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물 만난 물고기들이 저럴까.
‘다들 잘도 노네.’
비꼬는 게 아니라 정말로 그랬다. 조금 전, 생각보다 차가운 계곡물에 놀란 재경은 무릎까지만 들어갔다가 결국 후퇴하고 커다란 바위 위에 자리를 잡았다. 반면 다른 녀석들은 수중 비치발리볼을 빙자한, 반칙과 몸싸움이 난무하는 공놀이를 즐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와중에 한 놈은 1인용 에어매트에 드러누워서 자연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신선놀음이 따로 없었다.
“넌 안 들어가?”
인기척에 옆을 돌아보니 박성범이 보였다. 분명 조금 전까지 물속에 있었던 것 같은데 언제 여기로 올라왔나 싶다.
“물이 차가워서.”
“추운 거 싫어하나 보네.”
춥다기보다는 단순히 물이 차가운 거지만, 굳이 정정할 필요는 없…….
“으앗!”
갑자기 무언가가 팔뚝에 닿는 느낌에 재경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반팔 티 아래로 드러난 자신의 팔을 박성범이 잡고 있는 게 보였다.
“뭐야?”
“닭살 돋은 게 보여서. 수건이라도 갖다 줄까?”
“됐어.”
재경은 뒤늦게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나방이나 벌레가 아니라서 천만다행이었다.
그건 그렇고, 박성범의 손은 여전히 뜨거웠다. 분명 좀 전까지 계곡물을 휘젓고 놀았을 텐데 이렇게 빨리 원상 복귀된 게 신기할 정도였다. 여름엔 싫겠지만 날씨가 추울 때는 상당히 좋을 것 같았다.
“계속 여기 있을 거야?”
“아마도.”
혼자 펜션으로 돌아가 버리면 기껏 여기까지 따라온 보람이 없었다. 그리고 딱히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깨끗한 공기를 마시며 마음 편히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그 때였다. 문득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계곡으로 이어지는 계단으로 젊은 여자들이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앳된 얼굴도 그렇고, MT촌인 장소를 생각하면 이쪽처럼 친구들끼리 놀러 온 대학생들 같았다.
“벌써 작업 들어가나 보다.”
박성범의 말마따나 동기 중 한 놈이 은근슬쩍 여자들 쪽으로 다가가는 모습이 재경의 눈에도 보였다. 잠깐 이야기를 주고받나 싶더니, 이내 젊은 청춘남녀들은 한데 어울려서 놀기 시작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긴 머리카락을 한데로 질끈 묶은 여학생이 이쪽을 가리키며 무어라 말을 하는 것 같았다. 소리가 들리지는 않지만 느낌이 왔다. 아마도 일행이냐 물어본 것 같고, 타깃은 두말할 필요 없이 박성범일 게 분명했다.
힐끗, 재경의 시선이 옆을 향했다. 솔직히 말하면 같은 남자인 제가 봐도 난 놈이긴 했다. 얼굴도 잘생겼고, 몸도 좋고, 남자의 자존심인 거기도…….
크흠,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재경이 운을 뗐다.
“안 내려가? 네 이야기 하는 거 같은데.”
“둘 다 내려와! 같이 놀자.”
마침 김성욱이 이쪽을 바라보며 큰 목소리로 외쳤다. 하지만 박성범은 몸을 일으키는 대신 니들끼리 놀라며 짧게 대꾸했다. 재경도 마찬가지로 거절했다.
“너는 왜 안 가?”
“말했잖아. 물이 차가워서 싫다고.”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마시던 맥주가 떨어지자 박성범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속 여기 있을 거야?”
재경은 잠깐 고민하다가 무릎을 짚으며 일어났다.
“아니. 갈 거면 같이 가자.”
다들 물놀이에 정신이 팔려서 이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런데 돌계단 앞에 이르렀을 때 대뜸 등 뒤에서 외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니들 어디 가?”
“먼저 가서 쉴게.”
짤막하게 대꾸한 박성범이 먼저 계단을 올랐다. 재경이 그 뒤를 따랐고, 잠시 후에 눈에 익은 펜션이 나타났다. 가방에서 속옷을 꺼내 든 재경은 뒤를 돌아보며 예의상 박성범에게 물었다.
“먼저 씻을래?”
“너부터 씻어.”
재경은 사양 않고 욕실로 향했다. 샤워를 끝내고 나오자 박성범이 교대하듯 안으로 들어갔고, 재경은 쌓여 있던 이불 중 하나를 펼쳐서 피곤한 몸을 뉘었다.
방 안은 쾌적하고, 몸은 뽀송뽀송하고, 그야말로 천국이 따로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김성욱이 생일이라며 찡찡대지만 않았어도 끝까지 거절했을 텐데, 막상 와보니 따라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사이 샤워를 마친 박성범이 밖으로 나왔다. 문을 닫고 돌아선 그의 눈에 어떤 장면이 포착됐다. 좀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이재경이 옆으로 몸을 움츠린 채 누워 있었다. 잠깐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그쪽으로 다가갔다.
“자냐?”
“…….”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샤워만 하고 나왔으니 길어봤자 10분 남짓일 텐데, 그새 저렇게 잠든 걸 보니 어지간히 피곤한 모양이었다.
그대로 상대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했다. 4년 전, 처음 봤을 때부터 생각한 거지만 얼굴 하나는 다시 봐도 정말로 제 취향이었다.
내심 잘 지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럴 만한 기회는 생기지 않았다. 이재경은 학기 초부터 과 모임에 거의 참석하질 않았고, 어쩌다 한 번씩 와도 구석 자리에 앉아 있다가 서둘러 돌아가기 일쑤였다.
제대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오가며 마주쳐도 눈인사를 나누는 것조차 어색한 사이였는데, 한 지붕 아래 같이 살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박성범은 뒤늦게 시선을 거두며 가방 안에 든 이어폰을 꺼냈다. 하나씩 귀에 꽂고는 이재경 옆에 나란히 누웠다. 밤새도록 퍼마시며 놀 게 뻔하니 그 전에 잠깐이나마 눈을 붙일 생각이었다.
* * *
눈을 떴을 때 제일 먼저 보인 것은 새카만 무언가였다. 밀려오는 졸음에 다시금 눈을 감는데 어디선가 시끌벅적하게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그중엔 낄낄대며 웃는 익숙한 목소리도 섞여 있었다. 덕분에 재경은 자신이 오늘 김성욱의 생일 파티를 빙자한 동기 모임에 낀 것을 기억해냈다.
“하암…….”
재경은 긴 하품을 하며 일어나 앉았다. 눈은 여전히 감은 채였다. 과제며 레포트 때문에 늦게 잔 데다 아까 잠깐이나마 물속에서 놀았더니 몹시도 졸렸다. 와중에도 밖에서 떠드는 소리는 여전했다. 도저히 흘려들을 수 없는, 고기 운운하는 말을 듣고는 뻐근한 뒷목을 주무르며 그제야 눈을 떴다.
“……!”
무심결에 고개를 돌렸다가 화들짝 놀랐다. 바로 옆에 누군가의 다리가 있었다. 반사적으로 후다닥 물러서자 이쪽을 보는 자세로 누워 있는 박성범의 얼굴이 보였다.
‘깜짝 놀랐네.’
다리만 봤을 땐 진짜 간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이 자식이 왜 내 옆에 누워 있나’ 하는 표정으로 쳐다보다가, 아까 같이 펜션으로 돌아왔던 것을 생각해냈다. 편하게 누워 있는다는 게 그만 그대로 잠이 들어버린 모양이었다.
벌컥-
문이 열리며 김성욱이 방으로 들어왔다. 갑자기 쏟아지는 형광등 불빛에 재경은 인상을 찌푸렸다.
“어, 깼네. 안 그래도 니들 깨우려고 들어왔는데.”
“다른 애들은?”
“밖에 있어. 저 새낀 완전 한밤중이네.”
옆을 돌아보니 박성범은 정말로 숙면 중이었다. 불빛 때문에 눈이 부실 법도 한데 평온한 얼굴로 잘도 잔다.
“고기 구울 거니까 나와. 참, 아까 걔들이랑 저녁 같이 먹기로 했어. 교대 2학년 애들이래.”
재경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구겼다.
“정혜는 어쩌고?”
“난 당연히 바람잡이 역할만 하지. 내가 우리 여보야 놔두고 한눈파는 그런 쓰레기 짓을 할 것 같아?”
“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꾸하자 김성욱이 허공에 대고 주먹질하는 시늉을 해 보였다.
“양재가 맘에 드는 애가 있다고, 분위기 좀 몰아달라고 하더라. 암튼 빨리 나와. 걔네들까지 오면 고기 모자랄걸.”
그래놓곤 쌩하니 나가버리는 놈을 보니 조급함이 차올랐다. 재경은 서둘러 박성범을 깨우기 시작했다.
“야, 일어나.”
“…….”
“저녁 안 먹을 거야?”
말로만 했더니 요지부동이라서 할 수 없이 팔을 잡고 흔들어 깨웠다. 잠시 후에 박성범이 부스스 눈을 뜨더니 상체를 일으켰다.
“몇 시야?”
“6시 넘었어.”
벽시계를 본 뒤에 재경이 대답했다. 속으로는 내심 놀라는 중이었다. 보통은 자고 일어나면 몰골이 우스꽝스럽기 마련인데, 박성범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었다. 방금 깬 거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멀끔한 데다 목소리도 멀쩡했다. 살짝 가라앉은 것 같긴 한데 그마저도 얼굴과 무척 잘 어울렸다.
그러다 문득, 아주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옷, 입고 있네.”
“뭐?”
“잘 땐 벗고 잔다며.”
이내 박성범이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당연히 집에서만 그러지. 변태로 잡혀갈 일 있어?”
“……아.”
“옷 입고 있어서 서운했나 봐.”
재경의 얼굴이 대번에 구겨졌다. 그냥 입 다물고 나가는 거였는데, 잠이 덜 깼는지 괜한 말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고로 먼저 달라붙은 사람은 너야.”
“뭐?”
“자는데 누가 날 더듬길래 깼는데, 보니까 너더라고. 원래 껴안고 자는 버릇이라도 있어?”
“없어.”
몇 년째 혼자 사는 데다가 인형은커녕 베개도 하나뿐인 사람한테 껴안고 자는 버릇이 있을 리가 없었다. 아무래도 모함이 틀림없다고 생각하며 재경은 퉁명스레 말을 이었다.
“깼으면 나와.”
벌떡 일어서서 그대로 문을 열고 나갔다. 마당에는 동기 놈들뿐만 아니라 좀 전에 김성욱이 귀띔해준 대로 여학생들도 평상에 앉아 있었다. 재경은 곧 바비큐 기계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목장갑을 낀 양재현이 집게로 막 삼겹살을 집어 드는 것이 보였다. 곧 치직거리며 맛있는 소리가 났고, 재경은 소시지 봉지를 뜯으며 눈치껏 식사 준비를 도왔다.
“맛있겠다.”
뒤를 돌아보니 언제 나왔는지 박성범이 서 있었다. 식사 준비는 순조롭게 진행됐고, 잠시 후에 다들 상 앞에 빙 둘러앉아서 작은 종이컵을 하나씩 들었다.
“다 같이, 위하여!”
식상한 건배사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식사 타임이 시작됐다. 고기는 생각보다 양이 많았고, 다들 신나게 웃고 즐기며 푸짐하게 배를 채웠다. 한 가지 의외인 점은 재경의 옆자리에도 여학생 한 명이 앉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깐 왜 먼저 들어가셨어요?”
“물이 너무 차가워서요.”
통성명을 시작으로 이런저런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오갔다. 엄밀히 말하면 상대방이 먼저 질문을 하면 재경이 짧게 대답하는 식이었고, 대충 식사가 마무리된 것을 보고는 자진해서 뒷정리에 나섰다.
쌓은 빈 그릇을 들고 공용 주방으로 향하는데 김성욱이 따라 붙었다. 표정만 봐도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짐작이 갔고, 아니나 다를까 능글맞게 웃으며 팔꿈치로 옆구리를 쿡쿡 찔러댔다.
“나현인가? 걔 너한테 완전 관심 있어 보이던데.”
재경의 오른편에 앉아 있던 여학생 이름이었다. 확실히 밥 먹는 내내 계속해서 말을 붙이긴 했지만, 원래 성격이 그런지 아니면 김성욱의 말마따나 호감이 있어서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대답하기가 애매해서 입 다물고 설거지만 하는데 김성욱이 옆에서 불쑥 면상을 들이밀었다.
“이재경 선수, 이참에 솔로 탈출하는 겁니까?”
“저리 가. 술 냄새 나.”
“그러지 말고 한 말씀 해보시죠. 네?”
전혀 굴하지 않고 마이크를 내미는 시늉까지 하는 김성욱은 몹시도 신나 보였다. 그러든 말든 재경은 묵묵히 설거지에만 집중했다. 오지랖에 비해서 끈기가 턱없이 부족한 놈이라 금세 떨어져 나갈 걸 알기 때문이었다.
예상대로 김성욱은 존나 재미없는 놈이라고 투덜대며 스르륵 물러났다. 아니, 물러나는 척하며 불시에 재경의 옆구리를 힘껏 간지럽혔다.
“죽을래?!”
재경이 버럭 화를 내며 뒤돌아 봤지만 김성욱은 이미 멀찌감치 달아나고 있었다. 낄낄 웃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막냇동생이 일곱 살이라더니, 가끔씩 하는 짓이 유치하기 짝이 없었다. 나가면 뒤통수나 한 대 후려쳐야겠다고 생각하며 다시금 설거지에 몰두하는데 또다시 인기척이 들렸다.
“저…….”
뒤를 돌아보니 뜻밖의 인물이 서 있었다. 김성욱이 희희낙락하며 언급했던 바로 그 여학생이었고, 잠깐 머뭇거린다 싶더니 조심스럽게 꺼내는 말이 이어졌다.
“혹시 연락처 알려줄 수 있으세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오빠가 마음에 들어요.”
재경의 얼굴에 난감함이 떠올랐다. 잠깐 뜸을 들이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미안한데, 지금 제가 누구를 사귈 만한 상황이 못 돼요. 죄송합니다.”
“그러면 우선 연락만이라도…….”
“아니요. 그것도 곤란할 거 같아요.”
조금 더 냉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쩔 수 없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재경은 제대로 된 직장을 잡기 전까지는 누구와도 사귈 마음이 없었다. 그런데 거절하기 곤란하다고 해서 연락처를 알려줘봤자 서로 시간 낭비일 뿐이었다.
“정말 안 돼요?”
“네.”
“……알겠어요. 방금 한 말은 못 들은 걸로 해주세요.”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인 여학생이 빠른 걸음으로 멀어졌다. 재경은 짤막한 한숨을 흘리고 말았다.
이성에게서 고백을 받은 게 처음은 아니다. 학교는 물론이고 알바하는 호프집에서도 가끔 번호를 알려달라고 말하는 여자들이 있었지만, 재경은 단 한 번도 응한 적이 없었다. 말했다시피 먹고사는 것만 해도 바빠서 그럴 만한 여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설거지를 끝내고 밖으로 나갔더니 평상은 텅 비어 있었다. 다들 어딜 갔나 싶어 주위를 두리번거리는데 펜션 안에서 갑자기 왁자지껄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고개를 돌리니 현관 앞에 얼기설기 얽혀 있는 신발이 보였고, 재경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다 했냐?”
문 옆에 앉아 있던 김성욱이 아는 체를 했다. 방 한복판에서는 두 놈이 서로 헤드락을 걸며 난리도 아니었다. 재경은 김성욱 옆에 나란히 앉으며 벽에 등을 기댔다.
“의리도 없이 나만 빼놓고 들어와?”
“밥 먹고 나니까 할 일이 없더라고.”
“여자애들은.”
“좀 전에 갔어. 더 놀자고 했는데 늦어서 가봐야 된다……는 건 당연히 핑계일 거고. 깠지?”
확신에 가득 찬 어조였다. 재경은 뒷목을 긁적이며 말을 돌렸다.
“재현이는 어떻게 됐어?”
“번호 땄다더라. 완전 신났어 지금.”
김성욱의 말마따나 만개한 꽃처럼 웃는 얼굴이 보였다. 덕분에 재경은 그나마 한시름 덜 수 있었다. 남의 애정 전선까지 망치지 않아서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슬슬 달려볼까?”
큰 소리로 말한 김성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돌아온 놈의 팔에는 소주병이 가득 안겨 있었고, 다들 꽃향기에 홀린 벌처럼 모여들면서 금세 술판이 벌어졌다.
이후로는 예상대로 광란의 시간이 이어졌다. 시커먼 남자들끼리 마시면서 무슨 재미가 있겠냐 싶었는데 오산이었다. 오글거리는 구호와 함께 듣도 보도 못한 각종 술자리 게임이 이어질 때마다 재경은 그야말로 신세계를 접하는 기분이었다.
초반에는 벌칙주를 두어 번 마셨지만 금세 적응해서 요리조리 잘 피해 갔다. 시간이 흐를수록 분위기는 무르익었고, 빈 술병도 줄을 섰다. 오늘의 최대 희생자는 양재현과 김성욱이었다. 혼자만 그린 라이트를 켠 괘씸죄로 양재현은 집중 공격을 받았고, 김성욱은 게임을 더럽게 못해서 자꾸만 제 무덤을 제가 팠다. 결국 김성욱이 먼저 백기를 들면서 게임은 끝이 났다.
벌컥-
“와 씨, 죽을 거 가타…….”
화장실 문이 열리며 김성욱이 또 네 발로 기어 나왔다. 혀가 풀리고 눈동자는 썩은 생선처럼 흐리멍덩했다. 몇 걸음 못 가서 풀썩 쓰러지는 꼴을 보고 재경은 속으로 혀를 찼다.
‘저럴 줄 알았지 내가.’
한숨을 내쉬며 일어선 재경은 김성욱을 질질 끌고 와서 쓰러진 무리 옆에 눕혀주었다. 후우, 내뱉은 숨에서 술 냄새가 났다. 금세 곯아떨어진 다른 놈들처럼 재경도 주량을 살짝 넘길 정도로 술을 마셨다. 벌칙에는 많이 안 걸렸지만, 웃고 떠들면서 물처럼 맥주며 소주를 마셔댄 탓이었다.
“안 되겠다.”
재경은 빈자리에 누우려다가 생각을 바꿔 몸을 일으켰다. 안주도 틈틈이 주워 먹었더니 속이 더부룩했다.
‘어?’
문을 열고 나오던 걸음이 멈칫했다. 아무도 없을 줄 알았던 평상에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뒷모습만 봐도 박성범이었고, 인기척을 느꼈는지 뒤를 돌아보는 놈과 시선이 마주쳤다.
눈까지 마주쳤는데 말없이 다시 들어가기도 뭣해서 재경은 스니커즈를 구겨 신고 평상으로 걸어갔다. 모퉁이에 걸터앉으니 나직하게 묻는 목소리가 들렸다.
“안 잤어?”
“잘 거야. 바람 좀 쐬고 들어가려고.”
말소리가 끊기자 적막이 맴돌았다. 하지만 예전만큼 어색하지는 않았다.
“아까 그 애, 왜 거절했어?”
“뭐?”
“밥 먹을 때 네 옆에 앉아 있던 애 말이야. 딱 봐도 너한테 관심 있는 눈치던데, 고백받은 거 아냐?”
재경은 잠깐 침묵을 지키다가 뒤늦게 대답했다.
“그냥…… 아직은 누굴 사귈 만한 여력이 안 돼. ……내 형편 뻔히 알고 있잖아.”
평소였으면 하지 않았을 뒷말이 이어진 것은 아마도 술기운 때문일 거다. 한발 늦게 후회가 밀려들었다. 그건 그렇다며 사람 속을 긁어대려나.
생각과 달리 덤덤하게 대꾸하는 말이 이어졌다.
“그래도 연애는 할 수 있잖아. 마음만 끌리면.”
살짝 놀란 시선이 박성범을 향했다. 옆모습이 진지한 걸 보니 농담 같지는 않았다. 끔뻑끔뻑, 느리게 눈을 깜빡이다가 서로 시선이 마주쳤고, 재경은 뒤늦게 짧은 웃음을 터뜨렸다. 딴에는 위로랍시고 한 말인가 보다.
“만나서 얼굴만 볼 일 있어? 밥도 먹고, 차도 마시고, 데이트도 하고. 근데 나는 그럴 여력이 안 된다는 거야.”
학창 시절에는 미친 듯이 공부에 열중하느라, 수능을 친 뒤에는 학비며 생활비를 버느라 다른 데 신경을 쓸 틈이 없었다. 물론 예쁜 여자들을 보면 눈길이 가긴 해도 그냥 그뿐이었다. 애인을 사귀고 싶다거나, 성적인 행위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 적은 거의 없었다. 혈기왕성한 고딩 때조차 일주일에 한 번 빼내면 많이 하는 거였다.
정말 ‘이 사람이다.’ 싶은 사람이 있으면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아직까지는 그런 사람을 만난 적이 없었다.
문득 박성범은 어떤지 궁금했다. 다른 사람의 연애에는 별 관심이 없지만, 대화 주제가 이쪽으로 흘러서인지 아니면 술김에 오지랖이라도 발동한 건지 불현듯 궁금함이 들었다.
“너는 여자친구 없어?”
“없어.”
당연히 있을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덕분에 또 한 번 순수한 의문이 들었다.
“왜?”
“왜긴. 없으니까.”
지그시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는지 픽 웃으며 몇 마디를 더 보탠다.
“솔직히 말하면……. 한 사람한테 진득하게 감정을 쏟는 것보단 가볍게 만나고 헤어지는 게 편해. 그러다 정말 잘 맞다 싶으면 오래가는 거고.”
짧은 침묵을 깨며 핸드폰이 울렸다. 재경은 폰을 가지고 나오질 않았으니 당연히 박성범의 것이었고, 그는 양해를 구한 다음 전화를 받았다.
- 여보세요? 뭐하냐?
주변이 워낙 조용한 탓에 상대방의 목소리가 여과 없이 들려왔다. 자리를 피해줘야겠다는 생각에 슬그머니 몸을 일으키는데 갑자기 팔을 턱 붙잡는 손길이 느껴졌다. 박성범이 여기 있으라는 듯한 눈짓을 보냈다.
엉거주춤 평상에 다시 앉은 재경은 방금 붙잡혔던 팔목을 무의식중에 다른 손으로 쓸었다. 그러고 보면 박성범은 곧잘 전화가 걸려오는 편이었다. 둘만 있는 게 그리 흔하지도 않은데 벌써 몇 번이나 본 것 같았다. 와중에도 통화는 계속되고 있었다.
- 뭘 벌써 자. 애들 다 있으니까 나와. 거짓말 아니고, 오늘 물 끝내주게 좋아.
“가고 싶어도 못 가. 지금 서울 아니야.”
- 서울 아니라고? 설마 애인이랑 여행이라도 간 거야? 이거 의리 없는 자식이네.
뒤에서 ‘뭐? 애인이랑 여행?!’ 하는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고, 박성범은 핸드폰을 잠깐 귀에서 떼며 미간을 꾹 눌렀다. 전화를 받는 게 아니었다고 후회하며 뒤늦게 대답했다.
“친구들이랑 놀러 왔어. 끊어.”
- 거짓…….
뚝.
흥분 섞인 목소리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전화를 끊은 뒤에도 박성범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가 잠시 후 고개를 돌리며 재경을 바라보았다.
“미안. 시끄러웠지? 워낙 목소리가 큰 형들이라서.”
“괜찮아. 근데 난 왜 잡은 거야?”
“나 때문에 들어가면 미안하잖아.”
재경은 눈을 깜빡거리다가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의미 없는 손가락 장난을 치며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본래는 좀 더 일찍 물어보고 싶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질 않아서 몇 번이고 속으로 삼켰던 물음이었다.
“왜 같이 살자고 했어?”
“뭐?”
“……그렇잖아. 까놓고 말해서 우리가 친했던 것도 아니고, 고작 이름이나 알던 사이인데 왜 그랬나 싶어서.”
누군가를 갑자기 자신의 생활공간 안에 들이는 것. 가족이라도 쉽지 않을 거라는 게 재경의 생각이었다. 집이 홀랑 타버렸으니 불쌍하다거나 안타까운 마음은 들 수 있겠지만, 냉큼 자신의 공간을 내어주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과한 호의였다.
“고작 이름만 알던 사이는 아니지. 성도 알고 나이도 알잖아.”
“…….”
일그러지는 표정을 본 박성범이 웃음을 터뜨렸다.
“솔직하게 말할까, 아니면 모범답안으로 말할까.”
뜻 모를 아리송한 질문이 이어졌다. 재경은 잠깐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둘 다 말해줘.”
“똑똑하네. 하나만 고를 줄 알았는데.”
“지금 놀리는 거야?”
“아닌데.”
“……알았으니까 대답이나 해봐.”
“일단 모범답안은, 같은 학번 동기가 큰 곤경에 빠졌다는 말을 들으니 안타까워서. 그리고 솔직하게 말하면…….”
박성범이 잠깐 뜸을 들였다가 거듭 말을 이었다.
“얼굴이 맘에 들어서 그랬어.”
“뭐?”
“네 얼굴이 맘에 든다고.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거든.”
재경의 얼굴이 또 한 번 천천히 구겨졌다. 확실히 술에 취하긴 했는지 이해하는 데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잠시 후에 재경은 느릿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얼빠야?”
“…….”
짧은 정적이 흐른 뒤에 박성범이 돌연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상황에 재경은 더더욱 마뜩잖은 표정이 되었다.
혼자 미친놈처럼 웃던 놈이 느닷없이 재경의 머리를 벅벅 헝클었다. 재경은 얼른 팔로 밀어내며 불만스럽게 목소리를 높였다.
“뭐 하는 거야?”
“그냥. 생각보다 더…….”
더 뭐?
그런 표정으로 쳐다봤지만 뒷말을 들을 수는 없었다. 박성범의 얼굴에는 여전히 의중을 알 수 없는 웃음이 남아 있었다.
“농담이고, 어려울 땐 서로 도와야지. 난 진짜 신경 안 쓰니까 있고 싶은 만큼 있어도 돼. 내가 먼저 나가라고 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
정곡을 찌르는 말에 재경은 그만 멈칫하고 말았다. 박성범의 지적은 정확했다. 사정상 어쩔 수 없이 신세를 지고 있긴 하지만, 언제 쫓겨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은연중에 계속 남아 있었다.
얼굴 전체에 열기가 번진 것은 그다음이었다. 애꿎은 목덜미만 만지작거리는데 박성범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들어갈게.”
“……잠깐만!”
한 박자 늦게 붙잡는 말이 튀어나왔다. 왜 그러냐는 듯 돌아보는 얼굴을 보니 말이 목구멍에 걸린 것처럼 입안에서 맴돌았다. 다시금 아래로 향하려는 시선을 간신히 참아내며 재경은 어렵사리 입술을 달싹였다. 적어도 이런 말은 상대방의 눈을 보고 하는 것이 맞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인사가 좀 늦었긴 한데…… 고마워.”
술기운 때문이다. 술기운 때문이다.
속으로는 주문 아닌 주문을 걸고 있으니 박성범이 또 한 번 입꼬리를 올리는 것이 보였다.
“고마우면 레포트 쓰는 거나 도와줘. 대리출석도 좋고.”
농담 같은 대답을 남긴 뒤에 박성범이 펜션 안으로 들어갔다. 홀로 남게 된 재경은 숨을 길게 내쉬며 팔을 뒤로 쭉 뻗었다.
조금 쪽팔리긴 해도 마음은 한결 홀가분해졌다. 혹시나 자존심 긁는 소리를 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말을 꺼내고 보니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가 미안할 정도였다.
산골의 밤공기는 생각보다 차가웠다. 하지만 기분 좋은 서늘함으로 다가왔고, 재경은 고개를 젖히며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쏟아질 것 같은 별무리가 두 눈 가득 담겼다.
* * *
노트북을 켠 박성범은 바탕화면에 깔린 파란색 아이콘을 더블클릭했다. 곧 익숙한 프로그램 창이 실행됐다. 화면을 보며 콘솔 믹서를 조절하는데 등 뒤에서 예고도 없이 작업실 문이 벌컥 열렸다.
“깜짝이야.”
상대의 입에서 새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뒤를 돌아보니 부랑자 몰골을 한 중년 남성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작곡 및 프로듀싱 팀 ‘하이튠’의 수장이자 녹음실 주인이기도 한 최정열이었다.
“이 시간에 어쩐 일이세요?”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너야말로 아침 댓바람부터 왜 여기 있어?”
“일이 있어서 일찍 나왔어요.”
벽에 걸린 자그마한 시계는 정오를 살짝 넘긴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침 댓바람이라고 하기엔 어폐가 있지만, 둘 다 주로 새벽 시간대에 활동하는 것을 감안하면 영 틀린 말은 아니었다.
문을 닫고 들어선 최정열이 의자를 끌어와서 옆에 앉았다.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여기서 주무셨어요?”
“어. 이럴 줄 알았으면 작업실 근처에 집을 얻을 걸 그랬어.”
“그러게요. 미정 누나도 요즘 바빠 보이던데.”
“말도 마. 씨엔에서 좋은 발라드 하나만 뽑아보라고 난리도 아니야. 칼만 안 들었지 아주 그냥 날강도나 다름없어.”
“쫀다고 나오는 게 아니잖아요.”
“내 말이! 이하성이 불러서 대박친 게 틀린 말은 아닌데, 곡 자체도 완전 잘 뽑혔잖아. 해달라는 거 다 맞춰주니까 요즘엔 그냥 대놓고 갑질이야. 이참에 끊든가 해야지 원.”
한동안 투덜대며 불만을 토로하던 최정열이 질문을 던졌다.
“편곡 때문에 온 거야?”
“네.”
그러자 거지꼴에 어울리지 않는 거만한 명령이 떨어졌다.
“한번 틀어봐.”
아직 미완성이었지만 박성범은 군말 없이 그의 말을 따랐다. 미디어 파일을 재생하자 몇 년 전에 대히트를 쳤던 발라드가 전혀 다른 장르로 탈바꿈돼서 흘러나왔다. 1절이 끝난 뒤에 박성범은 정지 버튼을 누르고 최정열에게 견해를 물었다.
“어때요 형?”
“방향성은 좋은데, 템포가 너무 빠르지 않아? 박수연이 춤추다가 나자빠질 거 같은데.”
“일부러 빠르게 했어요. 어중간한 것보다는 차라리 시원시원하게 지르는 게 나을 거 같아서요.”
“답정너면서 묻긴 왜 물어?”
“예의상 물어본 거죠.”
능글맞은 대답에 최정열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자식, 많이 컸다.”
“저 원래부터 컸어요. 초딩 때 벌써 형만 했을걸요.”
“닥쳐.”
최정열은 곧 담배 한 개비를 꺼내서 입에 물었다. 하지만 지성인답게 불을 붙이지는 않고 필터만 잘근잘근 씹어댔다. 잠을 쫓기 위한 나름의 노력이었다.
“언제까지 있을 거야?”
“가능하면 끝내고 가려고요.”
팀원은 여러 명인데 작업실은 두 개뿐이다 보니 서로 스케줄을 맞춰서 이용하는 중이었다. 박성범도 본래는 낮보단 밤 시간대를 선호하지만 개강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작업을 핑계로 1학년 때부터 학업을 소홀히 했더니 학점이 아슬아슬했다. 유급 없이 제때 졸업하려면 지금부터라도 우선순위를 달리할 필요성이 있었고, 그래서 당분간 학기 중에는 밤샘작업을 지양할 생각이었다.
“저녁엔 형 타임이죠?”
“어. 모초 애들 녹음하러 올 거야.”
태연한 대꾸에 박성범은 웃음을 흘렸다. 걸그룹 이름이 모카초코인 것도 웃기고,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줄여서 부르는 40대 아저씨는 더더욱 웃겼다.
본인피셜을 빌리자면 최정열은 타고난 천재 뮤지션에 노력과 열정까지 겸비한 작곡가로, TV 프로에 가끔 패널로도 출연할 만큼 이쪽 업계에서는 유명한 인물이었다. 실제로 그의 곡을 받고 싶어 하는 가수들이 줄을 서서 기다릴 정도로 많았다. 또한 그는 취미로만 곡을 만들던 박성범을 본격적인 직업 세계로 끌어들인 장본인이기도 했다.
“점심은 먹었어?”
“아뇨, 아직이요.”
“그럼 국밥이나 한 그릇 시켜 먹을까?”
“좋죠. 제가 주문할게요.”
역시 센스가 있는 놈이라고 치켜세우는 말을 들으며 박성범은 핸드폰으로 배달 앱을 켰다.
“하암…….”
액정을 끄자마자 하품이 쏟아졌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어제오늘 박성범의 일정은 꽤나 타이트했다. 어제는 아침부터 계속 작업을 하다가 오후에 김성욱 무리와 합류했고, 예상대로 새벽까지 술을 마시며 달리다가 3시가 넘어서야 겨우 눈을 붙였다. 그마저도 짜증 날 정도로 코를 골아대는 놈들 때문에 잠을 거의 설치다시피 했다.
본래 박성범은 가평까지 갈 생각이 없었다. 술자리는 좋아하지만 곡 작업에 시일이 촉박한 레포트까지 겹쳐서, 급한 일이 마무리되면 김성욱한테 밥이나 한 끼 사 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뒤늦게 마음을 바꾼 이유는 이재경 때문이었다. 김성욱의 초대로 들어간 단톡방에 어쩐 일인지 재경도 있었다. 경영학부에 이재경이라는 이름은 하나뿐이니 동명이인은 아닐 터였다. 그날 밤에 박성범은 본인에게 직접 모임에 가는지 물어봤고, 그렇다는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박성범은 잠깐 고민하다가 핸드폰을 켜서 자신도 참석하겠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같이 어울리며 놀다 보면 조금 더 친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재경의 말마따나 같은 학부, 같은 학번의 동기라는 점만 빼면 둘 사이에는 접점이 전무하다시피 했다. 심지어 그동안은 강의실에서도 마주친 적이 손에 꼽을 정도였는데, 집에서 독립함과 동시에 곡 작업에 올인하면서 밥 먹듯이 강의를 빠진 탓이었다.
그래도 부모님과 한 약속이 있어서 학업을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았다. 덕분에 가끔이나마 학과 건물에서 이재경과 마주쳤고, 아마 졸업할 때까지 그렇게 어정쩡한 사이로 계속 지냈을 거다. 녀석이 살던 고시텔에 불만 나지 않았더라도.
소식을 전해준 사람은 김성욱이었다. 오랜만에 같이 PC방에서 게임을 하다가 잠깐 쉬는 중에 놈이 대뜸 말을 꺼냈다. 이재경이 사는 고시텔에 불이 났다고. 급하게 방을 알아보는 중인데 마땅한 데가 없는 것 같다고. 박성범은 음료수를 마시며 충동적으로 대답했다.
‘아님 우리 집에 와도 되는데.’
말을 꺼내면서도 이재경이 올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런데 웬걸. 잠시 후에 낯선 번호로 문자가 왔고, 그날부로 두 사람은 같이 살게 됐다. 솔직히 말하면 녀석에게 내줄 방을 치우면서도 얼떨떨했다. 다음 날 아침에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을 땐 순간적으로 ‘어머니가 오셨나’ 하는 생각을 했을 정도였다.
그렇게 엉겁결에 동거가 시작됐고, 솔직히 조금은 걱정스럽기도 했다. 동기라곤 하지만 성향이 어떤지도 잘 모르는 녀석과 갑자기 같이 살게 됐으니 당연히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괜한 우려였다. 이재경은 밖에 있는 시간이 많았고, 밤늦게 귀가해서 방에 들어가면 기척조차 들리질 않았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박성범은 동거를 제안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세상 무심할 것 같은 인상과 달리 이재경은 의외로 남을 잘 챙기는 데다 진솔함도 갖추고 있었다. 술에 취해 고꾸라진 김성욱을 기어이 거실로 끌고 가서 바로 눕혀준 것도 그렇고, 듣고 싶어 하던 과목을 넣어줬을 땐 진심으로 좋아하며 고맙단 인사를 몇 번이나 하기도 했다.
여러모로 생각지도 못한 수확이었다. 어젯밤 펜션에서 장난처럼 말했던, 얼굴이 맘에 든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이재경은 깨끗한 페이스로 시선을 잡아끌었고, 적당히 큰 키에 마른 몸까지 거의 완벽하게 제 이상형에 부합했다.
하지만 뭘 어찌해보겠다는 생각은 지금도 전혀 들지 않았다. 딱 봐도 이재경은 이쪽이 아닌데 험난한 가시밭길을 자처해서 갈 필요가 없었다. 그저 친구로서 조금 더 친해지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습관처럼 다시 핸드폰을 켰더니 단톡방 몇 개에 대화가 잔뜩 쌓여 있었다. 그중 박성범은 ‘가평으로 GoGo’ 라는 촌스러운 이름의 대화방부터 확인했다.
[다들 잘 들어갔음?]
[ㅇㅇ]
[존나 피곤]
[어제 개랑은 계속 연락하는 중?]
[ㅅㅂ 개아니거든]
[ㅋㅋㅋㄱㅋㅋㅋ]
[겜방갈사람?]
저마다 한마디씩 떠들며 생존 신고를 했지만 그중에 이재경은 없었다. 문득 오늘 아침에 본 얼굴이 떠올랐다. 다들 터진 찐빵처럼 처참한 몰골이었고, 이재경도 눈 밑이 퀭한 게 몹시 피곤해 보였었다.
“아니라니까. 너 나 못 믿어?”
여전히 옆자리에 앉아 있는 최정열은 좌우로 한 번씩 의자를 돌리며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어차피 곧 있으면 배달도 오겠다, 이 상태로는 도저히 집중이 안 될 것 같아서 박성범도 의자에 깊숙이 몸을 기대며 재경에게 문자를 보냈다.
[뭐해?^_^]
그러자 곧바로 답장이 왔다.
[도서관에 있어]
도서관이라니. 오는 길에 버스 안에서도 계속 졸길래 집에 가서 뻗을 줄 알았는데 뜻밖의 대답이었다. 이내 피식 웃으며 박성범은 다시금 손가락을 움직였다.
[점심은 먹었어?]
[아직 10분 뒤에 나갈거야]
[뭐 먹을건데?]
[몰라 매점 가서 고르려고]
[저녁은 같이 먹을까? 나도 계속 밖에 있을거 같은데]
이번에는 답장이 곧바로 오지 않았다.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으니 잠시 후에 핸드폰이 짧게 진동했다.
[밤까지 도서관에 있을 거야]
가히 이재경다운 대답에 박성범은 한 번 더 웃고 말았다.
[그럼 내가 학교로 갈게
같이 먹을 사람 없어서 외로워ㅠㅜ]
[알았어 몇 시에 올건데?]
[6시쯤?]
[ㅇㅋ 나중에 보자]
마음 같아선 조금 더 놀고 싶지만 황금 같은 일요일 오후에도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녀석을 더 이상 방해할 수는 없었다. 아직 확인 못 한 다른 메시지들도 뒤늦게 훑어보는데 뜬금없이 최정열의 목소리가 들렸다.
“애인이야?”
고개를 돌리자 징그러울 정도로 능글맞게 웃고 있는 면상이 보였다. 잠깐 잊고 있었는데, 최정열은 청춘들이 썸을 타거나 연애하는 이야기를 환장할 정도로 좋아했다.
“아니요.”
“아니긴. 입이 귀에 걸리려고 하던데.”
“같은 과 친구예요.”
“뻥치시네. 친구랑 연락하면서 누가 그런 표정을 지어?”
그런 표정이 어떤 표정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최정열이 짓고 있는 표정이 얼마나 엉큼한지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박성범은 핸드폰 화면을 끄며 다른 쪽으로 화제를 돌렸다.
“저 이제 작업실에 자주 못 와요. 일도 좀 줄일 거고요.”
“왜. 무슨 일 있어?”
최정열의 얼굴에 금세 의문이 떠올랐다. 지금도 작업실에서 가끔 마주치면 ‘이건 어떠냐’며 강제로 데모 음원을 들려줄 만큼 욕심이 많은 놈인데, 일을 늘리는 것도 아니고 줄이겠다니.
이내 뇌리를 스치는 생각에 최정열은 두 손을 깍지 끼며 안타까움이 담긴 시선을 보냈다.
“그래. 그동안 너무 오버 페이스로 달리긴 했어. 좀 쉴 때도 됐지.”
슬럼프를 확신하는 분위기였지만 완벽한 헛다리였다. 박성범은 피식 웃으며 그의 생각을 정정해주었다.
“학업 때문에 바쁠 것 같아요.”
“학업?”
“네. 이제부터 학점 관리 좀 하려고요.”
“……갑자기 왜 그래. 낯설다, 너.”
“이왕 들어갔으니까 졸업은 해야죠.”
그건 그렇지, 하며 고개를 끄덕이던 최정열이 금세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하긴. 너 수능 치자마자 여기서 살던 거 생각하면 지금까지 학교 안 잘리고 다니는 게 용할 정도야.”
박성범은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실제로 1학년 첫 학기부터 학고를 받은 전적도 있긴 하지만, 그래도 무사히 위기를 넘겨서 앞으로 1년 반만 더 버티면 됐다.
“그래도 어째 졸업은 할 생각인가 보네. 걸린 게 많다고 했었나?”
“네. 그게 아니라도 가능하면 약속은 지키고 싶어서요.”
떠들다 보니 배달 왔다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은 테이블로 자리를 옮겨 식사를 시작했고, 최정열이 먼저 포만감 가득한 얼굴로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역시 사람은 안 먹고는 못 살아. 밥값 얼마 나왔어?”
“2만 5천 원이요.”
“형이 지금 현금이 없으니까 다음에 만나면 꼭 달라고 해. 그릇은 내가 내놓을게.”
“제가 할게요. 편의점 갈 거거든요.”
“그럼 난 집에 가서 눈 좀 더 붙이고 와야겠다. 도저히 안 되겠어.”
먼저 일어서는 최정열을 따라서 박성범도 핸드폰과 담배 케이스를 챙겨 들고 몸을 일으켰다.
* * *
시간은 잘도 흘러갔다. 몇 번이고 반복 재생하며 세세하게 다듬다 보니 네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가버렸다. 파일을 백업하고 노트북을 끄는데 문 너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저희 왔습니다.”
이름을 밝히지 않아서 ‘저희’가 누군지 알 턱이 없었지만, 아까 최정열이 했던 이야기를 떠올리고는 들어오라고 대답했다. 곧 문이 열리며 세미 정장 차림의 남자와 낯이 익은 여자애 두 명이 안으로 들어왔다.
“앗,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오늘 최정열이 녹음을 맡게 된 걸그룹 멤버들이었다. 예전에 통성명을 한 적이 있는 실장 겸 매니저는 잠깐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며 밖으로 다시 나갔고, 여자애들은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소파에 앉았다. 그중 팀의 리더인 윤혜나가 턱을 괴고 웃으며 박성범에게 말을 걸었다.
“오늘 오빠가 저희 봐주시는 거예요?”
“아니. 근데 왜 니들 두 명뿐이야?”
“다른 멤버들은 촬영 끝나면 이쪽으로 바로 온대요.”
“넌 왜 안 갔는데.”
“음악 프로그램이라서 노래 잘하는 애들만 갔어요. 저희는 예능 담당.”
과연, 가창력은 어느 정도인지 모르겠지만 성격이 좋아 보이기는 했다. 가수가 왔는데도 최정열은 감감무소식이었다. 전화를 걸려고 핸드폰을 켜는데 윤혜나가 일어나서 가까이 다가왔다.
“혹시 오빠 번호 알려줄 수 있으세요?”
“내 번호는 뭐하려고.”
“오빠랑 친하게 지내고 싶어서요.”
크고 또렷한 눈망울도 그렇고, 가까이에서 봐도 잡티 하나 없는 게 확실히 예쁘긴 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여느 남자들 같았으면 냉큼 번호를 찍어줬을지도 모르지만, 박성범에게 지금 상황은 그저 성가시기만 할 뿐이었다. 시시덕거리며 수다나 떨자고 번호를 알려달라고 할 리가 없으니 말이다.
“난 아무한테나 내 번호 안 가르쳐줘.”
“에이, 아무나라고 하면 섭섭하죠. 그러지 말고 알려주세요. 네?”
보아하니 순순히 물러설 분위기가 아니었다. 작업실 출입문을 쳐다봤지만 화장실에 간다던 매니저는 돌아올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박성범은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나랑 뭘 어떻게 해볼 생각이면 포기해. 난 여자한테 관심 없어.”
안 선다고 하려다가 그나마 자체적으로 수위를 조절해서 한 말이었다. 윤혜나가 금세 눈을 둥그렇게 뜨며 돌직구를 날렸다.
“오빠 게이예요?”
“맞아.”
“헐, 대박. 그런 이야기 막 해줘도 돼요?”
“상관없어.”
성적 지향은 일찌감치 자각했고, 부모님께도 말씀드려서 가족들도 다 알고 있었다. 딱히 숨길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굳이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닐 만한 일도 아니었다. 세상이 변했다고는 해도 여전히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는 사람이 많았기에, 이해를 하지 못하거나 거부감을 느낄 것 같은 상대에게는 말을 아끼는 편이었다.
어쨌거나 이쯤 하면 말귀를 알아들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 윤혜나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시키지도 않은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저 아는 오빠 중에서도 되게 예쁘게 생긴 게이 오빠 있어요. 진짜 잘생기고 예쁜데, 나중에 소개해줄까요?”
“내가 알아서 잘 만나.”
“진짜 예뻐요, 진짜.”
“난 얼굴보다 인성을 더 따지는 사람이라서.”
“착하기도 엄청 착해요. 그러니까 번호 알려주세요. 네?”
마침 문이 열리며 매니저가 돌아왔다. 동시에 후다닥 소파로 돌아가는 윤혜나를 보면서 박성범은 알 만하다는 얼굴로 웃었다. 그래도 매니저가 무섭긴 한 모양이었다.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더는 있을 이유가 없었기에 박성범은 작업실을 나서려고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매니저가 서글서글하게 웃는 얼굴로 말을 붙였다.
“올해 스물네 살이라고 했던가요?”
“네.”
“전에도 생각한 건데 키가 엄청 크시네요. 마스크도 좋아서 이쪽으로 제안 많이 받으셨을 것 같은데.”
매니저의 말대로였다. 학창 시절에는 길 가던 중에 명함을 받은 적도 있고, 곡 작업 때문에 만나는 프로덕션 관계자들도 ‘모델이나 배우를 해볼 생각은 없냐’는 말을 반쯤 농담 삼아 꺼내기도 했다. 그리고 눈앞의 매니저도 그 비슷한 말을 했다.
“혹시 저희랑 같이 한번 일해볼 마음은 없습니까?”
그 말에 박성범은 고민도 하지 않고 웃으며 대답했다.
“곡 작업이면 대환영입니다.”
“하하. 그쪽도 물론 좋지만, 다른 방면으로 활동해볼 생각은 없는지 물어본 겁니다. 아니면 최 대표님처럼 작곡가로서 음악 방송 출연 위주로도 밀어줄 수 있습니다. 알고 계시겠지만, 일단 방송을 타면 인지도부터가 달라지기 때문에 지금보다 훨씬 찾는 사람들이 많아질 겁니다.”
꽤나 솔깃한 제안이었지만 박성범은 넘어가지 않았다. 오래전에 최정열도 비슷한 말을 꺼낸 적이 있지만 박성범은 연예계 쪽에는 흥미가 전혀 없었다.
딱히 돈이 궁한 것도 아니고, 시선을 받는 걸 즐기는 성격도 아니었다. 괜히 얼굴이 팔려서 제한적인 삶을 사는 것보다 지금처럼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자유롭게 사는 게 훨씬 좋았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그쪽에는 별 관심이 없어서요. 약속이 있어서 먼저 가보겠습니다.”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인 뒤에 박성범은 작업실을 나섰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최정열에게 전화를 걸었다.
- 여보세요?
“모초 애들 왔어요, 형.”
- ……뭐? 지금 몇 신데.
박성범은 시간을 확인한 뒤에 대답했다.
“5시 10분이요.”
- 왜 그렇게 일찍 왔대. 목 풀면서 잠깐만 기다리라고 해. 금방 갈게.
“저 벌써 나왔어요. 그럼 수고하세요.”
타이밍 좋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차에 탄 박성범은 내비게이션에 저장된 목적지 중에서 ‘학교’를 선택해 눌렀다. 약속대로 이재경과 함께 저녁을 먹기 위해서였다.
* * *
뒷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이 진동했다. 퍼뜩 꺼내 보니 박성범에게서 문자가 와 있었다.
[도서관 앞이야 :D]
[내려갈게]
재경은 답장을 보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1층 유리문을 열고 나가자 일전에 만났던 중앙 로비 테이블에 박성범이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두 사람은 곧 나란히 도서관을 나섰다.
“먹고 싶은 거 있어?”
“딱히 없어. 너는?”
“나도 없어. 고기는 좀 그렇지?”
“어.”
고기를 좋아하긴 해도 연달아서 먹을 정도는 아니었다. 일단 가서 정하기로 하고 계속 걷다 보니 후문 쪽에 길게 나 있는 먹자골목이 나타났다.
일요일 저녁이라 그런지 거리는 생각보다 한산했다. 하지만 식당들은 하나같이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고, 문을 열어둔 곳에서는 맛있는 냄새가 풍겼다.
식당 앞으로 바짝 붙여 세워둔 입간판 하나가 재경의 눈에 들어왔다. 된장찌개, 김치찌개, 순두부찌개 등 평범한 메뉴뿐이었지만 점심을 샌드위치로 때웠더니 찌개류가 몹시 끌렸다.
“여기 들어갈까?”
“그러든가.”
통유리 너머로 몇몇 손님들이 앉아서 식사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재경이 식당 문을 열고 들어가자 박성범이 그 뒤를 따랐다.
음식은 생각보다 빨리 나왔다. 재경은 제 몫으로 나온 순두부찌개를 한입 떠서 맛본 뒤에 본격적인 식사를 시작했다.
“안 피곤해? 어제 늦게 잤잖아.”
“조금.”
사실은 몹시도 피곤했다. 지금은 버틸 만하지만, 점심을 먹고 와서 의자에 앉았을 때는 잠이 쏟아져서 죽는 줄 알았다.
하지만 어제 온종일 놀다시피 했는데 오늘도 허송세월을 보낼 수는 없었다. 학년이 올라가니 확실히 수업이 더 빡세지면서 아직 학기 초인데도 과제가 벌써 네 개나 쌓였다. 나중에 가서 발등에 불 떨어진 꼴이 되지 않으려면 지금부터 하나씩 처리해놓는 게 나았다.
“그러고 보니 가방은 어딨어?”
“도서관에.”
깍두기 하나를 입에 밀어 넣으며 대답하자 박성범이 기가 막힌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또 가려고?”
“아직 7시도 안 됐잖아. 집에 가봤자 자는 것밖에 더하겠어?”
다시금 찌개를 떠먹다가 문득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박성범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아니. 참 성실하다 싶어서.”
재경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비꼬는 거야?”
“진심으로 하는 칭찬이야. 매일같이 그렇게 열심히 사는 거, 결코 쉽지 않잖아.”
다시 보니 눈빛이 진중한 게 놀리는 듯한 느낌은 아니었다. 잠깐이지만 오해한 게 머쓱해진 재경은 괜히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마침 타이밍 좋게 전화가 걸려왔다.
-최창섭-
액정에 뜬 이름을 보고 재경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분명히 서로 번호를 교환했고 지금도 매일 단톡방에서 보는 이름이긴 하지만 개인적으로 연락을 주고받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제대로 건 게 맞는지 긴가민가하면서 재경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여보세요? 재경이 형? 저 창섭이에요. 잠깐 통화 가능하세요?
이름을 부르는 걸 보니 맞게 건 모양이었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곧장 본론이 이어졌다.
- 형, 혹시 과외 수업하실 생각 없으세요?
“과외?”
- 네. 엄마 친구분이 괜찮은 선생님 있으면 소개 좀 해달라고 하는데 형 생각이 나더라고요. 아줌마 성격도 좋으시고, 애도 착해요. 지금 중3이고요.
“그럼 네가 하는 게 낫지 않아?”
- 아는 사이라서 오히려 좀 부담스럽더라고요.
듣자마자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자신만 해도 숙모 눈치가 보이는 데다가 경수 성적이 조금이라도 떨어지면 제 학점이 잘 나오지 않는 것만큼이나 신경이 쓰였다.
- 혹시 생각 있으세요, 형?
“알바 때문에 안 될 것 같아.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하거든.”
- 하루도 빼기 힘들어요? 그럼 평일에 한 번, 주말에 한 번 해도 되는데.
“아무래도 어렵지 싶어.”
- 에고……. 그럼 어쩔 수 없죠.
“미안. 생각해서 전화해줬는데.”
- 아니에요, 형. 그럼 다음 수업 때 봬요.
“그래. 들어가라.”
전화를 끊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박성범이 물었다.
“누군데?”
“최창섭.”
“최창섭?”
“대학 영어 같이 듣는 애 있잖아. 안경 쓰고 착하게 생긴.”
“아.”
그제야 누군지 알겠다는 투로 대답하더니 다시금 말을 잇는다.
“과제 때문에 연락한 거야?”
“아니. 과외 자리가 났는데 혹시 해볼 생각 없냐고 물어보네.”
“할 거야?”
“알바 때문에 못 해.”
그러자 박성범은 시선을 마주한 채로 합리적인 질문을 입에 담았다.
“알바보다는 과외가 더 효율적이지 않아?”
“그렇긴 한데, 과외는 안 해. 나랑 안 맞는 거 같아서.”
사실 1학년 때는 과외 수업을 했었다. 그런데 가르치던 여중생이 어느 날 재경에게 좋아한다는 고백을 했고, 학생의 어머니가 그 사실을 아는 바람에 한바탕 난리가 났었다. 재경은 몹시 억울했다. 가끔 문자가 오긴 했어도 모르는 문제를 사진으로 찍어서 물어보는 정도였고, 수업은 방문을 살짝 열어둔 채로 진행했다. 고백을 받기 전까지는 저에게 마음이 있는지조차 몰랐건만, 학부모는 재경을 파렴치한으로 몰고 가며 모욕적인 언사까지 퍼부었다.
다음에는 남학생을 가르쳤지만 그때도 문제가 발생했다. 곱상한 외모와 달리 발랑 까진 놈은 내뱉는 말의 90퍼센트가 욕설이었고, 수업 때마다 공부는 뒷전이고 온갖 성적인 호기심을 발산하기에 바빴다. 당근도 채찍도 소용이 없었다. 결국 재경은 백기를 들었고, 이후로 과외 수업은 깔끔하게 포기하고 몸으로 뛰는 알바를 선택했다.
“넌 알바 안 해?”
묻고 나서야 재경은 괜한 질문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처럼 생활이 빠듯하거나 돈을 벌어야 하는 것도 아닌데 굳이 알바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박성범은 의외의 대답을 했다.
“알바는 아닌데, 취미와 직업 사이 그 어디쯤에서 하는 일이 있긴 해.”
“……그래?”
어느덧 미지근하게 식은 국물을 한 번 더 떠먹는데, 그런 재경을 바라보며 박성범이 웃음 띤 얼굴로 물었다.
“뭔지 안 궁금해?”
“별로.”
“가만 보면 은근히 냉정하다니까.”
잠시 후 두 사람은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점심이 부실했던 재경은 물론이고 박성범도 일찌감치 그릇을 싹싹 비웠다. 기분 좋은 포만감을 느끼며 카운터로 걸어간 재경은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박성범이 제가 내겠다고 말했지만 재경은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내가 낼게. 매번 얻어먹기만 하면 미안하고, 저번에 신세 진 것도 있으니까.”
“신세?”
“법 경제학 넣어줬잖아. 그때 밥이라도 한 끼 사 주고 싶었는데 시간이 없었어.”
재경은 지갑에서 2만 원을 꺼냈고, 거스름돈을 주는 직원에게 잘 먹었다는 인사를 남기고 밖으로 나왔다.
“잘 먹었어. 다음엔 내가 살게.”
재경은 입술을 달싹였지만, 그러라고 대답하기도, 다른 대답을 하기도 애매해서 도로 입을 다물고 말았다. 학교를 향해서 걸어가는데 박성범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도서관에 몇 시까지 있을 거야?”
“열 시.”
“그렇게 오래 있는다고?”
재경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열 시면 딱히 늦은 시간도 아닌데 그렇게 놀랄 일인가 싶었다.
“근처에 빈자리 있어?”
재경은 한발 늦게 질문의 의미를 이해하고 설마 하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나올 때 보니까 제법 있긴 했는데……. 너도 가려고?”
“어.”
왜? 하는 질문이 차올랐지만 바보처럼 내뱉는 짓은 가까스로 멈출 수 있었다. 도서관에 가는 이유는 당연히 책을 읽거나 빌리거나 혹은 열람실에서 공부를 하기 위해서지만, 그중 어느 것도 박성범과는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걷다 보니 어느덧 학교 후문이 코앞이었다. 도서관으로 복귀한 재경은 조용히 의자를 빼고 자리에 앉았다. 왼손에는 오는 길에 박성범이 사준 커피가 들려 있었다.
성실한 학생들이 주말에도 학구열을 불태우는 열람실은 마치 다른 세상처럼 조용했다. 재경도 식곤증을 커피로 쫓아내며 공부에 집중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오후부터 계속 맞은편에서 공부하던 사람이 조용히 가방을 챙겨서 떠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누군가가 앉는 기척이 느껴졌지만 재경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가끔씩 펜을 돌리며 책만 보고 있는데, 갑자기 시야에 웬 커다란 손이 불쑥 들어왔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들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박성범이 턱짓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엉겁결에 따라서 시선을 옮기니 책 위에 놓인 자그마한 초콜릿 두 개가 보였다.
다시 고개를 들자 박성범은 그새 책을 펼쳐서 읽는 중이었다. 저처럼 책상에 눕히지 않고 모범적인 자세로 읽고 있는 탓에, 책등에 커다랗게 적힌 제목이 한눈에 들어왔다.
「에로스와 인류 발전의 상관관계」
일순 재경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고, 작년에 재경도 책 제목과 같은 이름의 교양 수업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문득 박성범과 눈이 마주쳤다. 뭔가 빤히 쳐다본 모양새가 되어서 민망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금 책으로 시선을 옮겼다.
펼쳐진 페이지 위에는 여전히 초콜릿이 놓여 있었다. 재경은 잠깐 망설이다가 포장을 벗긴 초콜릿 하나를 입에 넣었다.
‘먹으라고 준 거니까.’
다시금 펜을 손에 쥐는데 책상 위에 둔 핸드폰 화면이 갑자기 켜졌다.
[이상한 책 아니야]
박성범이 보낸 문자였다. 천천히 고개를 들자 웃고 있는 상대와 눈이 마주쳤다. 재경은 누가 뭐라 했냐고 대답하려다가 지금 이곳이 도서관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다고 무시하기도 그래서 조용히 손가락을 움직였다.
[누가 뭐래?]
확인 버튼을 누르면서도 기분이 이상했다. 코앞에 상대를 두고 문자질이라니.
채 꺼지지 않은 액정에 새로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많은것이 담긴 눈빛이었어ㅜㅠ]
일순 재경은 궁금함이 들었다. 입 다물고 가만히 있으면 시선이 절로 가는 녀석인데, 대체 어떤 표정으로 말끝에 우는 표시를 붙이는…….
‘웃고 있었지.’
재경은 잠깐 고민하다가 다시 답장을 보냈다.
[그런적 없어]
그대로 보내려다가 서둘러 몇 마디를 덧붙였다.
[문자 그만 보내 진짜 그런적 없어]
제 역할을 다한 핸드폰을 책상 위에 올려두고 다시금 책으로 시선을 옮겼다. 왼손으로는 뻐근한 뒷목을 문질렀다. 과제 때문에 마지못해 읽고 있긴 하지만, 600페이지에 육박하는 경제학 책은 빈말로도 결코 재미있다고 할 수 없었다.
그래서 10시가 되어 핸드폰 화면이 반짝 켜졌을 때는 반가운 기분마저 들었다. 재경은 미련 없이 가방을 챙겼고, 어느 순간부터 팔짱을 낀 채로 미동도 하질 않는 박성범을 흔들어 깨웠다.
잠시 후에 두 사람은 나란히 도서관을 빠져나왔다. 차가 세워진 곳으로 걸어가면서 박성범은 긴 하품을 흘렸다. 옆에서 걸어가던 재경이 그 모습을 보고 한마디 했다.
“피곤하면 집에 일찍 가지 그랬어.”
“그럼 또 밤낮이 바뀔 거 같아서.”
그런 것 치곤 열람실에서 꿀잠을 잔 것 같았지만 재경은 굳이 그 사실을 지적하지 않았다. 걷다 보니 주차장 한편에 세워진 차가 보였다. 반대편으로 돌아간 박성범이 운전석에 올랐고, 옆 좌석에 앉은 재경이 안전벨트를 맨 것을 확인한 뒤에 천천히 핸들을 돌려 출발했다.
“안 피곤해?”
“조금.”
“근데 진짜 집중력 대단하더라. 세 시간 내내 책만 보던데.”
“그러려고 간 거니까.”
재경은 효율성이나 가성비를 중시하는 타입이었다. 예를 들어 세 시간 만에 끝낼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바짝 집중해서 끝내고 편하게 쉬는 게 낫지, 중간중간 딴짓하며 시간을 늘리는 것은 성미에 맞지 않았다.
공부하는 동안 얌전히 두었던 핸드폰을 확인했다. 어김없이 단톡방에 메시지가 들어와 있었고, 바로 밑에 도서관에서 박성범과 주고받았던 대화의 일부가 보였다. 재경은 곧 고갤 돌리고 옆을 쳐다봤다.
“아까 보던 책, 혹시 이번 학기에 쓰는 교재야?”
“맞아. 어떻게 알았어?”
“작년에 나도 들었거든.”
“그래서 그렇게 쳐다봤구나.”
할 말이 많은 눈빛이라고 했던가. 그게 어떤 눈빛인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눈에 익은 제목이라서 쳐다본 것뿐이었다. 그마저도 박성범이 책을 들고 있길래 쳐다본 거였지 생판 모르는 사람이었으면 눈길이 가는 일조차 없었을 터였다.
“교수님 이름은 알아?”
“몰라.”
전공이나 담당 교수도 아니고, 교양 수업 강사니 그럴 만도 했다. 재경은 납득하며 다른 질문을 입에 담았다.
“혹시 눈알 부리부리하고 키 큰 교수님이야? 목소리는 얇고.”
“맞는 거 같아.”
“중간고사는 교재 요약 레포트로 대체하고?”
“어. 작년하고 똑같이 진행하나 보네.”
재경의 생각도 같았다.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을 이었다.
“혹시 필요하면 작년에 내가 했던 거 보여줄게.”
“그럼 완전 고맙지. 사진만 눈에 들어오고,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더라.”
“그러다 잘못하면 F 뜰걸. 그 교수님 자기가 설명한 부분에서만 기말시험 내거든.”
“……다음 학기에 또 듣고 있을 내 모습이 선하네.”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는 사이에 어느덧 차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박성범은 어김없이 한 번에 완벽한 주차를 선보였고, 두 사람은 나란히 빌라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