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6)화 (6/174)
  • 6화

    예정했던 대로 사흘 만에 델피아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아침이었음에도 마을은 조용했다.

    사람들의 왕래가 거의 없는 작은 마을인 델피아 마을에 갑작스럽게 귀족 가문의 마차가 나타나니 다들 겁을 집어먹고 집 안에 숨어 있는 듯했다.

    “아무래도 내려서 걸어가는 게 낫겠구나. 이보게, 여기서 멈춰 서게.”

    크라이튼 대공이 마부석과 연결된 창을 열어 마부에게 지시했다.

    마차가 천천히 속도를 줄여 완전히 정차한 후에야 크라이튼 대공이 먼저 마차에서 내려섰다.

    그리고는 내가 내리는 것을 도와주기 위해 손을 내밀어 주었다.

    나는 크라이튼 대공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려섰다.

    “그래, 아이야. 네 집이 어디니?”

    “이쪽으로 오세요.”

    크라이튼 대공을 대동한 채 나는 익숙한 길을 따라 걸었다.

    마을의 큰길을 따라 걸어간 후, 시장이 보이는 샛길로 빠졌다. 그리고 그 뒤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허름한 주택가로 걸음을 옮겼다.

    “흠…….”

    나를 따르는 크라이튼 대공의 입에서 나직이 침음이 흘렀다.

    슬쩍 돌아보니 인상을 잔뜩 찡그리고 있었다.

    허름하고 낡은 주택들이 보기 흉하다고 생각한 듯했다.

    귀족 중에서도 황제 다음가는 대공의 작위를 갖고 있는 크라이튼 대공에게는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라고 느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곳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귀한 보금자리이고, 삶의 터전이었다.

    나는 애써 크라이튼 대공의 반응을 모른 체하며 엄마와 내가 살던 집으로 향했다.

    “엄마!”

    집 안으로 들어가자 곧 안에서 부산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미라벨……?”

    엄마의 목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곧 엄마가 내 방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엄마의 얼굴이 많이 수척해져 있었다.

    눈물을 많이 흘렸는지 눈두덩이 조금 부은 것도 같았다.

    “어, 어디 갔었어……. 엄마가 널 얼마나 걱정했는 줄 알아?”

    다급히 나에게 다가온 엄마가 바닥에 무릎을 굽혀 앉아 두 손으로 내 뺨을 감싼 채 울먹였다.

    엄마의 눈에 금세 차오른 눈물을 확인하며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많지 않았다.

    “말도 없이 나가서 미안해.”

    “다친 데는? 어디 아픈 데는 없고?”

    “……응.”

    “그래, 그럼 됐어. 그럼 된 거야.”

    나를 곳곳이 살피던 엄마가 양팔을 벌려 나를 꼭 감싸 안았다.

    “다시는 그렇게 떠나지 마.”

    “응. 미안해, 엄마.”

    흐느끼는 엄마의 등을 가볍게 쓰다듬어 주었다,

    나에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는 해도, 남아 있는 엄마에게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일이었던 모양이다.

    “……맙소사.”

    그때, 뒤에서 크라이튼 대공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는 그제야 나를 따라온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나를 품에서 놓아 주었다.

    “코넬리아?”

    크라이튼 대공의 목소리가 떨렸다.

    엄마는 나를 안기 위해 주저앉았던 자세로 멍하니 크라이튼 대공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는 듯한 얼굴로 나직이 중얼거렸다.

    “……아버지?”

    나는 엄마와 크라이튼 대공에게서 조금 떨어진 채로 두 사람을 살폈다.

    크라이튼 대공의 눈동자가 연신 흔들렸다.

    눈앞에 있는 딸, 코넬리아 크라이튼을 확인하고도 스스로 믿지 못하는 듯했다.

    그간 내가 했던 말을 단지 도움을 청하고자 한 거짓말로 치부했으니, 그 결과를 확인하고 더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정말…… 코넬리아 너니?”

    크라이튼 대공이 엄마와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무릎을 굽혀 앉았다.

    마침내 마주한 딸을 확인한 크라이튼 대공이 떨리는 손을 들었다.

    크라이튼 대공이 엄마의 뺨에 닿았다. 그의 손끝은 섬세한 유리 조각상을 만지듯 조심스러웠다.

    그의 시선이 엄마의 젖은 눈을, 오뚝한 코를, 영양이 부족해 부르튼 입술을 훑었다.

    그러더니 이내 크라이튼 대공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엄마는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못하고 크라이튼 대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망설이다 크라이튼 대공의 손을 감쌌다.

    “예, 아버지. 저예요. ……코넬리아.”

    엄마가 크라이튼 대공에게 말하며 입꼬리를 끌어 웃었다.

    그러자 크라이튼 대공의 눈이 크게 뜨였다.

    여전히 그는 눈앞에 있는 사람이 코넬리아 크라이튼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크라이튼 대공은 곧 현실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토록 그리워했던 딸이 눈앞에 있다는 사실을.

    “코넬리아, 내 딸아!”

    크라이튼 대공이 엄마를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어린아이처럼 큰 소리로 엉엉 울었다.

    그럼에도 그의 모습이 추하거나 비루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10년 만에 잃어버린 딸과 해후했는데 얼마나 기쁘고, 또 안타까울까.

    크라이튼 대공의 품에 안겨 있던 엄마도 망설이다 손을 들어 크라이튼 대공의 등을 꼭 끌어안았다.

    “죄송해요, 아버지.”

    엄마의 목소리도 물기에 젖어 있었다.

    * * *

    시간이 지나 차츰 울음이 멎었다.

    엄마와 크라이튼 대공은 울음을 그치고 난 후에야 집 안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동안 이 집에서 살았던 거니?”

    크라이튼 대공이 집을 이곳저곳 훑어보며 물었다.

    델피아 마을에서는 보편적인 집이었지만, 낡고 허름한 집 내부가 크라이튼 대공의 눈에 찰 리가 없었다.

    “네, 그래도 생각보다 지낼 만해요.”

    엄마가 주전자에 물을 올리며 대답했다.

    크라이튼 대공은 엄마가 직접 차를 끓인다는 것에 굉장히 충격을 받았다.

    굳이 차를 내오지 않아도 된다며 엄마를 말리기까지 했지만, 엄마는 10년 만에 다시 만난 아버지에게 차라도 대접하고 싶다며 완강한 태도를 보였다.

    결국 크라이튼 대공도 차마 그런 엄마를 말리지 못하고 의자에 앉아 엄마가 차를 내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가일 그놈은 어떻게 된 게냐?”

    “가일은…… 4년 전에 마을을 지키다가 눈을 감았어요.”

    “…….”

    크라이튼 대공이 나직이 침음을 흘렸다.

    “그럼 저택으로 돌아오지 그랬니.”

    크라이튼 대공이 주저하며 꺼낸 말에 엄마의 손이 잠시 멈추었다.

    한참 동안 말을 꺼내지 못하는 엄마를 보다 못해 내가 입을 열었다.

    “엄마는 대공 각하께 용서를 구하고 싶으셨어요.”

    “미라벨!”

    엄마가 당황해서 내 이름을 불렀으나, 이미 크라이튼 대공이 듣고 난 후였다.

    “용서?”

    “네. 그래서 대공 각하께 편지를 보냈어요. 그런데 아무리 편지를 보내도 답이 없었고요.”

    “편지라니, 그 무슨…….”

    크라이튼 대공은 뜻밖의 말에 놀라며 엄마를 바라보았다.

    모르는 게 당연하지. 편지는 다니엘이 빼돌리고 있었으니까.

    “그럼 그간 내게 편지를 보내왔다는 거니? 내게 용서를 구하려고?”

    “……예, 아버지.”

    뒤늦게 상황을 이해한 크라이튼 대공이 허탈감에 숨을 내뱉었다.

    “난 그것도 모르고…….”

    크라이튼 대공이 두 손을 들어 얼굴을 감쌌다. 그리고는 한동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엄마가 크라이튼 대공의 앞에 찻잔을 놓고 그의 맞은편에 앉을 때까지도 크라이튼 대공은 미동이 없었다.

    그렇게 짧지 않은 시간이 지나고 크라이튼 대공이 고개를 들었다. 힘겹게 뜬 그의 눈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미안하다. 내가 먼저 너를 찾았어야 했는데.”

    “아니에요, 이렇게 와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해요.”

    엄마는 괜찮은 듯이 말했지만, 나는 엄마의 속도 크라이튼 대공과 마찬가지로 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 이 아이 덕분에…….”

    크라이튼 대공이 말끝을 흐리며 나와 엄마를 번갈아 확인했다.

    “이 아이는 네 딸인 게냐?”

    “네, 맞아요. 가일과 제 딸이에요. 이름은 미라벨이고요.”

    빙긋 웃은 엄마가 나를 바라보았다.

    “미라벨, 이분은 네 외할아버지야. 인사드리렴.”

    이미 인사를 할 타이밍은 한참이나 지난 것 같았지만, 그래도 일단은 엄마가 시키는 대로 크라이튼 대공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미라벨이라고 합니다.”

    “그래, 이제 보니 네 엄마 어릴 때를 쏙 빼닮았구나.”

    크라이튼 대공의 큰 손이 내 머리에 부드럽게 얹어졌다. 그리고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맙다, 미라벨. 네가 아니었다면 코넬리아와 만나지 못했을 거란다.”

    “아니에요. 대공 각하께서 제 말을 들어주셔서 두 분이 만나게 되신 거예요.”

    만일 크라이튼 대공 저 앞에서 그가 내 말을 거짓말이라 치부하고 무시했더라면, 내 기억과 다름없이 두 사람은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사실 크라이튼 대공은 내 엄마가 코넬리아 크라이튼이라는 것을 믿지 않았다.

    그럼에도 평민 아이가 외치는 도움 요청을 외면하지 않고 들어주려 했기에 크라이튼 대공과 엄마가 만날 수 있었던 거다.

    “그런데 미라벨이 말하길, 네가 아프다던데 사실이니?”

    “…….”

    엄마는 크라이튼 대공의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크라이튼 대공은 침묵의 의미를 이해했는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진짜구나.”

    “죄송해요.”

    “아니다. 네가 내게 죄송할 게 뭐가 있겠니. 일단 저택으로 돌아가자꾸나. 네 병을 제대로 진료하려면 수도로 가야 할 것 같으니.”

    크라이튼 대공이 서두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덩달아 엄마와 나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엄마는 망설이는 분위기였다.

    “제가 다시…… 돌아가도 되는 걸까요?”

    “안 될 이유가 없잖니. 그곳이 네 집인걸. 브라이언도 널 반길 게다.”

    엄마는 잠시 생각하는 듯이 바닥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때 엄마의 얼굴에는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알겠어요.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짐을 좀 정리해야 할 것 같아요.”

    “사람이 필요하겠구나. 하인들을 불러줄 테니 그들에게 시키려무나. 몸도 좋지 않은데 무리하지 말고.”

    “감사해요, 아버지.”

    크라이튼 대공은 엄마의 인사를 받은 후 헛기침을 하더니 집 밖으로 나가 버렸다.

    엄마는 닫힌 문을 바라보다가 나를 돌아보았다.

    “미라벨, 이리 와 볼래?”

    “응.”

    짧은 다리로 쪼르르 달려가 엄마 앞에 서니 엄마가 몸을 굽혀 나를 다시 한번 끌어안았다.

    “엄마가 걱정돼서 할아버지를 데려온 거구나. 고맙고, 또 미안해. 근데 다음부터는 이런 무모한 짓은 하지 마. 너무 위험하니까. 엄마한테는 미라벨이 무엇보다 소중하거든. 알았지?”

    “응. 알겠어.”

    엄마는 내 확답을 들은 후에야 나를 품에서 놓아 주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