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
건물 밖으로 나오자 매서운 바람이 불어닥쳤다. 히터가 빵빵하게 돌아가는 실내에 오래 있다 나와서 그런지 상대적으로 더 춥게 느껴졌다. 비단 재경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닌지, 옆에서 툴툴대는 김성욱의 목소리가 들렸다.
“으, 해 있는데도 존나 추워.”
그러자 두어 걸음 앞서서 걷던 양재현이 태클을 걸었다.
“해 있는 거랑 추운 거랑 뭔 상관이야?”
“당연히 상관 있지. 태양이 내뿜는 에너지가 얼마나 큰데. 응달에 들어가면 더 추운 거 몰라?”
“크크, 응달이란다, 응달. 존나 나이든 할머니 같아.”
“지금 우리 할머니 모욕하는 거임?”
“미안.”
티격태격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버스 정류장이 코앞이었다. 도착과 동시에 타이밍 좋게 버스 한 대가 다가왔고, 번호를 확인한 재경은 서둘러 동기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저거 우리 집 가는 거야. 먼저 갈게.”
“오냐. 조심해서 가라.”
문이 열리자마자 재경은 얼른 버스에 올랐다. 마침 빈자리가 있어서 앉은 다음 목에 둘둘 두르고 있던 목도리를 풀었다.
토요일인 오늘, 재경은 졸업반인 동기들과 취업 박람회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해가 바뀌어 4학년이 되면서 다들 본격적인 취업 준비를 하는 분위기였다. 늘 우스갯소리가 판을 치던 단톡방에도 이제는 취업 관련 정보가 종종 올라왔고, 특정 기업을 목표로 한 스터디 그룹도 만들어졌다.
덕분에 재경도 더욱 바빠졌다. 당장 한 학기만 더 지나면 졸업이기 때문에, 알바도 이번 달 말까지만 하고 그만두는 것으로 이야기가 된 상태였다.
집에 도착한 재경은 빠르게 도어락 비번을 누르고 문을 열었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지난 학기에 다행히 훌륭한 성적표를 받아든 박성범은 겨울 방학이 시작되자마자 또다시 녹음실에 출근 도장을 찍었고, 저녁에 나갔다가 새벽이나 이른 아침에 들어올 때가 많았다. 그래서 한집에 같이 살아도 평일에는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다.
삑삑삑삑-
“응?”
화장실에서 씻고 나온 재경은 느닷없이 현관 쪽에서 울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삑삑거리는 전자음은 도어락 키패드를 누를 때 나는 소리였고, 이내 현관문이 열리며 박성범의 얼굴이 보였다. 뜻밖의 이른 귀가에 재경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왜 이렇게 일찍 왔어?”
“이거 때문에.”
현관문을 닫고 들어온 박성범이 오른팔을 들어 보였다. 순간 재경은 또 한 번 놀라고 말았다. 두툼한 롱 패딩에 가려져 있던 깁스 팔걸이가 드러났다. 재경은 서둘러 성큼 다가갔다.
“왜 이래? 다쳤어?”
“담배 사러 가는데, 뒤에서 갑자기 어어, 하는 소리가 들리는 거야. 돌아보니까 웬 애가 탄 자전거가 술 취한 것처럼 비틀대더라고.”
“부딪혔어?”
“아니. 자전거는 피했는데, 하필 바로 뒤에 연석이 있어서 걸려 넘어졌어.”
머쓱한 듯 웃는 박성범과 달리 재경의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병원 갔다 온 거지? 의사가 뭐래?”
“뼈에 금이 가서 당분간 깁스하고 있어야 된대. 그래도 뼈가 부러지거나 조각나지는 않아서 빨리 붙을 거라고 했어.”
“다른 데는 괜찮고?”
“응.”
“……그나마 다행이네.”
자칫 자전거에 심하게 부딪히거나 넘어지면서 머리를 다치기라도 했으면 큰일이었을 텐데 정말 불행 중 다행이었다.
“경찰에 신고는 했어?”
“그냥 보내줬어. 튀었으면 쫓아가서 잡았을 텐데, 초딩 같은 애가 달달 떨면서 괜찮으시냐고 묻는 거 보니까 짠하더라고. 조카랑 비슷한 또래이기도 하고.”
“……잘했어. 그나저나 하필 오른팔을 다쳐서 큰일이네.”
왼팔이면 그나마 나을 텐데, 자주 쓰는 팔을 다쳤으니 꽤나 불편할 것 같았다. 예상대로 박성범은 곧바로 난관에 봉착했다. 왼손으로는 옷을 벗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바지도 마찬가지였다. 긴 바지는 끌어 올리는 것도 일일 듯해서 박성범은 쭈그려 앉아 옷장을 뒤진 끝에 검은색 반바지를 찾아냈다.
드로즈만 입은 채로 욕실 문을 연 박성범은 수건걸이에 옷가지를 걸어둔 다음 세면대 앞에 섰다. 대충 물을 묻힌 다음 세안 폼으로 엉성하게 얼굴을 닦는데 문 너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씻는 중이야?”
“응.”
“좀 도와줄까? 혼자 하기 힘들 것 같은데.”
듣던 중 반가운 말이었다. 사실 좀 불편하긴 해도 천천히 하면 얼마든지 혼자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기에 냉큼 대답했다.
“그럼 완전 고맙지.”
“알았어. 들어갈게.”
곧 문이 열리며 재경이 들어왔다. 박성범은 서둘러 거품을 헹궈낸 뒤에 옆으로 고갤 돌렸다.
“세수는 내가 했어.”
어쩐지 뿌듯함이 느껴지는 목소리에 재경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잘했어. 근데 턱 밑에 거품 묻어 있다.”
“진짜?”
거울을 보니 턱뿐만 아니라 이마에도 옅은 거품이 묻어 있었다. 서둘러 씻어내는 동안 재경은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리며 세면대 쪽으로 다가갔다.
“면도는 안 해?”
“해야지. 너 까슬까슬한 거 싫어하잖아.”
박성범은 머리카락도, 수염도 빨리 자라는 편이었다. 언젠가 모닝 키스를 할 때 까슬까슬해서 따갑다고 스치듯 말한 적이 있는데, 그걸 여태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내 박성범은 세면대 위 수납장에 들어 있던 전기면도기를 꺼낸 다음 재경을 바라봤다.
“네가 해줄래?”
“뭘, 면도를?”
“응.”
“네가 하는 게 낫지 않겠어? 면도는 좀 무서운데.”
“무서울 게 뭐 있어. 왔다 갔다 움직이기만 하면 되는데.”
“그래도 면도날이 회전하잖아. 잘못해서 상처 날까 봐 겁나.”
“영광의 상처라고 생각하면 되지. 괜찮으니까 해줘.”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애인이 면도해주는 걸 받아보겠냐며 박성범은 미소가 만연한 얼굴로 재촉했다. 재경은 어쩔 수 없이 손을 내밀었다.
면도기를 넘겨준 박성범은 욕조 턱에 걸터앉으며 고개를 살짝 들었다. 편안해 보이는 그와 달리 재경의 얼굴에는 옅은 긴장감이 차올랐다.
“……혹시 긁혀도 나한테 뭐라 하지 마.”
“당연하지. 쉐이빙 폼부터 발라줘.”
원래는 건식으로 했지만, 두어 달 전부터 쉐이빙 폼을 사용하고 보습 크림도 챙겨 발랐다. 연인에게 조금이라도 더 점수를 따기 위한 숨겨진 노력이었다.
재경은 펌핑한 거품을 박성범의 턱 주변에 바른 뒤에 면도기 전원을 켰다. 절대 움직이거나 말하지 말라는 주의를 준 다음, 왼손으로 녀석의 뒷목을 감싸고 면도기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작업은 생각보다 수월했다. 하지만 재경은 긴장을 풀지 않은 채 한껏 집중해서 손을 움직였다. 덕분에 면도를 끝내고 기계 전원을 껐을 땐 등에 땀이 흠뻑 차올랐다.
“머리도 감을 거야?”
뒷정리를 하면서 그렇게 묻자 박성범이 기다린 것처럼 냉큼 대답했다. 어떤 자세로 감겨줘야 서로 편할지 고민하는데, 그 전에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방수 커버 같은 건 없어?”
“응. 병원에서 별말 없길래 그냥 왔어.”
“……잠깐 있어 봐.”
재경은 곧장 욕실 밖으로 나갔고, 다시 돌아온 그의 손에는 커다란 투명 비닐과 테이프 등이 들려 있었다.
“팔 이쪽으로 내밀어봐.”
박성범은 순순히 오른팔을 내밀었다. 그에 대고 재경은 비닐을 서너 번 감은 다음 위아래로 꼼꼼하게 테이프를 붙였다. 작업이 끝난 결과물을 내려다보며 박성범은 머쓱한 표정으로 뒷목을 만졌다.
“올 때 하나 사 올걸 그랬어.”
“나중에 사면 되지. 머리 감겨줄 테니까 욕조에 들어가 봐.”
“서서 안 하고?”
“……서서 하면 내 키로 어떻게 감당하라고.”
맞네, 하고 씩 웃어 보인 박성범이 냉큼 욕조에 들어가 앉았다. 재경은 거치대에 걸려 있던 샤워기를 빼낸 뒤에 녀석의 위치를 조정해주었다.
“좀 더 오른쪽으로 가. 팔 걸치면 편할 거야.”
박성범은 말 잘 듣는 아이처럼 뽀작뽀작 엉덩이를 움직여서 욕조 아래쪽 난간에 팔을 걸쳤다. 그사이 재경은 샤워기 물을 틀어서 수온을 확인한 다음 박성범의 머리에 갖다 댔다.
“안 차가워?”
“응. 딱 좋아.”
“눈 감고 있어. 불편한 데 있으면 말하고.”
두피 전체에 물을 적신 뒤에 재경은 샴푸를 펌핑해서 본격적으로 머리를 감겨주기 시작했다. 적당히 힘을 가해서 마사지하듯 움직이는 손길에 박성범은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재경의 성격이 반영된, 조심스러우면서도 꼼꼼한 손길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조금 서툴긴 해도 지금껏 그 어떤 미용실에서 받은 샴푸보다 훨씬 만족스럽고 기분이 좋았다.
“가려운 데는 없어?”
“음, 왼쪽 귀 위에.”
“여기?”
곧바로 손을 옮긴 재경이 방금 말한 부분을 시원하게 문질러주었다.
“다른 데는?”
“여기.”
박성범이 자신의 입술을 톡톡 두드렸다. 순간 재경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가, 다시금 손가락을 움직이면서 말했다.
“까분다.”
“진짜 가려워.”
“나가서 물파스 발라.”
“그럼 너도 따가울…… 컥!”
장난스럽게 머리카락을 잡아당기자 박성범의 입에서 요상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재경은 웃음을 흘리며 잠깐 잠가두었던 샤워기를 다시 틀었다.
“눈 감아. 물 뿌릴게.”
이어서 린스까지 해주고 헹구는 것으로 머리 감겨주기는 끝났다. 재경은 타월로 박성범의 머리를 감싼 다음 빠르게 닦아주었다. 머리카락이 짧아서 이렇게만 해줘도 대부분의 물기가 제거됐다.
일련의 작업이 끝난 뒤에 박성범이 몸을 일으켰다. 순간 눈에 보이는 장면에 재경은 당황했다. 속옷이 젖어서 중심부 윤곽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거품을 헹궈줄 때 욕조 안으로 물이 흘러 들어간 모양이었다.
“다 젖었네.”
욕조 밖으로 나온 박성범은 별생각 없이 고무 밴드를 끌어 내리며 드로즈를 벗었다. 그 직후 재경과 눈이 마주쳤다. 후다닥 시선을 피하는 모습을 보고는 이내 입꼬리를 끌어당겨 웃으며 들으란 듯 중얼거렸다.
“음흉하기는.”
그 말에 재경은 발끈했다.
“갑자기 벗은 사람이 잘못한 거 아냐?”
“어차피 씻을 거니까 벗어야지. 아, 아님 너한테 벗겨달라고 할 걸 그랬……, 아야!”
기어이 등짝 스매싱이 날아왔다. 젖은 탓에 찰싹하고 울리는 소리에 박성범이 아프다면서 엄살을 피웠다. 그러든 말든 재경은 눈도 깜빡 안 하고 말을 이었다.
“돌아서. 등만 닦아줄게.”
“앞은?”
“손 닿잖아. 왼손으로 닦아.”
“불편한데……. 하는 김에 그냥 해주면 안 돼?”
박성범이 오른팔을 넌지시 들어 보였다. 티격태격하느라 잠깐 잊고 있었는데, 그러고 보니 팔이 불편한 녀석을 도와주러 들어온 거였다. 재경은 승낙하는 대신 한 가지 조건을 덧붙였다.
“알았어. 해줄 테니까 가만히 있어.”
그러자 씩 웃으면서 되묻는 말이 들렸다.
“가만히 안 있으면, 키스라도 할까 봐?”
“……!”
“엉큼하기는. 아야!”
어김없는 엄살을 못 본 척하면서 재경은 거품을 낸 샤워 볼로 박성범의 어깨부터 닦아주기 시작했다.
슥슥 아래로 내려오는데, 새삼 참 잘 가꾼 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체격이야 유전적인 영향이 크다 해도, 보기 좋게 자리 잡고 있는 근육들은 노력의 산물이었다.
점점 아래로 내려오다 보니 어느덧 중심부에 다다랐다. 자칫 민망할 수도 있는 상황이지만, 환자를 도와준다 생각해서 그런지 의외로 아무렇지 않았다.
허리를 살짝 굽힌 채로 허벅지를 닦아주던 것도 잠시, 묵묵히 손을 움직이던 재경이 멈칫했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얌전하게 있던 성기가 조금씩 힘을 얻는 것이 적나라하게 눈에 들어왔다.
재경은 시선을 내리깔며 이를 악물 듯 중얼거렸다.
“……안 죽여?”
“내 뜻대로 안 되는 거 알잖아. 그리고 이건 내 잘못 아니야. 네가 이렇게 만져주는데 안 서는 게 문제 있는 거 아냐?”
적반하장이 따로 없는 말에 재경은 어이가 없었다. 남자는 원래 자극에 약한 동물이라곤 하지만, 성적인 뉘앙스라곤 손톱만큼도 없이 씻는 걸 도와주는 것뿐인데 잘도 세운다 싶었다. 심지어 그걸 남 탓으로 돌리니 더더욱 기가 찰 노릇이었다.
하고픈 말이 많았지만, 재경은 한숨으로 내뱉으며 속으로 삭였다. 평소엔 제 말이라면 죽는 시늉까지 하는 녀석이지만, 이런 쪽으로 대화가 빠지면 도저히 이길 수가 없었다.
박성범이 그런 재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비누칠에 집중하느라 재경은 못 봤겠지만, 아까부터 숨길 수 없는 미소가 입가에 떠올라 있었다.
분명 처음에 어깨부터 닦아줄 때만 해도 무표정했는데, 재경의 손길에 반응한 순간부터 눈에 띄게 당황하는 모습이 고스란히 눈에 들어왔다.
이 또한 재경이 가진 매력 중 하나였다. 이미 갈 데까지 간 사이에 서로를 속속들이 잘 알고 있는데, 재경은 아직도 묘하게 쑥스러워할 때가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표정은 금세 무뚝뚝하게 돌아왔지만, 아직도 빨갛게 열이 오른 귀가 그 증거였다.
“재경아.”
“왜.”
“이거 어떡하지? 그냥은 안 죽을 거 같은데.”
“네가 처리해.”
“나 환잔데.”
“왼손은 멀쩡하잖아.”
환자라는 말도 사치였다. 씻겨주는 데도 흥분해서 발딱발딱 세우는데 환자는 무슨.
“진짜 내가 해?”
“어.”
그래 봤자 계속 해달라고 조를 게 뻔했기에, 한 번 더 요구하면 못 이기는 척 도와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박성범의 입에서는 예상과 다른 말이 흘러나왔다.
“그럼 문 앞에 좀 서 볼래? 셔츠 좀 올려주면 더 좋고.”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싶어서 재경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문 앞에 서라고?”
“응. 너 보면서 하게.”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재경은 입을 뻐끔거렸다. 더 기가 막힌 사실은, 표정을 보니 장난이 아니라 진심이 다분히 느껴진다는 거였다. ……이런데 어떻게 이기라고. 재경은 짤막한 한숨을 한 번 흘린 뒤에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녀석의 중심을 향해서 손을 뻗었다.
쥐자마자 꿈틀하는 게 느껴져서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박성범이 기다렸다는 듯 벽에 등을 기대며 편하게 자세를 잡았다. 가만 보면 은근히, 아니 대놓고 뻔뻔한 구석이 있는 녀석이라고 생각하면서 재경은 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박성범이 왼손으로 재경의 귓불을 매만지며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도 해줄까?”
“됐어. 손대기만 해봐.”
꽈악, 하고 아래를 움켜쥐는 손길에 박성범은 금세 꼬리를 내렸다. 재경은 계속해서 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슥슥 훑다가 한 번씩 음낭을 주무르거나 예민한 끝부분을 손가락으로 비벼주기도 했다. 그간 해온 게 있다 보니 어떻게 하면 녀석이 좋아하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내 손등을 덮는 뜨거운 체온이 느껴졌다. 재경의 손에 자신의 손을 겹친 박성범이 그대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잠시 후 몸을 굳히며 열락의 덩어리를 토해냈다.
“후우.”
긴 숨을 한 번 내뱉은 뒤에 박성범은 재경의 턱을 올리며 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췄다. 한 번으로는 부족해서 연거푸 입맞춤을 하고는 웃음 띤 얼굴로 시선을 마주했다.
“나을 때까지 매일 도와줄 거지?”
그러자 응징하듯 귀를 잡아당기는 손길과 함께 가차 없는 대답이 들려왔다.
“꿈도 꾸지 마.”
* * *
욕실에서 한바탕 일을 치른 뒤에 박성범은 긴 하품을 흘리며 침실로 들어갔다. 재경은 자신의 방 책상에서 책을 펼쳤다. 공부를 좀 하다가 집에서 함께 저녁을 먹을 생각이었다.
집중하는 동안 시간은 훅훅 지나갔다. 시계를 보니 어느덧 오후 6시가 지나 있었고, 재경은 펜을 내려놓은 뒤에 잠깐 핸드폰을 켰다.
뼈에 금 갔을 때 좋은 음식을 검색해보니 곧바로 결과가 나타났다. 블로그 글을 꼼꼼히 읽은 다음 메모장에 입력했다. 식사 후에 산책 겸 마트에 가서 사 오면 될 것 같았다.
거실로 나간 재경은 닫혀 있는 방문에 대고 노크했다. 하지만 안쪽은 잠잠했다. 슬쩍 문을 열어보니 박성범이 기다란 베개를 다리 사이에 끼운 채 꿀잠을 자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간 재경은 녀석의 어깨를 흔들며 깨웠다.
“더 잘 거야? 저녁 먹어야 될 거 같은데.”
“으음……. 몇 신데?”
“6시 반 지났어.”
그 말에 박성범은 꾸물꾸물 몸을 일으켰다. 잠깐 앉은 채로 정신이 돌아오길 기다렸다가,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다음 침대 아래로 내려왔다.
“완전 캄캄해졌네. 저녁에 뭐 먹지?”
“집에 있는 걸로 대충 먹으면 되지. 팔은 좀 어때?”
“아까 진통제 먹어서 그런지 아직 괜찮아. 냉장고에 뭐 있는지부터 확인해야겠다.”
재경의 어깨에 왼팔을 걸치면서 함께 나가려는데 갑자기 벨소리가 울렸다. 협탁으로 가서 핸드폰을 집어 드니 익숙한 이름이 액정에 떠 있었다. 김성욱의 전화였다.
“왜.”
- 어디야?
“집이지.”
- 오올, 웬일로 집에 다 붙어 있냐? 아무튼 잘됐네. 나 오늘 하루만 재워주라.
그 말에 박성범은 곧바로 되물었다.
“재워달라고?”
마침 재경과 눈이 마주쳤다. 입 모양으로 김성욱, 하고 말해주고는 다시금 통화를 이어갔다.
- 아버지 생신이라서 고모랑 삼촌 가족들 총집합했거든. 근데 막내 고모네가 자고 갈 건가 봐. 어린 조카들이 있어서 존나 난장판이야.
“과방이나 동방에서 자.”
- 이 날씨에 입 돌아갈 일 있어?
“그럼 모텔로 가든가.”
- 돈 없어서 안 돼. 그러지 말고 하루만 재워주라. 응?
보지 않아도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눈에 훤히 그려졌다. 안 된다며 뚝 끊어버릴 수도 있지만, 생각해보니 방학한 뒤로는 한 번도 만나질 못했다.
“잠깐 있어 봐.”
핸드폰을 귀에서 뗀 뒤에 박성범은 거듭 재경을 쳐다봤다.
“집에 손님들 왔다고 하루만 재워달라는데, 어떡할까?”
그 말에 재경은 고민도 하지 않고 대답했다. 김성욱의 집이 대가족인 걸 알고 있는 까닭이었다.
“오라고 해. 너만 괜찮으면.”
“나야 네가 괜찮으면 무조건 오케이지.”
장난스럽게 답한 뒤에 박성범은 다시금 핸드폰을 귓가로 가져갔다.
“와도 돼.”
- 오, 땡큐땡큐! 지금 바로 갈게.
통화를 끝낸 박성범은 재경과 함께 거실로 나갔다. 냉장고를 뒤져보니 딱히 먹을 만한 게 없었다. 꽤 오래 전에 집에서 가져온 김치와 멸치볶음 정도밖에 없어서, 그냥 편하게 배달 음식을 시켜 먹기로 했다.
거실에서 TV를 보는데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벌써 왔나? 속으로 생각하면서 인터폰을 확인해보니 배달 직원 대신 김성욱의 얼굴이 보였다. 문을 열어주자 편의점 봉지를 손에 든 녀석이 안으로 들어왔다.
“왜 이렇게 빨리 왔어?”
“학교에 피난 가 있었거든. 근데 너 팔이 왜 그래?”
“넘어져서 다쳤어.”
자세히 설명하기 귀찮아서 대충 대답하자 김성욱이 낄낄대며 웃었다.
“존나 웃겼겠다.”
“……신발 신어.”
“응?”
“그대로 나가면 돼.”
“잘못했어.”
자칫하면 진짜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김성욱은 재빨리 거실로 걸어갔다. 마침 주방에서 나오는 재경을 보고 반갑게 말을 걸었다.
“나 왔어. 이건 내 스타일의 숙박비!”
랩하는 것처럼 말하며 편의점 봉지를 자랑스럽게 들어 올리는 걸 보고 재경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저녁은 먹었어?”
“당연히 안 먹었지. 밥 줌?”
은근한 기대를 담아서 묻는데 또 한 번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이번에야말로 배달 기사가 왔고, 잠시 후에 박성범은 크고 묵직한 비닐봉지를 식탁 위에 올렸다.
“뭐야?”
“오늘 저녁.”
“오, 뭐 시켰음?”
“해물 등뼈찜.”
뚜껑을 열자마자 맛깔스러운 자태를 뽐내는 비주얼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김성욱의 입에서 감탄이 절로 나왔다.
“와 씨, 존나 맛있겠다.”
그 순간 박성범이 먼저 선수를 쳤다.
“만 원.”
“응?”
“먹고 싶으면 만 원만 내라고. 원래 만천 원인데 천 원 까줄게.”
“……진심으로 하는 말?”
“백 퍼 진심.”
“술도 사 왔는데 이러기 있음?”
“그건 숙박비라면서.”
“에라이, 야박한 놈.”
툴툴거린 김성욱이 제일 먼저 식탁 의자를 빼고 앉았다. 가뜩이나 점심이 부실해서 배가 고팠는데, 푸짐한 등뼈찜을 보니 환장할 것 같았다.
이윽고 폭풍 같은 식사가 시작됐다. ‘앗 뜨거’를 연발하면서도 손으로 등뼈를 잡은 김성욱은 걸신들린 사람처럼 뜯기 시작했다.
박성범이 곱지 않은 눈으로 그 모습을 지켜봤다. 식비 운운한 건 당연히 장난이고, 또 치사하게 먹는 걸로 구박할 마음도 없지만, 눈치 없이 새우나 꽃게만 골라 먹는 게 예뻐 보일 리가 없었다. 이윽고 박성범은 커다란 등뼈를 국자로 떠서 재경의 앞 접시에 놓아주었다.
“얼른 먹어. 이러다 쟤 입으로 다 들어가겠다.”
쟤, 라고 말하며 턱짓을 했지만 정작 김성욱은 살을 발라 먹느라 고개도 들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재경이 뼈에서 발라낸 큼직한 살코기를 서둘러 박성범의 밥그릇 위에 올려주었다. 하지만 하필 그 타이밍에 김성욱이 고개를 든 바람에 딱 걸리고 말았다.
“뭐야, 지금 살 발라준 거?”
“팔 다쳤잖아.”
“맞네. 옛다, 이거도 먹어라.”
선심 쓴다는 듯 낙지 다리 하나를 건져서 박성범의 밥그릇에 올려준 뒤에 김성욱은 다시금 신나게 뼈를 빨기 시작했다.
‘깜짝 놀랐네.’
재경은 뒤늦게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박성범의 팔이 불편해서 살을 발라 준 게 맞기에, 그냥 대놓고 도와주기로 했다.
“먹고 싶은 거 있어?”
“새우 먹고 싶어.”
기다렸다는 듯 냉큼 하는 대답에 웃음이 나왔다. 재경은 곧 찜에 들어 있던 새우를 국자로 건졌다. 껍질을 벗긴 다음 그릇에 올려주려는데 박성범의 목소리가 들렸다.
“입에 넣어줘.”
“어?”
“그럼 더 편할 거 같아서.”
순간 얼어붙은 재경을 대신하듯 김성욱이 냉큼 끼어들었다.
“재경이 없었으면 어쩔 뻔했어?”
“그럼 네가 까줘야지.”
“까줄 거 같음?”
“내쫓기기 싫으면 까줬겠지.”
시종일관 만담을 방불케 하는 대화 속에서 식사는 끝이 났다. 다음은 당연하게도 술 파티였다. 박성범이 깁스한 팔을 들어 올리며 당분간은 금주라고 말했지만 김성욱은 눈도 깜빡하질 않았다. 그럼 옆에서 술이나 따르라며 얄밉게 말하고는 정체불명의 노래를 흥얼거리며 거실에 상을 폈다.
말로는 진상이네 어쩌네 툴툴대도 박성범은 소주병을 들고 잔을 채워주었다. 단숨에 잔을 비운 김성욱이 오징어를 씹으면서 말을 걸었다.
“근데 넌 오늘 왜 안 왔냐?”
“뭘.”
“취업 박람회 말이야. 다음 학기에 졸업해도 준비는 슬슬 해놓는 게 좋을 텐데.”
그래도 친구랍시고 신경이 쓰이긴 하는 모양이었다. 조미 땅콩을 입에 넣으면서 박성범은 대답했다.
“생각해둔 게 있긴 해.”
취업 준비에 매진하는 재경을 보면서 박성범도 요즘 부쩍 장래에 대해서 생각해보곤 했다. 재경과 사귀기 시작한 이후로 성적 관리에도 더 신경 쓰고 회사에 취직을 해볼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하면 지금도 곡을 만드는 게 즐겁고, 그 과정을 통해서 큰 활력을 얻었다.
그리고 성격상 틀에 갇히거나 얽매이는 걸 싫어하기도 했다. 상명하달이 기본인 회사는 틀림없이 적성에 안 맞을 테니, 운 좋게 취직한다 해도 오래 버티지 못할 게 뻔했다. 아니면 스트레스를 왕창 받거나.
“뭔데? 너네 아버지 회사에 들어가려고?”
“아니.”
박성범은 딱 잘라 대답했다. 아버지가 제법 큰 기업체를 운영하는 것은 맞지만, 그쪽에 취직하는 건 중고등학생일 때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석유화학 쪽으로는 아는 게 전무할뿐더러, 아버지 회사에는 이미 큰형이 차기 대표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런데 혹시라도 낙하산으로 들어가게 된다면 사사건건 부딪칠 게 불 보듯 뻔했다.
“그럼 뭐, 창업이라도 하게?”
“창업은 아무나 하는 줄 알아?”
“생각해 둔 게 있다고 하니까 하는 말이지. 좋은 거면 나도 같이 하자. 열심히 할게.”
“뭔 줄 알고 같이 하자는 거야?”
“그러니까 뭐냐고 물어보잖아.”
“그런 게 있어.”
“존나 치사한 새끼.”
놀리듯 하는 대답에 김성욱이 투덜거리며 거듭 소주잔을 채웠다. 단숨에 들이켜고는 이번엔 재경을 타깃으로 삼았다.
“재경이 넌 취직할 거지?”
“그래야지.”
“나도 1학년 때부터 학점 관리 좀 할걸.”
후회는 항상 뒤늦게 찾아오는 법이었다. 본인이 먼저 말을 꺼낸 주제에, 김성욱은 꿀꿀한데 다른 이야기나 하자면서 금세 화제를 전환했다.
이후로는 늘 그렇듯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오갔다. 함께 술을 마실 때면 빠지지 않는 축구 이야기와 선수들 몸값을 놓고 열띤 토론이 이어졌다. 와중에도 홀짝홀짝 쉬지 않고 마신 탓에 소주 두 병이 금세 동이 나고 말았다.
“벌써 다 마셨네. 술 사놓은 거 없어?”
“없어.”
집에서 소주는 딱히 마실 일이 없다 보니 안 산 지 오래됐고, 캔맥주는 두 개 남은 걸 지난주에 야식 먹을 때 재경과 함께 마셨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김성욱은 믿지 않았다.
“그러지 말고 있으면 가져와 봐. 다음에 언제 또 이렇게 셋이 보겠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종강과 동시에 박성범은 열심히 작업실을 들락거렸고, 재경도 취업 준비에 전념했다. 다들 생각이 비슷한 모양인지 수시로 술자리 약속이 오가던 단톡방도 최근엔 부쩍 조용해졌다.
김성욱의 표정엔 아쉬움이 가득했다. 모처럼 이렇게 편하게 얘길 나누니 좋기도 하고, 그간 녀석에게 신세 진 것도 있고 해서 재경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대답했다.
“진짜 없어. 가서 사 올게.”
“크, 역시 너밖에 없어!”
대번에 엄지를 추켜올리는 김성욱을 발바닥으로 민 뒤에 박성범도 덩달아 일어났다. 재경을 따라서 방으로 들어가자 옷걸이에 걸려 있던 외투를 챙겨 드는 모습이 보였다.
“내가 갔다 올게.”
“됐어. 넌 술도 안 마시는데 뭐 하러.”
“그러니까 내가 가는 게 낫지. 그리고 밖에 엄청 추워.”
순간 재경이 멈칫했다.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목격한 박성범이 귀엽다는 듯 웃으며 재경의 볼에 입을 맞춘 뒤에 “내가 갔다 올 테니까 진상 상대해주고 있어.” 라고 작게 말하고는 방을 나섰다.
잠시 후 패딩을 입고 나오는 걸 본 김성욱이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네가 가려고?”
“아님 네가 갈래?”
“조심해서 갔다 와.”
김성욱은 냉큼 고개를 돌리며 상에 있던 안주를 집어 먹었다. 잠시 후, 다시 제자리에 앉는 재경을 보면서 입을 열었다.
“근데 진짜 생각보다 잘 지내는 거 같아.”
그 말에 재경의 시선이 맞은편을 향했다.
“같이 사니까 알겠지만, 성범이 새끼 털털한 거 같으면서도 은근히 까칠하잖아.”
금시초문인 일이었다. 함께 산 지 몇 달이 지났지만, 그동안 박성범이 까칠하다고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오히려 제가 더 그랬을 거다. 남의 집이니 조심해야 된다는 생각도 있었고, 처음에 규칙 같은 건 없냐고 물어봤던 사람도 본인이었다.
“만일 나랑 같이 살았으면 하루가 멀다 하고 존나 싸워댔을걸?”
투덜대며 하는 말에 재경은 웃음을 흘렸다. 평소에도 워낙 아웅다웅하는 사이다 보니 그 모습이 절로 그려졌다.
“흐암……. 근데 이 자식은 왜 이렇게 안 와? 가만히 있으니까 슬슬 졸리는데.”
“졸리면 눈 좀 붙이든가.”
“지금 자면 괜히 나갔다 왔다고 개난리 칠걸? 그리고 오늘 술 고파서 더 마시고 잘 거야.”
“그러든가, 그럼.”
“나 화장실 좀 갔다 올게.”
비틀비틀 걷는 걸음걸이가 몹시도 불안해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재경의 예상은 적중했다. 휘청거리면서도 갈 땐 그나마 걸어갔던 녀석이 나올 땐 또 네 발로 기기를 시전했다.
볼 때마다 기괴하기 짝이 없는 술버릇이었다. 재경은 옅은 한숨을 내쉰 뒤에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채 다가가기도 전에 김성욱이 옆으로 풀썩 쓰러졌다.
“……참 한결같다, 너도.”
허리를 굽힌 재경은 김성욱의 팔을 제 어깨에 걸치면서 일으켜 세웠다. 일전에 그랬던 것처럼 질질 끌어서 거실에 눕혀주기엔 날씨가 너무 추웠다. 감기라도 걸렸다간 온갖 엄살을 다 피워댈 녀석을 알기에 끙끙대면서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후우.”
간신히 침대에 눕혀주고 허리를 펴자 한숨이 절로 나왔다. 보기엔 저보다 말랐는데 완전히 축 늘어져서 그런지 보통 무게가 아니었다. 대충 이불을 덮어준 뒤에 몸을 일으켰다. 방문을 닫고 나오는데 마침 현관문에서 삐리릭 소리가 나더니 박성범이 들어왔다.
“갔다 왔어?”
“응. 밖에 바람 장난 아냐.”
“수고했어. 근데 성욱이 뻗었어.”
“뭐?”
멈칫하며 살짝 구겨진 표정으로 묻는 말에 재경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화장실 갔다가 기어 나와서 쓰러졌어. 방금 침대에 눕혀주고 오는 길이야.”
“저 진상을 진짜.”
쯧, 하고 혀를 찬 뒤에 박성범은 말을 이었다.
“나 올 때까지 기다리지 그랬어. 혼자 옮기기 무거웠을 텐데.”
“또 그대로 냅두라고 할까 봐.”
박성범은 한발 늦게 말뜻을 깨닫곤 피식 웃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집들이를 빙자한 술 파티를 벌였을 때 그대로 내버려 두라고 말했던 적이 있었다. 김성욱의 술버릇을 익히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괜찮겠어? 이불에 토할 수도 있는데.”
“세탁비 청구해야지 뭐.”
시계를 보니 어느덧 곧 있으면 10시였다. 재경은 무릎을 굽히고 앉아서 어질러진 상을 치우기 시작했다. 묵직한 비닐봉지를 바닥에 내려둔 박성범이 빈 소주병 두 개를 한 손으로 쥐면서 투덜거렸다.
“괜히 나갔다 왔네.”
“다음에 마시면 되지. 치우고 자자.”
“벌써 자려고?”
자기엔 지나치게 이른 시간이었다. 팔을 다치지만 않았어도 지금쯤 한창 커피를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면서 작업에 몰두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그럼 영화라도 볼까?”
“좋지. 맥주 사 올 걸 그랬……, 난 어차피 못 마시네.”
시무룩한 얼굴을 본 재경이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포갠 그릇과 빈 박스를 양손에 하나씩 들고 주방으로 가자 박성범이 그 뒤를 졸졸 따라갔다.
“치우는 건 내일 하자.”
“그릇도 몇 개 없는데 뭐. 빨리하고 갈 테니까 영화 뭐 볼지 고르고 있어.”
하지만 박성범은 자리를 떠나는 대신 은근히 다가가서 재경의 어깨에 턱을 올렸다. 재경이 설거지를 할 때마다 하는 버릇 아닌 버릇이었다. 슬며시 허리를 안으려는 움직임을 눈치챈 재경이 팔꿈치로 녀석을 밀어냈다.
“떨어져. 숨소리 거슬려.”
사실 숨소리보다는 내뱉는 입김이 귓가를 간질이는 게 신경 쓰였다. 녀석과 사귄 이후로, 정확히는 같이 밤을 보낸 이후로 재경은 자신이 귀가 약하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됐다.
“애인 숨소리가 거슬린다니, 너무한 거 아냐?”
“……!”
응징이라도 하듯 입술로 귓불을 덥석 무는 바람에 재경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하마터면 떨어뜨릴 뻔한 접시를 가까스로 잡은 뒤에 작은 목소리로 힐책했다.
“미쳤어? 얼른 떨어져.”
“화내지 마. 나 백허그 좋아하는 거 알잖아.”
“화내는 게 아니라, 성욱이 있으니까 그러지.”
“화장실에서 나오다 뻗었다며? 그럼 내일 아침까지 절대 안 일어날걸?”
“그래도…… 우웁!”
한술 더 떠 박성범은 재경의 턱을 붙잡으며 그대로 입술을 겹쳤다. 재경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밀어내려 했지만, 단단한 몸은 꿈쩍도 하질 않았다. 하여튼 힘 하나는 끝내주게 좋았다.
박성범은 틈을 놓치지 않고 재경이 느끼는 부분을 집중적으로 공략했다. 야릇하게 혀를 섞고, 민감한 입천장을 혀로 부드럽게 자극해주자 결국 재경의 입에서 옅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술을 마셔서 그런지 평소보다 더 감각이 더 예민하게 느껴졌다. ……에라 모르겠다. 손에 세제 거품이 묻어 있는 것도 잊고, 재경은 두 손으로 박성범의 등을 붙잡았다. 그에 자극받은 박성범이 재경을 냉장고로 밀어붙이고는 더욱 깊은 키스를 이어갔다.
“으응… 흐읏!”
옷자락 안으로 들어온 손이 탐닉하듯 허리를 어루만졌다. 거슬러 올라가서 손끝으로 유두를 문질러주자 재경이 흠칫 몸을 떨며 반응했다. 박성범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자신뿐만 아니라 재경의 중심도 흥분한 게 느껴졌다.
“하아…….”
입술을 떼자 타액이 실처럼 길게 늘어졌다. 가쁜 숨을 내쉬는 재경의 입술에 박성범은 한 번 더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리고 방에 들어가서 계속하자는 말을 꺼내려는 순간, 지척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네…… 지금 뭐 하는 거야?”
“……!”
재경도, 박성범도 그대로 얼음처럼 굳었다. 잠시 후, 박성범이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잠이 덜 깬 듯 흐리멍덩한 표정으로 서 있는 김성욱이 보였다.
깨달은 순간 심장이 미친 듯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너무 당황하니 머릿속에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박성범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가까스로 말을 꺼냈다.
“잠든 거 아니었어?”
“몰라. 눈 뜨니까, 끅, 사방이 캄캄해서 나왔어. 근데…… 방금 너네 뭐 한 거야?”
그나마 정신을 차린 박성범과 달리 재경은 완전히 얼어붙었다. 매사에 철두철미하고 야무지긴 해도 그만큼 이런 돌발 상황에는 약한 것이 단점이었다. 박성범도 당황하긴 마찬가지였지만, 아직 게슴츠레해 보이는, 술이 덜 깬 게 분명한 김성욱의 표정에 희망을 걸고 대답했다.
“재경이 눈에 뭐가 들어갔대서 불어주고 있었어.”
“눈에 뭐가, 히끅, 들어갔는데 왜 입술 박치기를 해? 설왕설래하는 것도 본 거 같은데…….”
“꿈이야. 가서 자.”
단호하게 대답한 뒤에 박성범은 김성욱의 어깨에 왼팔을 걸치고 방향을 틀었다. 언뜻 보면 정신이 없는 친구를 부축해주는 것 같지만, 실상은 억지로 끌고 가는 거나 다름없었다.
“방금 본 거, 꿈이니까 잊어. 입도 벙긋하지 마.”
“……그런가? 근데 나 목마른데…….”
“그것도 꿈이야.”
재경의 방에 도착한 박성범은 그대로 김성욱을 침대 위로 떠밀다시피 했다.
“눈 감아.”
깔린 이불을 억지로 빼내는데 김성욱이 혀 풀린 소리로 중얼거리는 말이 들려왔다.
“근데 둘이, 끄윽, 쪽쪽거리는 거 봤는데……. 혀도 막 왔다 갔다… 했는데에…… 크어어…….”
이내 작게 코 고는 소리가 이어졌다. 하, 하는 한숨을 흘린 뒤에 박성범은 대충 이불을 덮어주고는 밖으로 나갔다.
주방으로 돌아가니 재경이 식탁 의자에 앉아 있는 게 보였다. 두 손으로 머리를 짚고 있는 모습을 보니 대체 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백 프로 자신이 잘못한 일이었기에, 박성범은 머리를 헝클다가 사과하는 말을 꺼냈다.
“미안해. 내가 부주의했어.”
화를 내고 책망해도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재경은 화를 내는 대신 긴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나도 같이 그랬는데 뭘. 성욱이는?”
“다시 잠들었어.”
거듭 막막함이 담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가까운 사람에게, 그것도 이렇게 허무하게 들킬 거라고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다.
먼저 조심하자는 말을 꺼낸 사람은 박성범이었다. 혹시라도 재경의 입장이 난처해질까 봐 그런 거였고, 재경은 군말 없이 동의했다. 물론 학교에서 살갑게 말을 걸거나 가끔 어깨동무를 하긴 해도, 다들 사이가 좋아서 그런 줄 알지 설마 둘이 사귄다는 생각은 하지 못할 터였다.
“……어떡하지.”
“많이 취해서 기억 못 할 거야.”
과연 그럴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재경은 입 밖으로 말을 내지 않았다. 애써 덤덤한 척해도 박성범 또한 놀라고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일 터였다.
이미 일은 벌어졌는데, 화를 내거나 탓해봤자 서로에게 상처만 될 뿐이었다. 그리고 집에 다른 사람이 있는데 끝까지 녀석을 밀어내지 못하고 동조한 자신의 잘못도 분명 있었다.
“……일단 들어가서 자자.”
어깨에 닿는 손길을 느낀 순간, 재경은 저도 모르게 그 손을 쳐냈다. 뒤늦게 제 행동을 깨닫고는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미안. 갑자기 닿으니까 놀라서…….”
박성범은 아무렇지 않게 손을 거두며 되레 미안한 듯 웃어 보였다.
“괜찮아. 정리는 내일 내가 할 테니까 들어가서 자.”
“너는?”
“나가서 담배 한 대만 피우고 올게. 그리고…….”
잠깐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
“……이런 말 하는 것도 미안한데,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마. 설령 기억해도 어디 가서 떠벌리거나 그러지는 않을 거야.”
재경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아는 김성욱도 일견 가벼워 보이고 장난치는 걸 좋아하긴 해도, 타인의 험담이나 안 좋은 말을 함부로 퍼뜨리고 다니는 녀석은 아니었다.
“그럼 잠깐 나갔다 올게.”
“……추우니까 빨리 들어와.”
박성범이 먼저 자리를 떠나고, 재경도 뒤늦게 몸을 일으켰다. 타악- 방문을 닫자마자 거듭 한숨이 흘러나왔다.
커다란 킹사이즈 침대가 처음으로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생각 같아선 거실에서 자고 싶지만, 그랬다간 박성범이 정말로 상처를 받을 것 같아서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재경은 이불을 끌어 덮으며 눈을 감았다. 당연하게도 날이 새도록 한숨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 * *
“하암…….”
김성욱은 긴 하품을 흘리면서 기지개를 쭉 켰다. 눈을 뜨자 보이는 낯선 풍경에 잠깐 당황했지만, 이내 어제 박성범의 집을 찾아왔단 사실을 깨닫곤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핸드폰 시계를 확인해보니 오전 10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어쩐지 배가 고프더라니.
“목도 존나 마르네.”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키려다가, 순간 김성욱은 멈칫했다. 어떤 기억이 플래시백처럼 뇌리에 떠오른 탓이었다. 그대로 가장자리에 다시 걸터앉으면서 김성욱은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고, 거듭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면서 방문을 열고 나갔다.
거실은 잠잠했다. 뭐야, 설마 나만 놔두고 어디 갔나? 재경은 몰라도 박성범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놈이었기에, 서둘러 다급한 목소리를 냈다.
“아무도 없어? 이재경! 박성범!”
그러자 안쪽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한겨울인데도 반팔에 반바지 차림인 박성범이 여전히 깁스를 한 채 거실로 나왔다.
“일어나자마자 행패냐?”
“아무도 없는 줄 알고 존나 놀랐어.”
이내 김성욱은 홀쭉한 배를 문지르면서 비굴하게 웃었다.
“밥 없어?”
“밥은 없고, 삼각 김밥이랑 샌드위치는 있어.”
“그게 밥이지! 어딨어?”
“따라와.”
박성범이 먼저 주방으로 들어가고, 김성욱이 냉큼 그 뒤를 쫓았다. 식탁에 있는 편의점 봉지를 보고 반색하고는 서둘러 샌드위치 포장을 벗기기 시작했다.
“재경이는? 아직 자?”
“아까 도서관 간다고 나갔어.”
“헐, 진짜 부지런하네.”
……누구 때문인데. 박성범은 씁쓸한 표정으로 턱을 매만졌다.
여느 때와 달리 오늘 아침 분위기는 몹시 무거웠다. 재경이 밤새 잠을 설친 것처럼, 박성범 또한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기는 마찬가지였다.
입맛이 없다는 녀석에게 억지로 아침을 먹인 뒤에, 박성범은 ‘어제 못한 만큼 열공하라’면서 일부러 재경을 밖으로 내보냈다. 아직 멘탈이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김성욱과 마주쳐봤자 좋을 게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물론 그 상태로 공부가 될 리가 없었다. 그래서 가능한 빠른 수습이 필요했고, 그 수습은 자신의 몫이었다.
허겁지겁 샌드위치를 먹는 김성욱을 바라보다가 박성범은 무거운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먼저 말을 꺼내질 않는 걸 보니 자신의 바람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불안함을 완전히 해소하려면 확실히 해두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김성욱.”
“왜.”
“단도직입적으로 물을게. 어제 일 기억해?”
순간 멈칫하는 것을 박성범은 놓치지 않았다. 저도 모르게 한숨을 흘리는데, 김성욱이 입안에 든 것을 꿀꺽 삼키고는 시선을 마주했다.
“깜짝이야. 안 그래도 다 먹고 나서 말할랬어, 인마.”
기억하고 있는 게 확실했다. 그나마 고무적인 사실은 김성욱이 혐오감이나 거북스러움을 내비치는 것 같진 않다는 거였다. 되레 녀석은 지나칠 정도로 평온했다. 평온하다 못해 아무렇지 않게 샌드위치를 계속 흡입해서, ‘진짜 기억하고 있는 게 맞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니, 남은 조각을 눈 깜짝할 사이에 해치운 녀석이 입가를 탈탈 턴 다음 말을 이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어제 본 그대로야.”
그 말에 김성욱은 잠깐 애먼 곳을 쳐다봤다가 다시금 시선을 원위치했다. 답지 않게 한결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둘이…… 그런 사이야?”
“맞아.”
박성범은 나직한 목소리로 수긍했다. 심장 박동이 조금 빨라졌다. 겉으로는 일상 이야기를 하듯 자연스러운 대화가 이어지고 있지만, 과연 속으로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평소와 달리 진중한 김성욱의 표정이 불안함을 더했다.
“언제부터?”
“……작년 가을쯤부터.”
“헐.”
생각보다 오래된 기간에 헐, 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사실 조금 전에 김성욱이 침대에 걸터앉아서 했던 생각도 이거였다.
박성범은 자꾸 꿈이라고 했지만, 느닷없이 친구 놈 둘이 딥 키스하는 꿈을 꿀 리가 없었다. 백번 양보해서 만약 집에서 깼으면 꿈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침에 눈을 뜬 곳은 이재경의 방이었다.
이내 가느스름하게 뜬 눈이 박성범을 향했다.
“그렇다고 존나 취한 사람한테 자꾸 꿈이라고 세뇌를 시켜?!”
“……그대로 잊길 바랐으니까.”
순간 김성욱은 멈칫했다. 5년째 티격태격하며 절친으로 지내고 있지만, 저런 표정은 본 적이 없었다. 무거운 분위기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이윽고 차분하게 말을 잇는 음성이 들렸다.
“원래 난 이쪽 성향이고, 굳이 떠벌릴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 말 안 하고 있었어. 혹시라도 불쾌하다면 사과할게.”
“야…….”
“근데 재경이는 아냐. 내가 먼저 좋아했고, 고백한 걸 받아준 것뿐이야. ……욕하고 싶으면 욕하고 손가락질해도 상관없어. 그런데 재경이한테는 그러지 마. 부탁할게.”
처음으로 김성욱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 대상은 박성범이 아니라 본인이었다. 어젯밤 일이 생각나서 별 뜻 없이 꺼낸 말이었는데, 제가 너무 무신경했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다시 보니 녀석의 얼굴이 까칠한 게 밤새 제대로 못 잔 것이 분명했다. 여기까지 생각이 닿으니 괜히 미안하고, 한편으로는 슬그머니 성질이 났다. 뭐? 쌍욕을 해도 상관없다고?
“새끼, 사람을 뭘로 보고. 그게 지금 나한테 할 소리야?”
다른 곳을 보고 있던 박성범이 시선을 들었다. 체념의 기색이 다분한 표정이었다. 그 모습을 보니 더더욱 부아가 치밀었다. 생수병을 단숨에 절반 정도 비운 뒤에 김성욱은 허심탄회하게 말을 이었다.
“네가 그쪽인 건 대충 눈치채고 있었어. 괜찮은 여자들이 대시해도 다 거절하고, 애인이 있다면서도 학교에서 만나는 건 본 적도 없고. ……그리고 정혜가 남자들끼리 좋아하는 뭐 그런 거에 관심이 많아서 나도 딱히 거부감은 없어. 알잖아. 우리 여보야가 좋아하는 거면 나도 다 좋아하는 거.”
“…….”
“근데 뭐? 욕을 하고 손가락질을 해? 인마, 그랬으면 아침에 눈 뜨자마자 쌍욕 퍼붓고 나갔지, 너랑 이렇게 오붓하게 샌드위치나 처먹고 있겠어?”
말이 이어질수록 박성범의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처음엔 놀랐고, 서서히 당혹스러움이 번져갔다. 늘 생각 없이 해맑고 가벼운 놈인 줄로만 알았는데……. 설마 제 성향을 눈치챘으면서도 모른 척해주고 있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런 말들을 듣게 될 줄은 더더욱.
할 말이 있으면 해보라는 표정이 박성범을 향했다. 곤란하거나 민망할 때 늘 그러듯 뒷목을 매만진 뒤에 박성범은 뒤늦게 입을 열었다.
“미안. 당연히 안 좋은 쪽으로만 생각했지, 이렇게 풀릴 거라고는 예상 못 했어.”
“미안한 줄 알면 됐어, 새꺄.”
부러 퉁명스레 대꾸한 뒤에 김성욱은 편의점 봉지를 재차 뒤적거렸다. 이번엔 삼각 김밥 하나를 고른 뒤에 다시금 박성범의 시선을 마주했다. 어느덧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온 모습이었다.
“네가 먼저 고백했다고?”
“어.”
“근데 재경이가 잘도 받아줬네. 남자끼리 좋아하고 그런 건 생각도 안 해볼 거 같은 느낌인데.”
“물밑 작업을 엄청 했거든.”
그제야 박성범의 입가에도 옅은 미소가 번졌다. 일이 커지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고, 또 재경이 자신에게 고백했던 때가 오랜만에 떠올랐다. 코앞에서 그 모습을 본 김성욱이 우웩 하는 시늉을 한 뒤에 들으란 듯이 툴툴거렸다.
“지금 보니까 내가 남 좋은 일만, 아니 너 좋은 일만 시켰네.”
“뭐?”
“잊었어? 너랑 재경이랑 같이 살게 된 거, 따지고 보면 내 덕분이잖아. 지금 보니까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양을 늑대 굴속에 밀어 넣은 거였어…….”
어디까지나 농담으로 하는 말이었다. 박성범이 아무리 남자를 좋아한다 해도, 재경이 받아주지 않았으면 연인으로 발전하는 일은 없었을 테니 말이다.
“재경이한테도 말 좀 잘해줘. 많이 불안해하고 있을 거야.”
그러고 보니 일단 전화부터 해줘야 될 것 같았다. 생각난 김에 몸을 일으키는데 김성욱이 대답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왠지 나 피할 것 같지 않아?”
“그러진 않을걸. 아님 전화로 바꿔줄까?”
김성욱은 잠깐 고민하다가 거절했다.
“아니. 걍 얼굴 보면서 말하는 게 좋을 거 같아. 도서관에 있다고 했지?”
“어.”
“그럼 30분 뒤에 중도 앞으로 잠깐 나오라고 해. 내가 보자고 했다 말하고.”
박성범은 곧바로 오케이하는 대신 다시금 진중해진 표정으로 물었다.
“장난치거나 안 놀릴 거지?”
그 말에 김성욱은 거듭 인상을 팍 구겼다.
“아오, 씨. 벌써부터 대놓고 챙기냐?”
“걱정되니까 그렇지.”
“때려치워. 내가 이래 봬도 재경이한테는 얼마나 잘하는데.”
“그럼 다행이고.”
“암튼 씻고 나올 테니까 전화해줘. 걱정하지 말라 해주고.”
“알았어.”
“아 참, 그리고 어제 먹은 밥값은 안 줄 거야.”
입막음 값, 하고 덧붙인 뒤에 김성욱은 늘어지게 하품을 하면서 욕실로 들어갔다.
박성범도 몸을 일으켜 방으로 돌아갔다. 기분은 당연하게도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홀가분했다. 긴 시간 동안 김성욱과 알고 지내고 있지만, 오늘처럼 녀석에게 고마웠던 적은 없었다.
* * *
시간이 이렇게 느리게 갈 수도 있나 싶다. 거의 10초에 한 번꼴로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던 재경은 정확히 28분이 되었을 때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학인데도 도서관 로비를 오가는 유동 인구는 많았다. 재경은 바깥 풍경이 한눈에 보이는 창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햇빛을 피해 기둥 뒤에 서서 뚫어져라 바깥을 보고 있으니, 잠시 후에 두 손을 주머니에 푹 찔러 넣은 채로 어슬렁어슬렁 걸어오는 김성욱이 보였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김성욱도 재경을 알아보고는 망충스럽게 뛰어왔다.
“어우 씨, 존나 춥다. 어디로 갈까?”
엄동설한에 밖에서는 대화를 나눌 엄두가 안 나고, 그렇다고 카페로 가자니 사람들이 너무 많을 것 같았다. 결국 두 사람은 바로 옆에 있는 정보관으로 들어갔다. 2층으로 올라가서 적당히 안쪽에 있는 문손잡이를 돌리자 다행히 문이 열렸다.
“마셔.”
김성욱은 코트 주머니에 들어있던 캔 커피 하나를 꺼내서 재경에게 건넸다. 이내 혀를 차며 제 몫의 캔 커피를 땄다.
“얼굴이 그냥 퀭하네. 밤 꼴딱 샜지?”
재경은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박성범에게서 전화로 대충 자초지종을 듣긴 했지만, 마음이 무거우면서도 불편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와 달리 김성욱은 미지근한 커피를 단숨에 절반쯤 마신 다음 평소처럼 아무렇지 않게 말을 꺼냈다.
“얼굴 펴, 인마. 누가 보면 내가 그런 줄 알겠다.”
“…….”
“성범이한테도 말했는데, 나 그 녀석이 남자 좋아하는 건 대충 눈치 까고 있었어. 물론 넌 상상도 못 했지만.”
그제야 재경의 표정에 변화가 생겼다. 자신은 박성범과 같이 살아도 큰형의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는데, 설마 김성욱이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나 그런 거 신경 안 써. 너도 알다시피 내가 좀 오픈 마인드에 너그러운 사람이잖아. 뭐, 날 좋아한다면 곤란하겠지만 그럴 일은 없을 것 같고…….”
그러다 갑자기 김성욱이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그 새끼가 날 좋아했으면 존나 뻥 차줬을 텐데, 생각하니까 아쉽네.”
재경은 그제야 옅게나마 웃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내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가며 커피 캔을 만지작거리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진짜 아무렇지도 않아?”
“그렇다니까. 요샌 TV에서도 브로맨스인가 뭔가 해서 남자들끼리 썸 타는 거 더럽게 많이 나오더만 뭐. 그리고 너네 둘은 비주얼이 되잖아. 어제도……. 아냐.”
김성욱은 급하게 말을 멈췄다. 재경의 귀가 갑자기 확 달아오르는 게 보인 까닭이었다.
“난 진짜, 존나, 개미 눈곱만큼도 신경 안 써. ……사실 완벽하게 이해는 못 하겠는데, 그냥 사이가 특별히 더 좋은 거라고 생각하면 또 납득이 가. 내가 원래 좀 단순명쾌하잖아.”
“…….”
“그리고 둘이 잘 지내도 나한테는 각각 내가 좋아하는 내 친구들이고, 대판 싸우고 틀어진다 해도 마찬가지야. 달라지는 건 없고, 앞으로도 없을 거니까 쓸데없는 걱정은 넣어 둬.”
“…….”
“크, 나 지금 좀 멋지지 않았음?”
재경은 저도 모르게 작은 웃음을 흘렸다. 자화자찬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나 같은 친구 또 없다, 영광으로 알아라 등등 알아서 멍석 펴고 셀프 칭찬을 늘어놓더니, 남은 커피를 마저 마신 뒤에 다시금 시선을 마주했다.
“그래서, 밥은 언제 사 줄 거야?”
“밥?”
김성욱은 목에 힘을 주고 아까와 같은 말을 반복했다.
“너네 잘된 거 따지고 보면 내 덕분이잖아. 중매비는 안 줘도, 밥 한 끼 정도는 당연히 사 줘야 되는 거 아님?”
덕분에 재경은 완전히 자신의 페이스를 되찾고 여유롭게 맞받아쳤다.
“중매 잘못 서면 따귀 맞는 건 알고 있어?”
“너넨 잘 됐잖아. 아니면 지금 너희 사랑이 밥 한 끼의 가치도 없다, 그렇게 말하는 거야?”
애처럼 떼를 쓰는 모습을 보면서 재경은 거듭 웃었다. 장난삼아 대답했을 뿐이지, 밥 정도야 얼마든지 사 줄 수 있었다.
“알았어. 가자.”
“헐, 진짜? 역시 뭘 좀 아네.”
집에서 배를 채운 건 깡그리 잊고 김성욱은 벌떡 일어서서 재경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뭐 사 줄 거임?”
그 말에 재경은 고민도 하지 않고 대답했다.
“학식.”
“…….”
“싫으면 말고.”
“다른 선택지는……. 없겠지.”
혼자 묻고 혼자 답하는 목소리가 몹시도 침울했다. 그것도 잠시, 이내 김성욱은 오는 길에 존나 이상한 벌레를 봤다는 둥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별로 우스운 이야기도 아닌데 재경의 입에서는 미소가 가실 줄을 몰랐다.
녀석이 건네준 캔 커피의 온기도, 조잘대며 떠드는 목소리도, 어깨에 올린 팔도. 모든 게 그대로여서 다행이었다. 참으로 다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