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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12)화 (12/174)
  • 12화

    황후는 한동안 엄마의 품에 안긴 채로 울음을 토해냈다.

    엄마는 말없이 황후의 등을 다독거리며 그녀를 달래 주었다.

    시간이 한참 흐른 후에야 황후가 엄마의 품에서 떨어졌다.

    그때까지 나와 에이드리안은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두 분을 바라보아야만 했다.

    “이제 좀 괜찮으세요?”

    엄마가 미안함을 담아 황후와 눈을 마주쳤다.

    황후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민망했는지 제대로 엄마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있었다.

    “차라도…… 마시고 갈래?”

    황후가 엄마에게 제안했다.

    엄마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황후의 제안에 긍정했다.

    “그럼요. 자리로 돌아가요.”

    엄마가 황후를 이끌며 동시에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딱히 이곳에 더 남아 있고 싶지는 않았지만, 일단 엄마가 차를 마시겠다고 했으니 다시 내 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그때까지도 내 손에 잡혀 있는 에이드리안은 볼멘소리로 투덜거리며 나를 따라왔다.

    아까와 같이 건물 안에 마련된 의자에 앉으니 브리지나가 황후의 앞에 차를 새로 내어 주고, 엄마에게도 차를 준비해 주었다.

    그러고는 나에게도 새로 주스를 내줄지 물어봤지만 거절했다.

    차는 식으면 맛이 없지만, 주스는 어차피 뜨겁게 먹는 게 아니었으니까.

    차를 마시며 엄마와 황후는 많은 이야기를 했다.

    들어 보면 다음과 같았다.

    마리안느 황후는 본래 엄마의 친구였다고 했다. 그리고 남모르게 황제를 마음에 품어 왔다고 했다.

    그러나 황제의 약혼녀는 엄마였기 때문에 마음을 정리하려던 어느 날, 갑자기 엄마가 사랑의 도피를 해 버리는 바람에 황제의 약혼녀 자리가 공석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운 좋게도 황제를 마음에 품었던 마리안느가 황후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지만, 황제는 줄곧 엄마만을 기다려 왔다고 했다.

    그 때문에 약혼한 이후로 2년이 지나 결혼식을 올릴 수 있었다고 했다.

    마리안느 황후는 황제를 사랑하는 마음과 엄마를 걱정하는 마음, 그리고 자신을 돌아봐 주지 않는 황제에 대한 미움이 한데 뒤엉켜 불행했다고 했다.

    적어도 황태자인 에이드리안이 태어나기 전까지는.

    그래도 에이드리안이 태어나고 나서는 정을 붙일 사람이 생겨 그나마 황궁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며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엄마는 그 모든 이야기를 들은 후 마리안느 황후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마리안느 황후가 놀란 눈으로 엄마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다시 고개를 들어 엄마를 바라보았다. 눈에 다시금 눈물이 글썽거리고 있었다.

    “코넬리아 너 손이 왜 이렇게 거칠어졌어?”

    가늘고 흰 마리안느 황후의 손과 햇볕에 타고 거칠어진 엄마의 손이 대비되었다. 엄마의 손에는 바느질하다가 바늘에 찔리고 다친 상처들이 남아 있었다.

    “가일이 몇 년 전에 눈을 감은 이후로,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고 하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여자 혼자 아이를 키우고 살기에는 아무래도 조금 버거워서.”

    “대공께서는? 대공께선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으셨니? 널 그렇게나 사랑하셨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버지와 연락이 계속 닿지 않았어요. 그래서 가문을 버리고 도망친 절 아버지께서 많이 원망하고 미워한다고 생각해서 차마 돌아올 수가 없었고요.”

    마리안느 황후가 깊이 탄식했다.

    안타까움과 슬픔이 그녀의 눈동자에 교차하고 있었다.

    “그럼 우리 가문을 통해서라도 나한테 연락을 해 주지 그랬어. 그래도 우린 친구잖아. 내가 설마 널 안 도울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지?”

    “제가 무슨 염치로 그러겠어요.”

    엄마의 웃음이 슬퍼 보였다. 아마도 엄마는 마리안느 황후의 사정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난 내 투정만 부렸구나.”

    죄책감에 고개를 숙인 마리안느 황후를 보며 엄마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니에요. 이 상처나 굳은살은 모두 제 딸과 함께 살기 위해 버둥거렸던 제 역사예요. 전 그 결과가 부끄럽거나 창피하지 않아요. 그러니 너무 염려하지 않으셔도 돼요.”

    어른들이 그렇게 대화를 마치는 사이에 에이드리안이 나를 빤히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왜 그런가 싶어서 돌아봤더니 그가 의아한 시선으로 내 접시 위에 놓인 쿠키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러세요?”

    영문을 모르는 그의 시선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설마하니 내 앞에 높인 쿠키가 탐이 나서 그럴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황태자이니만큼 원하는 양의 쿠키를 다시 내오라 명령하면 그만이었으니까.

    “너 쿠키 안 좋아해?”

    “그건 아니지만, 이건 너무 달아서 못 먹겠어요.”

    “단 거 싫어해?”

    “싫어하는 건 아닌데 요즘은 과하게 단 건 잘 못 먹겠더라고요.”

    나도 단 음식을 싫어하는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한창 단 음식이 당길 어린 나이에는 그런 음식이 워낙 고가였기 때문에 먹을 수가 없었다.

    막 용병 생활을 시작해서 돈을 좀 벌게 되었을 때는 종종 사 먹고는 했지만, 문득 어느 순간부터는 지나치게 단 음식은 별로 입에 당기지 않았다.

    그 탓인지 지금의 나 역시 단 음식이 그리 입에 맞지는 않았다.

    오히려 아침에 디저트로 먹었던 에그타르트와 같이 부담 없는 단맛이 나는 간식이 더 좋았다.

    “달콤한 거 싫어하는 사람 처음 봤어.”

    “싫어하진 않아요. 과한 걸 좋아하지 않을 뿐이에요.”

    “그게 그거 아니야?”

    에이드리안은 내가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아직 어린 에이드리안은 그 차이를 잘 구분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정확히는 자신은 상관없이 좋아하는 것들이기 때문에 그것에 차이를 두는 걸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는 한번 에이드리안을 흘겨본 후 다른 사람들에게서 관심을 끄고 정원을 둘러보며 시간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애초에 나는 이곳에 엄마를 따라온 것이었는데, 엄마는 이곳에서 이미 할 일을 다 마친 듯했다.

    그러니 이곳에서 내가 더 기대할 것은 없다는 소리였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고, 찻잔과 유리잔의 음료가 모두 떨어졌을 때가 되어서야 어른들의 대화가 끝이 났다.

    먼저 마리안느 황후와 엄마가 자리에서 일어났고, 나도 두 분을 따라 의자에서 내려왔다. 조금 높은 의자였기 때문에 폴짝 뛰듯이 내려서야 했다.

    “언제든지 황성으로 놀러 와. 너를 위해 케인트 차를 준비해 놓을 테니까.”

    마리안느 황후가 아쉬움을 감추지 않으며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는 몸을 돌려 마리안느 황후를 바라보며 빙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앞으로는 자주 찾아뵐게요. 대신 너무 자주 온다고 타박하면 서운해할 거예요.”

    “그럴 리가. 그럼 들어가 봐. 멀리 안 나갈게.”

    “예, 폐하. 그럼 다음에 다시 뵙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폐하.”

    엄마와 함께 마리안느 황후를 향해 정중하게 인사했다. 그러면서 마리안느 황후의 옆을 확인해보니 에이드리안이 나를 빤히 주시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그런 에이드리안을 확인하다가 고개만 숙여 인사한 후 곧장 몸을 돌렸다.

    * * *

    황성을 벗어나 다시 마차에 몸을 실었다.

    슬쩍 엄마를 확인해 보니 황성에 도착하기까지 내내 긴장한 얼굴이었던 것과 달리, 지금은 한결 후련해 보였다.

    나는 모든 일이 이렇듯 순조롭게 흘러가는 것이 조금은 가슴이 아팠다.

    처음부터 엄마의 편지가 크라이튼 대공에게로 전달이 되었다면, 그리고 두 분의 감정이 제대로 서로에게 닿았다면, 내가 겪은 그때의 과거에서 엄마가 고생만 하다가 병으로 돌아가시는 일은 없었겠지.

    그뿐일까?

    크라이튼 대공 역시 딸의 마음을 모른 채로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었다.

    이 모든 일의 원흉인 다니엘만 없었다면.

    기억을 되짚어보면 다니엘은 스스로를 내 작은할아버지라고 칭했었다.

    그렇다는 것은 크라이튼 대공의 동생이라는 의미겠지.

    내가 크라이튼 대공의 의뢰를 받아 크라이튼 대공 저를 찾았을 때, 그곳에 있는 모든 이들이 이미 다니엘의 수족이 되어 있었다.

    크라이튼 대공 모르게 저택의 고용인들을 제 편으로 끌어들인 모양이었다.

    그럼 지금은?

    지금 크라이튼 대공가의 고용인들은 과연 어느 쪽 사람이지?

    이제 크라이튼 대공가에 들어온 지 만으로 하루밖에 되지 않은 내가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단 하나.

    누군가는 엄마가 크라이튼 대공에게 보낸 편지를 빼돌렸다는 사실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우리 벨,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응? 으응. 아무것도 아니야.”

    내가 너무 심각한 표정을 지었는지 엄마가 의아해하며 내게 물어왔다.

    나는 별일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저은 후 대답했다.

    그러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엄마, 혹시 대공 각하한테…….”

    “미라벨.”

    그러나 말을 채 꺼내기도 전에 엄마가 나를 불렀다.

    “응?”

    “네가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당장은 바꾸기가 힘들다는 걸 알고 있지만, 가능하면 ‘대공 각하’라는 호칭 말고 ‘할아버지’라고 불러 주면 안 될까?”

    “할아버지?”

    “그래. 너도 알다시피 크라이튼 대공 각하는 네 외할아버지인걸. 겉으로는 티를 안 내시지만, 네가 할아버지, 하고 부르는 걸 내심 기대하고 계실 거야. 강요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나중에 마음이 내키면 그렇게 불러 주지 않을래?”

    “…….”

    나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내게는 아직 크라이튼 대공이 낯설었다.

    죽음의 순간에 필사적으로 나를 챙기려 했던 그 모습이 뇌리에서 잊히지 않긴 했지만, 그래도 스무 해 넘는 시간을 엄마와 아버지 외에 다른 가족 없이 살아왔던 나였다.

    갑작스럽게 크라이튼 대공을 할아버지라는 친근한 호칭으로 부르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엄마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크라이튼 대공은 엄마의 아버지였고, 내게는 어쨌든 외조부가 되는 거니까.

    “……노력해 볼게.”

    내가 어렵사리 대답을 꺼내자, 엄마가 환하게 웃었다.

    “그래. 일단은 노력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거야.”

    엄마는 내가 크라이튼 대공을 할아버지라 부르겠다고 선언한 것도 아닌데 벌써 그렇게 되기라도 한 듯이 기뻐했다.

    조금 부담스럽긴 했지만, 그래도 엄마가 좋아하는데 까짓것 못 할 것은 뭔가 싶었다.

    “그런데 방금 무슨 얘기를 하려던 거였니?”

    “아, 대공 각하께 다른 가족이 있는지 궁금해서.”

    “있지, 그럼.”

    엄마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다니엘 크라이튼이라고, 내게는 작은아버지, 그리고 미라벨 너한테는 작은할아버지가 되는 분이 계셔.”

    역시나.

    내가 미래에서 겪은 일들이 모두 헛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뵐 수 있을 거야. 이따 저녁에 저택에 방문한다고 하셨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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