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
재경은 거스름돈을 챙겨 받은 뒤에 매점 밖으로 나왔다. 손에는 검은색 볼펜 하나가 들려 있었다. 오후가 되니 하품이 자꾸 나와서 잠도 깰 겸 겸사겸사 바람을 쐬러 나온 거였다.
열람실로 직행하는 대신 근처에 있는 자판기로 향했다. 밀크커피가 내려오길 기다리는데 주머니 속 핸드폰이 웅웅거리며 울렸다. 폰을 꺼내서 확인해보니 박성범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
“어.”
- 나야. 이제 출발하려고.
“수고했어. 도착하면 다시 전화해.”
- 응. 이따 봐.
전화를 끊은 재경은 뒤늦게 종이컵을 꺼내 들었다.
일주일 전쯤 깁스를 푼 박성범은 또다시 열심히 작업실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졸업 후에도 계속 작곡 쪽으로 가기로 결심했다는 말에 재경은 고개를 끄덕였고, 재경 또한 인강을 듣고 다음 학기 졸업을 앞둔 동기들끼리 스터디도 하면서 계속 착실하게 취업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오늘은 박성범이 오랜만에 학교에 들르기로 했다. 과사에서 연락이 왔기 때문인데, 오면 만나서 같이 저녁을 먹기로 약속한 터였다.
커피를 다 마신 뒤에 일단 재경은 열람실로 돌아갔다. 앉자마자 펜을 들었지만, 저도 모르게 자꾸만 손목시계로 시선이 갔다.
그도 그럴 것이, 한집에 살아도 근래엔 얼굴 보기가 쉽지 않았다. 박성범이 밤 작업을 선호하는 탓에 서로 활동하는 시간대가 맞지 않기 때문이었다. 아침에 눈 뜨면 박성범이 자신을 꼭 껴안은 채 자고 있고, 아침을 먹는 동안 잠깐 얼굴을 본 뒤에 제가 먼저 집을 나서는 패턴이 계속 반복됐다. 물론 주말에는 웬만하면 함께 시간을 보내지만, 어쨌거나 모처럼 학교에서 만난다고 생각하니 괜히 가슴이 설렜다.
잠시 후, 또 한 번 핸드폰이 진동했다. 문자를 확인한 재경은 얼른 가방을 챙겨 들고 일어섰다.
1층 로비에 도착하자 마침 박성범이 중앙 출입문을 열고 들어오는 게 보였다. 이쪽을 봤는지 금세 활짝 웃으면서 빠르게 다가왔다.
“공부 열심히 했어?”
“당연하지. 근데 생각보다 빨리 왔네.”
“늦을까 봐 열심히 밟았지. 가자.”
곧 나란히 길을 걸으면서 재경은 뒤늦게 물었다.
“과사에선 무슨 일로 연락이 온 거야?”
“잡지 인쇄한 거 나왔다고 하나 받아 가래.”
“벌써 나왔대?”
“응.”
두 사람이 다니는 대학은 학기 초마다 교내에서 자체적으로 발행한 잡지를 배부했는데, 표지 모델은 당연히 재학생들이었다. 박성범은 편집부 부장인 후배의 부탁 때문에 남자 모델을 하게 됐다. 사실 말이 좋아서 부탁이지,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집요하다 싶을 정도로 계속 연락이 온 데다 옛날에 그룹 과제할 때 도움을 받았던 것까지 들먹이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승낙한 거였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금세 경영관에 도착했다. 박성범은 가볍게 노크한 뒤에 학과 사무실 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왔어?”
조교가 반갑게 웃으며 두 사람을 맞았다. 이내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잡지를 박성범에게 건네주었다.
“사진 잘 나왔더라. 양 교수님도 지나가다 보시곤 실물보다 잘 나온 것 같다고 엄청 칭찬하셨어.”
“칭찬 아니라 욕 아니에요?”
장난스럽게 대답하면서 박성범은 뒤늦게 표지를 확인했다.
캠퍼스를 배경으로, 저와 마찬가지로 반쯤 강제로 끌려왔다는 여학생과 함께 웃고 있는 자신의 얼굴이 보였다. 이제 곧 배포될 거라고 생각하니 손발이 오글거리며 또 한 번 후회가 밀려왔지만, 제가 봐도 이상한 사진이 나오지는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내 박성범은 재경을 바라봤다. 은근한 기대가 담긴 목소리가 이어졌다.
“어때?”
“잘 나왔네.”
“좀 더 길게 칭찬해줘.”
“엄청 잘 나왔네.”
“더 길게.”
“어어어엄청 잘 나왔네.”
조교의 입에서 풋, 하는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 또 다른 무언가를 박성범에게 건넸다. 둘둘 말린 커다란 종이였다.
“이건 뭐예요?”
“네 사진만 크게 출력한 거라는데, 모델들한테 주는 게 전통이래. 거실에 걸어놓으면 부모님 좋아하시겠다.”
조교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가득했다. 전혀 고맙지 않은 목소리로 감사하다며 받는 박성범의 행동에 또 한 번 시원하고 웃고는 ‘이번엔 계절학기 수업은 안 들었냐’, ‘취업 준비는 잘하고 있냐’는 등의 질문을 이어갔다. 덕분에 두 사람은 생각보다 긴 시간이 흐른 뒤에야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나오자마자 박성범이 피곤한 듯 목을 좌우로 젖히며 말했다.
“조교 쌤은 다 좋은데 말이 너무 많은 거 같아.”
재경도 동의하는 바였다. 자신도 가끔 일이 있어서 사무실에 갈 때마다 한참을 붙잡혀 있기 일쑤였다. 그나마 오늘은 박성범이 있어서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서 있긴 했지만, 어쨌든 계속 있었던 건 마찬가지였다.
“그나저나 오랜만에 흑역사 생성이네.”
재경은 한발 늦게 깨닫곤 웃음을 흘렸다. 손에 든 전리품을 내려다보는 박성범의 표정이 복잡 미묘했다.
“다른 애들은 하고 싶어도 못 한다던데, 재능기부 했다고 생각해. 다음에 부모님 댁 가면 거실에 꼭 붙여놓고.”
“그럴까?”
언제 웃었냐는 듯 재경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진짜 붙여놓게? 라고 묻자 박성범이 입가를 올리며 씩 웃었다.
“내가 봐도 괜찮게 나오긴 했더라고.”
당연히 버릴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나르시시즘이 있나? 문득 든 생각에 피식 웃으며 계단을 내려가는데, 누군가가 층계참을 돌면서 위로 올라왔다. 김성욱이었다.
“오올, 우리 학교 얼굴 마담!”
눈이 마주치자마자 김성욱은 낄낄대며 폭소했다. 이유는 뻔했다. 손에 들려 있는 결과물을 김성욱도 본 모양이었다. 박성범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학교엔 어쩐 일이야?”
“오늘 신입생 환영회 있는 날이라길래 애들 보러 왔지.”
재경은 속으로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이제 곧 4학년이니 일선에서 물러설 법도 한데, 하여간 모임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녀석다웠다.
“니들도 같이 가자. 지금 과방에 있대.”
“난 됐어. 너나 갔다 와.”
재경이 가볍게 사양했지만, 김성욱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두 사람의 어깨에 각각 팔을 걸쳤다.
“가자, 가자. 온 김에 얼굴도 익히고 앞으로 잘 지내면 좋잖아.”
그대로 연행하듯 이끄는 바람에 재경은 마지못해 걸음을 옮겼다. 과방 문을 열자 낯이 익은 3학년들이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와, 형님들 오랜만이네요.”
“안녕하세요.”
다른 사람들도 덩달아 꾸벅하며 어색한 인사를 건넸다. 묘하게 앳된 티가 남아 있는 것만 봐도 신입생 느낌이 풀풀 났다.
“안녕, 얘들아. 난 xx학번 김성욱이라고 해. 이쪽은 같은 학번인 박성범, 이재경.”
알아서 소개를 마친 뒤에 김성욱은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고 앉으며 3학년 후배에게 말을 걸었다.
“학교는 한 바퀴 둘러봤어?”
“네. 조별로 나갔다가 방금 들어왔어요. 아직 안 돌아온 조도 있고요.”
“그럼 이제 저녁 타임?”
“네.”
“껴도 되지?”
“당연하죠.”
재경의 입가가 또 한 번 슬며시 올라갔다. 후배들과도 어쩜 저리 죽이 잘 맞는지. 어쨌거나 바라는 대로 얼굴을 보여줬으니 박성범에게 ‘그만 가자’고 말하려는데, 김성욱이 먼저 이쪽을 돌아봤다.
“애들 이제 저녁 먹으러 간다는데 우리도 같이 가자.”
대답은 박성범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애들끼리 가는데 네가 거길 왜 껴.”
“뭐 어때! 나도 선밴데. 나 껴도 되는 거 맞지?”
냉큼 돌아보며 묻는 말에, 질문을 받은 후배가 웃으며 “그럼요.” 하고 대답했다. 그 모습을 본 박성범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 같으면 선배가 물어보는데 안 된다고 하겠냐?”
“시끄럽고, 암튼 같이 가자. 이따 양재도 온댔어.”
그러자 다른 3학년 후배들이 기다렸다는 듯 끼어들었다.
“성범 선배랑 재경 선배도 같이 가요.”
“됐어. 자리도 없을 텐데.”
“아니에요. 고깃집 통째로 예약해놔서 자리 많아요. 그리고 선배님들 가시면 없는 자리도 만들어 드려야죠.”
“크, 역시 민정이가 뭘 좀 안다니까. 갈 거지? 애들 이렇게 기대하는데.”
뭘 기대한다는 줄은 모르겠지만 선뜻 빠져나가기 어려운 분위기가 된 것 같긴 했다. 박성범은 곧 옆을 돌아보며 재경에게 물었다.
“어떡할까?”
“너는?”
“난 가도 되고, 안 가도 되고.”
“어허, 가자니까.”
귀신같이 끼어드는 목소리에 재경은 그쪽을 돌아봤다가 뒤늦게 대답했다.
“그럼 잠깐 들렀다 가자.”
이런 모임은 지금도 익숙하지 않지만, 김성욱이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후배들 앞에서 끝까지 거절하기가 좀 그랬다. 그리고 어차피 저녁도 먹긴 해야 할 터였다.
잠시 후 다른 팀도 복귀하면서 예약해 둔 식당으로 다 같이 이동했다. 인원이 많다 보니 자연히 몇 개의 무리가 만들어졌다. 박성범은 뒤쪽에서 재경과 나란히 느긋하게 걸어가는데 갑자기 조심스럽게 말을 거는 목소리가 들렸다.
“저기…….”
뒤를 돌아보자 낯선 여학생 두 명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혹시 교내 잡지에 실린 선배님 맞으세요?”
예상치 못한 질문에 박성범은 속으로 신음을 흘렸다. 벌써부터 또 하나의 흑역사가 만들어질 모양이었다.
“맞아.”
그러자 “거 봐, 내 말 맞지?” 하면서 활짝 웃더니 여학생은 오른쪽으로 나란히 걸으면서 조잘조잘 말을 이었다.
“아까 학과 사무실에 갔을 때 조교 쌤이 우리 학부 선배라면서 잡지를 보여주셨거든요. 너무 잘생기셔서 기억하고 있었어요.”
반대편에서 걷고 있던 재경은 고스란히 그 말을 듣고 있었다. 겉으로는 표정 변화가 없어도 속으로는 내심 놀라는 중이었다. 4학년 선배면 어려워할 법도 한데, 먼저 다가와서 말을 걸고 잘생겼다는 말도 서슴없이 하다니. 솔직한 건지 당돌한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좋지 않은 예감이 슬며시 들었다. 박성범을 바라보는 여학생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나는 듯한 느낌이 든 탓이었다.
걷다 보니 어느덧 목적지에 도착했다. 앞서 들어가는 일행들을 따라서 재경도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테이블엔 세팅이 미리 되어 있었다. 속속들이 채워지는 자리를 바라보다가, 어느 정도 착석이 끝났을 무렵 재경은 안쪽에 있는 빈 테이블을 발견하고 그쪽으로 걸어갔다. 당연하게도 박성범이 그 뒤를 따랐다. 잠시 후, 3학년 과대인 정민철이 다가와서 살갑게 말을 붙였다.
“선배님, 저 여기 앉아도 돼요?”
“당연하지. 내 자리 아니니까 마음껏 앉아.”
농담 섞인 대답에 정민철은 웃으면서 의자에 앉았다. 나머지 한 자리도 금세 채워지기는 마찬가지였다.
테이블마다 수다를 떠는 탓에 실내는 시끌벅적했다. 직원들이 고기 접시를 들고 나타나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환호성이 흘러나왔다.
재경은 조용히 사이다를 홀짝이면서 주변을 찬찬히 둘러봤다.
신입생 때도 참석 안 했던 신입생 환영회 자리에, 말년 병장이나 다름없는 4학년이 돼서 앉아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그리고 때늦은 아쉬움이 아주 살짝 들었다. 학과 생활도 조금만 더 열심히 할걸, 하는 생각이 든 탓이었다.
잠시 후 정민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뻔한 멘트를 장황하게 늘어놓은 다음 맥주잔을 높이 들며 ‘경영학부 파이팅’을 외쳤고, 다들 제창한 뒤에 같은 테이블 사람들끼리 잔을 부딪쳤다.
이후 본격적인 먹방 타임이 시작됐다. 박성범도 고기 몇 점을 집어먹은 다음 맞은편에 앉은 정민철을 향해서 손을 내밀었다.
“집게 줘. 이제 내가 구울게.”
“아니에요. 하늘 같은 선배님들이랑 같이 앉아 있는데 당연히 제가 구워야죠.”
넉살 좋게 하는 대답에 박성범은 픽 웃음을 흘리며 집게를 가져갔다.
“하늘은 무슨. 그래봤자 너랑 나랑 고작 한 살 차이야.”
학교에서는 한 학년 차이가 커 보일지 몰라도, 사회에 나가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실제로 박성범은 띠동갑보다 나이가 더 많은 최정열과도 친구처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분위기는 점점 무르익어갔다. 다들 어느 정도 배를 채우자 정민철은 다시 일어나서 이름 외우기 게임을 진행했다. 선배들도 예외가 없었기에 재경은 낯선 후배들의 이름과 얼굴을 열심히 매치해서 외웠다. 앞에서 걸리는 사람들이 많아서 여기까지 차례가 올지 의문이긴 했지만, 일단 한번 시작하면 끝을 보는 성격답게 열심히 머리를 썼다. 그렇게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괜히 열심히 외웠네.”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재경은 웃음을 흘렸다. 박성범도 나름 열심히 외운 모양인데, 예상대로 여기까지는 순서가 오질 않았다. 정민철이 새내기 차례만 되면 박수를 빠르게 치는 바람에 걸려든 애들이 많았다.
“그래도 오랜만에 떠들썩하니까 재밌긴 하다.”
“그러게.”
웃고 떠드는 동안 시간은 잘도 흘러갔다. 게임도 하고,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술잔도 계속 비우다 보니 처음에 비해서 훨씬 자연스러운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이런 자리에서도 각자의 성격이 드러났다. 아직 선배들을 어려워하는 후배들을 위해서, 외향적인 2, 3학년들이 자리를 옮겨가면서 잘 모르는 후배들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나 화장실 좀 갔다 올게.”
박성범이 맥주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석한 후배들도 신입생들을 찾아 떠나는 바람에 테이블엔 재경 혼자만 남게 됐다. 몇 시나 됐나 싶어 시계를 보는데, 갑자기 옆자리에 누군가가 털썩 앉는 기척이 났다. 고갤 돌려보니 김성욱의 얼굴이 보였다.
“많이 먹었음?”
“덕분에.”
“거 봐. 오길 잘했지?”
그러면서 김성욱이 무언가를 앞으로 내밀었다. 소주잔을 본 재경은 헛웃음을 흘렸다.
“아예 들고 다니냐?”
“이러면서 친해지는 거지. 자자, 한잔 가득 따라 봐.”
익살스럽게 하는 말에 재경은 픽 웃으며 소주병을 들었다. 바라는 대로 넘칠 만큼 가득 채워주자, 김성욱이 잠깐 잔을 내려놓으면서 재경이 들고 있던 병을 가져갔다.
“너도 받아.”
“난 됐어.”
“어허, 형님이 따라주신다는데 넙죽 받아야지 그러면 쓰나. 팔 아프니까 얼른 들어.”
딱 봐도 한껏 기분이 업되어 있는데, 계속 거절하면 제대로 삐져서 진상을 부릴 게 뻔했다. 재경은 애정을 담아서 김성욱의 머리통을 벅벅 문지른 뒤에 바라는 대로 소주잔을 들었다. 어차피 술배도 찼겠다, 마지막은 깔끔하게 소주로 마무리하면 될 것 같았다.
이내 폭풍 같은 수다가 이어졌다. 재경은 적당히 대꾸해주면서 소주를 마셨다. 시끄럽고 정신없긴 해도 확실히 리프레시가 되는 기분이었다.
그나저나, 시간이 꽤 흘렀는데도 박성범이 돌아오질 않았다. 식당 안을 눈으로 살펴보는데 옆에서 낄낄대며 하는 말이 들렸다.
“네 낭군님 저기 있다. 오른쪽 에어컨 앞에.”
시선을 돌리자 정말로 그쪽에서 양재현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게 보였다. 아무래도 화장실에 갔다가 나오는 길에 붙잡힌 모양이었다.
양재현도 김성욱 못지않게 대화를 좋아하는 타입이었다. 일찍 들어가기는 글렀다고 생각하는데 김성욱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여자들 보는 눈은 비슷한가 봐.”
뜬금없는 말에 재경은 옆을 쳐다봤다. 남의 잔으로 맥주를 홀짝이던 김성욱이 시선을 마주하면서 얄밉게 웃었다.
“밥 먹을 때 1학년 여자애들이랑 같이 앉았는데, 술 들어가니까 존나 수줍어하면서 물어보더라. 저기 앉은 선배님은 누구냐고.”
사실 저기 앉은 저분들은 누구냐고, 선배님이냐고 물은 거였지만, 김성욱이 듣기엔 어차피 거기서 거기인 질문이었다.
“오랜만에 추억 돋네. 대학 합격하고 처음 과방에 찾아갔을 때, 문 열리고 박성범 들어오자마자 선배들 난리 났었잖아. 그때 너도 있었나?”
“없었을걸.”
그때도 모임에 비협조적이긴 마찬가지였다. 잔을 쥔 채로 짤막하게 대답하자 김성욱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미소가 만연한 얼굴로 재경의 옆구리를 찔렀다.
“불안하지 않아? 정혜가 저러면 난 불안해서 미칠 것 같은데.”
낚으려는 의도가 다분했지만 재경은 넘어가지 않았다.
“별로.”
“진짜? 표정은 아닌 거 같은데?”
“불안할 게 뭐 있어. 어차피 내 건데.”
징글맞게 웃던 김성욱의 표정이 금세 벌레 씹은 것처럼 변했다.
“이야, 완전 잡은 물고기 취급이네.”
“맞잖아. 내 물고기.”
“……아 씨. 나 다른 데 갈래.”
김성욱은 한껏 툴툴거리면서 일어났고, 다른 테이블로 가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 또 낄낄대며 웃어대기 시작했다.
재경도 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계는 어느덧 10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화장실에 갔다 와서 이제 슬슬 집에 가야 될 것 같았다.
여전히 북적거리는 홀과 달리 화장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편하게 볼일을 본 다음 손을 씻고 나오다가, 재경은 멈칫하며 걸음을 멈췄다.
좀 전과 달리 웬 여자가 좁은 복도에 서 있었다. 쓸데없이 좋은 기억력은 이럴 때도 빛을 발했다. 기억이 맞다면, 아까 고깃집으로 오는 길에 박성범에게 말을 붙였던 신입생 여자애였다.
“이재경 선배님 맞으시죠?”
“맞아.”
짤막하게 대꾸하자 여학생의 얼굴이 조금 더 붉어졌다. 화장실로 이어지는 입구에 서 있는 것도 그렇고, 이름까지 부른 걸 보니 제가 화장실로 가는 걸 보고 일부러 따라온 듯했다.
원치 않아도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재경은 옅은 한숨을 내쉰 뒤에 입을 열었다.
“할 말 있어?”
“……네. 실례인 건 아는데, 혹시 박성범 선배님 여자친구 있으실까요?”
역시나 예상은 적중했다. 여학생은 긴 속눈썹을 자랑하듯 살짝 시선을 내리깐 채 손가락 장난을 치며 말을 이었다.
“잡지 사진 봤을 때 진짜 잘생겼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보니까 더 멋진 거예요. 이제 곧 나갈 거 같은데 갑자기 말 걸기가 그래서……. 선배님 화장실 가는 거 보고 따라왔어요. 죄송해요.”
이렇게 사람이 많은 데서 박성범에게 대뜸 다가가 말을 걸 용기는 없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러든 말든 재경이 알 바가 아니었다. 어느새 조마조마한 시선을 보내는 후배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이번에도 짧게 대답했다.
“성범이 사귀는 사람 있어.”
“아…….”
여학생의 얼굴에 금세 실망감이 번졌다. 거듭 입술을 달싹이려는 것을 보고는 재빨리 선수를 쳤다.
“더 할 말 없으면 먼저 갈게.”
그대로 빠르게 곁을 스쳐 지나갔다. 마음은 당연하게도 좋지 않았다.
사실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지금처럼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을 때, 멀리서만 봐도 박성범의 주변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가득했다. 비단 여학생들뿐만 아니라 남자 선배나 후배들과도 두루두루 잘 지내는 편이었다.
본래도 시선을 잡아끄는 녀석인데, 근래엔 마음에 여유가 있어서인지 더 잘 웃는 데다가 사람들을 상대할 때도 여유로움이 가득했다. 그러니 첫눈에 반하는 사람이 있어도 전혀 이상할 일이 아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홀로 돌아가서 보니 박성범은 여전히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왁자지껄하게 웃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입술 사이로 거듭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내 재경은 손바닥으로 눈을 가리고 말았다. 김성욱 앞에서는 잡은 물고기 운운하며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속마음은 그렇지 않다고 외치고 있었다. 이건 분명한 질투였다.
뒤늦게 자리로 돌아가자, 언제 돌아왔는지 정민철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어디 다녀오셨어요?”
“화장실.”
“이제 곧 정리할 건데, 한잔 더 받으실래요?”
마침 목이 타던 재경은 사양하지 않고 잔을 내밀었다. 곧 황금빛 맥주가 인심 좋게 채워졌고, 재경은 단숨에 잔을 들이켰다.
잠시 후, 방금 예고했던 대로 정민철은 자리에서 일어나 이제 그만 집에들 가자는 말을 꺼냈다. 다들 아쉬워하면서도 주섬주섬 짐을 챙겼다. 박성범도 뒤늦게 원래 있던 테이블로 돌아왔다.
“한참을 붙잡혀 있었네. 갈까?”
살갑게 웃으면서 묻는 말에 재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길 잠시, 일어서자마자 몸이 살짝 휘청거렸다. 놀라서 퍼뜩 일어선 박성범이 서둘러 팔을 뻗었고, 재경은 잠시 후에야 천천히 눈을 떴다.
“괜찮아?”
“응. 미안.”
근처에 있던 다른 후배들도 괜찮냐며 걱정스럽게 물어오는 바람에 재경은 민망해하면서 괜찮다고 대답했다. 속으로는 망했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왜 어지럽나 했는데 테이블을 보니 답이 나왔다. 소주잔과 맥주잔.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마셨던 소주 다음에, 진짜 마지막으로 맥주를 마신 게 문제였다.
* * *
결국 재경은 박성범의 부축을 받으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표정은 당연하게도 좋지 않았다. 왕창 섞어 마셨으면 그러려니 하겠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딱 한 번 소맥 순서로 마셨을 뿐인데, 그 한 잔에 훅 가버리는 게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박성범은 소파에 재경을 앉혀준 뒤에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괜찮아?”
“……어. 미안.”
“딱 붙어 와서 나야 완전 좋았지. 씻을 수 있겠어?”
이내 떠오른 생각에 박성범은 씩 웃으면서 장난을 쳤다.
“아님 같이 씻을까?”
그러자 예상치 못한 대답이 들려왔다.
“그러든가.”
순간 박성범은 저도 모르게 ‘어라?’ 하는 표정을 지었다. 제대로 들은 거 맞나? 난 안 취했는데……? 긴가민가하면서 다급하게 되물었다.
“진짜? 진짜 같이 씻어?”
“……싫으면 말고.”
애먼 곳을 바라보며 하는 대답이 들려왔다. 이내 박성범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귀가 살짝 붉게 물든 것이 보였다. 표정보다 귀가 더 솔직한 건 지금도 여전했다.
잠시 후, 두 사람은 나란히 욕실로 들어갔다. 하지만 재경이 여전히 어지러워해서 엄한 짓은 못하고, 샤워와 양치질만 간단히 하고 나왔다.
박성범의 서비스는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잠이 오는지 연신 하품을 하는 재경을 의자에 앉힌 다음 드라이기를 가져와서 머리카락을 말려주었다. 사락사락,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헤집는데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재경은 머리카락이 가늘면서도 부드러운 편인데, 이것마저 자신의 취향에 꼭 맞았다.
“다 됐어.”
“고마워. 줘 봐, 나도 해줄게.”
“내가 하면 돼. 너 아직 어지럽잖아.”
평소였으면 냉큼 드라이기를 넘겨주고 자리에 앉았겠지만 오늘은 그럴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하지만 재경은 물러서지 않았다. 이제 괜찮다고, 술 다 깼다고 말하면서 거듭 손을 내밀었다. 꼭 내가 해줄 거라는 눈빛을 본 박성범은 한 번 더 괜찮냐고 물어본 뒤에야 자리를 체인지했다.
곧 위잉 하는 소리와 함께 재경이 머리를 말려주기 시작했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박성범의 입가가 기분 좋게 올라갔다. 전에 깁스를 하고 있던 동안에도, 꼭 지금처럼 섬세하면서도 꼼꼼한 손길로 머리를 말려줬었다.
“다 됐어.”
어느새 눈을 감고 있던 박성범이 눈을 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선을 정리하는 재경에게 다가가서는 턱을 살짝 올리며 가볍게 입을 맞췄다.
“땡큐. 이제 자자.”
손에 들려 있던 드라이기를 테이블 위에 둔 다음, 재경의 손을 이끌었다. 침대에 몸을 누이자 길었던 하루가 비로소 끝이 나는 기분이었다.
“아, 불 안 껐다.”
박성범이 몸을 일으키려는데 뒤에서 옷깃을 당기는 느낌이 났다. 고갤 돌려보니 재경이 티셔츠 끝자락을 붙잡고 있었다.
“하고 싶어.”
“응?”
“……하고 싶다고. 섹스.”
놀란 듯 굳는 표정을 본 재경이 한 번 더 입술을 달싹였다.
“싫어?”
박성범은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리고 웃으면서 대답했다.
“완전 좋지.”
곧장 재경의 뒷목을 한 손으로 감싸면서 다시금 입을 맞췄다. 다른 손은 자연스럽게 옷자락 안으로 들어갔다. 그대로 침대에 눕히려는데, 재경이 고개를 살짝 돌리는 바람에 입술이 떨어졌다. 가빠진 숨을 고른 뒤에 재경은 상기된 얼굴로 시선을 마주했다.
“오늘은 내가 할래.”
“……어?”
박성범의 얼굴에 거듭 놀란 기색이 떠올랐다. 그러든 말든 재경은 잠옷 대용으로 입는 맨투맨 티를 단숨에 훌렁 벗었다. 이어서 박성범이 입고 있는 검은색 반팔 티셔츠도 벗겨낸 다음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누워 봐.”
박성범은 얼떨떨해하면서도 일단은 재경이 시키는 대로 했다. 침대에 누우면서도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연인 사이로 발전한 지 어언 넉 달째. 처음엔 재경을 배려해서 지극히 노멀한 자세로 몸을 겹쳤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조금씩 이런저런 다양한 체위를 시도하면서 더 큰 만족과 즐거움을 알아가는 중이었다.
하지만 보통은 자신이 먼저 리드하는 편이었다. 신호를 보내면 재경은 싫다고 빼지는 않지만, 먼저 적극적으로 요구하거나 유혹하는 경우는 몹시 드물었다. 하물며 지금처럼 본인이 하겠다고 말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술이 덜 깼나? 싶은 생각이 언뜻 들었지만, 그런 것치곤 눈빛도 목소리도 또록또록했다. 외려 진지함을 넘어서서 비장한 기색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순간 옛 기억이 떠올랐다. 오래 전, 술에 취한 재경이 가지 말라고 붙잡아서 처음으로 스킨십을 하고 함께 잠들었던 날. 제가 먼저 선수를 쳐서 아무렇지 않은 척 그냥 웃어넘겼지만, 재경이 후회하는 모습을 보면서 속으로는 상처 아닌 상처를 받았었다. 그리고 지금, 어쩐지 그때와 패턴이 비슷하단 생각이 들어서 은근한 불안감이 차올랐다.
이제 재경은 바지까지 벗기고 있었다. 잠깐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박성범은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취한 거 아니지?”
“완전 멀쩡해.”
아직 조금 어지럽긴 해도, 그건 술이 섞여서 그런 거지 취한 느낌은 전혀 아니었다. 어렵지 않게 바지까지 벗긴 뒤에 재경은 다리를 벌려 박성범의 허벅지 위에 걸터앉았다. 그대로 내리누른 채 섹스할 때처럼 엉덩이를 움직이자 녀석의 앞섶이 금세 크게 부풀었다.
“……진짜 취한 거 아니지?”
거듭 확인하듯 묻는 목소리에 재경은 픽 웃음을 흘렸다.
“안 취했다니까. 술 다 깼어.”
갑자기 적극적으로 변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바로 불안함 때문이었다.
박성범이 인기가 많은 건 알고 있지만, 근래엔 딱히 체감할 일이 없었다. 기말고사가 끝난 뒤부터 박성범은 학교에 나가는 일이 거의 없었고, 각자 일이 바쁘다 보니 서로 떨어져 있는 시간이 많았다. 주말에는 둘이 붙어 다니기 바빠서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거나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그간 잠시 잊고 있었는데, 오늘 학부 사람들이 한자리에 잔뜩 모인 덕분에 재경은 새삼스레 박성범의 인기를 실감하게 됐다. 어디 그뿐일까. 아까 고깃집에서 김성욱이 했던 말들, 화장실 앞에서 있었던 일, 그런 상태에서 사람들과 웃으면서 대화를 나누는 박성범을 보고 있자니 초조함을 닮은 감정이 차올랐다.
“……잡은 물고기는 무슨.”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박성범이 저를 두고 한눈을 파는 일은 없을 거라는 건 잘 알고 있지만, 한 번 생겨난 불안함은 좀처럼 가시질 않았다. 사실 좀 전에 머리를 말려줄 때도 계속 그런 생각들을 하다가, 침대에 앉은 순간 저도 모르게 ‘하고 싶다’는 말이 튀어나온 거였다.
심장은 여전히 빠르게 뛰었다. 첫 섹스 이후로 꽤 많이 몸을 섞었지만, 오늘처럼 제가 먼저 올라탄 것은 처음이었다.
내려다본 녀석의 얼굴에는 기대가 가득했다. ……남의 속도 모르고. 여유롭게 웃는 표정을 보니 오기 아닌 오기가 생겼다. 재경은 곧 상체를 숙이며 박성범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촉, 입술을 뗀 뒤에 점점이 입맞춤을 남기면서 아래로 내려갔다. 그러다 유두를 입에 담았을 땐 박성범도 내심 놀랐다. 섹스할 때 자신은 재경의 몸에 꿀이라도 발린 것처럼 곳곳을 물고 빨고 하지만, 재경은 손으로 거길 만져주거나 아주 가끔 오럴만 해줄 뿐이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는 얼굴에 거듭 미소가 떠올랐다. 사실 별다른 느낌은 들지 않지만, 재경이 이렇게 해주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잠깐 멈춰 있던 입술이 또다시 조금씩 아래로 내려갔다. 본능에 충실한 페니스는 드로즈 안에서 이미 한껏 발기한 채였다. 밴드 부근까지 내려왔을 땐 내심 ‘입으로 해주려나.’ 하는 기대가 차올랐지만, 아쉽게도 재경은 고개를 들었다.
“젤 있어?”
“응. 서랍에 있는데 꺼내줄까?”
“내가 할게.”
팔을 뻗은 재경이 서랍 속에 든 젤을 꺼냈다. 손바닥에 잔뜩 뿌린 다음, 병을 내려놓고 박성범의 속옷을 끌어 내렸다. 그와 동시에 딱딱하게 발기한 성기가 튀어나왔다.
그대로 박성범의 성기를 쥐고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미끄럽고 끈적거리는 감촉도 그렇고, 소리 때문에 야릇함이 배가 되는 기분이었다. 집중해서 열심히 만져주는데 박성범이 묻는 말이 들렸다.
“끝까지 할 거야?”
“당연하지. ……내 안에서 갈 거지?”
계속 태연함을 가장하던 얼굴이 어쩔 수 없이 달아올랐다. 손으로 만져주는 것도 물론 좋아하지만, 안에서 가는 걸 박성범은 제일 좋아했다.
잠시 후 재경은 손을 떼고 뒤늦게 자신의 바지와 속옷도 벗었다. 한 번 더 젤을 짠 것까진 좋았는데 이후가 문제였다. 애널 섹스에 제법 익숙해진 것은 맞지만 막상 스스로 뒤를 넓히려고 하니 엄두가 나질 않았다. 입구까지 갔다가 흠칫 놀라며 손을 떼길 몇 차례, 아직은 안 되겠다고 결론을 내리고는 살짝 눈을 들어 박성범을 바라보았다.
“손 줘 봐.”
순순히 내미는 손에 젤을 옮겨준 다음, 재경은 애써 민망함을 감추며 솔직하게 말했다.
“……내가 해보려고 했는데 아직은 못 하겠어.”
“응. 천천히 하면 되니까 무리하지 마.”
이내 기막힌 생각이 박성범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언젠가 재경과 해보고 싶었던 것들 중 하나였다.
“뒤돌아 앉아 볼래?”
“뒤로 돌라고?”
“응.”
의아해하면서도 일단 재경은 반대로 돌아앉았다. 그랬더니 또 다른 요구 사항이 이어졌다.
“그대로 엎드려 봐봐. 내 쪽으로 올라오면서.”
“……!”
그제야 뭘 요구하는지 알아챈 재경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굳어 있는데 등 뒤에서 묻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못 하겠어?”
그 순간 또 한 번 몹쓸 오기가 발동했다.
“누가 못 한대?”
생각해보니 이미 볼 거 못 볼 거 다 본 사이인데 부끄러워할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생각과 달리 얼굴의 열기는 좀처럼 가실 줄 몰랐고, 재경은 입술을 질끈 깨문 채 박성범이 말한 대로 움직였다.
“조금만 더 뒤로 올래? 응, 이제 됐다.”
이내 엉덩이 사이에 뜨거운 무언가가 닿았다. 재경은 아랫입술을 더욱 힘껏 깨물었다. 입이 벌어지는 순간 틀림없이 해괴망측한 소리가 터져나갈 것 같았다.
춥, 추웁, 아래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민망함을 더했다. 그때, 무언가가 언뜻 시야에 들어왔다. 여전히 기세등등한 박성범의 성기를 보고는 손을 뻗어서 붙잡았다.
그에 맞춰 박성범도 재경의 뒤를 푸는 데 공을 들였다. 손으로 살짝 벌려 드러난 밀부를 입술과 혀로 애무하면서, 손으로는 음낭을 가볍게 쥐고 주물렀다. 좀 전에 재경이 묻혀준 젤 때문에 손을 움직일 때마다 쿨쩍거리는 야한 소리가 났다.
원하는 만큼 실컷 맛을 본 뒤에 박성범은 손가락 두 개를 동시에 구멍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자 일순 재경이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긴장하지 말라고 둔부를 토닥여준 다음, 안에 넣은 손가락을 느리게 움직였다. 손끝으로 내벽 한 부분을 눌러주자 재경의 몸이 크게 들썩였다.
“내 거 계속 만져줘.”
그러자 끙끙대면서도 잠시 멈췄던 손을 다시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박성범의 입가에 또다시 미소가 번졌다. 이런 때조차 최선을 다하는 게 딱 재경다웠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끈질기게 안을 더듬던 손가락이 빠져나가는 느낌에 재경은 긴 숨을 내뱉으면서 몸을 일으켰다.
다시금 반대로 돌아앉았다. 좀 더 숨을 고른 뒤에, 살짝 몸을 띄우며 박성범의 성기를 붙잡았다. 그러자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는 모습이 보였다.
“네가 넣으려고?”
“오늘은 내가 한댔잖아. ……절대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어.”
재경은 아래를 더듬거려 구멍에 귀두 끝을 맞췄다. 깊게 숨을 들이쉰 다음 그대로 천천히 몸을 낮췄다.
‘안 들어가면 어쩌나’ 하는 우려와 달리 일단은 끝부분을 넣는 데 성공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늘 그렇듯 박성범이 오랜 시간 공을 들여 풀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괜찮아? 내가 할까?”
“내가, 할 거야.”
잠깐 숨을 고른 뒤에 재경은 마저 허리를 내렸다. 뜨겁고 딱딱한 게 밀려들어오는 느낌에 등줄기를 따라 소름이 돋았다. 재경이 힘들어하는 게 미안해진 박성범은 두 손으로 재경의 골반을 붙잡고 살짝 힘을 줘서 삽입을 도와주었다. 덕분에 마침내 끝까지 전부 들어갔다.
“……움직일게.”
민망하게도 땀까지 맺힌 이마를 대충 닦아낸 뒤에 재경은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흣…, 하앗!”
박성범이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이 탈 것처럼 뜨거웠다. 쿨쩍거리는 소리와 아래를 꽉 조이는 감각이 선명하게 느껴지는데도, 재경이 제 위에 올라타서 리드하고 있다는 사실이 꿈만 같았다.
둘이서 처음 해보는 체위에 평소보다 한껏 흥분한 건 말할 필요도 없었다. 서툰 허릿짓과 그때마다 흔들리는 성기까지 미치도록 사랑스러웠다.
자세를 바꿔서 빠르게 박아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오늘은 제가 할 거라는 재경의 말을 되새기면서 꾹 참아냈다. 엉덩이를 가볍게 쥐고 있던 손을 움직여서 앞을 쥐었다. 그러자 재경이 흠칫 놀라며 아래를 꽉 조였다.
“계속 움직여줘. 응?”
“거기, 만지지 마.”
박성범은 못 들은 척하면서 허리를 슬쩍 쳐올렸다. 재경이 신음을 흘리며 두 손으로 박성범의 복부를 짚었다. 계속 해달라며 은근히 조르자 움직임이 재개됐다.
끝까지 품은 채 엉덩이만 돌려대는 움직임에 박성범은 황급히 입술을 깨물었다. 하마터면 그대로 갈 뻔했다.
“이런 건 어디서 배웠어?”
“흐읏, 뭐?”
“너무 좋다고.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내 위에 태울 걸 그랬어.”
재경의 얼굴이 또 한 번 붉게 물들었다.
“……그런 말 좀 안 하면 안 돼?”
“왜. 사실이잖아.”
미소가 가실 줄을 몰랐다. 이내 재경의 허리를 두 손으로 끌어안으면서 시선을 마주했다.
“키스해줘.”
“……눈 감으면.”
시키는 대로 냉큼 눈을 감자 입술에 부드러운 것이 닿았다. 풋풋한 입맞춤은 금세 진한 키스로 변했다. 재경의 뒷머리를 감싸 안은 채로 키스하면서 박성범은 그대로 몸을 반 바퀴 회전시켰다. 덕분에 순식간에 정상위로 자세가 바뀌었다.
“야… 우웁!”
다시금 입술로 재경의 입을 막으면서 박성범은 그대로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재경이 박성범의 등짝을 두들겼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그 손마저 붙잡아서 결박한 뒤에 박성범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재경의 몸을 뒤흔들기 시작했다.
“하, 앗, 아읏, 하아!”
입을 다물 정신도 없이 속수무책으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한껏 몸을 밀착한 녀석이 사정없이 안을 박아댔다. 원래도 섹스할 땐 허리 위와 아래의 온도 차가 큰 편이지만, 오늘은 그야말로 통제가 되지 않는 느낌이었다. 어찌나 흔들어대는지 눈앞이 어지러울 정도였다.
“조금만, 흐읏… 처, 천천히 해!”
간신히 말을 내뱉었지만 소용없었다. 박성범은 응, 하고 대답하면서도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음낭이 짓눌릴 만큼 깊이 넣은 채로 계속해서 밀어붙였다.
“안에서 해도 돼? 응?”
귓가에 대고 묻는 목소리가 들렸다. 정신이 없어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하고 재경은 무작정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마침내 박성범이 움직임을 멈추며 몸을 굳혔다. 뜨거운 무언가가 몸 안을 적시는 느낌에 재경의 아랫배가 경련하듯 꿈틀거렸다.
어느새 저도 모르게 눈을 감은 모양이었다. 천천히 눈을 뜨자마자 이쪽을 바라보는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이내 턱이 살짝 들리며 짧은 베이비 키스가 이어졌다.
“진짜 좋았어.”
빈말이 아니라는 건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쪽, 쪽, 땀에 젖은 이마에도 아무렇지 않게 입을 맞춘 뒤에 박성범은 만족감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음에도 기승위로 하자.”
재경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놓은 뒤에 대답했다.
“이제 안 해.”
“왜. 완전 좋았는데.”
그러면서 은근슬쩍 또 반대로 자세를 바꿨다. 재경이 벗어나지 못하도록 두 팔로 꽉 껴안고는 입술에 가벼운 키스를 했다. 이내 재경의 엉덩이를 한 손에 하나씩 움켜쥐고는 안에 든 성기를 살짝 넣었다 빼기를 반복했다.
“안 추워?”
“춥다고 하면 그만둘 거야?”
“아니. 내 체온으로 따뜻하게 해줘야지.”
힘들이지 않고 상체를 일으킨 박성범이 쌓아 올린 베개에 등을 기댔다. 그러곤 거듭 재경을 끌어안으면서 느린 움직임을 이어갔다.
입가엔 미소가 가실 줄 몰랐다. 정신없이 흔들면서 몰아붙이는 것도 물론 좋지만, 이렇게 서로 맞닿은 채로 체온을 느끼면서, 또 심장 박동을 느끼면서 몸을 섞는 것도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한 번 더 절정에 이른 뒤에야 박성범은 재경을 놓아주었다. 정확히 말하면 재경이 기를 쓰고 빠져나왔는데, 이대로 있으면 3라운드가 이어질 게 뻔하기 때문이었다.
한 번만 해도 충분한 자신과 달리 박성범은 몹시도 혈기왕성했다. 하지만 재경을 생각해서 나름대로 절제하는 편이었는데, 그것도 모르고 일전에 ‘오늘은 네가 하고 싶은 만큼 하자’고 했다가 동이 틀 때까지 시달린 적이 있었다. 그마저도 기절하듯 잠들어버린 탓에 마지막은 어땠는지 기억도 나질 않았다. 이후로 재경은 장기전이 될 것 같다는 낌새가 보이면 알아서 몸을 사렸다.
“나 먼저 씻을게.”
움직이자마자 무언가가 허벅지를 타고 흘러내렸다. 깨달은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조명이 어두워 다행이라고 생각하는데 의아한 듯 묻는 박성범의 목소리가 들렸다.
“같이 안 씻고?”
“혼자 할 거야. 침대 정리 좀 해줘.”
섹스 후에는 둘이 같이 씻으러 가는 것도 위험했다. 도망치듯 욕실로 들어간 재경은 재빨리 샤워기를 틀었다. 샤워와 머리 감기를 동시에 하고, 속전속결로 뒤처리까지 한 뒤에 욕실 문을 열었다. 마침 시트 정리를 끝낸 박성범이 허리를 펴는 게 보였다.
“벌써 다 씻었어?”
“피곤해서 대충 씻었어. 너도 씻고 와.”
“응. 나도 빨리 하고 나올게.”
볼에 입을 맞춘 뒤에 박성범이 욕실로 들어가고, 재경은 쓰러지듯 침대 위에 누웠다. 긴 하품을 흘리면서 이불을 끌어당겼다. 술을 마신 데다 격한 운동까지 했더니 눈꺼풀이 절로 내려왔다.
“자?”
저도 모르게 깜빡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나직한 목소리에 눈을 뜨자 두터운 팔이 자신을 끌어안고 있었다. 그만 자자고 말하려는데, 박성범이 먼저 말을 꺼냈다.
“아까 말이야, 민정이가 나한테 너 사귀는 사람 있냐고 물어보더라.”
뜻밖의 말에 재경은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누구, 3학년 김민정?”
“응.”
짐작도 못 한 일이었다. 오늘 과방에서 마주쳤을 때도 김민정은 고개를 까딱이며 짧게 인사만 건네고는 계속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눴었다.
“그래서 끝내주게 멋진 애인이 있다고 했어.”
픽 웃음이 흘러나왔다. 저와 같은 바디 워시 향을 느끼면서 재경은 다시금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
“잘했네. 이제 자자.”
거듭 나직한 울림을 담은 목소리가 머리맡에서 들렸다.
“……이재경.”
“어.”
“재경아.”
“왜.”
“사랑한다고.”
“……나도.”
어깨를 안는 힘이 좀 더 강해졌다. 더없이 든든하고도 포근한 품 안에서 재경은 까무룩 잠이 들었다.
* * *
그날 재경은 모처럼 늦잠을 잤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옆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몸을 일으키자 어김없이 전신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고, 재경은 잠깐 멍하니 앉아 있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밖으로 나갔다.
거실은 조용했다. 화장실에도 없는 걸 보니 편의점에라도 간 모양이었다. 씻고 나온 재경은 뻐근한 허리를 주무르면서 밤새 비워둔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
방문을 열자마자 멈칫했다. 분명 어제까지 아무것도 없던 침대 옆 벽면에 커다란 포스터가 떡하니 붙어 있었다. 어제 박성범이 학교에서 받아온 바로 그 사진이었다.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포스터가 제 발로 저렇게 가서 붙었을 리는 없고. 아침에 먼저 일어나서 둘둘 말려 있던 포스터를 정성스럽게 펴고, 몰래 벽에 붙인 다음 뿌듯하게 바라봤을 모습을 상상하니 웃기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다.
‘……잠깐만.’
문득 떠오른 생각에 재경은 빠르게 방 안을 살폈다. 이내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이번에야말로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그럼 그렇지. 책등에 학교명이 박혀 있는 잡지가 책꽂이 사이에 여봐란듯이 꽂혀 있었다. 앞으로 살짝 튀어나와 있는 걸 보고 재경은 팔을 뻗어서 잡지를 꺼냈다.
꺼내자마자 또 다른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노란 포스트잇이 표지에 붙어 있었는데, 그 위에 익숙한 글씨체로 메모가 적혀 있었다.
- Love U with all my heart -
잠시 후, 재경은 잡지를 조심스럽게 제자리에 꽂아두었다. 옷을 갈아입는 동안에도 입가의 미소는 가실 줄을 몰랐다.
어쩌면 앞으로도 다른 누군가가 녀석에게 관심을 보이거나, 어제처럼 질투하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마다 끝내주게 멋진 애인이 흔들림 없이 붙잡아 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