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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2)화 (2/174)

2화

아홉 살이 되었다.

분명히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스물네 살이었던 내가, 아홉 살 꼬마가 되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나는 할아버지-크라이튼 대공을 지키다가 죽음을 맞이했다.

아직 처리하지 못한 병사들이 많았으니 내가 죽은 이후로는 크라이튼 대공마저 죽음을 맞았으리라.

그런데 정신을 차려 보니 과거로 돌아와 있었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 봐도 답이 나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홉 살의 꼬마가 된 것이 나의 현실이라면 지금의 내가 알아둘 것이 있었다.

앞으로 1년 뒤 엄마가 난치병으로 영영 세상을 떠날 것이라는 사실과 엄마의 믿음이 배신당하지 않았다는 사실.

나는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을 하염없이 들여다보다가 이내 엄마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침 식사를 위해 부엌에서 요리하고 있는 엄마의 뒷모습이 보였다.

“엄마, 오늘 바빠?”

“아니. 안 바빠. 너도 알다시피 요즘 일이 별로 없잖니. 한동안은 집에 있을 것 같아.”

엄마는 대수롭지 않은 듯이 말했지만, 걱정과 불안마저 숨길 수는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 우리는 엄마가 마을의 일을 도와주고 받아오는 돈으로 겨우 생계를 꾸리고 있었다.

일이 없다는 건 쉴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지만, 또 다르게 생각한다면 한동안은 먹고 살 걱정을 해야 한다는 말이기도 했다.

이 제국에서 가장 귀한 레이디였을 엄마였다.

누구도 무시 못 할 크라이튼 대공가의 딸이었고, 현 황제의 전 약혼녀였다.

그런 엄마가 나를 건사하기 위해서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고 할 수 있는 모든 일은 다 해 왔다.

어릴 때의 나는 당시의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이해하지 못했으나, 지금의 나는 이해했다.

몸을 돌려 천천히 엄마를 향해 다가갔다.

마침내 엄마의 뒤까지 다가갔을 때, 표정을 숨긴 채로 요리하고 있는 엄마를 껴안았다.

“엄마.”

“어쩜, 정말 이상한 꿈이라도 꿨니? 우리 벨, 왜 이렇게 응석받이가 됐대?”

“그냥. 엄마가 좋아서. 사랑해, 엄마.”

14년을 홀로 용병으로 지내며 후회하고 또 후회했던 일이 있다면 역시 엄마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많이 해 주지 못한 것이었다.

이제 더는 듣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던 엄마의 목소리도,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던 엄마의 얼굴도.

모두 다시 볼 수 있게 되었으니 이제는 후회를 남기고 싶지 않았다.

“엄마도 사랑해.”

다정한 목소리에 다시금 눈가에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엄마를 안았던 손을 풀어 눈물을 닦아 내었다.

몸이 아홉 살이 되어 버리니 마음도 응석받이 아홉 살이 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마냥 이대로 어리광을 부리고 있을 때는 아니었다.

내가 이리도 엄마가 보고 싶었는데, 엄마도 마찬가지겠지.

엄마한테도 아버지가 있으니까.

마음 깊이 크라이튼 대공을 그리워하고 있었기 때문에 꼬박꼬박 답장 없는 편지를 썼던 거겠지.

“엄마, 나한테 할아버지가 있다고 했지?”

“……응. 그럼. 있지.”

엄마가 쓰게 웃었다.

나는 그런 엄마의 손을 잡으며 엄마를 위로하길 원했다.

“우리 할아버지 보러 가자.”

내 말이 끝나자 엄마의 손에 약하게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엄마는 선뜻 가겠노라 대답하지 못했다.

“벨, 엄마는…….”

알고 있다.

엄마가 왜 할아버지를 만나기를 주저하는지.

엄마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집안을 버리고 사랑을 선택한 엄마였다.

엄마를 믿고 사랑해 주었던 모든 이들을 버리고 도망쳐 나왔는데, 이제 와서 돌아가는 일이 쉽지는 않을 터였다.

게다가 크라이튼 대공에게 사죄의 편지를 보내어도 대답이 오지 않았으니 엄마는 끝내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게 되었을 것이다.

“할아버지한테는 못 갈 것 같아.”

결국, 엄마가 내 손을 놓고 몸을 돌려 버렸다.

보지 않아도 엄마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알 것 같았다.

* * *

무리인 줄은 알지만, 내가 결심을 해야만 했다.

내가 아는 대로라면, 엄마는 끝끝내 크라이튼 대공을 그리워하며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그리고 크라이튼 대공은 돌아오지 않는 딸을 기다리다 다니엘에게 죽음을 맞이하겠지.

내가 알고 있는 미래를 바꾸려면, 내가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새벽빛이 내려앉은 시간, 작은 가방을 챙기고는 방을 나왔다.

엄마가 잠든 집안은 고요하기만 했다.

나는 그런 방을 한 번 둘러본 후, 미리 준비한 편지를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이런 편지 한 장 남기고 없어지면 엄마가 많이 놀라겠지만, 내겐 이 방법밖에 없었다.

엄마가 크라이튼 대공에게 편지를 보내 봤자 어차피 다니엘이 중간에 채갈 테니 직접 만나는 수밖에.

게다가 엄마에게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1년 후면 엄마가 병으로 눈을 감을 것이다.

어린 나는 죽어가는 엄마를 보며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만, 대공가라면 다르겠지.

엄마를 위해서, 나는 길을 떠나야만 했다.

작게 심호흡한 뒤 집을 나섰다.

어제 미리 마을을 떠나 수도로 향하는 상단을 알아 두었기 때문에 시간 맞춰 나가야 했다.

조금씩 밝아 오는 하늘을 바라보며 발을 재촉했다. 상단 직원들이 출근하기 전에 미리 도착해야 했다.

스물넷의 나라면 이렇게 하는 일 없이 말을 사서 직접 갔을 텐데, 아홉 살의 나는 돈도, 힘도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암 상단에 도착하니 상단에서 수도로 가져가기 위해 어제 미리 실어 두었던 짐들이 가득했다.

주변으로 물건을 지키는 가드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내게 아무런 방해도 되지 않았다.

엄마가 돌아가셨던 과거이자 미래에, 죽음을 앞둔 엄마는 용병에게 남은 돈을 건네며 나를 크라이튼 대공가로 데려가 달라고 의뢰하였지만, 의뢰를 받은 용병은 나를 옆 마을에 버리고 떠나 버렸다.

열 살에 혼자가 된 내가 선택한 생존 방식은 구걸이었다.

어린 여자아이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며 일꾼으로도 받아 주지 않았기에 선택한 방법이었다.

그나마도 마을의 부랑자들에게 잘못 걸리기라도 한다면 그 마을에서 구걸하는 것을 포기하고 다른 마을로 이동을 해야만 했다.

내가 직접 경비대의 검문을 피해 자유로이 돌아다닐 수는 없었기 때문에 상단의 짐 마차에 숨어들었다.

본격적으로 돈을 벌기 시작했던 열세 살 이전에는 어쩔 수 없이 사용한 이동 방법이었다.

때때로 상단에 걸려서 흠씬 두들겨 맞는 일도 있었지만, 어쨌든 그건 운이 매우 안 좋았을 때의 일이었다.

근 삼 년을 이런 식으로 옮겨 다녔으니 짐 마차에 숨어드는 일은 내게 아주 간단한 일이었다.

가드들의 시선을 피해 짐 마차를 찾았다.

짐이 잔뜩 실린 마차 위로 끙끙거리며 올라갔다.

짐이 빼곡히 차 있는 틈 사이로 내 작은 몸 하나 숨길만 한 자리가 있었다.

나는 커다란 짐을 낑낑거리며 움직여 내가 안에 들어가 있어도 보이지 않도록 만든 후 그 안에 자리를 잡았다.

워낙 작은 공간에 몸을 구겨 넣은 거라 발견하기는 힘들겠지만,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까만 모포를 뒤집어썼다.

시간이 지나자 상단 직원들이 출근했는지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떠나기 전에 짐 확인해 봐!”

누군가가 소리쳤다. 그 후에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졌다.

곧 짐마차가 흔들렸다. 누군가가 짐을 확인하기 위해 짐마차에 오른 모양이었다.

나는 최대한 몸을 웅크린 채 숨을 죽였다.

종이가 팔락하고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재고를 확인하는 모양이었다.

최대한 이 시간이 빠르게 지나가길 바랐다.

조용히 기다리고 있으니 안쪽까지 다가왔던 걸음이 천천히 멀어지기 시작했다.

“이상 없습니다!”

직원의 외침에 맥이 탁 풀려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좋아, 짐도 다 확인했으니 곧 출발한다!”

다른 짐마차의 짐을 확인하는 건지 시간이 더 지난 후에야 수레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덜컹거리는 마차의 진동에 몸을 맡기고 막 눈을 감으려던 찰나, 가까운 곳 어딘가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몸을 잔뜩 긴장시키고 입을 꾹 다물었다.

설마 아직 직원이 여기 타고 있었던 걸까?

아닌데…….

분명히 재고를 확인하고 짐마차에서 내렸는데.

주의를 집중하고 있으니 곧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멈췄다. 소리의 진상이 쥐였던 건가 싶어서 긴장을 풀려던 순간, 가까운 곳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야, 너?”

그리암 상단의 직원이라고 하기에는 목소리가 애기 티를 벗지 못했다.

“거기 있는 거 다 알아.”

게다가 바깥에 들리지 않을 정도로 소리를 낮춘 것이, 꼭 나처럼 짐마차에 숨어든 사람 같았다.

나는 모포를 조금 들어 올려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확인했다. 그곳에 은빛 실타래 같은 것이 보였다.

눈을 가늘게 뜨고 자세히 보니 은발 머리를 한 작은 남자애였다.

입고 있는 옷은 땅바닥이라도 구른 건지 흙먼지가 잔뜩 묻어 있어 꾀죄죄해 보였다.

나는 슬쩍 모포를 내리며 고개를 내밀었다.

“상대방에게 이름을 물을 땐 자기소개부터 하는 거야.”

나처럼 이 짐마차에 숨어든 아이 같았지만 일단은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남자애에게 말했다.

남자애는 잠시 당황해하는 얼굴을 지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제프리 콜먼이야.”

“제프리 콜먼?”

그 아이의 이름을 듣자마자 머릿속에 그것과 똑같은 이름을 갖고 있는 누군가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내 기억 속의 제프리 콜먼이라는 남자도 내 앞의 아이처럼 밝은 은발에 파란 눈동자를 가진, 예쁘장한 외모를 가진 사람이었다.

물론, 단지 얼굴이 예쁘다는 이유로 제프리 콜먼을 기억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제프리 콜먼은 대륙에서 가장 유명한 용병이었다. 그를 높여 부를 때는 그에게 용병왕이라는 칭호를 붙일 만큼 능력이 뛰어나고 강한 사내였다.

그가 세운 용병단은 제국의 기사단인 라이언 기사단과도 견줄 만큼 강하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내가 용병 생활을 할 때, 날 자신의 용병단에 넣고 싶어 했던 남자기도 했다.

“뭐야? 나는 내 소개 했는데 왜 넌 안 해?”

짜증이 가득 담긴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제프리를 바라보았다.

“난 미라벨이야. 미라벨…… 헤일.”

나는 잠시간의 고민 끝에 결국 내 지금의 성을 이야기했다.

헤일이라는 성은 아버지와 엄마가 크라이튼 대공가의 눈을 피해 지은 가짜 성이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이것이 진짜 성이었다.

태어난 뒤로 나는 줄곧 미라벨 헤일이었으니까.

제프리는 내 이름을 듣고 한동안 내 이름을 중얼거렸다.

“예쁜 이름이네.”

“응?”

“아, 아냐!”

제프리가 당황하는 얼굴로 소리치려 하기에 나도 놀라 검지를 입술에 가져갔다.

쉬, 낮게 바람이 새는 소리가 나자 제프리가 황급히 처지를 깨닫고 입을 가렸다.

짐마차에 타고 있었다는 게 들키면 쫓겨나는 건 예상사요, 최악의 경우엔 도둑으로 몰려 흠씬 두들겨 맞은 뒤 수풀에 버려질 수도 있었다.

숨을 죽이고 바깥에서 혹시 다른 소리가 들려오지는 않는지 주의를 기울였지만, 다행히도 바깥까지 소리가 들린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짐 더미에 등을 기대었다.

“조용히 해. 소리 크게 내다 걸리면 큰일이니까.”

“으응.”

제프리도 제 잘못을 인지하고는 멋쩍은 듯이 뺨을 긁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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