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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10)화 (10/174)

10화

말이 많았던 식사 시간을 거친 후 디자이너 세 명이 크라이튼 대공 저를 찾았다.

엄마와 내가 입을 옷을 제작하기 위함이었다.

아무래도 그동안 우리가 입었던 옷은 이곳에서 입기에 많이 초라하니 당연한 절차겠지.

세 디자이너는 나 역시도 몇 번 들은 적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셋 모두 최소 준남작의 작위를 갖고 있었는데, 그중에서 한 명은 나도 한번 만나 본 적 있는 사람이었다.

디자이너 셋은 엄마와 나의 신체지수를 측정한 후 원하는 디자인이나 색상이 있는지를 확인했다.

나는 딱히 의견이 없었기 때문에 멀뚱히 앉아 있었다. 그런 나를 대신해서 엄마가 이런저런 디자인을 제안했다.

디자이너들은 엄마의 말을 꼼꼼히 받아 적은 후에야 저택에서 떠날 수 있었다.

“이제…….”

디자이너들이 떠나가고 난 이후 엄마가 나를 돌아보았다. 어쩐지 슬퍼 보이는 눈을 하고 있어서 나는 조용히 엄마의 손을 잡았다. 엄마 역시 내 행동을 느끼고는 곧 큰 손으로 내 손을 꼭 잡아 주었다.

그제야 나는 다시금 실감이 났다.

엄마가 살았다.

돌아오고 난 이후로 내가 하는 행동이 옳은지, 이렇게 한다고 해서 엄마를 살릴 수 있을지 걱정을 많이 했었다.

그리고 지금에서야 과거가 바뀌고 엄마가 살아났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지금보다도 더 어릴 적으로 돌아갔다면, 그랬다면 아빠도 이렇게 살릴 수 있었을까?

공허한 질문이 가슴 속에 작은 파문을 남겼다.

하지만 그건 역시 무리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가 돌아가실 무렵의 나는 너무 어렸으니까.

내게 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과거의 일이었으니까.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아버지를 살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마을을 습격한 마물을 처리하지 못했을 테지.

“미라벨.”

엄마가 낮은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응. 왜?”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엄마를 확인했다. 엄마는 가만히 나를 내려다보다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엄마가 황성에 황제 폐하를 만나러 갈 건데, 우리 딸이 같이 가 주면 안 될까? 네 숙부한테는 괜찮다고 말했지만, 엄마가 사실은 조금 무섭거든. 우리 딸이 같이 가 주면 엄마가 그래도 덜 무서울 것 같은데, 같이 가 줄래? 혹시 싫으면 거절해도 돼.”

엄마가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언젠가는 엄마가 황제와 직접 만나서 풀어야 할 회포이긴 했지만, 나 때문에 조금 더 빨리 시기가 앞당겨진 것 같아 나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조용히 엄마의 손을 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내가 함께여서 엄마가 덜 무섭다면 나는 어디든지 같이 갈 거야.”

내가 같이 가는 걸로 엄마의 무서움이 가실 수 있다면, 까짓거 백 번 천 번도 갈 수 있었다.

“고마워, 우리 딸.”

엄마는 내 대답을 들으며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우리 벨, 엄마가 그동안 못 해 준 게 정말 많았는데, 앞으로는 엄마가 널 위해 무엇이든지 해 줄게.”

엄마를 따라 황성에 가는 것이 결정되자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나는 조금 전 디자이너들이 가져왔던 아이용 드레스로 갈아입었고, 하녀들의 손에 이끌려 머리를 손질하고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뒤늦게 거울을 앞에 두고 서서 나를 확인해 보니 이전의 꾀죄죄한 모습은 사라지고 어느 귀족 집안에서 곱게 자라 고생은 모르는 것처럼 보이는 여자아이가 되어 있었다.

나는 놀라울 정도로 변한 내 모습에 감탄하며 몸을 이리저리 틀어 거울 속에 비치는 나를 감상했다.

나도 한때는 이런 모습을 동경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어린 시절에는 그게 사치였고, 용병이 되어서는 드레스 같은 건 내 몸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이런 고가의 드레스를 입는 것은 포기했었다.

그런데 막상 하녀들이 꾸며 놓은 내 모습을 보니 아주 안 어울리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귀여우셔요, 작은 아가씨!”

내 머리치장을 도왔던 하녀가 아부성 말을 내뱉었다.

당연히 그게 아부인 줄 알면서도 나는 빙긋 웃음을 지었다.

“고마워요.”

“어머, 작은 아가씨 저한테는 말 높이지 않으셔도 돼요. 저뿐만 아니라 이 집안의 고용인 누구한테도 말을 높이지 않아도 됩니다.”

그랬지, 참. 나는 지금 크라이튼 대공의 손녀로서 이 자리에 있었다.

그러니 일반적으로는 집안의 고용인들에게 높임말을 쓰지 않는 게 맞았다.

나는 뒤늦게 깨닫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알겠어.”

“그럼 어서 나가 보셔요. 큰 아가씨께서 기다리고 계실 거예요.”

하녀의 안내를 받아 드레스룸을 나오니 그녀의 말처럼 엄마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와아!”

엄마의 모습을 보며 나는 작게 탄성을 내질렀다.

엄마의 모습은 마치 그림 속의 여신처럼 아름다웠다.

긴 갈색 머리를 길게 늘어트리고 있었고, 노란색 드레스에는 초록색의 리본으로 포인트가 들어가 있었는데 평소의 온화한 모습이 합쳐지니 마치 자애의 여신 셀리네스를 보는 듯했다.

“왜? 오랜만에 입는 드레스라 조금 어색한데…… 이상하니?”

“아니! 너무 예뻐!”

내가 엄지를 치켜세우며 외치자 엄마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럼 가자, 벨.”

엄마의 손을 잡고 저택을 나오니 밖에 화려한 마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크라이튼 대공가의 문장을 깃발로 단 사두마차였는데, 지난번에 크라이튼 대공과 함께 탔던 마차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화려했다.

나는 그 모습에 조금 기가 질렸지만, 엄마는 익숙한 듯 마차를 향해 다가갔다.

먼저 엄마가 마차에 올라타고 난 후 엄마는 내가 쉽게 탈 수 있도록 손을 내밀어 주었다.

엄마의 손을 잡고 마차에 올라타 자리를 잡자 곧 마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말이 네 마리나 이끄는 사두마차였음에도 이동하는 데 덜컹거리거나 불편한 느낌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푹신한 승차감 덕에 이곳이 마차 안이라는 것도 잊을 것 같았다.

이동하는 사이 엄마는 말이 없었다.

나 역시도 괜히 말을 걸어서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 않아 창문을 열어 바깥을 바라보았다.

수도의 전경이 천천히 지나가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 마침내 황성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이미 많은 사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개중에서 가장 앞에 있는 것은 엄마 나이 대로 보이는 기사였다.

“레이디 코넬리아.”

가슴에 손을 댄 채 엄마에게 정중히 인사한 기사가 아련한 눈으로 엄마를 바라보았다.

엄마는 옅게 웃으며 오른손을 그에게 내밀었다.

“오랜만이에요, 테네르반.”

기사는 당연하다는 듯이 엄마의 손을 잡고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돌아오셨다는 이야기는 황제 폐하께 들었습니다. ……그간 무탈하셨습니까?”

“걱정해 주신 덕분에요. 테네르반은 그사이 기사 단장이 된 것 같네요.”

“예, 황실 근위대를 이끌고 있습니다.”

“축하해요.”

“별말씀을. 안으로 드시지요.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흘긋, 테네르반이라 불린 기사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우리를 황성 안으로 안내하기 시작했다.

황성은 크라이튼 대공가의 저택과는 또 다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하얀 벽에 금색으로 포인트를 준 장식이나 천장과 벽면을 장식한 아름다운 그림들.

무엇하나 눈길을 빼앗지 않는 것이 없었다.

엄마의 손을 잡고 앞으로 향하면서도 나는 황성의 내부를 천천히 구경했다.

어린아이의 모습일 때나 이렇게 노골적으로 구경하지, 성인이었다면 체면을 차리느라 그러지도 못할 행동이었다.

“이 응접실 안에 황제 폐하께서 계십니다.”

이윽고 도착한 문 앞에서 테네르반이 말해 주었다.

“고하게.”

“예.”

시종에게 그가 명하자 시종이 곧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폐하, 코넬리아 크라이튼이 들었습니다.”

“들어오게.”

안쪽에서 들려온 소리에 시종과 테네르반 둘 다 우리가 들어갈 수 있도록 길을 터 주었다.

이제 들어가나 싶었는데 엄마가 나를 잡은 손에 미약하게 힘을 주었다.

슬쩍 고개를 들어 엄마를 바라보니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조용히 다른 손을 들어 엄마의 손을 감싸 주었다. 그제야 엄마가 나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들어가자.”

“응.”

조금은 긴장을 푼 모습으로 엄마가 먼저 걸음을 옮겼다. 나도 그 보폭을 따라 응접실 안으로 들어갔다.

응접실 안에는 우리를 등진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가 한 명 있었다.

빛이 역광을 드리워 남자의 정확한 모습을 볼 수는 없었다.

엄마는 안으로 들어온 이후에야 내 손을 놓고 치마를 양손으로 잡은 채 무릎을 살짝 굽혀 예를 차렸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나도 뒤늦게 엄마의 행동을 따라 하며 인사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내 목소리가 응접실에 울린 후에야 남자는 몸을 돌렸다. 그러나 여전히 역광 때문에 그의 모습을 확인하기는 어려웠다.

다행히도 곧 그가 천천히 우리를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빛에서 벗어난 이후에야 나는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흑단처럼 검은 머리에 루비처럼 붉은 눈동자가 인상적인 남자였다. 이 남자가 바로 제국의 주인이자 황제인 제임스 바젯 카스트로인 것 같았다.

“너무 늦었군.”

황제가 처음으로 꺼낸 말은 인사가 아니었다.

“나는 계속 바넷사의 정원에 서 있어. 그때도, 그리고 지금도.”

원망이 조금 섞여 있는 말에 엄마가 잠시 고개를 숙였다가 들었다.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그게 제 답이었어요.”

“적어도 떠나기 전에 한 번은 나를 찾아 줄 수 있는 거 아니었나?”

“……아뇨. 제가 바넷사의 정원을 찾았다면, 다시는 가일과 만날 수 없었을 거예요. 전 제 선택을 후회하지 않아요. 다만, 줄곧 기다리셨을 폐하께는 정말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의미 모를 말들이 오갔다.

황제는 한동안 말없이 엄마를 주시했다.

많은 감정이 그의 눈에서 느껴지는 듯했다.

그리움, 반가움, 원망 따위가 한데 엉키어 작게 소용돌이치는 것 같았다.

황제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가 이내 나를 발견하고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제야 황제의 눈에 보이지 않았던 체념의 빛이 어리는 듯했다.

“그 아이가 휴스턴 경과 그대의 딸인가?”

“예, 그렇습니다. 미라벨이에요.”

내가 다시금 예를 차려 인사했지만, 황제는 반응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한참 후에야 길게 숨을 뱉어냈다.

“일단 아이는 밖에 내보내는 게 좋을 것 같군. 아이가 들을 만한 이야기는 아니지 않나?”

“……그렇겠죠.”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 엄마가 나와 눈높이를 맞춰 앉았다.

그 사이 황제는 설렁줄을 울려 사람을 불렀다.

“미라벨, 잠깐만 다른 곳에서 쉬고 있을래? 금방 얘기하고 나올게.”

“응. 알겠어. 기다릴게.”

“고마워, 벨.”

엄마가 내 옆머리를 귓바퀴 너머로 쓸어 넘겨 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때마침 나타난 시녀 한 명이 우리를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아이를 데리고 다른 곳에 가 있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테니 근처에 있어.”

“예, 폐하. 아가씨, 이쪽으로 오시지요.”

시녀가 나를 안내하기 시작했다. 나는 잠깐 고개를 돌려 엄마와 황제가 소파에 앉는 것을 확인하고는 곧장 응접실을 나왔다.

“으악!”

응접실에서 막 나와 고개를 돌리는 순간, 갑자기 옆에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자세히 보니 예닐곱 살 정도의 남자아이가 엉덩방아를 찧은 채 인상을 구기고 있었다.

“너 때문에 넘어졌잖아!”

아이는 잔뜩 심통이 난 목소리로 내게 외쳤다.

그러고 보니 남자아이의 머리칼과 눈 색이 황제의 것과 아주 흡사했다.

이 아이가 혹시?

의문을 품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곧 내 옆에 있던 시녀가 황급히 남자아이를 일으켜 주며 입을 열었다.

“괜찮으십니까, 황태자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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