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9/22)
  • 9.

    도심 외곽에 위치한 노인 전문 요양 병원은 버스 정류장에서 도보로 5분 정도 걸리는 곳에 있었다. 공원처럼 잘 꾸며진 병원 외부에는 몇몇 노인들이 휠체어에 몸을 의지한 채 보호자와 함께 산책을 즐기고 있었다. 그들을 지나쳐 병원 건물 안으로 들어선 재경은 지하 매점에 잠깐 들렀다가 엘리베이터를 탔다.

    상승 속도가 유달리 더디게 느껴졌다. 3층에서 내린 재경은 익숙한 호실 앞에 멈춰 서서 문을 열었다.

    “어머, 재경 학생 오랜만이네요.”

    의자에 앉아 있던 요양보호사가 재경을 보고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큰이모뻘인 그녀에게 재경도 인사한 뒤에 방금 매점에서 산 음료 세트를 내밀었다.

    “일하시는 분들이랑 같이 드세요.”

    “아유, 이런 거 사 오지 말라니까.”

    요양보호사는 손사래를 치다가 못 이기는 척 받아서 협탁 위에 두었다. 이어서 재경이 궁금해할 법한 말을 해주었다.

    “할아버님 지금 주무시고 계세요. 조금만 일찍 왔으면 좋았을 텐데.”

    고개를 돌리자 침대에 반듯하게 누워 있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재경은 다시금 앞을 바라보며 물었다.

    “가서 봐도 될까요?”

    “물론이죠.”

    걸음을 옮겨 할아버지가 누워 있는 안쪽 침대로 다가갔다. 가까이에서 본 할아버지는 입을 살짝 벌린 채로 약하게 코를 골며 주무시는 중이었다.

    재경은 가방을 벗고 보호자용 의자에 걸터앉았다. 가만히 할아버지의 잠든 얼굴을 바라봤다. 이곳에 올 때마다 늘 그렇듯, 이런저런 생각들이 떠오르며 만감이 교차했다.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부터 재경은 할아버지 손에서 자랐다. 지금 생각해보면 몸도 성치 않은 양반이 그래도 핏줄이랍시고 어디 보내지 않고 손수 키워준 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지만, 어릴 땐 무뚝뚝하고 퉁명스러운 할아버지가 몹시도 무섭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약주라도 거하게 한잔 걸치면 어김없이 며느리를, 그러니까 재경의 모친을 욕하곤 했는데, 어린 마음에는 꼭 자신을 탓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할아버지 몰래 서럽게 운 적도 많았다.

    환경에 변화가 생긴 것은 중3 때였다. 졸업까지 얼마 남지 않은 무렵, 삼촌이 할아버지 몰래 시골 땅을 팔아먹는 짓을 저질렀고, 그 일로 인해 할아버지는 심신에 큰 충격을 받았다. 몸은 느리게나마 회복이 되었지만 정신은 그렇지 못했다. 이웃 아저씨의 도움으로 찾아간 병원에서 할아버지는 중증 치매 진단을 받았고, 삼촌은 역정을 내며 마지못해 노인 전문 병원에 할아버지를 보내기로 했다.

    병원에 입원하는 첫날, 재경은 처음으로 할아버지의 눈물을 보았다. 어딜 가냐고, 나도 데려가라고 붙잡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몹시도 아팠지만 당시의 재경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할아버지를 입원시키는 건 집안 어른들의 결정이었고, 정신이 온전치 않으신 분을 집에 혼자 둘 수도 없었다. 그리고 친척들 중 누구도 할아버지를 모실 만한 형편이 되지 않았기에 열일곱 미성년자에 불과했던 재경은 어른들의 결정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할아버지를 보러 오는 걸음은 쉽지 않았다. 고등학생일 땐 공부하느라 시간이 없어서, 그리고 대학생이 되어서는 먹고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서너 달에 한 번꼴로 겨우 요양 병원을 찾아오곤 했다.

    그리고 최근 들어 할아버지는 상태가 점점 악화되고 있었다. 이제는 자력으로 걷는 것조차 불가능하고, 가족들은 물론이고 재경의 얼굴도 알아보지 못할 때가 가끔 있었다.

    이래저래 무거운 마음으로 할아버지를 바라보다가 괜히 이불을 다시 덮어드리는데 마침 잠에서 깬 할아버지와 눈이 마주쳤다. 두어 번 눈을 깜빡인 할아버지는 다행히 오늘은 손자의 얼굴을 알아보고 반갑게 웃었다.

    “재경이 아니냐.”

    “네, 할아버지. 저 왔어요.”

    “아이고. 우리 재경이 아니냐.”

    몸을 일으키려는 것을 보고 재경은 퍼뜩 할아버지를 부축해드렸다. 듬성듬성 흰 수염이 난 데다 치아가 빠져서 더 홀쭉해 보이는 얼굴을 보고 있으니 새삼 또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런 손자의 마음도 모르고 할아버지는 아이처럼 웃으며 주름이 가득한 손으로 연신 재경의 손등을 쓸었다.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누?”

    “……할아버지 손자니까 알죠.”

    “그래. 잘 왔다, 내 새끼.”

    재경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살짝 시선을 피하며 뒷목을 긁적였다. 함께 살았을 때 할아버지는 물론이고 재경도 집에선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데면데면하게 지낸 기간이 워낙 길었던 터라, 이렇게 아이처럼 웃으며 살갑게 대하는 모습이 지금도 영 어색하기만 했다.

    “바람 쐬러 갈까요?”

    “응?”

    “산책이요. 바깥에 꽃 보러 가실래요?”

    “그래. 나가자.”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보호사의 도움으로 재경은 할아버지를 휠체어에 앉혔고, 곧 손잡이를 밀며 병원 건물 밖으로 나갔다.

    10월이 되니 확실히 계절이 바뀌는지 바람이 차갑게 느껴졌다. 재경은 잠깐 제자리에 멈춰 서서 자신의 점퍼를 벗고는 할아버지의 어깨를 덮어주었다.

    “안 추우세요?”

    “괜찮다.”

    다시금 휠체어 손잡이를 붙잡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작은 꽃이 심어진 화단을 따라 돌다 보니 길쭉한 벤치가 나타났다.

    “잠깐 쉬었다 갈까요?”

    “그래. 니 힘들 텐데 그러자.”

    또록또록한 발음도 그렇고, 힘들 손자를 생각해서 쉬어 가자는 걸 보니 오늘은 그나마 컨디션이 좋으신 듯했다. 재경은 잠깐 휠체어를 세우고 벤치에 앉았다.

    “하늘이 참말로 예쁘네.”

    두 팔을 허벅지에 걸치고 있던 재경은 그 말에 고개를 들고 하늘을 쳐다봤다. 할아버지의 말씀대로 모처럼 청명한 푸른 하늘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상근이는 잘 살고 있나?”

    “……네.”

    “경수랑 경수 애미도 잘 지내고?”

    “네. 잘 지내고 있어요.”

    정신이 조금이나마 온전하면 할아버지는 매번 삼촌네 가족의 안부를 묻곤 했다. 장가를 가서도 정신 못 차리고 돈 좀 꿔달라며 몇 번이고 할아버지를 찾아왔었는데, 그래도 자식이랍시고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그래. 재경이 니도 잘 지내고 있재?”

    이번에는 선뜻 입술이 열리질 않았다. 재경은 그만 한숨을 내쉬며 손바닥으로 마른 얼굴을 쓸었다. 어릴 때부터 겪었던 맘고생, 열심히 살고 있지만 아직은 불확실한 미래, 지금도 틈만 나면 할아버지 약값을 핑계로 돈을 요구하는 삼촌의 얼굴 따위가 머릿속에서 마구 뒤섞이며 지독한 두통이 밀려오는 느낌이었다.

    “그만 들어가요.”

    “조금만 더 있다 가면 안 되나? 하늘도 저리 예쁜데.”

    그래서였을 것이다. 저도 모르게 퉁명한 목소리가 흘러나온 것은.

    “하늘은 병실에서도 볼 수 있잖아요. ……저 추워요.”

    “맞나? 그라믄 얼른 들어가자.”

    어쩐지 머리가 더 아파오는 것 같았다. 눈가를 꾹 누른 뒤에 일어선 재경은 다시금 휠체어를 밀며 천천히 병원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오늘따라 정말 기분이 좋은지 할아버지는 병실로 돌아가서도 이런저런 두서없는 이야기들을 쉼 없이 늘어놓았다. 재경은 간간이 대꾸하며 맞장구를 쳐주었고, 곧 저녁 식사 시간이 되어서 배식 담당 직원이 주는 식판을 건네받았다.

    보호사는 자력으로 숟가락질이 힘든 환자들의 침대를 돌아다니며 식사를 거들어주었다. 이쪽으로 다가오려는 것을 보고 재경이 말했다.

    “할아버지는 제가 챙길게요.”

    “아유, 그럼 고맙죠. 밥은 조금씩만 드려야 돼요.”

    “예. 걱정하지 마세요.”

    당부대로 밥을 조금만 떠서 국물에 적신 다음 할아버지의 입으로 가져갔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아이처럼 입을 벌려 받아먹으면서 맛있다는 말을 연발했다.

    “재경이 니도 밥 먹어야재.”

    “전 좀 있다 먹을게요.”

    “밥 많이 있다. 같이 묵자.”

    “……이거 할아버지 거예요. 얼른 드세요.”

    하지만 계속 너도 먹으라며 권하는 할아버지 때문에 조금은 힘겨운 식사 시간이 이어졌다. 어찌어찌 식사를 끝내고 양치질까지 한 뒤에 할아버지는 다시금 이불을 덮고 침대에 누웠다.

    “재경아.”

    “예.”

    “니가 오니까 참말로 좋다. 다음에도 할아버지 보러 온나.”

    이번에도 재경은 선뜻 말이 나오질 않았다. 할아버지는 그런 손자의 손을 꼭 잡으며 손등을 두드려준 뒤에 눈을 감았다. 잠시 후에 작게 코 고는 소리를 듣고 재경은 아까 할아버지에게 덮어주느라 벗었던 점퍼를 다시 입었다.

    가방을 챙겨 들고 나가려는데 요양 보호사가 조용히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잠깐 얘기 좀 할까요?”

    재경은 곧장 그녀를 따라나섰다. 병실에 다른 환자들도 있어 멀리 나가지는 못하고, 반쯤 닫은 병실 문 앞에서 아주머니를 마주 보고 섰다. 인자하면서도 푸근해 보이는 얼굴에 금세 안타까움이 떠올랐다.

    “요즘 계속 할아버님 상태가 안 좋은 편이에요. 식사도 잘 못 하시고, 밤에 주무시다가도 계속 깨서……. 낮에도 멍하니 계실 때가 많아요.”

    “…….”

    “그래도 오늘은 재경 학생이 와서 그런지 기분이 참 좋아 보이시더라고요. 힘들겠지만, 조금만 더 자주 오면 할아버님이 무척 기뻐할 거예요.”

    재경은 묵묵히 듣고 있다가 느리게 입술을 달싹였다.

    “혹시 삼촌은 언제 다녀가셨는지 아세요?”

    “내가 알기로는 꽤 오래됐는데……. 어쩌면 다른 보호사님이 있을 때 다녀가셨을지도 몰라요.”

    그럴 리가 없다는 사실은 두 사람 모두 잘 알고 있었다. 재경은 거듭 치밀어 오르는 한숨을 눌러 참으며 억지로 웃는 얼굴을 만들어 보였다.

    “앞으로도 잘 좀 부탁드릴게요.”

    “걱정 말고 조심해서 가요.”

    꾸벅 고개를 숙인 뒤에 재경은 병실을 나섰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간 그는 수납과로 직행했다.

    “안녕하세요. 병원비 납부 좀 알아보려고요.”

    그러자 직원은 몇 가지 정보를 요구했다. 키보드에 올린 손가락을 빠르게 움직이더니 재경이 궁금해하는 것을 알려주었다.

    “이번 달 병원비 미납에, 추가 약값도 아직 남아 있으세요.”

    “두 달 치 미납이라고 들었는데…….”

    “이틀 전에 통장으로 납부하신 걸로 되어 있네요.”

    재경은 그런 적이 없으니 아무래도 삼촌이 납부한 모양이었다.

    ‘일단 급한 불은 끈 건가.’

    감사하다는 인사를 남긴 뒤에 재경은 뒤돌아섰다. 아직 이번 달 병원비는 미납 상태라는 게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이내 머릿속에서 떨쳐내고는 출입문을 향해서 걸어갔다.

    지금도 재경은 알바해서 번 돈을 매달 30만 원씩 삼촌 통장으로 부쳐주고 있었다. 그런데 병원비까지 내주면 어느 순간 이조차도 완전히 자신에게 떠맡길 것 같아서 아예 처음부터 발을 들이지 않는 게 좋을 듯했다.

    물론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다른 것도 아니고 할아버지 병원비로 쓰는 돈이니 형편만 된다면 자신이 내도 상관없지만, 현실은 생활비 대출과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으로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는 상황이었다.

    정류장에서 10분 정도 기다리니 버스가 왔다. 뒤쪽 자리에 앉은 재경은 버스 창문에 힘없이 머리를 기댔다. 표정은 딱딱하게 굳은 채였다.

    ‘돈벼락이라도 떨어졌으면 좋겠네.’

    이내 한숨을 푹 내쉬고 말았다. 현실성 없는 희망 회로는 돌리는 성격이 아닌데, 이런 실없는 생각까지 드는 걸 보니 스스로 봐도 한계에 점점 몰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지잉- 지잉-

    상념을 깨뜨리듯 핸드폰이 울렸다. ‘숙모’라는 글자를 보자마자 긴장감이 차올랐다.

    정확히 4시까지 있다가 나왔는데……. 아니면 경수가 가져온 과일 때문에 전화한 건가.

    바쁘게 머리를 굴리는 와중에도 핸드폰은 계속해서 진동했다. 안 받으면 나중에 더 성화를 낼 것을 알기에 재경은 마지못해 통화 버튼을 누르고 전화를 받았다.

    “네, 숙모.”

    - 여보세요? 재경아, 지금 어디니?

    평소와 달리 살갑게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살짝 의아했지만 일단은 내색 없이 대답했다.

    “잠깐 나갔다가 집에 가는 중이에요.”

    할아버지와 관련된 말만 나와도 히스테릭하게 반응하는 숙모를 알기 때문에 일부러 요양 병원에 다녀오는 길이라고 대답하지 않았다. 곧 뜻밖의 질문이 이어졌다.

    - 그래? 저녁은 먹었어?

    “아뇨, 아직이요.”

    - 잘됐네. 그럼 지금 바로 삼촌 집으로 와. 네 삼촌이 친구한테 선물로 받았다고 좋은 고기 세트를 가져왔더라고. 너도 와서 좀 먹고 가.

    순간 재경은 제 귀를 의심했다. 벌써 3년째 주말마다 경수의 공부를 봐주고 있지만, 이제껏 식사는커녕 제대로 된 간식도 대접받은 적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고기 운운하며 집으로 오라는 말을 들으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싶었다.

    - 여보세요? 재경아?

    “……듣고 있어요.”

    - 대답이 없어서 끊긴 줄 알았잖아. 아무튼 지금 바로 숙모 집으로 와. 알았지?

    “저 지금 집에 거의 다 와서요. 그냥 집에서 먹을게요.”

    - 생각나서 일부러 전화까지 했는데 그렇게 말하면 섭섭하지. 네 몫 남겨놓을 테니까 지금 바로 와. 삼촌도 기다리고 계셔. 알았지? 얼른 와.

    그대로 전화가 뚝 끊겼다. 재경은 황당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쳐다보다가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어느덧 사방이 어둑하게 변해 있었다. 재경은 부르르 떨며 몸을 움츠렸다.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바람이 차다 싶더니 으슬으슬 한기가 들었다.

    고기고 뭐고 간에 그냥 집에 가서 편하게 쉬고 싶지만, 숙모가 신신당부하던 것을 떠올리면 가지 않을 수도 없었다. 재경은 도착 예정 시간을 확인한 뒤에 핸드폰 알람을 맞췄다. 아직 30분은 더 가야 하니 그동안이나마 잠깐 눈을 붙일 생각이었다.

    * * *

    벨을 누르자마자 현관문이 벌컥 열리며 경수의 얼굴이 보였다.

    “형!”

    “또 보네.”

    툭툭, 경수의 머리를 가볍게 토닥인 뒤에 재경은 집 안으로 들어갔다. 식탁 앞에 앉아 있던 삼촌과 숙모가 웃는 얼굴로 재경을 반겼다.

    “얼른 와서 앉아라.”

    재경은 경수의 손에 이끌리다시피 해서 식탁 의자에 앉았다. 식탁에는 먹음직스러운 자태를 뽐내는 고기를 비롯해서 각종 밑반찬들이 푸짐하게 차려져 있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공기를 내려놓는 숙모를 바라보며 삼촌이 말했다.

    “고기 남았지?”

    “응. 좀 더 구울까?”

    괜찮다고 말릴 틈도 없이 숙모가 뒤돌아섰다. 이어서 삼촌은 경수에게 소주잔을 가져오라 말했고, 그 잔은 재경에게 건네졌다.

    “한잔 받아.”

    “괜찮아요, 삼촌.”

    “어허, 어른이 주는데 거절하는 거 아니야. 얼른 받아.”

    이 또한 처음 있는 일이기에 어색하기만 했다. 컨디션이 별로라서 마시고 싶지 않았지만, 거절했다간 분위기가 어떻게 될지 뻔해서 재경은 할 수 없이 두 손으로 잡은 소주잔을 앞으로 내밀었다.

    입술에 대고 잔을 기울이자 목구멍이 타는 것처럼 뜨거웠다. 낯선 친절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삼촌은 생전 하지 않던 우스갯소리를 늘어놓으며 이후로도 틈틈이 재경의 잔을 채워주었다.

    확실히 몸이 좋지 않은지 오늘따라 취기가 빨리 도는 기분이었다. 불편한 식사를 겨우 마친 재경은 빈 그릇을 들고 가서 개수대 안에 담았다.

    “설거지는 제가 할게요.”

    “됐어. 숙모가 할 테니까 거실에서 TV라도 보고 있어.”

    “가자, 형.”

    이번에도 경수가 재경의 팔을 이끌었다. 소파에 앉아 있던 삼촌이 그 모습을 보고 입을 열었다.

    “이리 와서 앉아. 경수 너는 이제 들어가서 공부하고.”

    “형이랑 조금만 놀면 안 돼요?”

    삼촌은 금세 굳은 표정으로 경수를 나무랐다.

    “형이 네 친구야? 잔말 말고 얼른 방에 들어가. 아빠가 나오라고 할 때까지 계속 공부하고 있어.”

    “…….”

    “얼른 안 들어가?”

    쓰읍, 하며 상체를 세우는 아빠를 본 경수가 움찔하며 고개를 숙였다. 재경은 속으로 한숨을 삭이며 경수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주었다.

    “아까 형이 내준 숙제 아직 안 했지?”

    “……응.”

    “그거 풀고 있어. 모르는 부분 있으면 좀 이따 형한테 물어보고.”

    그러자 경수는 금세 기대감을 담은 눈동자로 재경을 올려다봤다.

    “형 오늘 자고 갈 거야?”

    “그건 아닌데……. 아무튼 가서 공부하고 있어.”

    경수는 아쉬워하면서도 자신의 방으로 갔다. 뒷모습에서 시선을 거두며 재경은 삼촌과 살짝 간격을 두고 소파에 앉았다. 저도 모르게 배로 손이 올라갔다. 불편하게 밥을 먹어서인지 아니면 억지로 과식을 해서인지 체한 것처럼 속이 더부룩했다.

    내쉬는 숨에서도 열기가 느껴졌다. 이마를 슬쩍 짚어보니 아까보다 더 뜨거워진 것 같았다.

    ‘대체 왜 갑자기 오라고 한 걸까.’

    감도 잡히질 않았다. 친척끼리 사이가 좋으면 삼촌 집에서 밥을 먹는 게 별일 아닐 수도 있지만 재경은 그렇지 않았다. 솔직하게 말하면 이상하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잠시 후에 숙모도 거실로 나왔다.

    “경수는?”

    “방에 들어갔어.”

    이윽고 숙모도 빈자리에 앉았다. TV 소리가 사라지자 정적이 찾아왔다.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은 삼촌이 평소답지 않게 차분한 어조로 운을 뗐다.

    “사실 삼촌이 재경이 너한테 부탁할 게 있어서 불렀어.”

    뭔지는 몰라도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기에 딱히 놀랍지도 않았다. 다만 그 부탁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문제였다.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니 삼촌의 말이 이어졌다.

    “다른 게 아니고, 네 이름으로 대출을 좀 받았으면 해서 말이야.”

    그 말에 재경은 고개를 들고 삼촌을 쳐다봤다.

    “……대출이요?”

    “삼촌이 지금 하고 있는 사업이 있어서 여윳돈을 거기에 다 밀어 넣었어. 다음 달 초에 수익금이 들어오는데, 그때까지 자금 융통이 좀 여의치가 않아서……. 이번 한 번만 재경이 네가 힘을 보태줬으면 해. 원금은 물론이고 이자도 삼촌이 내줄 거야.”

    숙모가 바짝 붙어 앉으며 추임새를 넣듯이 끼어들었다.

    “이것 좀 봐봐, 재경아.”

    메모지 한 장이 재경의 앞으로 내밀어졌다. 딱 봐도 대부업체로 보이는 상호명과 전화번호가 줄줄이 적혀 있었다.

    “너 귀찮을까 봐 숙모가 먼저 좀 알아봤는데, 전부 대학생도 신용 대출이 가능한 업체들이야. 이자도 은행권이랑 비교해서 별로 안 세고. 한번 봐봐.”

    누군가 뒤통수를 거하게 후려친 것처럼 머릿속이 얼얼했다. 복잡한 감정이 차올랐지만, 재경은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며 대답했다.

    “저 지금 학자금이랑 생활비 대출받은 게 천만 원이 넘어요. 그것만 해도 갚을 길이 막막한데, 이 이상 빚을 늘릴 수는 없어요. 갚을 능력도, 형편도 안 되고요.”

    “삼촌이 갚아준다니까. 다음 달에 돈이 나오는데 그동안 자금 융통이 어려워서 그래. ……내가 부끄러워서 이 말은 안 하려고 했는데, 지금 네 할아버지 병원비도 밀려서 까딱하면 강제 퇴원할 지경이야.”

    감정에 호소하는 말이 이어졌지만 오히려 역효과였다. 병원비가 미납된 건 진작 알고 있었고, 그나마 급한 불을 껐다는 사실은 바로 오늘 확인했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는 쏙 빼놓고, 무슨 어린애 사탕 빼앗는 것처럼 살살 구슬리려는 태도를 눈앞에서 보니 머리 위에서 찬물이 들이부어진 것처럼 마음 한구석이 착잡했다.

    그런 생각을 알 리 없는 삼촌은 좀 더 극단적이고 자극적인 말을 빠르게 늘어놓았다. 침착함은 점점 사라지고, 흥분이 조금씩 섞이기 시작한 어조였다.

    “다른 건 몰라도 네 할아버지 병원비는 내야 되지 않겠어? 그동안 너 키워준 은혜 갚는 셈 치고 이번 한 번만 삼촌 말대로 해.”

    이번에도 어김없이 숙모의 지원사격이 더해졌다.

    “지금이니까 하는 말인데, 너 고등학생일 때 숙모가 뒷바라지하느라 진짜 신경 많이 썼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지만 그래도 조카라는 생각에 내색 없이 서포트해준 거야. ……사실 우리 형편에 사립대 진학이 가당키나 했니? 그래도 네가 가고 싶다니까 숙모랑 삼촌이 밀어줬잖아.”

    순간 재경은 헛웃음을 흘릴 뻔했다. 아침밥은 고사하고 등하굣길에 얼굴 한 번 비친 적이 없고, 밤늦게 야자를 마치고 고양이 걸음으로 집에 들어오다가 거실에서 숙모와 마주치기라도 하면 있는 대로 짜증을 내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선했다.

    그런데 뒷바라지를 해줬다고? 서포트를 해줬다고?

    “경수 얼굴 봐서라도 이번 한 번만 삼촌 말대로…….”

    “집으로 모시고 오면 되잖아요.”

    “뭐?”

    말이 끊긴 숙모가 인상을 찡그리며 되물었다. 그에 대고 재경은 덤덤한 어조로 할 말을 이어갔다.

    “병원비도 못 낼 정도라면 집으로 모시고 오라고요. 일 안 하고 집에 계시니까 돌볼 수 있으시잖아요.”

    큰소리는 삼촌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너 이 새끼, 지금 그게 숙모한테 할 말이야?”

    “틀린 말 아니잖아요.”

    여기서 멈춰야만 했다. 어떤 욕을 들어먹더라도 ‘대출은 절대 안 된다’고 이성적으로 대답해야만 했다.

    머리로는 그 사실을 아는데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그간 누르고 또 눌렀던 서러운 마음이 화산처럼 터져 나왔다.

    “할아버지 그렇게 쓰러지신 것도, 따지고 보면 삼촌이 할아버지 땅을 몰래 팔아서 그런…….”

    “이, 이놈의 새끼가!”

    짜악-

    큰 소리와 함께 고개가 돌아갔다. 이어서 또 한 번 뺨에서 불이 나며, 바로 옆에서 굉음이 터진 것처럼 순간적으로 귀가 멍했다.

    “야 이 새끼야, 뚫린 입이면 단 줄 알아? 고아 새끼 불쌍해서 거둬줬더니 뭐가 어쩌고 저째? 네가 뭘 안다고 삼촌 눈 똑바로 쳐다보면서 그따위 말을 지껄여, 지껄이길!”

    흐릿한 시야에 부들거리는 삼촌의 주먹이 보였다. ……한 대 더 후려치면 볼 만하겠네. 맞아서 머리가 어떻게 되기라도 했는지 조소가 흘러나왔다. 이왕 이렇게 돼버린 김에 한마디 더 하고 싶었지만, 삼촌이 재경의 뒷덜미를 우악스럽게 움켜쥐고는 현관문으로 질질 끌고 가서 패대기를 쳤다. 머리 위에서 고성이 터져 나왔다.

    “당장 나가! 앞으로 내 눈에 한 번만 더 띄면 죽여버릴 줄 알아!”

    쾅,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재경은 숨을 몰아쉬다가 뒤늦게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대문을 나서자마자 스르륵 주저앉았다. 일어설 기운도 없어서 그대로 벽에 등을 기대며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문득 들리는 발소리에 재경은 고개를 들었다. 마침 앞을 지나가던 아주머니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걸음을 빨리했다. 재경은 그제야 무릎을 짚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버스 정류장에 도착해서야 삼촌 집에 가방을 놔두고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다시 돌아갈 엄두가 나질 않았다. 가봤자 문을 열어줄 리도 없고, 아직도 화가 잔뜩 나 있을 삼촌한테서 한 대 더 얻어맞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그나마 핸드폰이 점퍼 주머니에 들어 있어서 케이스 뒷면에 넣어둔 비상금으로 버스를 탔다. 빈자리를 발견하고 반색하며 앉은 것도 잠시, 이내 한숨을 푹 내쉬며 눈을 감고 말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차창에 빗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버스에서 내린 재경은 재빨리 정류장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굵은 장대비가 계속해서 주룩주룩 쏟아졌다. 그냥 봐도 몇 분 만에 그칠 만한 비가 아니었다.

    가까우면 그냥 뛰어가겠는데, 하필 오늘따라 버스 노선 때문에 집에서 멀리 떨어진 정류장에서 하차했다. 이 비를 맞으면서 집까지 걸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한숨이 차올랐다.

    발에 못이 박힌 사람처럼 서 있다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메시지 버튼을 누르자 방금 머릿속으로 생각한 사람의 이름이 곧바로 눈에 들어왔다.

    투욱-

    그런데 그 때, 천장에서 떨어진 굵직한 물방울이 하필이면 녀석의 이름 위에 떨어졌다. 재경은 옷소매로 물방울을 닦아낸 뒤에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뭐해?]

    잠깐 망설이다가 전송 버튼을 눌렀다. 심장이 두근두근했다. 보통은 박성범이 먼저 전화를 걸거나 문자를 하기 때문에 자신이 먼저 연락한 적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쏴아아아-

    또 한차례 거센 비가 쏟아져 내렸다. 차들이 지나갈 때마다 굉음을 닮은 소리를 내며 바퀴 아래의 빗물이 크게 튀었다.

    재경의 시선은 손에 쥔 핸드폰에 고정되었다. 평소 박성범은 문자 확인을 빨리하는 편이었다. 핸드폰을 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곧바로 답장을 보낼 법한 녀석이라서 일부러 전화 대신 문자를 보냈다. 전화상으로는 차마 데리러 와달라는 말을 꺼내지 못할 것 같았다.

    하지만 핸드폰은 잠잠했다. 혹시나 해서 액정을 켜봤지만 상태 표시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재경은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아직도 답장이 없는 걸 보니 확인하지 못한 게 분명했다.

    다시금 핸드폰을 켠 재경은 방금 보낸 메시지를 삭제했다. 행여 흘리거나 비에 젖을세라 바지 주머니 안쪽에 깊숙이 넣은 뒤에 두 팔로 비를 막으며 집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 * *

    틈틈이 모니터 시계를 확인하던 박성범은 8시가 된 것을 보고 게임을 종료했다. 아까 오랜만에 같은 작곡팀 누나한테서 안부 차 연락이 왔는데, 오늘 밤에 녹음실이 빈다는 말을 들어서 모처럼 곡 작업을 하러 가볼 생각이었다.

    옷장 앞에 선 그는 입고 있던 반팔 티셔츠를 훌렁 벗었다. 옷걸이에 가지런히 걸려 있는 옷 중에서 검은색 후드 티로 갈아입고 밑에는 진한 색 청바지를 매치해 입었다.

    차 키는 금세 발견했지만 핸드폰이 보이질 않았다. 밖에 놔뒀나? 거실로 나와 보니 예상대로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게 보였다. 살짝 허리를 숙이며 집어 드는데 현관문에서 삑삑삑삑 하는 전자음이 울렸다. 곧 문이 열리며 재경이 들어왔다.

    “왔어?”

    다가가며 반갑게 인사한 것도 잠시, 이내 박성범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떠올랐다. 어디서 물벼락이라도 맞고 온 사람처럼 재경의 머리카락이며 옷이 흠뻑 젖은 것이 보였다.

    “설마 비 맞고 온 거야?”

    “……우산이 없어서.”

    “그럼 나한테 전화를 하지 그랬어. 잠깐만 있어 봐.”

    박성범은 서둘러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런데 수건을 들고나와서 보니 그새 재경이 사라지고 없었다. 현관에 덩그러니 남겨져 있는, 흠뻑 젖은 스니커즈를 바라보다가 작은 방으로 다가가서 닫힌 문에 대고 노크했다.

    “안에 있어?”

    “어.”

    “수건 가져왔어.”

    “문 앞에 놔두면 이따 쓸게.”

    내심 문이 열리기를 기대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박성범은 수건을 펼쳐서 문고리에 건 다음 말을 이었다.

    “나 좀 나갔다 올게. 새벽이나 아침에 들어올 거 같아.”

    “……알았어. 조심해서 다녀와.”

    잠깐 기다렸지만 끝끝내 방 문은 열리지 않았다. 편하게 푹 쉬라는 인사를 남긴 뒤에 박성범은 현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아무도 없을 거라던 이미정의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녹음실 문을 열자 불이 환하게 켜져 있는 가운데, 의자에 앉아 있는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문소리에 뒤를 돌아본 최정열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갑자기 어쩐 일이야?”

    “오랜만에 작업이나 하려고요. 시간 빈다고 들었는데…….”

    “다 했어. 보내기만 하면 돼.”

    생략된 뒷말을 눈치채고 대답한 뒤에 최정열은 다시금 앞을 바라보며 바쁘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박성범은 뒤쪽에 마련된 소파에 앉았다. 운전하고 오는 동안 간헐적으로 울려대던 핸드폰을 확인하는데 갑자기 김성욱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받자마자 쩔쩔매는 목소리가 들렸다.

    - 야, 제발 한 번만 살려주라.

    “안 한다고 했잖아.”

    방금 확인한 문자에는 김성욱이 보낸 것도 있었다. 체육대회 축구팀의 땜빵이 필요하니 도와달라는 내용이었는데, 미안하지만 안 된다는 답장을 보냈다. 박성범도 축구를 좋아하긴 하지만 이래저래 시간이 빠듯해서 연습에 참여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그리고 짐작건대 연습이 끝나면 ‘수고했다’는 핑계로 매일같이 한잔하러 갈 것이 뻔했다.

    - 왜. 너 축구 좋아하잖아.

    “바빠서 안 돼. 파릇파릇한 후배들한테 부탁해봐.”

    - 남는 게 시간인 거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데 이럴 거임? 지금 4강까지 진출해서, 잘만 하면 우승도 노려볼 만해. 내년 생일 선물 미리 주는 셈 치고 한 번만 도와주라.

    “안 한다니까. 진짜 시간 없어.”

    - 야 씨, 내가 존나 생일까지 들먹이면서 부탁하는데도 계속 깔 거야? ……알았어. 그럼 당일에만 뛰어줘. 이것도 거절하면 넌 내 친구도 아냐.

    “초딩이야?”

    - 시합 뛰어주면 초딩 해도 돼.

    이렇게까지 하는 걸 보니 승낙할 때까지 거머리처럼 쫓아다닐 모습이 눈에 선했다. 어쩌다 이런 자식하고 친해져서는. 박성범은 들으라는 듯 한숨을 한 차례 푹 내쉬고는 뒤늦게 대답했다.

    “알았다, 이 초딩아.”

    - 자식, 진작 그럴 것이지.

    “취소해?”

    - 잘못했습니다.

    금세 꼬리를 내린 김성욱이 “아.” 하며 뭔가가 생각났다는 듯 말을 이었다.

    - 혹시 옆에 재경이 있어?

    “아니. 나 지금 밖이야.”

    박성범은 이내 김성욱에게 되물었다.

    “재경이는 왜 찾는데?”

    - 뭐 좀 물어볼 게 있는데 계속 전화를 안 받아.

    “언제 했는데.”

    - 10분 전쯤?

    비를 맞은 채로 귀가한 재경의 모습이 떠올랐다. 10분 전에 전화를 했다면 집에 있는데도 받지 못했을 가능성이 컸다.

    “나 나올 때 잠깐 마주치긴 했어. 급한 일 아니면 문자 남겨놔.”

    - 진작 남겼지. 암튼 단톡방 초대할 테니까 바로 들어와.

    “알았어. 끊어.”

    전화를 끊은 박성범은 못다 확인한 메시지며 알림창을 마저 확인했다. 그대로 액정을 끄려다가 생각을 바꿔 전화번호부를 누르고 재경의 이름을 찾아서 통화 버튼을 눌렀다.

    Trrrr- Trrrr-

    꽤 오래 신호음이 울려도 재경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끊었다가 잠시 후에 다시 해봐도 마찬가지였다. 박성범은 종료 버튼을 누른 뒤에 메시지 창을 열었다.

    “……!”

    그런데 뜻밖에도 ‘삭제된 대화입니다.’라는 문장이 보였다. 메시지 옆에 뜬 시간은 오후 7시 55분. 틈틈이 시간을 확인하면서 컴퓨터 게임을 즐기던 때였다. 이내 초조함을 닮은 감정이 차올랐다.

    ‘뭐라고 보냈길래 삭제한 거지?’

    실수로 잘못 보낸 걸 확인하고 지웠을 수도 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재경이 그런 실수를 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박성범은 한 번 더 다급하게 통화 버튼을 눌렀지만 여전히 녀석의 목소리는 들을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끊고 서둘러 문자를 보냈다.

    [난데 문자확인하면 전화좀 줘]

    [추우면 보일러켜고 내방에서 자

    두꺼운 이불은 옷장 오른쪽칸에 있어]

    워낙 급하게 보내다 보니 평소에 즐겨 쓰는 이모티콘도 붙이질 못했다. 뒤늦게 후회 아닌 후회가 밀려왔다.

    ‘얼굴 보면서 말해주고 올걸.’

    자신과 달리 재경은 추위를 꽤 많이 타는 듯했다. 가뜩이나 날씨도 쌀쌀해졌는데 비까지 맞고 온 녀석을 그냥 두고 나왔다고 생각하니 뒤늦게 마음이 편치가 않았다. 더불어 살짝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데리러 오라는 전화 한 통만 했어도 바로 나갔을 텐데.

    “왜 그렇게 멍때리고 있어?”

    고개를 들어 보니 최정열이 팔짱을 낀 채로 앞에 서 있었다. 딴생각을 하느라 다가오는 줄도 몰랐다.

    “다 하셨어요?”

    “아까 다 했지. 오늘 밤샐 각?”

    그럴 생각으로 나왔는데 아무래도 일찍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았다. 핸드폰을 확인해보니 아직 재경에게서 온 답장이 없었다.

    “상황 봐서요. 비 많이 오니까 조심해서 가세요.”

    “아직 간다는 말도 안 했는데 인사부터 해? 오랜만에 봤는데 반갑지도 않아?”

    “다 했다니까 가실 줄 알았죠.”

    “매정하기는.”

    최정열은 곧 의자를 끌고 와서 앉았다. 테이블에 있던 생수병으로 목을 적신 뒤에 다시금 박성범과 시선을 마주했다. 얼굴엔 숨길 수 없는 미소가 가득했다.

    “태규 이번에 음원 차트 휩쓴 거 알고 있어?”

    “알죠.”

    고만고만한 인지도를 지닌 남자 솔로 가수로, 박성범과는 이번에 처음으로 작업을 같이했다. 그런데 그 곡이 예상보다 훨씬 큰 사랑을 받으면서 데뷔 이래 처음으로 음원 차트 1위를 찍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김 팀장이 고맙다고 세 번이나 연락했어. 본인한테서도 전화 왔고. 다음에도 너랑 하고 싶다고 애걸복걸해서, 좋은 곡 나오면 연락 준다고 했어.”

    소속사 사람들이야 그렇다 쳐도 가수 본인이 직접 연락을 할 정도면 어지간히 기쁜 모양이었다. 이어서 최정열은 떠보는 듯한 질문을 넌지시 꺼냈다.

    “작업해둔 거 없어?”

    “없어요.”

    “그러지 말고 좀 풀어봐.”

    곰살맞게 웃는 얼굴을 보면서 박성범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진짜 없어요. 그동안 안 온 거 아시잖아요.”

    “알지. 그래도 집에서 뭐라도 했을 거 아냐?”

    한번 꽂히면 2, 3일은 거뜬히 밤을 지새울 정도로 박성범은 음악 작업을 좋아했다. 꽤 오랫동안 작업실을 찾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손 놓고 있었을 녀석이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박성범의 대답은 예상을 빗나갔다.

    “진짜 없어요.”

    “……진짜 없어?”

    “네.”

    “진짜 하나도?”

    “네. 말씀드렸잖아요. 당분간은 학교생활에 충실할 거라고.”

    장난기가 비치는 얼굴이긴 해도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최정열은 곧 납득하곤 박성범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작업 시작하면 형한테 꼭 알려줘. 그럼 먼저 간다.”

    “같이 가요, 형.”

    자리에서 일어나는 최정열을 따라서 박성범도 몸을 일으켰다. 문으로 향하면서 최정열은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담배 피우러 가려고?”

    “아뇨. 집에 가려고요.”

    그 말에 최정열은 금세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집에 간다고?”

    “네.”

    “뭐 놔두고 온 거라도 있어?”

    “아뇨. 좀 신경 쓰이는 일이 있어서요.”

    박성범은 형광등 스위치를 끈 뒤에 문을 닫았다. 자동으로 잠기는 소리를 뒤로한 채 엘리베이터 쪽으로 가서 버튼을 눌렀다.

    “무슨 일인데 그래?”

    박성범은 잠깐 고민하다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같이 사는 친구랑 연락이 안 돼요.”

    “그래? 계속 안 되는 거야?”

    “아뇨, 그건 아니고……. 나올 때 잠깐 보긴 했는데, 비를 맞고 왔더라고요. 근데 계속 전화를 안 받으니까 걱정이 돼서요.”

    “자는 거 아냐? 종일 연락이 안 된 것도 아니고, 나오는 길에 봤다면서.”

    “네. 그래도 왠지 가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1층에 멈춰 선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예의상 “집까지 태워줄까요?” 하고 물은 말에 최정열은 됐으니 얼른 가보라고 대답한 다음 엘리베이터에서 먼저 내렸고, 홀로 남은 박성범은 서둘러 닫힘 버튼을 눌렀다.

    현관문을 열자 환한 거실이 집주인을 반겼다. 둘 중 누구라도 귀가가 늦으면 거실에 불을 켜놓는 것이 암묵적인 규칙이었다. 신발을 벗은 박성범은 곧장 재경의 방으로 다가가서 조심스럽게 노크했다.

    “나야. 안에 있어?”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박성범은 잠깐 망설이다가 문손잡이를 돌렸다. 현관에 운동화가 있던 걸로 봐서 밖에 나가지 않은 것은 확실했고, 만일 잔다면 잘 자고 있는지만 확인할 생각이었다.

    문이 열림과 동시에 거실의 불빛이 방을 침범했다. 덕분에 침대가 불룩하게 솟아 있는 것을 어렵지 않게 목격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깊이 잠들었나 보네.’

    별일 없는 걸 확인했으니 조용히 문을 닫아주려는데, 그 순간 희미한 신음소리가 귀에 들렸다. 박성범은 멈칫하며 다시금 방문을 열었다.

    “이재경?”

    “흐… 흐으….”

    대답 대신 거듭 앓는 소리가 들렸다. 형광등 스위치를 켜고 가까이 다가간 박성범은 재경이 목 끝까지 덮고 있는 얇은 이불을 조심스럽게 걷었다.

    “어디 아픈…… 이재경?”

    시야에 드러난 얼굴이 한눈에도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왼쪽 뺨이 벌겋게 부어오른 데다 이마에는 식은땀이 가득했다. 서둘러 손을 뻗어 이마를 짚어보자 몹시도 뜨거웠다. 박성범은 곧 침대에 걸터앉으며 재경을 깨웠다.

    “좀 일어나 봐.”

    하지만 재경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뜻밖의 상황에 안절부절못하던 박성범은 우선 열부터 내려야겠다는 생각에 다급히 거실로 나갔다. 구급약 상자를 뒤져보니 다행히 해열제가 있었다.

    “잠깐만 일어나 봐. 응?”

    다시금 침대에 걸터앉으며 재경의 상체를 안아 일으켰다. 여전히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며 거듭해서 재경의 이름을 불렀다. 그래도 일어나지 않으면 어떻게 해서든 약부터 먹일 생각이었는데, 다행히 힘겹게나마 눈을 뜨는 게 보였다.

    “해열제 가져왔으니까 먹어. 너 지금 열 장난 아니야.”

    “……줘.”

    박성범은 서둘러 재경의 손바닥 위에 알약을 올려주었다. 이어서 생수병 뚜껑을 돌리다가 컵을 가져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는 혀를 찼다. 평소에 물을 마실 때 입을 대지 않고 병째로 마시는 버릇이 있다 보니 챙겨야 한다는 생각 자체를 못 했다.

    “컵 갖다 줄까?”

    “괜찮아.”

    재경은 알약을 입에 털어 넣은 다음 생수병을 기울였다. 혀 위에서 뱅글뱅글 도는 약을 간신히 삼킨 뒤에 기절하듯 눈을 감았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차가운 물을 마신 탓인지 치아가 따닥따닥 부딪칠 정도로 오한이 들었다.

    “……추워.”

    박성범은 용케도 재경의 말을 알아듣고 다시금 반듯하게 눕혀주었다. 그러곤 자신의 방으로 가서 두꺼운 이불을 찾는데 뒤늦게 어떤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열이 심한데 이불을 덮어줘도 되나?’

    핸드폰으로 검색해 보니 최대한 몸을 시원하게 해서 체온부터 낮춰야 한다는 내용이 보였다. 그래서 이불은 포기하고, 곧장 주방으로 가서 냉동실 문을 열었다.

    급하게 만든 얼음주머니와 수건 등을 챙겨들고 방으로 돌아갔다. 서둘러 재경의 이마에 얼음주머니를 올렸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재경이 몸을 잔뜩 웅크리면서 또다시 덜덜 떨었다.

    “……추워.”

    눈도 뜨지 못하고 괴로워하는데 박성범이라고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이불을 덮어줬다간 더 위험해질 수도 있었기에, 그새 식은땀이 또 흥건하게 고인 재경의 이마를 쓸어주면서 최대한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열 내려야 되니까 조금만 참자. 아니면 구급차 부를까? 많이 안 좋은 거 같은데.”

    “싫어.”

    재경은 느리게나마 고개까지 내저으며 거부했다. 이 와중에도 ‘병원에 가면 돈이 든다’는 생각 따위를 하는 자신이 우스웠지만, 현실은 계속해서 드는 오한 때문에 온몸이 덜덜 떨렸다.

    결국 얼음주머니는 포기하고, 박성범은 물에 적신 수건을 비틀어 짰다. 대충 접은 다음 재경의 팔을 붙잡았다.

    “몸 좀 닦아줄게.”

    수건이 닿자마자 재경이 흠칫 놀라는 게 느껴졌다. 싫다고, 하지 말라고, 그냥 내버려 두라는 말이 거듭 이어졌지만 이번만큼은 박성범도 양보할 수가 없었다. 살짝 붙잡은 팔도 뜨겁기는 마찬가지였다. 계속 열이 내리지 않으면 병원에 데려가야 할 것 같았다.

    * * *

    지잉- 지잉-

    잠결에 어디선가 거슬리는 소리가 들렸다. 깨달은 순간 박성범은 번쩍 눈을 떴다.

    주변을 살피자 밤새도록 봤던 병실 내부가 눈에 들어왔다. 협탁 위에서 부르르 진동하는 핸드폰을 발견하고는 서둘러 집어 들었다.

    [왜안옴?]

    [출석부른다]

    [헐 방금이재경불렀는데대답을안해!!!]

    [ㅇ ㅘㅣ]

    [와이게무슨일이아]

    김성욱이었다. 메시지를 확인하자마자 새로운 대화가 떠올랐다.

    [둘이나란히늦잠?]

    뻑뻑한 눈가를 손끝으로 꾹 누른 뒤에 박성범은 답장을 보냈다.

    [지금 병원이야]

    [헐 병원? 왜?]

    [재경이가 열이 많이 나서]

    [ㄷㄷㄷ ㄱㅊ?]

    다시금 손가락을 움직이는데 문득 작은 소리가 들리는 듯해서 고개를 들었다. 이내 놀란 기색이 떠올랐다. 착각이 아니었다. 재경이 눈을 뜬 것을 보고는 곧장 말을 걸었다.

    “정신이 들어?”

    재경은 느리게 몸을 일으켰다. 박성범이 얼른 일어나서 등 뒤에 베개를 받쳐주었다.

    딱 봐도 눈에 들어오는 풍경이 평소와 달랐다. 재경은 곧 옆을 바라보며 박성범에게 물었다.

    “병원이야?”

    “어. 열이 계속 많이 나서 야간 진료하는 병원으로 데려왔어.”

    기억을 떠올려보려 해도 생각나는 게 전혀 없었다. “잠깐만.” 하는 말과 함께 커다란 손이 재경의 이마에 닿았다. 다시 마주한 얼굴에는 안도감이 가득했다.

    “열은 거의 다 내린 거 같긴 한데……. 의사 쌤 부를게.”

    벽면에 설치된 너스콜을 누르자 잠시 후에 병실 문이 열렸다. 간호사가 체온부터 먼저 쟀고, 체온계에 뜬 숫자를 확인한 뒤에 의사가 말했다.

    “미열이 있긴 해도 이 정도면 괜찮습니다. 어디 불편하거나 아픈 데는 없습니까?”

    “네.”

    “목감기 증상이 있는 것 같은데, 약을 처방해 줄 테니까 잘 챙겨 드세요. 당분간은 무리하지 말고 충분한 휴식을 취하는 게 좋습니다.”

    옆에 서 있던 간호사가 배턴을 이어받듯이 말했다.

    “퇴원은 오전 중으로 하면 되세요.”

    “네. 감사합니다.”

    환자보다 더 집중해서 의사의 말을 경청하던 박성범이 이내 재경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냥 하루 더 있다 갈까? 아직 완전히 나은 것도 아닌데.”

    자못 심각해 보이는 표정에 재경은 픽 웃음을 흘렸다.

    “오전에 퇴원하라는 말 못 들었어?”

    “그래도 하루 더 있겠다고 하면…….”

    “나이롱환자라고 욕할걸. 얼른 집에 가서 편하게 쉬고 싶어.”

    “……알았어. 나 잠깐 전화 한 통만 하고 올게.”

    밖으로 나온 박성범은 핸드폰 화면을 다시 켰다. 그새 또 몇 개의 대화가 쌓여 있었다.

    [갠찬냐고임마]

    [왜말이업서]

    [아씨 교수가이쪽보는거같ㄴ다]

    [문자보면답장ㄱ]

    요청대로 박성범은 답장을 보냈다.

    [재경이 방금 일어났어]

    [곧 퇴원함]

    제 역할을 다한 핸드폰을 바지 뒷주머니에 밀어 넣으며 박성범은 병실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원무과에서 병원비를 납부하고, 진료확인증까지 잊지 않고 챙긴 뒤에 병실로 돌아갔다.

    문을 열자 재경이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게 보였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안 그래도 갸름한 얼굴이 하룻밤 사이에 더 수척해진 것 같았다.

    그와 달리 왼쪽 뺨에는 여전히 붓기가 남아 있었다. 박성범은 입술을 달싹였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생각에 가볍게 웃으면서 말을 돌렸다.

    “그럼 갈까?”

    “어. ……근데 한 가지 문제가 있어.”

    “뭔데?”

    “……신발이 없어.”

    “아.”

    축 늘어진 재경을 둘러업고 허겁지겁 집을 나서는데 신발까지 챙길 만한 정신이 있을 리가 없었다. 덕분에 박성범도 때아닌 고민에 잠겼다.

    호텔 같은 일회용 슬리퍼가 병원에 있을 리 만무하고, 근처에 신발 가게가 있을지도 의문이고…….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박성범은 곧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재경에게 다가갔다. 그러곤 등을 보이며 자세를 살짝 낮췄다.

    “업혀.”

    “뭐?”

    “업히라고. 맨발로 갈 수는 없잖아.”

    그의 말마따나 재경은 양말도 신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차마 선뜻 업힐 수가 없어서 머뭇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병실 문이 벌컥 열렸다.

    “엄마야!”

    간호사가 새된 소리를 질렀다. 이내 민망한 듯 웃으며 하는 말이 들렸다.

    “아직 퇴원 안 하셨네요.”

    “이제 나가려고요.”

    빙긋이 웃으며 대답한 뒤에 박성범은 흘끗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얼른 업혀. 어차피 처음도 아니잖아.”

    재경은 한 발 늦게 이해하고 얼굴을 붉혔다.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그러고 보니 이미 한 차례 녀석에게 업힌 전적이 있었다.

    “안 떨어뜨리고 집까지 안전하게 모실게.”

    “…….”

    “얼른.”

    웃음 섞인 목소리로 하는 가벼운 재촉이 이어졌다. 재경은 여전히 이 상황이 난감했지만 다른 뾰족한 수가 없었다. 너른 등판을 잠깐 바라보다가 할 수 없이 주춤주춤 팔을 뻗어서 박성범의 어깨를 붙잡았다.

    재경을 업고 몸을 일으키자마자 간호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직 몸이 많이 안 좋으신가 봐요.”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하려 했지만 박성범이 한발 더 빨랐다.

    “네. 살짝 어지럽다고 해서 업고 가려고요.”

    “조심해서 가세요. 몸조리 잘하시고요.”

    “감사합니다.”

    이번에도 박성범이 대답한 뒤에 간호사를 지나치며 병실 밖으로 나갔다. 재경은 누가 시킨 것처럼 박성범의 등에 대고 얼굴을 숨겼다. 보지 않아도 이쪽을 향하는 사람들의 시선이 따갑게 느껴졌다.

    “꽉 잡아. 떨어질라.”

    “……안 떨어뜨린다면서.”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맞닿은 몸으로 진동이 전해졌다. 남의 속도 모르고 웃기나 하고. 여전히 시야는 자체적으로 차단한 채 재경은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다 문득 생각난 사실에 입을 열었다.

    “병원비는?”

    “아까 냈어.”

    “……미안. 집에 가서 줄게.”

    ‘됐다’는 말이 차올랐지만 박성범은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사이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해서 버튼을 눌렀다. 지하층에서 내린 박성범은 차를 세워둔 곳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앞바퀴가 경계선에 걸려 있는 걸 보니 ‘어제 어지간히 급하긴 급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주차장 출구를 벗어나자 쨍한 햇빛이 쏟아졌다. 새벽까지 비가 쏟아졌다는 게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로 화창한 날씨였다.

    차 안은 조용했다. 본래 박성범은 운전대를 잡을 때마다 습관처럼 음악을 틀지만 오늘은 재경을 생각해서 자제했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처음에 함께 차를 탔을 때 재경이 뒷좌석에 앉는 것을 보고 속으로 적잖이 당황했었다. 딴에는 내색 안 하려고 노력하는 듯했지만, 어색해하는 분위기가 팍팍 풍겼다. 오죽했으면 자신도 눈치 아닌 눈치를 보며 룸미러로 재경의 표정을 살폈을 정도였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장족의 발전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렇게 조금씩 익숙해져간다고 생각하니 은근히 기분이 좋았다.

    빨간색으로 바뀌는 신호를 보고 브레이크를 밟았다. 조용하지만 무겁지 않은 침묵을 깨트리며 박성범은 어제부터 묻고 싶던 질문을 입에 담았다. 사안이 사안인 만큼 다소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얼굴은 왜 그런 거야?”

    “……멍때리고 걷다가 부딪쳤어.”

    재경은 차창 밖으로 조금 더 시선을 돌렸다. 왼쪽 뺨으로 올라가려는 손을 간신히 참았다. 제가 한 말이지만 스스로 생각해도 신빙성이 없었고, 역시나 박성범은 속지 않았다. 조금 더 구체적인 질문이 이어졌다.

    “누가 그랬어?”

    “……그럴 일이 좀 있었어. 잘 해결됐으니까 신경 쓰지 마. 지금은 별로 아프지도 않고.”

    이 또한 거짓말이었다. 다행히 피는 멎었지만, 볼 안쪽 살은 깨문 것처럼 너덜너덜했다.

    “말해줄 생각은 없어?”

    기분 탓인지 목소리가 한층 낮아진 것처럼 들렸다. 주변을 둘러싼 공기도 조금 더 무겁게 변했지만 재경은 모르는 척하며 태연함을 가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진짜 별일 아니니까 신경 안 써도 돼.”

    사실 말해주지 못할 것도 없었다. 만일 같은 질문을 한 사람이 김성욱이라면 삼촌이 그랬다고 시원하게 밝힌 뒤에 훌훌 털어버렸을 거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박성범에게는 말하기가 싫었다. 그간 봐온 모습대로라면, 삼촌 이야기를 했을 때 자신을 한심하다고 생각하거나 흉을 보는 일은 없을 거다. 오히려 같이 화를 내주거나 위로를 건네줄 법한 녀석이 분명한데……. 그냥 그 사실 자체를 박성범이 알게 되는 게 부끄러웠다.

    그러다 순간 재경은 멈칫했다.

    ‘……부끄럽다고?’

    대체 왜?

    해답이 곧바로 생각나지 않는 물음이었다. 좀 전과는 다른 의미로 심장이 좀 빨리 뛰는 것 같기도 해서, 재경은 슬그머니 반대편 창문으로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이대로 넘어가나 했는데 박성범의 물음이 다시 이어졌다.

    “혹시 호프집에서 그런 거야?”

    뜬금없는 말에 재경은 의아해하다가 금세 깨닫고 대답했다.

    “아냐. 주말에는 알바 안 해.”

    “그럼 대체……!”

    갑자기 높아진 언성에 재경은 깜짝 놀랐다. 옆에서 바라본 박성범의 표정은 무서울 정도로 굳어 있었다. 크게 숨을 들이쉰 녀석이 그만큼 긴 한숨을 내쉬었다.

    “……됐어. 못 들은 걸로 해. 피곤하면 눈 좀 붙여.”

    마침 신호가 바뀌면서 멈춰 있던 차가 출발했다. 다시금 창밖을 바라보는데 흡사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마음이 불편했다.

    언제부턴가 익숙한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집에 거의 다 왔을 무렵, 박성범이 속도를 낮추고 갓길에 잠깐 차를 세웠다.

    “약국에 좀 갔다 올게.”

    대답하기도 전에 박성범이 차에서 내렸다. 홀로 남게 된 재경은 참았던 한숨을 터뜨리며 마른세수를 했다.

    “……미치겠네.”

    뒤늦은 후회가 차올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대충이라도 말해주는 거였는데. 배려심이 남다른 녀석이니까……. 말하기 싫어하는 티를 내면 깊이 파고드는 대신 그냥 웃으며 넘어갈 줄 알았지, 이렇게 분위기가 안 좋아질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지금 생각하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긴 했다. 끙끙 앓는 놈을 둘러업고 오밤중에 병원을 찾고 밤새 간호까지 해줬는데, 뭐 하나 제대로 말해주는 게 없으니 괘씸하다는 생각이 들어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동안 박성범은 근처에 있는 약국으로 들어갔다. 약사에게 처방전을 내밀고는 뒤쪽에 마련된 의자로 가서 털썩 주저앉았다.

    “후우…….”

    깍지 낀 손을 이마에 댄 채 긴 한숨을 흘리고 말았다.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이쪽을 쳐다보던 재경의 표정을 떠올리니 자괴감 아닌 자괴감이 들었다.

    추궁하려던 의도는 절대로 아니었다. 그저 누가 봐도 뺨을 맞은 게 분명한데, 별일 아니라며,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들으니 순간적으로 서운한 감정이 차올랐다. 자신은 이제 제법 많이 친해졌다고 생각하는데 ‘이재경은 아직 아닌가 보다.’ 싶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래서야 내가 뭔가를 줬으니 너도 같은 걸 줘야 한다고 떼를 쓰는 어린애와 다를 바가 없었다. 또 한 번 한숨을 푹 내쉬는데 약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재경 님.”

    퍼뜩 일어서서 앞쪽으로 다가가자 친절한 설명이 이어졌다. 약 성분과 복용법을 귀담아들은 뒤에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그런데 마침 옆에 나란히 선 아주머니가 영양제 어쩌고 하는 소리가 들렸다. 박성범은 곧 약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종합영양제 제일 좋은 걸로 하나 주세요. 입안에 난 상처에 바르는 연고도 주시고요.”

    “영양제 드실 분은 연령대가 어떻게 되세요?”

    “20대 남자예요.”

    이윽고 약사는 네모난 통을 카운터 위에 올렸다.

    “아침 식후에 하나씩 드시면 돼요. 영양제는 꾸준히 먹는 게 좋은데, 두 달분으로 드릴까요?”

    “네. 그리고 지금 감기에 걸렸는데 약이랑 같이 먹어도 상관없어요?”

    “괜찮아요. 아니면 조금 텀을 두고 복용해도 되고요.”

    이번에도 머릿속에 새겨들은 뒤에 박성범은 계산을 마치고 약국을 나왔다. 다음 목적지는 죽 전문점이었다. 시계를 한 번 확인하고는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체감상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박성범은 차로 돌아왔다. 집까지 가는 짧은 길에도 조용하긴 마찬가지였다. 불편한 마음으로 창밖만 보고 있던 재경은 잠시 후 집에 도착했을 때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더 큰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재경은 여전히 신발이 없었다.

    차에서 먼저 내린 박성범이 앞으로 빙 둘러 가는 것이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밖에서 조수석 문이 열리며 또 한 번 등이 내밀어졌다.

    “업혀.”

    “괜찮아. 집에 다 왔으니까 그냥 올라갈게.”

    “업혀.”

    “…….”

    차라리 잘 걸 그랬다고 뒤늦은 후회를 하며 재경은 마지못해 두 팔을 주춤주춤 내밀었다. 그런 재경의 몸을 한 번 추어올린 뒤에 박성범은 빌라 입구를 향해서 걸어갔다.

    “쯧.”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복도를 걷는데 갑자기 박성범이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재경은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나 때문인가. 지금 상황에선 그 외에 다른 이유가 없어 보였다. 그냥 내려달라고 말할 생각이었지만, 그새 큰 보폭으로 현관문 앞에 이른 박성범이 도어락을 해제하고 문을 열었다. 등을 돌려 거실에 내려주더니 “잠깐 내려갔다 올게.” 라는 말을 남기곤 다시금 밖으로 나갔다.

    “하아…….”

    답답한 마음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애꿎은 머리칼을 헝클어대다가 재경은 터벅터벅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풀썩, 그대로 쓰러지듯 침대에 누웠다. 시간으로 따지자면 채 열두 시간도 지나지 않았을 텐데 어쩐지 아주 오랜만에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그대로 눈을 감는데 배에서 꼬르륵 하는 작은 소리가 났다.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이 와중에도 본능에 충실한 게 우습기도 하고 조금은 서글프기도 했다.

    -똑똑

    문 너머에서 노크 소리가 들린 것은 그다음이었다. 재경은 감았던 눈을 다시 떴다.

    “방에 있어?”

    “어.”

    “잠깐만 나와봐.”

    비척비척 일어나서 문을 열자 바로 앞에 박성범이 서 있었다. 그러고 보니 고맙다는 인사도 제대로 못 한 게 생각나서 지금이라도 말하려는데, 박성범이 조금 더 빨랐다.

    “죽 사 왔으니까 먹고 쉬어. 약 먹기 전에 뭐라도 먼저 먹으라더라.”

    그 말에 재경의 입이 소리 없이 천천히 벌어졌다. 조금 전에 박성범이 잠깐 차를 세웠던 것이 떠올랐다.

    설마…….

    놀란 기색이 여실한 재경을 바라보다가 박성범은 옅게 웃으며 녀석의 머리를 아프지 않게 헝클었다. 내친김에 덥석 손목을 붙잡곤 주방으로 이끌었다.

    “가자.”

    식탁에는 죽이며 밑반찬이 이미 세팅되어 있었다. 박성범은 생수병을 꺼내려고 냉장고 문을 열었다가 아차 하는 생각에 다시 닫았다. 대신 주방 한쪽에 여분으로 쌓여 있는 것들 중 하나를 꺼내서 컵과 함께 가져갔다.

    “뜨거우니까 천천히 먹어. 아니면 내가 먹여줄까?”

    실없는 농담이 몹시도 반갑게 느껴졌다. 재경은 피식 웃으며 장단을 맞춰주었다.

    “그럼 나야 고맙지.”

    “……!”

    순간 놀라는 표정을 보니 좀 더 깊은 웃음이 나왔다.

    “농담이야. 다행히 손은 멀쩡하니까 내가 먹을게.”

    “……진짜 먹여줄 수도 있는데.”

    “농담이라니까. 근데 넌 안 먹어?”

    죽 그릇도, 수저도 하나씩만 놓여 있었다.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더니 대수롭지 않게 하는 대답이 들렸다.

    “약속 있어서 좀 이따 나가봐야 돼. 나 신경 쓰지 말고 편하게 먹어.”

    이윽고 거실에서 TV 소리가 들렸다. 재경은 뒷목을 긁적이다가 천천히 의자를 빼고 자리에 앉았다.

    어디 전문점에서 사 오기라도 했는지 전복이 잔뜩 들어 있는 죽은 생각보다 훨씬 맛있었다. 한 번씩 상처 부위에 닿을 때마다 인상이 절로 찌푸려지긴 했지만 후후 불면서 착실하게 숟가락을 움직였다.

    덕분에 꽤 커다란 통이 말끔하게 비워졌다. 뒷정리를 하려고 일어서는데 인기척과 함께 박성범이 다가왔다.

    “다 먹었어?”

    “……어.”

    뒤늦게 민망함이 차올랐다. 아프면 입맛도 없다던데 그것도 사람에 따라서 다른 모양이었다. 입맛이 없기는커녕 입안에 상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닥까지 남김없이 싹싹 긁어 먹었다.

    “……고마워. 덕분에 잘 먹었어.”

    “그럼 잠깐만 나와봐.”

    “뒷정리는…….”

    “나중에 내가 하면 돼.”

    다행히 박성범은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내심 안도하며 따라 나가니 녀석이 무언가를 내밀었다. 약국 이름이 찍힌 비닐봉지였다.

    “약은 하루 세 번씩 식후에 먹으면 된대. 그리고 통에 든 건 영양제인데 매일 아침마다 한 알씩 먹으라고 하더라.”

    “영양제?”

    “의사가 주는 대로 받아 온 거야. 그리고……. 연고는 입안에 바르는 거야.”

    순간 재경은 말문이 막히는 기분을 느꼈다. 바보처럼 멍하니 쳐다보고 서 있으니 박성범이 민망한 표정으로 제 목덜미를 주무르며 말했다.

    “어디서 맞고 왔다고 생각하니까 열불이 나서…….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걸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자꾸 추궁하게 되더라고. 불편하게 해서 미안해.”

    “…….”

    “그럼 편하게 쉬어. 약 꼭 챙겨 먹고.”

    “잠깐만……!”

    재경은 저도 모르게 팔을 뻗어 박성범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이내 뒤를 돌아보는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이재경?”

    의아한 듯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제가 붙잡아놓고도 잠깐 머뭇거리다가 시선을 내리깔며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어제 삼촌이랑 트러블이 좀 있었어.”

    “삼촌?”

    “어. 독립하기 전까지 같이 살았다던 그 삼촌인데……. 순간적으로 감정이 차올라서, 해서는 안 될 말을 해버렸어.”

    “그럼 삼촌이 네 얼굴에 손을 댔다는 거야?”

    재경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재경을 바라보는 박성범의 표정이 조금씩 일그러졌다.

    누가 그랬는지 마침내 알게 되었지만 조금도 개운하지 않았다. 재경이 무슨 말을 했는지는 알 수 없어도, 대뜸 쌍욕을 하거나 없는 말을 지어내지는 않았을 터였다. 설령 백번 양보해서 그랬다 쳐도 다 큰 조카에게 손찌검을 한 걸 보니 제대로 된 사람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데다 비까지 고스란히 맞으면서 돌아왔다고 생각하니 또 한 번 속에서 불이 나는 듯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다 큰 조카한테 손을 올리는 게 말이 돼? 때릴 데가 어딨다고.”

    “…….”

    “경찰에 신고라도 하지 그랬어.”

    장난기라곤 조금도 담겨 있지 않은 목소리였다. 백 퍼센트 진심으로 하는 말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재경은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역시, 예상대로다. 삼촌한테 무슨 말을 했냐고 묻거나 오죽했으면 삼촌이 그랬겠냐는 말을 할 수도 있는데 박성범은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무조건 자신의 편을 들어주는 듯한 녀석이 고맙게 느껴졌다. 한편으로는 마음 한구석이 묘하게 간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크흠, 하며 목을 가다듬은 뒤에 재경은 한결 밝아진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 정도 일로 신고하면 욕하면서 돌아갈걸? 아무튼 신경 써줘서 고마워. 어제오늘 폐만 잔뜩 끼쳐서 면목이 없어.”

    “폐는 무슨. 그리고 이건 내 지레짐작이긴 한데…….”

    말끝을 흐린 박성범이 다시금 시선을 마주하며 입을 열었다.

    “삼촌이랑 트러블 있었다는 거, 혹시 돈 때문이야?”

    순간 재경은 멈칫했지만 거듭 픽 웃으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맞아. 근데 잘 해결됐어.”

    당연하게도 박성범은 속지 않았다. 잘 해결됐는데 조카의 뺨을 때리고, 비가 그렇게나 쏟아지는데 우산조차 챙겨주지 않았을 리가 없다. 또다시 일렁이는 감정을 애써 억누르며 박성범은 재경과 거듭 시선을 마주했다.

    지금부터 할 말은 어쩌면 재경의 자존심을 상하게 할 수도 있고, 기분 나쁘게 받아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깟 돈 때문에 재경이 맞고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아니면 내가 빌려줄까?”

    “……뭐?”

    “많지는 않아도 모아둔 돈이 좀 있어. 부모님한테 손 벌리거나 용돈으로 받은 거 아니고, 일해서 직접 번 거야. 곡 써주고 그 대가로 받은 거.”

    말하면서도 괜히 쓸데없는 소리까지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만큼 박성범은 간절했다. 돈이 있다고 거들먹거린다거나 부모님께 받은 용돈으로 생색낸다는 오해는 절대 사고 싶지 않았다. 정말 순수한 걱정에서 하는 말인 것을 이재경이 꼭 알아줬으면 싶었다.

    다행히 재경은 화를 내거나 정색하는 대신 웃는 얼굴을 보여주었다.

    “말만으로도 고마워. 근데 진짜 잘 해결됐어.”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재경은 조금 더 솔직하게 털어놓기로 했다.

    “사실 해결됐다기보다는……. 그냥 무시하려고. 도와주면 고마워하는 게 아니라, 더 많이 내놓으라고 닦달하고도 남을 분이거든. 앞으로는 절대 눈에 띄지 말라던가 그랬으니까 차라리 잘됐지, 뭐.”

    이어서 재경은 박성범의 가슴께를 장난스럽게 툭 쳤다.

    “그리고 너 말이야. 매너 좋고 주변 사람들 잘 챙기는 건 나도 아는데, 그렇게 아무한테나 덥석 돈 빌려준다고 하는 거 아냐.”

    “…….”

    “그러다 나쁜 맘 먹고 홀랑 떼먹기라도 하면…….”

    “아니.”

    갑자기 말꼬리가 뚝 잘렸다. 박성범을 담고 있던 재경의 눈동자가 천천히 아래로 움직였다. 방금 장난스럽게 박성범의 가슴을 툭 쳤던 손목을 커다란 손이 붙잡고 있었다.

    자각한 순간 멋대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다시금 천천히 시선을 마주하는데,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긴장감이 차올랐다. 심장 박동이 조금 빨라진 것도 같았다.

    “전부터 나에 대해 뭔가 오해를 좀 하고 있는 거 같은데……. 나,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아무한테나 대책 없이 친절한 성격 아냐.”

    “…….”

    “비 온다고 누구 데리러 간 적도 없고, 취했다고 업어준 적도 없고, 아침마다 부지런 떨면서 식사 준비해본 적도 없어. 그러기는커녕 혼자 살 땐 아침 일찍 일어난 게 손에 꼽을 정도야.”

    낮은 목소리가 끊기자 정적이 맴돌았다. 재경은 간신히 입술을 달싹였다.

    “그럼 왜…….”

    어느 순간부터 심장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 스스로도 이유를 알 수 없는 두근거림이었다. 하마터면 가슴으로 올라갈 뻔한 손을 재경은 간신히 참아냈다. 침묵을 깨며 박성범이 대답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너니까.”

    “……!”

    “이재경 너라서 챙겨주고, 너라서 걱정하는 거야.”

    “…….”

    “무슨 사정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너 혼자서 힘들어하는 거 보는 것도 싫고,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속으로만 삭이는 것도 싫어. 겉은 멀쩡해 보일지 몰라도 속은 말이 아니라는 거, 알고 있으니까.”

    이제는 눈도 깜빡일 수 없었다. 얼어붙다시피 한 채로 서 있으니 박성범이 그제야 손목을 놓아주며 재경의 머리카락을 헤집듯 슥슥 헝클었다.

    “깊게 생각하거나 부담 가질 필요는 전혀 없어. ……아니, 당연히 부담스러울 거고, 그래서 말 안 하려고 했는데……. 그냥 널 걱정하고, 염려하고, 힘이 되어주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어.”

    “…….”

    “그러니까 아프지 마. 어디 가서 맞고 들어오지도 말고.”

    묵묵부답인 재경을 바라보며 박성범은 열없는 미소를 지었다.

    말할 생각이 없었다는 건 임기응변으로 둘러댄 게 아니라 진심이었다. 언젠가 여자친구 이야기가 나왔을 때, 이재경은 당분간 연애를 할 생각이 없다고 딱 잘라 말했었다. 게다가 이성애자인 녀석과 자신이 잘될 확률은 제로였기에 고백 따윈 생각도 하지 않았었다.

    그냥 지금처럼 친한 친구로만 지내도 만족했을 텐데……. 뭐든 혼자서 감내하려고 애쓰는 녀석을 보니 안쓰러우면서도 안타까워서 지금이라도 꼭 말해주고 싶었다. ‘이렇게 널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을.

    “피곤할 텐데 가서 좀 쉬어. 진료확인증 끊어 왔으니까 오늘 수업 빠진 건 신경 쓰지 말고. 난 약속 있어서 잠깐 나갔다 올게.”

    할 말을 마친 박성범이 먼저 걸음을 옮겼다. 재경은 저도 모르게 녀석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지만 금세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재경도 뒤늦게 방으로 돌아가서 닫힌 문에 등을 기대고 섰다. 이내 미끄러지듯 주저앉으며 열이 오른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방금 들은 말들이 멋대로 머릿속에서 반복되었다.

    ‘너라서 챙겨주고, 너라서 걱정하는 거야.’

    ‘널 걱정하고, 염려하고, 힘이 되어주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어.’

    “으으…….”

    앓는 소리를 내며 두 팔로 얼굴을 가리고 말았다. 귀 끝까지 열기가 번졌다. 보지 않아도 얼굴이 온통 달아올라 있을 게 뻔했다. 심장도 마치 전력 질주를 한 사람처럼 미친 듯이 뛰어댔다.

    ‘그러니까……. 그런 뜻이겠지?’

    비록 직접적으로 좋아한다거나 사……, 뭐 그런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 정도 분위기를 파악하는 눈치쯤은 있었다.

    지이이잉-

    “……!”

    갑자기 드르륵대는 핸드폰 진동음에 재경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방 안을 둘러보자 책상 위에 놓인 핸드폰이 보였다. 밤새 방치 상태였는데도 꿋꿋하게 살아 있는 핸드폰을 확인해보니 김성욱한테서 폭탄 메시지가 들어와 있었다.

    [??학교안왓음? ㅊㅅ부르는데조용하네]

    [설마또둘이서만달린거임?]

    [와ㅣ안바]

    [왜안보냐고ㅠㅈㄴ마상ㅠ]

    그리고 대략 한 시간 뒤에는 사뭇 달라진 분위기의 메시지가 가득했다. 마지막에는 콧물을 훌쩍이는 토끼에게 약봉지를 건네는 강아지 이모티콘이 움직이고 있었다.

    재경은 김성욱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아차 싶은 생각에 서둘러 종료 버튼을 눌렀다. 상단 시계를 보니 아직 수업이 끝나지 않은 시간이었다.

    메시지를 보낸 사람은 또 있었다. 바로 밑 대화 목록에 경수의 이름이 보였다. 자연히 어제 삼촌 집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라서 마음이 착잡했지만, 그렇다고 안 볼 수도 없어서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였다.

    [형.. 괜찮아? 집에 잘 들어갔어?]

    [나사실 방에서 다 듣고 있었는데... 아빠가무서워서 나갈수가 없었어]

    [미안해형.. 진짜진짜미안해]

    [형가방 내가 챙겨놨어. 주말에 올거지 형? 꼭왔으면 좋겠어.. 아빠 진짜 싫어. 엄마도 싫어. 난 형이 제일 좋은데...]

    [형... 화많이 났어? 진짜미안해... 제발답장좀 해줘]

    경수는 문자만 보낸 게 아니었다. 최근 통화 목록을 확인해보니 어제저녁부터 아침까지 부재중 전화가 무려 12통이나 들어와 있었다.

    당연하게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여리면서도 소심한 면이 있는 녀석인데, 어제 그렇게 쫓겨나듯 나간 형이 메시지도 안 읽고 전화도 받질 않으니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울었을 게 분명했다.

    어제 일로 삼촌과 숙모에게는 완전히 정이 떨어졌지만 경수는 아니었다. 어른들과 감정의 골이 깊다고 해서 애꿎은 경수한테까지 매몰차게 대할 수는 없었다.

    문제는 경수도 지금 학교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나중에 전화를 해줘야겠다고 생각하는데 또 한 번 핸드폰이 진동하며 전화가 걸려왔다. 발신자를 확인한 재경은 침대에 걸터앉으면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여보세요? 너 괜찮아?!

    커다랗게 터져 나오는 소리에 재경은 핸드폰을 멀찍이 뗐다가 다시금 귀에 갖다 대며 대답했다.

    “어. 괜찮아.”

    - 또 둘이서만 달린 줄 알고 갈궜는데, 병원에 실려 갔다는 말 듣고 미안해 죽는 줄 알았어. 어디가 아파서 그런 거야?

    “열이 좀 많이 났었나 봐. 지금은 괜찮아.”

    - 괜찮다는 사람 목소리가 그래?

    딴에는 걱정해서 하는 말인 것을 알기에 재경은 픽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 행여나 학교에 올 생각 하지 말고 오늘은 푹 쉬어. 나중에 양재랑 같이 병문안 갈까?

    “병문안은 무슨. 보면 멀쩡하다고 욕할걸.”

    - 암튼 진짜 미안. 지은 죄가 있으니까, 알바는 내가 대신 뛰어줄게. 내일까지 해준다.

    “안 그래도 돼. 좀 쉬었다가…….”

    - 셧업. 그 입 다물라.

    “…….”

    - 해준다고 할 때 감사합니다, 하고 오케이하는 거야. 뭐, 내가 워낙 잘해서 매니저 형이 나한테 반할 수는 있는데, 그래도 네 일자리는 안 빼앗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그러니 오늘은 꼼짝 말고 쉬라는 말을 남긴 채 김성욱은 전화를 끊었다.

    통화를 끝낸 재경은 쓰러지듯 침대에 몸을 뉘었다. 멍하니 눈을 깜빡이는데 누가 시키기라도 한 것처럼 박성범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너라서 챙겨주고, 너라서 걱정하는 거야.’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한 걸까. 잘해준다는 자각은 있었지만, 조금 전에 녀석이 지적했던 대로 모든 사람에게 다 그러는 줄 알았다. 워낙 여유가 넘치고 성격도 좋은 녀석이니까. 설마 그런 쪽으로 마음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해보지 못했다.

    ……아니. 정말 몰랐던 걸까? 김성욱이나 다른 동기들을 대하는 모습을 보면서, 또 과하다 싶을 정도의 배려를 받으면서 ‘뭔가 살짝 다르다’는 생각을 한 적이 정말 없었나?

    아니라고 부정할 수 없었다. 가끔, 아주 가끔 그런 생각이 언뜻 들려고 할 때마다 구체화되기 전에 부정하며 눈을 돌렸다. 처지가 딱하고 안타까우니 조금 더 잘해주는 것뿐이라고 멋대로 녀석의 마음을 단정 지으면서.

    그리고 나는…….

    “……모르겠다.”

    듣는 사람도 없는데 중얼거리며 재경은 눈을 감았다. 계속 생각한다고 해서 당장 길이 보이거나 해답을 내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일단 한숨 더 자자. 자고 일어나서 생각하는 거다.

    편하게 자세를 잡으며 잠을 청했다. 하지만 심장이 자꾸만 빠르게 뛰는 바람에 평소와 달리 한참을 뒤척거려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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