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삽입 섹스의 여파는 생각보다 컸다. 다음 날 아침, 정신이 들자마자 엄습하는 근육통에 재경은 끙끙대며 앓았다. 간단하게 토스트를 준비해서 침실로 가져온 박성범은 학교에 가기 전에 잠깐 짬을 내서 재경의 허리와 팔다리를 열심히 주물러주었다.
서비스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월요일에 1교시 수업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박성범은 재경과 함께 집을 나서서 학교로 차를 몰았다. 신호에 걸린 틈을 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고갤 돌렸다.
“수업 들을 수 있겠어?”
“들어야지.”
솔직히 말하면 지금도 컨디션이 좋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섹스 후유증이라는, 말하기도 민망한 이유 때문에 수업을 빠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도넛 방석 하나 사 갈까?”
“아니. 김성욱이 보면 대번에 치질이냐고 물을걸.”
“아픈 것보다 낫잖아.”
“됐어. 그 정도로 심하지는 않아.”
“그럼 나중에 알바 가기 전에 마사지 한 번 더 해줄게. 참, 점심 같이 먹을 거지?”
“그러든가.”
타이밍 좋게 바뀐 신호를 보고 박성범은 액셀을 밟았다. 상학관 앞에 재경을 내려준 뒤에 자신도 차에서 내려 근처 카페로 들어갔다.
핸드폰을 붙들고 있으니 시간은 금방 흘러갔다. 곧 있으면 수업이 시작될 시간이라 가방을 들고 일어서는데 카페 문이 열리며 익숙한 얼굴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같은 분반 동기들이었고, 짤막한 인사를 하자마자 둘 중 한 놈이 대뜸 말을 건넸다.
“너도 미팅할래?”
“미팅?”
“어. 금요일에 국문과 애들이랑 하기로 했어.”
싱글벙글한 친구의 얼굴을 보면서 박성범은 장난을 쳤다.
“능력 좋네. 근데 우리 나이에 미팅은 오바 아냐?”
“에이, 우리 나이가 뭐 어때서 그래? 아직 창창한 20대 초반인데.”
“양심도 없지.”
“내 양심 중동 간 지 오래야. 암튼 올 거야, 말 거야?”
“안 가.”
그러자 반은 장난으로, 또 반은 진심으로 흘겨보는 시선이 날아왔다.
“미팅 같은 거 안 해도 쉽게 만날 수 있다, 이거지?”
“그런 거 아냐. 그리고 나 사귀는 사람 있어.”
“헐, 너 여친 생겼어?”
“어. 수업 시간 다 돼서 먼저 갈게.”
친구의 어깨를 가볍게 툭 두드린 뒤에 박성범은 먼저 카페를 나섰다. 입가엔 저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애인이 누군지는 절대 밝힐 수 없지만, 사귀는 사람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실만으로도 날아갈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 * *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교수가 밖으로 나가자 강의실은 금세 시끌시끌해졌다. 우르르 나가는 학생들을 따라서 박성범도 복도로 나갔다. 현관 앞에 이르렀을 때 잠깐 멈춰 서서 핸드폰으로 재경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강의 끝났어?”
[어. 지금 막 나서는 참이야.]
“그럼 내가 먼저 가서 식당 자리 맡아놓을게. 뭐 시킬까?”
[너랑 같은 걸로. 성욱인 라면 먹고 싶대.]
“정혜랑 안 먹고?”
그러자 잠깐 조용하다 싶더니 다시금 재경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오늘은 따로 먹는다는데.]
“알았어. 도착하면 전화해.”
전화를 끊은 박성범은 곧장 구내식당으로 직행했다. 메뉴판을 빠르게 살핀 그는 특대 돈가스 두 개와 라면을 주문한 뒤, 구석에 있는 빈 테이블부터 선점했다. 음식은 생각보다 빨리 나왔다. 한 손에 하나씩 트레이를 들고 와서 자리에 앉아 있으니 잠시 후에 식당으로 들어서는 두 사람이 보였다.
“여기야.”
손을 흔들며 신호를 보내자 다행히 금세 알아보고 다가왔다. 염치없는 김성욱은 의자에 앉자마자 배고파 죽겠다며 라면을 흡입하기 시작했다.
늘 그렇듯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오갔다. 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박성범은 뒷주머니에서 진동을 느끼고 핸드폰을 꺼냈다.
액정을 보니 모르는 번호가 떠 있었다. 하지만 070이나 1588처럼 이상한 번호가 아니라 제대로 된 번호였기에 잠깐 쳐다보다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여보세요? 박성범?
대뜸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박성범은 살짝 인상을 찌푸린 채 상대에게 되물었다.
“누구시죠?”
- 설마 내 번호 지운 거야? 섭섭한데.
말과 달리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묻어났다. 왠지 좋은 느낌이 아니라서 박성범은 그대로 전화를 끊으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한발 앞서서 상대의 음성이 다시 이어졌다.
- 나야. 유지원.
그 순간 놀랍게도 곧바로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다. 박성범은 곧 얼떨떨한 음성으로 되물었다.
“진짜 형이에요?”
- 그럼 가짜겠어? 다행히 아예 잊은 건 아닌가 보네.
“당연하죠. 근데 어쩐 일로 전화하셨어요?”
- 아, 별일은 아니고. 나 귀국했거든.
“진짜요?”
박성범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유지원은 지인 소개로 알게 된 사람인데, 여러모로 취향이 비슷하고 아는 것도 많아서 바에서 마주칠 때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대화를 나누곤 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안 보여서 지인에게 물었더니 해외 발령이 났다는 말을 들었는데, 귀국했다니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완전히 들어오신 거예요?”
- 어. 이제 가라고 해도 안 가.
딱 잘라서 하는 말에 박성범은 웃음을 흘렸다.
- 시간 되면 얼굴이나 한번 보자.
“좋죠.”
- 역시 시원시원하다니까. 말 나온 김에 오늘 저녁은 어때?
“괜찮아요.”
- 그럼 내가 장소 물색해서 다시 연락할게. 번호 저장해 둬.
“네. 들어가세요, 형.”
전화를 끊자마자 김성욱이 오지랖을 발동했다.
“누구임?”
“아는 형. 귀국했다고 밥이나 같이 먹자고 하네.”
“오올, 해외 유학파 친구도 있나 봐?”
“뭔 소리야.”
박성범은 다시금 식사를 이어갔다. 그러다 문득 든 생각에 핸드폰을 켜고 빠르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몸은 좀 어때? >_<]
하지만 기대와 달리 상대는 반응도 하질 않았다. 결국 박성범은 재경에게 직접 말을 걸었다.
“너, 핸드폰 진동 온 거 같아.”
그 말에 재경은 잠깐 포크를 내려놓고 가방을 뒤적였다. 핸드폰을 꺼내서 액정을 확인한 순간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어쩐지. 사람이 바글바글해서 시끄러운데 가방 속에 든 핸드폰 진동음이 들린다 했다. 속으로 생각하며 재경은 답장을 보냈다.
[괜찮아]
[오후수업 째고 집에 갈래?]
[아니 밥이나 먹어]
핸드폰을 내려둔 재경은 맞은편에서 지그시 바라보는 시선을 모른 척하며 식사를 이어갔다.
* * *
차에서 내린 박성범은 빠른 걸음으로 약속 장소를 향해 걸어갔다. 7시 4분. 살짝 늦었지만 다행히 상대도 아직 도착하지 않은 듯했다. 스쳐 가는 사람들을 의미 없이 바라보고 서 있으니 잠시 후에 캐주얼한 옷차림의 유지원이 나타났다.
“미안. 오래 기다렸어?”
“아뇨, 저도 방금 왔어요.”
생긋이 웃는 상대를 보면서 박성범은 속으로 내심 놀랐다. 분명 1년여 만에 보는 건데도 마치 며칠 전에 본 것처럼 변한 게 없었다.
“와, 뭔가 그대로네요 형.”
“너도 마찬가지야. 가자, 배고프다.”
유지원이 박성범을 데리고 간 곳은 근처에 있는 고급 레스토랑이었다. 이름을 대자 지배인은 자리를 안내해주었고, 다양한 메뉴를 주문한 뒤에 그는 박성범과 시선을 마주했다. 얼굴에는 기분 좋아 보이는 미소가 가득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잘 지냈죠. 학교 다니고, 곡 작업도 하고요. 형은요?”
“난 일하느라 바빴지. 애인 만들 틈도 없었어.”
그 말에 박성범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형 사귀는 사람 있지 않았어요?”
“있었지. 근데 가기 전에 합의하에 헤어졌어. 장거리 연애는 취향에 안 맞거든.”
어느 정도는 공감할 수 있는 말이었다. 하루 이틀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고, 또 보고 싶다 해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니 어지간히 서로 좋아하고 신뢰하지 않는 이상 계속 기다리는 게 쉽지만은 않을 터였다.
“그 사람이랑 다시 만날 거예요?”
“아니. 그 뒤로 한 번도 연락 안 했는데 뭐 하러.”
이것도 영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내 박성범은 슬쩍 웃으며 말했다.
“형이라면 금세 좋은 사람 만날 거예요.”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훤칠한 키에 잘생긴 얼굴, 게다가 직장까지 번듯하다고 소문이 난 탓에 유지원은 바의 유명 인사인 데다 인기도 많았다.
잠시 후에 와인이 먼저 나왔다. 먼저 입가심을 한 유지원이 박성범을 바라보면서 물었다.
“안 마셔?”
“차 끌고 왔어요.”
“대리 부르면 되지.”
“이따 갈 데가 있거든요.”
평소였으면 일찌감치 2차를 염두에 두고 택시를 타고 왔거나 유지원의 말대로 대리를 부르겠지만 이후에 다른 일정이 있었다. 이따 박성범은 오랜만에 재경을 데리러 갈 생각이었다. 알바를 하러 갈 때도 재경은 여전히 조금은 버거운 것처럼 보였다. 맘 같아서는 대타라도 뛰어주고 싶었지만 재경이 거절했다. 그러니 하다못해 마중이라도 가야 자신의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어디 갈 건데?”
“애인 데리러요.”
그 말에 유지원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피식 웃음을 흘렸다.
“형이랑 보기로 했으면 새벽까지 달린다고 생각해야지, 다른 약속을 잡아?”
“죄송해요, 형.”
“죄송할 것까진 없고. 그나저나 애인 생겼나 보네.”
“네.”
떠보듯 하는 말에 박성범이 기다린 것처럼 냉큼 대답했다. 유지원은 깍지 낀 손에 턱을 괸 채 말을 이었다.
“그럼 오늘 같이 나오지 그랬어.”
“알바 중이라 시간이 안 돼요.”
“그래?”
싱글벙글 웃는 모습을 보면서 유지원은 ‘이것 봐라?’ 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직 박성범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지만, 유지원은 은근히 꼬인 구석이 있었다. 좋다고 매달리는 상대에게 일부러 더욱 모진 말을 해대는가 하면, 남의 상처를 들쑤시는 데도 거리낌이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대놓고 행복하다는 오오라를 풀풀 풍겨대는 놈이 눈앞에 있으니 그야말로 딱 좋은 먹잇감이 따로 없었다. 와인 잔으로 입가를 가리며 웃은 뒤에 유지원은 능숙하게 속내를 감추며 평이한 어조로 질문을 이어갔다.
“사귄 지 얼마나 됐어?”
“이제 한 달 좀 지났어요.”
“얼마 안 됐네.”
한 달이면 한창 뜨거울 때지만, 흔들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지는 않을 터였다. 말이 나온 김에 유지원은 조금 더 깊이 파고들기로 했다.
“어디서 만났어? 클럽에서?”
“아뇨, 친구예요.”
“친구?”
“네. 같은 과 동기인데 어쩌다 보니 잘돼서 사귀게 됐어요.”
“좀 더 자세히 풀어봐. 대뜸 눈 맞은 거 아니면 계기가 있었을 거 아냐.”
“으음, 그 친구한테 좀 곤란한 일이 있었거든요. 근데 다행히 제가 도울 수 있어서 친해졌고, 사귀게 됐어요.”
이거다, 싶은 생각이 머릿속에 번뜩였다. 유지원은 진중하게 들어주는 척하다가 차분한 음성으로 말을 꺼냈다.
“약간 흔들다리 효과, 그런 거 같은데.”
“흔들다리 효과요?”
“어. 힘들 때 네가 도와줘서 친해지고 사귀게 됐다며. 보통 그럴 땐 없던 마음도 생겨나기 딱 좋지 않아?”
순간 박성범은 멈칫했다. 저도 모르게 표정이 살짝 굳었지만, 이내 나이프질을 재개하며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그렇진 않아요. 고마운 거랑 애정을 혼동할 녀석이 아니거든요. 얼마나 똑똑하고 현명한데요.”
“그렇다니 다행이네. ……아니면 형이 한번 슬쩍 떠봐줄까?”
“떠본다니, 뭘요?”
“네 애인 말이야. 이왕이면 확실한 게 너도 마음 편할 거 아냐. 형은 또 너한테 도움이 될 수도 있으니까 좋고.”
박성범은 잠깐 고민하다가 이내 고개를 내저으며 대답했다.
“괜찮아요, 형. 걱정해주셔서 고마운데 마음만 받을게요.”
“그래, 그럼. 대신 다음에 밥이나 한번 같이 먹자. 아니지, 말 나온 김에 오늘 봐도 좋을 거 같은데……. 몇 시에 마쳐?”
“11시요.”
“꽤 늦게 마치네. 무슨 아르바이트 하는데?”
“호프집에서 일해요.”
“그럼 2차를 거기로 갈까? 너 어차피 애인 데리러 갈 거라고 했잖아.”
박성범은 난감한 표정으로 웃었다. 누가 머리 좋은 사람 아니랄까 봐 스치듯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오늘 재경은 하루 종일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만일 서로 대면하게 되면 유지원의 성격상 친화력 좋게 말을 붙이면서 이런저런 대화를 이어갈 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오늘은 날이 아닌 듯했다. 그래서 살짝 미안하지만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좋을 거 같긴 한데, 오늘 몸이 좀 안 좋은 모양이더라고요. 다음에 제가 자리 한번 마련할게요.”
“……그래?”
순간 유지원의 표정이 싸늘해졌지만 이내 픽 웃으며 농담조로 말을 이었다.
“설마 형 경계하는 건 아니지?”
“앗, 들켰네요. 그러니까 한 번만 봐주세요.”
넉살 좋게 대답한 뒤에 박성범은 다시금 식사를 이어갔다. 고급 레스토랑답게 음식은 맛있고, 유지원과 나누는 대화도 재밌고 유쾌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그 시간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다.
* * *
건물 밖으로 나오자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유지원은 일찍 헤어짐을 아쉬워했지만 박성범을 붙잡지는 않았다. 다음에 꼭 애인이랑 같이 한번 보자는 약속을 남긴 채 먼저 떠났고, 박성범은 근처 주차장으로 가서 자신의 차에 올랐다.
안전벨트를 당겨 멨지만 곧바로 출발하지 않았다. 차창 밖을 의미 없는 눈으로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생각에 잠겼다.
‘약간 흔들다리 효과, 그런 거 같은데.’
‘힘들 때 네가 도와줘서 친해지고 사귀게 됐다며. 보통 그럴 땐 없던 마음도 생겨나기 딱 좋지 않아?’
이제껏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던 일이었다. 자신이야 처음부터 재경의 외모가 이상형이었던 데다가 다른 면모까지 마음에 쏙 들어서 금세 푹 빠질 수밖에 없었고, 재경 또한 다른 사람에게 자기를 빼앗기기 싫다고 분명히 말해주었다. 또한 정말로 자신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면, 재경의 성격상 게이도 아닌데 같은 남자에게 삽입 섹스까지 허락해줄 리가 없었다.
그래서 하루하루가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마냥 좋고 행복한데……. 유지원이 했던 말을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어쩌면 자신이 놓쳤던 부분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함이 희미하게 피어올랐다.
결코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박성범은 재경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당사자에게 밝혔고, 그 뒤로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재경도 자신의 마음을 고백했다. 서로가 같은 마음이라고 지금껏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오늘 유지원이 했던 말을 생각하니 정말 어쩌면…….
쿵-
박성범은 두 눈을 질끈 감으며 핸들에 머리를 박았다.
“……바보 같은 생각 하지 말자.”
조용한 침묵을 깨며 핸드폰 알람이 울렸다. 이 시간에 웬 알람이냐는 생각에 인상을 찌푸렸다가, 재경을 데리러 가려고 맞춰놨단 사실을 뒤늦게 상기해내고는 그제야 시동을 걸었다.
다행히 늦지 않고 도착했지만 11시가 지나도 재경은 나오지 않았다.
‘손님이 많은 건가? 몸도 안 좋은데 하필이면…….’
5분만 더 기다려 보고, 그래도 안 나오면 올라가 볼 생각에 박성범은 팔짱을 낀 채로 건물 입구를 주시했다. 수시로 핸드폰을 확인하는데 다행히 잠시 후에 재경이 밖으로 나오는 것이 보였다.
“이재경!”
갑자기 불린 이름에 재경의 발걸음이 멈칫했다.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갤 돌리자 커다란 차체에 기대어 서 있는 박성범이 보였다.
“어떻게 왔어?”
“차 끌고 왔지.”
무슨 의도로 물은 질문인지 알면서도 장난스럽게 대답한 뒤에 박성범은 재경의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몸은 좀 어때?”
“괜찮아. 근데 진짜 어떻게 왔어? 저녁에 약속 있다며.”
“밥만 먹고 일찍 헤어졌어. 추우니까 일단 타자.”
박성범의 말마따나 밤바람이 제법 차가웠기에 재경은 얼른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 올랐다. 이어서 차에 탄 박성범은 곧바로 출발하는 대신 두 손으로 재경의 손을 덥석 붙잡아서 조물조물 주물렀다.
“따뜻하지?”
“어.”
“드디어 내 체온이 빛을 보는 계절이 왔어.”
뿌듯함이 가득 느껴지는 목소리에 재경은 웃으며 장난을 쳤다.
“개똥도 쓸모가 있다더니 진짜네.”
“헐, 지금 애인 체온을 개똥에 비유한 거야?”
“말이 그렇다는 거지. 이제 괜찮으니까 출발하자.”
그럼에도 박성범은 조금 더 재경의 손을 만지작거리다가 뒤늦게 차를 출발시켰다. 잠시 후, 집에 도착한 재경은 가방을 벗자마자 욕실로 직행했다. 대충 얼굴을 씻고 치약을 쭉 짜는데 하품이 절로 나왔다. 일할 땐 바빠서 몰랐는데 집에 도착하니 이제 마음 편히 쉴 수 있다는 안도감 때문인지 졸음이 밀려왔다. 평소에도 일찍 잠드는 편이지만, 오늘은 정말 베개에 머리가 닿자마자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재경의 계획은 실패했다. 자려고 침대 위의 이불을 걷는 순간 문 너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들어가도 돼?”
“어.”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안으로 들어온 박성범이 침대 위에 냉큼 걸터앉았다.
“마사지해줄게.”
“됐어. 너도 피곤할 텐데 그냥 가서 자.”
“나야 저녁에 먹고 놀았는데 뭘. 얼른 엎드려봐.”
거듭 이어지는 재촉에 재경은 못 이기는 척 침대 위에 엎드려 누웠다. 곧 커다란 손이 어깨부터 천천히 주무르기 시작했다.
“시원해?”
“어. 좋아.”
대답하는 목소리에 만족감이 가득했다. 손이 크고 힘도 세니 아프기만 할 법도 한데, 적당히 힘 조절을 해서 주무르는 덕분에 뭉친 근육이 풀리며 온몸이 절로 노곤해졌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재경은 입을 열었다.
“오늘 만난다는 사람은 잘 만났어?”
“어. 1년 만에 봤는데도 그대로더라. 참, 그러고 보니 형이 너 한번 보고 싶대.”
그 말에 재경은 고개를 살짝 돌리고 되물었다.
“날 보고 싶어 한다고?”
“응. 애인 있다고 하니까 궁금한가 봐.”
“그 형이라는 사람도 그쪽 성향이야?”
“응. 근데 꼭 봐야 할 필요는 없으니까 부담스러우면 편하게 거절해도 돼.”
재경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금 박성범에게 물었다.
“너랑 많이 친해?”
“으음……. 완전히 허물이 없다거나 그런 건 아닌데, 그래도 친한 편이긴 해. 여러모로 취향이 잘 맞아서 얘기가 잘 통하거든.”
“그럼 굳이 나는 안 껴도 될 거 같은데.”
“응?”
“난 모르는 사람이니까 아무래도 불편할 것 같아서.”
부지런하게 재경의 등허리를 배회하던 손이 멈칫했다. 이내 박성범은 넌지시 입을 열었다. 조심스러우면서도 옅은 기대가 담긴 음성이었다.
“혹시 형이랑 친하다고 해서 질투하는 거야?”
그 말에 재경도 멈칫했다. 이내 다시금 베개에 얼굴을 묻으며 대수롭지 않은 투로 대답했다.
“질투는 무슨. 내가 질투할 만한 사이면 셋이서 같이 만나자는 말 자체를 안 했겠지.”
정확한 지적이었다. 허리에서 손을 뗀 박성범은 그대로 재경의 몸 위에 자신의 상체를 포개고 지그시 체중을 실었다.
“나에 대해 너무 많은 걸 알고 있어.”
“비켜, 무거워.”
하지만 박성범은 꿈쩍도 하질 않았다. 아직 울혈이 남아 있는 재경의 목덜미에 쪽쪽 입을 맞춘 뒤에 가만히 이름을 불렀다.
“재경아.”
“어.”
“재경아.”
“왜.”
“너, 나 좋아하는 거 맞지?”
뜬금없는 질문에 재경은 눈을 깜빡거렸다. 뒤늦게 고개를 돌렸지만 여전히 박성범이 올라타고 있어서 얼굴을 볼 수는 없었다. 뭐라고 대꾸하기 전에 박성범이 거듭 말을 이었다. 어쩐지 의기소침하게 느껴지는 음성이었다.
“나 진짜 너밖에 없어. 네가 내 첫사랑인 거 알아?”
재경은 픽 웃으며 고개를 원위치로 돌렸다.
“지금 날 좋아하는 건 알겠는데, 첫사랑까지 끌어오는 건 오버 아냐?”
“진짜야. 이렇게까지 누군가를 좋아해본 건 처음이라서……. 하루하루 미치게 행복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좀 불안하기도 해.”
처음 듣는 이야기에 재경은 살짝 놀랐다. 연애에 있어서도 워낙 긍정적이고 쾌활한 녀석이라서 이면에 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전혀 몰랐다.
은근슬쩍 대화를 마무리하며 밀어낼 수도 있지만 왠지 지금은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재경은 잠깐 고민하다가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불안할 게 뭐 있어. 계속 잘 지내고 있는데.”
“……맞아.”
고개를 끄덕이며 답한 뒤에 박성범은 한마디를 더 보탰다.
“오늘 같이 자면 안 돼?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껴안고 자기만 할게.”
“알았어. 불 끄고 와.”
“……!”
거절당할 걸 알면서도 그냥 해본 말인데, 뜻밖의 승낙에 박성범의 눈이 번쩍 뜨였다. 혹시라도 그새 재경이 말을 바꿀세라 후다닥 몸을 일으켰다.
탁- 스위치를 누르자마자 어둠이 내려앉았다. 이내 찰싹 달라붙는 뜨거운 체온을 느끼면서 재경은 소리 없이 웃고 말았다. 다시 생각해도 박성범에 한해서는 마냥 무른 것 같았다.
* * *
경수가 문제를 푸는 동안 책을 읽고 있던 재경은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어느덧 6시가 다 된 것을 보고 책을 덮으며 말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응!”
경수는 희희낙락하며 냉큼 샤프를 내려놓았다. 해맑게 웃는 녀석의 뒤통수를 벅벅 쓰다듬은 뒤에 재경은 문제집을 팔락팔락 넘겨서 숙제 표시를 해주었다.
핸드폰을 확인해봤지만 박성범에게서 온 연락은 없었다. 카페에 도착하면 연락하겠다더니 아직 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남아 있는 커피를 빨대로 쭉 빨아들인 뒤에 재경은 부러 덤덤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집에 별일은 없어?”
“응. 없어.”
“삼촌이랑 숙모도 잘 지내시고?”
“응. 가끔 다투긴 하는데 그래도 막 소리 지르면서 싸우는 건 못 봤어.”
저처럼 덤덤하게 말하는 모습이 짠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다행이다 싶었다. 가방을 다 챙긴 경수를 보면서 재경은 다시금 말을 이었다.
“오늘은 먼저 가.”
“형은?”
“친구랑 약속 있어. 집에 도착하면 문자해.”
“응. 그럼 다음 주에 봐!”
손을 흔든 경수가 먼저 스터디 카페를 나섰다. 재경은 곧 핸드폰으로 박성범에게 전화를 걸었다. 익숙한 노랫소리가 뚝 끊기면서 쾌활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 자기야.]
“……. 어디야?”
[거의 다 왔어. 수업 끝났어?]
“응.”
[그럼 문 앞에서 기다릴래? 1분 내로 도착할 거 같은데.]
“알았어.”
전화를 끊은 재경은 가방을 어깨에 걸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문을 열고 나가자마자 타이밍 좋게 익숙한 차가 앞에 멈춰 섰다.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 오르자 청량감을 주는 향기가 느껴졌다. 박성범이 즐겨 뿌려서 이제는 재경에게도 익숙한 향수 냄새였다.
“사촌 동생은?”
“먼저 갔어. 비 오는 거 같은데?”
“그러네.”
하늘이 어둑어둑하다 싶더니 앞 유리창 위로 빗방울이 툭툭 떨어지기 시작했다. 빗방울은 금세 빗줄기로 변해서 시원하게 쏟아졌다. 차가 신호에 걸린 틈을 타서 박성범은 음악을 틀었다.
평소엔 주로 차트 상위권에 랭크된 가요를 듣지만, 오늘은 지금처럼 비 오는 날씨에 잘 어울리는 재즈 음악을 골랐다. 박성범은 익숙한 멜로디를 흥얼거리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입을 열었다.
“요즘 삼촌이랑은 어때?”
“……연락 안 한 지 오래됐어.”
“숙모는?”
“마찬가지야.”
흘끗 옆을 돌아보니 재경은 덤덤한 표정으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박성범의 입에서 소리 없는 한숨이 흘러나왔다.
지금도 재경은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주말마다 사촌 동생의 공부를 봐주고 있었다. 명색이 애 부모면 그걸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사과는커녕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이 뻔뻔하게 애를 맡기는 걸 보니 역시나 보통 사람들은 아닌 듯했다.
쯧, 하고 혀를 찬 박성범은 잠깐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
“혹시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꼭 말해줘.”
“……알았어.”
“배는 안 고파?”
“조금.”
“형이 쏜댔으니까 맛있는 거 실컷 먹자.”
“그래.”
짧게 답한 뒤에 재경은 차창 너머로 고개를 돌렸다.
토요일인 오늘, 재경은 일전에 박성범이 말했던 친한 형을 만나러 약속 장소로 가는 중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조금 부담스럽긴 했다. 애인 사이인 걸 알고 있대서 걱정 아닌 걱정도 살짝 들지만, 그래도 믿을 만한 사람이니 말을 꺼냈을 거란 생각에 응했다.
잠시 후 박성범은 건물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레스토랑에는 많은 손님들이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직원을 따라서 걸어가자 바깥 풍경이 훤히 보이는 창가 쪽 테이블이 나타났다.
“멋지네. 다음엔 둘이서 오자.”
재경은 고개를 끄덕이곤 핸드폰을 켰다. 경수가 보낸 문자에 답장을 한 다음, 어김없이 잔뜩 쌓여 있는 단톡방 대화를 대충 훑어봤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왔다.” 하고 말하는 목소리에 재경은 고개를 들었다.
“여기예요, 형.”
박성범을 발견한 유지원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맞은편 의자를 빼서 앉으며 미안한 듯이 웃었다.
“좀 늦었지? 생각보다 차가 많이 막히더라고.”
“저희도 방금 왔어요.”
박성범은 곧장 물병을 들어 유지원의 잔을 채워주었다. 단숨에 물잔을 비우고 숨을 돌린 유지원이 한결 여유로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소개 안 해줘?”
“해야죠. 이름은 이재경이고, 저랑 동갑이에요. 그리고 이쪽이 나랑 친한 지원이 형이야.”
간단한 소개가 끝나자 유지원이 먼저 재경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만나서 반가워요. 유지원이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재경은 가볍게 악수에 응했다. 이윽고 유지원은 일단 음식부터 시키자며 직원을 불렀고, 두 개의 메뉴판이 테이블 위에 놓였다.
메뉴판을 보자마자 재경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들어설 때부터 평범한 식당은 아닌 것 같다고 짐작하긴 했지만, 단품 요리 가격이 죄다 기본 3만 원 이상이었다.
재경이 메뉴를 고민하는 중이라고 생각했는지, 박성범이 몸을 살짝 붙이면서 살가움이 듬뿍 묻어나는 음성으로 물었다.
“뭐 먹을지 정했어?”
“아직.”
“그럼 이건 어때? 많이 안 느끼해서 재경이 네 입맛에 잘 맞을 거 같아. 아니면 이것도 괜찮을 거 같고.”
문득 시선이 느껴지는 듯해서 재경은 고개를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유지원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제야 박성범이 딱 붙어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서둘러 대답했다.
“이걸로 할게.”
“응. 그럼 내가 이거 할 테니까 같이 먹자.”
와중에도 이쪽을 바라보는 시선은 여전했다. 굳이 또 시선을 맞출 필요는 없었기에 재경은 일부러 물잔으로 목을 축였다. 거듭 한숨이 흘러나왔다. 조용히 밥만 먹고 가자는 생각으로 나왔는데, 과연 그럴 수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