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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7)화 (7/174)

7화

크라이튼 대공이 보내 준 하인 세 명의 도움을 받아 짐을 정리했다.

워낙 집도 좁고, 짐도 많지 않았던 터라 빠르게 짐을 정리할 수 있었다.

엄마는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유품을 한데 모은 상자를 꺼내었다.

이미 4년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음에도 그 유품이 든 상자는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엄마는 그리운 눈으로 한참 상자를 내려다보다가 다시 포장하여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인이 상자를 옮겨 드리겠다 말했지만, 엄마는 이것만큼은 직접 가져가고 싶노라 이야기하며 하인의 도움을 거절했다.

밖으로 나와 보니 영업용 짐마차가 집 앞에 대기하고 있었다.

크라이튼 대공가의 마차보다 작고 낡은, 짐마차라고 하기보단 짐수레라고 불리는 쪽이 더 알맞은 마차였다.

하인들은 짐마차에 차곡차곡 우리 집에서 나온 짐들을 싣고 있었다.

“그 짐도 저기 싣지 그러니?”

지팡이를 짚고 서서 하인들이 짐을 싣는 것을 지켜보던 크라이튼 대공이 상자를 들고나온 엄마를 향해 제안했다.

그러나 엄마는 고개를 저으며 크라이튼 대공의 제안을 거절했다.

“아뇨, 이건…… 제가 들고 갈게요. 가일의 물건이라……. 게다가 무겁지도 않아요.”

크라이튼 대공이 잠시 상자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러려무나.”

“이해해 주셔서 감사해요.”

엄마는 조금 겸연한 얼굴로 크라이튼 대공에게 감사를 표했다.

손을 들어 엄마의 어깨를 가볍게 도닥여 준 크라이튼 대공이 짐마차를 흘긋 보았다.

“우리가 탈 마차는 마을 입구에 대기하고 있단다. 거기까지는 좀 걸어야 하겠구나.”

“네, 아버지. 미라벨, 엄마가 지금 남는 손이 없어서 그런데 길을 잃지 않도록 할아버지랑 손잡고 올래?”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엄마의 제안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슬쩍 크라이튼 대공을 확인하자, 크라이튼 대공이 나를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런 크라이튼 대공을 확인하니 엄마가 왜 그런 제안을 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동네에서 계속 살아왔던 내가 마을 입구까지 가는 길을 잃어버릴 리도 없었다.

그럼에도 엄마가 크라이튼 대공의 손을 잡길 권한 것은, 아무래도 나와 크라이튼 대공이 조금 가까워지길 바라서 한 제안 같았다.

아무래도 크라이튼 대공이 앞으로는 내 할아버지가 될 테니 가까워지는 게 좋겠지.

게다가 마을 입구까지는 멀지 않으니 그 정도는 할 수 있었다.

나는 조금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공 각하, 손 좀 주시겠어요?”

“그, 그래.”

크라이튼 대공이 머뭇거리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 곧장 엄마를 돌아보았다.

엄마는 무언가 아쉽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왜 그러지?

“이제 가자꾸나.”

의아해하는 사이 크라이튼 대공이 헛기침하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내 짧은 다리로도 쫓아가기 편하도록 느린 속도였다.

마을 입구에 도착하니 처음 우리가 마차에서 내렸을 때와 마찬가지로 마차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랑 엄마가 마차 정방향 좌석에 앉고, 크라이튼 대공이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곧 마차가 천천히 출발했다.

* * *

마차를 타고 가는 사흘간 엄마와 크라이튼 대공은 그동안 쌓인 이야기를 나누었다.

엄마가 얼마나 아버지를 사랑했는지, 어떤 마음으로 가족을 버리고 도망치게 됐는지, 그리고 그렇게 도망치고 얼마나 많은 죄책감에 휩싸인 채 살았는지.

크라이튼 대공은 엄마를 잃고 나서야 자신의 욕심이 과했음을 깨달았다고 했다. 그러나 되돌리려 했을 때는 이미 돌이킬 수가 없었다고 했다.

그렇게 십 년.

평행선을 달리던 두 부녀의 감정이 드디어 맞닿았고, 용서를 구했으며, 서로를 이해했다.

그동안 서로를 그리워하고 만나고 싶어 했으니 마음에 쌓인 감정이 녹는 것도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엄마와 크라이튼 대공이 묵은 회포를 모두 풀었을 즈음, 우리는 다시 크라이튼 대공 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대공 저 앞에 도착한 마차가 천천히 속도를 늦추더니 완전히 정차했다.

“도착했습니다, 각하.”

마부가 도착을 알리자, 곧 마차의 문이 열렸다.

크라이튼 대공이 먼저 내리고, 그다음에 엄마, 마지막으로 내가 내렸다.

완전히 마차에서 내려서고 나자 주변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곳에는 많은 사람이 크라이튼 대공을 마중 나와 있었다.

“대공 각하!”

저택 입구에 서 있던 장신의 남자가 크라이튼 대공을 향해 빠르게 달려왔다.

3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였다.

“서신이 사실입니까? 코넬리아를 찾았다는 것이……!”

다그치듯 물어보던 남자의 시선이 엄마를 향했다. 자연스럽게 그의 말도 멎었다.

곧 남자가 눈을 크게 뜨고 엄마를 위아래로 살피기 시작했다. 불쾌하게 쳐다보는 게 아니라 정말로 눈앞에 있는 사람이 실재하는 건지 확인하고자 쳐다보는 듯했다.

엄마는 그런 남자를 보며 설핏 웃었다.

“오랜만이야, 오빠.”

“코넬리아, 너…….”

쉬이 말문을 열지 못하던 남자가 울 듯이 얼굴을 일그러트리더니 성큼성큼 다가와 엄마를 끌어안았다.

“살아 있었으면 나한테는 연락을 했어야지! 내가 널 얼마나 걱정했는 줄 알아?”

남자가 원망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

엄마는 괴로움을 억지로 참아 내고 있는 남자의 등을 도닥거리며 그를 위로해 주었다.

“아니야. 다시 돌아왔으니 됐다.”

남자가 곧 엄마를 품에서 놓아 주었다. 다시 엄마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는 기쁨이 가득했다.

그러더니 문득 나를 내려다보았다.

“이 아이는 혹시?”

“응. 나랑 가일의 딸이야.”

엄마가 내 손을 놓고 내 등을 가볍게 밀어 남자의 앞에 서게 만들었다.

“미라벨, 인사드리렴. 네 외숙부인 브라이언 크라이튼 공작이셔.”

아, 들었던 적이 있다.

크라이튼 대공에게 공작의 작위를 가진 아들이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사람은 엄마의 오빠이기도 했다.

“안녕하세요, 미라벨이라고 합니다.”

브라이언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무릎을 굽혀 앉아 나와 눈을 마주쳤다.

“신기할 정도로 휴스턴 경과 코넬리아를 반씩 닮았구나. 만나서 반갑다, 조카야. 편하게 숙부라 부르렴.”

나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네, 숙부님.”

내 말을 들은 브라이언이 어느 때보다도 밝게 미소를 지었다.

밝게 웃는 브라이언의 모습은 조금 전 괴로워하던 것과 괴리감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내게도 너와 비슷한 나이의 아들이 있단다.”

브라이언이 말을 하다 말고 뒤를 돌아보았다.

“엘리엇! 이리로 오거라.”

“예, 아버지.”

멀리 서 있던 갈색 머리의 남자애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품위 있고 우아한 걸음걸이였다.

아마도 저 아이가 브라이언의 아들인 모양이었다.

브라이언은 나와 비슷한 나이라고 이야기했지만, 나보다 서너 살 정도 많아 보였다.

“다녀오셨습니까, 대공 각하?”

“그래, 걱정해 준 덕분에 잘 다녀왔다.”

“고모님을 찾으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먼저 크라이튼 대공에게 인사를 마친 엘리엇이 엄마를 향해 인사했다.

“고모님, 처음 뵙겠습니다. 엘리엇 크라이튼입니다.”

“오랜만이란다. 몰라보게 컸구나.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간신히 걸음마를 딛고 있었는데.”

마지막으로 엘리엇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동그란 눈에 호기심이 가득 비치고 있었다.

“코넬리아의 딸이니 네 사촌이다. 잘 대해 주거라.”

브라이언의 설명에 빙긋 웃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반가워, 엘리엇이야. 내가 너보다 오빠겠구나.”

구김살 없이 밝은 모습이 그의 성격을 보여 주는 듯했다.

나는 손을 내밀어 악수를 하듯 엘리엇의 손을 잡았다.

“미라벨이야. 잘 부탁해.”

“자, 이제 인사를 마쳤으면 이만 들어가자꾸나. 연이어 마차를 타고 오느라 코넬리아도, 미라벨도 지쳤을 게다. 얘기는 천천히 나누어도 되니 이제 그만 쉬게 해 주렴.”

엘리엇과 내가 인사하는 것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크라이튼 대공이 제안했다.

마차를 타고 이동했을 뿐임에도 많이 피곤한 상태였다.

무엇보다 나는 꼬박 9일 동안 마차를 타고 이동한 상황이었다. 이제 좀 쉬고 싶은 찰나에 크라이튼 대공의 말은 가뭄 중의 단비와도 같았다.

막 저택으로 들어가던 크라이튼 대공이 다가온 하인의 말을 듣고 자리에서 멈추어 섰다.

무언가 마음에 안 드는 이야기를 들었는지 눈살을 찌푸리며 하인에게 다시 무언가를 이야기했다. 그러더니 나를 바라보았다.

“음, 미라벨, 아가. 오늘은 코넬리아의 방에서 보내야겠구나. 네 방을 준비하라 일렀는데 아직 준비가 끝나지 않은 모양이구나.”

“네, 괜찮아요.”

크라이튼 대공은 대견하다는 듯한 얼굴로 나를 보며 웃었다.

“코넬리아, 네 방은 네가 떠나던 그때 그대로란다. 어디인지 기억하지?”

“그럼요.”

“그럼 오늘은 피곤할 테니 이만 가서 쉬려무나.”

“네, 아버지. 가자, 미라벨.”

엄마가 내 손을 잡고 나를 방으로 인도했다.

엄마의 방은 저택의 3층 왼쪽 복도 끝에 위치하고 있었다.

“와아.”

나는 처음으로 본 화려하고 아름다운 방을 보며 나직이 감탄을 터트렸다.

용병 생활하며 고급 호텔에도 여러 번 머문 적이 있었지만, 그 호텔 방 역시도 이 방보다는 아름답지 않았다.

신기해하며 둘러보는 나와 달리 엄마는 그리움에 젖은 눈으로 방을 둘러보고 있었다.

나는 엄마의 그리움과 감상을 깨고 싶지 않아 조용히 침대로 가서 앉았다.

침대는 푹신하고 아늑했다.

짐마차로 3일, 고급 마차로 6일.

짐마차에 있을 때는 딱딱한 바닥에 누워 쪽잠을 잤고, 고급 마차로 이동할 때는 간이침대에 누워 잠을 청해야만 했다.

뭐, 귀족들이 사용하는 간이침대 정도면 용병 생활을 오래 했던 내게 제법 호사스러운 물건이었지만, 아홉 살인 지금 내 몸은 아직 노숙에 익숙하지 않았다.

9일간의 노숙 생활로 인해 피로가 많이 축적된 상태였다.

나는 일찍 잠에 들고 싶어 일단 신발을 벗고 침대에 누웠다.

제대로 된 침대에서 자본 게 얼마 만인지.

“벨, 많이 피곤하니?”

엄마가 내게 다가오며 물었다.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이었기 때문에 나는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일찍 자자. 엄마가 옆에서 자장가 불러 줄게.”

엄마는 이불을 내 목까지 덮어 준 후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리고는 나를 천천히 도닥거리며 낮은 음색으로 자장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언제나 엄마가 내게 불러 주던 그 자장가였다.

그리운 노랫소리를 따라 눈을 감으니 서서히 의식이 멀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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