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0/22)
  • 10.

    “패스!”

    “이쪽으로!”

    발끝으로 공을 굴리고 있으니 뒤쪽에서 같은 팀 멤버의 콜이 들렸다. 태클을 피해 이리저리 움직이던 박성범은 기회를 틈타서 공을 길게 보냈다. 커다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볼은 콜을 외친 놈의 가슴팍에 정확히 부딪히며 떨어졌다.

    박성범은 곧장 상대편 진영으로 치고 올라가면서 공격에 가담했다. 골문 앞에서 치열한 접전이 펼쳐지자 스탠드에 앉아서 구경하던 학생들의 기대감이 점점 고조되었다.

    “어, 어어, 와아아아-!”

    “꺄아아아!”

    감듯이 찬 볼이 골대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순간, 약속이나 한 것처럼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골의 주인인 김성욱은 달려드는 동기들을 뿌리치고 혼자 세리머니를 하며 오두방정을 떨었다. 뒤늦게 얼싸안고 득점의 기쁨을 함께 누리다가 심판에게 경고 아닌 경고를 받고는 다시금 시합에 복귀했다.

    8강전을 이기고 준결승전에 진출한 팀들답게 경기는 시종일관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했다. 인저리 타임으로 넘어가자 1점 차이로 지고 있는 토목과의 막판 공격이 더욱 거세졌다.

    “박성범, 받아!”

    외침과 함께 자신에게 넘어온 공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박성범은 또 한 번 장거리 패스를 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이제 슬슬 끝날 때가 됐는데. 유니폼 옷자락을 들고 땀을 닦기 무섭게 휘슬 소리가 길게 울렸다.

    삐이이익-

    “와아아아!”

    마침내 시합이 종료됨과 동시에 다들 약속이나 한 것처럼 서로 얼싸안으며 승리의 기쁨을 누렸다. 오늘 승리의 주역이나 다름없는 김성욱은 머리통이 까질 정도로 쓰다듬을 받다가 관중석으로 달려가서 여자친구를 와락 껴안았다.

    또다시 귀가 아플 정도로 터져 나오는 환호성을 뒤로한 채 박성범은 스포츠 백을 챙겨 들고 학생회관으로 향했다. 2층에 있는 샤워 시설을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여어!”

    누군가가 뒤에서 어깨동무를 빙자하며 한껏 체중을 싣는 게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자 김성욱이 허파에 바람이 든 사람처럼 실실 웃고 있었다. 투 톱 공격수에 주장 감투까지 쓰고도 시합 내내 한 골도 못 넣어서 의기소침해 하더니, 오늘 결승골로 만회해서 어지간히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거창한 자기 자랑을 한 귀로 흘려듣다시피 하며 박성범은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얼굴에는 언뜻 피로한 기색이 떠올랐다. 병원에서 거의 밤새워 재경을 보살핀 데다가, 집에 데려다준 다음 곧바로 학교로 와서 풀타임 축구 시합을 뛰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사실 하루 정도 잠을 못 자는 건 딱히 큰일이 아니었다. 집중해서 곡 작업을 하거나 시간이 촉박하면 이틀 연속으로 밤을 지새울 때도 더러 있지만, 박성범은 그때보다 지금 더 피곤함을 느꼈다. 육체보다는 정신적인 면에서 비롯되는 피로감이었다.

    재경에게 고백 아닌 고백을 하면서 ‘부담 가질 필요 없다’고 말하긴 했지만, 그런 말을 들었는데 신경이 쓰이지 않을 리가 없었다. 어쩌면, 아주 어쩌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흘려 넘길 수도 있겠지만……. 정말로 이재경이 그렇게 넘어간다면 또 그 나름대로 조금은 서운한 감정이 생길 것 같기도 했다. 이랬다가, 저랬다가. 누가 머릿속을 들여다보면 미친놈이라고 혀를 차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엉망이었다.

    “재경인 괜찮은 거 맞아?”

    가뜩이나 마음이 무거운데 김성욱은 눈치도 없이 하필 이 타이밍에 재경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목소리가 완전 맛이 갔던데.”

    박성범은 그제야 옆을 쳐다봤다.

    “통화했어?”

    “어. 말했잖아. 둘이 짼 줄 알고 재경이한테도 오만소리 다 했는데, 병원에 실려 갔었다고 하니까 존나 미안하더라.”

    “미안한 줄 알긴 아네.”

    “닥쳐, 인마.”

    팔꿈치로 박성범의 옆구리를 쿡 찌른 김성욱이 다시금 걸음을 옮기며 말을 이었다.

    “근데 진짜 네가 있어서 다행이었네. 이재경 혼자 있었어 봐. 진짜 큰일 났을걸.”

    박성범은 부정하지 않았다. 병원에 가서도 처음엔 열이 잘 떨어지지 않았던 걸 생각하면, 혹시나 하고 재경의 방을 들여다보길 잘했다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였다.

    걷다 보니 학생회관 건물에 도착했다. 이용 신청을 하고 공용 탈의실에서 옷을 벗다가 문득 든 생각에 핸드폰을 꺼냈다.

    [형 나 좀이따 가도돼?]

    답장은 금방 왔다.

    [ㅇㅇ당연하지]

    [한시간 내로 갈게 간단히 요기할것도 부탁해]

    [ㅇㅋ]

    답장을 확인한 뒤에도 잠깐 액정을 보고 있다가 박성범은 뒤늦게 핸드폰 화면을 껐다. 집에 혼자 있을 녀석이 걱정돼서 문자라도 한 통 보낼까 싶은 생각이 언뜻 들었지만, 결국엔 그냥 라커 안에 넣고 문을 잠갔다.

    샤워를 끝내고 나오자 김성욱은 벌써 거울 앞에 서서 머리를 말리고 있었다. 음정, 박자 모두 무시하고 흥얼거리는 콧노래를 어쩔 수 없이 들으며 옷을 입으니 그새 다가와서는 말을 건다.

    “점심 뭐 먹으러 갈까? 지원금 받은 거 아직 좀 남았는데.”

    티셔츠를 아래로 끌어 내리며 박성범은 무심하게 대답했다.

    “니들끼리 먹어.”

    “존나 열심히 뛰어줬는데 빠지면 섭섭하지. 고기 먹자, 고기.”

    “약속 있어서 가봐야 돼.”

    “무슨 약속?”

    “만나기로 한 사람이 있어.”

    “오올, 소개팅?”

    그와 동시에 후배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몰렸다. 선배들끼리 대화하는데 차마 끼어들지는 못하고, 대신 호기심과 기대감이 담긴 열렬한 시선을 보냈다. 박성범은 그 시선을 가볍게 무시하며 대답했다.

    “소개팅은 무슨. 아는 형이랑 잠깐 보기로 했어.”

    “형 누구?”

    “넌 모르는 사람이야.”

    “왜, 알 수도 있지.”

    김성욱이 마당발인 것은 맞지만 게이 클럽에서 만난 사람을 알 리가 없었다. 괜히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것은 사양이었기에 라커 안에 들어 있던 스포츠 백을 서둘러 꺼냈다.

    “먼저 간다.”

    “말해주면 입이 닳기라도 하냐?”

    애처럼 툴툴대는 녀석을 뒤로한 채 박성범은 먼저 탈의실을 나섰다. 꼬르륵, 먹을 것 좀 넣어달라고 시끄럽게 우는 배를 달래며 차를 세워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후루룩-

    포크로 돌돌 만 스파게티 면이 입안으로 쉼 없이 빨려 들어갔다. 앉은 자리에서 스파게티 2인분에 고르곤졸라 피자까지 먹어치운 박성범은 그제야 포크를 내려놓으며 티슈로 입가를 닦았다. 바 안쪽에서 팔짱을 낀 채 서 있던 윤정현이 음료가 담긴 유리컵을 건넸다.

    “마셔.”

    음료까지 원샷하자 그제야 좀 살 것 같았다. 포만감이 느껴지는 얼굴을 보면서 윤정현이 물었다.

    “뭘 했길래 아직 한 끼도 못 먹었어?”

    “아침까지 병원에 있다가 곧바로 축구 시합 뛰러 갔어.”

    “병원? 병원은 왜.”

    “재경이가 아파서.”

    누굴 말하는지 알아챈 윤정현이 금세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디가 아팠길래.”

    “밤에 보니까 온몸이 불덩어리더라고. 심각해 보여서 급하게 병원에 데려갔어.”

    “의사는 뭐라던데.”

    “피로가 많이 쌓였다고, 당분간 잘 쉬어주라고 했어. 다행히 열은 떨어져서 아침에 퇴원했고.”

    “진짜 다행이네. 근데 옆에 안 있어 줘도 괜찮아? 밤중에 병원 갈 정도였으면 많이 아팠을 거 같은데.”

    덤덤하게 건네는 말에 박성범의 얼굴이 금세 어두워졌다. 눈썰미가 좋은 윤정현은 찰나의 변화를 놓치지 않고 캐치해냈다.

    “무슨 일 있었어?”

    박성범은 묵묵부답이었다. 굳게 다물린 입술이 보였지만 윤정현은 그를 재촉하는 대신 가만히 기다려주었다. 아마 오늘도 무슨 일이 있어서 연락을 했지 싶은데, 짝사랑 상대가 아프다는 말을 하려고 여기까지 찾아온 것은 아닐 터였다.

    잠시 후에 한숨과 함께 내뱉는 말이 들려왔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평소와 달리 어깨에 힘이 전혀 들어가 있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저질러버렸어.”

    “뭘…….”

    저질렀느냐고 물으려는 순간, 한 가지 생각이 번개처럼 뇌리를 스쳤다. 윤정현은 설마 하는 표정으로 박성범에게 물었다.

    “고백했어?”

    “……직접 그런 말을 한 건 아닌데,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됐어.”

    천하의 윤정현도 이번만큼은 곧바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끼고 있던 팔짱을 풀며 저도 모르게 재촉하는 투로 말했다.

    “좀 더 자세히 말해봐.”

    “그러니까…….”

    박성범은 거듭 긴 한숨을 흘린 뒤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재경의 뺨에 맞은 흔적이 있는 걸 발견했고, 신경 쓸 필요 없다는 말에 순간적으로 서운한 마음이 들었던 것, 아무한테나 잘해주는 게 아니라 너라서 그런 거라며 본의 아니게 진심을 드러낸 것까지 전부.

    말하다 보니 현타가 찾아왔다. 다시 한 번 제 입으로 말하다 보니 아예 그냥 대놓고 고백한 거나 다름없었다.

    “하아…….”

    놀란 기색이 여실하던 재경의 얼굴을 떠올리자 거듭 무거운 한숨이 흘러나왔다.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되돌리고만 싶은 심정이었다.

    묵묵히 들어주던 윤정현이 뒤늦게 한마디 툭 던졌다.

    “내가 중딩 때 꿈꾸던 이상형이 여기 있었네.”

    “무슨 뜻이야?”

    “요새는 TV에서도 못 볼 순정남이 눈앞에 있다고.”

    박성범은 열없이 웃으며 대꾸했다.

    “……나도 나한테 이런 면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어.”

    성향을 깨달은 지 10년이 다 되어가지만, 그간 연애가 어려웠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바든 클럽이든 앉아만 있으면 항상 누군가가 먼저 다가왔고, 자신은 선택만 하면 되는 입장이었다.

    성적 지향을 자각하게 된 것도 특정한 누군가 때문이 아니었다. 보통은 중고등학교 때 친구나 아는 형, 동생 등 주변 사람들을 통해서 깨닫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박성범은 그렇지 않았다. 민망해서 누구한테도 말한 적은 없지만 박성범은 야동을 통해서 자신의 성향을 자각했다. 같이 보던 놈들이 다들 여자 배우를 보고 침을 질질 흘릴 때, 자신은 그 여배우에게 박아대는 남자 배우의 뒷모습을 보면서 흥분하는 걸 느꼈었다.

    이후로 가벼운 만남도 즐기고, 꽤 오래 만난 사람도 있긴 했다. 하지만 제가 먼저 누군가를 간절하게 바란다거나 깊게 빠진 적은 없었다. 좋게 말하면 쿨하고 가벼운 연애만 줄곧 해왔는데……. 처음으로 마음이 끌리는 상대가 생기다 보니 대체 어떻게 해야 좋을지를 알 수가 없었다.

    거듭 한숨이 푹 흘러나왔다. 남자를 좋아하는 녀석이라면 그나마 승산이라도 있을 텐데 이재경은 그렇지도 않았다. 여러모로 낯설고, 또 어렵다면 어려운 상황이다 보니 본의 아니게 자꾸만 겁쟁이가 되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팁 하나 알려줄까?”

    “……!”

    숙이고 있던 고개가 번쩍 들렸다. 기대감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얼굴을 본 윤정현은 “으이구, 이 귀여운 녀석.” 하며 박성범의 머리카락을 벅벅 헝클었다. 어른스럽고 여유로운 연애만 하는 놈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순정남이 따로 없었다.

    “뭔데. 빨리 말해봐.”

    답지 않게 재촉까지 하는 걸 보니 어지간히 다급한 모양이었다. 윤정현은 웃음기를 지우지 않은 채로 그제야 입을 열었다.

    “그냥 평소처럼 대해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

    박성범의 표정이 천천히 일그러졌다. 실망한 기색이 떠올랐지만 윤정현은 굴하지 않고 꿋꿋이 말을 이었다.

    “어차피 걔한테도 부담 갖지 말라고 했다며. 바꿔 말하면, 잘될 거라는 기대는 조금도 안 하는 거 아냐? 저번에 네 입으로도 그렇게 말했고.”

    맞는 말이었다. 만일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면, 잊어달라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비겁한 말을 덧붙이는 일은 없었을 거다.

    “네 태도가 달라지는 게 느껴지면 얼마나 난처하겠어. 그렇다고 대놓고 말하기도 뭣하고, 한집에 같이 살면서 모른 척하거나 계속 피해 다닐 수도 없을 거고.”

    “…….”

    “그러니까 밑져야 본전이라 생각하고 형이 시키는 대로 한번 해봐. 딱히 손해 보거나 나빠질 것도 없잖아. 안 그래?”

    박성범은 부정하지 않는 것으로 동의했다. 사실 본인도 이미 알고 있었다. 지금 상황에서는 윤정현이 말한 방법이 최선인 것을.

    이제는 버릇이 되어버린 듯한 한숨을 또 한 번 길게 내뱉으니 놀리듯 하는 말이 들려왔다.

    “고생이 많아. 한참 늦은 첫사랑 때문에.”

    “첫…….”

    저도 모르게 인상을 팍 구기며 고개를 들자 능글맞기 짝이 없게 웃는 얼굴이 보였다.

    “왜. 내가 뭐 틀린 말 했어?”

    이번에도 아니라고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 슬펐다. 계속 앉아 있어봤자 훌륭한 놀림감만 될 게 뻔했기에 박성범은 엉덩이를 걸치고 있던 스툴에서 일어났다.

    “벌써 가려고?”

    “집에 혼자 있는 게 신경 쓰여서. 오늘 이야기 들어줘서 고마웠어.”

    “나야말로 고맙지. 잘 마실게.”

    바 위에 올려진 와인 병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윤정현이 웃었다. 저번에도 이야기를 들어주고, 오늘은 식사까지 부탁했는데 빈손으로 오려니 염치가 없어서 오는 길에 사 온 거였다.

    다음에 또 오겠다는 인사를 남긴 채 박성범은 바를 나섰다. 멀리서 봐도 탄탄한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윤정현은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흥얼거렸다.

    “청춘이네, 청춘이야.”

    * * *

    피로에는 휴식만큼 좋은 게 없다더니 정말로 그랬다. 아무 생각 없이 푹 자고 일어나자 몸이 한결 개운해진 느낌이 들었다. 잠에서 깬 재경은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3시 26분. 한창 학교에 있어야 할 시간에 집에서 쉬고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자고 일어났더니 갈증이 났다. 물을 마시려고 일어나는데 방문 너머에서 갑자기 소리가 들렸다. 띡띡띡띡- 규칙적으로 울리는 전자음은 도어락 키패드를 누를 때 나는 소리였다.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에 들어올 사람은 한 명밖에 없다. 깨달은 순간, 재경은 서둘러 다시 이불을 덮으며 벽을 보고 누웠다. 그러다 뒤늦게 자신의 행동에 의문을 가졌다.

    ‘왜 다시 누웠지?’

    그러면서도 일어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오히려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는 두 눈을 더 질끈 감으며 필사적으로 자는 척을 했다. 이윽고 들리는 노크 소리에 심장이 철렁했다.

    “자?”

    응. 그러니까 들어오지 마.

    속으로 간절하게 빌었지만 헛된 바람이었다. 문손잡이가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방 문이 열렸다. 필사적으로 숨을 죽이고 있으니, 다가오는 발소리에 이어서 무언가가 이마를 살짝 덮는 느낌이 났다. 열이 있는지를 확인해보는 것 같았다.

    “……내 손이 뜨거워서 알 수가 없네.”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하마터면 웃음이 터질 뻔했다. 간신히 꾹 눌러 참고 계속 열심히 자는 척을 했더니, 다행히 박성범은 눈치채지 못한 듯 이불을 정돈해주고는 밖으로 나갔다.

    타악-

    방 문이 닫히는 소리에 재경은 그제야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혹시 몰라 잠깐 기다렸다가 뒤척이는 척하며 반대로 돌아누웠다. 실눈을 떠서 보니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윽고 벽에 기대앉으며 무릎을 세웠다. 멍하니 앞을 보며 목덜미를 주무르다가 이마에 손등을 대봤다. 다행히 미열은 없고, 머리가 아프지도 않았다. 대신 희한하게도 귀 끝에 열이 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내 손이 뜨거워서 알 수가 없네.’

    방금 들었던 말을 생각하니 또 웃음이 나왔다. 그것도 잠시, 재경은 옆으로 쓰러지듯 누우며 생각에 잠겼다.

    시간이 많이 흐른 것도 아니다. 바로 오늘 아침, 박성범은 고백 비슷한 말을 해놓고는 곧바로 이렇게 덧붙였다. 그냥 널 걱정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그러니 깊게 생각할 필요도 없고, 고민할 필요도 없다고.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니라 진심으로 한 말이었다는 것은 조금만 생각해봐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정말 그래도 되는 걸까? 주는 만큼 받고 싶어지는 게 인지상정인데, 대가를 바라기는커녕 고백조차 없던 일로 해도 녀석은 정말 괜찮은 걸까?

    ‘……안 괜찮을 것 같은데.’

    고백을 해본 적은 없지만, 누군가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는 게 쉬울 리가 없었다. 그래놓고 신경 쓸 필요 없다는 말을 덧붙여야만 했을 때, 녀석은 대체 어떤 마음이었을까.

    “후우…….”

    재경은 긴 한숨을 내쉬며 베개에 얼굴을 묻고 말았다. 녀석은 평소처럼 웃는 얼굴로 별것 아닌 듯이 말했지만, 그런 말을 하는데 아무렇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일까. 생각을 거듭하면 거듭할수록 미안하기도 하고, 왠지 자신이 잘못한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리고, 다른 건 몰라도 한 가지는 확실해 보였다. 박성범은 친구로서도, 또 같은 남자로서도 정말로 괜찮은 녀석이었다. 사람에 별 욕심이 없는 자신이, 박성범과는 앞으로도 계속 좋은 관계를 이어가고 싶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

    아마 그래서일 것이다. 잠깐, 아주 잠깐이나마 ‘연인으로서의 녀석은 어떨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든 것은.

    * * *

    정적을 깨며 핸드폰 알람이 울렸다. 오전 7시 40분. 시간을 확인한 재경은 손에 쥐고 있던 펜을 내려놓으면서 한껏 기지개를 켰다.

    책상에 앉을 때만 해도 창밖이 어두웠는데 어느덧 해가 환하게 떠올라 있었다. 보통은 알람을 듣고 간신히 깨지만, 이틀간 하도 많이 자서 그런지 오늘은 새벽녘에 일찌감치 눈이 떠졌다. 다시 눈을 감으며 잠을 청했지만 더는 잠이 오질 않았고, 결국 재경은 가방에 있던 책을 꺼내서 책상 앞에 앉았다. 그때가 새벽 5시를 살짝 넘겼을 때니 벌써 두 시간 반 정도 지난 셈이었다.

    방을 나선 재경은 화장실로 들어갔다. 세면대 앞에 서서 세안 겸 면도를 하고, 이어서 샤워기를 틀어 머리도 감았다. 그러고 보니 미용실에 간 지 꽤 오래된 것 같다. 시간 내서 한번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하며 팽팽하게 잡아당긴 수건으로 머리를 탈탈 털고는 밖으로 나왔다.

    다시 방으로 들어가려다가, 생각을 바꿔 살금살금 거실 쪽으로 다가갔다. 박성범의 방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잠잠한 걸 보니 아직 한밤중인 듯했다.

    거실 시계를 확인한 재경은 주방으로 향했다. 오늘은 둘 다 1교시 수업이 있는 날이었다. 보통은 박성범이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자신은 설거지나 뒷정리를 담당하지만, 정해진 룰은 아니니 바꿔서 해도 별문제가 되지는 않을 터였다.

    ‘아니지. 본래는 아침에 일어나는 일도 별로 없다고 했었…….’

    까지 생각하다 말고 재경은 고개를 휙휙 내저었다.

    어제 아침에 그런 일이 있고, 저녁에 다시 보게 된 박성범은 평소와 조금도 달라진 점이 없었다. 몸은 괜찮은지 물어보고, 아직 아프니까 주방엔 얼씬도 하지 말라며 혼자서 저녁 식사 준비를 하고, 밥 먹는 동안엔 일상적인 이야기를 꺼내고. 정말이지 손톱만큼도 달라진 게 없었다. 딱히 무리한다거나 애쓴다는 느낌도 들지 않았다. 한없이 자연스러우면서도 편안해 보여서, 나중엔 오죽하면 ‘설마 꿈이었나?’ 싶은 생각이 절로 들 정도였다.

    어쨌거나 덕분에 재경도 늦게나마 갈피를 잡았다. 당사자는 이미 다 잊은 모습인데, 이쪽에서 자꾸만 떠올리고 생각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다.

    “그나저나 뭘 준비하지?”

    밥통을 열어보니 텅 비어 있었다. 쌀이 있긴 하지만 지금 씻어서 안치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주방 안을 둘러보자 반 정도 남은 식빵이 보여서 재경은 빵 봉지를 들고 토스트기 앞으로 다가갔다.

    식빵이 구워지기를 기다리는 동안 프라이팬에 식용유를 둘렀다. 잼만 꺼내놓으면 너무 단출할 것 같아서 계란 프라이라도 해서 내놓을 생각이었다.

    달궈진 팬에 계란이 안착하자마자 맛있는 소리가 났다. 뒤집을 타이밍을 기다리며 빤히 쳐다보고 있는데 뒤에서 슬리퍼 소리와 함께 박성범의 목소리가 들렸다.

    “일찍 일어났네.”

    돌아보자마자 웃음이 나왔다. 다소 헝클어진 머리카락에 몇 가닥은 누가 잡아당긴 것처럼 삐죽이 솟아 있다. 침대에서 막 일어났을 때만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내가 준비하면 되는데.”

    가까이 다가온 녀석이 어깨 너머로 프라이팬을 쳐다봤다. 그러더니 한마디를 덧붙였다.

    “계란 탄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정말로 가장자리가 갈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재경은 서둘러 인덕션 온도를 낮추며 뒤집개로 계란을 뒤집었다.

    “토스트 먹으려고?”

    “어. 괜찮아?”

    “당연히 괜찮지. 마시는 건 뭐 마실래? 커피? 우유?”

    “커피.”

    동그란 캡슐을 꺼내 든 박성범이 토스트기 옆에 있는 커피 머신을 작동시켰다. 그동안 재경은 뒤집개로 계란을 한 번 더 뒤집은 다음, 다 익은 것을 확인하고는 전원을 껐다. 접시를 꺼내서 옮겨 담으려는데 갑자기 등 뒤쪽으로 박성범이 바짝 붙어 서는 느낌이 났다.

    “잠깐만.”

    재경은 그대로 동작 그만 상태가 되었다. 머리 위에서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밀착하듯 닿았던 몸이 금세 떨어졌다. 뒤늦게 고개를 돌리자 녀석의 손에 검은색 머그컵 두 개가 들려 있는 것이 보였다.

    “연하게 마실 거지?”

    “어? 어.”

    재경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다시금 손을 움직였다. 살짝 태워 먹은 계란을 접시에 담고, 냉장고에 든 딸기잼과 버터, 시리얼도 꺼냈다. 마지막으로 갓 추출된 커피를 담은 잔까지 식탁 위에 놓이자 제법 그럴싸한 아침상이 차려졌다.

    “잘 먹을게.”

    박성범은 딸기잼을 바른 식빵을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사실 알람 소리를 들었을 때만 해도 ‘오전 수업을 쨀까.’ 하는 생각을 살짝 했다. 다른 이유는 없고, 단순히 잠이 부족해서였다. 하지만 이내 유혹을 이겨내고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갑자기 태도가 달라지면 재경이 괜한 오해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전처럼 지내자고 제 입으로 말했는데, 이쪽에서 피한다는 느낌을 주는 행동은 하고 싶지 않았다.

    문득 깨달은 사실에 웃음이 나왔다. 그러고 보니 개강한 지 벌써 두 달이 지났는데 1교시 수업을 빠진 게 딱 한 번뿐이다. 이번 학기부터 학점을 관리할 생각이긴 했지만, 설마 이 정도로 충실할 거라고는 본인조차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오늘 학교 갈 거지?”

    “응.”

    “하루 더 쉬는 게 낫지 않겠어? 의사 쌤이 무리하지 말라고 했잖아.”

    “어제 푹 쉬어서 괜찮아. 너무 많이 자서 그런지 이젠 잠도 안 오더라.”

    덤덤한 어조로 하는 말에 박성범은 웃음을 흘렸다.

    “그래서 일찍 일어난 거야?”

    “어.”

    일찍 일어나다 못해 책까지 봤다는 건 비밀에 부치기로 했다. 사실대로 말했다가는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듣게 될 것 같았다.

    딱 좋을 정도로 연한 커피를 마시면서 재경은 속으로 웃음을 흘렸다. 박성범한테서 ‘잔소리를 듣는다’는 생각을 하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그리고 새삼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할 일은 절대 없겠지만, 녀석과 함께 있다 보면 ‘누군가가 나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나를 위해준다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하는 것을 종종 느낄 때가 있었다.

    “커피 더 마실래?”

    타이밍 좋게 묻는 말에 재경은 잠깐 고민하다가 자신의 잔을 내밀었다.

    “……조금만.”

    박성범은 한 손에 하나씩 잔을 들고 커피 머신으로 향했다. 채워진 잔을 재경에게 다시 건네고, 하나는 자신의 입으로 가져갔다. 원두 특유의 향긋한 냄새가 기분 좋은 감각을 일깨웠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재경을 바라보며 물었다.

    “약 아직 남았지?”

    “어.”

    “까먹지 말고 잘 챙겨 먹어. 영양제도 먹고.”

    말이 나온 김에 지금 바로 먹어도 될 것 같아서 박성범은 조금 남은 커피를 단숨에 마시고는 재차 일어섰다. 생수병과 새 컵을 식탁 위에 올려준 다음, 빈 그릇을 차곡차곡 포개서 싱크대로 가져갔다.

    “설거지는 내가 할게.”

    “내가 하면 돼.”

    “아침도 네가 차렸잖아. 얼른 약 먹고, 가서 머리부터 말려.”

    간단하게 먹어서 좋은 점은 그만큼 설거지할 거리도 적다는 거였다. 거의 1, 2분 만에 설거지를 끝내고 박성범은 방으로 들어갔다. 시간을 보니 생각보다 여유가 있어서 좀 전에 대충 껴입었던 티셔츠를 다시 벗고 욕실로 들어갔다.

    쏴아아아-

    샤워기를 틀자마자 물이 쏟아졌다. 적당히 차가울 정도로 수온을 맞춘 다음 거치대에 걸어놓고 머리부터 감았다. 기본 체온 자체가 남들보다 높다 보니 박성범은 한겨울이 아닌 이상 늘 차갑거나 미지근한 물로 샤워를 하곤 했다.

    이내 저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전에 동기들끼리 놀러 갔을 때 재경이 계곡물에 발을 담그자마자 기겁하며 뒷걸음질 치던 기억이 떠오른 까닭이었다.

    더불어 박성범은 새삼스러운 안도감을 느꼈다. 사실 어제는 자신도 조금 힘들긴 했다. 윤정현을 만나고 나올 때까지만 해도 ‘괜한 짓을 한 건 아닌가.’ 하는 후회와 자괴감에 입만 열면 한숨이 쏟아졌었다.

    과연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이재경을 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는데……. 웬걸, 막상 거실로 나온 재경과 눈이 마주치니 너무도 자연스럽게 괜찮냐고 묻는 말이 흘러나왔다. 이후로도 마찬가지였다. 마인드 컨트롤의 힘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번 더 녀석의 이마를 짚어보고, 같이 저녁을 먹을 때도 조금의 어색함 없이 평상시처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재경 또한 마찬가지였다. 미리 선수를 친 덕분인지, 처음엔 살짝 어색해하는 것 같았지만 이내 평소와 다름없는 태도로 자신을 대하는 걸 보고 속으로 얼마나 안도했는지 모른다.

    꼭 자신을 피하지 않아서만은 아니었다. 당시에는 잘 몰랐지만, 녀석의 성격에 친하지도 않은 사람과 함께 살기로 마음먹었을 정도면 그만큼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지금이라 해서 사정이 크게 나아지지도 않았을 텐데……. 까딱 잘못했으면 다른 방식으로 녀석을 내쫓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짓을 할 뻔했다고 생각하면 눈앞이 아찔했다.

    그러다 박성범은 뒤늦게 무언가를 깨달았다. 이래서야…….

    ‘호구가 따로 없네.’

    만일 윤정현 앞에서 이런 말을 했으면, 그걸 이제 알았냐며 웃어댈 모습이 눈에 선했다. 하지만 딱히 마음이 괴롭다거나 보답받지 못할 사랑으로 감정을 낭비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도 이런 생각을 하고, 이런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 조금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샤워를 끝낸 박성범은 수납장에서 새 속옷을 꺼내 입고 곧장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사랑에 대한 고뇌도 물론 좋지만, 지금은 얼른 준비를 끝내고 재경과 함께 수업을 들으러 가는 것이 우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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