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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4)화 (4/174)
  • 4화

    내가 예상했던 대로 짐마차를 타고 꼬박 사흘을 달린 후에야 수도 근방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첫날은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로 굶었고, 둘째 날에는 감자 반쪽씩 제프리와 나눠 먹고, 마지막 헤어지기 전에 또 감자 반쪽을 나눠 먹으며 허기를 채웠다.

    아무래도 만족스럽게 식사를 마친 게 아니었으므로 계속해서 배가 고프기는 했지만, 제프리를 남겨 두고 나 혼자 먹는 것보다는 나았기에 한 선택이었다.

    “밤에 노숙하면 그때 내리자.”

    제프리가 내게 제안했다.

    이미 수도로 출입할 수 없는 시간이었기 때문에 한 차례 야외에서 노숙할 것을 권한 것이었다.

    확실히 새벽에 그리암 상단 직원들의 경계심이 풀린 때를 노려 이 짐마차에서 내리는 게 좋은 선택이기는 했다.

    그럼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조용히 떠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 방법은 또 다른 리스크를 만들어 낼 터였다.

    나는 그런 제프리를 향해 고개를 저어 보였다.

    “아니, 내일 수도에 들어가면 그때 내리는 게 좋겠어.”

    “왜?”

    “오늘 밤에 내리면, 수도로 어떻게 들어갈 건데?”

    “그야…….”

    내가 묻자 제프리가 대답하다 말고 중간에 말이 턱 막혀 버렸다.

    “너 경비대에 쫓기고 있다며.”

    수도와 지방의 경비대는 관리자가 달라서 흉악범이나 현상금 수배범이 아니고서는 정보를 공유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주의를 요할 필요가 있었다.

    게다가 제프리와 나는 아직 어린아이다.

    행색이 꾀죄죄한 우리 둘이 보호자도 없이 수도 경비대로 들어가려는 걸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었다.

    “기왕이면 수도 안으로 들어가서 내리자. 아마 짐마차를 보관하기 위해 상단에서 운영하는 창고로 향할 거야. 그럼 그때 내리면 돼.”

    “걸리면 어떡해?”

    “안 걸리게 조심해야지.”

    경험상 상단에 도착하면 행수가 보고를 하기 위해 본관에 들어갈 터였다.

    그럼 직원들은 행수가 돌아올 때까지 그 자리에서 대기를 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그때를 틈타 짐마차에서 내리면 될 일이었다.

    “그럼 내일이면 진짜로 너랑 헤어지겠다.”

    불현듯 제프리가 말했다.

    제프리는 곧 찾아올 이별이 아쉬운 눈치였다.

    사실은 나도 요 사흘간 제프리와 같이 있으면서 정이 들었기 때문에 헤어지는 게 아쉽기는 했다.

    “영영 못 만날 것도 아니고, 나중에 언젠가 또 만날 날이 있겠지.”

    “그렇겠지?”

    “그래. 그리고 감자도 갚기로 했잖아.”

    내 말이 끝나자 제프리가 멋쩍게 웃었다.

    처음 감자 한 알을 두 알로 갚겠다던 제프리는 그 후로 내게 감자를 더 얻어먹고 난 후, 감자 여섯 알을 내게 갚기로 약속했다.

    “이제 내일 아침까지는 쉬면서 체력을 좀 비축해 두는 게 좋을 거야.”

    “응.”

    이제 헤어지게 되면, 제프리는 길거리를 전전하며 다니겠지.

    어떤 경위로 용병이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분명히 지금의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고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음만 같아서는 도움이라도 주고 싶었지만, 지금의 내가 그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단지 그의 미래에 행운이 가득하길 빌어 주는 수밖에.

    나는 모포를 제프리의 목까지 꼼꼼히 덮어 주었다. 제프리는 내가 해 주는 친절이 영 불편했는지 당황한 듯했지만 내 손길을 뿌리치지는 않았다.

    제프리에게 모포를 덮어 주고 난 다음 나도 제프리의 옆에 앉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는 있었지만, 내심 불안했다.

    내가 없어진 걸 알고 기겁했을 엄마도 걱정되었고, 크라이튼 대공이 나를 믿어줄지도 걱정이었다.

    * * *

    아침이 되자마자 수도로 들어선 짐마차가 그리암 상단 본부에 정차했다.

    나와 제프리는 천막을 걷고 주변을 훑어보며 모두가 짐마차에서 멀어질 때까지 기다리다가 조심스럽게 내려왔다.

    나보다 키가 큰 제프리가 먼저 마차를 내려왔고, 그 뒤로 내가 내려섰다.

    제프리는 내가 쉽게 바닥에 내려설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딱히 도움이 필요하지 않았지만, 나는 눈짓으로 그에게 감사를 전한 후 조용히 상단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리암 상단의 본부를 벗어나 으슥한 골목에 다다른 후에야 우리 둘은 참았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이제 진짜로 헤어지겠네. 할아버지 무사히 만나서 빨리 엄마한테 돌아가. 걱정하실 거야.”

    제프리가 찌뿌듯한 몸을 풀며 내게 말했다.

    어린 주제에 기특한 소리를 하는 제프리가 귀여워서 나는 그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 주었다.

    뜻밖의 행동이었는지 제프리가 당황하며 머리를 털었다.

    나는 곧 그에게서 한 걸음 떨어지며 밝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응. 너도 건강 조심해야 해.”

    “……응.”

    어색하게 대답하는 제프리를 바라보다 이내 몸을 돌렸다.

    “미라벨!”

    막 발걸음을 떼려는 순간, 제프리가 내 이름을 불렀다.

    몸을 돌려 제프리를 바라보니 제프리의 얼굴이 뜻밖에도 울상이었다.

    “진짜 감자 갚으러 갈 거니까 기다려야 해!”

    그리고는 크게 외치더니 자기가 먼저 자리를 떠나 버렸다.

    나는 떠나가는 제프리를 바라보며 손을 흔들었다.

    어떻게, 언제 만날지 결정된 게 하나도 없었지만, 어째서인지 그와는 또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골목을 나오니 밝은 햇빛이 나를 반겼다.

    사흘 만에 보는 햇빛은 환하고 따뜻했다.

    나는 내 기억을 더듬으며 크라이튼 대공가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짧은 걸음으로 삼십 분을 걸어간 후에야 크라이튼 대공 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볼 때마다 으리으리한 외형이 압도적이었다.

    나는 크게 심호흡한 후에 크라이튼 대공 저를 지키는 병사에게 다가갔다.

    “실례합니다.”

    “응?”

    내가 병사를 부르자 병사가 의아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니, 꼬마 아가씨?”

    병사는 드문 방문객이 나라는 사실에 어이가 없었는지 웃음을 터트리며 물었다.

    일단 나를 무시하거나 외면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됐다며 꺼지라고 할 줄 알았는데 그건 다행이었다.

    “대공 각하를 뵈러 왔습니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거다만, 어느 귀족 가문의 시동이니?”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음…….”

    내가 부정하자 병사가 생각하는 듯이 눈을 가늘게 좁혔다.

    그러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미안하지만 꼬마 아가씨. 대공 각하께서 국정을 돌보느라 많이 바쁘셔서 약속을 잡지 않으면 만날 수가 없단다.”

    이미 예상했던 대답이었다.

    역시 지금의 나를 크라이튼 대공이 만날 이유는 없는 거겠지.

    이전의 그가 나를 먼저 만나려고 했던 건 내게 의뢰를 맡기기 위해서였다. 이름 있는 용병에게 딸을 찾아 달라는 의뢰를 하기 위해서.

    하지만 지금의 나는 용병도, 성인도 아니었다.

    그저 어린 평민 아이일 뿐이었다.

    그나마 병사가 험악하게 인상 쓰고 쫓아내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나는 잔뜩 실망해서는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면 이대로 크라이튼 대공이 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럼…….”

    “무슨 일이지?”

    막 내가 입을 열려던 찰나에, 중후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귀에 설지 않은 목소리였다.

    “대공 각하! 오셨습니까?”

    병사가 각을 잡고 인사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돌아본 그곳에는 내가 만난 것보다 훨씬 젊어 보이는 얼굴의 크라이튼 대공이 있었다.

    “무슨 일인지 물었네.”

    크라이튼 대공이 채근하자 병사가 당황하여 입술을 뻐끔거렸다.

    “여기 이 아이가 대공 각하를 만나 뵙고 싶다 하여 되돌려 보내려던 중이었습니다.”

    “그렇군. 그럼 수고하게.”

    “예, 각하!”

    크라이튼 대공이 걸음을 옮기자 병사가 문을 열어 주었다.

    그렇게 천천히 멀어져가는 크라이튼 대공을 보며 나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소리쳤다.

    “도와주세요!”

    내 목소리가 들릴 것임에도 크라이튼 대공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크라이튼 대공을 자리에 멈춰 세울 만한 말이 필요했다.

    그래서 다급히 외쳤다.

    “코넬리아 크라이튼!”

    예상대로 이 이름을 언급하는 순간, 대공은 멈출 수밖에 없었다.

    크라이튼 대공은 자리에 멈추어 서서 굳은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흡사 듣지 말아야 할 것을 들은 듯이 무서운 얼굴을 한 채였다.

    “뭐라고 했니, 아이야?”

    크라이튼 대공의 목소리는 그의 얼굴만큼이나 무섭게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그런 크라이튼 대공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코넬리아 크라이튼이라고 했어요.”

    “네가 어째서 그 이름을…….”

    “그분이 제 어머니예요. 제발…… 제 어머니를 도와주세요.”

    크라이튼 대공은 매섭게 얼굴을 찌푸리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 이름이 무슨 이름인 줄 알고 입에 올리는 게냐?”

    크라이튼 대공의 목소리는 위협적으로 울렸다.

    그가 왜 이렇게까지 예민하게 받아들이는지 알고 있다.

    크라이튼 대공에게 있어서 코넬리아 크라이튼, 내 어머니는 내내 찾고 찾아도 찾을 수 없던 하나뿐인 딸이니까.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꼬마아이가 자신의 어머니가 코넬리아 크라이튼이라고 하니 예민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그는 결국 내 말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크라이튼 대공은, 엄마가 떠난 이후로 줄곧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알고 있어요. 대공 각하의 실종된 딸이잖아요.”

    나는 크라이튼 대공의 위협적인 눈빛과 목소리에도 지지 않고 그에게 말했다.

    “그리고 제 어머니의 이름이기도 해요.”

    “…….”

    크라이튼 대공이 말없이 나를 노려보았다.

    수많은 의심과 불신 따위가 그의 눈을 스쳤다.

    그러는 동안에도 시간은 계속해서 흘렀다.

    특별한 일이 아니라면 그가 의심을 지울 때까지 기다릴 테지만, 내게는 한시가 급한 일이 있었다.

    “정 믿지 못하시겠으면 직접 가서 확인해 보셔도 좋아요. 델피아 마을이니 이곳에서 마차를 타고 사흘이면 도착할 수 있을 거예요. 가능하면 최대한 빨리 결정해 주세요. 엄마가…… 많이 아파요.”

    아픈 와중에도 나를 찾고 계실 엄마를 생각하니 속에서 왈칵 설움이 복받쳤다.

    지금이 아니면 엄마를 살릴 기회가 없다.

    크라이튼 대공이 내 말을 믿어 주지 않으면 엄마는 또다시 1년을 버티지 못하고 눈을 감게 되겠지.

    내가 무슨 이유로 과거로 돌아오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엄마를 살릴 기회가 왔으니 나는 이 기회를 반드시 잡아야만 했다.

    이번에도 엄마를 잃을 수는 없었다.

    설움 때문인지 눈으로 금세 눈물이 맺혔다.

    울지 않으려고 애를 써 봤지만, 이미 고인 눈물은 봇물 터지듯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엄마를, 살려……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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