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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1)화 (1/174)
  • 1화

    “자네가 이런 시시한 일은 맡지 않는 걸로 유명한 건 알고 있네. 하지만 간곡히 부탁할 일이 있어 그대를 불렀네.”

    노쇠한 목소리로 크라이튼 대공이 말했다. 제국의 하나뿐인 대공으로, 황제에 버금가는 권력을 쥐었던 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그의 목소리는 힘이 없었다.

    나는 잠시 크라이튼 대공을 바라보았다. 혹시 크라이튼 대공이 모든 것을 알고 나를 이 자리에 부른 게 아닌가 싶은 마음에서였다.

    “제게 의뢰하실 내용이 뭔가요?”

    “내 딸을 찾아 주게.”

    크라이튼 대공의 눈에는 깊은 회한이 묻어나고 있었다.

    그의 눈을 보자마자 나는 직감했다. 크라이튼 대공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것을.

    “딸, 말입니까?”

    “그래. 이 초상화 속의 아이가 바로 내 딸일세.”

    크라이튼 대공이 내민 초상화를 확인하며 혀를 잘근 씹었다.

    초상화 속의 여자는 내가 익히 아는 사람이었다.

    단 한 순간도 잊을 수 없었고, 또 잊어서도 안 되는 사람이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초상화를 집어 들었다.

    “내 딸, 코넬리아 크라이튼. 벌써 25년이 지나 많이 바뀌었을지도 모르네만, 부탁하겠네. 꼭 딸을 찾아 주게나.”

    코넬리아 크라이튼.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었으나, 조금도 낯설지 않았다.

    14년이 넘는 세월 동안 내내 가슴속에 깊이 새겨 두었던 이름이었다.

    왜냐하면, 크라이튼 대공이 찾고자 하는 딸 코넬리아 크라이튼이 바로 내 어머니이기 때문이었다.

    “제가 알기로 코넬리아 크라이튼이 실종된 건 25년 전의 일일 텐데…… 왜 좀 더 빨리 찾으려 하지 않으셨죠?”

    평정을 찾으려 했으나 목소리가 절로 떨려 왔다.

    왜 하필이면 지금이어야 했을까?

    왜 하필이면……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14년이 흐른 후에야 찾으려는 걸까?

    나는 도저히 크라이튼 대공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집안의 명예와 사랑 중 사랑을 선택한 어머니였으나, 어머니는 할아버지한테 용서받기를 원했다.

    그래서 몇 번이나 할아버지에게 용서를 구하는 서신을 보냈지만, 끝끝내 크라이튼 대공에게서 답장은 오지 않았다.

    “찾으려고 했지. 하지만 도통 찾을 수가 없었어.”

    “찾고 싶지 않았던 건 아니고요?”

    “……뭐라?”

    “아니라면 왜 따님의 편지를 무시했습니까?”

    죽음을 앞두고 병마와 싸우던 어머니가 모든 것을 체념해 버린 그 순간을 나는 잊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눈을 감던 그 순간까지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당신은 알까?

    “편지?”

    “예, 편지요. 코넬리아 크라이튼이 틈틈이 당신에게 보낸 편지.”

    영문을 알 수 없어 하는 크라이튼 대공을 보고 있으니 더욱 화가 났다.

    얼마나 하찮게 여겼으면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걸까.

    “유감이지만, 크라이튼 대공 각하. 코넬리아 크라이튼은 죽었습니다.”

    말하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어 나는 결국 가슴속에서 요동치는 말을 꺼내었다.

    그와 동시에 크라이튼 대공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크라이튼 대공께 용서를 구하는 편지를 보내고, 보내고, 또 보내다! 끝끝내 답이 없는 아버지를 원망하며 죽었습니다. 그게 14년 전의 일이니, 제가 대공 각하의 의뢰를 받을 수는 없겠군요.”

    사실 어머니는 크라이튼 대공을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잘못이라며 내게 할아버지를 용서하라고 했다.

    그러나 크라이튼 대공, 나는 당신의 존재를 알게 된 이후로 단 한 순간도 당신을 용서할 수 없었어.

    “그럼 제가 여기 더 남아 있을 이유도 없겠네요.”

    이 이상 자리를 지키고 있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몸을 일으켰다.

    크라이튼 대공은 얼떨떨해하는 얼굴로 나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자네, 대체 정체가 뭔가? 코넬리아가 죽었다고?”

    그때였다.

    짝짝짝, 어울리지 않는 박수 소리가 응접실을 울렸다.

    “드디어 두 사람이 만났군.”

    응접실로 들어온 것은 노년의 남성이었다.

    크라이튼 대공만큼이나 비싸 보이는 정장을 입은 남자였다.

    “다니엘?”

    크라이튼 대공은 그가 누구인지 아는 눈치였다.

    “다니엘 네놈이 왜 여길……!”

    “그것보다…… 인사는 끝났나?”

    다니엘이라 불린 남자는 품에서 시가를 꺼내 입에 물었다.

    다니엘과 같이 들어온 하인이 그의 시가 끝을 조금 잘라 불을 붙여 주었다.

    다니엘이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쉬었다.

    그의 호흡을 따라 뿌연 연기가 허공에 흩어졌다.

    “아직 제대로 인사를 나누지 못했나 보군. 처음으로 보는 손녀인데 인사는 나누지 그랬어?”

    “뭐?”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이 다니엘이 말했다.

    크게 놀란 크라이튼 대공의 시선이 나에게 머물렀다. 나는 크라이튼 대공을 한 번 바라보았다가 다시 다니엘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가 어째서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건지 의아했다.

    “그게 무슨 소리냐, 다니엘? 손녀?”

    “아, 정말. 아무리 내가 대공가를 장악하고 있었다고 해도 말이지……. 자기 손녀를 못 알아보는 건 너무하지 않나? 안 그런가, 미라벨?”

    밝히지 않았음에도 다니엘은 내 이름을 알고 있었다.

    “당신 뭐야?”

    품에 숨겨 놓았던 단검을 언제든 꺼낼 수 있도록 준비를 했다.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뭐긴? 자네의 작은 할아버지지. 그래서 둘은 어디까지 얘기하던 중이었나? 아직 코넬리아의 편지까지는 얘기 안 했나?”

    명백히 놀리는 어조였다.

    “다니엘, 네가 어떻게 편지에 대해 알고 있지?”

    크라이튼 대공이 인상을 구기며 다니엘에게 물었다.

    다니엘은 어깨를 으쓱 추어올리며 이쪽으로 다가와 소파에 앉았다.

    “어떻게 알기는. 내가 그 편지를 빼돌렸으니까 알지. 정말 절절한 편지였어. 아마 형님께서 그걸 보았다면 분명 코넬리아를 저택으로 다시 들였을 거야.”

    다시 한번 숨을 크게 내쉰 다니엘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건 안 될 일이야. 그 아이는 내가 이 저택을 장악하는데 굉장히 방해가 됐거든. 알다시피 코넬리아는 당시 황태자였던 황제의 약혼녀였잖아? 사랑에 눈이 멀어 저택을 떠난 게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다니엘의 말을 들은 후에야 대략적인 상황이 그려졌다.

    그리고 어처구니없게도 나는 지금에서야 마음에 내내 쌓여 있던 응어리가 풀리는 것을 느꼈다.

    크라이튼 대공은 아예 어머니의 편지를 받지 못했던 거다.

    그 사실이 나를 안도시켰다.

    어머니의 믿음은 결국 배신당하지 않았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눈앞에 존재하는 저 다니엘이란 인간 때문에 어머니가 괴로워했을 것을 생각하니 열불이 났다.

    크라이튼 대공은 믿기지 않는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걸 털어놓는 이유가 뭐지?”

    나는 눈을 가늘게 좁히고 다니엘을 노려보았다.

    다니엘은 그런 질문을 하리라는 것을 짐작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너희 목숨이 오늘까지니까.”

    다니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병사들이 응접실 안으로 밀어닥쳤다.

    그러고는 동시에 칼을 뽑아 들었다.

    나 역시 그들이 칼을 뽑아 드는 것과 동시에 숨겨 두었던 단검을 꺼내 들었다.

    “이런, 미라벨. 무의미한 발악이란다. 그냥 얌전히 죽으렴. 그럼 고통은 덜할 테니.”

    다니엘이 말을 마치고 우리 쪽을 향해 턱짓했다.

    그걸 신호로 병사들이 거리를 좁혀 오기 시작했다.

    나는 내 뒤에 크라이튼 대공을 둔 채. 단검을 앞으로 내밀었다.

    사방으로 좁혀 오는 거리를 견제하고 있었으나, 다니엘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무의미한 발악이었다.

    방으로 밀려 들어오는 병사들을 나 하나로 물리칠 수는 없었다.

    혼자라면 도망이라도 치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도 없었다.

    “아, 아가, 나 때문에 네가 싸울 필요는 없단다. 나를 버려두고 가려무나.”

    크라이튼 대공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를 등지고 있기 때문에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크라이튼 대공이 나를 제치고 앞으로 나서려는 것을 막아선 채로 작게 심호흡했다.

    “크라이튼 대공, 하나만 말해 줘요.”

    “아가, 제발!”

    “코넬리아…… 우리 엄마를 정말로 사랑했나요?”

    “내 목숨과도 같은 아이였다. 그 아이를 미워한 적은 내 생에 단 한 번도 없었단다.”

    “그거면 됐어요.”

    나는 말을 마치고 코앞까지 다가온 병사들을 향해 단검을 휘둘렀다.

    * * *

    “……라벨.”

    물속에 침전되는 듯이 몸이 무거웠다.

    “미라벨.”

    눈물 나도록 듣고 싶었던 엄마의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그 순간 몸이 허공을 부유하는 느낌과 함께 다시 한번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미라벨!”

    “!”

    폭죽이 터지듯 갑작스럽게 찾아든 감각과 함께 눈을 떴다.

    익숙한 천장과 그리운 얼굴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왔다.

    “……엄마?”

    내 앞에 엄마가 있었다.

    “그래, 엄마야.”

    “진짜로?”

    눈앞에 보이는 것을 부정할 수 없어 나는 뚝뚝 눈물만 흘렸다.

    “그럼 진짜지. 나쁜 꿈이라도 꿨니?”

    엄마는 다정히 내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칼을 정리해 주고는 걱정이 가득 담긴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죽음의 끝에는 영원한 행복이 있다고 하던데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인 모양이었다.

    한참 엄마를 붙들고 울었다.

    마치 길을 잃은 아이가 어머니를 찾고 서럽게 울 듯이 나는 그렇게 엄마를 끌어안은 채로 오랜 시간 동안 설움을 터트렸다.

    엄마는 그런 나를 향해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단지 내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내 등을 토닥거려 주었다.

    엄마의 품에 얼굴을 파묻으니 풀 냄새가 코끝에 어렸다.

    다시는 맡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엄마의 냄새였다.

    나는 더 이상 울 수 없을 때까지 눈물을 쏟아낸 후에야 엄마에게서 떨어졌다.

    “괜찮니?”

    엄마가 내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며 물었다.

    그런 엄마의 손을 잡고 그 손에 뺨을 부볐다.

    “응. 괜찮아.”

    진짜다.

    진짜로 엄마였다.

    혹여나 순식간에 없어질 환상일까 두려워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엄마는 실재하고 있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걸까?

    의아한 마음에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그제야 나는 내가 어떻게 엄마를 앞에 두고 있는 건지 반쯤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게 뭐야?”

    마치 어린아이의 것처럼 작고 여린 손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아니, ‘마치’가 아니었다.

    내 의지대로 움직이는 이 작은 손은 분명 내 손이었다.

    헉!

    크게 숨을 들이마신 채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금 상황을 이해하려면 거울이 필요했다.

    주변을 둘러본 후에야 거실에 걸려 있는 작고 흐린 거울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황급히 거울을 향해 다가가 내 얼굴을 비추어 보았다.

    거울 속에 비친 것은 10살 남짓한 어린 여자아이였다.

    그리고 그 모습은, 어릴 적의 내 모습과 일치했다.

    “말도 안 돼…….”

    작은 손을 들어 얼굴을 매만졌다.

    거울 속 어린 나는 내가 하는 행동을 그대로 반사해 주었다.

    이는 곧 거울 속의 어린아이가 내 모습이라는 이야기였다.

    “어, 엄마. 혹시 내가 지금 몇 살이야?”

    그럴 리는 없지만, 혹시나 하는 가정을 머리에 품으며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는 별걸 다 묻는다는 얼굴로 웃음을 지었다.

    “몇 살이기는? 어제로 꼭 아홉 살이 되었잖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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