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6/22)

6.

늘 그렇듯 밖에서 저녁을 먹을 줄 알았는데 올해는 아니었다. 금요일 저녁에 박성범은 ‘집에서 모이기로 했다’는 어머니의 전화를 받았고, 다음 날 약속 시간에 맞춰 본가로 향했다.

“왔니?”

두어 달 만에 집에 들른 아들을 모친은 반갑게도 맞아주었다. 집 안은 조용했다. 떠들썩한 소리가 들리질 않는 걸 보니 형들 가족은 아직인 모양이었다. 도우미 아주머니가 내 온 사과를 포크로 찍어 아들에게 건네면서 모친인 정 여사가 먼저 운을 뗐다.

“학교는 잘 나가고 있어?”

“그럼요.”

“작곡은.”

“계속하고 있어요. 그래도 졸업할 때까지는 학업에 좀 더 충실하려고요.”

“……잘 생각했어.”

아들을 바라보는 정 여사의 얼굴에 복잡 미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절대 제 뜻대로 되지 않는 게 자식 농사라더니, 아이들을 낳고 키워보니 정말로 그랬다.

늦둥이로 낳은 막내아들은 어릴 때부터 인물이 훤칠하고 형들처럼 머리도 좋아서 그런 아들에 대한 부부의 기대는 매우 컸다. 그게 문제였던 걸까. 딱히 오냐오냐 키운 것도 아닌데, 아들은 한 번씩 엉뚱한 사고를 치는 데다 고집도 묘하게 셌다. 그러기만 하면 다행이었다. 중3일 때는 식사 자리에서 느닷없이 ‘여자보다 남자가 더 좋다.’는 폭탄 발언을 하는 바람에 온 집안이 발칵 뒤집어진 적도 있었다.

그로부터 몇 달 뒤, 고등학생이 된 아들은 또 하나의 폭탄을 터뜨렸다. 어느 날 저녁 수학 학원 선생님으로부터 ‘성범이가 학원을 그만뒀는데 혹시 무슨 이유가 있느냐’고 조심스럽게 묻는 전화가 걸려왔다. 금시초문인 일에 정 여사는 매우 당황했지만, 일단 침착하게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날 밤, 정 여사는 자정이 다 돼서 돌아온 아들을 불러 앉혀서 자초지종을 물었다. 잠깐 당황하는가 싶더니 이내 아들은 덤덤한 표정으로 이실직고를 했다. 작곡에 흥미를 느껴서 배우는 중이고, 앞으로 진로도 그쪽으로 정할 거라고.

정 여사는 결사반대했지만 이번에도 아들의 고집을 꺾을 수가 없었다. 용돈을 끊으면 아르바이트를 해서라도 계속 작곡 학원을 다니겠다고 말하는 아들의 모습은 비장하다 못해 결연하기까지 했다.

결국 이번에도 백기를 든 사람은 정 여사와 그녀의 남편이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을 다시 한번 온몸으로 통감하며, 그녀는 마지못해 아들의 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잠깐 그러고 말기를 바라면서.

하지만 정 여사의 바람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부모의 허락을 받은 아들은 학교를 가는 날에도 새벽 늦게까지 컴퓨터를 붙잡고 있기 일쑤였고,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학교 성적은 바닥을 모르고 곤두박질쳤다.

다음 학기 성적표를 확인하고 이마를 짚는데, 그런 정 여사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남편이 한 가지 제안을 꺼냈다. 이성적으로 타이르면 말귀를 알아듣는 녀석이니 지금이라도 한 번 더 성범이와 진지하게 대화를 나눠보자고.

그날 밤 부부는 다시 한 번 막내아들과 마주 보고 앉아서 부모로서의 입장을 허심탄회하게 밝혔다. 학생이면 학생답게 우선은 학업에 충실하는 것이 맞고, 미래를 생각해서라도 제대로 된 대학 졸업장까지는 땄으면 좋겠다고. 기대에 부응하는 결과를 보여준다면 이후로는 작곡을 하든 뭘 하든 일절 관여하지 않겠노라고.

‘알겠습니다.’

아들은 예상외로 순순히 수긍했다. 학벌이 좋아서 손해 볼 건 없으니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한 녀석은 2년 뒤에 정말로 큰형이 졸업한 대학과 똑같은 명칭의 도장이 찍힌 합격 통지서를 보여주었다.

덕분에 부부는 한 번 놀라고, 작곡과나 실용음악과가 아닌 경영학부에 합격해서 또 한 번 놀랐다. 그리고 지금까지 계속 다니고 있는 걸 보면 그때 한 번 더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길 잘했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아들이 프로 작곡가로서 제대로 자리를 잡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좀 더 나중의 일이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이 즐겨 듣는 음악은 잘 모르지만, 초등학생인 손녀 말로는 삼촌이 만든 노래가 엄청 유명하다고 하니 아무래도 잘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지금도 계속 최정열인가 하는 그 사람 밑에서 배우고 있어?”

“예.”

“얼마 전에 TV에서 보니까 살이 많이 빠진 것 같더라.”

모처럼 모자끼리 오붓한 시간을 보내는데 방문객이 왔음을 알리는 인터폰이 길게 울렸다.

“제가 갈게요.”

벌떡 일어나서 현관문으로 다가가자 인터폰 화면에 익숙한 얼굴이 비쳤다. 버튼을 누르고, 일어선 김에 현관문도 열어줬다. 잠시 후에 두 손 가득 쇼핑백을 든 형과 형수, 그리고 못 본 사이에 부쩍 큰 조카가 안으로 들어왔다.

“할머니! 삼촌!”

할머니를 와락 껴안는 조카를 잠깐 바라보다가 박성범은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셨어요?”

“오랜만이에요, 도련님.”

환하게 웃는 형수와 달리 큰형의 표정은 빈말로도 좋지 않았다. 민망해하며 형의 옆구리를 쿡 찌르는 형수에게 설핏 웃어 보인 뒤에 박성범은 다시금 조카를 바라보았다.

“엄청 많이 컸네.”

그러자 조카의 얼굴에 금세 뿌듯함이 차올랐다.

“삼촌, 나 이제 165넘는다?”

“정연이 네가 5학년이었나?”

“응! 친구들 중에서 내가 제일 커. 나보고 막 모델 하라고 그래.”

멋진 막내 삼촌을 올려다보며 한껏 자랑을 늘어놓는데, 찬물을 끼얹는 듯한 잔소리가 날아들었다.

“삼촌한테 존댓말 써야지.”

“삼촌이 말 편하게 해도 된다고 그랬어요. 그치, 삼촌?”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정 여사가 중재에 나섰다.

“정연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놔둬. 나이 차가 그렇게 많이 나는 것도 아닌데.”

“하지만 어머니…….”

아빠의 잔소리를 본능적으로 감지한 박정연이 냉큼 먼저 선수를 쳤다.

“삼촌, 요즘은 무슨 노래 만들고 있어? 나한테 들려주면 안 돼?”

“당연히 되지. 이리 와봐.”

“오 예! 완전 좋아!”

신이 나서 팔을 답삭 붙잡는 조카와 함께 박성범은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딱히 조카 바보까지는 아니지만, 활달한 성격에 생글생글 잘 웃는 녀석이 귀엽기는 했다.

아버지와 작은형까지 차례로 도착하면서 곧바로 저녁 식사가 이어졌다. 모처럼 온 가족이 한자리에 모인 만큼 이런저런 다양한 대화가 오갔다. 유일하게 한 사람, 아버지보다 더 보수적인 큰형의 표정이 딱딱하긴 했어도 자리가 자리인 만큼 분위기를 깨는 짓은 하지 않았다.

후식까지 먹고 나니 어느덧 9시가 훌쩍 넘었다. 하룻밤 자고 가는 형들과 달리 박성범은 시간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이 있다는 핑계를 댔더니 어머니는 아쉬워하면서도 붙잡지 않았다. 집을 나서기 전에 박성범은 어머니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반찬 있으면 좀 싸 주세요.”

“웬일이야? 싸 준다 해도 맨날 그냥 가더니.”

“룸메이트……, 아니 하우스메이트가 생겼거든요.”

“하우스메이트?”

놀란 표정의 모친을 바라보며 박성범은 갑자기 동거인이 생기게 된 이유를 간략하게 설명했다. 사정을 들은 정 여사는 몹시 안타까워하며 그래도 사람이 다치질 않아서 천만다행이라 말했고, 뒤늦게 문득 떠오른 생각에 한껏 소리를 낮춰 아들에게 물었다.

“……혹시 그 친구도 그쪽이니?”

무슨 뜻인지 깨달은 박성범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아니에요.”

“그래?”

묻고 싶은 말이 더 있었지만, 정 여사는 속으로 조용히 삼키며 웃어 보였다.

“잠깐만 있어 봐. 김치하고 이것저것 밑반찬 좀 싸 줄게.”

어머니가 곧 주방으로 들어가고, 박성범은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며 목덜미를 주물렀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일격을 당한 기분이었다.

이재경에게는 아직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을 말하지 못했다. 일부러 숨긴 건 아니었다. 동거를 제안했을 땐 정말로 응할 줄 몰랐고, 자신의 성향을 말해줘야 한다는 자각조차 없었다.

‘……말하긴 해야겠지.’

상황을 가정해보니 거듭 한숨이 흘러나왔다.

전날까지 잘만 어울려 놀다가도, 자신이 게이라는 걸 알고 나서부터는 대놓고 피하는 사람들을 이제껏 여러 번 봐왔다. 하지만 박성범은 딱히 개의치 않았다. 아직은 일반적인 사회 통념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간주되는 만큼 배척하거나 욕을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굳이 이해를 바라지도 않았다. 부모님을 비롯해서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해주는 몇몇 사람들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지만……. 혹시라도 그 때문에 이재경이 자신을 불편해하거나 집에서 나가겠다는 말을 꺼내기라도 하면 마음이 조금은 무거울 것 같긴 했다.

* * *

차에서 내리자 조금은 쌀쌀한 공기가 느껴졌다. 올 때와 달리 박성범의 손에는 짐이 한가득이었다. 같이 산다는 친구와 먹으라며 어머니가 각종 음식을 바리바리 싸 준 덕분이었다.

키패드를 누르고 캡을 내리자 현관문이 요란스럽게 열렸다. 안으로 들어선 박성범은 순간 멈칫했다. 현관에 가지런히 놓인 흰색 스니커즈가 보였고, 주방 쪽에서는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벌써 집에 왔나?’

손목시계를 확인해보니 이제 막 10시를 넘은 시간이었다. 금세 의아함이 들었다. 중간고사 기간이 코앞으로 다가오면서 이재경은 주말마다 새벽같이 도서관에 갔다가 자정이 넘어서 들어오곤 했다. 오늘도 으레 그럴 줄 알았는데 저보다 일찍 들어왔다니 의외였다.

귀를 기울였지만 닫힌 방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없었다. 박성범은 노크를 한번 해보려다가 그대로 손을 내리고 말았다. 기척이 없는 걸 보니 일찍 잠들었을 수도 있는데 노크를 하면 괜히 깨우는 꼴밖에 되지 않았다.

“……!”

뒤늦게 걸음을 옮기는데 또 한 번 뜻밖의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당연히 자기 방에 있을 줄 알았던 이재경이 주방 식탁 위에 한쪽 팔을 길게 뻗은 채 엎드려 있었다. 바로 앞에는 두꺼운 책과 스프링 노트가 펼쳐져 있는 게 보였다.

잠깐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박성범은 조용히 다가가서 이재경을 깨웠다.

“방에 가서 편하게 자.”

“…….”

“이재경.”

이름까지 부르며 거듭 깨웠지만 상대는 요지부동이었다. 어깨를 흔들어봐도 마찬가지였다. 이 정도면 깰 법도 한데, 일어나기는커녕 미동도 없는 걸 보니 어지간히 깊게 잠든 모양이었다.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안 봤으면 또 모르겠는데, 이러고 자는 걸 봐놓고도 모르는 척할 수가 없었다. 결국 박성범은 두 팔로 이재경을 안아 들었다. 이번에야말로 깨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괜한 기우였고, 박성범은 빠른 걸음으로 방을 향해 걸어갔다.

그런데 방문을 연 순간 또 다른 난관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재경의 방에는 침대가 없었다. 아니, 비단 침대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방 안에는 첫날에 자신이 넣어둔 간이 책상과 자잘한 물건들, 그리고 한편에 개켜진 이불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과장이 아니라 정말로 그랬다. 이제 막 이사를 들어온 집도 이 정도로 살풍경할 것 같지는 않았다.

“…….”

결국 박성범은 다시 뒤돌아 나왔다. 제 방으로 가서 침대 위에 이재경을 눕혀준 다음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며 욕실로 들어갔다.

쏴아아아-

샤워기를 틀자 차가운 물이 쏟아졌다. 씻고 나와서 흘끗 침대 쪽을 쳐다보니 이재경은 눕혀준 자세 그대로 여전히 한밤중이었다. 문득 드는 생각에 조심스럽게 이마에 손을 올려봤지만 다행히 열이 있지는 않았다.

잠잘 준비를 마치고 박성범도 침대에 누웠다. 깍지 낀 손으로 머리를 받친 채 천장을 보던 것도 잠시, 누가 부르기라도 한 것처럼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둠에 익은 시야에 이재경의 얼굴이 들어왔다. 살짝 이마를 덮은 머리카락, 굳게 감겨 있는 눈꺼풀, 앞에서 봐도 오뚝한 콧날에 적당히 얇은 입술까지. 이렇게 쳐다보려고 제 방으로 데려온 건 절대 아니지만, 바로 옆에 있다고 생각하니 저절로 눈길이 갔다.

박성범은 곧 나직한 목소리로 녀석의 이름을 불렀다.

“이재경.”

“…….”

“재경아.”

“…….”

“잡아먹는다?”

무시무시한 말을 해도 이재경은 계속 한밤중이었다. 잠든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박성범은 조심스럽게 팔베개를 해주며 그를 살짝 끌어안았다.

입꼬리가 금세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기다렸다는 듯 몸을 밀착하는 재경의 어깨를 토닥여주면서 뒤늦게 눈을 감았다.

* * *

잠에서 깨자마자 재경은 몹시 당황했다. 높아진 시야에 모던하면서도 깔끔한 풍경, 그리고 제 옆에서 어김없이 헐벗고 자는 박성범의 얼굴까지.

‘왜 또…….’

저도 모르게 표정을 굳힌 채 서둘러 어젯밤의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어제는 유달리 도서관 자리 운이 없었다. 왼쪽에 앉은 남학생은 책을 펼치자마자 계속해서 펜을 돌려댔고, 맞은편의 여학생은 10분에 한 번꼴로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재경은 고개를 처박다시피 한 채로 공부에 집중하기 위해 애를 썼다. 그러다 오후가 되자 펜 돌리기 신공 남학생이 먼저 가방을 챙겨 나갔다.

이제야 덜 산만하겠다는 생각에 안도한 것도 잠시, 그보다 더한 복병이 나타났다. 새롭게 옆자리를 차지한 남자는 앉자마자 미친 듯이 다리를 떨어대기 시작했다. 참다못해 주의를 줬지만 그때뿐이었다. 마지막으로 ‘다리 좀 그만 떨라’는 쪽지를 써서 보여주자 그놈은 이제 안 떠는데 왜 그러냐고, 그쪽이 너무 예민한 거 아니냐며 적반하장격으로 성질을 냈다.

더 있다간 싸움만 날 것 같아 결국 재경이 짐을 싸서 도서관을 나왔다. 혹시나 해서 빈자리를 체크해봤지만 역시나 만석이었고, 할 수 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박성범은 부재중이었다. 재경은 홀로 간단하게 저녁을 챙겨 먹은 뒤에 그대로 주방 식탁 위에 책을 펼쳤다. 도서관에서 공부해야 집중이 잘되지만 자리가 없으니 어쩔 수 없었다. 지금 다시 가봤자 여전히 만석일 게 뻔했기에, 괜히 오가는 시간만 낭비하는 것보다 집에서 하는 게 더 나았다.

그러다 중간에 잠깐 쉬었던 것 같은데…….

‘눈 뜨니까 왜 또 여기냐고.’

흘끗, 옆을 한 번 쳐다본 뒤에 재경은 슬금슬금 이불을 걷고 침대 아래로 발을 내렸다. 일어서려는 찰나에 등 뒤에서 느닷없이 말소리가 들려왔다.

“잘 잤어?”

“……!”

재경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분명 몇 초 전까지 눈을 감고 있던 박성범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 깬 거야?”

“네가 꾸물꾸물 뒤척이다가 벌떡 일어나기 전부터.”

느긋하게 웃는 얼굴을 본 재경은 저도 모르게 따지듯 물었다.

“근데 왜 자는 척했어?”

“더 잘 생각이었는데 네가 일어난 거야.”

그렇다니 할 말이 없었다. 재경은 머리를 벅벅 헝클다가 다시금 고개를 들었다.

“……네가 여기로 나 데려왔어?”

“어. 와서 보니까 식탁에 엎드려서 자고 있길래.”

“그럼 깨우지 그랬어.”

“안 깨웠겠어? 흔들어도 안 일어나서 할 수 없이 내 방으로 데려온 거야. 네 방에 갔더니 침대가 없어서.”

그냥 바닥에 눕혀주지 그랬냐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재경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이러나저러나 신세 아닌 신세를 지기는 마찬가지였다.

“일어났으면 밥이나 먹자.”

“악!”

이번에야말로 재경은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박성범이 몸을 일으키자마자 거무튀튀한 흉물이 눈에 들어왔다. 심지어 반쯤 발기해 있어서 제 얼굴이 다 달아올랐다. 또 한 번 불시에 당한 안구 테러에 당혹스러운 목소리가 절로 나왔다.

“옷 좀 입고 자면 안 돼?”

“잘 땐 원래 벗고 잔다니까.”

“겨울에도 그래?”

“겨울엔 반팔이랑 반바지.”

또 한 번 움직이는 기척이 들려서 재경은 기겁하며 벌떡 일어섰다.

“갈게.”

“밤새 꼭 붙어 잤으면서, 눈 뜨니까 먹튀하는 거야?”

“내가 무슨 먹튀를……. 아 씨, 진짜.”

발끈해서 뒤를 돌아보자마자 재경은 후회했다. 후다닥 나와 방으로 돌아가서 가방을 챙기는데 문 너머에서 박성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와서 밥 먹어.”

시계를 보니 이제 막 7시를 넘어가는 참이었다. 아주 잠깐 ‘나가서 먹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금세 주머니 사정을 떠올리고 주방으로 향했다.

식탁을 보자마자 재경은 깜짝 놀랐다.

“반찬이 왜 이렇게 많아?”

“친구랑 같이 산다니까 엄마가 싸 주셨어. 저녁엔 갈비 구워 먹자.”

박성범이 먼저 식사를 시작했다. 그와 달리 재경은 답지 않게 머뭇거리다가 말을 꺼냈다.

“나랑 같이 사는 거 어머니한테 말씀드렸어?”

“어. 자주는 아닌데, 근방에 볼일이 있으면 가끔 오시거든.”

“다른 말씀은 없으셨어?”

박성범이 뭐라고 설명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부모 입장에서는 친구와 함께 사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우려와 달리 박성범은 다른 방향으로 대답했다.

“밥 잘 챙겨 먹으라고 하시더라. 이것저것 잔뜩 싸 줘서 열흘은 더 먹을 수 있을 거 같아.”

“……감사하다고 꼭 전해줘.”

재경은 뒤늦게 식사를 시작했다. 식탁을 풍성하게 채운 반찬은 비주얼만큼이나 맛도 훌륭했다. 아삭한 총각김치와 나물 반찬 등을 한 번씩 집어먹다 보니 밥 한 공기가 순삭이었다. 마찬가지로 깨끗이 먹어치운 박성범이 빈 공기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도 더 먹을래?”

“어. 내가 할게.”

“앉아 있어. 선 김에 내가 하면 돼.”

곧 커다란 손이 다가와서 재경의 그릇도 가져갔다. 자연스레 재경의 시선이 그를 따라 움직였다.

뒷모습만 봐도 확실히 몸이 좋긴 했다. 넓은 어깨에 셔츠 핏이 딱 맞고, 키가 커서 그런지 다리도 몹시 길어 보였다. 그리고…….

‘은근히 사람을 잘 챙긴단 말이지.’

아니, 생각해보면 은근히가 아니었다. 어제 침대로 옮겨준 것도 그렇고, 며칠 전 밤에는 호프집으로 데리러 오기도 하고. 그리고 제가 하겠다 해도 괜찮다며 거의 매일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사람도 박성범이었다.

어찌 보면 부담스러울 수도 있는 배려인데 재경은 딱히 그런 느낌을 받지 못했다. 그걸 당연시 여기거나 별것 아니라고 생각해서 아니라, 그만큼 티가 나질 않기 때문이었다.

타인의 순수한 호의나 배려가 낯선 자신조차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걸 보면 박성범은 평소에도 곧잘 그러는 것이 분명했다. 녀석의 주변에 사람이 많은 건 외모나 돈 때문일 거라고 내심 생각했는데……. 어쩌면 저런 배려심이나 인간성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잠시 후 박성범이 한 손에 하나씩 밥공기를 들고 돌아왔다. 제 앞에 놓이는 그릇을 보자마자 재경은 신음을 삼켰다.

“너무 많은 거 아냐?”

“어중간하게 남아서 그냥 다 펐어. 아니면 나한테 좀 덜어주든가.”

재경의 시선이 거듭 제 밥그릇을 향했다. 먹는 걸 좋아하기도 하고 체격에 비해 많이 먹는다는 소리도 종종 듣지만 아무리 봐도 이건 너무 많았다. 결국 재경은 숟가락으로 밥을 가득 떠서 박성범의 그릇 위에 올려주었다.

“오늘도 도서관 갈 거야?”

“어.”

“그럼 나랑 같이 가자.”

“너도 가게?”

말하고 나서야 아차 싶었지만 다행히 박성범은 개의치 않는 듯했다.

“시험 기간인데 나도 공부해야지.”

그러다 문득 입가를 올린 채로 시선을 마주한다.

“나는 뭐 공부도 안 하는 줄 알았어?”

“그런 거 아냐. 그냥 좀 놀라서……. 아니, 그게 아니고.”

어째 말을 하면 할수록 제 무덤을 파는 기분이었다. 버벅대는 재경을 보며 급기야 박성범은 큭큭 웃음을 터뜨렸다.

“사실 공부 목적으로 도서관에 간 적이 거의 없긴 해. 그래도 졸업은 해야 되니까 지금부터라도 정신 차려야지.”

밥을 한 숟갈 크게 떠먹은 박성범이 문득 생각났다는 투로 말을 이었다.

“참, 교양 수업 과제물은 언제 빌려줄 거야? 에로스 어쩌고 하는 거.”

“까먹고 있었어. 밥 먹고 바로 메일로 보내줄게.”

“그럼 고맙지.”

먹다 보니 두 번째 그릇을 비우는 것도 금방이었다. 대충 뒷정리를 끝낸 뒤에 두 사람은 나란히 집을 나섰다.

* * *

고진감래. 인내는 쓰나 열매는 달다.

재경은 오늘만큼 이 격언이 잘 어울리는 날이 또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월요일 1교시부터 치른 첫 시험을 시작으로 마침내 모든 시험이 끝났고, 재경은 답안지를 제출한 뒤에 홀가분한 마음으로 강의실을 나섰다.

화창한 가을 날씨만큼이나 기분도 좋았다. 시험 기간이라 오후 수업이 전부 휴강이라서 모처럼 긴 여유 시간이 주어진 덕분이었다. 잠깐 꺼두었던 핸드폰을 켜자 ‘대학 영어’ 단톡방에 또 수두룩한 대화가 쌓여 있는 게 보였다.

[헤르미온느♡ : 다들 열공중이신가요~~ 전 오늘 끝났습니당! 크크]

[Alexander Yifan : 끝난자의여유다]

[헤르미온느♡ : 너는?]

[Alexander Yifan : 2개남았어]

[헤르미온느♡ : 오 저런 가엾은 친구ㅜ]

[Alexander Yifan : 우리친구아니자나]

[헤르미온느♡ : .....말이 그렇다는 거지요 님아]

[섭섭 : 헐]

[섭섭 : 친구가 아니라고요? 그럼 대체 멉니까?]

[Alexander Yifan : 뭐가멀어?]

대충 훑어보고 끝까지 내려가니 마지막 대화 옆에 오전 10:20이라는 시간이 보였다. 재경은 잠깐 고민하다가 손가락을 움직였다.

[재경 : 나도 끝]

그러자 곧바로 숫자 1이 줄었다.

[헤르미온느♡ : 오오~~ 고생하셨어요! 오빠도 이제 자유의 몸이네요ㅋㅋ]

[재경 : ㅇㅇ]

[헤르미온느♡ : 오늘 뭐하실 거예요?]

[재경 : 일단 밥부터 먹으려고]

지이이잉- 지이이잉-

갑자기 화면이 바뀌면서 전화가 걸려왔다. 바로 직전까지 대화를 주고받은 이보라였다.

“여보세요?”

- 재경 오빠! 저예요.

“어. 무슨 일이야?”

- 혹시 점심 같이 먹는 사람 있어요?

“아니.”

- 그럼 저랑 같이 드실래요? 시험 끝난 사람들끼리 맛있는 거 먹으러 가요!

늘 그렇듯 듣는 사람도 기분이 좋아지는 쾌활한 목소리였다. 재경은 피식 웃으며 이보라의 제안을 수락했다.

“지금 어딘데?”

- 저 중도에 있어요.

“그럼 샛별 식당 앞에서 보자.”

구내식당을 일컫는 걸 깨달은 이보라가 앓는 소리를 냈다.

- 그러지 말고 나가서 맛있는 거 사 먹어요, 우리. 시험 끝난 기념으로요.

딱히 기념할 만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재경은 짧은 고민 끝에 이보라의 말을 들어주기로 했다.

“알았어. 그럼 내가 중도 앞으로 갈게.”

- 네. 이따 봐요, 오빠!

전화를 끊은 재경은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중앙 도서관 근처에 이르렀을 무렵, 계단 앞에 서 있던 이보라가 재경을 알아보고는 손을 크게 흔들었다. 곧 두 사람은 나란히 길을 걷기 시작했다.

“시험은 잘 보셨어요?”

“그럭저럭. 너는?”

“망한 게 있긴 한데 다들 엄청 어려웠다고 해서 잊으려고요. 우리 뭐 먹으러 갈까요?”

“난 아무거나 괜찮아.”

재경은 딱히 가리는 음식이 없었다.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와 살아서 시골 밥상에나 나올 법한 반찬들도 잘 먹고, 맛이 정말 형편없지 않은 이상 남기는 일도 드물었다.

“그럼 스파게티 먹을까요? 저 자주 가는 식당 있는데 진짜 맛있어요. 화덕 피자도 팔고요.”

들뜬 기색을 감지한 재경이 웃으며 농담조로 대꾸했다.

“첨부터 정하고 물어본 거 아냐?”

“어머나, 들켰네요.”

이보라가 말한 식당은 먹자골목에서도 거의 끝자락에 있었다. 감각적인 검은색 간판과 내부가 훤히 보이는 전면 유리창이 손님을 반겼다. 안으로 들어서니 몇몇 손님들이 벌써 식사를 하고 있었다.

“먼저 고르세요, 오빠.”

이보라는 점원이 주고 간 메뉴판을 재경에게 먼저 양보했다. 메뉴판도 꼭 가죽 수첩처럼 고급스럽다고 생각하며 넘겨보던 재경은 이내 깜짝 놀라고 말았다.

‘엄청 비싸네.’

주변 식당들과 비슷할 줄 알았는데 오산이었다. 제일 저렴한 메뉴가 8천 원이고, 나머진 죄다 만 원을 넘어가는 가격대였다. 본의 아니게 고심하고 있으니 핸드폰을 만지던 이보라가 불쑥 말을 꺼냈다.

“창섭이랑 성범 오빠도 시험 끝났대요.”

“그래?”

폰을 켜서 대화창을 확인해보니 그새 메시지가 또 잔뜩 쌓여 있었다. 대충 훑어보는데 이보라가 묻는 목소리가 들렸다.

“밥 같이 먹을 사람 있는지 물어볼까요?”

“그래도 되고.”

이내 새로운 메시지가 대화창 하단에 나타났다.

[헤르미온느♡ : 재경오빠랑 같이 밥 먹으러 왔는데 조인하실 분 있나요? 끝내주는 맛집이에요]

[섭섭 : 메뉴머에요?]

[헤르미온느♡ : 스파게티 먹으러왔어ㅋㅋ 피자도 있엉]

[섭섭 : 아앗.... 그럼전다음에낄게여 밥이먹고시퍼서ㅜ]

[브랜든 : 어디야?]

“앗, 성범 오빠다.”

반갑게 말한 이보라가 두 손으로 빠르게 글자를 입력했다.

[헤르미온느♡ : 먹자골목 끝에 있는 리얼앤펀이에요! 오실 거예요?]

[브랜든 : ㅇㅇ]

[헤르미온느♡ : 그럼 저희 기다리고 있을게요 빨리 오세용~~]

이보라는 다시금 재경을 바라보면서 수다를 떨었다. 간간이 맞장구를 치며 웃다 보니 잠시 후에 박성범이 식당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쪽이에요!”

“아직 주문 안 했어?”

“오빠 오면 같이 시키려고 기다렸어요. 뭐 드실래요?”

그러자 박성범의 시선이 재경을 향했다.

“넌 뭐 시킬 거야?”

“잠깐만.”

그새 메뉴 이름을 까먹은 재경이 메뉴판을 다시 펼쳤다. 그 때 이보라의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이 집은 크림 불고기 스파게티가 존맛이에요. 크림인데 별로 안 느끼하고, 고기도 불맛이 확 나서 진짜 맛있어요.”

재경은 고개를 들며 이보라에게 물었다.

“기본은 별로야?”

“아무래도 좀 무난하지 않을까요? 저 믿고, 오빠도 크림 불고기로 한번 시켜보세요.”

재경은 다시금 메뉴판을 확인했다. 여전히 부담스러운 가격이었지만, 이내 큰맘 먹고 이보라의 추천 메뉴를 시키기로 결심했다. 박성범이 본가에서 가져온 반찬 덕분에 식비가 굳기도 했고, 또 며칠간 애써 공부한 자신에게 소소한 셀프 선물을 주기로 했다.

셋 다 같은 메뉴로 주문한 뒤에 이보라가 박성범에게 물었다.

“오빤 시험 많이 남았어요?”

“내일 하나만 더 치면 돼.”

“그러면 이번 주말에 다 같이 모여서 연습하자고 해봐야겠어요. 저 다음 주부터 친구랑 자봉 가기로 해서 시간이 안 날 거 같거든요.”

“자봉?”

“자원봉사 활동이요.”

덕분에 재경은 할 일을 찾았다. 밥 먹고 남는 시간에 뭘 할까 싶었는데, 알바 가기 전까지 발표 대본이나 외우면 될 것 같았다.

“식사 나왔습니다.”

“와, 감사합니다.”

식탁에 놓이는 커다란 접시를 보며 이보라는 매우 기뻐했다. 사진을 찍어야 한대서 잠깐 기다려준 뒤에 재경은 식사를 시작했다.

“어때요? 맛있죠?”

“응.”

사실 끝내주게 맛있다, 이런 건 잘 모르겠지만 크림소스가 부드럽긴 했다. 식사를 하다 말고 잠깐 핸드폰을 들여다보던 박성범이 재경에게 말을 걸었다.

“오후엔 뭐할 거야?”

“집에 가서 영어 대본이나 외우려고. 왜?”

“침대 주문한 게 오늘 온다고 해서.”

재경은 어렵잖게 말뜻을 이해하고 대답했다.

“나 있을 때 오면 문 열어줄게.”

“네 방에 넣어달라고 하면 돼.”

“…….”

포크로 면을 돌돌 말던 것도 잠시, 이어진 말에 재경은 천천히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설마 나 때문에 산 거야?”

“어. 아님 네 방에 넣고 내가 쓰겠어?”

웃으며 하는 농담이 이어졌지만 재경은 웃을 수 없었다. 이내 차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금이라도 취소할 수 있으면 취소해.”

“이미 늦었어. 좀 이따 설치하러 온다고 문자 왔어.”

태연한 대꾸에 재경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럼 나한테 미리 말이라도 해주지 그랬어.”

“말하면 사지 말라고 했을 거 아냐.”

“당연하…….”

멈칫 입을 다무는 재경을 보며 박성범은 어깨를 으쓱했다.

“거봐.”

사실은 박성범도 고민 아닌 고민을 했다. 딱딱한 바닥에서 계속 자면 당연히 불편할 테고, 그렇다고 제 침대를 같이 쓰자고 하면 거절할 게 뻔할 뿐더러 자신도 다른 이유로 곤란했다. 해서 고민 끝에 적당한 싱글 사이즈로 주문했고, 오늘 오후에 설치하러 오겠다는 문자를 받은 참이었다.

여전히 표정이 딱딱한 재경을 바라보며 박성범은 부러 가벼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부담 가질 필요 없어. 원래 옵션 딸린 원룸은 침대도 포함인데, 오히려 너무 늦은 거지.”

“너희 집은 원룸이 아니잖아. 앞으로 얼마나 더 있을지도 모르는데.”

“……빨리 나가려고?”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아무튼 좀 그래.”

재경은 타인에게서 무언가를 받는 것에 익숙지 않았다. 친하지 않은 상대에게선 커피 한 잔 얻어 마시는 것도 부담스러운데, 하물며 자신 때문에 침대를 샀다고 하니 무거운 돌이 가슴에 턱 놓인 기분이었다.

“그렇게 부담스러워?”

“당연하지. 너 같으면 안 부담스럽겠어?”

“나였음 더블로 사달라고 했지.”

또 한 번 구겨지는 재경의 얼굴을 본 박성범이 웃음을 흘렸다.

“정 그러면 다음에 야식이나 한 번 더 사줘. 저번에 먹었던 떡볶이 진짜 맛있더라.”

문득 느껴지는 시선에 박성범은 고개를 돌렸다. 맞은편에 앉은 이보라가 입을 헤 벌린 채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왜 그래?”

“성범 오빠 엄청 스윗한 거 같아요.”

뜬금없는 말에 박성범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갑자기 무슨 말이야?”

“아니, 솔직히 오빠 얼굴만 보면 완전 잘 놀고, 말도 막 험하게 할 거 같거든요. 근데 실제로 들어보면 되게 자상하고 부드러워요. 오빠 아직 여친 없다고 했죠?”

“어.”

“이판이만 아니었어도 제가 엄청 들이댔을 텐데 아까워 죽겠어요.”

“누가 받아준대?”

“칫, 너무해요. 아무튼 성범 오빤 애인한테도 진짜 잘할 거 같아요. 그죠?”

“어? 어…….”

갑자기 동의를 구하는 바람에 재경은 당황해하며 대답했다. 이보라는 금세 흐뭇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며 웃었다.

“그때 오빠들한테 말 걸길 진짜 잘했다니까요.”

“이판이랑은 사귀는 거야?”

“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썰 좀 풀어봐.”

“아이참, 쑥스러운데요.”

말과 달리 이보라는 거침없이 본인의 연애사를 풀어놓았다. 여전히 살아 있는 말발에 웃음이 절로 터졌고, 배부르게 식사를 마친 뒤에 세 사람은 식당을 나섰다.

이보라는 2차도 갔으면 하는 눈치였지만 박성범이 누굴 좀 만나야 한다고 해서 카페는 다음에 가기로 했다. 두 사람은 학교로 돌아가고, 재경은 집을 향해서 걷기 시작했다.

빌라 근처에 이르렀을 무렵, 문득 든 생각에 재경은 점퍼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은행 앱을 켜고 로그인하자 예상과 얼추 비슷한 잔액이 남아 있는 게 보였다. 잠깐 고민하던 그는 곧 발걸음을 돌려 집 근처에 있는 마트로 향했다.

‘부담 가질 필요 없어. 나라면 더블 침대로 사달라고 했을걸.’

박성범은 그렇게 말했지만 재경의 생각은 달랐다. 과자나 캔 맥주 같은 것도 아니고, 자기 때문에 침대를 샀다는 말을 듣고도 무던히 넘길 수 있을 정도로 얼굴이 두껍지 못했다. 그러니 뭐라도 성의 표시를 하긴 해야 될 거 같은데……. 비싼 밥을 사 주기엔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으니 아쉬운 대로 마트에서 파는 고기라도 사서 주말에 같이 먹으면 좋을 듯했다.

오후라 그런지 마트는 한산했다. 재경은 먼저 정육 코너로 가서 삼겹살 팩을 골랐다. 큰맘 먹고 상추와 깻잎도 사고, 초특가 세일 중인 믹스 커피가 보이길래 얼른 인터넷으로 가격 비교를 한 다음 그것도 장바구니에 담았다.

덕분에 예상보다 봉지가 묵직했지만 전부 먹을 거라서 기분은 좋았다. 잠시 후 빌라에 도착한 재경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으로 올라갔다.

냉장고 정리는 금방 끝났다. 거실로 나오며 손목시계를 보니 이제 막 오후 2시를 지나는 참이었다. 재경은 새삼스러운 기분을 느꼈다. 보통은 밤늦게 들어오기 일쑤인데, 집 안에 햇볕이 잔잔하게 비쳐드는 걸 보고 있으니 묘한 느낌이 들었다.

“참, 이럴 때가 아니지.”

방으로 들어간 재경은 노트북을 들고나와서 거실 소파에 앉았다. 한글 파일을 켠 그는 미리 형광펜 표시를 해둔 자신의 파트를 중얼거리며 외우기 시작했다.

파트는 제비뽑기로 공평하게 정했는데 쪽지를 펼치자마자 재경은 절망했다. 그가 뽑은 역할은 일회용품 사용을 남발하는 무개념 남편이었다. 일부러 약간 부족한 캐릭터로 설정했는데 대사는 또 엄청 많아서, 재경이 뽑은 걸 알고는 다들 박수를 치며 기뻐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갑자기 울리는 인터폰 소리에 재경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구 업체에서 왔다는 말을 듣고 문을 열어주자 건장한 체구의 기사들이 대형 박스를 어깨에 인 채로 나타났다.

“어디에 놓으면 됩니까?”

“이 방이에요.”

위치를 지정해준 뒤에 재경은 방해가 되지 않도록 거실로 나갔다. 소요 시간은 생각만큼 길지 않았다. 세팅을 마친 기사들이 밖으로 나왔고, 그들이 돌아가자마자 재경은 문이 열려 있는 자신의 방을 슬쩍 들여다보았다.

‘……좋네.’

견물생심이라더니. 이제껏 없이 살아도 그렇게 불편하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는데, 막상 눈앞에 있으니 좋아 보이기는 했다.

방으로 들어간 재경은 침대 가장자리에 슬쩍 걸터앉았다. 애처럼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매트리스의 탄력성을 체감하다가, 아침에 곱게 개켜둔 이불을 가져와서 침대 위에 펼쳤다.

흐뭇한 미소가 절로 나왔다. 밖으로 나간 재경은 거실에 있던 노트북을 챙겨 와서 침대 위로 올라갔다. 벽에 등을 기대고 양반다리를 한 채 또다시 중얼거리며 대사를 외우기 시작했다.

* * *

현관문을 열자마자 익숙한 스니커즈가 눈에 들어왔다. 그 옆에 나란히 운동화를 벗은 뒤에 박성범은 거실로 들어갔다. 그대로 지나치려다가, 생각을 바꿔 작은 방 문을 조용히 두드렸다.

“안에 있어?”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박성범은 조심스럽게 문손잡이를 돌리며 문을 열어보았다.

침대 위에 노트북이 입을 벌린 채로 놓여 있고, 그 옆에 이재경이 나란히 누워 있는 게 보였다. 안으로 들어간 박성범은 노트북을 책상 위에 올려둔 다음 재경의 목 밑에 베개를 넣어주었다. 들어갈 때와 마찬가지로 조용히 문을 닫고 나오는데 입가에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침대를 샀다고 말했을 때 재경의 반응은 생각보다 더 좋지 않았다. 내심 또 반품하라고 할까 봐 걱정했는데, 저렇게 누워 있는 걸 보니 주문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나도 눈이나 좀 붙일까.’

방으로 가는데 긴 하품이 흘러나왔다. 최근 박성범은 더없이 성실하고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중이었다. 방학 때까지만 해도 작업실에서 밤을 지새우기 일쑤였고, 작업이 잘 풀리지 않을 때는 줄담배를 피우는 게 다반사였다. 그랬던 것이 근래에는 시험공부를 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어제도 제법 늦게까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더니 졸음이 밀려왔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욕실에서 씻고 나오는데 핸드폰 진동음이 울렸다. 폰을 들어 확인한 순간 얼굴이 절로 굳어졌다. 긴 한숨을 내쉰 뒤에 박성범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지금 어디야?

받자마자 대뜸 어디냐고 묻는 사람은 그의 큰형인 박성호였다. 박성범은 소파에 깊숙이 몸을 묻으며 대답했다.

“집에 있어.”

- 이 시간에? 학교는 어쩌고.

“시험 기간이야. 무슨 일로 전화했어?”

- ……그냥.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서 전화했어. 공부는 하고 있는 거야?

“어.”

대답하면서도 떨떠름한 기분이 들었다. 큰형과는 사이가 좋지 않아서 1년에 한두 번이면 통화를 많이 하는 편이었다. 이렇게 뜬금없이 전화해서 어디에 있는지, 공부는 하고 있는지 물어봤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 열심히 해. 허튼 데 시간 그만 보내고.

곧 전화는 끊겼고, 박성범은 그대로 소파에 길게 드러누웠다.

보통 남자 형제만 있는 집은 치고받고 싸우면서 크는 게 일상이다. 아니면 한쪽이 포기를 하거나 양보를 해줘서 평화로운 경우가 많은데 박성범은 어느 경우에도 해당되지 않았다.

큰형과는 나이 차가 워낙 많이 나기도 하고, 장남인 데다 원래 성격도 고지식해서 어릴 때부터 아버지보다 더 엄격하게 동생들을 대했다. 반면 둘째 형은 놀기 좋아하는 날라리에 친구들을 무척 좋아했다. 성향이 극과 극이다 보니 둘은 사사건건 틈만 나면 부딪쳤다. 그 탓에 박성범은 부모님도 주지 않는 스트레스를 형들 때문에 왕창 받으며 자라야만 했다.

둘째는 글러먹었고, 큰형은 막내만이라도 반듯하게 자라기를 기대했지만 세상일은 뜻대로 흘러가질 않았다. 박성범은 일찌감치 자신의 성적 지향을 깨닫고선 중학생일 때 커밍아웃을 했고, 이후로 큰형과의 사이가 완전히 틀어져 버렸다.

어머니의 중재 덕분에 형제간의 연이 완전히 끊어지는 것은 피할 수 있었지만, 지금도 작은형에 비하면 큰형을 대하는 것이 어렵고 조금은 껄끄럽긴 했다.

‘……잠이나 자자.’

쿠션을 베개 삼아 베고 눈을 감자 금세 잠이 밀려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묘하게 거슬리는 소리에 박성범은 눈을 떴다. 벌떡 몸을 일으키자 테이블에서 요란한 진동음을 내고 있는 핸드폰이 보였다.

액정을 확인해보니 또 큰형이었다. 단잠을 방해받은 박성범은 미간을 구긴 채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아직 집에 있어?

“어.”

자다 일어난 탓에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뻐근한 목덜미로 손을 올림과 동시에 인터폰 알림이 울렸다.

- 그럼 문 좀 열어줘. 지금 빌라 현관 앞이야.

박성범은 저도 모르게 동작 그만 상태가 되었다.

“현관 앞이라고?”

- 회사 들어가기 전에 잠깐 들렀어. 뭐해? 얼른 안 열고.

벽에 붙어 있는 인터폰을 쳐다보니 손님의 방문을 알리는 빨간 불빛이 빠르게 점멸하고 있었다. 곧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선 김에 현관문까지 열어주고 기다리자 잠시 후에 복도를 걸어오는 형의 모습이 보였다.

“잘 지냈어?”

“보시다시피.”

“받아.”

음료 세트가 박성범에게 건네졌다. 거의 2년 만에 동생의 집을 방문한 박성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거실에 서서 실내를 둘러보는 거였다.

“생각보다 깔끔하네.”

도우미 아주머니가 온다는 말은 굳이 해줄 필요가 없었다. 박성범은 눈가를 한 번 꾹 누른 뒤에 형을 보며 물었다.

“오늘 회사 안 갔어?”

“거래처 미팅 갔다 오는 길이야. 마침 근처라서 잠깐 들렀어.”

이어서 박성호는 본론을 꺼냈다.

“같이 산다는 친구는.”

“……오늘 시험 끝나서, 방에서 쉬고 있어.”

“친구 형이 집에 왔는데 나와보지도 않아?”

못마땅한 기색이 가득 담긴 어조에 박성범은 또 한 번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문 열어보니까 자고 있어서 안 깨웠어. 형 온 줄도 몰라.”

이럴 줄 알았으면 밖에 있다고 할걸. 아니, 아예 전화를 안 받는 거였는데.

후회해보지만 이미 늦었다. 굳은 표정으로 서 있는 동생을 바라보며 박성호는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냈다.

“같이 산다는 놈도 게이야?”

그제야 박성범은 큰형이 갑자기 연락한 이유를 깨달았다. 며칠 전 어머니한테 말했던, 친구와 같이 산다는 말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전전긍긍하다가 두 눈으로 직접 보려고 찾아온 게 분명했다.

다시 생각해도 집에 있다고 말하는 게 아니었다고 후회하며 박성범은 뒤늦게 대답했다.

“아니야. ……말했잖아. 고시텔에 불이 크게 났는데 사정의 여의치 않아서 같이 살게 됐다고. 못 믿겠으면 기사라도 찾아보든가.”

박성호는 대답 대신 가만히 동생의 얼굴을 살폈다. 표정을 보아하니 딱히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고 보면 능글능글 웃으며 사람 복장을 뒤집는 둘째와 달리 막내는 어릴 때부터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판단을 끝낸 박성호는 무테안경을 밀어 올리며 다음 말을 꺼냈다.

“그러면 그 친구는 알고 있어? 네가 같은 거 달린 놈들 좋아하는 거.”

“……아직 몰라.”

한숨 섞인 음성으로 대답한 것도 잠시, 실수 아닌 실수를 했다는 생각에 박성범은 속으로 혀를 차고 말았다. 아니나 다를까, 표정을 굳힌 채 입술을 달싹이려는 형을 보고는 제가 먼저 선수를 쳤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신경 쓰지 마.”

하지만 형의 반응은 싸늘했다.

“알아서 하긴 뭘 알아서 해. 처음부터 말을 안 했다는 건 앞으로도 밝힐 생각이 없다는 거 아냐?”

“형.”

“나중에 그 친구가 알게 되면 배신감이…….”

“형!”

한층 낮아진 목소리에 박성호는 멈칫 입을 다물었다.

늦둥이 막냇동생이 태어났을 때 그는 중학생이었다. 그래서인지 제 눈에는 아직도 어린애와 다를 바 없는 녀석이지만, 한 번씩 저렇게 정색하고 목소리 톤을 낮추면 저도 모르게 흠칫할 때가 있었다.

긴 한숨을 내쉰 박성범이 손으로 제 얼굴을 한번 쓸고는 시선을 맞추었다.

“진짜 갑자기 같이 살게 돼서 내 성향이 문제가 될 거라는 생각을 못 했어. 엄마한테 말하면서 뒤늦게 깨닫긴 했는데, 하필 시험 기간이라서 끝나면 말하려고 했어.”

“…….”

“형이 굳이 이러지 않아도 조만간 말할 생각이었다고.”

박성호는 말문이 막히는 기분을 느끼며 마른침을 삼켰다. 거듭 안경을 밀어 올리고는 뒤늦게 입술을 달싹였다.

“뭘 잘했다고 형 앞에서 큰소리야.”

“…….”

“일단은 알겠으니까 하루라도 빨리 해결해. 나중에 괜히 듣기 싫은 소리 듣지 말고.”

“다른 할 말은 없어?”

“어머니한테 전화 좀 자주 드려. 집에도 한 번씩 들르고. 전에 너 가고 나서 많이 서운해하셨어.”

“알았어.”

대화가 끊기자 침묵이 내려앉았다. 박성호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결국 “간다.”는 한마디를 남기고는 집을 나섰다.

박성범은 거듭 한숨을 흘리며 이마를 짚고 말았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자 이재경이 거실로 나온 것이 보였다.

“일어났어?”

“어. 언제 왔어?”

“좀 전에.”

재경은 괜히 손목시계를 한 번 본 뒤에 말했다.

“나 알바 갈 시간이 다 돼서. 세수 좀 하고 올게.”

화장실로 들어간 재경은 세면대에서 찬물로 세수를 했다. 이어서 양치질을 하는 동안 자연스레 방금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깜짝 놀랐네.’

불현듯 눈을 떴을 때, 재경은 자신이 깜빡 잠들었다는 사실을 알고 매우 당황했다. 허둥지둥 시계를 확인해보니 5시를 살짝 넘긴 시간이었고, 다행히 아직 여유가 있다는 사실에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웅성거리는 소리를 인지한 것은 그다음이었다. 박성범이 집으로 돌아왔는지 문 너머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엔 전화 통화라도 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또 다른 목소리도 선명하게 들려와서 누군가가 집으로 찾아왔음을 깨달았다.

어떡하지.

또 한 번 시계를 보며 재경은 고민했다. 슬슬 나갈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은데, 밖에 다른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니 왠지 모르게 조심스러웠다. 일단 동태부터 살피자는 생각에 재경은 조용히 방문 앞으로 다가가서 귀를 기울였다.

‘그러면 그 친구는 알고 있어? 네가 같은 거 달린 놈들 좋아하는 거.’

재경은 그대로 일시 정지 상태가 되었다. ……같은 거 달린 놈을 좋아한다고? 어느덧 숨을 죽인 채 집중하고 있으니 뒤늦게 대답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 몰라.’

박성범이었다. 덕분에 재경은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어서 본능적으로 느낌이 왔다. 정황상 의문의 상대가 말한 ‘그 친구’는 자신인 듯했고, 박성범은 부정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박성범이 게이라고?

생각도 못 해본 일이었다. 와중에도 두 사람의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맹세컨대 엿듣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지만, 어찌 된 일인지 발이 굳어 움직이질 않았다. 덕분에 재경은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대화를 고스란히 듣고야 말았다.

잠시 후에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재경은 여전히 방문 앞에 선 채로 고민에 휩싸였다. 마음 같아서는 텀을 두고 나중에 나가고 싶지만 출근 시간이 점점 다가오는 게 문제였다.

전전긍긍하던 재경은 결국 방문을 열었고, 놀란 듯 쳐다보는 박성범에게 최대한 자연스럽게 말을 건넨 뒤에 화장실로 직행했다.

솔직히 말하면 놀랍기는 했다. 함께 산 지 벌써 한 달이 지났지만, 게이 같다는 느낌은 전혀 받지 못했다.

그런 느낌이 뭐냐고 묻는다면 정확하게 대답할 수는 없지만……. 가장 친한 친구 녀석도 게이이긴 했다. 고딩 때 대담하게도 골목에서 남자와 키스하는 걸 본의 아니게 목격하는 바람에 알게 됐는데, 그 때문에 우정에 금이 가는 일은 없었다. 유년 시절의 대부분을 함께 보낸 절친이기도 하고, 녀석의 성적 지향이 어떻든지 간에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친구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그래서일까. 처음엔 놀라긴 했어도 재경은 금세 무덤덤해졌다. 오히려 수건으로 얼굴을 닦은 다음 화장실 문을 열었을 때 더욱 놀라고 말았다.

이쪽을 보고 있었던 듯 박성범과 곧바로 눈이 마주쳤다. 이어서 나직하게 묻는 말이 귓가에 닿았다.

“혹시 형이랑 나랑 했던 이야기 들었어?”

갑작스러운 돌직구에 당황했지만 재경은 이내 솔직하게 대답했다.

“……어. 들으려고 한 건 아닌데, 마침 알바 갈 시간이 다 돼서…….”

박성범의 안색이 점점 어두워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괜히 제가 잘못한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재경은 서둘러 뒷말을 덧붙였다.

“진짜 일부러 엿들은 거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 나가려는데, 마침 딱 그 부분이 들려서……. 아무튼 난 네가 게이라도 크게 신경 안 써. 소문낼 일도 물론 없을 거고.”

믿어달란 뜻을 담아서 시선을 마주하자 박성범의 표정이 조금 묘하게 변했다.

“신경 안 쓴다고?”

“어. 친한 친구도 그쪽인데 지금까지 잘 지내고 있어. 그러니까 진짜 걱정 안 해도 돼. 나 입 무거워.”

그러자 박성범은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불쾌하지 않아?”

“뭐?”

“불쾌하지 않냐고. 본의 아니게 널 속인 셈이 됐잖아.”

속인 셈이 됐다고?

가만히 반추해봤지만 딱히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리고 말했다시피 재경이 처음에 동거를 고민했던 이유는 박성범과의 사이가 서먹하기 때문이었다. 바꿔 말하면 녀석이 게이인 걸 일찌감치 알게 됐다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동거를 재고하는 일은 없었을 터였다.

그래서 재경은 이번에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말했다.

“딱히 그렇게 생각 안 해. 그리고 어차피 시험 끝나면 나한테 말할 생각이었다며. 아니야?”

“그렇긴 한데…….”

“그럼 해결됐네. 나 이제 나가봐야 돼.”

시계를 보니 여섯 시까지 20분도 남질 않았다. 서둘러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갑자기 팔을 붙잡는 힘이 느껴졌다. 뒤를 돌아보니 박성범이 제 손목을 잡고 있었다.

“넌……. 이쪽 아니지?”

재경은 한발 늦게 말뜻을 이해하고 대답했다.

“아니야.”

“근데 진짜 괜찮아?”

늘 태연하던 녀석의 얼굴에 일견 긴장감이 떠오른 것이 보였다. 재경은 저도 모르게 픽 웃고 말았다.

“속고만 살았어? 사람이 사람 좋아하는 게 잘못도 아니고, 게이인 친구랑 계속 잘 지내고 있다고 말했잖아. 네가 불편하다면 할 말이 없는데……. 난 진짜 괜찮아. 진심으로.”

짧은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에 박성범은 원래의 표정으로 천천히 돌아왔고, 그 모습을 보니 이상하게도 재경은 마음이 놓이는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이 녀석도 보기와 달리 나름의 고난이나 고충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그다음이었다.

“그럼 나중에…….”

보자고 말하려는데, 박성범이 말꼬리를 자르며 뜬금없이 이름을 불렀다.

“이재경.”

“왜.”

“한번 안아봐도 돼?”

“……!”

순간 놀란 재경과 달리 박성범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덕분에 장난이라는 걸 깨닫고는 본래의 표정으로 돌아오며 여상하게 대답했다.

“몸값이 비싸서 아무한테나 안 안겨. 그리고 나 진짜 가봐야 돼.”

붙잡힌 손목을 가리키는 눈짓에 박성범은 그제야 재경의 팔을 놓아주었다. 방으로 들어간 재경이 다시 나올 때까지 박성범은 계속 그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가방은?”

“오늘은 그냥 갈 거야.”

“그래. 조심해서 다녀와.”

현관문을 열고 나가려던 재경은 문득 떠오른 생각에 뒤를 돌아보았다.

“참, 아까 침대 왔더라. ……잘 쓸게.”

이번에야말로 재경은 집을 나섰고, 박성범은 뒤늦게 걸음을 옮겨 소파에 앉았다.

습관처럼 텔레비전을 켜자 가끔 보는 예능 프로그램이 방영되었다. 하지만 화면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는 곧 고개를 숙이며 한 손으로 눈가를 덮었다.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큰일 났네.”

조만간 이재경에게 자신이 게이인 걸 밝히려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 이후의 결과는 뻔했다. 놀라는 건 당연하고, 노골적으로 싫은 기색을 드러내거나 심할 경우 집을 나가겠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람이 사람 좋아하는 게 잘못도 아니고, 게이인 친구랑 계속 잘 지내고 있다고 말했잖아.’

‘네가 불편하다면 할 말이 없는데, 난 진짜 괜찮아.’

설마 그런 말을 듣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박성범은 긴 한숨을 내쉬며 뜨끈하게 열이 오른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정말로 큰일이었다. 처음엔 진짜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자신의 성적 지향을 알고도 아무렇지 않아 하고, 조금의 거부감도 없이 평소처럼 대해주는 걸 보니 욕심 아닌 욕심이 생겨날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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