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1/22)

11.

“왜 이렇게 아침부터 멍때리고 있어?”

툭 하고 어깨를 치는 손길에 재경은 정신을 차렸다. 조금 전만 해도 거의 텅 비다시피 했던 강의실이 어느새 학생들로 가득 차 있었다.

“또 어디 아픈 건 아니지?”

“아냐.”

김성욱의 물음에 재경은 고개를 내저으며 즉각 대답했다. 꾸준히 약을 먹은 덕분인지 감기 증상은 물론이고 입안에 났던 상처도 말끔히 나았다.

시계를 보니 곧 있으면 강의가 시작될 시간이었다. 펼쳐놓은 책으로 시선을 내린 것도 잠시, 재경은 저도 모르게 또다시 딴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날, 그 일이 있고 난 뒤 어느덧 일주일이 지났다. 그동안 박성범은 자신이 한 말을 철두철미하게 지켰다. 이전과 전혀 다름없는 태도로 자신을 대했고, 볼 때마다 옅게 웃는 듯한 미소도 여전했다. 둘 다 1교시 수업이 있는 날에는 어김없이 기사 노릇을 자처하면서, 차 안에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손가락으로 핸들을 톡톡 두드리며 기분 좋게 따라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재경은 그렇지 못했다. 그게 문제였다. ‘대학 영어’ 시간에는 여전히 옆자리에 나란히 앉고, 시시덕거리는 농담도 주고받고, 점심때 시간이 맞으면 학식도 같이 먹고. 예전과 달라진 점이 없는데, 거기에 자꾸만 의미를 부여하는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제는 녀석의 향기라고 인식되어 버린, 아침마다 살짝 풍기는 향수 냄새도, 기분 좋게 웃는 얼굴도, 부드럽게 울리는 목소리도. 전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던 것들이 새삼스레 낯설게 와 닿으면서 심장이 자꾸만 두근거렸다.

아마 녀석의 마음을 알게 되어서 그런 걸 거라고, 나에게 호감이 있는 걸 알기 때문에 나 또한 상대에게 관심 아닌 관심이 생기는 거라고, 금방 원래대로 돌아갈 거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하아…….”

“땅 꺼지겠다. 진짜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연거푸 한숨을 내쉬었더니 김성욱이 핸드폰 게임을 하다 말고 옆을 힐끗 쳐다봤다. 그러다 시계를 확인하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교수님이 안 오시네. 수업 시간 지났는데.”

그 말에 재경도 핸드폰 시계를 다시 봤더니 정말 9시 10분이 넘어가고 있었다. 무슨 일 있나. 항상 정각에 들어오는 교수님인데. 이내 강의실 앞쪽 문이 열리며 경제학부 조교가 안으로 들어왔다.

“방금 최 교수님께 연락이 왔는데, 급한 일이 생겨서 오늘 수업이 어려울 것 같다고 하시네요.”

그와 동시에 곳곳에서 웅성웅성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기껏 아침 일찍 왔는데 갑자기 휴강이라고 하니 그럴 만도 했다. 흐트러진 주의를 집중시키며 조교는 말을 이었다.

“오늘 수업 못 한 건 다음에 연강으로 보강한다고 하셨어요. 그리고 이제 곧 레포트 제출 기한 마감이니까, 아직 안 낸 사람 있으면 이번 주까지 제출하세요.”

전언을 끝낸 조교가 돌아서자마자 김성욱이 투덜거렸다.

“에이씨, 괜히 일찍 왔네. 미리미리 말해주면 어디 덧나나?”

가방을 챙기는 학생들을 따라서 재경도 책과 필기구를 가방 안에 넣고 일어섰다. 터벅터벅 복도를 걷는데 김성욱이 핸드폰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물었다.

“도서관?”

“어.”

“하여튼 징하다니까. 참, 오늘 축구 결승전 있는 거 알지?”

어제 언뜻 학과 단톡방에서 본 기억이 났다. 그러고 보니 오늘, 내일 양일간 학교 축제가 있어서 다음 교양 수업도 휴강이었다.

“축제 기간이랑 겹치네.”

“학생회에서 일부러 그렇게 잡았을걸. 올 거지?”

“봐서.”

“어허, 우리 과 놈이면 당연히 와서 막대풍선 흔들어야지. 준결승 때 내가 얼마나 까리하게 골 넣었는지 알아?”

“한 번만 더 들으면 백 번이야.”

“그러니까 꼭 오라는 거지. 박성범도 뛰어.”

순간 재경은 멈칫할 뻔했지만 다행히 김성욱은 눈치채지 못한 기색이었다. 건물을 나와서 계속 걷다 보니 두 갈래로 나뉘는 길이 나타났다.

“그럼 나중에 봐. 꼭 와야 돼.”

“넌 어디 갈 건데.”

“과방에 있다가 울 여보야 데리러 가려고. 점심 같이 먹을래?”

“아니.”

여자친구랑 밥 먹는데 눈치 없이 덜렁 끼어드는 불청객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꼭 와서 응원에 힘을 보태라는 놈을 뒤로한 채 재경은 도서관을 향해서 걷기 시작했다.

시간은 잘도 흘러갔다. 곧 있으면 12시인 것을 확인한 재경은 가방을 챙겨 들고 학교 식당으로 갔다. 원래 이 시간이면 조금만 늦어도 대기줄이 상당한데 오늘은 출입문 근처에 몇 명만 서 있을 뿐이었다. 이 또한 축제의 여파인 듯했다.

식권 자판기 앞에 서서 오늘은 뭘 먹을지 고민하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이름을 불렀다.

“재경 오빠?”

뒤를 돌아보니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이보라였다.

“맞네요! 점심 드시러 오셨어요?”

변함없이 생글생글 웃는 미소를 보며 재경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이판이는?”

“주점 준비 때문에 아침부터 선배들한테 끌려갔어요. 저도 좀 이따 갈 거고요.”

다들 여기저기서 난리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재경에게는 다소 낯선 상황이었다. 아르바이트에 매여 있다 보니 1학년 때도 학과행사에 제대로 참여한 적이 거의 없었다. 처음엔 왜 저 새끼는 항상 빠지냐며 투덜대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지만, 면역이 생겼는지 아니면 무슨 말을 듣기라도 했는지, 나중엔 다들 그냥 그러려니 하며 신경도 쓰지 않는 분위기였다.

“오빠 혼자 오셨어요?”

“어.”

“저도 혼잔데 같이 먹어요. 괜찮으시죠?”

“나야 고맙지.”

만 원짜리 지폐를 투입구에 넣은 재경은 이보라의 식권도 끊어주었다. 이보라는 괜찮다며 한사코 사양했지만, 오늘 밥동무도 되어주고, 또 저번에 발표할 때 많이 애써준 것도 있어서 마침 기회가 왔을 때 이렇게나마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었다.

식당 안도 상대적으로 한산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비빔밥을 한 숟갈 크게 떠먹은 이보라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한 투로 말했다.

“좀 이따 축구 결승전 하는 거 아세요?”

“어.”

“저도 오늘 알았는데, 경제학부랑 국제학부랑 붙는다길래 보러 가려고요. 혹시 오빠도 가세요?”

“아마도.”

딱히 축구를 좋아해서가 아니었다. 불참한 것을 나중에 김성욱이 알게 되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며 찡찡댈 게 불을 보듯 뻔해서였다. 어차피 휴강이기도 하니 잠깐 가서 얼굴을 비치고 올 생각이었다.

“이판이도 참가해?”

“아뇨, 그랬다간 큰일 나요. 걔, 알아주는 개 발이거든요.”

“개 발?”

“네. 멍멍이 발이요. 축구 진짜 못해요.”

익살스러운 표정에 재경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식사를 이어갔다.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식당을 나서면서 시계를 확인했다. 지금 바로 운동장으로 가면 시간이 딱 맞을 것 같았다.

걸은 지 5분 정도 지났을까.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며 옆에서 걷던 이보라가 갑자기 “잠깐만요.” 하고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몇 걸음 앞서서 걸어가던 여학생 앞을 살짝 막아서듯 하더니 금세 환하게 웃었다.

“맞네!”

“오, 이보라~”

금세 서로 손뼉을 마주치는 걸 보니 아는 사이인 듯했다. 이내 이보라의 질문이 이어졌다.

“축구 시합 보러 가는 거야?”

“어.”

“근데 왜 혼자야? 다른 애들은 없어?”

“축구 보러 가자고 하니까 다들 들은 척도 안 하더라. 너도 운동장 가는 거야?”

“응.”

“잘됐다. 나랑 같이 가자.”

친구가 이보라의 팔에 냉큼 팔짱을 끼는 것이 보였다. 따로 가는 게 나을 듯해서 두 사람을 슬쩍 지나치려는데 이보라가 말을 걸었다.

“같이 가요, 오빠.”

의아한 표정을 짓는 친구를 보며 이보라는 친절한 설명을 덧붙였다.

“대학 영어 같이 듣는 선배님인데, 같이 운동장에 가던 중이었어. 경제학부 선배님이시거든. 이쪽은 저랑 같은 학부인 제 친구예요.”

그러자 친구가 먼저 눈치껏 재경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재경도 살짝 고개를 끄덕이면서 인사하자 이보라가 재경을 바라보며 물었다.

“같이 가도 돼요, 오빠?”

“어.”

덕분에 본의 아니게 일행이 한 명 더 늘었다. 사실 따로 가도 전혀 상관없었기에 재경은 일부러 두어 걸음 정도 떨어져서 걸었다. 하지만 굳이 그러는 보람도 없이 이보라는 간간이 뒤를 돌아보며 말을 붙였고, 거리가 벌어진다 싶으면 잠깐 기다려주기까지 했다.

그렇게 걷다 보니 목적지에 도착했다. 재경은 속으로 살짝 놀랐다. 결승전이라곤 해도 일개 교내 축구 대회일 뿐인데, 운동장에는 생각보다 많은 관중이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저희 팀 응원석은 저긴가 봐요. 그럼 다음에 또 봐요, 오빠.”

혼자가 된 재경은 잠깐 주변을 둘러보다가 가방을 벗으며 제일 위쪽 스탠드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시야가 높은 덕분에 운동장이 한눈에 들어왔다. 같은 유니폼을 입은 선수들끼리 볼을 굴리며 몸을 풀고 있었다.

이내 박성범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일부러 찾은 게 아니라, 남들보다 거의 머리 하나는 더 크다 보니 원치 않아도 눈에 띄었다.

‘축구도 잘하나 보네.’

결승전 선수로 뛸 정도라면 머릿수만 채우는 땜빵은 아닐 터였다. 중계 시합을 즐겨본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직접 발로 뛰는 데도 소질이 있는 줄은 몰랐다. 마침 누군가가 패스한 공이 박성범의 발에 닿았고, 녀석은 곧 화려한 발재간을 선보이며 이리저리 공을 굴렸다.

저도 모르게 계속 쳐다보고 있는데 머리 위에서 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 이재경 아냐?”

양재현이었다. 같은 분반이지만 지난 학기 때까지만 해도 이름만 아는 사이였는데, 함께 가평에 놀러 갔던 날 이후로 부쩍 많이 친해졌다. 정확히는 양재현이 매일같이 단톡방에 웃긴 짤을 투척하거나 대화를 이끌면서부터였다.

“시합 보러 온 거야?”

“누가 꼭 오라고 사정사정해서.”

양재현이 알 만하다는 얼굴로 웃었다. 이내 안경을 밀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가자. 애들 저쪽에 다 모여 있어.”

“난 여기가 편해.”

“어허, 낙동강 오리 알도 아니고 혼자 떨어져 있으면 안 되지.”

덥석 손목을 붙잡는 바람에 재경은 끌려가다시피 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앞쪽에 앉으니 시야가 좁아진 대신 확실히 더 잘 보이긴 했다. 이내 박성범과 눈이 마주쳤고, 살짝 놀란 표정을 지어 보인 녀석이 곧장 성큼성큼 다가왔다. 거의 동시에 조금 떨어진 곳에서 갑자기 터져 나온 목소리에 재경은 깜짝 놀랐다.

“성범 선배님! 선배님 응원하러 왔어요!”

“파이팅하세요!”

흘끗 옆을 쳐다봤지만 모르는 얼굴이었다. 예전에 비하면 재경도 아는 후배들이 제법 많아지긴 했지만, 비율로 따지면 여전히 한 줌에 불과했다. 그와 달리 박성범은 꽤나 친밀감이 느껴지는 어조로 여학생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수업 없어?”

“네. 전부 휴강이에요.”

옆모습만 봐도 여학생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박성범은 1학년 때부터 잘생긴 신입생으로 인기가 많았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누군가 고백할 때마다 죄다 거절해서 ‘캠퍼스 커플은 싫어한다’, ‘나이 많은 연상만 만난다’는 둥 이런저런 소문이 많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왜 전부 거절했는지 이해가 갔다.

그리고 지금 녀석은 나를…….

“언제 왔어?”

갑자기 들리는 목소리에 재경은 “어?” 하며 퍼뜩 고개를 들었다. 뜨끔했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시선을 마주하니 박성범이 웃는 얼굴로 다시금 말을 걸었다.

“왜 그렇게 놀라. 안 올 줄 알았는데 왔네.”

“다시 갈까?”

장난으로 일어서는 시늉을 하자 박성범이 곧장 팔을 뻗으며 재경의 어깨를 아프지 않게 붙잡았다. 역시나 녀석의 손바닥은 몹시도 뜨거웠다.

“농담이야, 농담. 살살 하려고 했는데 열심히 뛰어야겠네.”

“…….”

재경은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도로 다물었다. 시선은 저도 모르게 슬며시 피한 채였다.

또다. 쓸데없는 의미부여. 이런 데 생전 얼굴도 비치지 않던 사람이 응원하러 왔으니 열심히 해야겠다는 의미로 한 말일 수도 있는데, ‘나 때문에 열심히 하겠다’는 말로 먼저 해석했다는 사실에 뒤늦은 민망함이 밀려왔다. 녀석에게 타인의 머릿속 생각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없어서 천만다행이었다.

“가방 좀 맡겨도 돼?”

“어?”

다시 고개를 들자마자 박성범과 눈이 마주쳤다. 늘 그렇듯 옅은 미소를 지은 채였다.

“한데 모아놓긴 했는데, 앞서 준결승전 할 때 도난 사건이 있었단 말 들으니까 불안해서. 안에 지갑이랑 핸드폰 들어 있거든.”

“그럼 나한테 줘.”

가방 보관 정도야 얼마든지 해줄 수 있었다. 잠시 후 묵직한 스포츠 백과 함께 음료수 캔 하나가 앞으로 내밀어졌다.

“이건 보관료.”

“안 줘도 돼.”

가볍게 거절하자 손목을 살짝 붙잡으며 캔을 쥐여 준다. 그러더니 “갔다 올게.” 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박성범은 선수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되돌아갔다. 본의 아니게 받게 된 캔을 만지작거리고 있으니 양재현이 눈독을 들였다.

“안 마실 거야?”

“아니. 마실 거야.”

언제 사양했었냐는 듯 재경은 서둘러 탭을 땄다. 상온에 있던 건지 시원한 맛은 없었지만 목을 축이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이윽고 긴 휘슬 소리와 함께 경기가 시작됐다. 양 팀 모두 이번이 마지막 시합이라는 생각 때문인지 초반부터 태클도 서슴지 않으며 맹공을 퍼부었다. 응원석에서 커다랗게 울려 퍼지는 북소리가 열기를 고조시켰다.

* * *

재경은 팔짱을 낀 채 학생회관 출입문 근처에 서 있었다. 물론 이유 없이 그냥 서 있는 것은 아니고, 지금쯤 샤워실에서 한창 씻고 있을 박성범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대략 20분 전, 시종일관 치열한 접전을 펼친 축구 시합은 결국 경제학부의 승리로 끝이 났다. 처음에 운동장 스탠드에 앉을 때만 해도 재경은 10분 정도만 자리를 지키다가 돌아갈 생각이었다. 오후 수업이 전부 공강이긴 해도 축구 시합 때문에 두 시간 넘게 바깥에 앉아 있을 마음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막상 자리를 뜨려니 뜻밖의 복병이 발목을 붙잡았다. 시합 직전에 박성범이 맡겨놓은 검은색 스포츠 백이 제 옆자리에 놓여 있었다.

양재현한테 맡기고 갈까 하는 생각을 아주 잠깐 했지만, 이내 재경은 마음을 고쳐먹고 계속해서 자리를 지켰다. 도난 때문에 그렇다는 말을 들었는데 남한테 떠넘기다시피 하고 가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다. 게다가 수고비 명목으로 음료수까지 받았으니 말이다.

결국 재경은 시합을 계속 관전했고, 끝날 때까지 한 사람만 눈에 담았다. 그리고 시합 종료 후에 박성범은 성큼성큼 큰 보폭으로 재경을 향해 다가왔다. 열심히 지키고 있던 가방에서 꺼낸 수건으로 땀을 닦더니 재경에게 질문을 던졌다. 오후에는 뭘 할 생각이냐고.

‘도서관에 있다가 알바하러 가려고.’

대답을 들은 박성범이 싱긋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나랑 같이 축제 구경하러 갈 생각은 없어?’

그래서 재경은 박성범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재경은 괜찮다고 했지만, 땀 냄새 풀풀 풍기면서 유니폼 차림으로 돌아다니는 건 좀 그렇다면서 박성범은 잠깐만 학생회관에 들렀다 가자며 양해를 구했다. 학생회관 안에 샤워실이 있다니, 재경은 4년 만에 처음으로 안 사실이었다.

무리 지어 지나가는 사람들을 의미 없이 바라보고 서 있으니 잠시 후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많이 기다렸어?”

돌아보자 조금 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모습을 한 녀석이 보였다. 워낙 몸이 좋다 보니 유니폼 차림도 나름대로 멋졌지만, 멀끔하게 차려입은 모습과는 비교가 불가능했다. 이내 두 사람은 나란히 길을 걷기 시작했다. 향수를 항상 소지하고 다니기라도 하는지 익숙하면서도 은은한 냄새가 풍겼다.

“계속 뛰어다녔더니 배고프다.”

녀석의 말마따나 풀타임으로 계속 뛰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재경은 옆을 돌아보면서 물었다.

“나가서 뭐 좀 사 먹을까?”

“미리내골 가면 먹을 거 천지일걸.”

넓디넓은 캠퍼스에는 자그마한 골짜기와 나무로 만들어진 아치형 다리가 있었다. 축제 기간이 되면 그곳을 중심으로 먹자골목이 세워지는데, 이제껏 재경은 그 아래쪽 길로만 오갔을 뿐 안으로 들어가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엇,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갑자기 누군가가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당황한 재경과 달리 박성범은 웃음 띤 얼굴로 후배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오랜만이네. 복학했어?”

“아뇨. 다음 학기에 하는데, 오늘 축제라길래 놀러 왔어요.”

“동아리 애들은 봤어?”

“내일 저녁에 만나기로 했어요. 선배님도 꼭 오세요.”

“그래. 그럼 재밌게 놀다 가.”

잠깐 멈췄던 발걸음을 움직이면서 박성범은 동아리 후배라고 설명했다. 이후로도 비슷한 상황이 서너 번 정도 반복됐다. 걷다 보면 어김없이 누군가가 박성범의 이름을 대뜸 부르며 반갑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오래 붙잡혀 있지는 않았다.

“나 지금 어디 가는 중이라서 그런데, 다음에 한번 따로 보자.”

“오냐. 연락해라.”

이내 박성범은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사과했다.

“미안. 오늘따라 자꾸 아는 사람이랑 마주치네.”

웬만큼 학과 행사에 관심이 있다 하는 사람들은 죄다 이 근처에 있을 테니 그럴 만도 했다. 재경은 픽 웃으며 농담조로 대답했다.

“일부러 심어놓은 거 아냐?”

“들켰네.”

금세 넉살 좋게 받아주는 행동에 재경의 웃음이 좀 더 깊어졌다. 조금 더 걷다 보니 두 줄로 쭉 늘어선 천막들이 눈에 들어왔다.

“와, 전부 다 맛있겠다.”

부스 초입에서부터 박성범의 입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노릇노릇하게 구워지는 꼬치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걸 보니 정말로 배가 고픈 모양이었다. 재경은 속으로 웃음을 흘리며 박성범에게 물었다.

“닭꼬치 하나씩 먹을까? 오늘 수고한 기념으로 내가 살게.”

“진짜?”

화색이 만연한 얼굴에 거듭 웃음을 흘리며 재경은 닭꼬치 두 개를 주문했다. 이후로는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먹자 타임이 펼쳐졌다. 음식을 파는 부스가 보일 때마다 박성범은 걸음을 멈추며 아낌없이 지갑을 열었고, 괜찮다고 사양하는 재경의 손에도 하나씩 꼭 쥐여 줬다. 덕분에 다섯 번째 부스에서 떡볶이와 어묵을 클리어했을 때는 한 끼 식사에 버금가는 포만감이 들었다.

미리내골에는 먹거리 부스만 있는 게 아니었다. 조금 더 안쪽으로 걸어가니 가끔 TV에서나 보던 커다란 원형 돌림판이 눈에 띄었다. 그 옆에 앙증맞은 토끼 머리띠를 한 남자가 음악에 맞춰 경쾌하게 박수를 치며 사람들의 참여를 유도했다.

“자, 다들 오셔서 돌림판 한 번씩 돌려보세요~! 한 번에 2천 원, 세 번에 5천 원. 싸다 싸! 꽝 없는 이런 게임 세상에 또 없습니다!”

재경은 금세 흥미를 잃고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박성범은 구미가 당겼는지 가던 길을 멈추고 재경에게 물었다.

“한번 해볼까?”

손끝으로 돌림판을 가리키는 행동에 재경은 거듭 그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눈으로 돌림판 위를 빠르게 훑었다. 들은 대로 꽝은 없지만, ‘갈증을 날려줄 시원한 음료수 캔’, ‘당신의 노트를 아름답게 꾸며줄 볼펜 세트’ 등등 잡다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사이 박성범은 뒷주머니에서 꺼낸 지갑을 열고 남자에게 5천 원짜리 지폐를 건넸다. 두 손으로 넙죽 지폐를 건네받은 남자가 다시금 박수를 치며 말했다.

“돌려주세요~!”

아령처럼 생긴 손잡이를 쥔 박성범이 힘차게 돌림판을 돌렸다. 착착착 하는 소리를 내며 몇 바퀴를 돌아가더니 이내 속도가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완전히 멈춘 순간, 어느덧 멈춰 서서 구경하던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축하합니다! 당신의 노트를 아름답게 꾸며줄 볼펜 세트에 당첨되셨습니다!”

박스를 뒤적인 남자가 볼펜 세트를 찾아서 건넨 뒤에 또다시 힘차게 외쳤다.

“자, 한 번 더 돌려주세요!”

박성범은 손잡이를 잡는 대신 재경을 바라보며 물었다.

“한번 해볼래?”

“난 됐어.”

손사래를 쳤지만 소용없었다. 옆에 서 있던 남자까지 나서서 거드는 바람에 재경은 마지못해 손잡이를 붙잡고 힘주어 돌렸다.

착착착착, 또다시 소리를 내며 돌림판이 돌아갔다. 마지못해 돌렸을 때는 언제고, 막상 판이 돌아가니 기대 아닌 기대가 차올랐다. 하지만 잠시 후 결과를 확인한 재경은 그만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고 말았다.

“축하합니다! 당신의 몸과 마음을 달콤하게 녹여줄 츄파춥스에 당첨되셨습니다!”

말이 좋아서 당첨이지 꽝이나 다름없는 아이템이었다. 민망함에 차마 손을 뻗지 못하는 재경을 대신해서 박성범이 경품을 건네받았다.

“이재경.”

뒤늦게 손을 떼며 고개를 들자 껍질이 홀랑 벗겨진 사탕이 코앞에 있었다.

“아- 해.”

“됐어. 너 먹…….”

말하느라 벌어진 입안으로 사탕이 불쑥 들어왔다. 아직 한 번 더 기회가 남았기에, 박성범은 송진 가루를 묻힌 선수처럼 손바닥을 탁탁 털고는 손잡이를 힘껏 돌렸다.

“이번에는 과연 뭐가 나올까요?”

힘껏 돌린 덕분에 커다란 돌림판은 오래도 돌아갔다. 잠시 후, 다음 칸으로 넘어갈락 말락 하며 긴장감을 자아내던 돌림판이 마침내 완전히 멈춰 섰다. 경품을 확인한 재경은 이번에야말로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축하합니다! 대형 곰 인형에 당첨되셨습니다! 오늘 장사는 망했네요, 흑흑.”

익살스러운 멘트와 함께 남자가 잠깐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다시 나온 그의 손에는 정말로 곰 인형이 들려 있었다. 초대형은 아니지만 어림잡아 30cm 정도는 돼 보이는 크기였다.

박성범에게 곰 인형을 건네며 남자는 한 번 더 도전해보는 건 어떠냐고 넌지시 부추겼다. 그러자 박성범이 재경을 쳐다봤다. 의중을 묻는 듯한 표정에 재경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내젓고는 박성범의 팔을 잡아끌었다.

“나중에 또 올게요.”

재미로 돈을 쓰는 건 이 정도로 충분했다. 좋은 취지로 하는 거면 한 번 더 참가하겠지만, 아마 대부분의 수익금은 술값으로 사용될 터였다. 하지만 이내 ‘너무 내 입장에서만 생각했나.’ 싶은 마음이 들어서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더 하고 싶어?”

“아니. 또 하면 츄파춥스만 걸릴 거 같아.”

누가 봐도 놀리는 말에 재경은 박성범의 가슴께를 아프지 않게 툭 쳤다.

“놀리지 마.”

그 손을 그대로 붙잡으며 박성범이 무언가를 들려주었다. 방금 경품으로 받은 곰 인형이었다.

“선물이야.”

재경은 뒤늦게 제 품에 들린 것을 확인하고 당황해하며 말했다.

“됐어. 너 가져.”

“내가 계속 들고 있으면 시선 집중일걸?”

듣자마자 절로 그 모습이 상상됐다. 안 그래도 오는 내내 말을 거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런 걸 들고 있으면 더더욱 눈에 띌 터였다.

그렇다곤 해도 재경 역시 난감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이제껏 재경은 이런 인형은커녕 가방에 달고 다니는 자그마한 인형조차 만져본 기억이 없었다.

“갈까?”

박성범이 먼저 걸음을 옮기는 바람에 재경은 그만 거절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흘끗 자신의 가방을 내려다봤지만 곰 인형을 집어넣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잘하면 몸 부분은 넣을 수 있겠지만, 그랬다간 머리만 빼꼼 내민 채로 다녀야 했다. 반대로 집어넣어도 난감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꼼짝없이 손에 들고 갈 수밖에 없었다.

다음 부스 앞에서 재경을 기다리고 있던 박성범이 손끝으로 또다시 어딘가를 가리켰다.

“핫도그도 하나 먹을까?”

“난 됐어. 배 엄청 불러.”

“벌써? 배가 왜 그렇게 작아.”

“…….”

진심으로 하는 말이냐는 소리가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자랑은 아니지만, 재경도 어디 가서 먹는 걸로는 절대 뒤처지지 않았다. 집에서 가끔 같이 저녁을 먹을 때마다 두 공기씩 거뜬히 비우는 걸 봤을 텐데 잘도 저런 말을 한다 싶었다.

“먹을 거면 내가 사줄게. ……이거 준 답례로.”

눈짓으로 곰 인형을 슬쩍 가리킨 뒤에 재경은 먼저 핫도그 부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박성범은 사양 않고 가장 큰 핫도그를 골랐고, 머스타드 소스에 케첩까지 듬뿍 뿌린 핫도그를 그 자리에서 서너 입 만에 먹어치웠다. 이내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맛있네. 진짜 안 먹어?”

“응.”

고개까지 끄덕이며 대답하는데 무언가가 재경의 눈에 띄었다.

“너 입가에…….”

“박성범!”

그 때, 말꼬리를 자르며 누군가가 또 박성범의 이름을 불렀다.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이번에는 재경도 아는 사람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같은 학부 동기인 김소연이었다.

재경은 잘 모르지만, 김소연은 여자 연예인 누구를 닮았다고 하는 데다가 성격도 털털해서 인기가 많았다. 게다가 들리는 말로는 어학연수를 제법 길게 다녀와서 나이는 동갑이지만 아직 2학년이었다.

김소연도 재경을 알아보고는 인사를 건네더니 다시금 박성범을 쳐다봤다.

“놀러 온 거야?”

“어.”

“근데 왜 우리 부스에는 코빼기도 안 비쳐?”

“배 좀 채우느라고. 우리 부스는 어딨는데.”

“저기 안쪽. 성철이가 제비뽑기를 거지같이 해서 완전 후진 데 있어.”

과장되게 한숨을 푹 내쉬는 행동에 박성범은 웃음을 터뜨렸다. 이내 김소연도 생긋이 웃으면서 박성범의 팔을 잡아끌었다.

“가자. 소주 한 병 공짜로 줄게.”

“대낮부터 무슨 술이야.”

“우리가 언제 그런 거 따졌어? 빨리 와. 호객 행위도 좀 해주고.”

“안 그래도 저녁부터 서빙하기로 했어.”

“진짜? 누군지는 몰라도 잘했네. 너 있으면 매상 걱정 안 해도 되겠다, 야.”

김소연은 옆으로 메고 있던 핸드백을 열더니 물티슈를 꺼내서 박성범에게 내밀었다.

“입가에 소스 묻었어. 나 빼고 뭘 그렇게 맛있게 먹었어?”

“시합 뛰고 났더니 배고파서. 정혁이는?”

“부스 안쪽에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아 있어. 나오지 말라고 해도 말을 안 들어요.”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 재경은 가만히 그 옆에 서 있었다. 딱히 끼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자신은 알지 못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니 소외감 아닌 소외감이 살짝 들기는 했다.

웃으며 대화하는 두 사람은 언뜻 봐도 퍽이나 친밀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김소연은 물론이고, 박성범의 얼굴에도 웃음이 가실 줄 몰랐다.

‘……게이면서 여자랑 저렇게……. 미친,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재경은 곤혹스러움에 입가를 가리며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게이라 해서 여자와 친하게 지내지 말라는 법도 없고, 녀석이 누구와 친하게 지내든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이런 뜬금없는 생각이 들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재경이 너도 저녁에 서빙 뛸래?”

갑자기 말을 거는 목소리에 재경은 깜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미안. 뭐라고 했어?”

“너도 서빙 뛸 생각 있냐고. 끝나면 다 같이 마시러 갈 거야.”

“그러고 싶은데 저녁에 알바가 있어서.”

말이 나온 김에 시계를 봤더니 어느덧 오후 4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아직 여유가 좀 있긴 했지만, 방금 순간적으로 했던 생각 때문에 차마 박성범의 얼굴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럼 먼저 가볼게.”

“벌써 가게? 아직 시간 좀 남지 않았어?”

“그렇긴 한데…….”

말끝을 흐리는데 마침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재경은 들고 있던 곰 인형을 살짝 들어 올려 보였다.

“집에 잠깐 들렀다 가려고.”

그러자 박성범이 아아, 하며 웃음을 흘렸다. 언밸런스한데도 묘하게 잘 어울려서 억지로라도 안겨준 보람이 있었다.

“그래. 그럼 나중에 집에서 보자.”

김소연도 빼먹지 않고 인사를 건넸다.

“시간 되면 놀러 와. 서비스 빵빵하게 줄게.”

“사람 좀 있어?”

“2학년 애들 몇 명 앉아 있어. 너 가면 난리 나겠네.”

이내 두 사람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멀어져 갔다. 졸지에 혼자 남게 된 재경은 잠깐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뒤늦게 돌아서서 걸음을 옮겼다.

걷는데, 기분이 좀 이상했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면 나쁜 쪽에 가까웠다.

굳이 김소연을 만나지 않았어도 어차피 곧 있으면 헤어져야 하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저만 남겨두고 둘이서 걸어가는 모습을 보니 어쩐지 일행을 빼앗긴 듯한 느낌이 들었다.

‘……뺏기기는 무슨.’

이내 재경은 고개를 내저으며 걸음을 빨리했다. 오늘은 좀 한가하려나. 경험상 시험 기간이나 축제 기간에는 호프집을 찾는 손님들이 뜸한 편이었다. 그러니 모처럼 편하겠다고 애써 생각을 돌렸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박성범을 올려다보며 웃던 얼굴, 물티슈를 건네던 가느다란 손가락, 그리고 둘이서 나란히 걸어가던 뒷모습 따위가 자꾸만 불쑥 떠올랐다.

* * *

축제의 영향력은 다음 날까지 이어졌다. 오전에 듣는 전공 수업들은 그대로 진행되었지만, 문제는 그다음 수업이었다. 교수가 강의실로 들어오자 앞쪽에 모여 앉아 있던 학생들이 갑자기 앙탈 비슷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교수는 당황한 듯 웃으며 “왜 이럽니까?” 하면서 출석부를 펼쳤다. 하지만 채 이름을 부르기도 전에 기어이 한 명이 손을 들며 호기롭게 말을 꺼냈다. 오늘까지 축제 기간인데 수업하실 거냐고. 결석한 학생들도 많을 텐데 하루만 쉬면 안 되냐고.

그러자 교수는 강의실을 쭉 둘러보았다. 재경은 수업을 하자고 강하게 텔레파시를 보냈지만 안타깝게도 닿지 않은 모양이었다. 앉아 있는 학생이 수강 인원의 절반도 되지 않는 것을 확인한 교수는 짤막한 한숨을 내뱉더니, 그럼 다음에 연강을 하거나 레포트를 더 늘리는 것으로 하자는 말을 남기며 휴강을 선언했다.

“진작 말해주든가.”

박수를 치며 환호하는 무리들을 뒤로한 채 재경은 가방을 챙겨 들고 강의실을 나섰다. 표정은 빈말로도 좋지 않았다. 예술관은 캠퍼스에서도 거의 최전방에 있어서, 중앙도서관까지 가려면 족히 15분은 넘게 걸어가야만 했다. 그것도 짜증이 나는데, 연강 아니면 레포트를 추가해서 내주겠다는 말까지 들었으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그래도 걷다 보니 목적지가 나타나긴 했다. 낮지만 개수가 많은 계단을 빠르게 올라가는데 누군가가 재경을 알아보고 아는 척을 했다.

“재경 오빠!”

이보라였다. 오른손에 일회용 커피 컵을 손에 든 이보라가 곧장 가까이 다가왔다.

“공부하러 오신 거예요?”

“그냥 겸사겸사. 너는?”

“책 반납 기간이 오늘까지라서 잠깐 들렀어요. 근데 성범 오빠는 안 보이네요.”

재경은 애매한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구내식당에 점심을 먹으러 가거나 수업을 들으러 이동할 때면 저에게 박성범이 어디 있는지를 묻는 학부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어쨌거나 알면 대답해주었겠지만, 오늘 녀석은 1교시 수업이 없는 날이라서 아침부터 그림자조차 보질 못했다. 엄밀히 따지면 어제 미리내골에서 헤어진 게 마지막이었다. 알바를 마치고 돌아왔더니 녀석이 집에 없었고, 아침에는 제가 먼저 집을 나선 까닭이었다.

“그럼 먼저 가볼게.”

“잠깐만요, 오빠.”

도서관 안으로 들어가려는 재경을 이보라가 붙잡았다.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서더니, 주변을 한 번 둘러보고는 다시금 시선을 마주했다.

“혹시 잠깐만 시간 좀 내줄 수 있으세요? 5분 정도면 충분한데.”

왜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정도 시간쯤은 얼마든지 내줄 수 있었다. 이윽고 두 사람은 도서관 뒤쪽에 있는 벤치로 걸음을 옮겼다.

자리에 앉자마자 이보라는 본론을 꺼냈다.

“혹시 어제 만났던 제 친구 기억하세요? 운동장 가는 길에 마주쳤던 애요.”

“응.”

웨이브 진 갈색 머리카락에 분홍색 치마를 입고 있던 여학생의 얼굴이 떠올랐다. 모르는 사람에게는 관심이 없지만, 짧게나마 인사를 나눈 사람을 하루 만에 잊어버릴 정도는 아니었다.

“걔가 대학 축구 되게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어제도 시합 보러 간 거였는데, 성범 오빠가 눈에 확 들어왔나 봐요. 시합 시작하자마자 저 사람 누구냐면서 난리더라고요.”

“……그래?”

한 템포 늦은 반응이 재경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어쩐지 뒷말을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이보라는 살짝 상체를 가까이 하면서 예상대로의 말을 입에 담았다.

“그래서 말인데요, 혹시 성범 오빠 미팅 같은 거 좋아해요? 원래 다음 수업 시간에 만나면 직접 물어보려고 했는데, 이 기집애가 하루라도 빨리 자리 좀 마련해달라면서 난리더라고요. 근데 문자나 전화로 대뜸 물어보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요.”

평소였으면 ‘역시나 속이 깊다’며 웃었겠지만, 어쩐 일인지 지금은 웃음이 나오질 않았다. 이번에도 입술을 달싹이며 대답을 보류하고 있으니 이보라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참, 이걸 먼저 물어봤어야 됐는데. 성범 오빠 아직 여자친구 없는 거 맞죠? 저번에 물어봤을 땐 없다고 하셨는데……. 설마 그사이에 생기진 않았겠죠?”

질문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없기를 기대하는 분위기였다. 반짝반짝 빛나는 진갈색 눈동자를 마주 보다가 재경은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있어.”

“네?”

“박성범, 사귀는 사람 있다고.”

그러자 이보라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정말요?!”

다급하게 되묻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 내가 무슨 짓을 한 걸까. 재경은 이제라도 ‘농담이었다.’며 상황을 수습하려 했지만, 안타깝게도 이보라가 한발 더 빨랐다.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하는 말이 이어졌다.

“하긴, 성범 오빠가 계속 솔로일 리가 없죠. 오빠한테 먼저 물어보길 진짜 잘했어요.”

“그…….”

재경이 한 번 더 입을 열었지만, 하필이면 이보라가 시선을 내리며 핸드폰을 확인했다. 그러더니 금세 귓가로 가져가서 전화를 받았다.

“응. 어디야? 나 아직 도서관. 응. 진짜? 알았어, 지금 바로 갈게.”

통화를 끝내자마자 이보라는 미안함이 담긴 표정으로 웃었다.

“친구랑 만나기로 해서 지금 가봐야 될 것 같아요. 오늘 시간 내주셔서 감사했어요.”

서두르는 듯한 느낌이 물씬 풍겨서 차마 붙잡을 수가 없었다.

“그럼 다음에 또 봐요, 오빠.”

끝까지 밝고 경쾌한 인사를 남긴 채 이보라가 먼저 자리를 떠났다. 혼자 남게 된 재경은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떨궜다. 뒤늦게 자괴감을 닮은 감정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눈가를 가리듯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말았다.

“……일 났다.”

심장이 뒤늦게 떨리기 시작했다. 혈관을 타고 떨림이 전달되기라도 하는지 이내 손가락이 떨리며 손끝이 차갑게 변했다.

어제, 오늘 직접 보고 들었던 일들로 인해서 재경은 그간 잠깐 잊고 있던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됐다. 박성범이 학교에서 상당히 인기가 많은 녀석이라는 사실을. 선후배나 동기들에게 예쁨을 받는 것은 물론이고, 이성적으로 호감을 느끼는 여자들도 많이 있을 터였다.

하지만 녀석은 게이니까. 여자들이 아무리 녀석을 좋아해도 연인이 될 수는 없을 테니까. 그리고……. 설령 녀석을 좋아하는 남자가 있다 해도, 녀석은 나를 좋아한다고 했으니까.

그런 생각들이 한데 모여 한 덩어리로 고착되면서 재경은 그만 완전히 잊고 있었다. ‘마음’이나 ‘감정’이라는 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박성범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다른 사람과 연애를 시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만일 사귀는 사람이 생기면 언제든지 그 사람에게 곁을 내어줄 수 있다는 사실을.

박성범의 옆자리는 결코 자신의 것이 아닌데……. 어느덧 제 옆에 박성범이 있고, 그가 베푸는 호의와 선의를 당연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심지어 이보라의 친구가 박성범에게 마음이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그 녀석이 좋아하는 사람은 나’라는 생각을 은연중에 하기까지 했었다.

덕분에 재경은 그만 깨닫고 말았다. 다른 사람에게 박성범을 빼앗기기 싫다고. 관심을 보이는 것도, 호의를 베푸는 것도, 웃으며 장난스럽게 머리를 헝클어주는 것도, 전부 자신에게만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그리고…….

“…….”

누가 불이라도 지른 것처럼 재경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상대가 박성범이라면, 만일 녀석이 원한다면, 그런 것들도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잔뜩 취했던 어느 날 밤, 몇 번이고 키스를 나누며 서로를 만졌던, 다른 놈이라면 상상조차 하기 싫은 그런 일들을.

박성범이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도 그랬던 것처럼.

* * *

쨍그랑-!

쟁반에서 미끄러진 유리잔이 낙하하며 산산조각이 났다. 들고 있던 쟁반을 내려놓으며 재경은 놀라서 쳐다보는 옆 테이블 손님들에게 빠르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유리 깨지는 소리가 제법 크게 났는지 안쪽에 있던 최용식이 놀라서 달려왔다. 대번에 상황을 파악하고는 창고 한쪽 구석에 있던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들고 다시 나타났다.

“손으로 줍지 마. 잘못하면 다쳐.”

“앗…!”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재경이 움찔하며 손을 뗐다. 유리 조각에 베인 상처에서 금세 새빨간 핏방울이 맺혀 올랐다.

“거 봐, 다친다니까. 많이 베였어?”

“괜찮아요. 죄송해요, 형.”

“얼른 휴지로라도 감싸. 여긴 내가 치울게.”

재경은 카운터 위에 있던 휴지로 손가락을 꾹 눌렀다. 같은 타임에 일하는 다른 알바생이 밴드를 건네줘서 그나마 근무 시간에 약국으로 달려가는 불상사는 면할 수 있었다. 잠시 후 뒤처리를 끝낸 최용식이 다가와서 물었다.

“괜찮아?”

“괜찮아요.”

“어디 한번 봐.”

최용식이 재경의 손목을 잡으며 상처 부위를 확인했다. 손끝에 감긴 밴드에 피가 번져 있는 것을 보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실수에 대한 책망이 아니라 재경이 다쳤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혹시 몸이 안 좋은 거야?”

“아니에요.”

재경은 즉각 부정했지만 최용식의 얼굴에는 걱정이 가시질 않았다.

“내가 말은 안 했는데, 너 아까부터 계속 멍때리는 표정이었어. 생전 안 그러던 놈이 그러니까 안 그래도 이상하다 싶었는데……. 진짜 괜찮은 거 맞아?”

“네, 괜찮아요 형. 걱정 끼쳐서 죄송해요.”

그래도 크게 안 다쳐서 다행이라며, 최용식은 재경의 어깨를 가볍게 툭툭 두드려주고는 자리를 떠났다.

재경은 한숨을 푹 내쉬며 눈가를 눌렀다. 최용식의 지적은 사실이었다. 오늘 자신은 제가 생각해도 정신이 계속 다른 데 팔려 있는 데다가 처음으로 컵을 깨먹는 실수까지 저질렀다.

‘……정신 차리자.’

바로 지난주에 아파서 이틀이나 쉬었는데 이 이상 폐를 끼칠 수는 없었다. 재경은 정신을 다잡으며 업무에 복귀했고, 이후로는 다행히 별다른 실수 없이 평소처럼 서빙 일을 했다. 그리고 마치는 시간까지 30분 정도 남았을 때 최용식의 호출을 받았다.

“오늘은 좀 일찍 들어가서 쉬어. 시급은 안 깔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괜찮아요, 형.”

“내가 안 괜찮아서 그래. 너 지금도 얼굴이 별로야.”

“진짜 괜찮아요. ……사실 마치고 나서 형한테 물어보려고 했는데, 일 끝나면 저랑 한잔하러 가실래요?”

최용식의 얼굴에 뜻밖이라는 표정이 떠올랐다. 늘 자신이 먼저 ‘오늘 한잔 콜?’ 하고 신호를 보내지, 재경이 먼저 이런 말을 꺼낸 적은 거의 없었다.

“괜찮으세요?”

“나야 완전 좋지. 근데 괜찮겠어? 손가락도 다쳤잖아.”

“이 정도는 다친 축에도 못 들어요. 형 바쁘시면 다음에 가고요.”

혹시나 해서 뒷말을 덧붙이자마자 최용식이 냉큼 대답했다.

“바쁘기는. 왠지 이럴 것 같아서 시간 비워 놨어.”

* * *

직원이 주문을 받으러 오자 최용식은 메뉴판을 보지도 않고 삼겹살과 소주를 시켰다. 잠시 후에 두 사람은 사이좋게 소주잔을 부딪친 뒤에 시원하게 들이켰다.

재경은 자신이 고기를 굽겠다고 했지만, 최용식이 쓰읍 하며 집게를 가져가서는 불판 위에 고기를 올렸다. 그사이 재경은 빠르게 소주잔을 비웠다. 주당인 최용식도 그에 질세라 열심히 잔을 들이켰고, 소주 두 병을 더 시킨 뒤에 재경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제 말해 봐.”

“네?”

“오늘 계속 다른 데 정신 팔려있었던 이유 말이야. 생전 안 하던 실수를 한 것도 그렇고, 뭔가 할 말이 있어서 마시러 가자고 한 거 아냐?”

재경은 다소 놀란 표정으로 최용식을 쳐다봤다.

“형, 보기보다 예리하시네요.”

“몰랐어? 나 이런 사람이야.”

최용식이 여봐란듯이 어깨를 으쓱이는 동안 재경은 빈 술잔을 만지작거렸다.

그의 지적은 정확했다. 오늘 학교에서 이보라와 헤어진 이후로 재경은 거의 온종일 박성범에 대해서 생각했고, 녀석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되짚어 보았다. 하지만 혼자서 딱 잘라 결론을 내릴 수 없는 부분이 있어서 최용식에게 조언을 구하고 싶었다.

쉬지 않고 열심히 마셔댔더니 취기가 올라오는 느낌이 들었다. 한 번 더 술잔을 비운 뒤에 재경은 시선을 내리깐 채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야기가 이어지는 동안 최용식은 장난기를 싹 거둔 얼굴로 진지하게 경청해 주었다.

“……그냥 좋은 친구라고만 생각했는데, 고백을 받은 다음부터 한 번씩 의식될 때가 있더라고요. 그런데 그게 녀석에 대한 관심인지, 아니면 나를 좋아한다는 걸 아니까 그것 때문에 의식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구구절절 읊은 뒤에 입을 다물자 최용식은 한 문장으로 명쾌하게 요약해서 재경에게 되물었다.

“한마디로 네 감정이 어디에서 기인하는지 헷갈린다는 거지?”

“네.”

“그럴 땐 쉬운 방법이 있어.”

“쉬운 방법이요?”

“어. 존나 쉬워. 걔랑 키스한다고 한번 상상해봐. 거북하거나 싫다는 생각이 들면 연애 감정이 아닌 거고, 괜찮은데? 싶으면 친구 이상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야. 친구하고도 막 잘 수 있는 놈이 아니라면.”

말을 마친 최용식은 소주병을 들고 쿨하게 자신의 잔을 채웠다. 속으로는 내심 놀라는 중이었다. 내가 이렇게 언변의 달인이었나. 사실 언젠가 오프였을 때 백수처럼 방구석에 드러누워서 봤던 B급 예능에서 나온 내용이었는데, 제가 말해놓고도 제법 그럴싸해서 놀랄 정도였다.

“어때? 할 수 있겠어?”

예의상 재경에게 물어봤지만 답은 이미 나온 듯했다. 슬쩍 얼굴이 붉어지는 걸 보니 아무래도 후자인 것 같…….

“벌써 해 봤어요.”

“……뭐?”

최용식의 표정이 순식간에 달라졌다. 해 봤다고? 뭘? 키스를?

“그때 많이 취하긴 했는데, 아무튼 다음날에 좀 쪽팔리긴 했어도 싫다는 생각은 안 들었어요.”

“허…….”

최용식의 입에서 기가 막힌 탄식이 흘러나왔다.

“술김이든 뭐든 간에 키스를 한 적이 있고, 싫지 않았고, 상대가 계속 의식되면 이미 끝난 거 아냐?!”

라고 외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한층 더 열이 오른 재경의 얼굴을 보고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딴에는 진지한 거 같으니까.’

재경이 알바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지금처럼 둘이 마시러 갔다가 최용식은 재경이 모태 솔로라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얼굴 반반해, 키도 평균 이상이야, 학벌도 좋아. 뭐 하나 부족한 게 없어 보이는 놈이 그냥 솔로도 아니고 모솔이라니 지금도 이해가 가지는 않지만, 어쨌거나 그런 녀석이 저에게 속마음을 털어놨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아진 최용식은 조금 더 나서서 불을 지펴주기로 마음먹고 다시금 입을 열었다.

“감정에는 명확한 경계선이 있는 게 아냐. 막말로 어떤 사람한테 관심도 없다가 어느 순간 자기도 모르게 끌릴 수도 있고, 잘 지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싫증이 날 수도 있어. 음, 그러니까 너도 자각하지 못한 사이에 상대를 향한 네 마음이 바뀌었을 수도 있다는 거야. 너, 분명히 걔랑 키스했는데 괜찮았다고 했지?”

“……네.”

“다른 사람한테 뺏기기 싫고, 걔가 너만 봐 줬으면 좋겠고?”

“……네.”

“근데 뭘 더 고민해.”

“……!”

“당장 잡아. 어영부영하는 사이에 딴 놈이 나타나서 확 낚아채 갈 수도 있어.”

* * *

“오늘 고마웠어요, 형.”

“고맙기는. 잘 되면 한턱 거하게 쏴.”

“……네. 그럼 내일 뵐게요.”

꾸벅 고개를 숙인 뒤에 재경은 뒤돌아서 걷기 시작했다. 취해서 살짝 어지럽긴 해도 마음은 훨씬 홀가분해졌다.

사실 오늘 계속 덤벙거리고 답지 않은 실수를 했던 이유를 재경은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어제 박성범과 함께 걸어갈 때 자신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녀석에게 말을 걸었던 것, 김소연과 다정하게 대화를 하던 모습, 또 이보라의 친구가 박성범에게 관심이 있다는 말 등이 자꾸만 마음을 어지럽혔다. 그리고 생각을 거듭하면 할수록 불안함을 닮은 감정이 차올랐다. 혹시라도 녀석이 다른 사람에게로 가 버릴까 봐. 다른 사람에게 곁을 내줘버릴까 봐.

‘어영부영하는 사이에 딴 놈이 나타나서 확 낚아채 갈 수도 있어.’

우뚝, 재경의 발걸음이 멈췄다.

사실 지금도 마음의 정리가 완벽하게 된 것은 아니었다. 갓 태어난 새끼 오리가 처음으로 눈에 담는 대상을 어미로 생각하는 것처럼……. 처음으로 따뜻한 호의를 베풀어준 사람을 남에게 빼앗기기 싫은 것인지, 아니면 정말 박성범과 같은 감정으로 녀석을 좋아하는 것인지 명확하지가 않았다. 절친한 친구가 그쪽이긴 하지만 자신도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최용식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더는 이유 따윈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앞으로도 박성범이 계속 자신만을 바라봐 주었으면 한다는 거였다.

한번 자각한 마음은 터진 둑처럼 주체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손 놓고 있는 사이에 녀석이 다른 사람을 만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조급함이 절로 차올랐다.

‘……안 돼.’

재경은 달리기 시작했다. 불안함이 번지며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설마 박성범의 마음이 그리 쉽게 바뀌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어쩌면 자만일 수도 있었다. 남에게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최용식의 말을 들으니 정말로 그런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

숨이 차오르며 어지러웠지만 재경은 멈추지 않았다. 집에 도착하면 당장 녀석을 붙잡고 말해야 할 것 같았다. 누구에게도 널 빼앗기기 싫다고. 지금처럼 나만 걱정하고, 나에게만 잘해줬으면 좋겠다고.

* * *

삑삑삑삑-

현관에서 들리는 익숙한 소리에 박성범은 리모컨으로 TV 볼륨을 줄였다. 일어서서 현관 쪽으로 다가가니 잠시 후에 문이 열리며 재경이 들어왔다.

“왔어?”

“……응.”

“생각보다 일찍 왔네. 내일 토요일이니까 늦게까지 달릴 줄 알았는데.”

밤 11시 무렵에 박성범은 재경의 문자를 받았다. 매니저 형이랑 마시러 간다는 내용에 ‘알겠다’는 답장을 보냈었다.

술을 제법 마신 모양인지 재경의 얼굴은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벽시계를 확인한 박성범은 다시금 앞을 바라보면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피곤하겠다. 얼른 씻고 자.”

평소였으면 너도 잘 자라는 인사를 남기고 뒤돌아섰겠지만 오늘은 달랐다. 재경은 잠깐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시선은 살짝 아래를 향한 채였다.

“할 말이 있어.”

“뭔데?”

운을 뗀 것까진 좋았지만, 막상 눈앞에 박성범이 있으니 뒷말을 잇기가 무척 어려웠다.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기 전에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한번 해봤는데, 그새 누가 지우개로 지우기라도 한 것처럼 머릿속이 새하얬다.

‘……미치겠네. 어떡하지.’

내일 이야기할까, 하는 생각이 언뜻 들었지만 서둘러 지워내며 거듭 마음을 다잡았다. 박성범에게 해야 할 말은 또 있었다. 오후에 본의 아니게 해버린 실수를 재경은 아직 수습하지 못했다. 당장은 아니지만 언제라도 이야기가 나올 수 있는 문제였고, 박성범이 다른 루트로 알아버리게 되면 자칫 상황이 이상한 쪽으로 흘러갈 가능성이 있었다.

무슨 일인지 궁금할 법도 한데 박성범은 묵묵히 기다려주었다. 재경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뱉으며 다시금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오후에 학교 도서관에서 보라랑 마주쳤는데, 걔 친구가 너한테 관심이 있다 하더라고. 미팅 같은 거 좋아하냐고 나한테 물어보길래……. 사귀는 사람 있다고 했어.”

입을 다물자마자 심장이 더 크게 뛰기 시작했다. 그런 재경을 잠시 바라보다가 박성범은 뒤늦게 제가 이해한 바를 되물었다.

“나한테 사귀는 사람이 있다고 한 거지?”

끄덕, 재경의 고개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이어서 평소의 녀석답지 않게 작은 목소리로 하는 말이 들려왔다.

“미안. 내 멋대로 그렇게 말해서.”

“미안하긴.”

솔직히 말하면 처음엔 ‘왜?’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한 가지 짐작 가는 바가 떠올랐다. 이재경은 자신이 남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여전히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재경을 바라보며 박성범은 미소 띤 얼굴로 말을 이었다.

“모르는 척 넘길 수도 있었는데 일부러 중간에서 잘라준 거잖아. 나 생각해서 그렇게 해준 건데 오히려 고맙지.”

“…….”

재경은 살며시 주먹을 그러쥐었다. 유감스럽지만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지금부터 할 말을 생각하니 심장이 두근대다 못해 울렁거리며 눈앞이 핑핑 도는 기분이었지만, 이제 더는 물러설 수가 없었다.

“……게 아니야.”

“뭐?”

“그래서 그런 게 아니라고. 너 빼앗기기 싫어서 그랬어.”

“……!”

“게이라 해서 여자친구 없으란 법은 없잖아. 그게 아니라도, 다른 사람이 너한테 관심을 보이는 게 싫어. 그리고 네가 다른 사람한테 잘해주는 것도 싫어.”

“…….”

“이제야 그걸 깨달았는데……. 아직 늦은 거 아니지?”

목소리에 희미한 떨림이 묻어났다. 박성범은 아무런 말도 없었다. 말소리는커녕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재경은 초조함을 느꼈다.

설마 늦어버린 걸까. 그새 녀석의 마음이 바뀐 거면……. 그런 거라면…….

“재경아.”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심장이 철렁했다. 그리고 재경은 그만 도망치고 싶어졌다.

길었던 침묵도 그렇고, 고저 없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불길함을 자아냈다. 재경은 천천히 입술을 깨물었다. 술 때문에 뇌가 미치기라도 했는지 눈가가 시큰해지며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어진 말에 모든 생각이 일시에 멈췄다.

“나, 뺨 한 대만 때려주라.”

“……뭐?”

숙이고 있던 고개가 절로 들렸다. 낮았던 목소리만큼 무표정하거나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뒷목에 손을 올린 채로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아니, 지금 내가 서서 꿈을 꾸는 것 같아서.”

그러더니 스스로 뺨을 꼬집는 모습이 보였다.

“……아닌데. 아픈데.”

그러면 진짜로…….

꼭 그렇게 말하는 듯한 표정이 재경을 향했다. 깨달은 순간, 재경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안도감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거절할 말을 생각하느라 뜸을 들인 게 아니었다. 꿈을 꾸는 것 같다고, 뺨까지 꼬집었던 걸 보니 아무래도 실감이 나지 않아서 그런 모양이었다.

여전히 놀란 듯한 녀석을 보며 재경은 그제야 웃을 수 있었다. 늘 근사하고 멋지게만 보이는 녀석이 ‘이런 표정을 지을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꿈 아니야.”

절대 그래서는 안 됐다. 어떻게 꺼낸 말인데. 한없이 길게 느껴지던 침묵을 생각하면 지금도 심장이 떨렸다. 그런 긴장감과 초조함은 두 번 다시 느끼고 싶지 않았다.

잠시 후에 박성범이 묻는 목소리가 들렸다.

“나 빼앗기기 싫다는 거, 혹시 친구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는 거야?”

“……그런 거 같아.”

재경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헷갈렸던 게 그 부분이었는데 박성범의 입을 통해서 들으니 비로소 명확해졌다. 자신은 박성범의 마음을 독점하고 싶고, 또 그 이상의 깊은 유대관계를 가지고 싶었다.

“그러면…….”

말끝을 흐린 박성범이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순간 재경은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커다란 두 손이 살며시 뺨을 감싸더니 건조하면서도 뜨거운 무언가가 입술에 닿았다. 잠시 후에 멀어지며 나직하게 묻는 말이 들려왔다.

“이런 것도 나랑 할 수 있겠어?”

덤덤한 음성이었지만 재경은 속지 않았다. 박성범은 지금 태연함을 가장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살짝 갈라진 목소리와 웃음기라곤 보이지 않는 표정이 그 증거였다.

덕분에 재경은 확신할 수 있었다. 녀석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더는 가슴 졸이거나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당연하지.”

“……!”

일순 박성범의 눈이 크게 뜨였다. 목을 끌어당긴 재경이 까치발을 하고 먼저 입을 맞췄다. 이어서 눈을 마주 보며 하는 말이 들렸다.

“더한 것도 했으면서 새삼스레.”

담백한 어조와 달리 귀 끝은 온통 붉게 물든 채였다.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박성범은 그대로 재경의 허리를 끌어당기며 다시 한 번 거칠게 입술을 부딪쳤다.

“……!”

뜨거우면서도 물컹한 무언가가 입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재경은 흠칫 놀라 물러서려 했지만 박성범이 한 손으로 뒤통수를 감싸고 있어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키스가 이어질수록 재경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입술을 빨아당기거나 혀가 얽힐 때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야릇한 감각이 느껴졌다. 부드러우면서도 휘몰아치는 느낌이 동시에 드는 키스였다.

“자, 잠깐만… 우읍…!”

숨이 차서 고개를 돌리려 했지만 박성범은 집요하게 따라붙으며 놓아주질 않았다. 결국 재경은 벗어나길 포기하고 다시금 눈을 감았다. 덕분에 박성범은 원하는 만큼 실컷 키스한 뒤에야 천천히 입술을 뗐다.

“하아, 하아…….”

재경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호흡을 골랐다. 그러다 뒤늦게 박성범의 옷깃을 붙잡고 있다는 걸 깨닫고는 깜짝 놀라며 손을 뗐다.

‘방금 녀석이랑…….’

키스했다는 사실을 상기하자마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러고 보니 일전에 사고 같았던 키스를 제외하면 이번이 제대로 된 첫 키스나 다름없었다. 입술로 올라가려는 손을 간신히 참아내며 서 있는데 머리 위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재경아.”

이제껏 수도 없이 들은 이름이고, 또 익숙한 목소리인데도 이상할 정도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키고 고개를 들자 박성범과 눈이 마주쳤다. 기껏 숨을 고른 보람도 없이 또다시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진짜 꿈 아니지?”

“…….”

“혹시라도 장난이나 농담이라고 하면……. 나 진짜 회복 불가일 거 같아.”

그렇게 진한 키스를 했으면서 아직도 꿈 타령을 하는 걸 보니 재경은 살짝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이내 박성범의 얼굴에 떠오른 불안함을 감지하고는 뜸 들이지 않고 대답했다.

“내가 장난으로 이런 말을 할 사람으로 보여?”

그리고 이왕 말이 나온 김에 한마디를 덧붙였다.

“다른 사람이 널 채갈까 봐 갑자기 불안해져서……. 심장이 터질 정도로 열심히 달려왔는데, 장난이나 농담으로 치부하면 내가 더 곤란해.”

박성범의 얼굴에 뒤늦게 미소가 번졌다. 일견 덤덤해 보이지만, 귓가를 붉게 물들인 채로 삐딱하게 시선을 피하고 있는 걸 보니 몹시도 쑥스러워하는 게 분명했다.

“나 좀 봐, 재경아.”

그러자 머뭇거리면서도 눈을 맞춘다. 다시 생각해도 정말 꿈만 같은 일이었다.

“내일 되면 기억 못 하는 거 아니지?”

“안 그래.”

“그러면 우리 오늘부터 1일이네.”

“……!”

“아냐?”

불안해하는 표정을 지었을 때는 언제고, 어느덧 박성범은 자신의 페이스를 완전히 되찾은 모습이었다. 오늘부터 1일이라니, 말만 들어도 낯간지럽고 민망하지만 결코 싫은 기분은 아니었다. 오히려 ‘다들 이런 맛에 연애를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잘할게. 앞으로 내가 진짜 잘할게.”

“……지금보다 뭘 더 얼마나 잘하려고.”

“나 없이는 못 살 정도로.”

“그건 좀… 으음….”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또다시 입술이 닿았다. 재경은 놀라서 눈을 살짝 크게 떴다가, 다시금 감으며 박성범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맞닿은 가슴으로 누구의 것인지 모를 심장 소리가 요란했다. 부드러우면서도 뜨거운 키스를 계속하면서 재경은 속으로 생각했다. 지금이라도 마음을 깨달아서 정말 다행이라고. 모르는 척 외면하지 않고, 용기를 내길 천만다행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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