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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5)화 (5/174)

5화

엄마가 돌아가시고, 살기 위해 떠돌아다니다 용병이 되고부터는 눈물이 메말라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런 일이 없어졌기 때문인지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고개를 숙여 크라이튼 대공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쉽지는 않았다.

한참 말이 없던 크라이튼 대공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결국 내 말을 믿지 못하고 저택으로 들어가는 건가 싶은 순간, 내 머리 위로 커다란 무언가가 얹어졌다.

고개를 들어 확인해 보니 크라이튼 대공의 손이었다.

“아이야. 네가 내게 거짓말을 한 거라면 널 크게 혼낼 거란다. 그래도 내게 확인하라 할 게냐?”

이제 좀 화가 누그러진 건지 크라이튼 대공이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그에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래, 네 말대로 진짜인지 아닌지는 내 직접 가서 확인해 보면 알겠지.”

말을 마친 크라이튼 대공이 내 머리에서 손을 떼고 근처에 있던 보좌관을 바라보았다.

“이 아이의 말을 확인하러 갈 것이니 일정은 비워 두거라.”

“예? 하, 하지만…….”

당황한 보좌관이 말을 더듬다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

“예,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먼저 들어가서 일정을 정리해 놓겠습니다.”

“그래.”

보좌관이 먼저 자리를 비웠다.

크라이튼 대공은 내 옆에서 복잡한 얼굴로 허공을 바라보다 문득 나를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그의 눈에는 불신이 가득했지만, 처음 보았던 것처럼 적대적이지는 않았다.

“얘야, 식사는 했니?”

“……아니요.”

“그래, 그럼 일단은 들어가서 아침 식사라도 하자꾸나.”

“그럼 델피아 마을로는…….”

내가 말끝을 흐리자 크라이튼 대공이 옅게 웃었다.

“일정을 정리하고 마차를 준비해서 출발하기까지 시간이 조금 걸릴 거란다. 식사하는 시간 정도는 있으니 걱정하지 말렴.”

크라이튼 대공이 대공 저로 들어갔다.

나도 크라이튼 대공을 따라 대공 저로 향했다.

대공 저는 내가 죽기 전에 방문했을 때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둘러보니 새삼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엄마는 이곳에서 나고 자라며 생활했겠지. 여기는 엄마의 추억이 가득 담겨 있는 곳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여전히 낯선 곳이었다.

“이 아이와 아침을 먹을 거니 준비해.”

“예.”

저택에 대기하고 있던 하녀를 향해 크라이튼 대공이 명했다.

하녀는 별다른 대꾸 없이 크라이튼 대공의 말에 고개를 숙였다.

“꼬마 아가씨, 이리로 오겠어요?”

하녀가 내게 말했다.

나는 잠시 크라이튼 대공과 하녀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하녀를 따라가도 되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크라이튼 대공은 허락의 의미로 내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크라이튼 대공의 고갯짓을 보고 하녀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하녀는 식사를 하기 전에 세안을 할 수 있도록 물을 준비해 주었다.

이런 대접이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어색하게 세안을 마치고 하녀가 건네주는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냈다.

그 후에야 식당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식당으로 들어가니 긴 식탁과 열을 지어 놓인 의자가 보였다.

딱 보기에도 가구 모두 비싸 보였다.

크라이튼 대공은 이미 상석에 앉아 있었다.

내가 크라이튼 대공의 오른편에 앉자 식사가 천천히 나오기 시작했다.

“맛있게 들렴.”

분명히 내가 여태 먹어 본 것 중에서 가장 훌륭하고 화려한 음식이었지만, 제대로 맛을 음미할 수가 없었다.

내가 이러는 동안에도 엄마는 사라진 나를 찾고 있을 텐데, 내가 지금 여기서 태연하게 식사나 하고 있어도 되는 건지 의문이었다.

“걱정되는 게냐?”

식사를 이어가던 크라이튼 대공이 물었다.

“네. 말씀드렸다시피 엄마가 많이 아파요. 그런데다가 제가 이렇게 떠나 있으니 많이 걱정하고 있을 텐데 저 혼자 이런 호사를 누리는 게…….”

“죄스러운 모양이구나.”

“……네.”

맛있는 식사도 지금 내게는 허물일 뿐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마차가 아니라 말을 타고서라도 델피아 마을로 향하고 싶었다.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크라이튼 대공은 나를 보며 옅게 미소 지었다.

“나도 딸이 아무도 모르게 떠나간 입장에서 하는 말이다만, 기왕이면 나는 내 딸이 좋은 것을 먹고 좋은 옷을 입고, 좋은 것만 보고 있었으면 한단다. 그러니 너희 어머니도 틀림없이 그러실 게다.”

나는 슬쩍 크라이튼 대공을 확인했다.

크라이튼 대공은 아직까지도 내 엄마가 코넬리아 크라이튼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 듯했다.

하긴, 엄마가 이 저택에서 떠나온 게 무려 10년 전의 일이었다.

그간 코넬리아 크라이튼의 행방을 안다며 찾아온 이들이 많았을 터였다.

크라이튼 대공의 기대는 그때마다 산산이 조각났겠지.

부서지고 조각난 마음을 품은 채로 살아온 크라이튼 대공은 이제 내 말을 선뜻 믿을 수가 없었으리라.

하지만 그래도 그의 말은 진심으로 느껴졌다.

사랑을 선택해 집을 나간 딸이라고 해도 좋은 것만 먹고, 입고, 보았으면 한다는 것은.

그래, 엄마도 내가 굶은 채로 돌아오는 건 원하지 않겠지.

나는 영 내키지 않았음에도 천천히 스푼을 움직여 식사를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억지로 욱여넣다 보니 맛이 제대로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허했던 속이 차는 느낌은 들었다.

아침 식사를 마칠 즈음에야 일정을 정리하러 가겠다던 크라이튼 대공의 보좌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공 각하, 마차를 대기시켜 놓았습니다.”

보좌관의 말이 끝나자 크라이튼 대공이 나를 보았다.

가겠느냐는 의미였다.

나는 들고 있던 스푼을 내려놓고 고개를 끄덕였다.

* * *

크라이튼 대공가의 문양이 새겨진 마차가 대공 저의 앞에 대기하고 있었다.

“올라타렴.”

크라이튼 대공은 신장이 작은 내가 마차에 쉬이 오를 수 있도록 손을 내밀었다.

나는 크라이튼 대공이 내게로 내민 손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의 손에는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나는 크라이튼 대공의 손을 잡고 이내 마차에 올랐다.

내가 자리에 앉은 후, 크라이튼 대공도 마차에 올라타 내 맞은편에 앉았다.

그는 지팡이를 옆에 기대어 놓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휴식을 취하려는 듯했다.

크라이튼 대공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조용히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크라이튼 대공은 내 생각보다 더 다정한 사람이었다.

처음 보는 어린아이를 위해 기꺼이 시간을 내어 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니.

내가 엄마의 이름을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내 엄마가 정말로 코넬리아 크라이튼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는 듯이 보였다.

그럼에도 크라이튼 대공은 왕복 엿새나 되는 거리를 직접 동행하기로 했다.

물론, 그가 나를 데려다주는 데에는 아주 작은 일말의 희망이 있었을 거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미 부서질 대로 부서진 희망을 그가 얼마나 붙잡고 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엄마와 크라이튼 대공이 만나면, 이 사람은 내 할아버지가 되는 거겠지.

나는 아직까지도 죽기 전에 보았던 크라이튼 대공을 기억했다.

죽을 위험에 놓이고도 고작 만난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은 나를 걱정해 주었던 사람.

엄마에 대해 알게 된 이후로 평생을 미워하고 증오했던 사람이었는데, 모든 걸 알게 된 지금은 그가 조금도 밉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가엾게 느껴지기도 했다.

평생 떠나간 딸을 그리워하다 딸의 죽음을 안 것과 동시에 죽음을 맞이했으니.

그러다 문득 나는 크라이튼 대공이 죽음을 앞두고 나를 ‘아가’라고 불렀던 게 떠올랐다.

다 큰 성인에게 붙일 호칭은 아니었지만, 크라이튼 대공이 나를 그렇게 부른 게 싫지는 않았다.

만약 크라이튼 대공이 엄마를 만나고, 내가 손녀라는 걸 알게 되면 날 그때처럼 부를까?

머릿속을 스치는 궁금증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러다 혹시나 크라이튼 대공이 소리를 들었을까 싶어 나는 얼른 얼굴을 정돈하고 고개를 창밖으로 돌렸다.

다행히 크라이튼 대공 쪽에서 별다른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 * *

늦은 밤이 되었다. 적당한 공터에 마차를 세우고 간단한 저녁을 먹은 후, 크라이튼 가의 사람들이 분주히 돌아다니는 것을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나도 도와야 하나 싶었지만, 사람들이 어린이는 굳이 이런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며 내 도움을 거절했다.

결국 아무것도 할 게 없어 자리에 앉아 돌아다니는 사람들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네가 정말 코넬리아의 딸이면 좋겠구나.”

불현듯 크라이튼 대공이 내게 말했다.

고개를 돌려 크라이튼 대공을 확인했다. 크라이튼 대공의 눈에 깊은 그리움이 묻어 있었다.

그의 눈에 비친 그리움이 누굴 향한 건지 이해 못 할 정도로 나는 어리석지 않았다.

“넌 그저 코넬리아 이름을 빌려 나에게 작은 도움을 구하려는 의도였겠지. 하지만 내게 있어 코넬리아라는 이름은 내 가슴에 박힌 못이었다.”

크라이튼 대공의 시선이 추위를 피하기 위해 피워 놓은 모닥불로 향했다.

불꽃이 일렁일 때마다 크라이튼 대공의 눈동자도 일렁거리는 듯했다.

“코넬리아의 바람을 들어주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무거운 후회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모두 다 내 욕심 때문이었지.”

크라이튼 대공이 자세히 이야기해주지 않았지만, 나는 그가 어떤 것을 이야기하는지 알고 있었다.

코넬리아 크라이튼, 나의 엄마는 지금은 황제가 된 제임스 바젯 카스트로의 약혼녀였다.

원래대로라면 황제와 혼인하여 이 제국의 황후가 되었을 터였다.

하지만 그런 엄마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 엄마의 수호 기사인 가일 휴스턴이었다.

엄마는 파혼하고 수호 기사와 결혼하길 원했지만, 크라이튼 대공가의 사정 때문에 그 바람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엄마는 사랑을 이루고자 수호 기사와 함께 수도에서 도망쳤다.

그게 10년 전 엄마와 아빠의 이야기였다.

그렇게 떠나 행복했다면 좋았을 텐데, 아빠는 델피아 마을에 인접한 숲의 마물과 싸우다 유명을 달리하셨다.

엄마는 그 후로 델피아 마을에서 홀로 나를 키웠다. 그러면서 크라이튼 대공에게 꾸준히 사죄의 편지를 보냈지.

답이 오지 않는 편지를 썼을 엄마의 마음이, 눈앞에 있는 크라이튼 대공의 마음과 다르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회한이 깊은 크라이튼 대공의 얼굴을 살피다 손을 뻗어 그의 큰 손을 감쌌다.

크라이튼 대공은 갑작스러운 내 행동에 의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 이내 쓰게 웃었다.

그리고는 내게 잡힌 손을 빼내어 내 머리를 인자하게 쓰다듬어 주었다.

“고맙구나. 위로해 줘서.”

“…….”

엄마가 진짜 코넬리아 크라이튼이니 곧 다시 만나게 되실 거라고 이야기를 해 주고 싶었지만, 왜인지 말문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머뭇거리고 있는 것을 확인한 크라이튼 대공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혹시 네 어머니가 내 딸이 아니면 널 도와주지 않을까 봐 두려운 거니?”

크라이튼 대공은 내가 머뭇거리는 이유를 지레짐작하여 이야기했다.

“걱정하지 말렴. 네 어머니가 내 딸 코넬리아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내 기꺼이 너와 네 어머니를 도와줄 테니.”

그렇게 말하는 크라이튼 대공의 목소리가 유난히 쓸쓸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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