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16/22)
  • 5.

    “아오, 죽겠다.”

    테이블 위에 거꾸로 놓여 있던 의자를 전부 내린 최용식이 앓는 소리를 내며 허리를 폈다. 홀 쪽으로 돌아가려는데 마침 출입문이 열리며 재경이 들어왔다.

    “왔어?”

    “안녕하세요, 형. 옷 갈아입고 올게요.”

    “오냐.”

    재경은 곧장 스태프 룸으로 직행했다. 외투를 벗는데 갑자기 가방 안에서 진동음이 들려왔다. 잠깐 손을 멈추고 핸드폰을 꺼내자 문자 한 통이 들어와 있었다.

    [뭐해?]

    발신자는 유지원이었다. 이름을 보니 자연히 며칠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서로 취향이 잘 맞는다더니 유지원과 박성범은 시종일관 유쾌하게 대화를 나눴다. 주로 음악이나 영화 이야기 등이 오갔는데, 유지원이 한 번씩 말을 걸 때마다 재경은 진땀을 흘렸다. 나름 챙겨주려고 그런 것 같기는 한데, 처음 들어보는 영화 제목이나 외국 배우 이름 등을 들먹이니 대답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식사를 마친 뒤에 유지원은 번호를 교환하자며 본인의 핸드폰을 내밀었다. 거절할 만한 분위기가 아니라서 재경은 자신의 핸드폰 번호를 찍어주었고, 금세 걸려온 번호를 ‘유지원 형’이라는 이름으로 저장했었다. 이후로 유지원은 하루 한두 번꼴로 말을 걸거나 문자로 안부를 묻곤 했다.

    시계를 보니 아직 여유가 있어서 재경은 빠르게 답장을 보냈다.

    [알바하러 왔어요]

    그러자 곧바로 전화가 걸려왔다. 재경은 통화 버튼을 누르며 캐비닛에 등을 기댔다.

    “여보세요?”

    - 여보세요? 나야. 잠깐 통화 가능해?

    “네. 말씀하세요.”

    - 어제 성범이랑 잠깐 만났는데, 알고 있어?

    “네.”

    귀국 후 일주일간 휴가 겸 연차를 썼다면서 자꾸만 불러대는 통에 오늘 또 잠깐 만나기로 했다던 박성범의 말이 생각났다. 재경은 물론 재밌게 놀다 오라고 대답했었다.

    - 안다니 잘됐네. 어제 같이 한잔했는데, 성범이가 고민이 있는 거 같더라고. 너랑 관련해서.

    마지막 말에 재경은 멈칫했다. 벽에 걸린 시계를 한 번 더 확인한 뒤에 빠르게 되물었다.

    “저랑 관련해서요?”

    - 어. 전화로는 좀 그렇고, 오늘 잠깐 볼 수 있어? 성범이 없을 때 만나는 게 좋을 거 같아서.

    오늘 오랜만에 작업실에 갈 거라고 했는데 유지원도 그걸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바로 어제 만났으니 얘기했을 수도 있지만, 어쩐지 좋은 기분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재경은 뒤늦게 대답했다.

    “죄송한데 알바가 11시에 끝나서요.”

    - 뭐 어때. 끝나고 잠깐 보면 되지.

    “늦은 시간인데 괜찮으시겠어요?”

    그 말에 유지원이 귀엽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 11시면 한창 신나게 놀 때지. 전화 끊으면 너 알바하는 곳 주소 문자로 보내. 시간 맞춰서 그쪽으로 갈게.

    틈을 주지 않고 몰아붙이다시피 한 탓에 재경은 그만 거절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마지못해 지도를 캡쳐해서 보내주고는 그제야 서둘러 옷을 갈아입었다.

    “왜 이렇게 늦게 나왔어?”

    “전화가 와서요.”

    “그래? 형 잠깐 화장실 좀 갔다 올게.”

    곧 최용식이 자리를 비웠고, 재경은 행주로 테이블을 닦기 시작했다. 세정제를 칙칙 뿌리며 손은 기계적으로 움직이지만 머릿속에는 금세 딴생각이 차올랐다.

    ‘성범이가 고민이 있는 거 같더라고. 너랑 관련해서.’

    평소였으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넘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 걸리는 점이 있었다. 틈틈이 백허그를 하거나 입맞춤을 하는 것은 여전하지만, 근래 박성범은 한 번씩 자신을 좋아하냐는 질문을 할 때가 있었다.

    녀석에 비해 애정표현이 박하다 보니 장난을 빙자해서 듣고 싶어 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시간이 갈수록 어쩐지 그런 뉘앙스가 아닌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 말곤 딱히 달라진 점이 없었기에 모르는 척하고 지켜볼 생각이었는데……. 그런 상황에서 박성범이 저와 관련해 고민이 있단 말을 듣게 되니 순간이나마 심장이 철렁했다.

    ‘고민이 뭘까.’

    표현을 잘 안 하는 게 불만인가? 아니면 내가 평소에 너무 틱틱거렸나? 그것도 아니면 혹시 잠자리가 만족스럽지 않기라도…….

    “…….”

    생각을 이어갈수록 재경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 그리고 새삼스레 충격을 받았다. 무뚝뚝한 성격 탓으로 치부하고 넘기기엔, 박성범에 비해서 부족한 부분이 너무 많다는 걸 바보처럼 이제야 깨달은 탓이었다.

    아니면……. 설마 헤어지고 싶기라도 한 걸까?

    생각과 동시에 재경은 고개를 한껏 내저었다. 그건 아닐 거다. 사랑한다고, 네가 내 애인이라서 진짜 행복하다는 말을 몇 번이고 했으니까. 그리고 오늘 현관 앞에서 배웅해줄 때도 억지로 웃는 얼굴은 결코 아니었다.

    “어흐, 춥다.”

    불쑥 들리는 목소리에 재경은 정신을 차렸다. 최용식이 어깨를 한껏 움츠린 채 돌아왔고, 재경은 그제야 테이블을 닦던 중이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다시금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잠시 후에 문이 열리며 오늘의 첫 손님이 들어왔다. 재경은 자리를 안내해준 다음 냉장고가 있는 쪽으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마음이 무겁고 불편하지만 잠시나마 내려놓기로 했다. 혼자 고민해봤자 한계가 있으니, 나중에 유지원을 만나면 그의 이야기를 한번 들어봐야 할 것 같았다.

    * * *

    술집은 어느 곳이든 분위기가 비슷했다. 탁한 조명이 스포트라이트처럼 실내를 비추고, 느린 템포의 음악이 빈 공간을 채우듯 흐르고 있었다. 칵테일 바에 들어간 재경은 입구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잠시 후 유지원을 발견하고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안녕하세요.”

    “잘 왔어. 앉아.”

    재경은 가방을 벗으며 그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혼자서 먼저 달리고 있었는지 유지원의 앞쪽에는 작은 글라스 두 개가 놓여 있었다.

    “뭐 마실래?”

    딱히 마시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술집에 와서 우두커니 앉아 있기도 그래서 메뉴판을 펼쳤다. 논알콜 칵테일을 고르자 유지원이 곧장 테이블 벨을 눌렀다. 직원에게 주문하는 동안 재경은 가만히 눈앞의 상대를 바라보았다.

    유지원은 오늘도 훤칠했다. 단정하게 잘생긴 얼굴에 여유로움까지 갖춘, 성공한 남자의 표본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재경은 여전히 그가 껄끄러웠다. 묘한 거리감이 느껴지는 데다 첫 만남도 그다지 유쾌하지만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굳이 나온 이유는 박성범 때문이었다. 주문을 끝낸 유지원이 가볍게 깍지를 끼고 먼저 화두를 던졌다.

    “궁금하지? 어제 성범이가 무슨 얘길 했는지.”

    “네.”

    짤막하게 대답하자 유지원이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그 전에 먼저 말할 게 있는데…….”

    “말씀하세요.”

    “한때 성범이랑 나랑 썸 타던 사이라고 하면 믿겠어?”

    “……!”

    평정을 유지하던 얼굴이 살짝 흔들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유지원은 남에게 안길 만한 사람으로 보이진 않았고, 박성범도 마찬가지였다. 굳이 비유하자면 용호상박 같은 느낌인데, 둘이서 썸을 탔다니 선뜻 믿기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보인다는 듯 유지원이 설명을 덧붙였다.

    “보통 안는 쪽이긴 한데, 정말 마음에 드는 상대가 있으면 깔려줄 때도 있어. 섹스란 게 어차피 기분 좋으려고 하는 짓인데, 받으면 받는 대로 느껴지는 쾌감이 있거든. 너도 알잖아. 뭐, 아무튼…….”

    “죄송한데 잠깐만요. 문자가 온 것 같아서요.”

    재경은 외투 주머니에 든 핸드폰을 꺼내서 만지작거렸다. 잠시 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고개를 들었다.

    “계속하세요.”

    갑자기 말이 끊겨서 유지원은 살짝 불쾌함을 느꼈지만, 이내 픽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바텀도 하는데 성범이가 그런 상대였어. 좀 더 자세히 말하면, 서로 호감이 있는 거 같아서 맘먹고 대시할 생각이었는데……. 하필 그 무렵에 해외 발령이 났어.”

    유지원이 1년간 해외에 있었다는 사실은 재경도 알고 있었다.

    “근데 내 성격상 장거리 연애는 해당 사항이 없거든. 내 거라고 침 발라놓는 건 쉬운데, 그랬다가 다른 놈이랑 배라도 맞추면 연인을 배신하는 꼴이잖아. 해서 일단은 그냥 갔다가, 돌아오면 다시 잘해볼 생각이었어.”

    어디까지가 농담이고 어디까지가 진담인지 알 수 없었다. 마침 주문한 칵테일이 나와서 일단 재경은 목을 축였다.

    분명 논알콜을 시켰는데도 혈관이 펄떡대며 뛰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하지만 재경은 숨을 고르면서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방금 들은 말은 어디까지나 유지원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이었다.

    유지원은 그런 재경을 탐색하듯 빤히 바라보다가 푸른색 칵테일을 한 모금 마셨다. 표정엔 여전히 여유로움이 가득했다.

    아닌 척해도 꽤나 혼란스러운 모양인데, 유감스럽게도 방금 한 말은 대부분 사실이었다. 다들 자신을 올 탑으로 알고 있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정말 마음에 드는 놈이 있으면 구멍을 벌려주기도 하는데, 그런 상대가 거의 없다 보니 계속 탑을 했을 뿐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지인의 소개로 박성범을 알게 됐고, 만나면 만날수록 호감이 점점 커졌다. 끼고 다녀도 부끄럽지 않을 외모와 스펙, 게다가 성격도 좋아서 모처럼 ‘스테디한 관계를 맺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하필 그 무렵에 미국으로 가게 됐고, 가서도 개 버릇 남 못 주고 문란한 성생활을 즐겼다. 솔직히 말하면 그동안에는 박성범의 얼굴도 떠오르지 않았지만, 귀국하니 불현듯 생각나서 연락을 해본 거였다.

    하지만 그사이 녀석에게는 죽고 못 사는 애인이 생겼다. 딱히 놀랍거나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자신마저 혹할 정도로 괜찮은 놈이니 계속 솔로로 있는 게 이상할 노릇이었다.

    제 감정에 솔직한 녀석인 만큼, 박성범은 눈앞의 녀석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았다. 애인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어찌나 행복해하는지 없던 심술도 절로 생겨날 지경이었다.

    딱 봐도 제가 끼어들 여지는 없어 보였지만, 무료한 삶에 활력이 될 만한 상황을 앞두고 그냥 넘어가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다. 그래서 유지원은 작은 장난을 쳐보기로 했다. 박성범도 그렇고 눈앞의 녀석도 쉽게 흔들리거나 깨질 것처럼 보이진 않지만, 설령 그렇다 해도 저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고작 이 정도로 깨진다면 처음부터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사이라는 뜻이니 말이다.

    비뚤어진 속내를 수려한 웃음으로 감추며 유지원은 말을 이었다.

    “성범이 취향은 알고 있어? 애인 취향.”

    “저라고 하던데요.”

    “뭐?”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가 유지원은 시원한 웃음을 흘렸다.

    지금쯤 머릿속이 복잡할 법도 한데, 별다른 내색 없이 앉아 있는 것만 봐도 보통내기는 아닌 놈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건드리고 흠집을 내고 싶었다.

    “내가 아는 박성범은 여리여리하고 애교 많은 애들을 좋아해. 본인이 크니까 한 품에 쏙 들어오는 상대가 좋다더라고.”

    ‘그래서요?’ 라고 되묻고 싶은 것을 눌러 참으며 재경은 칵테일을 마셨다. 유지원이 저런 말을 하는 의도는 모르겠지만, 여기서 반응하면 그대로 휩쓸려서 말려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 성범이가 나한테 말했던 고민도 그거야. 자기는 지금 사귀는 애가 죽을 정도로 좋은데, 상대는 아닌 것 같다고.”

    유지원의 입가가 슬며시 올라갔다. 찰나의 동요를 놓치지 않고 캐치한 덕분이었다.

    “너, 남자 사귀는 건 박성범이 처음이지?”

    “…….”

    “사실 안 봐도 뻔하긴 해. 녀석은 좋다고 꼬리 흔들면서 너 따라다니고, 재경이 너는 대충 받아주겠지. 근데 말이야, 하루 이틀도 아니고 매일같이 그런 상황이 반복되면 사람이 점점 지치거든. 상대는 날 별로 안 좋아하나? 하는 생각도 들고. 뭐 그런 거지.”

    이어서 유지원은 다른 질문을 던졌다.

    “성범이 작곡하는 건 알아?”

    “네.”

    “그럼, 이전에 죽고 못 살던 애인한테 러브송 만들어준 것도?”

    재경의 손끝이 움찔했다. 빤히 바라보는 시선을 자의적으로 해석한 유지원이 짐짓 유감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딱 봐도 욕심나는 녀석이잖아. 그러니 인기가 없을 수가 없고, 꽤 괜찮은 바텀이랑 사귄 적도 많아. 그리고 썸 타는 상대한테 노래 만들어서 선물하는 거는 소문이 자자했어.”

    “…….”

    “뭐, 지금 너한테 하는 행동 보면,”

    “그러니까.”

    갑자기 잘린 말꼬리에 유지원이 흠칫했다. 무표정한 얼굴로 되돌아간 재경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가 표현을 잘 안 해서 불안하다, 이게 성범이의 고민이라는 거죠?”

    “맞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죄송한데, 시간이 늦어서 먼저 일어나보겠습니다.”

    지갑에서 꺼낸 만 원짜리 지폐를 탁자에 올린 뒤에 재경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채 몇 걸음 걷기도 전에 우악스러운 힘이 팔을 붙잡았다.

    “기다려. 얘기 중에 멋대로 일어나는 건 어디 매너야?”

    “더 들어봤자 저한테 별 도움은 안 될 것 같아서요.”

    “뭐?”

    처음으로 일그러지는 유지원의 얼굴을 잠깐 바라보다가 재경은 그의 손을 떨쳐냈다.

    “성범이 고민이 뭔지 궁금해서 나왔는데, 덕분에 풀렸거든요. 이따 만나면 대화로 잘 풀어갈 테니까 신경 안 쓰셔도 될 것 같아요.”

    “…….”

    “그리고 이건 tmi긴 한데, 원래 제 이상형도 성범이랑은 백만 광년 동떨어져 있어요. 근데 막연히 생각하던 이상형보다 더 좋은 사람이 나타나니까 그 사람이 제 이상형이 되더라고요. 아니면 오늘 형 전화 받고 나오는 일도 없었을 거예요.”

    “너…….”

    그 순간 재경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액정을 확인한 재경은 전화를 받는 대신 거듭 유지원을 바라보았다.

    “앞으로는 이런 일로 저한테 연락하실 필요 없어요. 애인한테 전화가 와서……. 먼저 가보겠습니다.”

    꾸벅 고개를 숙인 뒤에 재경은 이번에야말로 먼저 뒤돌아섰다. 행여나 또 붙잡힐까 봐 서둘러 문을 열고 나왔다. 일단은 수신 거부를 하고,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이용해서 빠르게 내려갔다.

    다행히 쫓아오는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1층에 도착한 재경은 긴 숨을 토해내며 핸드폰을 다시 켰다. 파일함부터 먼저 확인한 뒤에 최용식에게 전화를 걸었다.

    - 여보세요?

    “여보세요? 전화하셨어요, 형?”

    - 어. 늦은 시간에 미안한데 오늘 물어보는 게 나을 거 같아서.

    통화 상대는 최용식이었다. 조금 전에 전화를 걸었던 사람도 최용식이었지만, 순간적으로 애인 어쩌고 하는 말이 튀어나간 거였다. 건물 밖으로 나온 재경은 터덜터덜 길을 걸으면서 최용식에게 물었다.

    “무슨 일 있어요?”

    - 승희가 내일 엄마 생신이라고 하루만 쉬면 안 되냐 물어보더라고. 그래서 말인데, 혹시 저녁에 잠깐만 도와줄 수 있겠어? 서너 시간만.

    재경이 주말 알바는 하지 않는 이유를 최용식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을 땐 한 번씩 SOS를 보냈고, 재경은 특별한 일이 없으면 그의 부탁을 들어주는 편이었다. 평소에 그만큼 최용식이 잘해주고, 또 편의를 많이 봐주는 덕분이었다.

    “네. 그렇게 할게요.”

    - 크, 역시 재경이 너밖에 없다. 그럼 내일 보자.

    통화를 끝낸 재경은 발걸음에 속도를 더했다. 그것도 잠시, 우뚝 멈춰 서서 핸드폰을 다시 꺼내서는 유지원의 전화번호를 미련 없이 차단했다.

    “……좋은 사람은 개뿔.”

    입술 사이로 중얼거리는 말이 흘러나왔다. 박성범에게는 마음 잘 맞는 좋은 형일지 몰라도, 자신이 파악한 유지원이라는 사람은 빈말로도 인간성이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비단 첫인상이 별로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늘, 걱정해주는 척하며 들려준 이야기만 해도 자신뿐만 아니라 은연중에 박성범까지 먹이려는 느낌이 다분했다.

    집에 도착했을 땐 자정이 훨씬 넘은 시각이었다. 거실은 조용했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외투 주머니에 든 핸드폰이 짧게 울렸다.

    [자기야 자? >_<]

    박성범의 문자였다. 방으로 들어간 재경은 침대에 걸터앉으며 답장을 보냈다.

    [아니]

    [그럼 전화할게]

    곧바로 전화가 걸려왔다. 통화 버튼을 누르자 쾌활한 목소리가 들렸다.

    - 좀 전에 지원이 형 만났다면서?

    대뜸 들리는 이름에 재경은 울컥했다. 어떻게 알았냐고 물으려다가 멈칫 입을 다물었다. 제가 말해준 적이 없으니 아무래도 그쪽에서 박성범에게 먼저 연락한 모양이었다.

    ‘뭐라고 했을까.’

    알 수는 없지만, 오늘 있었던 일을 곧이곧대로 말했을 리는 절대 없단 생각이 들었다. 재경은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쉰 뒤에 대답했다.

    “그 형이랑 통화했어?”

    - 응. 나 빼고 완전 재밌었다던데, 진짜야?

    하, 실소가 절로 나왔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전화보다는 얼굴을 보면서 말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에 일단은 참았다. 하지만 은근히 열불이 올라서 재경은 살짝 비꼬며 대답했다.

    “어. 미치게 재밌더라. 나중에 자세히 말해줄게.”

    - 알았어. 일 끝나자마자 튀어갈게.

    “언제 마치는데?”

    - 음, 확실히는 모르겠는데 빨라야 새벽쯤에 끝날 거 같아. 되도록 일찍 갈게.

    “그래.”

    - 보고 싶어.

    따뜻한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재경은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숨도 쉬지 않고 빠르게 대답했다.

    “나도 보고 싶어. 힘내서 열심히 해.”

    그대로 종료 버튼을 꾹 누르며 먼저 전화를 끊었다. 뒤늦게 귀 끝에 열이 올랐다.

    평소였으면 못 들은 척하며 대충 대답하고 말았겠지만, 유지원이 했던 말이 아직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어제 성범이가 나한테 말했던 고민도 그거야. 자기는 지금 사귀는 애가 죽을 정도로 좋은데, 상대는 아닌 것 같다고.’

    진위여부는 알 수 없지만, 솔직히 말하면 거짓말 같은 느낌이 다분하지만, 떨치지 못하고 머릿속에 남아 있는 것은 스스로 찔리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었다.

    표현도, 스킨십도 스스럼없이 하는 박성범에 비해서 자신은 스스로 생각해도 겉으로 드러내는 표현이 박하기는 했다. 그래도 원래 성격이 그런 걸 아니까 이해해줄 거라고 은연중에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쩌면 그게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근래 박성범은 좋아한다고 말한 다음 넌 어떠냐고 묻거나, 나 사랑하냐고 묻는 일이 부쩍 많았다. 마치 사랑을 확인받길 바라는 아이처럼 말이다.

    “……고쳐야겠지.”

    연애를 해본 적은 없지만, 관계를 오래 유지하려면 서로 불만이 있거나 안 맞는 부분들을 조금씩 맞춰가는 게 중요하다는 사실쯤은 알고 있었다. 하루아침에 딴사람처럼 성격을 바꿀 수는 없겠지만, 작은 것부터 조금씩 해볼 생각이었다.

    * * *

    언제부턴가 묘한 압박감이 들었다. 뭔가 무거운 게 가슴팍에 놓인 것처럼 숨이 편하게 쉬어지질 않았다.

    재경은 인상을 찌푸린 채 잠에서 깼다. 옆으로 누운 상태에서 비몽사몽간에 시선을 내리자 누군가의 팔이 제 허리에 감겨 있었다.

    ‘……어쩐지.’

    슬쩍 상체를 일으켜 뒤를 돌아보니 박성범의 얼굴이 보였다. 어지간히 한잠이 들었는지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잘도 자고 있었다.

    핸드폰을 켜보니 이제 곧 있으면 오전 8시였다. 조심조심 녀석의 팔을 떼어낸 뒤에 일어나려는데, 거듭 허리를 끌어안으며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조금만 더 자자. 나 좀 전에 집에 왔어.”

    빨라야 새벽쯤에 온다더니 결국 밤을 꼴딱 새운 모양이었다. 재경은 잠깐 고민하다가 어르는 듯한 투로 말했다.

    “더 자. 난 아침 먹을 건데 너도 먹을 거야?”

    “아니. 너랑 이러고 있을래.”

    허리를 더 세게 끌어안는 힘이 느껴졌다. 왠지 이럴 것 같았기에 딱히 놀랍지도 않았다. 뿌리치고 일어나자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지만 맞닿은 체온도 따뜻하겠다, 어제 귀가가 늦은 만큼 수면 시간도 부족했으니 괜찮다고 자기합리화를 하며 재경은 뒤늦게 대답했다.

    “알았어. 대신 딱 한 시간 뒤에 일어날 거야.”

    “응.”

    틈 없이 등에 닿는 온기를 느끼면서 재경은 알람을 맞춘 뒤에 다시금 눈을 감았다. 싱글 침대에 장정 둘이서 누워 있으니 비좁긴 하지만, 불편하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 * *

    약속대로 재경은 정확히 한 시간 뒤에 눈을 떴다. 박성범은 조금만 더 잤으면 하는 눈치였지만, 한 말이 있다 보니 그제야 재경을 놓아주고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잠 오면 더 자.”

    먼저 일어난 재경이 눈을 감은 채 망부석처럼 침대에 앉아 있는 박성범을 보며 그렇게 말하자, 박성범은 눈가를 꾹 누르면서 대답했다.

    “나중에 더 자면 돼. 아침 뭐 먹을래?”

    “내가 준비할게.”

    “원래 아침은 내 담당이잖아. 씻고 천천히 나와.”

    재경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춘 뒤에 박성범은 한껏 기지개를 켜며 주방으로 향했다. 빵과 과일로 대충 끼니를 때우고, 뒷정리는 재경이 도맡아서 했다. 그동안 박성범은 커피를 내려서 한 손에 하나씩 잔을 들고 거실로 나갔다.

    소파에 앉아서 향긋한 커피 향을 음미하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운을 뗐다.

    “어제 형은 잘 만났어?”

    순간 재경이 멈칫했지만, 박성범은 눈치채지 못하고 미소 띤 얼굴로 말을 이었다.

    “언제 둘만 만날 정도로 친해진 거야?”

    “…….”

    아무것도 모르고 천진난만하게 웃는 얼굴을 보니 뒤늦게 또 울화가 치밀었다. 커피잔을 내려놓은 재경은 두 손으로 박성범의 귀를 잡고 짤짤 흔들었다.

    “어쩌다 그런 사람이랑 엮인 거야?”

    느닷없는 봉변에 박성범은 서둘러 재경의 손목을 붙잡았다. 하지만 억지로 떼지는 않고, 그대로 재경의 손목을 쥔 채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래? 혹시 형이랑 무슨 일 있었어?”

    “무슨 일 정도가 아냐. 잠깐만 있어 봐.”

    그제야 손을 뗀 뒤에 재경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핸드폰을 켜고 음성 파일을 누르자 소음이 좀 섞였긴 해도 유지원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확인을 마친 뒤에 재경은 핸드폰을 들고 거실로 돌아갔다.

    시간이 흐를수록 박성범의 얼굴은 점점 굳어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 재경이 일단 이것 좀 들어보라며 핸드폰을 내밀었을 때만 해도 별생각이 없었는데, 시간이 가면 갈수록 정신이 멍했다. 솔직히 말하면 두 귀로 듣고 있으면서도 ‘지금 내가 뭘 듣고 있는 거지?’ 하는 생각이 가실 줄을 몰랐다.

    [앞으로는 이런 일로 저한테 연락하실 필요 없어요. 애인한테 전화가 와서……. 먼저 가보겠습니다.]

    여기까지 재생이 끝난 뒤에 재경은 파일을 껐다. 이게 대체 뭐냐고 묻는 듯한 눈빛에 뒤늦게 부연설명을 했다.

    “어젯밤에 녹음한 거야. 아무래도 대화가 이상하게 흘러가는 거 같아서.”

    박성범은 얼이 빠진 사람처럼 앉아 있다가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잠깐만. 잠깐 생각 좀 할게.”

    머릿속은 여전히 혼란의 도가니였다. 형이 저런 말을 했다고? 하지만 핸드폰에서 흘러나온 목소리의 주인은 틀림없이 유지원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1년 전에 한창 게이 바를 드나들 때, 유지원의 행실과 관련된 안 좋은 소문을 들은 적이 있긴 했다. 하지만 자신이 겪어본 유지원은 매너가 좋고 대화도 잘 통해서, 누가 퍼뜨렸는지도 모를 소문에 휩쓸릴 필요가 없단 생각에 그가 미국에 가기 전까지 나름대로 좋은 관계를 계속 유지했었다.

    그런데 설마 재경과 이런 대화를 주고받았을 줄이야. 어처구니가 없는 거짓말에 화가 나기보다 ‘대체 왜?’ 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왜 그랬을까. 저런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해서 얻는 것도 없을 텐데, 대체 왜.

    ‘만일 녹음 파일이 없었더라면…….’

    그랬다면 아마 선뜻 믿지 못했을 거다. 재경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제가 아는 유지원이 그런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현타가 찾아온 것은 그다음이었다. 사람 좋아 보이는 모습에 깜빡 속아 넘어간 자신이 병신 머저리 같고, 한편으로는 허탈감이 밀려오기까지 했다.

    재경이 불편한 마음으로 그런 박성범을 바라보고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녹음을 했고, 말로 하는 것보단 직접 듣는 게 나을 듯해서 대화 내용을 들려주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충격이 커 보이는 모습을 보니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괜찮아?”

    “어. 괜찮아.”

    대답과 달리 수그린 고개는 좀처럼 들리질 않았다. 박성범은 긴 한숨을 내쉰 뒤에 뒤늦게 고갤 돌려 재경을 쳐다봤다.

    “미안해. 진짜 그런 사람인 줄 몰랐어.”

    그 말에 재경은 퍼뜩 대답했다.

    “네가 미안할 게 뭐 있어. 좋게 생각하면 본색을 빨리 드러내줘서 차라리 잘됐지.”

    말은 이렇게 했지만 재경도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사람은 왜 이런 얘길 꺼낸 걸까. 자칫 불화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단 사실을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설마 그걸 노린 건가? 아니면 박성범한테 말하지 않고 그냥 넘어갈 줄 알았나?

    예전 같았으면 후자를 택했을지도 모른다. 연인에 대한 불만을 다른 사람에게 털어놨다는 사실에, 그것도 약점이라 할 수 있는 부분에 불만을 토로했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해서 혼자 고민하다가 ‘그만두자’는 말을 꺼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새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이야기를 박성범에게 솔직히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지고, 또 그만큼 신뢰할 수 있어서.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이 있었기에, 재경은 침묵을 깨며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전에 사귀었던 사람들한테 노래 만들어 줬다는 건 진짜야?”

    질문과 동시에 박성범의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이제 슬슬 머리가 돌아가는지 처음보다 살짝 화가 난 모습이었다.

    “당연히 뻥이지. 그런 생각은 해본 적도 없어.”

    연거푸 하, 하는 한숨이 터져 나왔다. 생각하면 할수록 어이가 없고, 뒤늦게 슬슬 화가 치밀었다.

    “왜 그랬는지 물어봐야겠어.”

    “잠깐만!”

    핸드폰을 쥔 채 당장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걸 재경이 서둘러 막아섰다. 적잖이 화가 난 듯한데 좋은 말이 오갈 리가 없었다.

    “그냥 이상한 사람이다, 생각하고 무시해. 앞으로 안 보면 되지.”

    “그래도 따질 건 따져야지.”

    “따져봤자 눈도 깜빡 안 할걸? 그러니까 그냥 번호 차단하고 끝내자. 똥이 더러워서 피하지 무서워서 피하는 거 아니잖아.”

    하나같이 맞는 말이었다. 말발로는 이기기 힘든 사람이니, 전화해서 화를 내봤자 장난이었다고 하거나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갈 모습이 훤히 그려졌다.

    여전히 기가 막히고 어처구니가 없지만, 재경의 말대로 그냥 미친개한테 물렸다 생각하고 잊는 게 나을 듯했다. 박성범은 이를 갈며 유지원의 번호를 차단한 뒤에 곧바로 재경을 쳐다봤다.

    “너도 차단해.”

    “난 진작 했지.”

    어깨를 으쓱이면서 하는 대답에 박성범은 그제야 조금이나마 표정을 풀 수 있었다. 이후 거듭 긴 한숨을 흘린 뒤에, 재경의 허리를 안은 두 손을 깍지 끼고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가만히 서 있다가 뒤통수 얻어맞은 기분이야. 엄청 세게.”

    “그래도 무슨 일 생기기 전에 손절했으니까 잘됐지, 뭐.”

    “응.”

    짧은 침묵 뒤에 박성범이 말을 이었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그저께 형이랑, 아니 그 인간 만나서 시답잖은 얘기만 했지 불만 어쩌고 하는 얘기는 입도 벙긋 안 했어.”

    “…….”

    “그리고 표현 같은 거 안 해도 괜찮아. 사실 귀국하고 처음 만났을 때 자꾸 아픈 구석을 찔러서 며칠간은 계속 생각나고 조금 불안하긴 했는데, 지금은 전혀 안 그래. 네가 녹음한 거 들어보니까 그때 나한테도 백 퍼 일부러 그랬던 거 같아.”

    묘하게 껄끄러운 기분이 들었을 때 눈치챘어야 했는데. 애인 자랑을 실컷 늘어놓고 소개까지 해줬다 생각하니 거듭 자신이 똥멍청이 같았지만, 재경의 말마따나 무슨 일이 생기기 전에 잘라낼 수 있어서 천만다행이었다.

    이윽고 재경의 말이 이어졌다.

    “좀 더 노력할게.”

    “응?”

    박성범은 그제야 고개를 들고 재경을 쳐다봤다.

    “더 노력하겠다고. 너처럼 자연스럽게 잘하지는 못하겠지만, 하다 보면 조금씩 좋아지겠지 뭐.”

    “안 그래도 돼. 나 때문에 억지로 바꾸는 거 싫어.”

    “그래?”

    “응. 지금 이대로도 충분히 좋아.”

    재경도 그제야 녀석의 시선을 마주 봤다.

    “그럼 앞으로 평생 좋아한다거나 사랑한다는 말 같은 건 안 해도 되지? 더불어 내가 먼저 하는 포옹이나 키스도.”

    “그건…….”

    갈피를 못 잡고 마구 흔들리는 눈동자에 재경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말했잖아. 당장 180도 바뀌겠다는 게 아니라 조금씩 노력해보겠다고.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느릴 수도 있으니까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마.”

    “응, 알았어. ……그리고 말이야.”

    박성범이 답지 않게 머뭇거리다가 넌지시 물었다.

    “네 이상형은 어떤 사람이야?”

    “뭐?”

    “아니, 나 아니라고 하길래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

    뜬금없는 말에 재경은 눈을 깜빡거리다가 뒤늦게 이해하곤 또 한 번 웃었다. 어제 유지원한테 했던 말을 놓고 묻는 것 같은데, 여러모로 충격이 컸을 텐데 잘도 기억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도 내가 네 이상형 아니라며?”

    “그거야 형이, 아니 그 인간이 멋대로 지껄인 거지!”

    박성범이 억울하다는 듯 소리쳤다.

    “내 이상형은 너야. 옛날에 내가 했던 말 기억 안 나? 왜 우리 집에서 살게 해줬냐고 물었을 때, 네 얼굴이 맘에 든다고 했잖아.”

    “아.”

    그러고 보니 생각났다. 처음으로 동기들이랑 같이 놀러 갔을 때. 그때만 해도 박성범이 게이인 줄은 꿈에도 모르고, 그냥 장난으로 하는 말인 줄로만 알았다.

    “거짓말 아니고 진짜 네가 내 첫사랑이야. 그런데도 못 믿겠으면…….”

    일순 박성범의 표정이 능글맞게 변했다.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몸으로 보여줄게.”

    “몸으로?”

    의아한 듯 되물음과 동시에 재경은 깜짝 놀랐다. 박성범이 갑자기 반팔 티를 훌렁 벗어 던진 탓에 헐벗은 상체가 드러났다.

    “갑자기 왜 이래?”

    재경은 본능적으로 엉덩이를 뒤로 뺐지만 소파 팔걸이에 막혀 금세 퇴로가 차단됐다. 옆 공간은 트여 있으니 소파를 벗어나면 되지만,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해서 거기엔 생각도 닿지 않았다.

    “말했잖아. 몸으로 보여준다고. 마침 오늘 토요일이니까 화끈하게 불태워보자.”

    “미쳤어? 지금 아침이야.”

    재경이 절박하게 외쳤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아침이면 뭐 어때서. 연인끼리 몸의 대화를 나누는 데 시간이 뭐가 중요해.”

    “야, 우웁…!”

    한 손으로는 팔걸이를, 한 손으로는 소파 등받이를 잡은 박성범이 그대로 상체를 숙이며 재경에게 입을 맞췄다. 말하려고 벌린 입술 사이로 순식간에 혀가 침투했다. 박성범은 그대로 체중을 실으면서 재경의 혀를 휘감았다.

    “으응…….”

    재경은 저도 모르게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미끈한 혀가 얽힐 때마다 야릇한 쾌감이 몸 전체로 번져 나갔다.

    박성범은 재경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곳을 자극하며 진한 키스를 이어갔고, 잠시 후에 입술을 떼며 흥분을 숨기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계속하면 안 돼?”

    어느새 맞닿은 아래도 잔뜩 흥분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문제는 재경도 사정이 딱히 다르지 않다는 거였다. 따가운 시선을 피해서 애먼 곳을 바라보고 있던 재경은 뒤늦게 슬쩍 눈을 마주치며 대답했다.

    “대신 끝까지 가는 건 안 돼. 저녁에 알바 대타 뛰러 가야 되거든.”

    그러자 곧바로 냉큼 대답하는 말이 들려왔다.

    “내가 대신 뛰어줄게.”

    “됐거든? 그 뒤는 오늘 밤에 해. ……나도 너랑 하고 싶으니까.”

    말하고 보니 뒤늦게 쑥스러움이 밀려와서, 이번엔 재경이 먼저 박성범의 목을 끌어당기며 입술을 겹쳤다. 예정에 없던 뜨거운 시간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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