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22)
  • 8.

    재경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닿았던 입술이 떨어지면서 다시 한 번 박성범과 눈이 마주쳤다. 낮게 묻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싫어?”

    심장 소리가 귀를 울릴 정도로 크게 뛰었다. 재경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느리게 대답했다.

    “……모르겠어.”

    박성범의 입꼬리가 살며시 위로 올라갔다.

    “눈 감아봐.”

    거리가 좁혀지며 거듭 입술이 맞닿았다. 쪽, 쪽. 두어 번의 짧은 입맞춤 뒤에 무언가가 입술을 가르며 안으로 침투했다. 재경은 키스를 해본 적이 없지만 본능적으로 그것이 박성범의 혀라는 것을 깨달았다.

    “……!”

    스치는 감각에 움찔해서 혀를 뒤로 빼자 박성범이 곧바로 뒤쫓아 왔다. 안쪽으로 도망간 혀를 건드리며 깊게 얽어대다가 거의 입술을 붙이다시피 한 채로 말했다.

    “손, 움직여.”

    그리고 또다시 키스가 이어졌다. 박성범은 손을 움직이라고 했지만 재경은 도통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다. 처음 해보는 딥키스에 숨 쉴 타이밍을 찾기도 힘들었다.

    “자, 잠깐만… 우웁…!”

    어느 순간 두 손은 박성범의 어깨를 붙잡고 있었다. 그런 재경의 허리를 끌어당겨 한껏 밀착한 채로, 박성범은 틈을 주지 않고 계속해서 키스하며 두 사람의 것을 같이 쥐고 빠르게 흔들어댔다.

    “하아….”

    입술을 떼자 실 같은 타액이 길게 이어졌다. 박성범은 그대로 재경의 목선을 따라서 입술을 미끄러트렸다. 여린 피부를 핥으며 가볍게 빨아대는데 재경이 헐떡거리며 하는 말이 들렸다.

    “놔봐. 할 것 같아…….”

    “그냥 해. 어차피 다 젖었어.”

    박성범은 한껏 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잠시 후, 재경이 먼저 몸을 굳히며 정액을 토해냈다. 그에 뒤질세라 박성범도 재경의 목덜미를 콱 깨물며 뜨거운 덩어리들을 왈칵 쏟아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해방감이었다. 긴 한숨을 내뱉은 뒤에 고개를 드니 바로 앞에 재경의 얼굴이 보였다. 박성범은 홀린 듯이 재경의 뒤통수를 끌어당기며 다시 한 번 입술을 겹쳤다.

    재경은 거부하지 않았다. 자신처럼 적극적으로 응하지는 않지만, 밀어내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원하는 만큼 실컷 키스한 뒤에 박성범은 입술을 떼며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한 번 더 할까?”

    뭘 뜻하는지 알아듣는 눈치쯤은 있을 터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재경의 입에서 흘러나온 대답은 기대를 비껴갔다.

    “……졸려.”

    어찌 보면 녀석다운 대답에 박성범은 웃고 말았다. 취해서 자다 깬 데다가 시원하게 한발 빼기까지 했으니 졸릴 법도 했다.

    급한 대로 좀 전에 벗었던 셔츠를 주워서 재경의 몸을 닦아주었다. 그러곤 잠깐만 있어 보라는 말을 남긴 뒤에 밖으로 나갔다.

    찾는 물건은 거실 테이블 위에 있었다. 물티슈 통을 챙겨 들고 되돌아갔더니 재경은 그새 웅크린 채로 누워 있었다. 박성범은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으며 물티슈를 서너 장 뽑았다. 우선 제 손부터 먼저 닦은 뒤에 몇 장을 더 뽑아서 못다 한 뒤처리를 마저 했다.

    잠자리는 여전히 협소했다. 재경을 안아들고 자신의 방으로 갈까 하다가, 이내 생각을 고쳐먹고 바짝 몸을 붙이며 뒤에서 재경을 껴안았다.

    곧 박성범도 조용히 눈을 감았다. 여느 때보다 만족스러움을 느끼며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 * *

    언제부턴가 묘한 답답함이 느껴졌다. 이리저리 몸을 뒤척여봤지만 묵직한 무게감은 좀처럼 가시질 않았다. 외려 허리에 가해지는 압박감에 재경은 앓는 소리를 내며 눈을 떴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희끄무레한 벽이었다. 반쯤 몸을 일으킨 재경은 그제야 자신을 얽매던 압박감이 어디에서 기인했는지 알 수 있었다. 두꺼운 팔이 제 허리에 감겨 있었다.

    “…….”

    뒤를 돌아보니 예상대로 박성범의 얼굴이 보였다. 전적이 있어서 딱히 놀랍지는 않지만, 어째서 또 이러고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화장실부터 갔다 오자.’

    그러려면 우선 결박에서 벗어나는 것이 먼저였다. 박성범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허리에 감긴 팔부터 천천히 떼어냈다. 다행히 녀석이 눈을 뜨는 일은 없었다. 재경은 조심스럽게 침대 아래쪽으로 이동한 다음 발소리를 죽여서 조용히 방문을 열고 나갔다.

    동이 트기 전, 잔잔하게 깔린 새벽 어스름이 재경을 반겼다. 화장실로 직행한 재경은 소변을 본 뒤에 긴 하품을 하며 세면대 앞에 섰다. 내친김에 세수까지 하고 밖으로 다시 나왔다. 방으로 돌아가려다가 생각을 바꿔 거실 소파에 앉았다.

    간밤의 일은 기억나지 않지만, 박성범이 등 뒤에 떡하니 누워 있으니 아마 밤새도록 벽을 보는 자세로 잤을 것이 뻔했다. 그래서인지 뻐근한 뒷목을 주무르며 재경은 속으로 불만을 토로했다.

    ‘넓은 방 놔두고, 왜 남의 침대에 올라와서 자고 난리…….’

    순간 재경은 멈칫했다. 기억에 없는 몇몇 장면들이 플래시백처럼 머릿속에서 재생되었다.

    ‘그래도 집은 알아보나 보네.’

    ‘깬 김에 옷이라도 갈아입고 자.’

    ‘편하게 자. 불 꺼줄게.’

    그리고…….

    ‘같이 자자.’

    제가 내뱉었던 말을 떠올린 순간 재경은 그만 숨을 삼키고 말았다. 뒤늦게 숨을 토해내며 두 손으로 이마를 감쌌다.

    “……제대로 미쳤구나.”

    만취하면 기억이 통째로 날아갈 때도 있는데, 드문드문이긴 해도 어젯밤 일은 확실하게 기억이 났다. 그래서 미치도록 난감했다.

    어제는 정말 심적으로 많이 힘들었고, 사람의 온기가 절실해서 홀린 것처럼 박성범을 붙잡았다. 그래, 여기까지는 스스로도 이해할 수 있고 박성범에게 사정을 설명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이후가 문제였다.

    ‘내가 해줄게.’

    이것도 분명 제 입에서 흘러나간 말이었다. 놀란 기색이 여실하던 박성범의 얼굴을 떠올리니 이대로 사라져버리고만 싶었다.

    “뭔 짓을 한 거야 미친 새끼야…….”

    재경은 고개를 푹 숙이며 뒷머리를 벅벅 헝클었다. 얼굴이 탈 것처럼 뜨거웠다.

    진짜 미쳤던 게 틀림없다. 아니면 뭔가에 홀렸거나.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걸 해주겠단 말을…….

    그뿐이면 다행이었다. 자신 또한 박성범의 손 안에서 갔고, 싸자마자 퍼질러 잤던 걸 떠올리니 눈앞이 캄캄했다.

    “어떡하지.”

    지금도 난감하지만 앞으로가 더 문제였다. 대체 어떤 얼굴로 박성범을 봐야 할까. 기억이 나질 않는다고 할까. 아님 취해서 한 실수였다고, 서로 깔끔하게 잊자고 하면…….

    벌컥-

    갑자기 열리는 방문 소리에 재경의 어깨가 튀어 올랐다. 곧 거실로 나온 박성범과 눈이 마주쳤고, 재경은 저도 모르게 슬며시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덕분에 자동적으로 1번 선택지는 사라졌다.

    ‘돌겠네 진짜.’

    아직 어떻게 할지도 못 정했는데 너무 이른 조우였다. 보지 않아도 이쪽을 향하는 시선이 느껴졌다.

    미친놈아. 대체 왜 그랬냐고. 차마 그쪽은 쳐다보지도 못하고 속으로 자책하고 있으니 박성범이 먼저 말을 걸었다.

    “일찍 일어났네.”

    “……어. 화장실 가고 싶어서.”

    그야말로 가시방석이 따로 없었다. 잠시 후 들려오는 말에 재경은 심장이 덜컥했다.

    “어제 일, 혹시 기억해?”

    “……대충.”

    떨어지지 않으려는 입술을 달싹여 간신히 대답했다. 이미 너무 티 나게 반응해 버려서, 잡아떼거나 거짓말을 해봤자 녀석을 기만하는 꼴밖에 되지 않을 터였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박성범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미안. 어제는 내가 실수한 거 같아.”

    느닷없는 사과에 일순 재경은 멈칫했다. 그제야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겸연쩍게 웃고 있는 박성범의 얼굴이 보였다. 녀석이 목덜미를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어제 나도 꽤 많이 마셨거든. 사귀던 애랑 헤어진 지 좀 됐는데, 모처럼 누가 달라붙으니까 주체가 안 돼서……. 너도 남자니까 무슨 뜻인지 알지?”

    “어? 어……. 알지.”

    “둘 다 술김에 그런 거니까, 그냥 사고였다 생각하고 넘어가자. 앞으로는 절대 그럴 일 없을 거야.”

    “……어. 그럼 나야 고맙지 뭐.”

    “아직 여섯 시밖에 안 됐던데 들어가서 좀 더 자. 난 내 방으로 갈게.”

    싱긋이 웃어 보인 박성범이 먼저 걸음을 옮겼다. 달칵,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재경은 소파에 좀 더 앉아 있다가 뒤늦게 제 방으로 들어갔다.

    침대에 풀썩 엎드려 누우며 느리게 눈을 깜빡거렸다. 다시 곯아떨어질 법도 한데, 어제 그렇게 마신 것치고는 정신이 생생했다.

    ‘둘 다 술김에 그런 거니까, 그냥 사고였다 생각하고 넘어가자.’

    방금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실제로 자신이 했던 생각이기도 하고, 또 가장 무난한 해결책이기도 했다. 그런데 정작 박성범이 먼저 그런 말을 꺼내니 어딘지 모르게 기분이 이상했다.

    재경은 뒤늦게 그럴싸한 이유를 떠올렸다. 어제 박성범과는 거기만 서로 만져댄 게 아니다. 분명히 키…… 그것도 했던 거 같은데. 문제는 그게 재경의 첫 키스라는 사실이었다.

    허락도 없이, 숨쉬기도 어려울 정도로 계속 몰아붙였을 때는 언제고……. 그것까지 싸잡아서 없던 일로 하자는 말을 듣게 되니 살짝 억울한 마음까지 들었다. 그렇다고 따질 수도 없고.

    저도 모르게 입술을 만지작거리다가 화들짝 놀라서 손을 뗐다. 부끄러운 모습을 누군가에게 들킨 것처럼 괜히 얼굴이 뜨거워졌다.

    ‘……잠이나 자자.’

    긴 한숨을 내쉰 뒤에 재경은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무언가가 못마땅한 듯 미간은 살짝 찡그린 채였다.

    * * *

    걸음을 뗄 때마다 뚜벅거리는 발소리가 울렸다. 계단 끝에 이른 박성범은 굳게 닫혀 있는 술집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왔어?”

    바 안쪽에서 마른행주로 글라스를 닦고 있던 윤정현이 반갑게 방문객을 맞았다. 가까이 다가간 박성범은 그의 바로 앞에 있는 스툴에 걸터앉았다.

    실내는 조용했다. 언제나 많은 손님들로 북적이는 곳이지만, 아직 영업을 개시하기 전이라서 조명도 바 쪽에만 켜져 있을 뿐이었다.

    박성범은 점심때 윤정현에게 문자를 보내서 일부러 오늘 이 시간에 찾아가겠다고 했다. 몇 년 전에 클럽에서 알게 된 윤정현은 잘나가는 이태원 바의 사장님이자, 어떤 문제나 고민이 있으면 경청해주고 조언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래서 박성범은 수업이 끝나자마자 그를 찾아왔다.

    “뭐 마실래?”

    “시원한 거 먹고 싶어.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시원한 거.”

    “논알콜?”

    “아니. 찐한 걸로.”

    윤정현은 곧 글라스를 내려놓고 분주하게 손을 움직였다. 잠시 후에 푸른빛을 띠는 칵테일 잔이 박성범의 앞에 놓였다. 곧 있으면 가게 오픈인데 시작도 전부터 도수 있는 술을 마시기는 그래서, 윤정현은 제 몫으로 오렌지 주스를 준비했다.

    “무슨 일이야?”

    박성범이 오픈 전에 가게를 찾아올 때는 보통 뭔가 고민이 있을 때였다. 주스를 마시며 느긋하게 기다려주니 잠시 후에 박성범이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형.”

    “어.”

    “나, 잘한 거 맞겠지?”

    밑도 끝도 없는 말이었지만 윤정현은 면박을 주는 대신 부드러운 어조로 뭘 했냐고 되물었다. 박성범은 칵테일을 한 모금 마신 뒤에 천천히 말을 이었다.

    “얼마 전부터 친구랑 같이 산다고 했잖아. 어제 걔랑 둘이서 같이 마셨는데, 사고가 좀 있었어.”

    “무슨 사고?”

    “녀석이 많이 취해서 내가 업고 들어갔거든. 침대에 눕혀주고 나가려는데, 같이 자자면서 붙잡더라고.”

    순간 윤정현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떠올랐다.

    “자자고 했다고?”

    그제야 박성범은 말실수 아닌 말실수를 깨닫고 서둘러 정정했다.

    “섹스 말고, 말 그대로 그냥 같이 누워서 자자는 뜻이었어.”

    “그럼 그렇다고 했었어야지. 깜짝 놀랐네.”

    “형 때문에 내가 더 놀랐어. 아무튼, 원래 힘든 내색을 잘 안 하는 녀석인데 어제는 평소 보던 모습이랑 많이 다르더라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같이 누웠는데…….”

    “흥분한 거야?”

    “……어.”

    박성범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윤정현이 그게 뭐가 대수냐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네 타입인 녀석이라며. 그런 애랑 한 침대에 나란히 누워 있는데, 안 서는 게 이상한 거 아냐?”

    “……그렇지. 근데 그게 문제가 아니야.”

    “그러면 뭐가 문젠데.”

    박성범은 다시금 말을 이었다. 서로 페팅하면서 키스한 것과 밤새도록 재경을 껴안고 잔 것, 그리고 새벽에 거실에서 마주쳤을 때 제가 먼저 어젯밤 일은 술김에 한 실수였다며 없던 일로 하자고 말한 것까지.

    줄곧 흥미진진하게 듣고 있던 윤정현의 표정이 그 부분에서 확 달라졌다.

    “네가 먼저 없던 일로 하자고 했다고?”

    “……어.”

    “손장난 친 것도 걔가 먼저 해주겠다고 한 거라면서. 그럼 차라리 어제 왜 그랬냐고 솔직하게 물어보지 그랬어. 아무리 취했어도 스트레이트인 놈이 다른 남자 거시기 만져준다는 말은 하기 힘들 텐데.”

    그러기는커녕 보통은 생리적인 거부감을 느끼거나 어디다 대고 세우냐며 욕을 퍼부을 법한 일이었다. 박성범의 말마따나 취한 상태라면 이성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더더욱 본심이 튀어나오기 쉬웠다.

    “게다가 상대는 네가 그쪽인 거 알고 있고, 들켰을 때도 쿨하게 넘어가 줬다며. 그 정도면 답은 뻔하지 않아?”

    그럴싸하게 들리는 추론이었다. 하지만 박성범의 생각은 달랐다.

    “그랬으면 좋겠는데, 아니야.”

    어젯밤, 뒤처리를 끝낸 뒤에 재경을 안고 잘 때만 해도 박성범은 기대 아닌 기대감이 싹트는 걸 느꼈다. 이유는 방금 윤정현이 읊어준 것과 같았다. 아무리 취했다고는 해도, 발기한 걸 알고도 정색하거나 거부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해주겠다고 말하는 걸 들으니 ‘조금쯤은 나한테 마음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하지만 헛된 기대였다. 잠결에 허전함을 느끼고 눈을 떴을 때 재경이 누워 있던 자리가 비어 있는 것이 보였다. 그때부터 슬금슬금 불안함이 번졌지만 애써 모른 척하며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갔다. 그리고 소파에 앉아 있던 재경과 눈이 마주친 순간, 박성범은 곧바로 깨달았다.

    쫓기듯 피하는 시선, 어색하기 짝이 없는 침묵. 깊게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당황스러움과 후회로 점철된 듯한 모습을 보면서 박성범은 빠르게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이재경이 어제 일을 기억하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걸 후회한다면. 그렇다면.

    ‘어제는 내가 실수한 거 같아. 둘 다 술김에 그런 거니까, 그냥 사고였다 생각하고 넘어가자.’

    그 외 어떤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쿨한 척 제 할 말만 내뱉고 도망치듯 방으로 들어간 박성범은 침대에 걸터앉으며 애꿎은 머리칼만 벅벅 헝클고 말았다.

    처음에 바랐던 대로 근래 재경은 자신을 친구로서 좀 더 믿고 의지하는 듯했다. 그런데 혹시라도 어제 일 때문에 사이가 다시 멀어지거나 어긋나는 것은 결코 원치 않았기에, 제가 먼저 선수를 칠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얼렁뚱땅하게나마 수습이 되어서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 한구석이 따끔거렸다.

    “눈 딱 감고 한번 밀어붙여 봐봐. 내가 보기엔 충분히 승산 있다니까.”

    “내가 보기엔 없어.”

    박성범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마른 얼굴을 쓸고 말았다. 윤정현은 여러 방면에서 촉이 좋은 편이지만 이번만큼은 그가 틀린 듯했다.

    “그럼 앞으로 어쩔 생각이야?”

    “어떡하긴. 계속 지금처럼 지내야지.”

    “할 수 있겠어? 가벼운 마음이 아니니까 지금 여기 와서 이러고 있잖아.”

    정곡을 찌르는 말에 박성범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남은 술만 들이켰다. 그런 박성범을 바라보면서 윤정현은 속으로 생각을 이어갔다.

    전혀 승산이 없다고 했지만, 암만 되짚어 봐도 자신의 생각은 달랐다.

    지금은 정신 차리고 한 사람에게만 애정을 쏟고 있지만, 겁 없던 20대 후반까지만 해도 윤정현은 모험과 스릴을 꽤나 즐겼었다. 그리고 다소 고약한 취미가 있었는데, 게이 바에 혼자 앉아 있는 사람들 중에서 귀신같이 초짜들만 골라내 잠자리를 가지는 거였다.

    그런 사람들은 딱 보면 티가 났다. 숨듯이 구석진 자리에 앉고, 불안하게 주변을 힐끔거리고, 누가 말이라도 걸면 소스라치게 놀라고. 윤정현은 단정하고 깔끔한 외모를 십분 활용해서 어렵지 않게 그들에게 접근했다. 그리고 합석을 해서 이야기를 듣다 보면 예상대로 열에 아홉은 이쪽 경험이 없거나 혼란스러움을 안고 찾아온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보통은 제가 리드하며 별 탈 없이 관계를 갖지만 한 번씩 재수가 없는 날도 더러 있긴 했다. 모텔까지 제 발로 따라왔을 때는 언제고, 바지 버클에 손을 대면 돌변하는 놈들이 가뭄에 콩 나듯 있었다. 못하겠다며 줄행랑을 치는 것은 양반이었다. 개중엔 밀치며 뺨을 때리거나, 어정쩡하게 윤정현의 것을 만지다가 갑자기 구토를 하는 머저리 같은 놈들도 있었다.

    그런 과거의 경험들로 비추어 봤을 때 박성범의 룸메이트는 이쪽 기질이 있는 게 분명해 보였다. 아무리 취했다지만, 아니, 그렇기에 더더욱 발기한 친구 놈 자지에 아무렇지 않게 손을 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풋풋한 중고딩들이 열기를 주체하지 못하고 서로 귀엽게 손장난을 쳐준 상황도 아니었다. 그러니 박성범이 조금만 과감하게 밀어붙이면 얼마든지 더 깊은 사이로 발전하거나, 룸메라는 녀석이 뒤늦게라도 자각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어 보인다는 게 윤정현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당사자가 저 모양이니 강하게 주장할 수도 없었다. 이유는 뻔했다. 행여나 친구 사이마저 아니게 될까봐 섣불리 다가가기 어려운 거겠지.

    제가 알기로 박성범이 먼저 타인에게 관심을 가진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친구에 이쪽 성향도 아닌 놈이라고 하니, 모르긴 몰라도 당분간은 마음이 꽤나 싱숭생숭할 터였다. 아예 가능성이 없으면 기대도 없을 텐데 꼭 그렇지만도 않으니 더더욱.

    띠링, 하며 박성범의 핸드폰이 울렸다. 문자를 확인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마셨어, 형.”

    “벌써 가려고?”

    “당구 치러 오라고 해서.”

    그 말에 윤정현의 눈매가 금세 가늘어졌다.

    “걔도 있어?”

    “없어. 바빠서 그럴 시간도 없는 녀석이야.”

    조금만 더 떠보거나 장난을 치고 싶었지만, 윤정현은 꾹 눌러 참으며 말을 돌렸다.

    “그러지 말고 그냥 여기 있어. 좀 이따 손님들 오면 취향에 맞는 사람 있는지 한번 살펴봐. 요즘 클럽에도 아예 발 끊었다면서.”

    “그럴 기분 아니야. 다음에 또 놀러올게.”

    “……그래라 그럼. 너무 침울해하지 말고.”

    웃으며 배웅하는 윤정현을 뒤로한 채 박성범은 바를 나섰다.

    주차장까지 가는 길이 오늘따라 멀게만 느껴졌다. 터덜터덜 걸어서 차가 있는 곳까지 도착했는데 달갑지 않은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앞 범퍼 우측에 긁힌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어디에 부딪힌 기억은 전혀 없었다. 아마 누군가가 차를 빼면서 부주의로 긁은 것 같은데, 앞 유리창을 살펴봐도 명함이나 쪽지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핸드폰으로 온 연락도 없는 걸 확인하니 짜증이 절로 일었다.

    “양심껏 먼저 연락하면 얼마나 좋냐고. 어차피 영상 확인하면 다 나오는데.”

    박성범은 투덜거리며 스마트 키를 눌렀다. 운전석 쪽 손잡이로 손을 뻗은 것도 잠시, 한 잔이지만 술을 마셨다는 사실을 가까스로 상기해내고는 혀를 차고 말았다.

    취하기는커녕 간에 기별도 안 가는 수준이지만 차를 몰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놔두고 가자니 다시 찾으러 오는 게 번거롭고…….

    할 수 없이 전화번호부를 검색해서 대리운전을 불렀다. 어째 오늘따라 되는 일이 없는 기분이었다.

    * * *

    월요병은 비단 직장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다. 선잠을 자고 다시 일어났더니 누가 전신을 짓밟고 간 것처럼 몸이 무거웠다. 간신히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자 주방에 서 있는 박성범이 보였다.

    재경은 아침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괜히 어제 일 때문에 피한다는 느낌을 줄까봐 마지못해 식탁에 앉았다. 마주앉아서 일상적인 이야기를 꺼내는 박성범은 평소와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어영부영 식사를 마치고, 오늘은 오전 수업이 없는 녀석의 배웅을 받으면서 집을 나섰다. 그리고 혼자서 학교로 걸어가는데 마치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오늘도 변함없는 하루가 지나가고, 마지막 수업이 끝나자마자 재경은 호프집으로 직행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문이 잠겨 있었다.

    ‘화장실에라도 갔나?’

    5분 정도 기다렸지만 안에서 문이 열리는 일은 없었다. 결국 핸드폰으로 전화를 거는데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최용식이 나타났다. 한 손에는 묵직해 보이는 비닐봉지를 든 채였다.

    “벌써 왔어?”

    최용식은 곧 열쇠로 호프집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밀폐된 공간 특유의 텁텁한 냄새가 났다. 재경은 알아서 창문을 열고 환기부터 시켰다. 그런 다음 유니폼을 갈아입고 나오니 홀에 서 있던 최용식이 말을 걸었다.

    “속은 괜찮아? 어제 엄청 달린 거 같던데.”

    “괜찮아요.”

    “역시 젊음이 좋긴 하네. 근데 어제 너랑 같이 온 놈은 무슨 운동하는 애야? 갑빠가 장난 아니던데.”

    박성범을 일컫는다는 걸 깨닫고는 괜히 뻘쭘하게 대답했다.

    “저랑 같은 과예요.”

    “체육 전공이 아니라?”

    “네.”

    “당연히 몸 쓰는 쪽인 줄 알았는데 의외네. 평소에 운동을 존나 열심히 하는 건가.”

    이어서 사뭇 진지한 표정이 재경을 향했다.

    “나도 몸이나 좀 키워볼까?”

    “술부터 끊어야 할 거 같은데요.”

    “응. 그럼 포기.”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번에는 재경이 최용식에게 질문을 던졌다.

    “저 어제 뭐 실수한 건 없어요?”

    “나야 모르지. 같이 마신 녀석한테 물어봐.”

    그럴 수가 없다는 게 문제였다. 물어보면 말해주기야 하겠지만, 아직은 아무렇지 않게 어젯밤 일을 언급할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박성범의 성격으로 짐작건대 설령 제가 무슨 실수를 했더라도 ‘아무 일도 없었다.’며 웃어넘길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래서일까. 이래저래 계속 마음이 심란했다. 본래 지나간 일에는 연연해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이지만 어젯밤 일은 좀처럼 쉬이 떨칠 수가 없었다. 분명 먼저 잊자고 말한 사람은 박성범인데, 왠지 모르게 제가 잘못을 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형.”

    “응?”

    “술김에 서로 실수를 했는데……. 상대방이 먼저 없던 일로 하자고 하면 그래도 되는 거죠?”

    최용식은 고민도 하지 않고 명쾌하게 대답했다.

    “당연하지. 그쪽도 기억하거나 생각하기 싫으니까, 없던 일로 하자고 굳이 말한 거 아니겠어?”

    “……네.”

    “왜. 진짜 어제 무슨 실수라도 했어?”

    “아니에요.”

    둘이서 그렇고 그런 짓을 했다는 말은 절대로 할 수가 없었다. 최용식은 뭔가 미심쩍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재경의 얼굴에 떠오른 난감함을 보고는 더 깊이 캐묻는 대신 자연스럽게 말을 돌렸다.

    “참, 7시에 단체 예약 있어. 스무 명.”

    월요일부터 달리는 사람들이 있는 모양이었다. 알바 입장에선 사실 썩 달갑지 않은 상황이지만, 오늘은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얼른 청소기부터 가져와서 코드를 꽂는데 앞치마에 넣어둔 핸드폰이 띠링, 하며 울렸다.

    문자를 확인한 순간 안색이 절로 어두워졌다. 병원에서 미납 문자가 또 온 걸 보니 아직도 삼촌이 병원비를 납부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갑자기 굳은 채로 서 있는 모습이 이상했는지 최용식이 다가와서는 얼굴을 살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재경은 입술을 달싹였지만, 이내 아무것도 아니라며 웃어 보이고는 청소기를 돌리기 시작했다. 거듭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여윳돈이 있으면 최용식은 아마도 선뜻 빌려주겠지만, 가까운 사이이기 때문에 돈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더욱 조심스러웠다. 다행히 이틀만 있으면 알바비가 들어오니 그걸로라도 급한 불을 꺼야할 것 같았다.

    * * *

    뚜벅뚜벅, 조용한 복도에 발소리가 울렸다. 이윽고 재경은 현관문 앞에 이르렀다. 평소처럼 도어락 커버를 밀어올리고 비밀번호를 누르려던 것도 잠시, 안에서 희미하게 새어나오는 소리에 저도 모르게 손가락이 멈칫했다.

    ‘……거실에 나와 있나.’

    이후의 상황을 생각하니 새삼스러운 긴장감이 차올랐다. 문을 열었을 때 박성범이 보일 반응은 뻔했다. 늘 그렇듯 웃는 얼굴로 귀가 인사를 해주거나, 오늘은 좀 늦었다면서 살갑게 말을 걸겠지.

    사실 집에 올 때까지만 해도 재경은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오늘도 무척 바빴기에 얼른 가서 쉬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는데, 이제 곧 박성범과 마주친다고 생각하니 괜히 입안이 바짝 마르며 긴장감이 차올랐다.

    ‘자연스럽게 하자. 자연스럽게.’

    마른침을 한번 삼킨 뒤에 재경은 다시금 키패드로 손을 뻗었다. 그런데 숫자를 막 누르려는 순간, 다른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이 갑자기 진동하는 바람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액정을 켜보니 김성욱이 보낸 문자가 보였다.

    [어디ㅏ임?]

    뜬금없이 위치를 묻는 게 이상했지만 일단 재경은 순순히 답장을 보냈다.

    [알바마치고 집에 막 도착했어]

    [ㅇㅋ 빠리들어왘ㅋㅋㅋ]

    이상함을 눈치챈 것은 그다음이었다.

    ‘빨리 들어오라고?’

    설마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시선은 자연스레 바로 앞에 있는 현관문을 향했다. 뒤늦게 문을 열고 들어가자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 앞에서 답장한 거야?”

    김성욱이었다.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서니 거실 바닥에 나란히 앉아 있는 두 녀석이 보였다. 앞에 펼쳐진 좌식 테이블에는 치킨 박스와 맥주 등이 놓여 있었다. 곧 박성범도 웃는 얼굴로 말을 건넸다.

    “오늘 좀 늦었네.”

    “단체 손님이 늦게 빠졌어.”

    “고생했어.”

    다행히 자연스럽게 말을 섞었다는 사실에 재경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거의 동시에 김성욱이 치킨을 뜯으면서 말했다.

    “얼른 와서 앉아. 너 주려고 닭다리 하나 남겨놨어.”

    칭찬을 기대하는 눈빛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딱히 달갑지 않은 말이었다. 오늘따라 유독 하루가 길게 느껴져서 얼른 눕고만 싶었다.

    “니들끼리 먹어. 난 좀 전에 간식 먹고 왔어.”

    하지만 김성욱은 순순히 물러서지 않았다. 젓가락으로 치킨 박스를 뒤적여서 닭다리를 집어 들더니 이윽고 재경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그럼 안 되지. 둘이서는 잘만 마시면서, 나 있으니까 빠진다 이거야? 이거 봐. 진짜 다리 남겨놨단 말이야.”

    둘만 마셨다는 걸 알고는 전에도 꽤나 서운함을 토로한 전적이 있었다. 이번에도 거절하면 제대로 삐질 것 같다는 생각에 재경은 마지못해 한숨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았어. 옷만 갈아입고 올게.”

    “안 나오면 잡으러 갈 거야.”

    재경은 뒤늦게 자신의 방문을 열었다. 이제 슬슬 가을, 겨울옷도 좀 사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옷을 갈아입는데 등 뒤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반쯤 열린 문 너머에 박성범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티를 끌어 내리고 가까이 다가가자 미안한 표정으로 하는 말이 이어졌다.

    “피곤할 텐데 그냥 자. 김성욱은 내가 알아서 할게.”

    이럴 줄 알았으면 밖에서 마실 걸 그랬다는 말에 재경은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닭다리 남겨놨다는데 나가봐야지.”

    “나 빼고 다들 어디 갔어어~?”

    기막힌 타이밍으로 목청을 높여 외치는 말이 들려왔다. 재경은 그것 보라는 듯 어깨를 으쓱인 뒤에 박성범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손만 씻고 금방 나갈게.”

    “……알았어.”

    박성범이 먼저 거실로 돌아가고, 재경은 대충 씻은 다음 뒤늦게 합류했다. 앉자마자 김성욱이 닭다리를 내밀었다.

    “먹어.”

    “오냐.”

    TV 화면에서는 해외 축구 중계가 방영되고 있었다. 이내 긴 휘슬소리와 함께 시합이 종료됐고, 박성범이 팔짱을 풀며 김성욱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놔.”

    한마디만 들어도 어떤 상황인지 알 것 같았다. 둘이서 또 시합 결과를 두고 내기라도 한 모양이다. 예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김성욱이 몹시 뻔뻔해졌다는 거였다.

    “없어. 배 째. 배 째.”

    약 올리듯 한껏 배를 내미는 모습이 몹시도 밉살스러웠다. 저러다 식겁하지. 재경의 예상대로 박성범은 잠깐 김성욱을 바라보다가 한쪽 입가를 올리며 웃었다.

    “알았어. 한번 째보자.”

    “농담이야, 농담!”

    당장 일어서려는 박성범의 허리에 매달리며 김성욱은 금세 꼬리를 내렸다.

    “지금 진짜 돈이 없어서 그래. 내일 뽑아서 줄게.”

    하지만 박성범은 속지 않았다. 커다란 손으로 김성욱의 얼굴을 밀어내며 무덤덤하게 사실을 지적했다.

    “아까 지갑에 돈 들어 있는 거 다 봤어. 얼른 내놔.”

    “아냐. 교통카드밖에 없어.”

    “너 같으면 믿겠냐?”

    “당연히 믿지. 친구를 안 믿으면 누굴 믿겠어.”

    “다 믿어도 너는 안 믿어.”

    “……와 씨, 존나 마상이야.”

    그러면서 김성욱이 느닷없이 자신을 껴안는 바람에 재경은 흠칫했다. 취해서 달아오른 얼굴이 재경을 향했다.

    “저 자식 좀 혼내주라. 피도 눈물도 없는 새끼야.”

    “알았으니까 좀 떨어져.”

    재경은 대충 대답하며 팔꿈치로 김성욱을 슬쩍 밀어냈다. 말할 때마다 술 냄새가 섞인 뜨거운 숨결이 목이며 귓가에 와 닿는 탓이었다.

    순순히 밀려난 김성욱은 상 위에 있던 리모컨을 들고 채널을 돌리기 시작했다. 새 치킨 조각을 고르던 재경은 갑자기 들리는 요상한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순간 눈에 들어오는 장면을 보고는 멈칫했다. 벌거벗은 두 남녀가 침대 위에서 몸을 포갠 채로 격정적인 키스를 나누고 있었다.

    “오, 수위 쩔어. 가슴도 다 보여주네.”

    김성욱이 감탄사를 흘리며 화면에 집중했다. 재경은 자연스럽게 시선을 내렸지만 춥춥대는 마찰음과 배우들의 신음소리가 귀에 들어오는 것까지는 막을 수가 없었다.

    “딴 거 틀어.”

    “왜. 좋기만 하구만. 와…… 키스신도 존나 격렬하다.”

    키스.

    그 말이 들린 순간 재경은 이끌리듯이 주춤주춤 고개를 들었다. 김성욱의 말마따나 화면 속의 두 배우들은 계속해서 높은 수위의 장면을 연출하고 있었다. 특히 남자 배우는 여자 배우의 가슴을 마구 주무르며 무아지경으로 키스를 해댔다.

    머릿속에서 멋대로 어젯밤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강하게 부딪치던 입술, 혀가 얽히는 느낌, 축축하면서도 뜨거운 감각, 멋대로 새어 나오던 신음소리. 그리고…….

    “참.”

    “……!”

    갑자기 김성욱이 말을 거는 바람에 재경은 화들짝 놀라며 치킨을 떨어뜨렸다. 그 모습을 본 김성욱이 배를 잡고 낄낄댔다.

    “딴 거 틀라더니 존나 열심히 보기 있음?”

    “안 그랬어.”

    “안 그러기는. 입까지 벌린 채로 보고 있더구만.”

    “아니라니까.”

    “그럼 아니라 치고. 정혜 친구가 너 소개해달라고 했대. 도서관 앞에서 너랑 마주쳤다던데?”

    며칠 전에 김성욱의 여친과 우연히 마주친 적이 있긴 했다. 하지만 미안하게도 누가 옆에 있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았다.

    “나 그런 데 관심 없는 거 알잖아.”

    “알지. 그래서 내 선에서 적당히 둘러댔는데, 방금 네가 넋 놓고 텔레비전 쳐다보는 거 보고 갑자기 생각나서 물어본 거야.”

    “넋을 놓긴 누가 놨다고 그래.”

    “누구긴 누구야. 너님이지.”

    또 한 번 낄낄대며 웃은 김성욱이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는 말을 이었다.

    “영교과 3학년이고 귀염성 있게 생겼어. 정혜 친구니까 인성은 볼 필요도 없을 거고. 근데도 생각 없어?”

    “없어.”

    재경은 리모컨을 들어서 채널을 바꿨다. 그러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치킨을 뜯자 김성욱은 재미없는 놈이라며 투덜대다가 금세 타깃을 바꿨다. 그 타깃은 물론 박성범이었다.

    “너도 아직 솔로야?”

    “어.”

    김성욱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았다.

    “둘 다 멀쩡하게 생겨가지고 대체 왜 애인이 없냐고. 놀이공원에서 더블데이트하는 게 우리 여보야 소원이라는데.”

    더블데이트라니, 생각만으로도 손발이 오글거렸다. 물론 속으로만 하는 생각이었고, 그새 김성욱은 다시금 박성범에게 질문을 이어갔다.

    “이재경이야 그렇다 쳐도 넌 대체 왜 여친이 없어?”

    “휴식기도 있고 그런 거지 뭐.”

    “그 휴식기 존나 긴 거 아님? 방학 전에 깨졌다면서.”

    재경은 저도 모르게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약간의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방학 전에 깨졌다고? 게이인데도 여자친구를 사귈 수가 있나? 아니, 사귈 수는 있겠는데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

    궁금하지만 무엇 하나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물을 수는 없었다. 그동안에도 김성욱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아님 내가 정혜한테 괜찮은 애 좀 소개해달라고 할까?”

    “됐어. 굳이 그렇게 안 해도 알아서들 다가오니까.”

    “……재수 없는 새끼.”

    김성욱은 금세 입술을 삐죽거리며 박성범의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시늉을 했다. 중얼거리는 듯한 목소리가 이어진 것은 그다음이었다.

    “옆구리가 시리긴 하네.”

    “……!”

    재경의 어깨가 흠칫했다. 힐끔 옆을 쳐다보니 소파에 등을 기댄 채로 살짝 시선을 내리깔고 있는 박성범의 옆모습이 보였다. 그러다 갑자기 눈이 마주치는 바람에 재경은 후다닥 고개를 돌렸다. 뒤늦게 아차 싶었지만 다시금 그쪽을 바라보기도 그랬다.

    “슬슬 정리하고 자자.”

    “벌써? 아직 한 시도 안 됐는데?”

    “내일 1교시 수업 있어. 이불 줄 테니까 거실에서 자.”

    먼저 일어서는 박성범의 다리를 붙잡으며 김성욱이 위를 올려다봤다.

    “네 침대에서 재워주라. 바닥은 딱딱해서 싫어.”

    “전에는 바닥에서도 잘 잤잖아.”

    “그땐 취해서 그냥 기절한 거지.”

    “그럼 오늘도 그 정도로 퍼마시고 자.”

    “후후, 그렇게는 못 하지. 된다고 할 때까지 안 놔줄 거임.”

    김성욱은 여봐란듯이 박성범의 다리를 더욱 힘껏 껴안았다.

    밝게 염색한 갈색 머리를 내려다보는 박성범의 얼굴에 한심하다는 기색이 가득했다. 코알라가 매달리면 귀엽기라도 하지, 이건 뭐…….

    다리를 흔들어봤지만 묵직한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박성범은 뒷머리를 긁적이다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나 잘 때 홀딱 벗고 자. 그래도 상관없으면 같이 자든가.”

    사실을 말했지만 김성욱은 믿지 않았다.

    “존나 창의력 없는 개뻥이다. 크크.”

    “뻥 아니고 진짜야. 못 믿겠으면 재경이한테 물어보든가.”

    느닷없이 언급된 이름에 재경은 깜짝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장난스럽게 아래를 바라보는 박성범과 눈이 마주쳤다. 동시에 같은 눈높이에 있는 김성욱의 시선도 이쪽을 향했다.

    “진짜야?”

    “어?”

    “다 벗고 잔다는 거 진짜냐고.”

    “어…….”

    “에이씨.”

    김성욱은 곧바로 박성범의 다리에서 손을 뗐다. 존나 이상한 습관이라며 투덜대던 것도 잠시, 이내 게슴츠레한 시선이 재경을 향했다.

    “근데 넌 어떻게 알아? 이 새끼 잘 때 다 벗고 자는 거.”

    “……!”

    순간 당황해서 말문이 막힌 재경을 대신해서 박성범이 심드렁한 어투로 대답했다.

    “아침에 화장실 가다가 마주쳐서 그래.”

    “홀딱 벗은 채로?”

    “어.”

    “어우씨, 상상만 해도 토 쏠려.”

    김성욱이 장난스럽게 몸을 부르르 떠는 시늉을 했다. 그런 놈의 등짝을 발로 밀어내며 박성범이 물었다.

    “그래도 내 방에서 같이 잘 거야? 존나 꼭 껴안아줄 수 있는데.”

    “안 자. 안 자. 거실에서 잘 거야. 으, 소변 마려.”

    자리에서 일어난 김성욱은 제집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화장실로 향했다. 덕분에 거실에는 두 사람만 남게 됐다. 재경은 애써 덤덤한 척 상을 치우며 박성범에게 물었다.

    “얼마 주면 돼? 치킨값.”

    박성범도 뒷정리를 도우며 대답했다.

    “우리 집에서 먹고 싶다길래 김성욱한테 쏘라고 했어.”

    “잘했어. 내가 치울 테니까 들어가서 자.”

    갑자기 시선이 느껴져서 재경은 옆을 돌아보았다. 빙긋이 웃고 있는 박성범과 눈이 마주쳤다.

    “……왜 웃어?”

    “그냥. 부지런하다 싶어서.”

    “안 치우고 자면 냄새나잖아.”

    “전에도 그렇게 말했었어.”

    대꾸할 말이 없어진 재경은 먼저 고개를 돌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내일 보자.”

    “어. 잘 자.”

    잠시 후에 재경은 김성욱과 교대하듯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양치질을 하고 나와서, 그새 자리를 잡고 누운 김성욱에게도 인사를 한 뒤에 방으로 들어갔다.

    달칵-

    닫힌 방문에 등을 기대며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바로 앞에 있는 침대에 시선이 닿은 순간 조건반사처럼 얼굴이 슬쩍 달아올랐다. 이내 머릿속 생각을 훌훌 털어내며 재경은 쓰러지듯 침대 위로 몸을 뉘었다. 다시 생각해도 오늘 하루는 참으로 길게만 느껴졌다.

    * * *

    함께 어울리는 시간이 많아지거나, 소속감을 주는 무리에 어울리게 되면 자연스럽게 규칙 아닌 규칙이 만들어지곤 한다. 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딱히 대화를 나누거나 규칙을 정한 것도 아닌데, 언제부턴가 아침 식사는 박성범이 준비하고 뒷정리는 재경이 하는 게 일상이 되어버렸다.

    설거지를 끝낸 재경은 부랴부랴 방으로 돌아갔다. 오늘은 둘 다 1교시 수업이 있는 날이었다. 바꿔 말하면 박성범의 차를 타고 함께 가는 날이었고, 가방과 핸드폰을 챙겨서 밖으로 나오니 다행히 녀석의 모습은 아직 보이질 않았다.

    소파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으니 잠시 후에 박성범이 거실로 나왔다.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돌렸다가 재경은 멈칫했다. 위아래로 검은색 슈트를 갖춰 입은 박성범의 모습이 보였다.

    뒤늦게 이유를 깨달았다. 오늘은 ‘대학 영어’ 강의 시간에 재경이 속한 그룹이 발표를 하는 날이었다.

    “오랜만에 입으니까 확실히 어색하네. 어때?”

    제 몸을 내려다보던 박성범이 고개를 들며 물었다. 재경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뒤늦게 대답했다.

    “평소랑 분위기가 다르긴 하네.”

    “에이, 그게 다야?”

    “……나가자. 시간 다 됐어.”

    더 큰 반응을 기대하는 듯했지만 재경은 못 알아들은 척하며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속으로는 내심 놀랐다. 평소에도 박성범은 옷을 잘 입고 다니는 편이지만, 정장을 갖춰 입은 모습을 보니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잘나가는 증권사 직원 같은 느낌이었다.

    곧 두 사람은 나란히 현관문을 나섰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기다리는데 갑자기 박성범이 바지 주머니를 차례로 더듬듯 만졌다.

    “왜 그래?”

    “차 키 안 가져온 거 같아. 얼른 갔다 올게.”

    그새 엘리베이터는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바뀌는 숫자를 의미 없이 바라보고 있는데 코 안쪽이 간질간질하며 재채기가 터져 나왔다.

    “에, 에취!”

    연거푸 재채기를 한 뒤에 재경은 코를 훌쩍였다. 목이 따갑다거나 기침이 나오지는 않지만, 손등을 이마에 대보니 미열이 있는 것 같긴 했다.

    ‘얼른 옷부터 사야겠네.’

    이윽고 엘리베이터가 멈춰 서며 문이 열렸다. 재경은 열림 버튼을 누른 뒤에 복도 쪽을 쳐다봤다. 잠깐 기다려도 안 나오면 손을 뗄 생각이었는데 다행히 금세 문이 열리며 박성범이 밖으로 나왔다.

    박성범은 핸드폰을 손에 쥔 채로 통화하는 중이었다. 어서 오라고 손짓을 했더니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고, 두 사람은 나란히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아뇨. 오후엔 안 돼요.”

    나지막하게 들리는 목소리에 재경은 슬쩍 옆을 쳐다봤다. 벽에 등을 기대고, 한 손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로 통화를 하는 옆모습이 보였다. 저도 모르게 상대의 얼굴에 시선이 고정됐다. 과하지 않게 세팅한 머리카락, 우뚝한 콧날, 핸드폰을 들고 있는 손, 말할 때마다 움직이는 입술…….

    땡-!

    도착 알림음에 재경은 흠칫 놀라며 앞을 쳐다봤다. 괜히 제풀에 찔려서 성큼성큼 먼저 걸어갔더니 뒤에서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차 이쪽에 있어.”

    쭈뼛대며 왔던 길을 되돌아가자 박성범이 락을 해제하며 운전석 문을 열었다.

    “저 이제 학교 가야 돼요. 7시쯤에 한번 들를게요. 네, 들어가세요, 형.”

    전화를 끊은 뒤에 박성범은 차를 출발시켰다. 평소엔 학교에 거의 다 왔을 무렵에만 한 번씩 신호에 걸리는데, 오늘은 빌라에서 나오자마자 빨간 신호가 보였다. 이윽고 차 안에 음악이 흘러나왔다.

    “이 노래 어떤 거 같아?”

    “좋아.”

    가사는 들리지 않는 걸 보니 MR을 튼 것 같은데 리듬이 경쾌하면서도 익숙한 느낌을 주는 곡이었다. 계속 듣고 있으니 박성범이 하는 말이 이어졌다.

    “이거 내가 만든 거야.”

    그 말에 재경은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네가 만들었다고?”

    “어. 기억할지 모르겠는데, 전에 한번 취미랑 직업 중간 즈음에 걸쳐서 하는 일이 있다고 말한 적 있잖아. 그게 이거야. 노래 만드는 거.”

    박성범이 핸드폰을 만지자 곡이 바뀌며 다른 노래가 흘러나왔다. 전주부터 귀에 몹시 익숙한 노래였다.

    “혹시 이건 알아?”

    “어. 알바할 때 많이 들어봤어.”

    이내 뇌리를 스치는 생각에 재경은 설마 하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이것도 네가 만든 거야?”

    “어. 편곡은 같은 팀 형이 많이 손봐주긴 했는데 기본 작업은 내가 다 했어. 앗, 신호 바뀌었다.”

    잠깐 멈췄던 차가 다시금 출발했다. 학교에 도착한 것은 금방이었다. 수업은 다르지만 건물은 같아서 나란히 걷는데, 경영관에 들어선 순간부터 시선이 쏟아졌다. 자판기 앞에 서 있던 남학생이 두 사람을 발견하고 먼저 말을 걸었다. 같은 학부 동기인 양재현이었다.

    “왔냐?”

    “어.”

    “근데 웬 정장이야? 장례식장에라도 갔다 왔어?”

    “어딜 봐서 장례식장 차림이야, 이게. 발표 수업 있어서 입고 왔어.”

    “뭔 발표길래 이렇게 빼입고 와? 암튼 까리하긴 하다. 애들 보면 난리 나겠네.”

    양재현의 예상은 정확했다. 2교시 수업을 마친 뒤, 재경은 박성범과 함께 건물을 나섰다. 다들 조금 일찍 모여서 마지막 리허설을 해보기로 했기 때문에 같이 점심을 먹고 강의실로 가기로 한 탓이었다.

    그런데 나오자마자 이쪽을 힐끔 쳐다보는 시선들이 마구 쏟아졌다. 식당으로 가는 길에도, 줄을 서서 기다릴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중 일부는 박성범에게 말을 걸면서 양재현과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밥을 먹는 동안에도 상황은 비슷했다. 식사 시간이 그리 길었던 것도 아니다. 길어봤자 15분 남짓이었을 텐데, 어찌 박성범을 알아보고 다가온 사람들 때문에 재경은 흡사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후배들이 재경에게도 덩달아 인사하거나 말을 걸어댄 까닭이었다.

    간신히 식사를 마치고 나왔지만 안도하기에는 아직 일렀다.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나머지 세 사람이 먼저 와 있었고, 박성범을 보자마자 다들 약속한 것처럼 감탄을 쏟아냈다.

    “와, 성범 오빠 완전 멋져요!”

    “이대로 드라마 촬영장에 가셔도 되겠는데요?”

    “너무 띄워주는 거 아냐?”

    장난스럽게 대답하며 박성범도 자리에 착석했다. 시간을 확인한 이보라가 팀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15분밖에 안 남았으니까 나가서 한번 맞춰봐요. 소품 착용하고요.”

    눈에 익은 앞치마와 고무장갑이 재경에게 건네졌다. 연습인데 굳이 지금 착용해야 하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어차피 이보라를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에 금세 포기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습은 순조로웠다. 그새 강의실로 들어온 학생들의 시선이 느껴지긴 했지만, 어차피 곧 있으면 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발표를 해야 되기 때문에 신경 쓰기 않기로 했다. 대략 5분 뒤에 박성범의 마무리 멘트로 발표가 끝나자 곳곳에서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자리로 돌아간 뒤에 이보라가 생긋이 웃으며 재경에게 말을 걸었다.

    “반응 되게 좋을 거 같지 않아요?”

    “그러게.”

    주이판이 중국어로 멘트를 치기 시작했을 때 확실히 웃음소리가 들리긴 했다. 섣부르다면 섣부른 판단일 수 있겠지만, 다들 연습을 많이 했는지 실수도 거의 없었던 걸 생각하면 좋은 점수를 기대해봐도 좋을 듯했다.

    「좋은 오후입니다.」

    정각 1시에 문이 열리며 교수가 들어왔다. 출석부터 먼저 부른 뒤에 교수는 맞은편의 학생들을 바라보며 운을 뗐다.

    「오늘 발표할 팀원들, 준비됐습니까?」

    「네! 준비됐습니다.」

    이보라가 손을 들며 씩씩하게 대답했다. 교수는 웃는 얼굴로 어서 나오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팀원들은 각자 소품을 챙겨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단상 쪽으로 걸어가는 동안 재경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자신의 대사를 되뇌며 체크했다.

    자신만 쳐다보는 것은 물론 아니겠지만, 시선이 집중되니 괜한 긴장감이 차올랐다. 그와 달리 박성범은 학생들을 둘러보면서 여유롭게 말문을 열었다.

    「오늘 첫 발표를 맡게 된 ACE조입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 * *

    강의실 문을 열고 나오기 무섭게 이보라가 예스를 외치며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얼굴에는 웃음꽃이 활짝 폈다.

    “보셨죠? 저희 전부 다 A 받은 거요!”

    “그동안 열심히 한 보람이 있네요.”

    재경은 속으로 주이판의 말에 동의했다.

    박성범이 내레이션을 시작할 때만 해도 재경은 다소 긴장했지만, 자신의 차례가 되었을 때 침착하게 세탁기를 돌리는 시늉을 하며 대사에 집중했다. 다행히 혀가 꼬이거나 버벅거리지 않고 무사히 맡은 파트를 끝냈고, 다른 팀원들도 큰 실수 없이 잘해냈다. 덕분에 박성범이 마무리 멘트를 하고 다 함께 인사를 했을 때 학생들로부터 큰 호응을 받을 수 있었다.

    강의가 끝난 뒤에 교수는 오늘 발표한 팀원들을 남게 해서 점수를 확인시켜줬다. 재경은 떨리는 마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찾았고, 팀원들 전원이 A를 받은 것을 확인하고는 감사하다며 인사한 뒤에 강의실을 나섰다.

    “공익 광고 쪽으로 가닥을 잡은 게 신의 한 수였던 거 같아요. 보니까 B랑 C 받은 사람들도 수두룩하더라고요.”

    최창섭의 말에 이보라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다들 그동안 너무 수고하셨어요. 뭔가 종강한 것처럼 시원섭섭하네요.”

    “저도요. 자축하는 의미로 주말에 다 같이 한번 모일까요?”

    “좋죠. 근데 저는 토요일 7시 이후에 시간이 날 거 같아요.”

    “난 상관없어.”

    “나도.”

    기시감이 있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마지막으로 재경이 대답하려는 순간, 또다시 코가 간질간질하며 재채기가 나왔다. 재경은 서둘러 고개를 돌리며 재채기를 했다. 다시 앞을 보자마자 이보라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얼굴을 들여다봤다.

    “오빠, 감기 걸리셨어요?”

    “아니. 그냥 재채기만 한 거야.”

    “그럼 다행이구요. 암튼 재경 오빠는 토요일에 시간 괜찮으세요?”

    “미안한데 토요일은 힘들 거 같아. 대신 일요일은 가능해.”

    토요일에 경수 과외 수업이 끝나면 오랜만에 할아버지를 뵈러 갈 생각이었다. 버스가 자주 오는 편도 아니고, 가는 데만 한 시간이 넘게 걸리기 때문에 저녁에 시간을 내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그럼 일요일에 보는 걸로 하고, 시간은 나중에 합의해서 정해요. 다음 수업 때문에 시간이 빠듯해서요.”

    재경도 다음 수업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헤어진 뒤에 각자 갈 길을 가는데, 박성범이 옆에서 걸으며 말을 붙였다.

    “진짜 감기 걸린 거 아냐?”

    “아냐.”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안 좋다 싶으면 병원에 빨리 가. 요즘 환절기라서 감기 환자들이 많다더라.”

    “알았어.”

    “뒤에 수업 하나 더 있지?”

    “어.”

    “난 오늘은 끝나서 가려고. 나중에 집에서 보자.”

    재경의 어깨를 가볍게 툭툭 두드린 뒤에 박성범이 먼저 걸음을 옮겼다. 길을 건너자마자 누군가가 가까이 다가오더니 금세 나란히 걸어간다. 잠깐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애꿎은 코 밑을 슥슥 문지르며 재경도 뒤늦게 건물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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