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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11)화 (11/174)
  • 11화

    예상했던 대로 아이는 황태자였다. 이미 그걸 아이의 까만 머리칼과 붉은 눈동자로 짐작하고 있었다.

    젖살이 통통하게 붙어 있는 귀여운 얼굴이었지만, 태도는 조금도 귀엽지 않았다.

    아마도 황태자는 응접실로 들어가려다가 바깥으로 나오는 나와 부딪쳐 넘어진 것으로 보였다.

    하녀의 부축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황태자는 제 손으로 엉덩이를 팡팡 털더니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불만이 가득해 보였다.

    “너 뭐야?”

    황태자가 내게 물었다.

    나는 일단 예의상 양쪽 치마를 들어 올리는 것과 동시에 무릎을 살짝 굽혔다 펴며 그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황태자 전하? 미라벨……입니다.”

    솔직히 지금 상황에서 내가 내 이름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몰라 잠시 갈등했다.

    그래서 성을 말하는 대신 이름만 말했다.

    본래 내가 줄곧 사용해왔던 성은 헤일이었지만, 아버지의 진짜 성을 따른다면 휴스턴이 될 것이었고, 엄마의 성을 따른다면 크라이튼이 될 터였다.

    “성은?”

    의아해하는 황태자를 향해 시녀가 첨언했다.

    “크라이튼 대공가에서 오셨습니다. 대공의 손녀분이십니다.”

    “대공가에 여자애가 있었다고? 엘리엇 말고 또 다른 사람이 있었단 말이야?”

    손으로 허리를 짚은 황태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의아해하는 황태자를 보면서도 나는 굳이 설명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부딪친 건 죄송했습니다. 다행히 괜찮아 보이니 저는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응? 응. 그래. ……아니, 잠깐만!”

    순순히 대답하던 황태자가 뒤늦게 나를 불러 세웠다.

    이대로 황태자를 지나쳐 가려던 나는 그 부름에 자리에서 멈추어 서서 몸을 돌렸다.

    “너 방금 이 응접실 안에서 나왔지?”

    황태자는 내가 나온 문을 가리키며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을 표했다.

    그러자 황태자가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이 안에 누가 있는 거야? 황제 폐하 말고 또 다른 사람이 있는 거지?”

    황태자는 조금 화가 난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응접실 안에 있는 사람이라고 하면 황제 폐하와 엄마뿐이었다.

    그러니 황태자가 말하는 또 다른 사람이라는 건 필시 엄마를 지칭하는 말일 터였다.

    나는 조금 불쾌해져서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죠?”

    “이 응접실 안에 황후 폐하를 울린 사람이 있으니까.”

    “…….”

    “내가 가서 황후 폐하 대신 혼내 줄 거야.”

    나는 황태자의 말이 끝나고 잠시 말을 잃었다.

    황태자가 어떤 마음으로 이 응접실에 들어가려 했던 건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응접실에는 황제와 황제의 과거 연인인 엄마가 들어가 있었다.

    엄마는 사랑을 이루기 위해 황제를 떠났지만, 아까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눈 것으로 추정해 보건대 아직까지도 황제는 엄마를 잊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황제는 다른 사람과 혼례를 올려 엄연히 배우자가 있는 몸이었다.

    그런 사람이 옛사랑을 만난다고 하니 황후가 된 입장에서 끔찍하고 싫을 수 있겠지.

    그래서 울었던 걸까…….

    아직 엄마에게는 아버지가 가슴 깊이 남아 있다고 하더라도 그건 엄마의 사정일 뿐이니까.

    심란해진 마음으로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황태자는 황후의 눈물을 보고 화가 나서 이곳까지 달려온 모양이었다.

    “이 안에는 제 어머니가 계세요.”

    내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자 황태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럼 황후 폐하를 울린 사람이 네 어머니야?”

    “……아마도요.”

    “어, 그럼…….”

    당황해하는 황태자를 보며 나는 옅게 미소를 지었다.

    “원하시면 안으로 들어가 보세요. 막지는 않을게요. 그렇지만 제 어머니께서 일부러 황후 폐하를 슬프게 하려던 의도는 없었다는 걸 미리 말씀드릴게요.”

    오해라면 푸는 쪽이 맞는 거겠지. 이렇게 어린아이가 뭘 얼마나 이해하는지는 알 수 없겠지만.

    내가 옆으로 자리를 비켜 주려던 때였다.

    “에이드리안!”

    누군가가 낮은 목소리로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뒤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황후 폐하…….”

    황태자는 내 뒤쪽에서 누군가를 발견하고 중얼거렸다.

    몸을 돌려 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니 금발을 곱게 틀어 올린 여성이 있었다.

    황태자의 말대로라면 저 사람이 황후인 듯했다.

    “맙소사. 혹시나 해서 왔는데 정말로 황제 폐하를 곤란하게 하러 온 거니?”

    황후는 단호한 표정으로 다가와 황태자의 앞에 섰다.

    “저는 황후 폐하를 속상하게 만든 사람을 용서할 수가 없어서 온 거예요.”

    “에이드리안, 에이든. 네가 그럴 필요는 없단다. 그리고 날 속상하게 만든 건……. 아니다. 됐으니까 이만 돌아가자꾸나.”

    황후가 황태자의 손을 잡았다.

    그러고는 잠시 응접실 문을 응시했다가 이내 자리에 멈추어 섰다.

    놀란 듯이 크게 뜬 녹색의 눈동자가 나를 향하고 있었다.

    나는 황후 폐하를 향해 정중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황후 폐하. 코넬리아 크라이튼과 가일 휴스턴의 딸 미라벨이라고 합니다.”

    “네가, 그 두 사람의 딸이구나.”

    황후 폐하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우지 못한 채로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쓰게 웃었다.

    “대화에 끼지 못하고 밖으로 나온 거니?”

    곁눈질로 응접실을 바라보는 황후 폐하의 행동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잠시 밖에 나가 있으라고 하셨어요.”

    “그래……. 그럼 나와 함께 가자꾸나. 가서 에이든과 함께 다과라도 즐기면 시간이 빨리 지나갈 거란다.”

    황후가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나는 잠시 황후의 손을 바라보기만 했다.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면 절대로 내가 곱게 보일 리가 없을 텐데도, 황후는 나를 향해 다정하게 웃어 보였다.

    과연 따라가도 되는 걸까?

    내가 선뜻 손을 잡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는 상황에서도 황후는 나를 침착하게 기다려 주었다.

    “예, 폐하.”

    결국, 황후의 가늘고 부드러운 손을 잡으며 대답했다.

    황후의 손은 궂은일을 하던 엄마의 손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러웠다.

    황후의 손을 힐끔거렸다.

    엄마도 원래는 이런 부드러운 손을 하고 있었겠지, 싶은 마음이 들어 가슴이 짠했다.

    황후를 따라 후원으로 향했다.

    후원에는 순백색의 휴식용 석조건물이 있었는데, 기둥을 타고 올라간 장미 덩굴이 자칫 단조로워 보일 수 있는 건물을 조화롭게 꾸며 주고 있었다.

    내부에는 네 명이 앉아서 쉴 만한 테이블과 의자가 마련되어 있었다.

    “이쪽에 앉으렴. 혹시 못 먹는 게 있니? 있으면 브리지나에게 이야기를 해 두렴.”

    시녀 한 명이 자신의 이름이 언급되자 고개를 숙여 보였다.

    “못 먹는 거 없어요. 안 먹는 것도 없고요.”

    “그건 코넬리아랑 똑같구나.”

    “네?”

    황후가 꺼낸 말에 고개를 들자 황후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는 바로 대답하는 대신에 고개를 돌려 시녀를 바라보았다.

    “브리지나, 다과를 내오렴.”

    “예.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황후 폐하.”

    브리지나가 다과를 준비하기 위해 자리를 잠시 비웠다.

    나는 그 잠깐의 침묵이 어색하고 불편해서 고개를 돌려 후원을 훑어보았다.

    잘 관리된 조경수와 꽃들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왔다. 그다음으로는 군데군데 자리를 잡은 조각상이 시야에 들어왔다.

    “예쁘지?”

    흐뭇하게 웃으며 나를 바라보던 황후가 내게 물었다. 나도 그녀를 향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당연히 예쁘겠지. 황후 폐하께서 직접 꾸민 정원인걸.”

    황태자, 에이드리안이 입술을 비죽거리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황후는 그런 에이드리안을 향해 눈살을 찌푸리는 것으로 눈치를 주었다.

    결국 에이드리안이 흥, 콧방귀를 뀌고는 고개를 팩 돌려 버렸다.

    그 사이에 트롤리를 이끌고 다시 돌아온 브리지나가 황후, 황태자, 그리고 내 순서대로 다과를 준비해 주었다.

    황후의 앞에는 다홍색 차가, 그리고 나와 황태자의 앞에는 과일을 갈아 만든 주스가 준비되었다.

    “맛있게 들렴.”

    “감사합니다, 황후 폐하.”

    내가 인사를 하는 사이에 에이드리안이 먼저 쿠키를 집어 먹었다.

    나는 먼저 주스를 한 모금 마셨다. 상큼한 사과 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달콤하고 상큼한 맛이 인상적이었다.

    그다음으로 쿠키를 하나 집어 먹었다.

    하지만 쿠키 자체는 단맛이 너무 강해서 내 입에 맞지 않았다.

    “네 어머니인 코넬리아는 내 친구란다.”

    쿠키를 더 먹지 못하고 내 앞에 놓인 접시에 내려놓는데, 황후가 갑작스럽게 말했다.

    “지금도 그 애가 나를 친구라고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래.”

    바람이 불어와 길게 늘어트린 내 머리칼을 흩트려 놓았다.

    무심코 나를 향해 손을 뻗던 황후는 잠시 멈칫거리더니 다시 손을 회수했다.

    내가 황후를 보며 두 눈을 깜빡거리자 그녀가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

    이후로 황후는 딱히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사실 내게 뭔가 더 말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그 예상이 틀린 모양이었다.

    에이드리안은 중간중간 가늘게 뜬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불만이 많은 눈치였지만, 황후의 옆이라서 딱히 말을 걸지는 않는 것 같았다.

    그렇게 말없이 주스를 홀짝이며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미라벨?”

    멀리서 다수의 인기척 소리와 함께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가움에 고개를 돌려 보니 엄마가 가까운 곳에서 멈추어 서 있었다.

    그런데 엄마의 시선이 나를 향하고 있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엄마가 바라보는 방향을 보니 그 끝에 황후가 있었다.

    “코넬리아.”

    황후가 먼저 엄마를 불렀다.

    그러자 엄마가 주저하며 이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황후 폐하.”

    그리고는 황후를 향해 인사했다.

    “…….”

    황후는 한동안 말을 꺼내지 않고 엄마를 바라보기만 했다. 엄마도 먼저 말을 걸지는 않았다.

    그렇게 불편한 시간이 지나고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엄마였다.

    “그간 무탈하셨나요?”

    엄마의 말이 계기가 된 듯이 황후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황후는 넘실대는 감정을 억누르기 위해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러나 얼굴에서 모두 표가 났다.

    “코넬리아 너…….”

    “…….”

    “너 때문에, 난 8년을 지옥 속에서 살았어.”

    8년. 나는 그게 무얼 가리키는지 알았다.

    황제와 황후가 혼례를 올린 지 올해로 8년이 되기 때문이었다.

    “제임스는 항상 너만을 기다렸고, 나는 그런 제임스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어. 이런 내 마음을 알겠니?”

    그래서 엄마를 원망하는 건가 싶었지만, 이상하게도 황후의 목소리에서는 원망이 느껴지지 않았다.

    “죄송해요.”

    엄마가 차마 황후를 바라보지 못하고 바닥을 보며 작게 사과의 말을 건넸다.

    그러자 황후가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그녀는 두 손을 들어 얼굴을 감싼 채로 작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엄마는 그런 황후를 향해 천천히 다가가기 시작했다.

    에이드리안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려고 했지만, 내가 반사적으로 에이드리안의 손을 잡아 멈추어 세웠다.

    두 분을 방해하면 안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에이드리안이 나를 억울하다는 듯이 나를 돌아보았지만, 내 손을 뿌리치지는 않았다.

    그사이 엄마는 황후의 앞에 서서 두 손으로 황후를 감싸 안았다.

    뿌리칠 거라고 생각했으나, 황후는 가만히 엄마의 품에 안긴 채로 울음을 흘렸다.

    “네가 너무 밉고, 또 원망스러운데…… 그래도 무사한 네 모습을 보니 화를 낼 수가 없어. 미련하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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