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18/22)
  • 7.

    똑똑-

    ‘사용 중’이라고 적혀 있는 팻말을 보고 노크했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들려오질 않았다. 아무도 없나? 속으로 생각하며 녹음실 문을 열자 예상과 달리 박성범이 소파에 앉아서 누군가와 통화하는 중이었다. 눈짓으로 인사를 대신한 뒤에 최정열은 바퀴 달린 의자를 빼고 착석했다.

    “이틀 뒤엔 집에 가야지. 주말인데.”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기분 좋은 기색이 가득했다. 그것만 봐도 지금 누구와 통화하는지 알 것 같았다.

    “알았어. 재경이 너도 저녁 잘 챙겨 먹고 조심해서 갔다 와. 나중에 문자할게. 응. 사랑해.”

    통화가 끝나기 무섭게 최정열이 의자를 반 바퀴 돌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표정엔 심술이 가득했다.

    “그런 말은 밖에 가서 해, 인마. 사람 염장 지르지 말고.”

    “형도 미정 누나한테 하면 되죠.”

    “부부 사이에는 그런 말 하는 거 아냐.”

    정색하며 딱 잘라 하는 말에 박성범은 웃음을 흘렸다. 말은 저렇게 해도 아내에게 잡혀 살다시피 한다는 사실은 작곡 팀 멤버라면 누구나 알고 있었다.

    “계속 여기 있었어?”

    “아뇨. 아침에 집에 가서 눈 좀 붙이고, 좀 전에 다시 나왔어요.”

    박성범은 거듭 핸드폰으로 시선을 내렸다. 최정열이 그런 녀석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제 기억이 맞다면 며칠 전부터 박성범은 작업실에서 살다시피 하는 중이었다. 주로 늦은 밤부터 시작하는 것도, 일하는 중엔 작업실 지박령이 되는 것도 알고 있지만, 두어 달 만에 보니 좀 낯설긴 했다.

    분명 학업 때문에 당분간은 쉰다고 했으면서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마침 쉬는 김에 최정열은 넌지시 입을 열었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그래?”

    “네?”

    “당분간 공부에 올인할 거라면서 코빼기도 안 비쳤잖아. 저번엔 내가 불러서 온 거고.”

    “아아.”

    그제야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 박성범이 거듭 웃었다.

    “급하게 할 일이 생겼거든요. 참, 전에 말씀드린 건 알아보셨어요?”

    “어.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지금 나온 거야. 하루인가 이틀인가 하는 신생 기획사가 있는데, 그쪽에서 계속 사정사정하고 있어. 너한테 곡 받고 싶다고.”

    “가수는 누군데요? 아이돌 그룹인가.”

    “남자 솔로라는 거 같던데, 신인인 모양이야.”

    “흐음……. 신인은 좀 그런데요.”

    그러자 최정열이 의외라는 듯 눈을 둥그렇게 떴다.

    “왜. 넌 원래 그런 거 안 따지고 무조건 음색만 듣고 픽하잖아.”

    “그렇긴 한데, 지금 작업하는 건 영혼을 갈아 넣고 있거든요.”

    “하루 이틀 하는 것도 아닌데 새삼스레 무슨 영혼씩이나 갈아 넣어?”

    “애인 생각하면서 만드는 거라서요.”

    “헐, 진짜?”

    격한 리액션을 선보인 뒤에 최정열은 아예 의자를 질질 끌고 와서 부담스러울 만큼 소파 쪽으로 바짝 붙었다. 청춘들의 연애 이야기에 환장하는 사람답게 얼굴엔 설렘이 가득했다.

    “진짜야?”

    “네.”

    “언제는 질색팔색하면서 싫어했잖아.”

    “그땐 트루럽을 못 만나서 그랬나 봐요. 일이랑 사생활을 겹치고 싶지도 않았고요.”

    “그럼 지금은 만났고?”

    “그러니까 이러고 있죠.”

    얼굴에 피로한 기색이 가득했지만 표정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좋아 보이긴 했다. 이어서 박성범은 아쉽다는 듯 한마디를 더 보탰다.

    “제가 노래를 조금만 더 잘했어도 직접 불렀을 텐데…….”

    최정열이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하는 표정으로 박성범을 쳐다봤다. 질색하던 일을 먼저 나서서 하는 것도 그렇고, 조금 전 본의 아니게 들었던 통화 내용만 봐도 어지간히 상대에게 깊이 빠진 모양이었다.

    애처럼 좌우로 빙글빙글 의자를 돌리면서 최정열은 명쾌한 해결책을 제시해주었다.

    “그럼 네가 부르면 되지. 녹음해서 애인한테만 들려줘.”

    그러자 박성범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래도 될까요?”

    “안 될 게 뭐 있어. 근데 그렇게만 쓰면 아까우니까 버전을 좀 다르게 해서 이태성이나 희찬이 같은 애한테 넘겨. 음원 1위는 따 놓은 당상이니까 네 애인도 좋아하지 않겠어? 자기 생각하면서 만든 노래라는 거 알잖아.”

    “……형, 천재네요.”

    생각도 못 했다는 듯 감탄하는 표정에 최정열은 한껏 어깨를 으쓱하며 거들먹거렸다.

    “알았으면 받들어 모셔.”

    * * *

    대학교 주변 술집이 제일 장사가 잘되는 날은 단연코 신입생 환영회가 있는 시즌과 개강 시즌, 그리고 시험 기간이 끝난 직후였다. 오늘은 그 어디에도 해당 사항이 없지만, 불금이라 그런지 오픈하자마자 들어온 남학생 무리를 시작으로 손님들이 줄줄이 들이닥쳤다.

    “여기 맥주 500cc만 더 주세요!”

    “저희 어묵탕 시킨 거 아직 멀었어요?”

    추가 주문은 물론이고 틈틈이 새로운 손님들까지 가세하면서 호프집은 그야말로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덕분에 바깥 날씨는 이가 딱딱 부딪칠 정도로 춥지만, 분주하게 홀을 누비는 알바생들의 이마며 등에는 땀이 흥건했다.

    재경도 바쁘기는 마찬가지였다. 화장실 갈 짬도 없을 만큼 정신없이 일하다 보니 어느덧 퇴근 시간이 코앞이었다. 빈 테이블을 치우고 행주로 닦는데 최용식이 다가와서는 말을 걸었다.

    “오늘따라 뭔 사람이 이렇게 많은지……. 놔두고 얼른 퇴근해. 11시 넘었어.”

    “이것만 마저 하고 갈게요.”

    시계를 보니 정말 11시가 넘어 있었다. 재경은 서둘러 뒷정리를 끝낸 뒤에 스태프 룸으로 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오늘처럼 바쁜 날에는 원래 좀 더 남아 일을 도와주지만, 미안하게도 선약이 있었다.

    “죄송해요. 먼저 가볼게요.”

    “수고 많았어. 푹 쉬어.”

    밖으로 나오자마자 재경은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금세 연결음이 끊기며 박성범의 목소리가 들렸다.

    - 여보세요?

    “여보세요? 미안. 나 이제 마쳤어.”

    - 응. 근처에 차 대놨으니까 천천히 내려와.

    마침 한 층 위에 엘리베이터가 있는 걸 보고는 서둘러 버튼을 눌렀다. 잠시 후, 1층에서 내린 재경은 뛰다시피 해서 건물 밖으로 나갔다. 주변을 둘러보니 박성범이 “여기야.” 하고 손을 드는 모습이 보였다.

    “추운데 왜 나와 있어.”

    “네 전화 받고 방금 내렸어. 얼른 타.”

    빵빵하게 틀어둔 히터 덕분에 차 안엔 훈기가 가득했다. 박성범은 사이드 미러로 뒤를 확인한 후에 천천히 핸들을 돌렸다.

    “많이 바빴어?”

    “조금.”

    머잖아 사거리가 나타났다. 평소엔 직진해서 집으로 가지만, 오늘 박성범은 일찌감치 좌회전 깜빡이를 켜고 신호를 기다렸다. 며칠 전부터 ‘오늘 일 마치면 데이트하러 가자.’며 노래를 부르더니 정말 어디 갈 데가 있는 모양이었다.

    “어디 가는데?”

    “비밀이야. 30분 정도 걸리니까 피곤하면 눈 좀 붙여도 돼. 도착하면 깨워줄게.”

    평소에도 곧잘 웃는 편이지만 오늘따라 유독 기분이 좋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대체 어딜 가기에 저러는지 궁금했지만, 어차피 곧 있으면 알게 될 거라는 생각에 재경은 계속 캐묻는 대신 창문 너머로 시선을 옮겼다.

    “재경아, 일어나. 다 왔어.”

    분명 창밖을 보고 있었는데 저도 모르게 깜빡 잠이 든 모양이었다. 눈을 뜬 재경은 긴 하품을 한 다음 살짝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도착했어?”

    “응. 내리자.”

    차 문을 열자마자 차가운 바람이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뒤쪽으로 걸어가니 뜻밖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고도가 높은 곳에 올라왔는지 멀리 떨어진 아래로 반짝이는 도시의 야경이 보였다.

    주차장 왼편에는 아담한 건물이 서 있었다. 건물 윗부분에 달린 풍차 모양의 구조물과 상호명으로 짐작되는 글씨가 네온사인 불빛으로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 뒤늦게 발견한 게 있었다. 박성범이 신경 써서 머리를 만지는 건 평소에도 종종 그래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옷차림이 범상치 않았다.

    캐주얼한 정장 차림에 코트를 매치해 입은 모습을 보고 재경은 저도 모르게 자신의 옷차림을 점검했다. 알바하러 갈 땐 무조건 편한 게 최고라서, 얼마 전에 싸게 산 청바지에 무릎까지 오는 야상 점퍼를 입고 있었다. 일행이라 하기엔 격차가 꽤나 큰 차림새였다.

    “이러고 가도 돼?”

    “응?”

    “아니, 넌 차려입었는데 난 너무 무성의한 거 같아서.”

    박성범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빙긋이 웃었다.

    “전혀 상관없어. 가자.”

    재경의 어깨를 감싼 채 박성범은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거짓말처럼 포근한 온기가 두 사람을 반겼다. 밀착형 블랙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다가와서는 웃으며 말을 걸었고, 곧장 안쪽으로 자리를 안내해주었다.

    소파에 앉은 재경은 탐색하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조명은 전체적으로 어두우면서도 분위기가 있었고, 앞쪽에 있는 무대 위에서는 한 남자가 피아노를 치며 팝송을 부르고 있었다. 어쩐지 스피커에서 나오는 것 치곤 소리가 생생하다 했더니 라이브 카페쯤 되는 모양이었다.

    “카페야?”

    “응. 낮엔 커피만 팔고, 밤에는 와인이나 칵테일도 같이 팔아. 뭐 마실래?”

    메뉴판을 확인한 재경은 눈에 익은 칵테일을 골랐다. 박성범도 같은 걸로 주문한 뒤에 잠깐 기다리자, 예의 그 여인이 다가와서는 자그마한 칵테일 잔을 테이블에 올려주었다. 그러곤 박성범 쪽으로 몸을 기울여서 귓가에 대고 말했다.

    “지금 사용하셔도 되세요.”

    “감사합니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바엔 생각보다 손님들이 많았다. 막상 때가 되니 약간의 긴장감과 함께 쑥스러움이 차올랐지만, 이내 박성범은 마음을 다잡고 재경의 얼굴을 바라봤다.

    “있잖아, 나 지금 나가서 피아노 칠 거거든.”

    “피아노?”

    뜬금없는 말에 재경은 칵테일 잔을 든 채로 되물었다. 하지만 곧 무언가를 떠올리고는 손끝으로 앞쪽 무대를 가리켰다.

    “설마 저거?”

    “응. 너 생각하면서 연주할 거니까……. 잘 들어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박성범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뚜벅뚜벅 걸어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재경은 진짠가 하는 생각에 반신반의했다. 그런데 정말 무대로 이어지는 계단을 오르더니 피아노 앞에 앉는 것이 보였다. 곧 박성범의 두 손이 건반 위에 가볍게 놓였다.

    맑고 깨끗하게 울리는 소리에 어느덧 모두의 시선이 같은 곳을 향했다. 박성범은 피아노만 치는 것이 아니었다. 잠시 후, 약한 떨림을 담은 목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잔잔하게 울려 퍼졌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것도 잠시, 시간이 갈수록 재경은 박성범이 부르는 노래에 점점 빠져들었다. 그의 입을 통해서 흘러나오는 노랫말은 연인을 향한 설렘과 사랑고백을 담고 있었다. 화려한 기교를 갖춘 가수들에 비하면 조금은 부족할지도 모르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더욱 진실한 마음이 전해지는 것 같았다.

    “You’re the only one for me, like the sun in the sky.”

    음역대가 높은 파트가 이어지고, 이내 도입부와 같은 멜로디를 허밍으로 마무리하면서 노래는 끝이 났다. 박성범이 옅은 한숨을 내쉬며 피아노 건반에서 손을 떼자 곳곳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청중들을 향해 예의 바르게 인사한 뒤에 박성범은 무대 아래로 내려왔다. 남들 앞에서 피아노를 치며 노래까지 부른 건 처음이라 지금도 심장이 쿵덕거렸지만, 실수 없이 무사히 끝내서 다행이었다.

    자리로 돌아간 박성범은 손도 대지 않은 칵테일을 단숨에 들이켠 다음 재경을 향해 넌지시 물었다.

    “어땠어?”

    “잘 부르더라. 이것 때문에 여기로 온 거야?”

    “응.”

    처음엔 최정열의 말대로 녹음한 노래를 들려줄까 했지만, 아무래도 직접 부르는 게 더 나을 듯해 연주가 가능한 라이브 카페를 급하게 물색했다. 미리 찾아와서 사정을 설명하자 여 사장님은 흔쾌히 오케이해주었고, 약속대로 재경과 함께 이곳을 찾은 거였다.

    “가사 잘 들었어?”

    “어. 좋더라.”

    “아까도 말했는데, 이거 너 생각하면서 만든 노래야. 가사도 내가 직접 썼어.”

    그 말에 재경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작사엔 소질이 없어서 전문 작사가에게 일임한다고 들었는데, 설마 노랫말도 본인이 직접 썼을 줄은 몰랐다.

    “손님.”

    그 때였다. 갑자기 끼어든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오늘 무대에 오를 수 있도록 도와준 여 사장이 서 있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방금 부르신 노래 제목 좀 알 수 있을까요? 다른 손님께 요청이 들어와서요.”

    고마운 말에 박성범은 웃음 띤 얼굴로 대답했다.

    “아직 미발매된 곡이에요. 다음 달에 음원 공개되니까 그때 들어달라고 전해주세요.”

    그러자 사장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떠올랐다.

    “어머, 혹시 가수예요?”

    “아뇨. 이런 실력으로 가수하면 큰일 나죠.”

    씩 웃으며 너스레를 떨자 사장의 얼굴에도 웃음이 깊어졌다.

    “그럼 그렇게 전해드릴게요. 편안한 시간 보내세요.”

    “네. 감사합니다.”

    사장이 자리를 떠난 뒤에 재경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음원으로도 나와?”

    “응. 아쉽게도 내가 부르는 건 아니고, 다른 가수가 녹음해서 디지털 음원으로 발매할 거야.”

    이것 말고도 숨겨둔 이벤트가 하나 더 있었다. 저작권협회에 선등록을 할 때, 박성범은 평소에 쓰는 가명 대신 JGL라는 이름으로 등록을 마쳤다. 이건 나중에 음원이 공개된 뒤에 검색해서 재경에게 직접 보여줄 생각이었다.

    “장난 아니지?”

    “뭐?”

    “이런 이벤트 해주는 사람 또 만나기 힘들걸? 앞으로 절대 못 만날 거야.”

    이어서 박성범은 웃음을 감추며 짐짓 선심 쓴다는 투로 말을 이었다.

    “보답은 집에 가서 진한 키스 한 방이면 돼. 여기서 해줘도 되고.”

    “해줄 거 같아?”

    재경은 픽 웃음을 흘리며 냉큼 대꾸했다. 반쯤 남은 칵테일을 홀짝인 것도 잠시, 이내 손끝을 까딱까딱 움직이자 박성범이 찰떡같이 알아듣고는 상체를 기울였다. 가까워진 녀석의 귓가에 대고 재경은 웃음 띤 목소리로 말했다.

    “집에 가서 화끈하게 서비스 해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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