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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13)화 (13/174)

13화

마차가 크라이튼 대공 저택 앞에서 멈추었다.

엄마가 먼저 마차에서 내리고 난 이후에야 내가 마차에서 내려갈 수 있었다.

아직은 아홉 살짜리 어린아이였기 때문에 다리가 짧아 하는 수 없이 폴짝폴짝 뛰며 마차를 내려와야 했다.

“다녀오셨습니까, 큰 아가씨, 작은 아가씨?”

마차에서 내려 현관으로 들어서자 대기하고 있던 하인, 하녀들이 우리를 맞았다.

이런 식으로 많은 사람들이 나를 환영해 주는 것은 아직 적응하기 어려웠다.

나는 조금 민망한 기분으로 쭈뼛거리며 안으로 들어섰다.

엄마는 그런 나를 보더니 소리를 죽여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뒤늦게 불만을 가득 품은 채로 눈을 가늘게 뜨고 엄마를 올려다봤지만, 엄마는 웃음을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코넬리아, 미라벨. 잘 다녀왔니?”

곧이어 계단으로 크라이튼 대공이 내려왔다. 그의 얼굴에 가득 찬 근심이 내 눈에도 선히 보였다.

“참, 아버지도. 그렇게 내려오시다가는 넘어져요.”

“넘어지는 게 대수겠니? 그래, 잘 다녀왔고? 황제 폐하께서 널 너무 원망하지는 않으시든?”

크라이튼 대공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엄마는 그의 말에 잠시 입을 닫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충분히 대화를 나눴고, 그간의 감정에 대해서 서로 이야기했어요. 황제 폐하께서도 이제는 제 말을 이해해 주셨고요.”

“다행이구나. 내가 같이 가야 했는데 괜히 네 말을 듣고 혼자 보낸 것이 아닌지 걱정을 많이 했단다.”

“아녜요. 걱정해 주시는 마음 다 이해해요. 그래도 잘 해결되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엄마는 크라이튼 대공을 안심시켰다.

“근데 조금 피곤해서 오늘은 이만 들어가서 쉬고 싶어요. 저녁에 작은아버지도 오신다고 하셨는데 조금이라도 쉬어 둬야 할 것 같아요.”

“그래, 얼른 가서 쉬렴. 내가 널 괜히 붙잡고 있었구나.”

엄마는 크라이튼 대공의 말을 들은 후 곧장 나와 함께 침실로 올라가려 했다. 그러나 나는 이대로 엄마를 따라 침실로 들어갈 생각이 없었다.

“엄마, 난 대공 각하와…….”

크라이튼 대공을 지칭하는 말을 들은 엄마가 안타까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제는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건지 알아 버렸기 때문에 나는 잠시 말꼬리를 흐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와 함께 얘기하고 싶은 게 있어. 그러니까 엄마 먼저 들어가.”

내가 ‘할아버지’라고 하자, 크라이튼 대공의 얼굴이 밝아졌다.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는데 크라이튼 대공 또한 내가 그를 할아버지라고 부르기를 원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내 심적으로는 아직 거리감이 느껴지기 때문에 완전히 할아버지라고 인식하려면 시간이 조금 걸리겠지만, 입으로 부르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엄마도, 크라이튼 대공도 이렇게 원하고 있으니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게 나을 거라고 판단했다.

“그래, 아가. 어떤 이야기일지 정말 궁금하구나. 코넬리아, 미라벨과는 따로 이야기하고 올려 보낼 테니 먼저 들어가서 쉬려무나.”

“알았어요. 그럼 벨, 엄마 먼저 올라갈게.”

“응!”

엄마가 먼저 계단을 오르고 나자, 크라이튼 대공이 흐뭇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딱히 어떤 제안을 하거나 움직이지는 않고 있었다.

나는 의아한 마음에 크라이튼 대공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기서 이야기해도 되나요?”

“응? 아아, 아니다. 이리 오거라.”

크라이튼 대공이 어울리지 않게 허둥지둥하며 나를 안내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에 하녀에게 내가 마실 우유와 간식이 남아 있는지 물어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다과라면 이미 황성에서 실컷 먹고 마셨기 때문에 딱히 당기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야기하면서 목이 탈 것 같아 거절하지는 않았다.

크라이튼 대공은 익숙한 응접실로 나를 데려갔다. 하필이면 내가 죽음을 맞이한 그 응접실이었다.

나는 새삼스러운 눈길로 응접실 내부를 살폈다.

그림이 몇 개 바뀌었고, 조각상이 좀 다르다는 것 외에는 그때 보았던 응접실과 큰 차이가 없었다.

“거기 앉으렴.”

크라이튼 대공이 내게 제안한 자리도 그때와 똑같았다.

응접실이라고는 해도 이야기를 나눌 만한 곳이 한정적이기에 이 부분은 당연하다 치겠지만, 나는 왠지 그때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가슴이 쿵쿵 세게 뛰기 시작했다.

달칵,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에 나도 모르게 화들짝 놀라 문을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아까 크라이튼 대공이 지시한 우유와 쿠키를 쟁반에 담아 온 하녀가 있었다.

나는 내가 필요 이상으로 긴장했다는 것을 인지하고 크게 숨을 내쉬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곧 내 앞에 우유와 쿠키가 놓였다.

크라이튼 대공은 부드러운 시선으로 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가, 내게 무슨 할 말이 있니?”

나는 대답하기에 앞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금 이 응접실에는 크라이튼 대공과 나뿐만이 아니었다. 크라이튼 대공의 보좌관 두 명과 하인 네 명, 하녀 두 명이 멀찍이 서서 대기하고 있었다.

“할아버지, 혹시 할아버지하고만 대화할 수 있을까요?”

“나하고만?”

“네. 다른 사람은 없이요.”

“안 될 것은 없다만……. 잠시만 기다리렴.”

얼떨떨한 얼굴로 크라이튼 대공이 사람들을 모두 응접실 밖으로 물렸다.

사람들이 하나둘 나가기 시작하고, 마침내 마지막으로 우유를 가져왔던 하녀가 문을 닫고 나가는 것을 확인한 이후에야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아가, 무슨 일이 있니?”

크라이튼 대공은 내가 왜 단둘이서만 대화하고 싶다고 한 건지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로 내게 물었다.

이해하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나도 평범하게 9살이었다면 굳이 어색한 크라이튼 대공과 둘만 이곳에 남을 리는 없으니까.

하지만 크라이튼 대공에게 해야 할 말이 있었다.

“할아버지, 제가 예전에 엄마의 편지에 대해서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기억하시나요?”

“편지? 아, 그래. 코넬리아가 내게 용서를 구하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고 했지. 기억나지, 그럼.”

크라이튼 대공이 뒤늦게 기억을 떠올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이 저택의 누군가가 빼돌렸어요. 그래서 편지가 할아버지께 전달되지 않은 거예요.”

내 말이 끝나자 크라이튼 대공이 잠시 두 눈을 깜빡였다. 그러더니 뒤늦게 너털웃음을 흘렸다.

“아가, 그 이야기를 하는 거구나. 하지만 인편으로 보내는 편지는 종종 누락되곤 한단다. 게다가 코넬리아가 용병이나 상인에게 부탁하여 편지를 보낸 것이라고 하니 아마 경비병 선에서 내게 전달이 되지 않았을 거란다.”

크라이튼 대공은 그 나름대로 편지가 도착하지 않은 이유를 찾으려 했던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단순히 편지가 운반 도중 누락되었을 것이라 예상하는 듯했다.

진실은 다니엘 크라이튼이 빼돌린 것임에도 불구하고.

“만약 편지가 몇 개 되지 않았다면 그랬을 확률이 높았을 거예요. 하지만 아니에요. 엄마는 일주일에 적어도 두 번은 편지를 보냈어요. 말씀하신 대로 용병 편으로 보내기도 했고, 상단을 통해 보내기도 했어요. 적어도 한 해에 스무 통은 넘는 편지가 보내졌을 텐데, 모두 누락되었을 리는 없잖아요. 안 그런가요?”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엄마는 용병을 통해서든 상단을 통해서든, 편지를 보내며 은화 한 닢, 답장을 가져오면 은화 다섯 닢을 건네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 누구도 답장을 가져오지 못했다.

그때는 속상해하는 엄마를 위로하며 크라이튼 대공을 참 많이 원망했었는데, 모든 진실을 알게 되고 나니 진짜 범인이었던 다니엘 크라이튼이 끔찍이도 증오스러웠다.

다니엘 크라이튼 때문에, 석 달이면 고칠 수 있는 엄마의 병을 고치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무력하게 엄마가 숨을 거두는 모습을 봐야만 했다.

그뿐일까?

내 손으로 땅을 파고, 또 파서 엄마의 시신을 차가운 땅속에 매장해야만 했다.

맨손으로 흙을 파내어 손톱이 빠지는 고통보다도 차가운 흙 속에 엄마를 모셔야 한다는 사실이 끔찍하게도 괴로웠다.

그때의 감정과 기억이 내게는 사무칠 만큼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 모든 원흉이 다니엘 크라이튼 때문이었다는 걸 너무 늦게 알아버린 게 탈이 되어 나 역시도 죽음을 맞이하기는 했지만.

과거로 돌아온 지금은 절대 되풀이되게 해서는 안 되는 일들이었다.

“그건 확실히 이상하긴 하구나. 그렇게 주기적으로 매번 보내었다면 한 번쯤은 내게 보고가 되었을 텐데…….”

크라이튼 대공이 짧게 앓는 소리를 내며 대답했다.

그는 편지가 얼마나 자주 발송이 되었는지를 모르니 편지가 누락되는 일쯤이야 당연하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이 저택에 엄마의 편지를 빼돌린 사람이 있어요.”

“그렇지만 미라벨, 아가. 대체 무엇 때문에 내게 편지를 전해 주지 않는다는 게냐? 그럴 이유가 없지 않니? 아니, 만약에 그런 사람이 정말로 있다면, 대체 누구라는 게냐?”

나는 그 답을 위해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이미 크라이튼 대공은 내 말이 터무니없는 말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크라이튼 대공이 보기에 전혀 그럴 이유가 없으니까.

10년도 훨씬 지난 미래에조차 다니엘 크라이튼을 의심도 하지 못한 크라이튼 대공이었다.

저택을 장악한 다니엘 크라이튼을 보고 기함하던 크라이튼 대공의 모습이 아직도 선명하게 그려졌다.

지금 여기서 내가 다니엘 크라이튼의 이름을 부르면, 크라이튼 대공이 내 말을 믿을까?

이제 막 손녀가 된 나에 대한 신용과 수십 년을 함께 나이 먹은 동생 다니엘 크라이튼에 대한 신용 중에서 어떤 게 더 두터울까?

짧은 갈등이 머릿속을 스쳤다.

“할아버지와 엄마가 다시 만나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요. 할아버지의 주변에 그런 사람이 없나요?”

결국 나는 애매하게 말을 흐렸다.

“글쎄. 저택에 도착하는 편지까지 빼돌릴 간 큰 적은 없는 것 같구나.”

“…….”

솔직하게 내가 미래에서 모든 일을 겪었다는 것을 이야기할까 고민이 되었지만 금세 접어 버렸다.

나조차도 내가 왜 9살로 돌아왔는지, 정말로 이게 현실이 맞는 건지 의심스러운 상황이었다.

다른 사람이라고 내 말을 무조건적으로 믿어 줄 거라는 생각을 하는 게 우스웠다. 설령 그 사람이 내 가족이라고 하더라도.

터무니없는 내 말을 거짓이라 치부할 거고, 나는 미친 취급을 받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나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생각을 정리하고 다시금 입술을 달싹였다.

“알겠어요. 하지만 편지에 대해서는 한번 알아보셨으면 좋겠어요. 이건 제가 손녀로서 드리는 부탁이에요.”

나는 부디 크라이튼 대공이 내 말을 허투루 듣지 않기를 바라며 내 앞에 놓인 우유 잔을 들었다. 그리고는 단숨에 우유를 마시고는 빈 컵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볼게요.”

“잠깐 기다리렴, 아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크라이튼 대공이 나를 불러 세웠다. 무얼 하나 싶었더니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내 입가를 조심스럽게 닦아 주었다.

깨끗이 닦였는지 내 얼굴을 살핀 크라이튼 대공이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이제 가 보렴.”

나는 크라이튼 대공을 보며 꾸벅 인사를 마치고 곧장 몸을 돌려 응접실을 나왔다.

비록 오늘 크라이튼 대공에게 적이 누구인지 알려 주는 것에 실패했지만, 실망하지는 않았다.

겨우 하루였다.

엄마와 함께 이 저택으로 돌아온 지 꼬박 하루.

이곳에서 조금 더 지내면서 누가 다니엘 크라이튼에게 붙은 배신자인지 가려내는 게 급선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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