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어! 안녕하세요, 선배님!”
“……안녕.”
“여기서 알바하세요?”
“어. 몇 명이야?”
“저희 다섯 명이에요.”
“그럼 이쪽으로 와.”
재경은 창가 쪽 테이블로 일행을 안내했다. 메뉴를 정하면 벨을 눌러달라는 말을 남기고 홀로 되돌아가니 주방 근처에 서 있던 최용식이 말을 걸었다.
“아는 애들이야?”
“같은 학부 후배들이에요.”
아마도.
“저렇게 예쁜 후배들도 있었어?”
“그러게요.”
심드렁하게 대꾸하는데 마침 주방 안쪽에서 알탕과 감자튀김이 나왔다고 외치는 말이 들렸다. 재경은 서둘러 커다란 쟁반을 들었고, 냉장고에선 맥주 세 병을 꺼내서 7번 테이블로 걸어갔다.
그 테이블에도 아는 얼굴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재경을 본 주이판은 시키지 않아도 벌떡 일어서서 감자튀김 접시를 내려놓았고, 감사하다는 인사도 잊지 않았다.
서빙을 끝낸 재경은 빈 쟁반을 들고 카운터로 향했다. 언제 다가왔는지 나란히 선 최용식이 또 말을 붙였다.
“어째 요즘 널 아는 사람들이 많이 오는 거 같다?”
재경도 내심 느끼고 있는 부분이었다. 학교생활이나 일과는 딱히 달라진 점이 없는데, 알바를 하다 보면 아는 척을 하거나 선배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부쩍 많아졌다. 이유는 아마도 박성범 때문인 듯했다. 겹치는 수업이 있다 보니 본의 아니게 강의실에서 같이 나오거나 한 번씩 점심도 같이 먹는데, 그때마다 꼭 박성범에게 말을 거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면 박성범은 간단한 안부 인사를 나눈 뒤에 상대가 같은 학부 후배이면 반드시 재경을 소개해주었다. 그 때문인지 어느 순간부터는 교내에서 혼자 걷고 있는데도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고, 호프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딱히 귀찮다거나 신경이 쓰이지는 않지만 조금 신기하기는 했다. 전에는 강의를 듣든 학식을 먹든 줄곧 마이웨이였는데, 최근 들어 부쩍 인간관계가 넓어진 느낌이 들었다. 물론 대부분은 오가며 인사만 하는 정도이긴 해도 재경에겐 상당히 고무적인 변화였다.
앞치마에 든 핸드폰을 슬쩍 꺼내서 켜보자 메시지 표시가 떠 있었다. 앱을 켜서 확인해보니 아직도 유지되고 있는 가평 단톡방에 대화가 잔뜩 쌓여 있었다. 늘 그렇듯 십중팔구는 쓸데없는 잡담이었지만 보다 보면 은근히 재밌기는 했다. 오늘도 누가 웃긴 링크를 걸어줘서 피식 웃고 있으니 최용식이 넌지시 머리를 들이밀며 액정을 훔쳐봤다.
“뭐야, 여친 생겼어?”
“아뇨. 친구들이요.”
“근데 왜 그렇게 실실 웃어?”
“누가 웃긴 영상 보여줬거든요.”
“좋은 거면 같이 봐.”
동영상을 재생해서 보여주자 최용식은 금세 낄낄대며 웃기 시작했다. 잠시 후, 또 한 번 문이 열리며 손님들이 들어왔고 그중 한 명이 재경에게 물었다.
“우산 어디다 두면 돼요?”
“잠깐만요.”
재경은 퍼뜩 스태프 룸으로 들어가서 우산꽂이를 챙겨왔다. 그러고 보니 손에 다들 우산을 하나씩 들고 있는 게 비가 내리는 모양이었다. 호프집은 창문마다 검은색 시트지가 발라져 있어서 안에 있으면 바깥 날씨를 알 수가 없었다.
“제법 많이 오나 본데?”
“그러게요.”
“올 때는 멀쩡하더니만.”
잡담은 거기까지였다. 또다시 밀려드는 주문 러시에 재경은 부지런히 홀을 누볐고, 정확히 11시가 되었을 때 퇴근 준비를 하러 스태프 룸으로 향했다.
‘비 온댔지, 참.’
옷을 갈아입고 나가려던 재경은 뒤늦게 떠오른 생각에 캐비닛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문을 열고 안쪽을 살폈는데 이게 웬걸. 예전에 갖다 놓은 우산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질 않았다.
다시 한 번 샅샅이 훑어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빈손으로 나온 재경은 사장님을 대신해서 오늘 마감을 하고 가는 최용식에게 말을 걸었다.
“형, 혹시 남는 우산 있어요?”
“아마 없지 싶은데……. 아니면 창고 한번 뒤져 봐봐. 손님들이 놔두고 간 거 있을 수도 있어.”
그 말에 기대를 가지고 창고로 향했지만 이번에도 헛수고였다. 우산이 있긴 한데, 얼마나 오래 묵혀뒀으면 하나같이 녹이 슬거나 제대로 펼쳐지지도 않는 것들뿐이었다. 그래도 비를 맞고 가는 것보다는 나을 듯해서 그나마 멀쩡한 걸로 집어 드는데 핸드폰이 울리며 전화가 왔다. 발신자는 박성범이었다.
“여보세요?”
- 여보세요? 알바 끝났어?
“어. 무슨 일이야?”
- 문자했는데 답장이 없어서. 집에 가는 중이야?
“이제 나서려고.”
- 그럼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나도 지금 집에 가는 중인데, 그쪽으로 데리러 갈게.
몹시 솔깃한 제안이었지만 재경은 잠깐 고민하다가 거절했다.
“됐어. 그냥 걸어가면 돼.”
- 지금 비 많이 오고 있어. 어차피 가는 길이니까 같이 들어가. 10분 뒤에 도착할 거 같아.
“……그럼 그러든가.”
못 이기는 척 대답하자 웃음 띤 목소리로 하는 말이 들려왔다.
- 금방 갈 테니까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재경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핸드폰을 내려다봤다. ……얌전히는 무슨. 속으로 투덜거리며 밖으로 나오니 재경의 빈손을 본 최용식이 의아하단 표정을 지었다.
“우산 못 찾았어?”
“아뇨. 있긴 한데, 친구가 데리러 온대서 그냥 나왔어요.”
“잘됐네. 근데 뭔 친구길래 비 오는 날 데리러 와? 그것도 이 시간에.”
“지금 신세 지고 있는 그 친구예요.”
“아하.”
최용식은 그제야 납득이 간다는 표정을 짓다가 금세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설마 여자는 아니지?”
“당연하죠.”
어처구니없어하는 표정이 보이지도 않는지 최용식은 전혀 개의치 않고 제 할 말을 이어갔다.
“요샌 대학생들도 동거 많이 하잖아. 그러고 보니 넌 아직도 여친 없어?”
“없어요. 그럼 먼저 가볼게요, 형.”
“오냐. 조심해서 들어가라.”
1층에 도착해서 보니 정말로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다. 재경은 핸드폰 시계를 확인했다. 박성범이 온다고 했던 시간까지 2분 정도 남아 있었다.
통행에 방해가 되지 않게끔 안쪽으로 바짝 붙어 서서 정면을 바라봤다. 궂은 날씨에도 맞은편 상가들은 불야성처럼 환하게 불이 켜져 있고, 사람들은 다들 우산을 쓴 채 길을 걸어갔다.
잠시 후에 웬 남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왼손에는 우산이, 오른손에는 샌드위치가 들려 있었는데, 재경의 시선이 닿은 곳은 바로 남자가 들고 있는 샌드위치였다. 저도 모르게 입안에서 군침이 돌았다. 크게 한입 베어 먹으며 지나가는 모습을 보니 허기가 절로 밀려왔다.
알바 시간이 꽤 긴 만큼 도중에 한 번 간식을 먹을 때가 있는데, 오늘 주방에서 내준 간식은 계피가 들어간 떡이었다. 재경은 대체로 가리는 것 없이 잘 먹는 편이긴 하지만 계피 향은 취향에 맞질 않았다. 그래도 준비해 준 성의를 생각해서 한 조각만 맛을 보고, 같이 나온 오렌지 주스로 입가심을 했다. 이후로는 아무것도 먹은 게 없으니 허기가 들 법도 했다.
한번 자각하니 온갖 먹거리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라면, 우동, 김밥, 떡볶이, 어묵……. 마침 호프집 상가 근처에는 늦은 시간까지 하는 간이 포장마차가 있었다. 비도 내리겠다, 매콤달콤한 떡볶이에 어묵 국물을 곁들여 먹으면 그야말로 꿀맛일 것 같았다.
‘안 되겠다. 얼른 갔다 오자.’
결국 재경은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상가 건물 밖으로 뛰쳐나갔다. 별 소용없음을 알면서도 한 손으로 비를 막으며 포장마차로 뛰어갔더니 다행히 아직 영업 중이었다.
“어서 와요. 뭘 좀 줄까?”
재경은 습관처럼 1인분만 포장해 달라고 말하려다가, 누군가를 떠올리고는 생각을 바꿨다.
“떡볶이 3인분이랑 어묵 4개 포장해 주세요.”
혼자 먹기엔 많은 양을 주문한 이유는 박성범 때문이었다. 같이 사는 데다 오늘은 데리러 와주기까지 하는데 딸랑 1인분만 사면 얌체가 따로 없을 것 같았다. 분식을 좋아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운전 중인 사람한테 전화로 묻기도 그래서 일단은 넉넉하게 샀다.
‘혹시 남으면 내일 먹어도 되니까.’
일회용 용기에 가득 담기는 떡볶이를 보면서 군침을 흘리는데 또 한 번 핸드폰이 울렸다.
- 어디야? 상가 앞에 잠깐 차 세웠는데 너 안 보이는 거 같아.
“잠깐 뭐 좀 사러 왔어. 금방 갈게.”
곧 묵직한 봉지가 건네졌고, 재경은 서둘러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박성범의 말마따나 상가 입구 앞에 세워진 차를 발견하고는 조수석에 올라탔다.
“어디 갔다 왔어?”
“야식 사러.”
“야식?”
“비 오니까 떡볶이랑 어묵이 먹고 싶어서.”
“맛있겠네.”
곧 박성범은 부드럽게 핸들을 돌리며 차를 출발시켰다. 오늘도 차 안에서는 어김없이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차창을 두드리는 빗소리와 애절한 발라드가 묘한 조화를 이뤘고, 잠시 후에 차는 빌라 앞에 도착했다.
“잠깐만 있어 봐.”
시동을 끈 박성범이 먼저 차에서 내렸다. 시키는 대로 잠깐 기다리고 있으니, 곧 조수석 문이 열리며 우산이 내밀어졌다. 덕분에 재경은 비를 맞지 않고 빌라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집에 도착한 재경은 비닐봉지를 식탁 위에 잠깐 내려두고 욕실로 직행했다. 마음 같아서는 사온 것들을 얼른 먹고 싶지만, 포장마차에 다녀오는 동안 비를 제법 많이 맞아서 샤워부터 먼저 하는 게 나을 듯했다.
속전속결로 씻고 나오자 박성범의 모습은 보이질 않았다. 방으로 가니 문이 살짝 열려 있어서 재경은 가볍게 노크했다.
“있어?”
“어. 왜?”
이윽고 문이 열리며 박성범의 얼굴이 보였다. 재경은 가렵지도 않은 목덜미를 긁적이며 느리게 입술을 달싹였다.
“……떡볶이 좀 먹을래? 넉넉하게 샀거든.”
다행히 박성범은 몹시도 좋아했다.
“안 그래도 출출했는데 잘됐네. 옷만 갈아입고 바로 나갈게.”
“알았어.”
곧장 셔츠 단추를 푸는 그를 뒤로한 채 재경은 먼저 주방으로 돌아갔다.
“와, 양 엄청 푸짐하네.”
떡볶이 그릇을 본 박성범이 감탄사를 흘렸다. 아무렇지 않은 척 앉아 있긴 하지만 재경은 속으로 내심 당황하는 중이었다. 3인분을 사본 건 처음이라서 이렇게 양이 많을 줄은 몰랐다.
“잘 먹을게.”
먼저 젓가락을 움직이는 상대를 따라서 재경도 떡볶이 떡 하나를 입에 넣었다. 먹자마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살짝 식긴 했어도 먹기 딱 좋은 정도였고, 이번에는 오뎅을 집어서 맛을 보았다.
박성범도 잘 먹기는 마찬가지였다. 출출했다는 게 정말인지 떡볶이에 이어서 어묵 국물도 연거푸 떠먹으며 말했다.
“이거 먹으니까 소주 생각나네.”
꼴깍, 저도 모르게 침이 넘어갔다. 혼자 살 땐 집에서 술을 마신 적이 거의 없지만, 훌륭한 안주가 눈앞에 있고 비도 계속 내려서 그런지 덩달아 소주 생각이 났다.
머릿속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박성범이 은근한 어조로 제안했다.
“한잔할래? 전에 사둔 거 남았을 텐데.”
“……그럴까?”
“얼른 가져올게.”
냉장고 문이 열리는 소리와 덜커덩하는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잠시 후에 돌아온 박성범의 손에는 각종 전리품이 한가득 들려 있었다. 테이블에 놓이는 술병을 본 재경이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물었다.
“양주도 마시게?”
“소주가 한 병뿐인데 이걸로는 모자랄 것 같아서. 사러 나가긴 귀찮고.”
박성범은 곧 소주병을 따서 재경의 잔부터 채워주었다. 재경도 그의 술잔을 채워주었고, 서로 가볍게 잔을 부딪친 뒤에 소주를 마셨다.
기분 탓인지 오늘따라 술이 달게 느껴졌다. 잠깐 멈췄던 젓가락을 움직이며 박성범이 물었다.
“학교는 어디 나왔어? 고등학교.”
“운남고.”
“운남고?”
“안산에 있는 학교야.”
“어쩐지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더라. 줘봐. 내가 따라줄게.”
어느덧 반 정도밖에 남지 않은 소주병을 기울이며 박성범이 말을 이었다.
“학교 다닐 때 공부 잘했나 봐.”
재경은 뒤늦게 말뜻을 이해하고 대답했다.
“그럭저럭. 근데 너도 마찬가지지 않아?”
지금 두 사람이 다니는 학교는 소위 말하는 탑급 명문대였다. 이제야 하는 말이지만 재경은 중학생 때부터 기를 쓰고 공부에 매달렸다. 집에 돈은 없고, 유일한 가족은 건강이 좋지 않은 할아버지뿐이었다. ‘결핍’이라는 것은 어린아이도 일찌감치 현실을 직시하도록 해주었다. 재경은 공부를 통한 성공을 일찌감치 인생 목표로 설정하고, 중학생 때부터 전교 상위권을 놓치지 않았다.
그래도 꽉 막힌 공부벌레는 아니라서 학창 시절엔 나름 친구들도 많고 교우 관계도 좋은 편이었다. 함께 주말 내내 PC방에 눌어붙어 있다거나 용돈을 팍팍 쓰며 놀지는 못해도 점심시간이나 체육 수업 때 축구를 하면 반드시 껴서 함께 어울렸다.
그런데 성인이 되니 오히려 그조차 어렵게 됐다. 생계를 오롯이 책임져야 하다 보니 동기들끼리 모이는 술자리나 과 모임에 참석할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나마 학비는 장학금과 대출로 버티고 있긴 하지만, 빚으로 차곡차곡 쌓여간다고 생각하면 가끔은 숨이 막혔다.
“한잔 더 할래?”
듣던 중 반가운 말에 재경은 냉큼 빈 잔을 내밀었다. 확실히 오늘따라 술이 술술 넘어갔다. 마지막 잔을 아낌없이 양보한 박성범은 한 번 더 냉장고 문을 열고 얼음을 꺼내 왔다. 양주를 홀짝이는 모습을 보면서 재경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대체 무슨 조합이야 그게.”
떡볶이에 양주라니, 듣도 보도 못한 광경이었다. 뭘 말하는지 깨달은 듯 박성범도 덩달아 웃음을 흘렸다.
“한잔 줄까?”
“독할 거 같은데.”
“생각만큼 안 독해. 얼음 타서 먹으면 마실 만할걸.”
“……그럼 조금만 줘.”
결국 재경도 소주에서 양주로 갈아탔다. 처음엔 아주 살짝 맛만 봤다가, 생각보다 괜찮은 것 같아서 곧바로 한 모금을 삼켰다. 목이 찌르르 울리면서도 목 넘김이 부드러운 게 확실히 소주와는 느낌이 달랐다.
“가족 관계는 어떻게 돼?”
고개를 들자 여유롭게 이쪽을 바라보는 박성범과 눈이 마주쳤다. 슬슬 열이 오르는 재경과 달리 취기가 전혀 느껴지질 않는 멀쩡한 얼굴이었다.
“갑자기 그건 왜 물어봐?”
“그냥, 궁금해서. 개인적인 대화는 거의 해본 적이 없잖아.”
듣고 보니 정말 그랬다. 매일 밤낮으로 얼굴을 보고 있긴 하지만, 사적인 이야기는 주고받은 기억이 별로 없었다. 딱히 비밀로 할 만한 일도 아니었기에 재경은 술을 한 모금 더 마신 뒤에 대답했다.
“할아버지랑 계속 같이 살았는데 지금은 요양 병원에 계셔. 고등학생 때부턴 삼촌 집에 얹혀살았고.”
시선은 저도 모르게 박성범의 얼굴을 향했다. 보통 이런 얘길 꺼내면 사람들은 미안해하거나 동정 어린 눈길을 보내곤 했다. 그런데 박성범은 아니었다. 손에 들린 잔을 홀짝이더니 덤덤하게 묻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힘들진 않았어?”
그렇다고 놀리거나 비웃는 표정도 아니었다. 예상에 없던 반응에 재경은 당황해하다가 뒤늦게 대답했다.
“……눈치가 좀 보이긴 했지. 그래도 삼촌이 날 거둬줘서 다행이었어. 집에 어른이 있는 거랑 없는 거랑은 느낌부터가 다르니까.”
그땐 한창 예민할 시기라 심적으로도 많이 힘들었고, 모진 말을 서슴없이 해대는 삼촌을 원망하기도 많이 했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삼촌 가족이라도 있어서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그래서 대학에 합격하자마자 경수 공부를 봐달라던 숙모의 부탁도, 성인이 되었으니 생활비를 보태라는 삼촌의 요구도, 버겁지만 묵묵히 들어주었다.
그 때, 갑자기 박성범이 팔을 뻗어서 재경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재경은 떡볶이를 먹다 말고 눈썹을 꿈틀했다.
“뭐야?”
“그냥. 기특해서.”
“…….”
“장하다, 이재경.”
아주 어렸을 때 학교 선생님이나 해주시던 행동을 눈앞의 놈이 대뜸 하니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재경은 당황해서 눈을 깜빡이다가 뒤늦게 박성범의 팔을 밀어냈다.
“하지 마. 오글거려.”
방황하던 눈동자에 마침 양주병이 눈에 들어왔다. ……마시려고 꺼낸 거니까. 재경은 스스로를 납득시키며 빈 잔을 가득 채웠고, 단숨에 절반 정도를 들이켰다. 젖은 입가를 손등으로 닦고는 박성범을 쳐다봤다.
“넌 어떤데?”
“응?”
“넌 가족 관계가 어떻게 되냐고.”
“난 부모님 계시고, 3형제 중 막내야.”
“막내라고?”
“어. 귀엽고 애교 많은 막내.”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자 박성범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재경은 다시금 술을 홀짝였다. 귀엽고 애교 많은 모습은 상상도 안 가고 상상하고 싶지도 않지만, 집에서 사랑을 듬뿍 받으며 부족함 없이 자랐다는 건 왠지 알 것 같았다.
‘그래서 베풀 줄 알고, 나이에 비해서 여유로움이 있는 거겠지.’
하지만 딱히 질투심이 들지는 않았다. 날 때부터 타고난 환경은 제힘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고, 가질 수 없는 것을 시기하고 부러워해 봤자 마음만 좀먹어갈 뿐이었다. 재경은 꽤 어린 나이에 그 사실을 깨달았다.
문득 재경의 눈에 잔을 만지작거리는 박성범의 손이 보였다. 체격이 좋아서 그런가. 분명 똑같은 잔으로 마시고 있는데, 박성범이 들고 있으니 양주잔이 아니라 자그마한 소주잔을 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키 큰 건 유전이야?”
“어. 아버지도 크고, 형들도 둘 다 180 넘어. 난 고등학생 때도 동복만 세 번인가 새로 맞췄어.”
술이 들어가서 그런 걸까. 이렇게 가까이에서 마주 보고 대화를 나눠도 생각만큼 어색하지 않았다. 빈 잔을 발견한 박성범이 또다시 재경의 잔을 채워주웠다.
“양주도 잘 마시네.”
“……그러게.”
재경도 오늘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다. 흘끗 병을 쳐다보니 어느덧 절반 정도가 사라지고 없었다. 인지한 순간 갑자기 취기가 확 밀려오는 느낌이 들었다. 내일도 1교시 수업이 있기 때문에 이것만 마시고 일어나는 게 좋을 듯했다.
“졸업하면 뭐할 거야?”
“취직해야지.”
무성의하고도 상투적인 대답에 박성범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거야 당연하다면 당연하고. 구체적인 직종이 있을 거 아냐.”
“대기업 아니면 연구소 위주로 준비 중이야.”
“역시, 그쪽인가.”
“아니면 다른 학교로 갔지. ……학비도 더럽게 처비싼데.”
다시 생각해도 사립대 학비는 고학생에겐 가혹할 정도로 비쌌다. 생각하니 또 속이 쓰려서 한숨을 내쉬는데 박성범이 살짝 고개를 숙인 채로 어깨를 들썩이는 것이 보였다.
우는 건 아닐 테고. 그럼 웃는 건가.
판단을 끝낸 재경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추궁하듯 말을 꺼냈다.
“왜 갑자기 웃어?”
“그냥……. 네 입에서 처비싸단 말이 나오니까 왠지 웃겨서.”
습관처럼 웃는 녀석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웃음 허들이 어지간히도 낮은 모양이었다. 재경은 남은 술을 단숨에 들이켠 뒤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웃어서 화났어?”
“화는 무슨. 가서 자려고.”
“벌써?”
“시간 많이 지났어.”
시계를 보진 않았지만 체감상 왠지 그럴 것 같았다. 잘 자라는 인사를 남기고 방으로 돌아가려는데, 순간 눈앞이 핑 돌며 다리에 힘이 풀렸다.
“이재경!”
박성범이 서둘러 붙잡아준 덕분에 가까스로 바닥에 처박히는 꼴은 면할 수 있었다. 재경은 어지럼증에 눈을 감고 있다가 뒤늦게 고개를 들었다. 눈앞의 사물이 두세 개로 보이는 걸 보니 제대로 취기가 도는 모양이었다.
“괜찮아?”
“……괜찮아. 갑자기 일어나서 그래.”
“방까지 데려다줄까?”
“아니. 혼자 갈 수 있어.”
재경은 눈가를 꾹 한 번 누른 뒤에 박성범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뒷정리는 내일 내가 할게. 잘 마셨어.”
걸음걸이가 다소 불안정하긴 해도 쓰러질 정도는 아니었다. 재경은 정신을 다잡으려 노력하며 한 발 한 발 천천히 걸음을 옮겼고, 와중에도 용케 화장실로 들어가서 칫솔을 입에 물었다. 느릿하게 칫솔질을 하는데 이번에는 급격히 졸음이 밀려왔다. 간신히 양치질을 마친 재경은 비틀대며 방으로 들어갔고, 쓰러지듯 눕자마자 그대로 암전이 찾아왔다.
* * *
“으음…….”
잠결에 느껴지는 한기에 재경은 신음을 흘리며 몸을 움츠렸다. 미간에는 점점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 분명 얼마 전만 해도 이러다 녹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날씨가 무더웠는데, 언제 이렇게 기온이 낮아졌는지 모를 일이었다.
뒤척이다가 반대로 돌아눕는데 불현듯 따뜻한 무언가가 손에 닿았다. 재경은 본능적으로 더듬더듬 손을 움직였고, 잠결에도 만족감을 느끼며 몸을 바짝 붙였다. 뭔지는 몰라도 제법 길쭉한 것을 꼭 껴안은 채 다시금 잠을 청하려는데 뒤늦게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방에는 이런 온기를 전해줄 만한 물건이 없었다. ……그럼 지금 내가 안고 있는 건 대체 뭐지?
“……!”
깨닫자마자 소스라치게 놀라며 벌떡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두통이 느껴졌다. 엄습하는 숙취에 이마를 부여잡고 끙끙 앓던 재경은 뒤늦게 겨우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어쩐 일인지 제 옆에 반듯하게 누워서 자고 있는 박성범의 얼굴이 보였다. 당장 눈에 들어오는 광경만 봐도 이곳은 제 방이 아니었다. 재경은 혼란스러움을 느끼며 어젯밤의 기억을 더듬었다.
둘이서 야식을 먹으며 술을 마셨던 것까지는 기억난다. 그리고…….
“아으…….”
순간 또다시 밀려오는 두통에 신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그 소리에 반응한 박성범이 눈썹을 꿈틀하며 잠에서 깼다. 몸을 일으키자마자 제 옆에서 머리를 감싸 쥔 채 신음하는 이재경이 보였다.
“일어났어?”
“어…….”
재경의 입에서 다 죽어가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잠시 후에 간신히 고개를 들며 박성범과 시선을 마주했다.
“왜 내가 여기에 있어?”
가만히 쳐다보던 박성범이 입가를 끌어올리며 웃었다.
“기억 안 나? 어제 우리 장난 아니었는데.”
“……!”
재경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혼란스러움이 다분히 드러나는 모습을 보며 큭큭 웃다가 박성범은 뒤늦게 진실을 알려주었다.
“농담이고, 자다가 느낌이 이상해서 깼는데 네가 내 옆에 누워 있더라. 나 진짜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어.”
친절한 설명이 이어졌지만 재경은 순순히 믿지 않았다.
“……거짓말이지?”
“내가 뭐 하러 그런 거짓말을 해. 어제 너 술 마시고 네 방으로 갔었는데, 그것도 기억 안 나?”
“…….”
비틀대며 방으로 들어갔던 것까지는 어찌어찌 기억이 났다. 재경은 그만 이마를 짚고 말았다. 그 이후의 일은 전혀 기억에 없지만, 아무래도 잠결에 혹은 술김에 실수를 한 모양이었다.
“미안. 화장실 갔다가 방을 착각했나 봐.”
“그건 괜찮은데……. 아냐. 술 마시면 그럴 수도 있지 뭐.”
너그럽게 하는 말이 이어졌지만 재경은 외려 불안함을 느꼈다. 박성범이 뭔가 다른 말을 하려다가 멈춘 듯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욱신거리는 이마를 짚은 채 어떻게든 어젯밤의 제 행적을 떠올려 보려했지만, 누가 기억을 싹둑 잘라낸 것처럼 아무것도 생각이 나질 않았다.
‘……설마 무슨 실수라도 한 건 아니겠지?’
기억이 없다는 것이 이렇게 무서운 일인 줄 미처 몰랐다. 한숨을 푹 내쉰 재경은 뒤늦게 박성범을 쳐다보며 떨어지지 않으려는 입술을 억지로 달싹였다.
“방금 무슨 말 하려고 했던 거야?”
“뭐?”
“좀 전에 뭐라고 하려다가 말 돌렸잖아.”
“아아.”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박성범이 거듭 웃었다.
“별건 아니고, 진짜 잠버릇이 있는 거 같아서.”
“……잠버릇?”
“어. 너, 어제도 나한테 엄청 달라붙어서 잤어. 예전에 펜션에서도 그랬잖아.”
이 또한 재경의 기억에는 전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딱히 거짓말을 한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고, 그럴 이유도 없었다. 그리고 생각해 보니 오늘 아침에 정신이 든 것도 제가 붙잡고 있던, 묘하게 뜨겁던 무언가 때문이었다. 상황 판단을 끝낸 재경은 또 한 번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미치겠네.’
애꿎은 뒷머리를 벅벅 헝클다가 뒤늦게 입술을 달싹였다.
“추워서 그랬나 봐. ……진짜 미안.”
“잘 잤으면 됐지 뭐. 근데 괜찮아? 얼굴이 안 좋은 거 같은데.”
“숙취가 좀 있어서.”
사실은 조금이 아니었다. 가뜩이나 골이 띵한데 머리를 굴렸더니 이제는 깨질 것처럼 욱신거렸다. 내쉬는 숨에서도 술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소주 한 병 정도는 거뜬히 마시는데 이렇게 숙취가 심한 걸 보니 아무래도 그 뒤에 마신 양주 때문인 듯했다.
“잠깐 있어 봐.”
박성범이 의자 등받이에 걸쳐둔 트레이닝 바지를 꿰어 입고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에 돌아온 그의 손에는 머그잔 두 개가 들려 있었다.
“일단 물부터 좀 마셔.”
재경은 사양하지 않고 컵을 건네받았다. 순식간에 한 잔을 비웠더니 또 다른 컵이 내밀어졌다.
“이건 꿀물이야. 찾아봤는데 숙취 해소제는 없더라.”
염치 불고하고 꿀물이 담긴 잔도 말끔히 비웠다. 그동안 장승처럼 앞에 서 있던 박성범을 올려다보며 뒤늦게 물었다.
“넌 괜찮아?”
같이 달렸다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멀끔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옆머리가 삐죽 튀어나와 있긴 했지만, 상반신 나체에 반반한 얼굴 때문인지 그조차도 묘하게 섹슈얼한 느낌이 풍겼다.
“난 멀쩡해. 더 잘 거 아니면 나가서 해장이나 하자.”
“지금 몇 시나 됐어?”
박성범이 침대 헤드 위에 올려둔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10시 12분이네.”
생각만큼 늦게 일어난 건 아닌……. 잠깐만. 10시 12분이라고?
재경은 사색이 되어서 벌떡 일어났다. 10시 12분이라니, 3분만 있으면 1교시 강의가 끝난다는 뜻이었고, 지금 상태로 봐서는 2교시 수업도 날릴 가능성이 다분했다. 이제껏 결석은커녕 지각 한 번 해본 적이 없던 재경에게는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일이었다.
“미친…….”
재경은 그대로 화장실로 직행했다. 벼락 세수를 하고, 30초 만에 양치질을 끝내고는 방으로 가서 되는 대로 옷을 주워 입었다. 낚아채듯 백팩을 들고나오니 박성범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은 채로 문 앞에 서 있었다.
“설마 그러고 학교에 가려고? 숙취도 있다면서.”
“그래도 가야지.”
제 몰골이 어떠한지는 방금 재경도 화장실 거울로 확인한 바였다. 하지만 지금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2교시 담당 교수는 출결을 매우 중시하기 때문에 강의가 끝나면 지각 체크라도 해야만 했다. 그런 남의 속도 모르고 박성범은 태평한 소리를 해댔다.
“그러지 말고 이따 같이 나가자. 다음 수업도 어차피 그른 거 같은데.”
“잘하면 세이프할 수도 있어. 먼저 갈게.”
재경은 서둘러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1층에 있는 엘리베이터가 올라오기를 기다리는데, 잠시 후에 슬리퍼 소리를 내면서 박성범이 다가왔다.
“눌러야 내려오지.”
곧 길쭉한 손가락이 내려가는 버튼을 눌렀다. 그제야 재경은 제가 버튼도 안 누르고 멍청하게 서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혀를 차는데, 갑자기 무언가가 머리를 덮었다.
“모자라도 쓰면 좀 나을 거야.”
더듬더듬 손을 올려보니 야구 모자의 윤곽이 만져졌다. 재경은 고맙단 인사를 한 뒤에 엘리베이터 문을 거울 삼아서 모자를 고쳐 썼다. 녀석의 말마따나 모자를 쓰니 그나마 한결 나아 보였다.
곧 문이 열리며 박성범이 먼저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닫힘 버튼은 재경이 눌렀다. 문득 옆을 쳐다봤다가 저도 모르게 말을 꺼냈다.
“그러고 가게?”
지금 보니 박성범도 만만치 않았다. 물론 얼굴은 멀끔하지만 옷차림이 문제였다.
패션에 문외한인 제가 봐도 박성범은 평소에 옷 스타일이 제법 좋은 편이었다. 벨트 하나도 신경 써서 하는 타입인 듯한데, 지금 녀석은 검은색 무지 티셔츠에 트레이닝 바지를 입고 발에는 삼선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재경의 표정을 본 박성범이 입가를 올리며 웃었다.
“그렇게 별로야?”
“별로라기보다는……. 다들 놀랄 거 같아서.”
“김성욱이 보면 엄청 비웃긴 하겠네.”
이내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박성범은 빠르게 차를 몰았다. 경영관 앞에 도착하자마자 재경은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렸다. 1분 1초가 급하지만 그래도 예의상 기다려주는데, 조수석 창문이 열리며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얼른 들어가.”
“넌 안 내려?”
“너 데려다주려고 온 거야. 내가 양주도 까자고 한 바람에 늦잠 잔 거 같아서.”
“아…….”
“시간 간다. 빨리 들어가.”
박성범이 턱짓으로 뒤편 건물을 가리켰다. 그의 말마따나 지금도 계속해서 시간이 가고 있었기에 재경은 부랴부랴 건물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 * *
집으로 돌아온 박성범은 패잔병처럼 침대 위에 털썩 드러누웠다. 거의 밤새 잠을 설치다시피 했더니 뒤늦게 피곤함이 밀려왔다.
이재경이 새벽 중에 제 방으로 들어온 것은 사실이었다. 사실 그전까지만 해도 박성범은 한창 달게 자고 있었다. 어제 늦게까지 녹음실에서 열중하기도 했고, 집에 와서는 소주에 양주까지 마셨더니 눈을 감자마자 곧바로 잠이 들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이상한 기척을 감지했다. 잠결에 몸을 뒤척이는데 묘하게 따뜻한 무언가가 제 몸에 닿아 있는 느낌이 났다. 깨달은 순간 박성범은 번개 맞은 사람처럼 벌떡 몸을 일으켰다. 순간 여기가 어딘가 싶어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제 방인 것을 알고는 서둘러 무드 등을 켜고 옆을 돌아봤다. 그랬더니 이쪽을 보는 자세로 누워 있는 이재경의 얼굴이 보였다.
‘……왜 여기에 있지?’
혼란스러워하던 박성범은 뒤늦게 상황을 파악했다. 어제 같이 술을 마신 뒤에 이재경은 비틀대면서도 분명히 자기 방으로 들어갔었다. 그러니 나중에 화장실을 갔거나 물이라도 마신 뒤에 방을 착각해서 여기로 들어온 모양이었다.
잠깐 이재경을 바라보다가 박성범은 그의 허리께에 걸려 있는 이불을 어깨까지 잘 덮어주었다. 그러곤 무드 등 전원을 끄고 다시 잠자리에 누웠다.
눈을 감으며 도로 잠을 청했다. 하지만 놀라서 깨버린 탓인지 정신이 지나치게 맑았다.
……아니, 이유는 또 있었다. 언제부턴가 이재경이 내쉬는 숨소리가 들렸다. 인식한 순간부터 묘한 기분이 들었다. 예전에 펜션에서도 잠깐 같이 잠든 적이 있긴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전혀 다른 상황이었다.
친구로서 잘 지내고 싶다는 마음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하지만 이재경이 제 이상형에 가깝다는 것 또한 변함없는 사실이었다. 그런 놈이 제 옆에서, 심지어 한 침대 위에서 무방비하게 자고 있는데 신경이 쓰이지 않는 게 이상할 노릇이었다.
‘잠이나 자자.’
머릿속 생각을 한숨으로 몰아내며 다시금 눈을 감았다. 자랑은 아니지만 박성범은 게이 바나 클럽에서 인기가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다가오는 사람들이 많은데, 굳이 잠든 상대를, 그것도 게이가 아닌 사람에게 손대는 짓을 할 리가 없었다.
그와는 별개로 섹스를 안 한 지 꽤 오래되긴 했다. 내일은 오랜만에 클럽이나 갈까. 일부러 이런저런 딴생각을 하다가, 어느 순간 박성범은 흠칫 놀라 몸을 굳혔다. 이재경이 옅은 신음을 흘리며 뒤척이더니 갑자기 품으로 파고들다시피 한 까닭이었다.
“……이재경?”
놀라서 이름을 불렀지만 상대는 요지부동이었다. 굳게 감긴 눈꺼풀도 그렇고, 내뱉는 숨소리도 규칙적인 걸 보니 단순히 잠결에 자세를 바꾼 듯했다.
떼어 낼 생각으로 손을 움직였지만, 막상 곤히 잠든 얼굴을 보니 밀어내기도 어려웠다. 결국 옅은 한숨을 내쉬며 그냥 눈을 감고 말았다. 이후로는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번뇌의 시간이 이어졌다. 한동안 이런저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던 그는 동이 터오를 무렵에 간신히 잠이 들었다.
그 여파가 뒤늦게 사정없이 밀려왔다. 맘 같아서는 이대로 자고 싶었지만, 박성범은 또 한 번 유혹을 이겨내고 몸을 일으켰다. 한껏 기지개를 켠 뒤에 티셔츠를 벗으며 욕실로 들어갔다.
아침에 본 이재경은 상태가 정말로 좋지 않아 보였다. 오늘도 구내식당에 갈 게 뻔하니, 밖으로 데려가서 해장이나 같이할 생각이었다.
* * *
10시 42분. 최선을 다했지만 안타깝게도 지각이었다. 그래도 뒷문이 있는 강의실이라서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재경은 기척을 죽인 채로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문틈으로 안을 살펴보니 다행히 빈자리가 드문드문 있었다. 교수가 잠깐 시선을 돌린 틈을 타서 재경은 티 나지 않게 조용히 의자에 앉았다.
‘아이고, 머리야…….’
혼자서 미션 임파서블을 찍는 긴장감에 잠깐 잊고 있던 두통이 다시금 밀려왔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본전은 뽑아야 한다는 생각에 재경은 옆자리에 앉은 남학생의 책을 슬쩍 훔쳐보고 똑같은 페이지를 펼쳤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지각한 학생들 나와서 출석 체크하세요.”
흡사 다섯 시간처럼 길게 느껴지던 50분이 지나가고, 재경은 퍼뜩 일어나서 단상 쪽으로 걸어갔다. 줄을 서서 기다렸다가 조교에게 이름을 밝혔다. 터덜터덜 제자리로 돌아가는데 아직 남아 있던 김성욱이 재경을 알아보고 놀란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
“뭐야, 너 왔었어?”
“어.”
“네 지정석 비어 있던데?”
누차 말하지만 재경은 이제껏 지각조차 한 번 해본 적이 없는 모범생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확인 사살을 당하게 되니 새삼스레 입안이 썼다.
“지각했어.”
“와, 해가 서쪽에서 뜨겠네.”
김성욱이 금세 재경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어째 몰골도 영 꾀죄죄하네. 늦잠 잤어?”
“……어.”
거듭 밀려오는 두통에 재경은 이마를 짚었다.
“나 지금 나무에서 떨어진 원숭이 보는 기분이야.”
표정을 확 구겼지만 김성욱은 눈도 깜빡하질 않고 낄낄 웃을 뿐이었다.
“오랜만에 밥이나 같이 먹자. 학식 갈 거지?”
“정혜는.”
“친구들이랑 같이 먹는대. 끼고 싶지만 알다시피 내가 부끄러움이 많잖아.”
“부끄러움은 개뿔.”
속이 쓰려서 밥 생각은 딱히 없지만 오후 강의를 들으려면 뭐라도 먹긴 해야 할 것 같았다. 나란히 강의실을 나서는데 핸드폰이 징징거리며 울렸다. 이름을 확인하고 곧장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수업 끝났어?
“어.”
- 그럼 같이 해장하러 가자. 나 지금 경영관 앞에 있어.
재경은 곧 놀란 목소리로 되물었다.
“아까 집으로 돌아간 거 아냐?”
- 갔다가 씻고 나왔어.
오늘 수업은 전부 쨀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걷다 보니 1층 출입문이 보였고, 재경은 계속 통화를 이어갔다.
“근데 성욱이가 점심 같이 먹자던데.”
- 달고 가면 되지. 얼른 나와.
“……알았어.”
전화를 끊자마자 김성욱이 물었다.
“누구야?”
“박성범. 점심 같이 먹자고 하네.”
“오늘 안 온 거 아냐? 걔 지정석도 비어 있던데.”
재경은 저도 모르게 옆을 쳐다봤다.
“그걸 다 기억해?”
“내가 원래 동기들한테 관심이 지대하잖아. 크크. 암튼 어디라는데?”
“경영관 앞이래.”
“그래? 어, 진짜 있네.”
재경의 눈에도 계단 아래쪽에 서 있는 박성범이 보였다. 깔끔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세팅한 머리에 적당히 멋을 낸 옷차림까지. 여전히 추레한 자신과 달리 박성범은 아침과는 완전히 딴판인 모습으로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괜한 민망함에 모자 캡만 만지작거리는데 어김없이 김성욱이 먼저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
“요, 날라리! 수업은 왜 쨌어?”
“술 마셔서 늦잠 잤어. 받아.”
무언가가 재경에게 내밀어졌다. 엉겁결에 받고 보니 숙취해소제였다.
“왜 이재경만 줌? 나도 줘.”
“숙취해소제야.”
김성욱의 눈매가 금세 가늘게 변했다.
“뭐야. 어제 둘이서 달린 거야?”
“집에서 한잔했어.”
“와 씨, 니들 존나 치사하다. 술 마시면서 날 안 불렀다고?”
“집에서 마셨다니까.”
“그니까 왜 안 불렀냐고. 나도 어제 술 엄청 땡겼는데.”
찡찡대는 놈을 깔끔하게 무시하며 박성범은 재경을 바라봤다.
“머리 아픈 건 괜찮아?”
“……어.”
“점심은 뭐 먹을래. 육개장이나 해장국 먹으러 갈까? 후문 쪽에 잘하는 식당 있는데.”
그러자 김성욱이 냉큼 대답을 가로챘다.
“해장엔 해장국이 최고지. 근데 뭘 얼마나 마셨길래 둘 다 못 일어나?”
“소주 한 병이랑 양주 조금.”
“헐. 야앙주? 나 빼고 마신 것도 서러운데, 양주까지 깠다고?”
누가 보면 엄청난 배신이라도 당한 것 같은 표정이 김성욱의 얼굴에 떠올랐다. 그러더니 갑자기 손뼉을 짝 치며 뭔가가 생각난 사람처럼 말했다.
“나도 이참에 너네 집으로 들어갈까?”
무덤덤하던 박성범의 표정이 처음으로 흐트러졌다. 이재경을 한 번 쳐다봤다가 다시금 시선을 돌리며 대답했다.
“꿈도 꾸지 마.”
“왜. 셋이 살아도 존잼일 거 같지 않음?”
“우리 집이 무슨 아지트인 줄 알아? 그리고 남는 방도 없어.”
“재경이랑 같이 쓰면 되지. 아님 너랑 같이 써도 되고.”
표정을 보아하니 진심이라기보다는 그냥 한번 던져보는 말 같았다. 그래서 박성범은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대신 농담으로 장단을 맞춰주었다.
“월세 감당할 자신 있으면 들어오든가.”
“얼만데.”
“월세 50, 관리비 30.”
“와 씨, 날강도가 여기 있었네. 112에 신고하면 되냐?”
걷다 보니 어느덧 해장국집이 코앞이었다. 점심시간이라 그런지 식당은 먼저 온 손님들로 만석이었다. 그래도 얼마 안 있어 빈자리가 났고, 다소 촉박한 시간을 고려해서 통일성 있게 같은 메뉴를 주문했다.
“근데 진짜 생각보다 잘 지내는 거 같다?”
“뭐가.”
“뭐긴. 니들 말이지. 살짝 질투가 나려는데, 그런 의미에서 오늘 한잔 콜?”
술잔을 들이켜는 시늉을 본 재경이 질색하며 인상을 구겼다.
“나 다 죽어가는 거 안 보여?”
“나 빼고 둘만 달려서 벌 받은 거야. 그리고 어리석은 중생인 너님이 뭘 모르나 본데, 원래 술은 술로 푸는 거야.”
“약 팔고 있네.”
“진짜야. 너 나 못 믿음?”
“좀 작게 말해. 머리 깨질 거 같아.”
박성범은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을 흥미로운 표정으로 쳐다봤다. 김성욱이야 신입생 OT 때부터 알아주는 오지라퍼에 말 많기로 정평이 나 있어서 새삼스러울 게 없는데, 이재경이 저렇게 다 받아주는 모습은 지금도 좀 신기했다.
볼 때마다 혼자인 것도 그렇고, 늘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어서 박성범도 학부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재경이 몹시 까칠하고 대하기 어려운 타입이라고 은연중에 생각했었다. 그런데 겪어보니 전혀 아니었다. 물론 말수가 많다거나 요란한 성격은 아니지만, 은근히 재밌는 구석이 있으면서 생각보다 대화도 잘 통했다.
하지만 아직은 조심스러워하는 느낌이 들 때가 있는데, 김성욱과 같이 있을 때는 달랐다. 말도 훨씬 편하게 할뿐더러 시끄럽다는 타박도 서슴지 않고 한다.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하는 모습은 상상이 되질 않는데 말이다.
팔짱을 낀 채 지그시 김성욱을 바라보고 있으니 시선을 느낀 듯 이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왜 그렇게 쳐다봐?”
“그냥. 못생김이 넘치도록 묻어 있어서.”
“와, 밥 먹으러 와서 뜬금없이 시비 거네. 오늘 함 뜰까?”
“오징어.”
“헐.”
“꼴뚜기.”
“허얼.”
“말미잘.”
“야, 이 초딩 새끼야.”
“식사 나왔습니다.”
마침 타이밍 좋게 직원이 웨건을 끌고 다가왔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뚝배기가 테이블 위에 놓이자 김성욱은 언제 눈을 부라렸냐는 듯 냉큼 숟가락을 들고 국물 맛을 보았다.
“크, 끝내주네.”
밥까지 말아서 퍽퍽 떠먹는 김성욱과 달리 재경은 그제야 숟가락을 들었다. 식당에 와서도 입맛이 없긴 마찬가지였는데 막상 시작하니 생각이 달라졌다. 뜨거운 국물을 후후 불며 먹는데 김성욱이 또 말을 걸었다.
“참, 나 중경론 노트 좀 빌려주라. 여기저기 막 해놨더니 엉망진창이야.”
“맨입으로는 안 돼.”
“내가 널 하루 이틀 겪냐? 식권 세 장 쏠게.”
“다섯 장. 거기에 캔 커피 올리면 생각해볼게.”
“……콜.”
“참, 캔 커피도 다섯 개야.”
“와. 날강도가 여기 또 있네. 둘이 부부사기단 아님?”
“싫음 말고.”
옆에서 불을 뿜든 말든 재경은 묵묵히 식사를 이어갔다. 그러고 보니 곧 있으면 중간고사 기간이었다. 보통 중간고사는 생략하거나 다른 과제로 대체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번에는 네 과목이나 시험이 있어서 부담이 제법 컸다.
식사를 마치고 캠퍼스로 되돌아온 재경은 다음 수업을 듣기 위해서 상학관 건물로 향했다. 15분 정도 여유 시간이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무미건조하게 울리던 신호음이 끊기며 숙모가 전화를 받았다.
- 여보세요?
“저예요, 숙모.”
- 무슨 일이니?
“저 곧 있으면 중간고사 기간이라서요. 경수 과외 2주만 쉬고 시험 끝나면 다시 시작할게요.”
그러자 예상대로 못마땅한 기색이 담긴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 잠깐 와서 봐주는 것도 안 되니? 아니면 경수랑 같이 공부하든가.
혼자서 공부하는 습관이 몸에 밴 재경에게는 참으로 난감한 제안이었다. 게다가 중학생인 경수는 지난주에 벌써 시험이 끝났기 때문에, 놀자며 꼬시거나 방해 아닌 방해를 할 것이 뻔했다. 재경은 들리지 않게 한숨을 내쉬고는 대답했다.
“주말에 스터디 모임이 있어서 힘들 거 같아요. 대신 다음에 가면 좀 더 많이 봐줄게요.”
- ……그럼 어쩔 수 없지. 알았다.
전화를 끊자마자 거듭 한숨이 흘러나왔다. 재경은 눈가를 꾹 누른 뒤에 강의실로 되돌아갔다. 이제는 충분히 익숙해졌다고 생각하지만, 한 번씩 답답함이 차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 * *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시간을 확인한 교수가 먼저 강의실을 나갔다. 가방을 챙긴 박성범은 친구들과 함께 구내식당으로 향했다.
“뭐 먹을 거야?”
“난 돈가스 정식.”
이제는 식권 자판기 뒤쪽 벽에 붙어 있는 오늘의 메뉴를 확인하는 것도 익숙해졌다. 전에는 거의 올 일이 없었는데 이번 학기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오후 수업 때문에 시간이 빠듯해서 일주일에 기본 두세 번은 구내식당을 이용하는 중이었다.
줄은 생각보다 빠르게 빠졌다. 박성범은 식판을 든 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변을 둘러봤지만 찾는 사람의 모습은 보이질 않았다.
“저쪽에 자리 비었네.”
박성범의 행동을 자리를 찾는 것으로 오해한 친구가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마침 근처에서 밥을 먹던 동아리 후배들이 인사를 건넸고, 박성범은 넉살 좋게 인사를 받아준 뒤에 식사를 시작했다. 불성실했던 캠퍼스 라이프에 비해서 박성범은 아는 사람들이 많았다. 본래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기도 하고, 한잔하자는 전화가 걸려오면 바쁘지 않은 이상 나가서 얼굴을 비친 덕분이었다.
돈가스 정식은 딱히 맛있지도, 그렇다고 맛이 영 없지도 않았다. 식사를 마치고 나온 박성범은 강의실로 가기에 앞서 도서관에 잠깐 들렀다. 1층 로비에 있는 카페가 목적이었고, 커피를 마시며 휴대폰을 확인해보니 웬일로 아버지한테 문자가 와 있었다.
[문자보면 전화해 아들]
박성범은 곧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머리 굵은 여느 자식들처럼 연락을 그렇게 자주 하지는 않아도 아버지와는 사이가 꽤 좋은 편이었다.
“여보세요? 저예요, 아버지.”
- 그래. 점심은 먹었어?
“네. 아버지는요?”
- 나도 방금 먹었어. 이번 주 토요일 저녁에 시간 좀 비워둬.
“엄마 생신 때문에 그런 거죠?”
- 응? 알고 있었어?
“당연하죠.”
부모님 결혼기념일이나 가족들 생일 등, 중요하지만 자칫 놓치기 쉬운 기념일을 박성범은 캘린더 앱에 매해 반복으로 저장해뒀다. 덕분에 그는 흐뭇함이 듬뿍 묻어나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 내일 아침에 엄마한테 전화라도 해줘.
“그래야죠. 집에는 별일 없죠?”
- 아무 일도 없어. 너는, 학교생활 잘하고 있어?
“물론이죠. 그럼 주말에 뵐게요.”
- 그래. 들어가라.
전화를 끊고 보니 어느덧 다음 수업까지 시간이 얼마 남질 않았다. 남은 커피를 단숨에 들이켠 뒤에 박성범은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