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3. (22/22)
  • 외전 3.

    차 문을 열고 내리자 도심과는 다른 한가하고도 조용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토요일인 오늘, 재경은 할아버지 기일을 맞아서 박성범과 함께 근교에 있는 납골 공원을 찾았다.

    “1년 만인데도 변함이 없네.”

    “그러게.”

    늘 캐주얼하게 입고 다니는 박성범도 오늘은 깔끔한 정장 차림이었다. 이내 두 사람은 저만치 보이는 건물을 향해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여기서 기다릴게.”

    재경은 고개를 끄덕인 뒤에 혼자 안쪽으로 들어갔다. 이내 한 곳에서 걸음이 멈췄다.

    변하지 않은 것은 또 있었다. 유골함과 함께 놓인 액자 속에서 할아버지는 환하게 웃고 계셨다.

    매해 기일 때마다 재경은 납골 공원을 찾았고, 할아버지의 사진을 바라보면서 옛 추억들을 곱씹어 보곤 했다. 마지막을 지키지 못했던 것은 지금도 상처로 남아 있지만, 그래도 이제는 많이 아물었다. 어릴 때 할아버지와 함께 군고구마를 만들어 먹다가 냄비를 홀랑 태운 일이나, 바퀴벌레를 잡으려고 둘둘 만 신문지로 방바닥을 마구 때리던 추억 등을 떠올리면서 조금이나마 웃을 수 있을 정도로.

    한동안 그렇게 서 있었던 것 같다. 문득 들리는 소리에 고갤 돌리자 다른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오는 게 보였다. 재경은 다시금 사진 속 할아버지를 바라봤다.

    ‘……다음에 또 뵈러 올게요.’

    사진 속 할아버지는 여전히 웃는 모습이었다.

    돌아갈 때의 분위기는 조금 더 차분하고도 조용했다. 길을 따라서 조용하게 달리던 차가 신호에 걸렸다. 계속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시선을 거두면서 재경은 운을 뗐다.

    “오늘 간다고 어머니께 말씀드렸지?”

    “진작 했지. 안 그래도 좀 전에 전화 왔는데, 맛있는 거 잔뜩 해놓고 기다리는데 우리 재경이 언제 오냐고 성화시더라.”

    너스레를 떨면서 하는 대답에 재경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박성범과 만난 지도 올해로 벌써 6년째에 접어들었다. 그간 다툼이 한 번도 없었다면 거짓말이지만, 그래도 만난 시간에 비하면 놀랄 만큼 무탈한 연애를 이어 오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3년 전쯤에 박성범은 자신의 가족들에게 진지하게 만나고 있는 상대가 있음을 밝혔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녀석의 생일 때였는데, 얼마 후 ‘어머니가 널 보고 싶어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재경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만간 그런 날이 올 거라고 짐작한 까닭이었다.

    “…….”

    입가의 미소가 좀 더 깊어졌다. 처음으로 녀석의 본가를 찾아갔던 때가 떠올랐다. 어찌나 긴장이 되던지, 어머니께 인사를 드릴 때 입가가 바르르 떨릴 지경이었다. 식사 자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정도로 정신이 없었는데, 이제는 기분 좋게 웃으면서 되새길 수 있는 추억이 되었다.

    “백화점에 잠깐 들렀다 가자.”

    “엄마가 그냥 오라고 했어.”

    “그래도 빈손으로 가면 안 되지. 가뜩이나 오랜만에 찾아뵙는 건데.”

    “역시, 이래서 엄마가 나보다 널 더 좋아하시는 거 같아.”

    박성범의 목소리에도 기분 좋은 기색이 가득했다. 조금 더 편해진 분위기 속에서 계속 차를 모는데, 정적을 깨며 재경의 핸드폰이 울렸다. ‘서경훈 부팀장님’이라고 뜬 이름을 보고 재경은 얼른 전화를 받았다.

    “예, 부팀장님.”

    - 여보세요? 재경 씨 잠깐 통화 가능해?

    “예. 말씀하세요.”

    - 다름이 아니라, 오늘 부산에서 포럼 열리는 거 알지?

    “그럼요.”

    국제 에너지 연구기관에 소속된 각국의 연구원들이 2년에 한 번씩 모이는 모임이 있는데, 올해는 부산에서 열리게 됐다. 포럼 주제에 맞춰 글로벌 전략 연구팀이 대표로 참석하게 돼서, 재경은 팀장을 필두로 한 직원들과 함께 한 달 가까이 자료를 준비하면서 바쁜 시간을 보냈다.

    - 좀 전에 팀장님 와이프한테 전화가 왔는데, 팀장님이 지금 병원 응급실에 계신다네.

    그 말에 재경은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응급실이요?”

    - 갑자기 숨도 못 쉬고 괴로워하셔서 119를 불렀나 봐. 병원에 갔더니 급성 위궤양 진단이 나왔대.

    역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부쩍 명치끝이 타는 것처럼 아프다고 해서 팀원들이 몇 번이나 병원에 가라고 말씀드렸었다. 포럼 끝나면 가보겠다고 한사코 버티시더니 기어이 탈이 난 모양이었다.

    “팀장님은 괜찮으시대요?”

    - 어지럼증 때문에 제대로 앉지도 못하신대. 그런데도 부산에 가야 된다고 고집을 부리셔서, 할 수 없이 나한테 연락을 하셨다 하더라고.

    “그러면…….”

    - 어차피 팀장님이랑 나랑 둘이 갈 예정이었으니까 내가 발표해야지. 그래서 말인데, 혹시 재경 씨가 나랑 같이 가줄 수 있겠어? 알겠지만 혼자서는 무리라서……. 대외비용은 물론 연구소에서 다 지불할 거야. 기차는 팀장님 자리에 앉아서 가면 되고.

    재경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약속이 없으면 대번에 가겠다고 했겠지만, 지금 그는 박성범과 함께 오랜만에 어머니를 뵈러 가는 길이었다. 하지만 사정을 듣고도 외면할 수가 없어서, 짧은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그럼 제가 갈게요. 몇 시까지 어디로 가면 돼요?”

    - 어디 보자, 지금이 12시니까 2시까지 서울역으로 오면 될 거 같은데. 가능해?

    재경은 퍼뜩 내비게이션을 확인했다. 곧바로 집에 가서 준비하면 아슬아슬하긴 해도 늦지는 않을 것 같았다.

    “네. 괜찮을 거 같아요.”

    - 다행이네. 그럼 좀 이따 봐.

    고맙다는 인사를 끝으로 전화가 끊겼다. 그와 동시에 박성범이 물었다.

    “무슨 일 있어?”

    “저녁에 국제 포럼이 열리는데, 팀장님이 응급실에 실려 가서 참석할 수가 없나 봐. 그래서 나한테 땜빵 좀 해달라고 부탁하시네.”

    “그럼 네가 발표하는 거야?”

    “아니. 발표는 부팀장님이 하고, 난 보조 역할만 하면 돼.”

    “……그래?”

    안 가면 안 되냐는 말이 입안을 맴돌았지만, 박성범은 옅은 한숨으로 흘려보내고 말았다. 포럼 준비 때문에 근래 재경이 바빴다는 건 그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다른 이유도 아니고 책임자의 갑작스러운 건강 문제 때문에 그렇다고 하니 이해해 줄 수밖에 없었다.

    아쉬운 마음을 갈무리하면서 박성범은 부러 가벼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애인이 유능한 게 이럴 땐 슬프네. 그럼 일단 집으로 갈까?”

    “그래야 할 거 같아. 미안해.”

    “미안하면 갔다 와서 뽀뽀 찐하게 해줘. 참, 엄마한테도 전화 드려야겠다.”

    “내가 할게.”

    재경은 곧장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며칠 전에 통화하면서 ‘오늘 찾아뵙겠다’고 말씀드렸을 때 무척 좋아하셨는데, 본의 아니게 약속을 어기게 돼서 어머니께도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 * *

    딩동-

    정적을 깨며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오늘 막내아들이 집에 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정 여사는 인터폰 화면도 확인하지 않고 부랴부랴 현관으로 가서 문을 열었다.

    “왔니?”

    활짝 웃으며 아들을 반긴 것도 잠시, 이내 정 여사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떠올랐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위아래로 바쁘게 움직였다. 핸섬한 아들은 대체 어디로 가고, 눈앞에 서 있는 남자는 덥수룩한 꽁지머리에 수염까지 기르고 있었다.

    “머리가 대체 왜 그래?”

    집 안으로 들어선 박성범은 씩 웃으면서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이 스타일도 잘 어울리지 않아요?”

    “잘 어울리긴. 인물 다 버려놨어.”

    가차 없는 평가가 이어졌다. 다시 봐도 영 별로였다. 남다른 체격에 하필이면 또 정장을 입고 있어서, 언뜻 보면 날건달이 따로 없었다.

    사실 두어 달 전에 봤을 때도 머리카락이 제법 길긴 했지만, ‘바빠서 그런가 보다’ 하고 내색 없이 넘어갔었다. 멋 내는 걸 좋아하는 녀석이니, 바쁜 일이 일단락되면 당연히 미용실에 갈 줄 알았다. 그런데 그새 더한 꼴로 나타난 걸 보니 이번에는 잔소리를 안 할 수가 없었다.

    “얼른 미용실부터 갔다 와.”

    하지만 박성범은 걸음을 옮기는 대신 턱을 문지르면서 대답했다.

    “일부러 기르고 있는 거예요.”

    “뭐?”

    되묻는 말을 못 들은 척하면서 박성범은 손에 든 것을 모친에게 건넸다.

    “이거, 재경이가 엄마 갖다 드리래요.”

    쇼핑백을 건네받은 정 여사는 안을 슬쩍 들여다봤다. 즐겨 먹는 쿠키 브랜드 명이 찍혀 있는 상자가 보였고, 순간적으로 마음이 사르르 녹으면서 미소가 나왔다. 선물이 마음에 든 것도 있지만, 좋아하는 걸 기억하고 챙겨주는 마음 씀씀이가 고마웠다.

    “출장 때문에 바쁠 텐데 언제 이런 걸 샀대. 그러고 보니 재경이는 잘 갔어?”

    “네. 역 앞에 내려주고 오는 길이에요.”

    “잘했어.”

    “오늘 같이 못 와서 죄송하다고 전해달래요.”

    “죄송하긴. 주말인데 쉬지도 못하고 갑자기 부산까지 가게 돼서 안쓰럽지.”

    금세 표정이 달라진 모친을 보면서 박성범은 속으로 빙긋이 웃었다. 재경이 이야기를 꺼내면 금세 그쪽으로 화제가 흘러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예상대로…….

    “얼른 미용실 갔다 와.”

    예상대로가 아니었다. 또다시 이어진 엄명에 박성범은 습관처럼 뒷목을 주무르면서 대답했다.

    “말씀드렸잖아요. 진짜 일부러 기르는 거예요.”

    변명 같지만 사실이었다. 근래 머리카락을 기르고 다소 지저분한 몰골로 다니는 이유는, 웃기지만 인기 때문이었다.

    몇 개월 전, 최정열의 지속적이고도 끈질긴 권유로 박성범은 종편 채널 예능에 출연한 적이 있었다. 시청자들이 보낸 사연을 골라서 그들이 의뢰하는 분위기로 곡을 만드는 프로그램이었는데, 말이 좋아서 출연이지 가수가 녹음하러 왔을 때 프로듀싱하는 장면이 몇 컷 들어간 게 다였다.

    그런데 방송이 나간 이후로 생각지도 못한 유명세를 치르게 됐다. 여기저기서 연락이 오는가 하면, 잘 하지도 않는 sns 팔로워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덕분에 박성범은 방송의 파급력이 얼마나 큰지를 원치 않아도 알게 됐다. 얼굴을 알아보고 말을 거는 사람도 있고, 대시를 받는 일도 부쩍 많아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름을 검색하면 언제 찍었는지도 모르는 사진과 생일, 학력 등 개인 정보까지 뜨는 것을 알고는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원치 않는 관심은 몹시도 번거롭고 성가셨다. 머리카락이라도 길러보기로 결심한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재경과 함께 걸어가는데 누군가가 허락도 없이 사진을 찍는 일이 발생했다. 박성범은 드물게 화를 내며 당장 사진을 지워줄 것을 요구했고,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방법을 모색했다.

    그 결과 생각해낸 것이 머리카락과 수염을 길러보는 거였다. 얼굴이나 몸을 바꿀 수는 없으니 스타일에 변화를 줘 보기로 했는데, 웃기게도 효과는 생각보다 좋았다.

    고작 헤어스타일만 바꾸고 옷을 좀 촌스럽게 입었을 뿐인데 알아보는 사람이 눈에 띄게 줄었다. 그러기만 하면 다행이었다. 밤중에 편의점이라도 갈 일이 있으면, 맞은편에서 오던 사람들이 움찔하며 도망치듯 빠르게 걸어가는 일이 더러 있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박성범은 만족했고, 재경도 이해해주었다. 혹시나 마음에 들지 않을까 봐 몇 번이고 진짜 괜찮냐고 물어봤는데, 그때마다 재경은 네가 편한 대로 하라며 쿨하게 대답했다. 겉모습이 어떻든지 간에 내가 아는 너는 변함없다는 예쁜 말까지 덧붙이면서.

    재경의 허락도 받았겠다, 또 박성범은 달라진 스타일이 생각보다 더 마음에 들었다. 줄곧 깔끔하고 댄디한 스타일만 고수했는데, 거친 느낌의 스타일도 제법 잘 어울리는 듯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아닌 모양이었다. 이러저러해서 스타일에 변화를 줬다고 설명드렸지만, 여전히 지금 스타일이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실제로도 정 여사는 암만 봐도 아들의 변한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다못해 저 산도적 같은 수염만이라도 어떻게 좀 했으면 싶었다.

    하지만 막내아들은 은근히 고집이 있는 편이었기에 그냥 얘기하면 한 귀로 듣고 흘릴 게 뻔했다. 그래서 정 여사는 효과가 직방인 마법의 단어를 입에 담았다.

    “재경이는 뭐라고 안 해?”

    “네. 잘 어울린다고 했어요.”

    “속이 깊으니까 그렇지. 너 배 아파서 낳은 엄마가 봐도 영 아닌데, 재경이라고 지금 그 모습이 진짜 마음에 들겠어?”

    순간이나마 아들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정 여사는 놓치지 않았다. 이내 옅은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그럴 생각으로 말을 꺼내긴 했지만, 재경이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이렇게 티 나게 반응할 줄이야.

    이내 박성범의 시선이 모친을 향했다.

    “……그렇게 별로예요?”

    “솔직히 말하면 그래. 그러니까 얼른 가서 머리라도 좀 다듬고 와. 깔끔하게 변한 모습 보면 재경이도 좋아할걸?”

    박성범은 잠시 후에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수염이야 길을 들여서 나름 깔끔하게 기르고 있으니 그렇다 쳐도, 머리카락은 멋대로 뻗친 게 좀 지저분해 보이긴 했다.

    남들이야 자신을 어떤 눈으로 쳐다봐도 상관없지만 재경에게는 언제나 좋은 모습만 보이고 싶었다. 나름대로 이유도 있고, 이런 스타일도 괜찮다고 하길래 진짜 그런 줄 알고 안심하고 있었는데……. 재경 못지않게 쿨한 어머니가 질색하는 걸 보니 어쩌면 재경도 사실은 별로인데 말로만 괜찮다고 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거울을 보고 있으니 확실히 예전만 못한 것 같기도 했다.

    ‘……기를 만큼 길러봤으니까.’

    이내 결심을 굳히고 뒤를 돌아봤다. 비장한 목소리가 이어진 것은 그다음이었다.

    “밥 먹고 잠깐 나갔다 올게요.”

    * * *

    재경은 밤 11시가 넘어서야 숙소로 잡은 호텔에 도착했다. 포럼은 8시쯤에 끝났지만, 늘 그렇듯 친목을 겸한 저녁 식사 자리가 이어졌다. 밥만 먹고 헤어지기엔 아쉬워서 술도 한 잔 걸치다 보니 눈 깜짝할 사이에 시간이 흘러갔다.

    호텔 로비로 들어서자마자 부팀장의 시선이 재경을 향했다. 수더분한 얼굴에 웃음을 띤 채였다.

    “오늘 진짜 고생 많았어. 재경 씨 아니었으면 어쩔 뻔했나 몰라.”

    “부팀장님이 고생하셨죠. 저야 그냥 자리만 채웠는데요, 뭘.”

    부팀장의 얼굴에 거듭 흐뭇한 표정이 떠올랐다. 황금 같은 주말에, 그것도 부산까지 출장을 오게 됐으니 툴툴거릴 법도 한데 그런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자료 요약을 도맡아 해서 발표 내용을 훤히 꿰고 있고, 타국의 연구원들과 무리 없는 의사소통까지 가능하니 고마운 마음이 안 들 수가 없었다.

    “재경 씨 많이 피곤해?”

    “아뇨, 괜찮아요.”

    “그럼 저기서 한 잔만 더 할까?”

    부팀장이 가리킨 곳은 호텔 출입문 옆에 있는 술집이었다. 작은 비즈니스호텔이라서 아침엔 조식을 제공하고 밤에는 술과 간단한 야식을 파는데, 일전에도 여기서 묵은 적이 있었기에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피곤하면 들어가서 쉬어도 돼.”

    조금 피곤하긴 해도 잠이 바로 올 것 같지는 않았다. 내일은 별다른 일정도 없으니 가볍게 한 잔씩 더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럼 맥주 한 잔씩만 더 할까요?”

    “좋지.”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아늑한 분위기가 두 사람을 반겼다. 생맥주와 간단한 안주거리를 시킨 뒤에 부팀장이 말문을 열려는데, 절묘한 타이밍으로 핸드폰이 울렸다. 잠깐 전화 좀 받겠다고 말한 다음 부팀장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 여보.”

    집에서 걸려온 전화인 모양이었다. 금세 화색이 도는 목소리를 들으면서 재경은 속으로 빙긋이 웃었다.

    마흔이 훌쩍 넘은 부팀장은 2년 전에 한 가정의 가장이 되었다. 이미 늦은 것 같다고, 딱히 결혼 생각도 없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사람이었는데……. 마찬가지로 비혼주의자였다던 아내분을 만나서 행복하게 잘 사는 걸 보니 사람마다 인연이 다 따로 있긴 한 모양이었다.

    “어. 회식은 끝났고, 재경 씨랑 둘이서 좀 더 마시러 왔어. 응. 수찬이네 들렀다가 내일 저녁에 올라가려고. 지현이는? 아빠 안 보고 싶어 해? …알았어. 당신도 얼른 자.”

    부팀장은 다정함이 듬뿍 묻어나는 목소리로 통화를 끝냈다. 이윽고 머쓱한 듯 웃으면서 시선을 마주했다.

    “재경 씨도 오래 사귄 사람 있다고 했지?”

    “네.”

    “결혼 계획은 아직 없는 거야?”

    “네. 지금 이대로도 좋아서요.”

    “그럼 서두를 필요 없지. 나만 해도 남들보다 훨씬 늦게 했고 말이야. 하하.”

    내밀어지는 잔에 대고 재경은 가볍게 제 잔을 부딪쳤다. 목을 울리자 생맥주 특유의 쌉싸름한 맛이 느껴졌다.

    이윽고 부팀장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대화를 주도했다. 처음에만 애인에 대한 질문을 잠깐 했을 뿐, 이후로는 그쪽과 관련된 언급은 일절 없었다. 그래서 재경은 부팀장이 좋았다. 부하 직원에게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행여나 부담감을 느낄까 봐 일부러 터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백업을 해놨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한 달 꼬박 작업한 거 다 날릴 뻔했다니까? 그때 생각만 하면 지금도 간담이 서늘해.”

    부팀장은 수더분한 인상만큼이나 대화도 자연스럽고 편하게 이끌 줄 알았다. 덕분에 재경의 입에서 간간이 웃음이 흘러나왔다. 가벼운 술 한 잔과 함께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시간이 눈 깜짝할 새에 흘러갔다. 별생각 없이 핸드폰을 확인한 부팀장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이고, 벌써 12시가 넘었네. 재경 씨 피곤하지?”

    그렇게 묻는 부팀장의 얼굴이 일견 피곤해 보였기에, 재경은 잔을 내려놓으면서 대답했다.

    “슬슬 일어날까요?”

    “그럴까?”

    객실 복도에서 헤어진 뒤에 재경은 카드 키로 문을 열었다. 모든 일정이 무사히 끝났다는 안도감 때문인지 뒤늦게 졸음이 밀려왔다. 씻고 나와서 곧바로 침대에 몸을 뉘었다. 하지만 문득 든 생각에 핸드폰을 들고 문자를 보냈다.

    [자?]

    그러자 곧바로 답장이 왔다.

    [아니 미드보고 있어>_< 아직마시는중이야?]

    [좀전에 방으로 올라왔어. 침대에 누워 있어]

    [고생했어 전화할게]

    재경은 이윽고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어.”

    - 고생 많았어. 피곤하지?

    특유의 따스함이 담긴 목소리가 위로하듯 귓가에 닿았다. 목소리만 들어도 박성범이 지금 어떤 표정으로 통화를 하고 있을지 훤히 그려졌다.

    “이제 잘 건데 뭐. 너도 너무 늦게까지 있지 말고 일찍 자.”

    - 이것만 보고 잘게. 내일 2시쯤에 도착하는 거 맞지?

    “어. 근데 진짜 안 나와도 돼.”

    - 안 가면 삐질 거면서.

    웃음이 담긴 목소리에 재경도 픽 웃고 말았다. 이내 작은 하품이 흘러나왔다. 소리 죽여 했지만 박성범의 귀에 들린 모양이었다.

    - 피곤하겠다. 얼른 자.

    “어. 그럼 내일 봐.”

    - 사랑해.

    “나도.”

    먼저 끊을 때까지 기다릴 것을 알기에 재경이 먼저 전화를 끊었다. 눈을 감고 잠을 청한 것도 잠시, 재경은 다시금 핸드폰을 켜고 기차 예약 앱을 눌렀다. 혹시나 더 이른 시간에 빈 좌석이 남아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 * *

    딩동-

    초인종을 누르고 잠깐 기다리자 현관문이 열렸다. 이내 정 여사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어서 와 재경아.”

    재경은 구두를 벗고 거실로 들어갔다.

    “어제 못 와서 죄송해요.”

    “죄송하긴. 모처럼 쉬는 날인데 갑자기 불려가서 네가 힘들었지. 아직 식전이지?”

    “기차 타기 전에 간단하게 먹었어요. 아버지는요?”

    “친구들이랑 낚시 갔는데 점심만 먹고 바로 올 거래. 성범인 한밤중일 거야.”

    예상대로의 말에 재경은 빙긋이 웃었다.

    부팀장이 오늘 어디 들를 곳이 있다고 해서 올 때는 혼자 올라왔다. 원래 오후에 여유 있게 도착하는 걸로 예약했지만, 어젯밤에 시간을 변경해서 출발 전에 어머니께만 살짝 귀띔을 드린 차였다.

    “그럼 올라가 볼게요.”

    “그래. 성범이 누워 있으면 발로 밀어내고 허리 좀 펴. 이따 점심 같이 먹자.”

    고개를 살짝 끄덕여 보인 뒤에 재경은 2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올랐다.

    똑똑- 예의상 노크했지만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조용히 방문을 열자 박성범이 세상모르고 자는 모습이 보였다.

    “어?”

    그러다 곧 이상한 점을 눈치챘다. 벽을 보고 옆으로 누워 있는 녀석의 뒷모습이 딱 봐도 어제와 달랐다. 뒷덜미가 시원하게 드러난 데다 머리카락 색깔도 짙은 갈색에서 검은색으로 변해 있었다.

    등 뒤로 문을 닫은 뒤에 재경은 조심조심 침대 쪽으로 다가갔다. 잘못 본 게 아니었다. 가까이에서 보니 그간 제법 공들여서 기르던 수염도 온데간데없었다.

    그대로 계속 자는 모습을 바라봤다. 시선이 따가울 법도 한데, 꿈쩍도 하지 않고 잘만 잔다. 재경은 어머니 말씀대로 박성범을 발로 밀거나 깨우는 대신 책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세월의 흐름이 느껴지는 판타지 소설 시리즈가 칸칸이 꽂혀 있고, 제일 아래 칸에는 졸업 앨범들이 옆으로 누워 있었다.

    재경이 선택한 것은 책이 아닌 졸업 앨범이었다. 초등학교 앨범부터 꺼내서 차근차근 페이지를 넘기다 보니 귀티가 나면서도 장난기가 다분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저만치에서 문득 핸드폰 알람음이 울렸다. 박성범이 재경을 데리러 가려고 잠들기 전에 맞춰 놓은 거였다.

    벨소리는 금세 사라졌다. 더듬더듬 알람을 끄더니 끄응, 하고 베개에 얼굴을 묻는 모습을 보고 재경은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일어났어?”

    “……!”

    박성범의 등이 흠칫 굳었다. 이내 고개를 번쩍 들고는 놀란 표정으로 뒤를 돌아봤다.

    “언제 왔어?”

    “좀 전에.”

    그 말에 박성범은 서둘러 핸드폰을 켜고 시간을 확인했다.

    “2시쯤에 도착한다고 안 했어?”

    “더 일찍 출발하는 기차가 있길래 그거 타고 왔어.”

    “그럼 출발하기 전에 연락하지 그랬어.”

    “안 봐도 자고 있을 거 같아서.”

    웃으며 하는 말에 박성범은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재경의 짐작대로 밤새 연달아서 드라마를 보다가 새벽 5시가 넘어서 잠자리에 들었다.

    “근데 머리는 어떻게 된 거야? 언제 잘랐어?”

    “어제 오후에. 좀 지저분해 보여서.”

    자연스레 오른손이 뒷목으로 올라갔다. 몇 달간 꽁지머리를 하고 있었던 탓인지 훤해진 목덜미가 아직은 좀 허전하게 느껴졌다. 이내 박성범은 기대감이 담긴 눈빛으로 물었다.

    “어때? 괜찮아?”

    “어. 깔끔해서 좋네.”

    “머리 길었을 때보다 이게 더 나아?”

    “그것도 괜찮고, 이것도 괜찮고.”

    모범적인 대답이었지만 박성범은 만족스럽지 못했다. 양반다리를 하면서 퍽 진지한 어조로 다시금 물었다.

    “그래도 더 마음에 드는 스타일이 있을 거 아냐.”

    “둘 다 괜찮다니까.”

    “진짜?”

    “진짜. 꼭 하나만 골라야 되는 이유라도 있어?”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말끝을 흐리면서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아무래도 이번에는 어머니의 말이 틀린 듯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넘어가지 말고 그냥 꿋꿋이 버틸걸.

    어쨌거나 재경이 조금이라도 일찍 와서 좋기는 했다. 박성범은 뒤늦게 목덜미에서 손을 떼며 말했다.

    “이따 데이트하자.”

    “데이트? 집에 안 있고?”

    “얼굴 보여드렸으니까 됐지. 너, 엄마가 해주는 밥 좋아하니까 점심만 먹고 나가자.”

    이어서 박성범은 씻고 오겠다면서 몸을 일으켰다. 기지개를 쭉 켜고 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재경은 살짝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래도 그렇게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 탓이었다.

    * * *

    재경의 예상은 정확했다. 식사를 끝낸 뒤에 박성범이 ‘이제 가보겠다’는 말을 꺼내자, 정 여사는 대번에 눈을 흘기면서 아들을 나무랐다.

    재경은 서둘러 중재에 나섰고, 거실에서 후식 타임이 이어졌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데 현관문이 열리면서 박성범의 아버지가 귀가했다. 그는 아들들을 보자마자 몹시 반가워하면서 차례로 가볍게 포옹했고, 그대로 가세해서 이야기꽃을 피웠다.

    덕분에 두어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어머니가 화장실에 간 틈을 타서 박성범은 아버지에게 이제 그만 가보겠다는 말을 꺼냈다. 아버지도 서운해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저녁 먹고 좀 더 놀다 가라는 것을, 다음에 또 찾아뵙겠다고 말씀드린 뒤에야 간신히 집을 나설 수 있었다.

    “해 다 졌다.”

    시동을 걸면서 툴툴대는 말에 재경은 웃음을 흘렸다. 말만 이렇게 할 뿐, 실상은 녀석이 부모님들께 얼마나 고마워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남들과 다른 성향을 지닌 아들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여주는 부모님이 있다는 것은 정말 큰 축복이었다.

    “배는 안 고파?”

    “어. 이것저것 자꾸 먹었더니 완전 배불러.”

    담소를 나누는 동안 어머니는 자꾸만 간식거리를 내왔다. 과일이 떨어진다 싶으면 새로 내오고, 쿠키를 다 먹어간다 싶으면 끝없는 리필이 이어졌다. 이번에 새로 사셨다는 홍차도 서너 잔이나 마셨더니 배가 꺼질 틈이 없었다.

    저녁은 나중에 먹기로 하고, 일단 박성범은 영화관으로 차를 몰았다. 오늘 볼 장르는 로맨스였다. 모 프로덕션 팀의 요청으로 영화 OST 작업에 참여한 적이 있는데, 며칠 전에 그 영화가 개봉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둘 다 로맨스 영화는 딱히 좋아하지 않지만, 그래도 자신의 작업물이 들어가 있으니 한 번 보기로 했다.

    차는 거침없이 도로 위를 달렸다. 정면을 바라보고 있던 재경은 슬쩍 고갤 돌려서 옆을 쳐다봤다.

    솔직히 말하면 처음이 아니었다. 무념무상으로 앞을 보거나 옆을 보고 있다가도, 한 번씩 저도 모르게 운전석 쪽으로 시선이 움직였다.

    이유는 박성범 때문이었다. 장발과 수염을 길렀을 때의 모습이 어지간히 머릿속에 깊이 박혔는지, 하루아침에 확 달라진 모습이 지금도 낯설게 느껴졌다. 그리고 보면 볼수록 가슴이 묘하게 두근거렸다. 저렇게 머리카락을 짧게 자른 건 정말 오랜만이기도 하고, 학교 다닐 때의 느낌이 나는 것도 같았다.

    잠시 후, 차는 야외 주차장으로 진입했다. 영업하는 일요일이라 그런지 백화점은 몹시도 북적였다. 영화관이 있는 층은 더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바글대는 사람들을 보고 재경은 혀를 내둘렀다. 박성범도 같은 생각인지 질린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사람 완전 많네.”

    “그러게. 몇 시 영화야?”

    “6시 10분 거. 20분 정도 남았네.”

    이어서 박성범은 재경을 바라보면서 물었다.

    “팝콘 먹을 거지?”

    “아직 배부른데…….”

    “그래도 영화관에 오면 먹어주는 게 예의지. 갔다 올게.”

    이내 박성범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재경의 시선이 그의 뒷모습을 좇았다. 짧게 친 검은색 머리카락과 훤하게 드러난 목덜미가 지금 봐도 여전히 어색했다. 멀리 떨어져서 보니 모르는 사람 같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데 재경만 그쪽을 보는 것이 아니었다. 박성범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도 덩달아 움직였다. 덕분에 재경은 새삼 ‘보이는 것’의 위력을 깨달았다. 꽁지머리에 수염을 길렀을 땐 흠칫 놀라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는데, 다들 그때와는 전혀 다른 반응이었다.

    재경은 계속 시선을 고정했다. 꿀이 발려져 있는 것도 아닌데 어쩐 일인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주문을 하고 옆으로 한 걸음 물러선 녀석에게 웬 여자가 다가가는 것이 보였다.

    저도 모르게 설핏 표정이 굳었다. 대화는 들리지 않지만 딱 봐도 감이 왔다. 몇 달 전만 해도 더러 있는 일이었다.

    “……!”

    그때였다. 박성범이 갑자기 이쪽을 쳐다보는 바람에 재경은 화들짝 놀라며 시선을 피했다. 표정이 좀 더 굳어졌다. 몰래 훔쳐보다가 걸린 듯한 기분이 든 탓이었다.

    * * *

    걷다 보니 주차된 차 앞에 이르렀다. 벨트를 당겨 멘 뒤에 박성범이 핸들을 돌리면서 말했다.

    “별 기대 안 했는데 생각보다 괜찮더라.”

    “그러게.”

    재경은 찰떡같이 알아듣고 대답했다. 영화가 끝나고 나니 시간이 애매해서 위층 식당가로 갔는데, 결과적으로는 탁월한 선택이었다. 재경의 입맛에도 생각보다 음식들이 잘 맞았다.

    이윽고 소리 없는 하품이 흘러나왔다. 간밤에 잠을 좀 설치기도 했고, 주말인데도 제대로 못 쉬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근데 말이야.”

    불쑥 들리는 목소리에 재경은 고개를 돌렸다. 정면을 응시하는 박성범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는 게 보였다.

    “너, 오늘 계속 나 쳐다보더라?”

    “……!”

    “실컷 보라고 말은 안 했는데, 얼굴에 구멍 뚫리는 줄 알았어.”

    목소리에 옅은 웃음기가 묻어났다. 재경도 픽 웃으며 뒤늦게 대답했다.

    “마음대로 생각해. 착각은 자유니까.”

    “에이, 그렇게 말하면 섭섭하지. 아까 영화관에서 눈 마주쳤을 때 후다닥 피하는 거 다 봤는데.”

    웬일로 안 놀리고 그냥 넘어가나 했다. 입을 열수록 불리해질 것 같아서 재경은 자체적으로 묵비권을 행사했다. 잠시 후에 박성범이 묻는 말이 이어졌다.

    “다시 반했어? 응?”

    대답을 재촉하듯 집요하게도 계속 물어본다. 설핏 웃음이 나왔다. 이럴 때 보면 처음 연애할 때 풋풋하면서도 장난기 많던 모습들이 떠오르곤 했다.

    잠깐 고민하던 재경은 모처럼 립 서비스를 해주었다.

    “원래부터 반했는데 새삼스레.”

    “역시, 그럴 줄 알았어.”

    뻔뻔한 대답에 재경은 웃으면서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잠시 후에 의아한 표정이 떠올랐다. 원래라면 좌회전 신호를 기다려야 하는 곳인데, 박성범은 멈추는 대신 그대로 직진을 했다.

    “뒷길로 가려고?”

    “아니. 잠깐 들를 데가 있어.”

    “지금?”

    “응. 지금 당장.”

    “나 내일 출근해야 돼.”

    “알아. 30분… 아니 한 시간 정도만 투자하면 돼.”

    어디냐고 물어봤지만 박성범은 가보면 안다면서 대답을 아꼈다.

    15분 정도 더 달린 끝에 마침내 차가 세워졌다. 시동을 끄자 캄캄한 어둠이 찾아왔다. 주변에 그 흔한 가로등 하나 없었다. 그나마 달이 밝은 덕분에 차 안의 광경만 어렴풋이 인지할 수 있었다.

    “여긴 어디야?”

    그러자 달칵 하고 벨트가 풀리는 소리와 함께 박성범이 대답했다.

    “카섹 명소로 소문난 곳.”

    순간 재경은 제 귀를 의심했다. 뭐? 하고 되물으려는 찰나, 박성범이 조수석 쪽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벨트가 풀림과 동시에 멀쩡하던 좌석이 갑자기 뒤로 젖혀졌다.

    “뭐야?”

    놀라서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박성범이 한발 더 빨랐다. 그는 좌석을 젖히자마자 날렵하게 재경의 몸 위에 올라탔다. 아래를 내려다보는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장난스럽게 반짝였다.

    “태성이가 강력 추천해줬어. 우리 아직 카섹은 안 해봤잖아.”

    몇 번 위기가 있긴 했지만, 재경이 결사반대한 탓에 차에서 끝까지 한 적은 없었다. 근래엔 딱히 그런 낌새가 없어서 아예 생각도 안 하고 있었다.

    “잠ㄲ…… 으읍!”

    방심의 대가는 컸다. 말하려는 틈을 타서 박성범이 그대로 입술을 겹쳤다. 능숙하게 혀를 밀어 넣고 키스하면서 손으로는 재경의 바지 벨트를 풀었다.

    “야, 잠깐…, 우읍…!”

    재경이 버둥거리면서 밀어냈지만 단단한 몸은 꿈쩍도 하질 않았다. 속옷 안으로 파고든 손이 거침없이 성기를 주물렀다.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몸은 그렇지 않았다. 한 사람에게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탓에, 금세 흥분해서 찔끔찔끔 선액을 흘려댔다.

    “하아…….”

    타액이 넘나드는 깊은 키스를 한 뒤에 마침내 입술이 떨어졌다. 더는 밀어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재경은 가쁜 숨을 헐떡이면서 물었다.

    “진짜 여기서 할 거야?”

    “당연하지.”

    재경의 셔츠를 끌어 올린 박성범이 그대로 유두를 입에 물었다. 재경은 흠칫 놀라며 몸을 굳혔다. 안 된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마치 머릿속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회음부를 간질이거나 유두를 잘근대며 깨무는 애무가 이어졌다.

    그때마다 아찔한 신음이 멋대로 흘러나왔다. 쾌락과 이성 사이에서 안절부절못하던 재경은 잠깐 박성범의 입술이 떨어진 틈을 타서 두 손으로 그의 입을 막았다. 금세 손목을 붙잡는 뜨거운 체온을 느끼고 서둘러 말했다.

    “누가 신고하는 거 아냐?”

    “괜찮아. 밖에선 절대 안 보여.”

    “그게 아니라…….”

    “아니면?”

    “……혹시라도 누가 지나가는데, 차가 흔들리면 이상하게 생각할 거 아냐.”

    오랜만에 재경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차 안이 어두워서 다행이라고 생각한 것도 잠시, 이내 웃음을 참듯 나직한 목소리로 하는 말이 들렸다.

    “흔들릴 정도로 안을 거라는 거, 알고 있나 보네?”

    “……!”

    “걱정하지 마. 올 때 보니까 아무도 없었어.”

    박성범은 다시금 입술을 겹치면서 재경의 성기를 손에 쥐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성이 점점 옅어져갔다. 일말의 불안함이 남아 있긴 하지만, 녀석이 괜찮다고 했으니 괜찮겠지, 하는 막연한 믿음이 들었다.

    잠시 후, 재경은 못 이기는 척 박성범의 목에 팔을 둘렀다. 변함없이 뜨겁고 진한 키스를 나누면서, 아까부터 계속 시선을 잡아끌던 짧은 뒷머리를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밝게 빛나던 달이 구름 뒤로 천천히 몸을 가렸다. 연인끼리 뜨거운 밀정을 나누기에 더없이 좋은 밤이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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