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7/22)

7.

오랜만에 ‘대학 영어’ 멤버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세미나실에서 수다를 떨며 기다리고 있으니 최창섭이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제일 늦게 나타났다. 모든 멤버가 착석하자 리더인 이보라가 오늘도 자진해서 진두지휘를 맡았다.

“각자 맡은 파트는 다 외워 오신 거죠?”

“넵!”

“그럼 일단 리딩부터 한번 해봐요, 우리.”

각자 손에 든 대본으로 시선이 향했다. 첫 시작은 내레이션을 맡은 박성범이었다. 대사가 적힌 종이를 보며 첫마디를 떼는 순간 이보라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재경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든 말든 박성범은 자신이 맡은 부분을 막힘없이 술술 읽었고, 리딩이 끝나자마자 이보라가 말을 걸었다.

“와, 오빠 발음 되게 좋으시네요. 혹시 유학이나 어학연수 다녀오셨어요?”

“어릴 때 외국에서 잠깐 살다 왔어.”

“와, 진짜요? 어디에 있었는데요?”

금세 이야기꽃을 피우는 동안 재경은 묵묵히 캔 음료를 마셨다. 어릴 때 외국에서 살다 왔다니 금시초문이었다. 새삼 녀석에 대해서 아직 모르는 게 많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잠시 엇나갔던 궤도가 돌아오며 연습이 재개됐다. 한 차례 리딩을 끝낸 뒤에 이보라가 묵직해 보이는 종이 가방을 탁자 위에 올렸다. 하나씩 밖으로 나오는 물건들을 보면서 주이판이 의아한 듯 물었다.

“그건 뭐야?”

“소품도 활용하면 좋을 거 같아서 챙겨 왔어.”

이보라는 빠른 손놀림으로 소품들을 나누어 주었다. 자신에게 배당된 것을 확인한 재경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이보라를 쳐다봤다.

“이게 내 거라고?”

“네. 세제 팍팍 쓰는 전업 남편이잖아요.”

그렇긴 한데…….

재경의 시선이 거듭 테이블 위를 향했다. 빨간 고무장갑과 네모반듯하게 개켜진 앞치마를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앞치마를 펼쳐보았다. 그 순간 더더욱 인상이 찌푸려졌다. 가슴 부근에 커다란 토끼 얼굴이 그려진 걸 발견한 까닭이었다.

“꼭 입어야 돼?”

“강요는 안 해요. 그래도 준비성 점수가 있으니까 하는 게 더 좋지 않을까요? 발표 때문에 일부러 산 건데.”

그러니 입었으면 좋겠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재경은 뒷머리를 두어 번 긁적이다가 결국 승낙했다.

“알았어.”

“와, 고마워요, 오빠.”

이보라는 매우 기뻐하며 다른 멤버들에게도 소품에 대한 설명을 해주었다. 팀원 중 유일하게 박성범만 빈손이었다. 아나운서처럼 가만히 서서 내레이션만 하기 때문이었는데, 대신 발표 당일에 정장을 입고 오기로 합의를 봤다.

“그럼 저희 나가서 한번 맞춰봐요. 소품도 착용하고요.”

그 말에 또 다른 피해자인 최창섭이 울상을 지었다. 그의 앞에는 긴 생머리 가발이 놓여 있었다.

“다음에 하면 안 돼요?”

“오늘 전부 모일 수 있대서 일부러 챙겨 온 거야. 나 이제 주말에 시간 빼기 어렵거든. 성의를 봐서라도 한 번만 해보면 안 될까?”

두 손을 모으며 부탁하는데 계속 싫다고 할 수가 없었다. 결국 최창섭은 가발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고, 재경도 앞치마와 고무장갑을 챙겨 들고 세미나실 앞으로 나갔다.

앞치마는 허리에 끈이 달려 있고, 등 부분에는 소위 말하는 찍찍이를 붙이도록 되어 있었다. 일단 목부터 건 뒤에 찍찍이를 붙이려고 끙끙대고 있으니 그 모습을 본 박성범이 가까이 다가왔다.

“뒤돌아봐봐. 내가 해줄게.”

시키는 대로 돌아서자 박성범은 재경이 엉성하게 붙인 찍찍이를 다시 제대로 붙여주었다. 이왕 도와주는 김에 허리끈도 묶은 다음, 손을 떼며 재경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잘 어울리네.”

“그럼 네가 할래?”

“아쉽지만 나는 세제 펑펑 쓰는 남편이 아니라서.”

전혀 아쉽지 않은 투로 웃으며 하는 말에 재경은 울컥했지만 딱히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 그사이 다른 조원들도 준비를 마치고 본격적인 연습을 시작했다.

첫 타자는 어김없이 박성범이었다. 우측에 자리를 잡고 선 박성범은 정면을 보며 여유롭게 본인의 대사를 소화했다. 이어서 문제의 장면 차례가 되었다.

「허니? 나 왔어요.」

소품을 보며 난감해했을 때는 언제고, 막상 연습이 시작되니 최창섭은 긴 머리 가발을 마치 본인의 머리카락처럼 귀 뒤로 한껏 쓸어 넘기며 허니를 부르기 시작했다.

재경은 입술을 꾹 깨물고 웃음을 참았다. 빈 세제 통을 기울여 세탁기 안에 들이붓는 연기를 하고 있으니 최창섭이 세탁실 문을 여는 척하며 가까이 다가왔다.

「허니, 여기 있었……. 어머 여봇! 지금 뭐 하는 거예요?!」

“풉, 크큭……. 푸하하하!”

결국 참았던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다들 기다렸다는 듯 배를 잡고 웃어댔고, 평소에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주이판도 잇몸을 활짝 드러내 웃으며 물개 박수를 쳤다.

이후로도 서너 번의 고비가 찾아왔다. 최창섭이 비음 섞인 목소리로 허니를 연발할 때마다 웃음이 터질 것 같았지만 재경은 꾹 참아내며 연습에 몰두했다.

나중엔 어느 정도 익숙해져서 자연스럽게 대사를 받아칠 수 있었다. 마지막까지 무사히 끝나자 이보라는 몹시 좋아하며 흡족하게 웃었다.

“다들 정말 잘하셨어요. 실전 때도 이렇게만 해요, 우리.”

두 번 더 합을 맞춰본 뒤에 오늘 연습은 여기까지 하기로 했다. 나란히 계단을 내려가는데 오늘의 일등공신이나 다름없는 최창섭이 말을 꺼냈다.

“다 같이 밥 먹으러 갈까요? 아님 술도 좋고요.”

“완전 좋지!”

“나도 찬성.”

다들 동의한 가운데 재경만 남았다. 저번처럼 시선이 쏟아지기 전에 재경은 자진해서 대답했다.

“나도 갈 수 있어.”

“정말요? 잘됐다. 그럼 우리 뭐 먹으러 갈까요?”

금세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녀석들을 뒤따라 걷는데 갑자기 핸드폰이 진동하며 전화가 왔다. 액정을 본 재경은 서둘러 통화 버튼을 눌렀다. 할아버지가 입원해 있는 요양 병원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여보세요?”

- 안녕하세요, 여기 상록수 요양병원입니다. 혹시 이귀남 할아버님 보호자 분 맞으신가요?

“네. 맞습니다.”

정식 보호자는 삼촌이지만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재경의 연락처도 남겨두었다. 간단한 확인 절차를 거친 뒤에 원무과 직원은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 이상근 보호자님께서 계속 전화를 안 받으셔서 이 번호로 연락드렸어요. 다름이 아니라, 지금 할아버님 병원비가 두 달째 미납 중이에요.

그 말에 재경은 저도 모르게 핸드폰을 고쳐 잡았다.

“미납이요?”

- 네. 월말까지 납부가 안 되면 강제 퇴원 조치 될 수 있으세요.

“……알겠습니다. 제가 한번 알아보고 다시 연락드릴게요.”

- 네.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자마자 옆에서 나란히 걷던 박성범이 물었다.

“무슨 일 있어?”

“……아무것도 아냐.”

머잖아 또 한 번 재경의 핸드폰이 울렸다. 병원에서 다시 건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재경은 잠깐 액정을 쳐다보다가 전화를 받았다.

“어, 경수야.”

- 혀엉…….

전화를 받자마자 울먹이는 목소리가 흘러나와서 재경은 다급하게 되물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 엄마랑 아빠랑 계속 싸워서, 친구랑 도서관 간다 하고 밖에 나왔어. 나 지금 형 보러 가면 안 돼?

잔뜩 풀 죽어 있을 모습이 눈에 선했다. 재경은 짤막한 한숨을 내쉰 뒤에 대답했다.

“차비는 있어?”

- 응.

“그럼 지하철역으로 가서……. 아니다. 길 건너지 말고 버스 타서 시청 앞에서 내려. 내린 다음에 형한테 다시 전화해.”

- 그럼 형네 학교 갈 수 있어?

“어. 중간에 한 번 갈아타야 되니까 일단 시청에서 내린 다음에 전화해.”

- 알았어, 형.

통화를 끝낸 재경은 앞서가던 녀석들을 불러서 사정을 설명했다.

“미안한데 난 못 갈 거 같아.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겼어.”

“그래요?”

“다음에 같이 가자. 그럼 먼저 가볼게.”

어리둥절해 하는 사람들을 뒤로한 채 재경은 빠른 걸음으로 길을 가로질렀다.

* * *

뉘엿뉘엿 해가 저물며 노을이 퍼졌다. 또 한 대의 버스가 정류장을 떠나갔지만 재경은 요지부동이었다. 틈틈이 시간을 확인하면서 버스가 오는 방향을 주시하고 있으니 마침내 기다리던 버스가 코너를 돌며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곧 문이 열리며 승객들이 내렸다. 그중엔 경수도 있었다. 정류장에 서 있는 재경을 발견한 경수가 큰 소리로 외쳤다.

“형!!!”

보자마자 와락 껴안는 바람에 재경의 몸이 살짝 휘청거렸다. 곧 경수의 머리를 가볍게 토닥여주며 녀석과 시선을 마주했다.

“잘 찾아왔네.”

“응. 형이 알려준 대로 길 건너자마자 버스가 와서 바로 탔어.”

“잘했어.”

혼자서 잘 찾아올 수 있을지 걱정했는데 다행히 괜한 기우였던 모양이다. 재경은 곧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저녁을 먹기엔 살짝 이른 시간이지만, 카페보다는 식당에 먼저 가는 게 나을 듯했다.

“밥은 먹었어?”

“아까 점심 먹었어.”

순진하다면 순진한 대답에 재경은 피식 웃고 말았다.

“점심 말고 저녁 말이야.”

“저녁은 아직 안 먹었어.”

“그럼 형이랑 밥 먹으러 가자. 먹고 싶은 거 있어?”

“음……. 돈가스 아니면 스파게티?”

“하나만 골라. 더 먹고 싶은 걸로.”

“그럼 돈가스 먹을래.”

재경은 곧 경수를 데리고 학교 근처 식당으로 향했다. 몇 시에 점심을 먹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경수는 돈가스를 보자마자 무척 좋아하며 맛있게도 먹었다. 재경은 김밥 두 줄로 배를 채운 다음 경수가 밥을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식사 자리에서 할 말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식사를 마친 뒤에 장소를 옮겨 근처 카페로 들어갔다. 진동 벨과 교환한 트레이를 들고 자리로 돌아오자 핸드폰 게임을 하고 있던 경수가 고개를 들었다. 재경은 아이스 초코를 녀석 앞에 놓아준 뒤에 차분한 목소리로 본론을 꺼냈다.

“숙모랑 삼촌, 많이 싸웠어?”

“……응.”

경수의 얼굴에 금세 시무룩한 기색이 떠올랐다. 애꿎은 손가락을 꼼질대며 장난치다가 풀 죽은 목소리로 오늘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집에서 컴퓨터 게임하고 있는데 아빠가 갑자기 집에 들어왔어. 술 취한 목소리로 막 뭐라 하길래 얼른 끄고 자는 척했어.”

보지 않아도 머릿속에 훤히 그려졌다. 더불어 소리 없는 한숨이 흘러나왔다. 삼촌은 본래도 성격이 괄괄하고 사나운 편인데 술이 들어가면 한층 더 난폭해졌다. 재경도 그 집에서 살 땐 술에 취한 삼촌으로부터 폭언과 욕설을 여러 번 들어야만 했다.

“좀 이따 엄마가 막 화를 냈는데, 아빠도 욕하면서 소리 지르고 계속 싸웠어. 귀를 막아도 계속 들려서……. 도서관에 간다 하고 도망쳐 나왔어.”

“뭐 때문에 싸우신 거 같아?”

“돈 때문이지 뭐. 그 인간한테 또 투자했냐고 하면서 엄마가 엄청 화냈거든.”

경수만큼이나 재경의 기분도 가라앉았다. 머리가 욱신거리며 두통이 절로 일었다. 자세한 내막은 알지 못하지만, 투자 어쩌고 하는 말이 들렸다는 걸 보면 삼촌이 또 사업을 하겠답시고 돈을 끌어 썼다가 날려먹은 모양이었다. 그러니 병원에서도 미납 안내 전화가 걸려온 것일 테고.

거듭 한숨이 차올랐다. 고개를 푹 숙이며 미간을 누르는데 조심스럽게 말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형.”

고개를 들자 우물쭈물하며 이쪽을 바라보는 경수와 눈이 마주쳤다.

“나, 형이랑 같이 살면 안 돼?”

“뭐?”

“집에 들어가기 싫어. 형이랑 같이 살고 싶어. ……아니면 형이 집으로 다시 들어오면 안 돼?”

순진하게 묻는 경수를 보면서 재경은 입안이 씁쓸해짐을 느꼈다.

스무 살이 되자마자 집을 나온 이유는 삼촌 때문이었다. 대학교 합격 소식을 알렸을 때 숙모는 이유야 어떻든지 간에 기뻐하기라도 했지만 삼촌은 그런 것도 없었다. 어느 날, 늘 그렇듯 불퉁한 얼굴로 대뜸 방문을 열고 들어와서는 이제 성인이니 따로 나가서 살 것을 대놓고 요구했다.

다행히 기숙사에 합격하고, 정부에서 운행하는 대출을 받아서 길거리에 나앉는 꼴은 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재경은 그 이후로 한동안 불안함과 공허함에 시달려야만 했다. 돌아갈 수 있는 ‘집’이 없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상당한 두려움을 자아낸다는 것을 재경은 뼈저리게 깨달았다.

경수는 자신이 왜 집을 나왔는지 모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러니 다시 들어오라고, 같이 살자고 하는 거겠지.

말간 눈망울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심란했다. 하지만 이내 머릿속 생각을 훌훌 털어내며 재경은 일부러 가벼운 어조로 대답했다.

“거리가 너무 멀어서 안 돼. 그리고 형 이제 취업 준비해야 돼서 집에 있을 시간도 없어.”

“그래도…….”

“사실 지금도 엄청 바빠. TV 같은 거 보면 대학생들은 되게 한가해 보이지?”

“응.”

“근데 절대 안 그래. 수업 끝나고, 알바하고 집에 들어가면 맨날 밤 열두 시야. ……아무튼 같이 사는 건 안 되고, 다음에 형이 취직해서 좋은 집 구하면 자주 놀러 와.”

축 처지는 작은 어깨가 보였지만 이 이상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이제 그만 가자고 하려는데 테이블에 놓인 경수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전화가 왔는데도 머뭇거리며 받지 않는 걸 보고 재경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야?”

“……엄마.”

“얼른 받아.”

경수는 받기 싫어하는 눈치였지만, 눈에 힘을 주고 핸드폰을 가리키자 마지못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아까 도서관에 간다고 말했잖아.”

숙모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정황상 지금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 모양이었다. 잠시 후에 전화를 끊는 경수를 보며 재경은 곧장 백팩을 챙겨 들었다.

“가자. 버스정류장까지 데려다줄게.”

“조금만 더 있다 가면 안 돼?”

“안 돼. 너 안 들어오니까 걱정돼서 전화하신 거잖아.”

“…….”

“맞지?”

침묵이 대답을 대신해주었다. 재경은 경수의 어깨를 두드려준 뒤에 그대로 손을 올리고 카페를 나섰다.

잠깐 기다리니 집으로 가는 버스가 왔다. 승객을 태운 버스는 빠르게 멀어졌고, 경수를 보낸 재경은 집으로 돌아가는 대신 정류장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핸드폰 통화 목록에서 숙모를 찾았다. 한동안 액정을 바라보고 있던 재경은 결국 통화 버튼을 누르는 대신 긴 한숨을 흘리며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말았다.

‘전화하면 뭘 어쩔 건데.’

저에게는 쌀쌀맞은 숙모도 배 아파 낳은 자식인 경수는 몹시 아꼈다. 그런 녀석이 집에 있는데도 삼촌과 언성을 높이며 다툴 정도면 보통 화가 난 게 아니라는 뜻이었다. 더군다나 경수도 아직 밖에 있는데……. 이런 상태에서 전화를, 그것도 할아버지 때문에 전화를 걸면 욕만 얻어먹을 게 뻔했다.

그간 삼촌이 돈 문제로 말썽을 일으킨 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시골집도 그렇고, 몇 년 전에는 할아버지 명의로 된 땅까지 몰래 팔아서 투자했다가 그것도 홀랑 날려먹었다. 이후로 할아버지의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제가 알기로 병원비는 미룬 적이 없었다. 강제 퇴원을 당하면 집으로 모셔 와야 하기 때문인데, 처음으로 미납됐다는 연락이 온 걸 보니 이번에는 정말 심각한 모양이었다.

‘하아…….’

생각할수록 눈앞이 캄캄해졌다. 생활비는 일찌감치 딱 필요한 만큼만 대출받았기 때문에 손을 댈 수가 없고, 두 달이나 미납됐다고 하니 알바비로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지금 이 시기에 휴학을 할 수도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보이지 않는 현실이 그저 막막하기만 했다.

그 때였다. 머리맡에서 문득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재경?”

손바닥에 파묻고 있던 고개를 들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아까 학교에서 헤어졌던 박성범이 눈앞에 서 있었다.

“뒷모습 보고 긴가민가했는데 맞네.”

씩 웃는 상대를 바라보다가 재경은 느리게 입술을 달싹였다.

“애들이랑 마시러 간 거 아냐?”

“밥만 먹고 헤어졌어. 급한 일 있다더니 잘 해결됐어?”

“……어.”

“다행이네. 근데 어디 가려고 여기 있어?”

“뭐?”

“버스 정류장에 있어서.”

그제야 재경은 자신이 아까부터 정류장 벤치에 앉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느덧 어둠이 드리워진 가운데, 버스를 기다리는 듯한 사람도 두어 명밖에 없었다. 재경은 뒤늦게 목덜미를 쓸며 대답했다.

“……그냥. 생각할 게 좀 있어서.”

“뒷모습이 고뇌에 찬 것처럼 보이기는 하더라. 저녁은 먹었어?”

우스갯소리에 이어 살갑게 묻는 말이 들렸다. 순간 재경은 기묘한 기분을 느꼈다. 별 뜻 없이 인사치레로 한 말인 걸 알고 있지만, 좀 전에 숙모가 경수를 찾는 걸 보고 은연중에 부럽다는 생각을 한 탓인지 누군가가 챙겨주는 말을 들으니 이상하게 가슴이 울렁거렸다. 더불어 충동적인 말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혹시 시간 있어?”

* * *

“어서 오세요!”

호프집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손님을 보고 최용식은 유쾌하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다 뒤따라오는 사람의 얼굴을 보고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눈에 띄는 훤칠한 남자 손님과 함께 들어온 사람은 바로 이재경이었다.

“어쩐 일이야?”

“……친구랑 한잔하러 왔어요.”

‘동거인’, ‘동기’ 등의 단어가 떠올랐지만 재경은 짧은 고민 끝에 친구라는 단어를 선택했다. 말하고 보니 괜히 낯간지러운 기분에 목덜미로 손이 올라갔다. 그런 자신과 달리 박성범은 전혀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이야, 오래살고 볼 일이네. 이쪽으로 와. 안에 자리 있어.”

최용식은 룸처럼 되어 있는 안쪽 테이블로 두 사람을 안내했다. 소파에 앉자마자 박성범이 물었다.

“여기서 알바해?”

“어.”

집에서 마시면 저렴하겠지만 오늘은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마침 정류장에서 가깝기도 하고, 2년째 알바를 하고 있지만 이제껏 한 번도 손님으로 매출을 올려준 적은 없어서 겸사겸사 이곳으로 왔다.

“뭐 마실래?”

그러자 박성범이 메뉴판을 훑어보며 되물었다.

“이 집 생맥주 맛있어?”

“맥주 맛이 거기서 거기지 뭐.”

말하고 나서야 아차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어깨를 들썩이며 웃는 모습이 보였다.

“그럼 안주는 뭐가 맛있어? 안주 맛도 다 똑같으려나.”

놀리는 게 분명한 중얼거림이 들려왔지만 방금 제 입으로 했던 말이 있는지라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메뉴판과 함께 나온 손가락과자를 입에 넣으면서 재경은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

“매운 거 좋아하면 매콤짝태랑 사천치킨이 입에 맞을 거야. 알탕도 괜찮고.”

“짝태?”

“북어포 같은 건데 생각보다 맛있어.”

“술안주로 딱이겠네. 네가 말한 거 다 시키자.”

그 말에 재경은 눈썹을 꿈틀하며 박성범을 쳐다봤다.

“다 먹을 수 있겠어?”

“당연하지.”

뭐 그리 당연한 걸 물어보느냐는 듯한 말투였다. 하긴, 먹는 거라면 자신도 뒤쳐지진 않으니까. 재경은 곧 벨을 누르고 술과 안주를 시켰다. 그사이 박성범은 잠깐 핸드폰을 켜서 문자를 보냈다.

원래 그는 친구들의 호출을 받고 당구장으로 가던 길이었다. 그러다 버스 정류장 벤치에 앉아 있는 익숙한 뒷모습을 발견하고 말을 걸었는데, 시간 있냐고 묻는 말을 들었을 때는 내심 놀랐다. 하지만 이내 남는 게 시간이라고 대답하고는 이재경을 따라서 걸음을 옮겼다.

당구장 모임은 가도 그만, 안 가도 그만이고 다음에 언제라도 모일 수 있는 멤버들이었다. 하지만 재경은 달랐다. 아까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겼다며 먼저 간 것도 그렇고, 버스 정류장 의자에 고개를 푹 숙인 채 앉아 있던 모습만 봐도 ‘무슨 일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중요한 일이 생겨서 못 갈거 같아. 담에 보자]

이어서 박성범은 한 문장을 더 써서 보냈다.

[전화 못 받으니까 걸지마]

흡족하게 웃으며 확인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고개를 드는데 곧바로 이재경과 눈이 마주쳤다.

“약속 있었던 거 아냐?”

“아냐. 성욱인데, 겜방 가자고 해서 발 닦고 자라고 했어.”

재경은 순순히 납득했다. 축구 못지않게 RPG 게임을 좋아하는 녀석은 종종 학교 앞 PC방에서 새벽을 달리곤 했다.

잠시 후에 최용식이 커다란 트레이를 한 손으로 들고 나타났다. 능숙하게 세팅을 끝낸 뒤에 마지막으로 접시 하나를 더 테이블 위에 올려주었다.

“이건 형이 주는 서비스.”

재경이 좋아하는 새우볼이었다. 다른 손님들에게 하는 것처럼 맛있게 드시라는 말을 남긴 뒤에 최용식은 밖으로 나갔고, 재경은 맥주잔부터 먼저 손에 쥐었다. 서로 가볍게 잔을 부딪친 뒤에 맥주를 마시는데 박성범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장님이야?”

“아니, 매니저 형.”

“근데 서비스도 막 주고 그래?”

“사장님이 매형이거든.”

덤덤한 대답을 들으며 박성범은 또 한 번 웃고 말았다. 딱히 우스운 말을 하거나 농담을 한 것도 아닌데 듣다 보면 그냥 웃음이 날 때가 있었다.

금세 맥주잔을 비운 재경이 소주병으로 손을 뻗었다. 사실 오늘은 맥주보다는 소주 생각이 간절했다. 뚜껑을 따자마자 박성범이 손을 내밀며 말했다.

“줘. 내가 따라줄게.”

“……됐어.”

“사람 앞에 두고 자작하는 거 아냐. 아니면 나부터 먼저 줘.”

냉큼 제 앞으로 내밀어지는 소주잔을 보며 재경은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밑으로 좀 잡아봐.”

“어?”

“밑으로 잡으라고. 잔이 안 보여.”

아닌 게 아니라 잔을 감싸듯 쥐고 있으니 허공에 손만 올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뒤늦게 나타난 자그마한 유리잔에 대고 재경은 소주병을 기울였다. 박성범이 곧바로 그 병을 이어받아서 재경의 잔을 채워주었다.

목을 울리자 오늘따라 목구멍이 찌르르하게 울렸다. 순식간에 한 잔을 비운 재경이 거듭 제 잔을 채웠다. 그 모습을 본 박성범이 입술을 달싹였지만, 이내 장난스럽게 웃으며 원래 하려던 말 대신 다른 말을 입에 담았다.

“초반부터 너무 달리는 거 아냐?”

“두 병까지는 거뜬해.”

“맥주랑 같이 마시면 바로 취하는 애들도 있던데, 그렇진 않아?”

“맥주부터 마시면 상관없어.”

하지만 희한하게도 순서가 바뀌면 폭탄주를 마신 것처럼 취하기 때문에 조심하는 편이었다. 그러려니 하고 넘길 법도 한데, 눈치 빠른 박성범은 금세 웃으며 장난을 쳤다.

“우리 맥주 한 잔씩 더 시킬까? 맛있던데.”

표정에도 장난기가 다분했다. 재경은 피식 웃으며 장단을 맞춰주었다.

“고래고래 소리 지르면서 추태 부리는 거 감당할 자신 있으면 그래도 돼.”

“그런 주사가 있는 줄은 몰랐네.”

또 한 번 서로의 잔을 채운 다음 가볍게 부딪쳤다. 재경은 계속 평소보다 빠른 페이스로 잔을 비웠다. 빈 술병이 늘어나는 만큼 알딸딸하게 취기가 돌았다.

고개를 들자 박성범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시선을 느낀 듯 눈을 마주치더니 이내 입가를 끌어올리며 웃는다. 잠깐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재경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안 이상해?”

“뭐가.”

“갑자기 마시러 가자고 한 거.”

솔직히 말하면 일찌감치 이유를 물어볼 줄 알았다. 평소에도 종종 같이 마시러 다니면 이상할 게 없겠지만 두 사람은 그런 사이가 아니었다. 눈치가 없는 녀석이 아니니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법도 한데, 박성범은 호기심을 충족하는 대신 말없이 어울려줄 뿐이었다.

덕분에 되레 이쪽에서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잠깐 맴돌던 침묵을 깨며 박성범이 뒤늦게 대답했다.

“이상하지.”

“근데 왜 안 물어봐?”

“그냥, 시간이 필요해 보여서. 네가 먼저 말할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었어.”

이내 옅게 웃으며 묻는 말이 이어졌다.

“물어봐주길 바랐어?”

“아니거든.”

재경은 한 번 더 잔을 채우고 원샷했다. 살짝 눈을 내리깐 채로 빈 잔을 만지작거리다가 혼잣말처럼 조용히 속마음을 이야기했다.

“……사는 게 참 힘들어. 나이는 계속 먹어 가는데 미래는 불확실하고, 가진 건 아무것도 없고. ……앞만 보고 계속 달리고 있긴 한데, 한 번씩 ‘이렇게 살아서 뭐 하나’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어.”

현실을 원망하고 힘들어해 봤자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힘든 일이 있어도 ‘이 또한 지나가리라’ 하는 마음으로 이겨내려고 노력하지만, 자신도 사람이다 보니 마냥 긍정적일 수만은 없었다. 악착같이 버티며 살다가도 한 번씩 깊은 수렁에 빠진 것 같은 우울함과 절망감이 밀려왔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재경은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넌 안 힘들었어?”

불완전한 문장이지만 박성범은 이번에도 곧장 알아들은 듯했다. 살짝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옅게 웃는 모습이 보였다.

“아무래도 좀 그렇긴 했지. ……사실 깨닫고 인정하는 건 별로 안 어려웠는데, 친하게 지내던 녀석들이 내가 게이란 걸 알고는 아닌 척하면서도 티 나게 피하는 걸 겪었을 때 충격이 좀 크긴 했어. 근데 그것도 처음에만 그렇고, 시간이 지나니까 또 괜찮아지더라고. 거부감을 느껴도 어쩔 수 없다는 걸 아니까.”

“…….”

“모두가 다 내 마음 같을 수는 없잖아.”

소주병으로 손을 뻗던 것도 잠시, 재경을 본 박성범은 피식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급하게 달리더니 제대로 취기가 올랐는지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한 채 두 손으로 소주잔을 잡고 있다. 빈틈없는 평소의 성격을 생각하면 절대 떠올릴 수 없는 모습이었다.

덕분에 박성범은 한결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너한테는 진짜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지금이니까 하는 말인데, 혹시 너도 그럴까 봐 오랜만에 되게 심란했었어.”

“……안 그런다니까.”

“알아. 그래서 고맙다는 거야. 그리고……. 나도 취한 김에 한마디만 더 하자면, 너 지금 진짜 잘하고 있어.”

“…….”

“전에도 한 번 말했었잖아. 그렇게 열심히 사는 거, 진짜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니라 진심으로 한 말이었어. 지금도 마찬가지고.”

재경의 귀 끝이 조금 더 붉게 변했다. 어릴 때부터 여러모로 결핍된 환경 속에서 자라서 그런지 아니면 원래 성격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재경은 이런 기습적인 칭찬에 익숙지 않았다. 대가 없이 순수하게 주어지는 호의나 배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 사실을 알 리가 없는 박성범은 다소 낯간지러운 말을 서슴지 않고 이어갔다.

“그리고 너랑 나랑 이제 많이 친해졌잖아. 한집에서 같이 살기도 하고. 그러니까, 혹시라도 내가 도와줄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편하게 이야기해.”

“…….”

“솔직히 말하면, 아까 나한테 같이 마시러 가자고 해줘서 속으로 되게 좋아했어. 그만큼 마음을 열어준 것 같아서.”

“……내가 무슨 창문이야? 열긴 뭘 열어.”

“아님 받아들였다고 할까?”

“그것도 이상해.”

쑥스러움에 괜히 퉁명스럽게 대답하고는 한 번 더 소주병을 기울였다. 하지만 절반 정도 채워지자 더는 나오는 것이 없었다. 박성범이 그 모습을 보고 재경에게 물었다.

“더 마실 거야?”

“너는?”

“난 그만 마시려고. 더 마시면 취할 것 같아.”

“……그럼 이것만 마시고 일어나자.”

네 병 중 거의 세 병을 자신이 마셨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취하고 싶다는 목표도 달성했겠다, 주량을 이미 넘겼는데 여기서 더 마셨다가는 내일 하루가 괴로울 것이 뻔했다.

재경이 마지막 잔을 비우는 것을 보고 박성범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화장실 좀 갔다 올게.”

“……나가서 오른쪽이야.”

와중에도 친절하게 알려주는 말에 박성범은 웃고 말았다. 알려준 대로 오른쪽으로 걸어가니 정말로 화장실이 있었다. 시원하게 물을 뺀 뒤에 박성범은 세면대 앞으로 가서 섰다.

거울에 비친 얼굴은 몹시 멀끔했다. 본래 술을 마시거나 취해도 겉으로 티가 거의 안 나기도 하고, 오늘은 평소 주량의 삼 분의 일 정도도 마시지 않았다. 여차하면 이재경을 부축해서 집으로 데려가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페이퍼 타올을 뽑아서 손을 닦은 뒤에 박성범은 자리로 되돌아갔다. 순간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재경이 팔짱을 낀 채로 벽면에 비스듬히 머리를 기대고 있는 것이 보였다.

두 눈은 감은 채였다. 잠깐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뒤늦게 가까이 다가갔다.

“이재경, 집에 가자.”

“…….”

하지만 재경은 묵묵부답이었다. 어깨를 흔들며 깨워도 마찬가지였다. 일어나기는커녕 누가 밀기라도 한 것처럼 고개가 아래로 푹 꺾이는 바람에 박성범은 깜짝 놀라며 녀석을 붙잡았다.

그런데도 재경은 눈을 뜨지 않았다. 계속 깨워봤자 소용이 없을 듯해서, 박성범은 나가서 계산부터 한 뒤에 다시 돌아왔다.

이제는 제 것처럼 눈에 익은 검은색 크로스백부터 먼저 멨다. 그러곤 테이블을 살짝 앞으로 밀며 무릎을 굽혀 앉은 뒤에, 재경의 두 팔을 제 목에 두르고는 그대로 둘러업으며 일어났다.

밖으로 나가자 매니저라는 사람이 이쪽을 보고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냉큼 다가오더니 업혀 있는 사람의 얼굴을 확인한다.

“완전 뻗었네요.”

“네.”

“원래 이렇게 마시는 녀석이 아닌데……. 친구랑 같이 왔다고 달렸나 봐요.”

최용식은 또 한 번 기웃거리듯 재경의 얼굴을 살폈다. 아끼는 동생이기도 하고, 한 번씩 같이 마실 때마다 폭주 기관차처럼 달리는 자신과 달리 이재경은 웬만해선 주량을 넘기는 법이 없었다. 그런 녀석이 정신을 잃고 업혀 나온 걸 보니 걱정이 들 수밖에 없었다.

“혹시 이 녀석 집은 어딘지 알고 있어요? 친구랑 같이 산다고 했던 거 같은데……. 아님 스태프 룸에 눕혀주면 내가 데리고 갈게요.”

설마 길바닥에 버리기야 하겠냐마는 그래도 혹시 모를 일이었다. 정 안 되면 여기서라도 재울 생각으로 말했더니 상대가 빙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저랑 같이 살거든요.”

“그래요?”

최용식의 얼굴에 금세 안도감이 떠올랐다. 그렇다니 재경이 저렇게 취한 것도 이해가 갔다. 믿는 구석이 있어서 마음 놓고 달린 모양이었다.

“버리지 말고 끝까지 잘 챙겨 가주세요. 택시 불러 줄까요?”

“그럼 감사하죠.”

최용식은 곧 핸드폰을 꺼내서 택시를 호출했다.

“3분 뒤에 도착한다고 하네요. 도로 쪽 입구로 오라고 했어요.”

“네. 감사합니다.”

“문 열어줄게요.”

최용식은 마지막까지 아낌없는 서비스를 베풀었다. 덕분에 수월하게 바깥으로 나온 박성범은 한 번 더 최용식에게 감사 인사를 한 뒤에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 * *

집에 무사히 도착한 박성범은 신발을 벗자마자 재경의 방으로 직행했다.

불을 켜자 늘 그렇듯 깔끔하게 정돈된 내부가 눈에 들어왔다. 재경을 침대 위에 조심스럽게 눕혀준 뒤에 박성범은 그대로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으며 숨을 골랐다. 슬림한 체형이라서 딱히 무겁지는 않았지만, 혹시라도 어디에 부딪힐까 봐 신경을 기울였더니 식은땀까지 났다.

박성범은 옷깃을 붙잡고 펄럭거리다가 재경에게 시선을 주었다.

눕혀준 자세 그대로 잘도 자고 있다. 아마도 취해서 그런 거겠지만, 까칠해서 조금만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도 금방 깰 것 같은데 의외의 모습을 보는 기분이었다.

이내 피식 웃으며 베개로 손을 뻗었다. 재경의 머리를 살짝 들어서 베개를 넣어주고, 몸 밑에 깔린 이불을 요령껏 아래로 빼냈다.

그런데 막상 덮어주려니 녀석이 입고 있는 옷이 눈에 밟혔다. 티 위에 셔츠를 겹쳐 입은 거야 그렇다 쳐도, 뻣뻣한 청바지에 양말까지 신은 채로 자면 불편할 게 뻔했다.

잠깐 망설이던 박성범은 이내 마음을 굳히고 재경의 발쪽으로 먼저 손을 뻗었다. 이런 걸로 고민한다는 것 자체가 눈앞의 녀석을 의식한다는 뜻이나 다름없는데, 친구 사이에 그럴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재경은 제가 게이여도 아무렇지 않다고 말했었다. 불편할 것 같아서 갈아입혔다고 사실대로 말하면 그러냐며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고도 남을 녀석이었다.

손쉽게 양말 두 짝을 벗긴 뒤에 이번에는 바지 벨트로 손을 뻗었다. 그 순간 문득 불필요한 깨달음이 박성범의 머리를 스쳤다. 그러고 보니 섹스를 할 것도 아닌데 상대의 옷을 벗기기는 처음이었다.

더불어 인정해야만 했다. 상대가 이재경이라서 이렇게까지 해주는 거라고. 기본적인 매너와 배려심을 갖추고 있는 것은 맞지만 그것도 상대에 따라서였다. 만일 취해서 뻗은 놈이 평범한 친구나 동기 놈들이었으면 바닥에 떨군 뒤에 불만 꺼주고 밖으로 나갔을 거다.

괜히 목덜미를 한 번 긁적인 뒤에 박성범은 다시금 재경의 바지로 손을 뻗었다. 작업은 수월했다. 벨트부터 먼저 풀고, 이어서 버클과 지퍼도 힘들이지 않고 풀었다. 그리고 아래로 끌어내리려는 순간이었다.

“으… 음….”

줄곧 미동도 없이 자던 녀석이 갑자기 뒤척이는 바람에 박성범은 심장이 철렁했다. 저도 모르게 동작 그만 상태가 됐다. 다시금 잠들기를 바랐지만, 바람과 달리 잠꼬대 같은 신음을 거듭 흘린 재경이 실눈을 뜨는 것이 보였다. 형광등 불빛 때문인지 인상은 한껏 찌푸린 채였다.

이어서 살짝 갈라진 목소리가 녀석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목말라.”

괜히 긴장했던 것도 잠시, 박성범은 맥 빠진 웃음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있어 봐. 물 갖다 줄게.”

물컵을 들고 방으로 돌아오니 재경은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여전히 붉은 얼굴로 벽에 기대고 있는 걸 보니 아직 제 뜻대로 몸을 가누기가 힘든 모양이었다.

“마셔.”

두어 번 헛손질을 한 뒤에야 재경은 제대로 컵을 잡았다. 단숨에 끝까지 들이켜고는 젖은 입가를 손등으로 훔치며 고개를 들었다.

“집이야?”

“어. 그래도 집은 알아보나 보네.”

“……놀리지 마.”

재경은 어떻게 집까지 왔는지 기억을 더듬어보려 했지만, 가위로 뭉텅 잘라낸 것처럼 아무것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아무렴 어때.’

어쨌거나 집이라고 하니 마음이 놓였다. 안도와 동시에 또다시 졸음이 밀려왔다. 익숙한 베개를 발견하고 쓰러지듯 옆으로 머리를 기대는데, 눕자마자 박성범의 목소리가 들렸다.

“깬 김에 옷이라도 갈아입고 자.”

“……귀찮아.”

재경은 훠이훠이 손을 내저으며 반대로 돌아누웠다. 평소였으면 그런 말을 듣기 전에 먼저 옷을 갈아입고 씻은 뒤에 누웠겠지만 지금은 정말 만사가 귀찮았다. 일어나기는커녕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도 싫었다.

그런 재경을 내려다보던 박성범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님 내가 갈아입혀 줄까?”

“……뭐?”

재경은 부스스 고개만 돌려서 뒤를 쳐다봤다. 여전히 밝은 형광등 불빛 때문에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그 표정을 본 박성범은 속으로 아차 했다. 귀찮다고 하니 도와주겠다는 뜻이었지만, 듣기에 따라서는 오해 아닌 오해를 할 수도 있었다. 괜히 분위기가 이상해지기 전에 박성범은 일부러 어깨를 으쓱하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종일 바깥에 있었는데 그냥 자면 찝찝하잖아. 이불도 더러워지는 거 같고.”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그러잖아도 미세먼지다 뭐다 해서 말이 많은데, 옷도 갈아입지 않고 그냥 자려니 확실히 찝찝하긴 했다.

재경은 마지못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꼼짝도 하기 싫은 건 여전했기에 뻔뻔함을 무릅쓰고 박성범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내가 갈아입을 테니까 옷만 좀 갖다 주라. 저기 벽에 걸린 거.”

턱짓으로 앞을 가리키자 박성범의 고개가 그쪽으로 움직였다. 군말 없이 다가간 박성범이 반팔 셔츠와 반바지를 가져와서 재경에게 내밀었다.

“땡큐.”

재경은 곧 셔츠 단추부터 풀기 시작했다. 하지만 노력에 비해 결과는 시원찮았다. 좋게 말하면 느긋하고, 솔직하게 말하면 계속 헛손질을 하면서 안 된다고 툴툴대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결국 박성범이 나섰다.

“있어 봐. 내가 해줄게.”

금세 다가온 커다란 손이 서슴없이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그동안 재경의 시선은 박성범의 손에 고정됐다. 키가 커서 그런지 손가락도 길쭉길쭉하다.

“팔 들어봐.”

시키는 대로 엉거주춤하게 두 팔을 들자 셔츠 안에 받쳐 입은 면티가 훌렁 벗겨졌다. 되도록 맨살에 시선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박성범은 재경의 옷을 갈아입혔고, 어린애를 다루듯 구슬려가며 좀 전에 벗기려다가 중단된 바지도 무사히 갈아입혔다.

“됐어.”

손을 뗀 순간 저도 모르게 속에서부터 한숨이 흘러나왔다. 주정뱅이 친구의 옷을 갈아 입혀 준 것뿐인데 무슨 대단한 일이라도 한 것처럼 기력을 소모한 기분이었다.

어쨌거나 무사히 임무를 완수했기에 박성범은 장난스럽게 재경의 뒤통수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제 편하게 자. 나가면서 불 꺼줄게.”

잘 자라는 인사까지 한 뒤에 박성범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돌아서자마자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느낌이 났다. 뒤를 돌아보니 재경이 제 셔츠 자락을 붙잡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입술을 달싹이며 하는 말이 들렸다.

“같이 자자.”

“……!”

여전히 취기가 남이 있는 얼굴이지만 시선만큼은 또렷하게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박성범은 당혹감을 느끼며 재경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오늘 이재경은 확실히 평소와 달랐다. 먼저 술을 마시자고 한 것도 그렇고, 남에게 신세 지는 걸 싫어하는 녀석이 갈아입을 옷을 갖다 달라고 부탁한 것도 솔직히 말하면 뜻밖이었다.

그래서 박성범은 난감했다. 평소와 다르기 때문에 더더욱 외면하거나 무시할 수가 없었고, 결국 피식 웃으며 농담조로 대답했다.

“또 나한테 딱 붙어서 자려고?”

“맞아.”

“……어?”

“맞다고. 눈 부시니까 빨리 불 끄고 와.”

“…….”

“빨리.”

장난이라기엔 몹시 진지한 얼굴로 숫제 재촉까지 한다. ……이런 술버릇은 없었던 것 같은데. 난감함에 턱 끝을 매만지다가 박성범은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확답을 받기로 했다.

“나 다 벗고 자는 거 알지? 그래도 괜찮아?”

“……팬티만 안 벗으면 돼.”

순간 웃음이 터질 뻔한 것을 간신히 참으며 되물었다.

“왜? 전에는 그래도 잘 잤잖아.”

“내 기억에 없는 일이니까 열외야. ……벗을 거면 빨리 벗고 올라와. 자고 싶어.”

몇 번을 물어도 같은 대답을 듣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박성범은 그제야 양팔을 교차해 셔츠 끝자락을 붙잡으며 상의부터 탈의했다. 이어서 바지 버클로 손을 가져가는데 재경의 목소리가 들렸다.

“넌 원래 그래?”

“뭐?”

멈칫하며 쳐다보자 살짝 시선을 내리깐 채로 아래를 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원래 그러냐고. 주변 사람들 잘 챙기고, 해달라는 대로 다 해주는 거.”

“…….”

“난 어릴 때부터 집에 혼자 있는 시간도 많았고, 돌봐줄 사람이 없어서 웬만한 건 전부 스스로 하면서 컸어. ……그래서 다른 사람이 나를 도와주거나 뭔가를 해주려고 하는 게 엄청 어색해. 근데 네가 막 이것저것 챙겨주고 그러니까…….”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던 재경이 돌연 입을 다물었다. 박성범은 가만히 기다려주었지만 아쉽게도 뒷말은 들을 수 없었다.

“자자. 피곤하다.”

등을 보이며 돌아눕는 걸 보니 더는 말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잠깐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박성범은 옷을 마저 벗은 뒤에 불을 끄고 침대 위로 올라갔다.

재경이 벽 쪽으로 몸을 붙이긴 했지만 다 큰 장정 둘이서 같이 눕기에 싱글 침대는 너무나 좁았다. 자칫하면 굴러 떨어질 것 같은 위기감에 박성범은 안쪽으로 조금 더 움직였다. 덕분에 원치 않아도 재경에게 몸이 닿았다. 그러고 보니 자신은 베개도 없었다.

“가서 베개 좀 가져올게.”

몸을 일으키는데 재경이 꾸물꾸물 움직이며 베고 있던 베개를 뒤로 밀었다.

“이거 써.”

“너는?”

“난 빨리 잠드니까 상관없어.”

확실히 빨리 자는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없으면 불편할 터였다. 박성범은 재경의 뒤통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같이 벨까? 아님 팔베개라도 해줘?”

팔베개는 물론 장난으로 한 말이었다. 둘 다 거절할 게 뻔하니 다시금 베개를 돌려주려고 한 말이었는데, 예상을 비켜가는 대답이 들려왔다.

“……그러든가.”

덕분에 박성범은 또 한 번 멈칫했다. 말하는 족족 예상과 다른 대답이 들려오니 몹시 당황스러웠다.

“진짜야?”

“해주기 싫으면 말고.”

농담이었다거나 장난이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으면서도, 박성범은 다시 누우며 주춤주춤 팔을 뻗어서 재경에게 팔베개를 해주었다.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지니 갑자기 긴장감이 확 차올랐다.

그런 속을 알 리 없는 재경은 몸을 살짝 움직이며 좀 더 편하게 자세를 잡았다.

같이 자자며 박성범을 붙잡은 건 정말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과하게 마신 술이 머릿속 어딘가를 건드리기라도 했는지, 오늘따라 자꾸만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있고 싶지 않았다. 누구라도 좋으니 옆에 있어주면 안심이 될 것 같았다.

다행스럽게도 박성범은 자신의 요청을 거절하지 않았다. 팔베개를 해주는 건 생각도 못 한 일이긴 하지만, 낯설고 어색하긴 해도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충동적으로 떠오른 말이 입 밖으로 흘러 나왔다.

“……이보라 말이 맞는 거 같아.”

“응?”

“전에 너한테 여친… 애인 있으면 잘할 것 같다고 했었잖아. 근데 진짜 그럴 거 같아.”

박성범은 설핏 웃으며 대답했다.

“제대로 봤네. 내가 원래 내 사람들한테는 잘하는 편이야.”

“……그럴 거 같다니까.”

재경은 몸을 좀 더 웅크리며 넌지시 박성범의 팔에 제 손을 올렸다. 이제 밤이 되면 제법 쌀쌀한데, 아직 쇼핑을 못 해서 잘 땐 계속 짧은 옷을 입는 탓에 은근한 한기가 들었다.

그래서 지금 이 상황이 생각보다 더 마음에 들었다. 사람 마음만큼 간사한 건 없다더니 정말로 그랬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박성범의 손이 닿으면 기겁을 하며 피했는데 이제는 뜨뜻한 게 몹시도 좋았다.

닿는 면적을 조금 더 넓혀보고자 재경은 편안한 자세를 찾는 척 꾸물거리며 조금씩 몸을 뒤로 물렸다. 하지만 계획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조금씩 몸을 붙이는 만큼 박성범도 조금씩 옆으로 피하는 게 느껴졌다. 이어서 전혀 달갑지 않은 말이 들렸다.

“아무래도 불편한 거 같은데, 혼자서 편하게 자.”

“안 불편해. ……추워서 그런 거니까 나한테 좀 붙어봐 봐. 얼른.”

내친김에 재경은 더듬더듬 박성범의 왼팔을 붙잡아서 자신에게 두르도록 했다. 만족감도 잠시, 박성범은 금세 팔을 떼며 엉뚱한 소리를 해댔다.

“내일 온수 매트 사줄게.”

“지금 춥다고. 지금.”

그러니 당장 좀 붙어보라는 뜻이었지만 박성범은 요지부동이었다. 순간 재경은 울화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춥냐며 장난스럽게 안아줄 줄 알았는데, 예상과 달리 밀어내는 듯한 행동을 취하니 괜한 서운함까지 밀려왔다.

급기야 재경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야속하게도 나무토막처럼 반듯하게 누워 있는 녀석을 껴안다시피 하며 그대로 제 몸을 겹쳤다.

“……! 이재경?”

당황해서 일어나려는 것을 감지하고는 더더욱 악착같이 매달렸다. 맞닿은 몸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지만 물러설 수 없었다. 오늘은 정말로 다른 사람의 체온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오늘만 이러고 자자. 오늘만.”

“…….”

박성범의 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을 시험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필사적으로 붙잡는데 밀어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재경이 바라는 대로 안아주는 것도 힘들었다.

취해서인지 저 못지않게 뜨끈하게 열이 오른 몸이 비비적거리며 안겨 오니 의지와는 하등 상관없이 아래에 조금씩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행여나 재경이 그걸 눈치채는 것은 상상도 하기 싫었기에 박성범은 진땀을 흘리며 급하게 차선책을 내놓았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아까처럼 누워봐. 그럼 내가 뒤에서 안아줄게.”

“그래놓고 도망치려고?”

“안 그래. 이렇게 자면 너도 불편하잖아.”

“별로 안 불편해.”

“……나 좀 살려주라.”

대화를 하면 할수록 제 무덤을 파는 기분이 들었다. 재경이 내뱉는 숨이 민감한 목덜미에 직격으로 와 닿았고, 그럴수록 중심부는 점점 더 부피를 키워갔다. 이래서야 들키는 건 시간문제였다.

아니나 다를까, 흐느적거리면서도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던 재경이 갑자기 고개를 치켜들었다. 창 너머로 비쳐드는 달빛 때문에 어둠 속에서도 상대의 얼굴이 뚜렷하게 보였다. 이어서 덤덤하게 묻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섰어?”

“……!”

심장이 덜컥한다는 게 이런 기분일까 싶었다. 박성범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결국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고 말았다.

“안 한 지 오래돼서……. 아니, 그게 아니고……. 하아.”

내가 이렇게 등신 같았나.

속으로 욕이 치밀어 올랐다. 대상은 물론 본인이었고, 박성범은 거듭 한숨을 푹 흘린 뒤에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말을 꺼냈다.

“먼저 자고 있어. 화장실 좀 갔다 올게.”

“빼려고?”

“…….”

진짜 나한테 왜 이러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더욱 기함할 말이 이어진 것은 그 직후였다.

“……가지 마. 내가 해줄 테니까.”

뭘 해준다는 거냐고 되물을 틈도 없었다. 목을 안고 있던 재경의 오른손이 아래로 내려가더니 그대로 중심부를 가볍게 움켜쥐었다.

“이재경……!”

큰 소리에 재경은 움찔했다. 곧 밀쳐질 것 같다는 생각에 몸을 더욱 밀착시키며 박성범의 중심을 쥔 손에도 조금 더 힘을 주었다.

하지만 생각하는 그런 일은 없었다. 고개를 들자마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순간 움찔했지만, 재경은 아무렇지 않은 척 시선을 내리며 계속해서 오른손을 움직였다. 이내 깊은 한숨과 함께 중얼거리듯 내뱉는 말이 들려왔다.

“……귀신에 홀린 것 같아.”

“살아 있는 귀신도 있어?”

무뚝뚝하게 대꾸했지만 재경도 지금 이 상황이 현실감 없게 느껴지기는 마찬가지였다.

대딸을 쳐주다니, 중고딩 때 친구들 사이에서도 해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그러기는커녕 매일같이 바쁜 일상에 쪼들리다 보니 자위도 잘 하지 않는 편이었다.

하지만 박성범이 화장실에 간다고 하는 말을 들으니 마음이 다급해졌다. 나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든 순간 저도 모르게 손이 먼저 움직였다.

닿았을 땐 흠칫 놀랐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먹고 속옷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까슬거리는 음모가 먼저 느껴졌다. 그 아래 있는 굵은 기둥을 손바닥으로 조심스럽게 감쌌다. 체온이 높은 녀석이라서 그런 걸까. 슥슥 문지르는 것뿐인데도 손바닥이 금세 뜨거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닿았을 때부터 힘이 들어가 있던 중심은 빠른 속도로 모양을 갖춰가며 딱딱하게 일어섰다. 애써 머릿속 생각을 비우며 기계적으로 손을 움직이는데, 박성범이 팔꿈치를 이용해서 상체를 일으켰다. 이내 재경의 허리를 끌어당겨 제 허벅지 위에 앉히며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댔다.

“나도 해줄게.”

불식간에 사타구니를 가볍게 움켜쥐는 손길이 느껴졌다. 이어서 바지 안으로 불쑥 들어오는 것을 느끼고 재경은 당황해서 허리를 뒤로 뺐다.

“난 됐어.”

하지만 소용없는 저항이었다. 허리를 감은 팔에 거듭 힘을 주어 끌어당기며 박성범은 “나만 받으면 불공평하잖아.” 라는 말을 귓가에 대고 읊조렸다. 뜨거운 입김에 소름이 쫙 돋았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박성범은 손에 쥔 재경의 중심을 서슴없이 흔들어댔다.

“흐읏…, 하아….”

언제부턴가 말소리는 완전히 사라졌다. 가쁘게 몰아쉬는 숨과 질척이는 소리, 한 번씩 탄성처럼 내뱉는 짤막한 신음만이 열기를 띤 것처럼 주변을 맴돌았다.

박성범은 능숙했다. 저와 달리 강약을 조절하며 만져주는 손길에 재경은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처음으로 느껴보는 타인의 손길은 자위를 할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강렬한 쾌감을 자아냈다.

“계속해줘.”

나직하게 말하며 밑동을 꽈악 압박하는 바람에 재경은 진저리를 쳤다. 평소였으면 왜 자꾸 귀에 대고 말하냐며 녀석을 밀어냈겠지만 지금은 그럴 만한 정신도 없었다.

저도 모르게 멈추고 있던 손놀림을 재개하자, 흘러내린 체액이 마찰되며 야릇한 소리가 울렸다. 재경의 중심도 젖기는 마찬가지였다. 고조되는 쾌감에 숨을 몰아쉬며 움찔대다가 불현듯 박성범과 눈이 마주쳤다.

“…….”

일순 정적이 흘렀다. 그 적막을 깨며 작은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것이 마치 기폭제라도 된 것처럼, 멱살이 휙 끌어 당겨지며 무언가가 입술에 부딪혔다.

< 2권에서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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