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싱싱한 상추 위에 양념 갈비와 마늘, 구운 양파 등이 차례로 쌓였다. 먹기 좋게 오므린 쌈을 한입에 밀어 넣은 박성범이 우물거리며 재경에게 물었다.
“고기 좀 더 구울까?”
“난 됐어. 너 더 먹을 거면 구워 줄게.”
“그럼 딱 두 줄만.”
재경은 식탁 의자에서 일어나 인덕션 전원을 켰다. 적당히 달궈졌다 싶을 무렵 프라이팬에 고기를 올리자 순식간에 맛있는 냄새가 퍼졌다.
주말을 맞아 두 사람은 오랜만에 집에서 점심을 먹는 중이었다. 며칠 전, 박성범이 어머니 호출을 받았다면서 본가에 다녀왔는데 갈 때와 달리 두 손 가득 묵직한 찬합을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번에도 과하다 싶을 정도로 넉넉하게 반찬을 싸주셨고, 그중엔 집에서 직접 만들었다는 갈비찜과 양념 갈비도 있었다.
덕분에 재경은 모처럼 든든한 한 끼 식사로 배를 채울 수 있었다. 설거지는 제가 하겠다고 말했지만 박성범은 틈을 주지 않고 싱크대 앞자리를 차지했다. 덕분에 선수를 빼앗기게 된 재경은 뒷정리를 끝낸 뒤에 방으로 들어갔다.
핸드폰 시간을 확인하고는 입고 있던 티셔츠를 훌렁 벗었다. 오늘 재경은 과외 말고 다른 약속이 있었다. 양재현의 누나가 모 연구소 하반기 공채에 최종 합격했는데, 비록 학교는 달라도 같은 학부인 동생과 그 친구들을 위해서 오늘 특별히 자신의 경험담을 들려주고 팁도 전수해 주기로 했다. 그쪽 분야도 염두에 두고 있는 재경에게는 무척 좋은 기회였다.
옷을 갈아입고 나오니 박성범은 소파에 앉아 있었다. 밖으로 나오는 기척을 느꼈는지 금세 이쪽을 바라보며 묻는다.
“커피 마실래?”
“내가 할게. 무슨 맛으로 해줄까?”
“너랑 같은 걸로.”
주방으로 간 재경은 커피 머신에 갈색 캡슐을 넣고 버튼을 눌렀다. 잠시 후, 한 손에 하나씩 잔을 들고 나가서 그중 하나를 건네주자 “땡큐.” 하며 손을 내민다.
TV에 시선을 고정한 채 커피를 마시는데 테이블 위에 올려둔 핸드폰이 짧게 울렸다. 폰을 켜서 확인해 보니 ‘다들 어디냐’며 김성욱이 찡찡대는 글이 새로 판 단톡방에 올라와 있었다.
[이제 나감]
짤막하게 답장을 보낸 뒤에 재경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방을 들고나오니 어느덧 현관 앞으로 다가온 박성범이 어리광을 부리듯 뒤에서 재경을 껴안았다.
“학교 가지 말고 나랑 같이 가면 안 돼?”
“말이 되는 소릴 해.”
“내가 표 끊어준다니까.”
“그런 문제가 아닌 거 알잖아. 나 이제 나가봐야 돼.”
“……냉정하기는.”
툴툴거리면서도 박성범은 순순히 재경을 놓아주었다. 원래라면 박성범도 오늘 같이 갈 계획이었지만 본의 아니게 일정을 바꿔야만 했다. 집에 갔을 때 아버지가 ‘할머니 생신 기념으로 주말에 가족 여행을 가기로 했으니 꼭 와야 한다’고 엄명을 내린 탓이었다.
“나가자. 데려다줄게.”
“됐어. 아직 시간 있으니까 걸어가면 돼.”
“네 전용 기사인 거 몰라? 안전하게 모셔다줄 테니까 같이 내려가자.”
그러더니 먼저 신발을 신고는 얼른 나가자고 재촉한다. 흡사 산책 가자고 조르는 강아지 같다고 생각하면서 재경은 녀석과 함께 집을 나섰다.
주말 오후라 그런지 학교 주변은 생각보다 한산했다. 정문에 거의 다 왔을 무렵 재경은 입을 열었다.
“여기서 세워줘.”
“왜. 뭐 살 거라도 있어?”
“성욱이랑 서점에 잠깐 들르기로 했어. 그리고 넌 오늘 가지도 않는데, 학교까지 데려다주면 이상하게 생각할 거 같아서.”
김성욱은 보기보다 눈치가 빨랐다. 아무리 한집에 살고 있다 해도,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것도 아닌데 학교 앞까지 차로 데려다주는 걸 보게 되면 괜한 의구심을 품게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박성범은 계속 액셀을 밟으면서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뭐 어때. 어디 가는 길에 잠깐 내려준 거라고 하면 되지.”
“……맞네. 그 생각을 못 했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박성범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어서 살짝 늦은 후회가 찾아왔다. 그러고 보니 서둘러 집을 나서느라 굿바이 키스를 못 했다.
‘최소 이틀은 못 볼 텐데. 지금이라도 어디 으슥한 골목으로…….’
하는 생각을 떠올림과 동시에, 하필이면 정문 앞에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김성욱이 고개를 들었다. 차를 알아봤는지 대번에 두 손을 번쩍 들고 휙휙 흔들어댄다. 박성범은 긴 한숨을 내쉬며 정문 근처에 차를 세운 다음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잘 다녀와.”
“너도.”
“키스해 달라고 하면 안 해줄 거지?”
“지금?”
“응.”
“당연하지.”
가차 없는 대답에 웃음이 나왔다. 당연히 안 될 걸 알고 던져본 질문이기에, 키스를 못 해서 아쉬울지언정 서운하다는 생각은 요만큼도 들지 않았다.
재경은 곧 차에서 내렸다. 문을 닫기 직전, 잠깐 뭔가를 생각하는 듯싶더니 살짝 상체를 기울여서는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갔다 오면 실컷 해줄게.”
뭐라고 할 틈도 없이 밖에서 차 문이 닫혔다. 뒷모습을 홀린 듯이 바라보다가 박성범은 뒤늦게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 진짜 미치겠다.”
어디서 저렇게 예쁜 녀석이 나타났을까. 아마도 당사자는 그럴 의도가 전혀 없겠지만,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는 게 수준급이 따로 없었다.
그사이 재경은 정문 앞에 도착했다. 거리가 좁혀지기 무섭게 김성욱이 말을 걸었다.
“쟤는 왜 안 내리고 저리로 가?”
뒤를 돌아보자 박성범의 차가 우회전을 해서 골목길로 빠지는 것이 보였다. 다시금 앞을 바라보면서 재경은 질문에 대답했다.
“가족 여행 있어서 못 간다고 했잖아.”
“그랬음? 난 왜 못 들었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 것도 잠시, 이내 김성욱의 시선이 다시금 앞을 향했다.
“그럼 쟨 여기까지 왜 온 거야?”
“근처에 뭐 살 거 있다길래 얻어 타고 왔어.”
“아하.”
다행히 김성욱은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는 눈치였다. 차 있는 놈이랑 같이 살아서 좋겠다며 부러움을 토로하더니 ‘가자’며 걸음을 옮겼다.
김성욱이 책을 고르는 동안 재경은 입구 쪽에 서서 핸드폰을 켰다. 어제가 월급날이었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닫고는 은행 앱에 로그인해서 잔고를 확인했다.
직접 얼굴을 비치는 일은 거의 없지만, 금전 문제만큼은 철두철미한 사장님답게 월급은 어제 오전에 일찌감치 입금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보다 앞서서 자동 이체로 걸어둔 금액이 삼촌 명의의 계좌로 빠져나간 것이 보였다.
하아, 소리 없는 한숨이 흘러나왔다. 삼촌의 얼굴을 떠올릴 때마다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뭐 해?”
고개를 들자 어느새 김성욱이 앞에 서 있었다. 재경은 그제야 핸드폰을 끄면서 대답했다.
“다 골랐어?”
“어. 가자.”
묵직한 책을 두 손으로 든 김성욱이 먼저 걸음을 옮겼고, 재경이 그 뒤를 따랐다.
* * *
집에 도착한 재경은 무거운 가방을 벗고 소파에 털썩 앉았다. 벽에 걸린 시계는 어느덧 저녁 8시께를 가리키고 있었다. 감사하게도 양재현의 누나가 저녁까지 사줘서 맛있게 먹고 방금 들어온 참이었다.
지이이잉-
주머니 속 핸드폰이 가볍게 진동했다. 메시지를 확인한 재경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자기야>_< 아직 다같이 있어?]
[방금 집에 왔어]
답장을 보냈더니 곧바로 전화가 걸려왔다. 재경은 소파에 깊숙이 몸을 묻으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 저녁 맛있게 먹었어?
“응. 너는?”
- 이제 막 식당에서 나서는 참이야. 배 엄청 불러.
“잘했어. 그럼 이제 숙소로 가는 거야?”
- 응. 해수욕장 근처에 있는 펜션이라서 방에서도 바다가 보이더라. 사전답사 열심히 해놓을 테니까 다음에 둘이 같이 오자.
재경의 입가가 가만히 올라갔다. 스치듯 그냥 한 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벌써 설레는 마음이 들었다.
“운전 네가 했다면서. 피곤할 텐데 얼른 들어가서 쉬어.”
- 그래야지. 보고 싶다.
“이틀만 있으면 보는데 뭘. 내일 또 전화하자.”
- 응. 잘 자. 내 꿈 꾸고.
통화를 끝낸 재경은 주방으로 들어갔다. 시원한 물로 목을 축이는데, 정면을 바라보는 시야에 아무도 없는 조용한 거실이 보였다. 적막함이 느껴진 것은 그다음이었다.
‘집이 이렇게 조용했었나?’
알바를 마치고 밤늦게 귀가하면 언제나 박성범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지 않은 날도 가끔 있긴 했지만, 씻고 잠자리에 들면 곧바로 곯아떨어지기 일쑤라서 외로움을 느낄 새도 없었다. 재경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물병 뚜껑을 닫았다.
‘외로움은 무슨.’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같이 산 지 아직 반년도 채 지나질 않았건만, 박성범과 함께 사는 생활에 완전히 익숙해져 버린 듯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고작 집에 혼자 있다는 이유로 외롭다는 감정을 느낄 리가 없었다.
거실로 돌아간 재경은 소파에 널브러져 있는 가방과 핸드폰을 챙겨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반듯한 침대를 보니 그대로 눕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유혹을 떨쳐내고 책상 앞 의자에 앉았다.
재경이 가능하면 예전과 같은 생활 패턴을 고수하려는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았다. 연애 중이라 해도 본분은 학생이니 열심히 공부하는 게 당연했고, 우선순위를 달리했다가 혹시라도 시험을 망치거나 성적이 엉망으로 나오기라도 했을 때 절대 남 탓을 하고 싶지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근처에 둔 핸드폰이 갑자기 진동하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재경은 펜을 내려놓고 핸드폰 액정을 확인했다. 내심 박성범인가 싶었지만, 예상과 달리 모르는 번호가 보였다. 잠깐 고민하다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여보세요? 재경 학생 핸드폰 맞나요?
“네. 맞는데 누구시죠?”
- 상록수 요양원 보호사예요.
“아.”
재경은 퍼뜩 자세를 바로 하며 핸드폰을 고쳐 잡았다. 늘 인자하게 웃는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 좀 전에 전화하고 문자도 남겼는데 연락이 없어서 다시 전화했어요.
순간 재경은 불안함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보호자 연락처에 자신의 번호를 적어놓긴 했지만, 이제껏 수납처가 아닌 보호사에게서 전화가 걸려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무슨 일이냐고 다급하게 물으니 안타까움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하는 대답이 들렸다.
“이귀남 할아버지가 지금 많이 위독하세요. 이제 곧 연명 치료를 중단한다는 말이 들리던데……. 재경 학생 안 오는 게 마음에 걸려서 고민하다가 전화했어요.”
어느 순간 심장이 불안할 정도로 빠르게 시작했다. 재경은 마른침을 삼킨 뒤에 간신히 입을 열어 대답했다.
“전화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 바로 갈게요.”
통화를 끝내자마자 벌떡 일어섰다. 하지만 정신이 없어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방황하다가, 가까스로 핸드폰과 지갑을 챙겨 들고 집을 나섰다.
* * *
버스를 타고 가는 내내 얼마나 불안했는지 모른다. 한 번 더 보호사님에게 전화가 걸려오면 무슨 말을 듣게 될지 너무도 자명한 까닭이었다.
다행히 핸드폰은 울리는 일 없이 잔잔했다. 시종일관 초조하게 다리를 떨던 재경은 버스가 정차하자마자 병원 건물을 향해서 내달리기 시작했다.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정문으로는 출입이 불가능했다. 옆에 있는 문을 이용해서 건물 안으로 들어간 재경은 숨 돌릴 겨를도 없이 엘리베이터로 가서 버튼을 눌렀다.
문이 열리자마자 할아버지가 계신 병실로 달려갔다. 마침 복도로 나오던 보호사가 재경을 알아보고는 서둘러 말을 건넸다.
“왔어요?”
“네. 할아버지는요?”
“7층 집중관리실에 계세요. 그쪽으로 올라가 봐요.”
재경을 바라보는 보호사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떠올랐다. 얼마나 뛰어왔으면 이 날씨에 이마에 땀이 흥건할까. 그 속을 알 리 없는 재경은 감사하다는 인사를 건넨 뒤에 한 번 더 엘리베이터를 타고 7층으로 올라갔다.
하지만 방금처럼 곧바로 안쪽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무슨 일로 오셨냐며 깐깐하게 물은 간호사는 재경이 할아버지 성함을 대자 그제야 따라오시라며 길을 안내해 주었다.
“저쪽, 제일 끝 침대예요.”
간호사가 가리킨 곳에는 하얀 파티션이 침대 전체를 가리고 있었다. 재경은 짤막한 인사를 건넨 뒤에 성큼성큼 안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안쪽을 보게 된 순간 저도 모르게 깜짝 놀라고 말았다.
파티션 너머에는 할아버지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얀 가운 차림의 의사와 간호사가 서 있고, 그 뒤쪽으로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삼촌이었다.
갑자기 나타난 재경을 보고 삼촌도 놀란 듯했지만, 이내 언짢음이 드러나는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
“네가 여긴 어쩐 일이야?”
“병원에서 전화가 왔어요. 할아버지가 많이 위독하시다고…….”
그러자 삼촌은 금세 못마땅한 듯 표정을 구기며 되물었다.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고?”
“네. 그나저나 할아버지는…….”
재경은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침대에 반듯하게 누운 할아버지는 두 눈을 굳게 감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려는데, 뒤늦게 무언가가 재경의 시선에 박혔다. 할아버지의 몸과 전선으로 연결되어 있는 모니터링 기계가 캄캄하게 꺼져 있었다.
깨달은 순간, 심장이 무서운 속도로 뛰기 시작했다. 언짢은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삼촌이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좀 전에 돌아가셨어.”
“…….”
순간 재경은 그대로 굳고 말았다. 분명 귀로는 삼촌이 하는 말을 들었는데,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혀 튕겨 나간 것처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머리가 굳어 버린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다가 뒤늦게 간신히 입술을 달싹였다.
“돌아……가셨다고요?”
“그래.”
“그런데 왜 저한테 연락 안 하셨어요?”
눈가에 멋대로 눈물이 스며 나오기 시작했다. 여전히 눈살을 찌푸린 채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삼촌이 혀를 차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연락하면 뭐 어쩌려고. 네가 무슨 신이라도 돼? 의사도 못 살려서 포기하라는 걸, 너한테 연락해서 뭐 어떡하라고.”
“그런 뜻으로 말씀드린 게 아니잖아요!”
“이게 지금 어디라고 삼촌 앞에서 언성을 높여? 그리고 네가 한 짓은 잊었어? 할아버지 병원비 좀 보태라고 했을 때 패악 부리고 뛰쳐나갔을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눈 부릅뜨고 삼촌한테 대들어, 대들길?”
“……그래도 제가 손자잖아요. 할아버지 살아계실 때 얼굴 보고…… 마지막 인사라도 할 수 있게 해주시지…….”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어느새 가득 차오른 눈물이 아래로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런 재경에게 돌아온 것은 칼날처럼 가슴을 후벼 파는 모진 말이었다.
“그렇게 할아버지 생각하는 마음이 컸으면 알아서 진작 좀 찾아뵙지 그랬어? ……정 아쉬우면 지금이라도 인사드려. 의사 불러올 테니까.”
파티션 너머로 멀어지는 발소리가 들렸다. 재경은 뒤늦게 고갤 돌려 할아버지를 바라봤다. 평온하게 잠든 듯한 얼굴을 바라보는 동안 통제되지 않는 눈물이 멋대로 또 흐르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하면 할아버지와의 사이가 딱히 좋았던 것은 아니었다. 부모 없는 어린 손자를 거둬서 홀로 키워주신 것. 지금 생각하면 그 자체만으로도 감사하고 평생 은혜를 갚아야 할 일이지만, 당시의 재경은 너무도 어렸다. 할아버지는 무척이나 무뚝뚝했고, 이른 아침부터 온종일 밭일에 매달려 있어서 저녁에 잠깐 얼굴을 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재경은 본의 아니게 일찍 철이 들어 버렸고 말수가 없는 아이로 성장했다. 남보다는 가깝지만 가족이라는 유대감은 딱히 없는, 혈연이라는 울타리로만 헐겁게 묶인 사이. 그런 상태에서 할아버지가 치매가 걸리고 재경이 삼촌 집으로 들어가게 되면서 조손 사이는 더더욱 서먹서먹해졌다.
그래도……. 그래도 재경에겐 유일한 가족이나 다름없는 분이었다. 성치 않은 몸으로 10년이 넘도록 키워주셨는데, 한 번씩 병원을 찾아올 때마다 아이처럼 활짝 웃으며 그렇게나 좋아하셨는데……. 임종을 지킬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곁에 있어드리지 못 했다고 생각하니 이루 말할 수 없는 미안함과 죄책감이 밀려왔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할아버지….”
재경은 겨우 팔을 뻗어서 시트에 덮인 할아버지의 앙상한 손을 살며시 쥐었다.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잠시 후에 의사를 필두로 한 사람들이 침대로 다가왔고, 삼촌과 나누는 대화가 재경의 귓가를 덧없이 스치고 지나갔다.
* * *
적에게 크리티컬 데미지를 맞은 캐릭터가 처참하게 뻗어버렸다. 심심해서 잠깐만 한다는 게, 거의 두 시간 가까이 핸드폰을 붙잡고 있었단 걸 확인한 박성범은 미련 없이 게임을 종료했다.
근처에 있던 리모컨으로 TV 채널을 돌리던 것도 잠시, 박성범은 다시금 핸드폰을 켜고 시간을 확인했다. 이제 막 밤 11시를 넘은 것을 보고는 잠깐 고민하다가 재경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기 전에 한 번 더 목소리를 듣고 싶어서였다.
- ……어.
혹시 잠들었을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재경은 전화를 받았다. 박성범은 포갠 베개 위에 편하게 등을 기대며 기분 좋은 목소리로 물었다.
“뭐 하고 있어?”
- ……잠깐 밖에 나와 있어.
“밖에? 뭐 사러 갔어?”
- …….
그런데 어쩐 일인지 수화기 너머는 잠잠했다. 박성범은 핸드폰을 고쳐 잡으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여보세요? 이재경?”
- …….
“여보세요? 내 말 안 들려?”
저도 모르게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약간의 시간이 더 흐른 뒤에야 대답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 듣고 있어.
듣자마자 박성범은 뭔가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뭐라고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는데, 계속 뜸을 들이는 것도 그렇고 대답하는 목소리도 평소와 느낌이 사뭇 달랐다.
“너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 …….
“대답 좀 해 봐. 왜 그래. 응?”
옆 싱글 침대에서 핸드폰을 만지고 있던 둘째 형, 박성현이 의아하다는 시선을 보냈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묘한 불안감에 한 번 더 닦달 아닌 닦달을 하려는 순간, 옅은 울먹임이 섞인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어.
“……!”
순간 박성범은 그대로 동작 그만 상태가 되었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당황해서 눈을 깜빡이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다급하게 물었다.
“너 지금 어디야?”
- ……할아버지 계신, 요양 병원.
조금 더 커진 흐느낌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박성범은 곧바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옷장으로 다가갔다.
“지금 바로 그쪽으로 갈게.”
- 뭐?
“지금 바로 그쪽으로 간다고. 문자로 주소 알려줘.”
- 괜찮아. 너 지금 가족 여행 중이잖아.
“지금 그깟 여행이 문제야? 바로 출발할 테니까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알았지?”
전화를 끊은 박성범은 지갑을 찾아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 모습을 본 박성현이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 있어?”
“친구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대. 지금 바로 가봐야 돼.”
그 말에 박성현은 살짝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가, 다시금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면서 대답했다.
“그럼 그냥 내일 가. 친구 부모님도 아니고 할아버진데, 가족 여행 중에 가는 건 오바 아냐? 어차피 내일 서울 올라갈 건데.”
“아니, 지금 가야 돼. 차 키 놔두고 갈 테니까 내일 형이 끌고 올라와. 엄마한테 말 좀 전해주고.”
“야, 박성범!”
뒤에서 부르든 말든 박성범은 그대로 펜션을 나서며 핸드폰으로 택시를 호출했다.
택시 안은 조용했다. 박성범은 줄곧 차창 밖을 보고 있다가 한 번씩 핸드폰 화면을 확인했다. 표정은 빈말로도 좋지 않았다. 최대한 빨리 가달라는 요청을 들은 택시 기사가 거침없이 액셀을 밟으며 고속도로를 내달리고 있는데도 시간이 무척이나 더디게 흐르는 기분이었다.
잠시 후, 눈에 익은 지명이 커다랗게 적힌 표지판이 나타나자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십여 분 정도를 더 달리자 외진 곳에 홀로 우뚝 서 있는 병원 건물이 나타났다. 마침내 택시가 멈춰 서자 박성범은 거스름돈도 받지 않고 서둘러 차에서 내렸다.
곧바로 통화 버튼을 누른 뒤에 정신없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윽고 저만치 떨어진 벤치에 앉아 있는 검은 인영을 발견하고는 서둘러 그쪽으로 뛰어갔다.
“이재경!”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재경이 고개를 들었다. 박성범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왔어?”
“괜찮아?”
다급히 어깨를 붙잡으며 묻는 물음에 재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또다시 울컥 올라오려는 감정의 덩어리를 간신히 삼킨 뒤에 애써 태연한 음성으로 물었다.
“어른들 화나진 않으셨어?”
“당연하지. 너야말로 괜찮아? ……할아버지랑 인사는 했어?”
재경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박성범의 눈에 들어왔다. 아무 말도 못 하는 모습을 본 순간, 자신이 실수했음을 본능적으로 깨닫고는 안절부절못하다가 두 팔로 재경을 와락 껴안았다. 덩달아 고조되는 감정을 애써 억누르며 작은 목소리로 조곤조곤 속삭이듯 말했다.
“옆에 못 있어 줘서 미안해.”
“…….”
“울고 싶으면 참지 말고 울어. 괜찮으니까.”
재경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잠시 후, 안쓰러울 정도로 마른 어깨가 서럽게 들썩이기 시작했다. 옷깃이 축축하게 젖어 드는 것을 느끼며 박성범은 가만히 재경을 안아주었다.
* * *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것처럼 하늘이 어두웠다. 장례식장을 지키고 있던 재경은 누군가의 호출을 받고 잠깐 밖으로 나왔다.
인적 없는 곳으로 걸어가자 낯익은 여인이 재경의 이름을 불렀다.
“재경 학생!”
마지막까지 할아버지를 돌봐주셨던 요양 보호사였다. 가까이 다가온 그녀는 밤새 얼굴이 반쪽이 되다시피 한 재경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다가 가만히 손을 뻗어 재경의 손을 잡아주었다.
“힘내요. 응?”
“……네. 여기까지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제 오전까지만 해도 괜찮으셨는데 정말 갑자기 상태가 악화되셨어요. 간호사한테 물어보니까 중환자실에 계시다길래 얼른 좋아지셨으면, 하고 바랐는데……. 갑자기 그렇게 되실 줄은 생각도 못 했어요. 미리 연락 못 해서 미안해요.”
“……아니에요. 보호사님 아니었으면…….”
또다시 눈가가 빨개지는 재경을 본 보호사가 퍼뜩 말을 이었다.
“주제넘은 말일지도 모르지만, 행여나 본인 탓은 절대로 하지 마세요. ……내가 20년이 넘게 요양 병원에서 어르신들을 보살피고 있지만, 친자식들도 부모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얼굴 한 번 비치지 않는 일이 허다해요. 물론 다들 사정이 있으니 이러쿵저러쿵 말할 수는 없지만……. 재경 학생이 할아버님께 얼마나 최선을 다했는지는 옆에서 지켜본 내가 제일 잘 알아요. 그러니까 슬퍼하되 절대로 자신을 탓하지는 말아요. 아마 할아버님도 틀림없이 나랑 같은 마음일 거예요.”
“……네. 감사합니다.”
힘내라는 듯 재경의 두 손을 꼭 쥐었다 놓은 뒤에 요양 보호사는 옆 건물로 돌아갔다. 멀리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박성범이 다가와서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누구셔?”
재경은 퍼뜩 눈가를 훔친 뒤에 대답했다.
“할아버지 돌봐주셨던 보호사님이야. 잠깐 짬 내서 와주신 것 같아.”
“감사하네.”
“……응.”
주위를 살핀 박성범은 근처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는 손끝으로 재경의 눈가를 닦아주었다.
“방금 성욱이한테 문자 왔는데, 5분 정도 있으면 도착할 거 같대.”
다음날 바로 치러진 장례 때문에 정신이 없는 재경을 대신해서 학과 사무실에 연락한 것도, 친한 동기들에게 연락을 돌린 것도 박성범이었다. 이윽고 그는 재경의 어깨를 가볍게 감싸 안았다.
“춥다. 들어가자.”
설핏 웃으며 건네는 말에 재경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걸음을 옮겼다. 정신이 없어서 아직 말하진 못했지만, 열 일 제치고 듬직하게 곁을 지켜주는 녀석이 그저 고맙기만 했다.
* * *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시간을 확인한 교수가 강의실을 나섰다. 교재며 필기구를 서둘러 가방 안에 챙겨 넣는데, 옆자리에 앉은 김성욱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박성범에게 말을 걸었다.
“대체 뭔 일이야?”
“뭐가.”
“너 양 교수님 별로 안 좋아하잖아. 앞쪽에 앉은 것도 신기한데, 보니까 필기도 존나 열심히 하던데? 딴 사람인 줄 알고 계속 쳐다봤잖아.”
녀석의 말마따나 박성범은 방금 끝난 전공 수업 담당 교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은 1교시부터 완전 집중해서 수업을 듣고, 난생처음 노트북으로 강의를 녹음하기까지 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본인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점심 뭐 먹을래? 난 얼큰한 거 당기는데.”
“약속 있어서 먼저 갈게. 나중에 보자.”
“야, 박성범!”
당황한 듯 소리쳐 부르는 놈을 뒤로한 채 박성범은 빠른 걸음으로 강의실을 벗어났다. 차에 오른 그는 도중에 잠깐 어디에 들렀다가 다시금 집으로 차를 몰았다. 잠시 후 빌라에 도착한 박성범은 가방 대신 ‘죽’이라는 글자가 크게 적힌 쇼핑백을 들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재경의 할아버지 장례식은 별 탈 없이 무사히 마무리되었다. 시신은 화장해서 납골 공원에 안치했고, 박성범은 모든 절차가 끝날 때까지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재경의 곁을 지켰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이틀간 잠을 거의 못 자고 힘들어하더니,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재경은 고열에 시달리며 앓아누웠다. 그 와중에 대체 무슨 생각인지 다음 날부터 학교에 가겠다는 말에 박성범은 드물게 정색하며 반대했다. 그리고 나중에 재경이 알면 혼날 걸 알면서도, 자신의 수업을 포기하고 재경의 시간표대로 수업을 들으면서 한껏 집중력을 발휘했다.
한 시간이 훌쩍 넘는 수업을 4교시 연속으로 듣는 건 생각보다 고달픈 일이었다. 덕분에 박성범은 새삼 재경이 얼마나 의지가 강한 녀석인지를 온몸으로 체감하며 도어락을 해제하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 있어?”
방문에 대고 노크했지만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아직 자는 중인가? 조심스럽게 문손잡이를 돌리려는 찰나, 뒤편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재경의 목소리가 들렸다.
“왔어?”
세수를 한 모양인지 머리카락이 물에 살짝 젖은 것이 보였다. 박성범은 곧장 가까이 다가가서 재경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몸은 좀 어때?”
“많이 좋아졌어.”
“가서 밥 먹자. 죽 사왔어.”
덥석 재경의 손을 잡으며 박성범은 주방으로 걸어갔다. 재경이 자기가 하겠다고 했지만, 못 들은 척하며 플라스틱 뚜껑을 죄다 열어주고는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자신과 같은 메뉴인 것을 본 재경이 박성범에게 물었다.
“죽 안 질려?”
“먹을 만해. 진짜 오랜만에 먹는데 생각보다 맛있는 거 같아. 재경이 네 입엔 어때?”
“맛있어.”
“내가 하겠다고 안 설쳐서 다행이네.”
자아 고찰하듯 진지한 어조로 하는 말에 재경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실제로 박성범은 죽을 손수 끓여볼까 하는 고민을 잠깐 했지만, 쌀조차 몇 번 씻어본 적이 없는 경험치를 상기하고는 깨끗하게 포기했었다.
순식간에 한 그릇을 뚝딱 비운 박성범과 달리 재경은 간신히 절반 정도만 먹고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뒷정리라도 하고 싶었지만 박성범이 그걸 가만히 보고 있을 리가 없었다. 양치질하라며 등을 슬쩍 떠미는 바람에 못 이기는 척 욕실로 들어갔고, 잠시 후에 나와서 침대에 앉아 있으니 박성범이 냉큼 뒤따라와서는 가장자리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다음 수업 때문에 가봐야 될 거 같아.”
“그러게 그냥 시켜먹는다니까.”
“내가 불안해서 안 돼. 그럼 갔다 올 테니까 편하게 푹 쉬고 있어.”
“알았어. 얼른 가.”
하지만 박성범은 곧바로 나가는 대신 슬쩍 상체를 기울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래도 나랑 같이 먹으니까 덜 심심하지?”
“어.”
“죽도 맛있었지?”
“어.”
“그럼 뽀뽀해줘.”
“……왜 갑자기 얘기가 그리로 튀어?”
“원래 세상은 기브 앤 테이크야. 알 만하신 분이 왜 이러실까?”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이는 행동에 재경은 픽 웃음을 흘렸다.
“감기 옮아.”
“나한테 옮기면 땡큐지.”
“됐으니까 얼른 가기나 해. ……나으면 많이 해줄게.”
“약속했어.”
입술 대신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춘 뒤에 박성범은 밖으로 나갔다. 홀로 남은 재경은 다시금 이불을 덮으면서 몸을 뉘었다.
확실히 체력이 많이 떨어지긴 한 모양이었다. 며칠간 정신없이 잤는데도 눕자마자 또다시 졸음이 밀려왔다.
가물가물, 느리게 깜빡이는 눈꺼풀에 물컵과 약봉지가 보였다. 그러고 보니 아직도 박성범에게 고맙다는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나중에 귀가하면 꼭 말해줘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재경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제 녀석이 없으면 어떡할까’ 하는 생각이 문득, 아주 문득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