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22)

3.

개강 날 아침이 밝았다. 어김없이 학교식당에서 점심을 때운 재경은 캔 커피를 하나 뽑아 들고 강의실로 향했다.

복도를 걷는 동안 뻐근한 뒷목을 주물렀다. 평소에도 일찍 일어나긴 하지만, 학기가 시작됐다고 생각하니 심적으로 좀 더 빠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한 가지 위안이 되는 점이 있긴 했다. 박성범이 정말로 법 경제학 수강 신청을 성공한 것이었다.

‘넣었어.’

‘뭐?’

‘네가 말한 과목, 넣어놨다고.’

처음엔 장난치는 줄 알았다. 그런데 반신반의하며 확인해보니 정말로 교과명이 바뀌어 있었고, 재경은 입이 귀에 걸리다시피 한 채 거실로 뛰쳐나와서 고맙단 말을 거듭했었다.

“301호. 여기네.”

호실을 확인하고 문을 열자 생각보다 넓은 내부가 눈에 들어왔다. 아직 시간이 남아서인지 빈자리는 많았다.

재경은 앞에서 세 번째 줄 책상 위에 백팩을 내려놓았다. 강의를 함께 듣는 동기는 없었다. 그런 귀여운 짓을 할 시기는 지나기도 했고, 스케줄이 워낙 빡빡하다 보니 다른 놈들하고 맞출 여유가 없기도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강의실 문이 열리는 빈도가 잦아졌다. 강의 시작까지 3분 정도 남았을 무렵, 또 한 번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왔다. 시선 끝에 걸리는 얼굴을 인지한 순간 재경은 깜짝 놀랐다.

문에 머리가 닿을 듯한 존재감을 뽐내며 들어온 사람은 바로 박성범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상대도 살짝 놀라는 듯하더니 이내 빠른 걸음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너도 이 수업 들어?”

“어.”

“잘됐네. 옆에 앉아도 되지?”

재경은 군말 없이 가방을 들고 한 칸 옆으로 당겨 앉았다. 하지만 박성범이 제 옆에 착석하자마자 후회했다. 의자 사이의 간격이 그리 좁은 것도 아닌데 갑자기 여유 공간이 확 줄어들며 벽을 옆에 둔 것처럼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

정각 1시에 문이 열리며 딱 봐도 교수로 보이는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머리가 살짝 벗겨지고 배가 많이 나온 외국인 강사였다.

간단한 인사 후에 빔프로젝터 화면이 바로 켜졌다. 쏟아지는 영어 공격을 한국어로 부지런히 치환하며 재경은 화면에 시선을 고정했다.

‘……망했네.’

다음 페이지로 넘어갈수록 안색이 점점 어두워졌다. 글자가 빽빽이 들어찬 첫 화면부터 예사롭지 않더니, ‘강의 시간에는 한국어 절대 금지, 휴대폰 사용 금지, 영어 이름으로만 부를 것’ 등등 은근히 피곤한 주의사항들도 많았다.

“헐…….”

“저게 뭐야.”

과제에 대한 설명이 나온 순간, 급기야 곳곳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재경도 표정이 좋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분명 글쓰기 수업을 신청했는데 ‘그룹별 발표’라니.

「무슨 일입니까?」

교수가 갑자기 어딘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모두의 시선이 한곳을 향했다. 재경도 고개를 돌리자 바로 뒷줄에 앉은 여학생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죄송하지만 글쓰기 수업으로 알고 있는데, 그룹별 발표 과제가 있는 건가요?」

그렇지!

재경은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적극적인 지지를 보냈다. 하지만 자신을 티모시라고 소개한 교수는 흔들림 없이 굳건했다.

「네,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직접 광고를 기획하고, 한 사람도 빠짐없이 그 광고에 참여해야 합니다. 기본적으로 글쓰기 수업인 것은 맞지만, 나는 여러분들이 좀 더 다양한 경험을 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내 수업 방침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지금이라도 취소하면 됩니다.」

웃는 사람은 티모시 교수 혼자뿐이었다. 다들 머리를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고, 이동 동선까지 고려해서 시간표를 짰을 텐데 말처럼 그리 쉽게 바꿀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벌레 씹은 표정으로 앉아 있으니 교수는 여전히 호쾌한 음성으로 새로운 미션을 부여했다.

「그럼 지금부터 자유롭게 그룹을 만들어주세요. 인원은 세 명부터 다섯 명까지 가능하고, 다 됐으면 손을 들어주면 됩니다.」

금세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입을 다문 채 앉아 있으니 옆에서 박성범이 말을 걸었다.

“어떡할 거야?”

“그냥 해야지, 뭐.”

“그럼 한 명만 더 있으면 되나.”

나직하게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재경은 옆을 돌아보았다.

“너도 듣게?”

“바꾸기 귀찮아서.”

덤덤하게 대꾸하더니 갑자기 한쪽 입꼬리를 씩 올린다.

“나랑 같이 하기 싫은가 봐.”

갑자기 정곡을 찌르는 바람에 움찔했지만, 이내 재경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학점 관리해야 돼서 농땡이 치는 놈 만나면 곤란해.”

“나도 마찬가지야. 열심히 할 테니까 한번 데려가 봐.”

좀처럼 신뢰가 가지 않는 말에 애꿎은 펜만 돌려대는데, 뒤에서 갑자기 어깨를 톡톡 두드리는 손길이 느껴졌다.

“저기요.”

뒤를 돌아보자 조금 전에 패기 있게 손을 들었던 여학생의 얼굴이 보였다.

“혹시 몇 명이세요?”

재경은 잠깐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두 명이요.”

“그럼 저희랑 같이 하실래요? 저희도 두 명이거든요.”

여학생 옆자리에 앉아 있던, 캡 모자를 쓴 남학생이 꾸벅 고개를 숙여 보였다. 재경은 곧 박성범을 쳐다보며 의견을 구했다.

“어떡할래?”

“난 상관없어.”

네가 결정하라는 표정이었고, 재경은 잠깐 고민하다가 여학생의 제안을 수락했다.

“그럼 같이 하죠.”

“저기, 죄송한데 혹시 저도 같이 할 수 있을까요? 수업을 혼자 들어서요.”

짧은 머리에 안경을 쓴 모범생 스타일의 남학생이 소심하게 끼어들었다. 만일 박성범이 없었으면 자신도 같은 처지였을 게 뻔했기에, 이번에는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다.

“전 괜찮습니다.”

“저도요. 너도 괜찮지?”

여학생의 질문에 검은색 캡 모자를 쓴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순식간에 5인으로 구성된 그룹이 만들어졌다.

“그럼 제가 손들게요!”

말이 끝나자마자 여학생이 번쩍 손을 들었다. 좀 전에도 느꼈지만 시원시원하니 거침이 없어 보이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가까이 다가온 티모시 교수가 웬 종이 하나를 책상 위에 올려주었다. 이후로도 여학생은 적극적으로 대화를 주도했다.

“그럼 일단 통성명부터 할까요? 저는 국제학부 2학년인 이보라라고 해요.”

다음 차례는 캡 모자를 쓴 남학생이었다.

“저는 주이판이고, 중국에서 왔어요. 이판이라고 불러주세요.”

“와, 한국말 엄청 잘하시네요.”

마지막에 합류한 남자가 감탄을 흘리며 칭찬했다. 이어서 그는 컴공과 2학년 재학 중인 최창섭이라며 자신을 소개했고, 재경과 박성범도 같은 수순을 밟았다. 그렇게 통성명이 끝나자 이보라의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그럼 우리 이것도 작성해요.”

곧 사각거리는 소리를 내며 종이에 까만 글씨가 채워졌다. 시계 방향으로 돌다 보니 이번에도 재경이 제일 마지막이었고, 종이를 본 순간 피식 웃음이 나왔다. 헤르미온느, 알렉산더 등등 영어 이름이 다들 몹시도 화려했다.

학과와 이름을 써넣은 재경은 영어 이름을 기입하는 칸에 망설임 없이 Tom이라는 이름을 적었다. 딱히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1학년 때 앞자리에 앉아 있던 남학생의 등짝에 TOMO 어쩌고 하는 글자가 적힌 것을 보고 Tom으로 정했고, 그 뒤로 영어 이름을 쓸 일이 있으면 계속 우려먹곤 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서로 연락처를 교환하고, 프레젠테이션 주제를 놓고 떠들다 보니 어느덧 마칠 시간이 다 됐다. 교수가 먼저 강의실을 떠나고, 재경은 의미 없이 펼쳐놨던 노트며 필기구 등을 주섬주섬 가방 안에 챙겨 넣었다. 들어갈 때는 혼자였지만 나올 때는 박성범과 나란히 걷는 꼴이 됐다.

“수업 또 있어?”

“어.”

“첫날부터 빡빡하네. 나도 남 말할 처지는 아니지만.”

그러고 보니 박성범도 거의 풀 학점으로 채워서 듣는다던 말이 생각났다. 다음 수업 때문에 부지런하게 걷는데, 계단 근처에 서 있던 남학생 두 명이 이쪽을 보고 아는 척을 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안녕하세요.”

“오랜만이네. 근데 니들 어째 나한테만 인사하는 거 같은데.”

“예?”

“옆에도 있잖아.”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질 않는다는 듯 둘이 서로 마주 보며 눈을 끔뻑거렸다. 재경도 ‘대체 무슨 말인가.’ 하는 표정으로 박성범을 쳐다보다가 뒤늦게 상황을 파악했다.

경영학부 애들인가.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인지 둘 중 한 놈이 조심스럽게 묻는 목소리가 들렸다.

“혹시 경영학부 선배님이세요?”

“네.”

“몰라 봬서 죄송합니다, 선배님!”

고개를 꾸벅 숙이는 모습에 재경은 몹시 당황했다.

“괜찮습니다.”

학부 특성상 학년별 인원이 많기도 하고, 복학한 뒤로는 과 모임에 거의 참석하질 않았으니 그럴 만도 했다. 어찌어찌 마무리를 짓고 다시 걸음을 옮기는데 옆에서 박성범이 물었다.

“너도 몰랐어? 쟤들, 우리 다음 학번 후배들인 거.”

“어.”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에 박성범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든 말든 재경은 휴대폰을 켰고, 채 10분도 남지 않은 시간을 확인하고는 마음이 조급해짐을 느꼈다.

“먼저 갈게.”

“그래. 나중에 보자.”

여유롭게 응대하는 녀석을 뒤로한 채 재경은 잰걸음으로 공대 건물을 나섰다.

* * *

몇 달째 불경기가 지속되고 있다는데, 재경이 일하는 호프집에는 해당 사항이 없었다. 가격이 저렴한 데다 개강이라는 특수 상황까지 더해져서 연일 발 디딜 틈 없을 정도로 손님들이 몰려들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발바닥에 불이 날 정도로 홀을 누비던 재경은 장장 테이블 네 개를 차지하고 있던 단체 손님들이 빠져나간 뒤에야 간신히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오냐.”

가는 길에 잠깐 핸드폰을 켜 보니 조별 모임 단톡방에 300개가 넘는 대화가 쌓여 있었다.

내심 이탈 인원이 있으면 어쩌나 했던 우려와 달리 ‘대학 영어’는 처음의 그 멤버 그대로 같은 조를 하게 됐다. 그리고 정정 기간이 끝난 그날부터 단톡방에서는 매우 활발한 대화가 오갔다. 상큼한 아침 인사는 기본이고, 수수해 보이던 컴공과 최창섭도 틈틈이 웃긴 짤이나 사진을 투척하면서 뜻밖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밀린 톡을 대충 훑어보고 있으니 그새 새로운 대화가 떴다.

[헤르미온느♡ : 저희 슬슬 과제 준비해야 될 거 같은데 한번 모이는게 좋지 않을까요?]

[Alexander Yifan : 좋죠 다들언제시간되세요?]

[섭섭 : 전 아무때나 갠찬슴다]

[헤르미온느♡ : 그럼 성범 오빠랑 재경 오빠만 확인하면 되겠네용! 전 주말이 좋아요♡]

마침 좋은 타이밍이라고 생각하면서 재경은 서둘러 손가락을 움직였다.

[재경 : 저도 주말 한표요]

[헤르미온느♡ : 앗 재경 오빠다! 알바 중이세요?]

[재경 : 어]

[헤르미온느♡ : 수고가 많으셔요>.< 주말에 만나면 시간은 언제가 좋으세요?]

[재경 : 다섯시쯤?]

[헤르미온느♡ : 넵! 그럼 성범 오빠만 확인하면 의견 취합해서 공지로 올릴게요]

만장일치로 뽑힌 리더답게 끝내주는 결단력이었다. 그리고 재경은 두어 시간 뒤에 ‘이번 주 토요일 오후 5시 모임’이라고 등록된 공지사항을 확인할 수 있었다.

* * *

재경은 학교 근처에 있는 카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입구에 서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니 이보라가 재경을 알아보고 손을 번쩍 들었다.

“여기예요, 오빠!”

안쪽으로 걸어가자 최창섭과 주이판도 와 있었다. 늦은 것도 아닌데 벌써 의견을 내고 있었는지 펼쳐진 노트에 ‘광고’, ‘발표’, ‘어떻게?’ 등의 글자가 적혀 있는 것이 보였다.

“성범 오빠는 20분 정도 늦을 거 같대요.”

그러잖아도 조금 전에 메시지를 확인하고는 첫 모임부터 늦는다는 사실에 한숨을 쉬었었다. 제일 싼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주문한 뒤에 재경도 회의에 동참했다.

“아이디어는 좀 나왔어?”

“계속 생각 중이긴 한데, 딱 이거다 싶은 건 아직 없어요.”

티모시 교수가 수강생들에게 부여한 그룹 과제는 광고 제작 발표였다. 정확히 말하면 각자 아이템을 하나씩 고른 다음, 역할을 정해서 광고 형식으로 발표하는 것이었다.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해서는 참신한 아이디어와 상상력은 물론이고, 고급 어휘와 유머까지 겸비해야만 했다. 2학점짜리 교필 주제에 바라는 것도 많았다.

“오빠는 뭐 좀 생각해보신 거 있으세요?”

“나도 딱히 특별한 건 없어.”

과제 때문에 모이는 건데 빈손으로 나올 수는 없어서 나름대로 검색도 해보고 오픈마켓 사이트에 있는 품목들도 쭉 훑어봤다. 하지만 말했다시피 ‘이거다!’ 하고 느낌이 오는 건 없었다.

“스포츠 용품은 어때요?”

“스포츠 용품?”

“기능성 운동복이나 특화된 성능이 있는 운동화 같은 거요.”

어김없이 유창한 어휘력을 뽐내며 주이판이 의견을 내놓았다. 재경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이보라는 만족스럽지 못한 듯했다.

“일단 적어놓고, 조금만 더 고민해보자.”

“아니면 가전제품은요? 최신 TV나 냉장고 같은 거요.”

안타깝지만 최창섭의 의견도 흡족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잘 살릴 자신 있어? 앗, 여기예요 성범 오빠!”

이보라가 또 한 번 손을 번쩍 들었고, 모두의 시선이 한곳을 향했다. 재경도 뒤를 돌아보자 정말로 박성범이 들어와 있는 것이 보였다. 분명 최창섭을 보고 있었는데 동체 시력이 끝내준다 싶었다.

가까이 이른 박성범이 빈자리에 앉았다. 이보라는 지금까지의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한 뒤에 동일한 질문을 입에 담았다.

“오빠는 뭐 좀 생각해보신 거 있으세요?”

“없어.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가는 걸 여러 번 봐서.”

첫 모임부터 늦은 주제에 핑계도 좋았다. 재경은 기가 찬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나머지 셋은 딱히 개의치 않는 분위기였다. 다들 어지간히 도량도 넓다.

“이제 슬슬 정해야 될 거 같은데, 나온 의견들 중에서 다수결로 정할까요?”

“저는 좋습니다!”

정말로 좋은 건지, 아니면 빨리 끝내고 싶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최창섭이 손을 들어 보이며 이보라의 말에 찬성했다. 재경도 한 표를 보탰다. 오래 고민하는 만큼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좋겠지만, 지금 분위기로 봐서는 딱히 그럴 것 같지가 않았다.

그 때 박성범이 불쑥 입을 열었다.

“아니면 공익광고는 어때?”

“공익광고요?”

“광고 형식의 발표라고 하긴 했지만 상품에 국한된다는 말은 없었잖아. 모 아니면 도일 거 같긴 한데, 잘만 짜면 망하지는 않을 거 같아.”

“전 완전 좋아요!”

이보라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났다. 재경의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박성범의 말마따나 약간의 위험 부담이 있긴 해도 참신함 측면에서는 나무랄 데가 없었다. 광고라고 하면 보통은 CF나 홈쇼핑을 떠올릴 테니 말이다.

큰 가닥이 잡히니 이후로는 일사천리였다. 조별 모임을 하면 보통 한두 명은 아웃사이더 짓을 하거나 분위기를 흐리기 마련인데 이번에는 그런 사람이 없었고, 환경보호를 주제로 해서 순식간에 스토리가 뚝딱 만들어졌다.

재경도 나름대로 참신한 의견을 하나 보탰다. 주이판이 있으니 중간에 중국어 멘트를 짧게라도 넣어보는 건 어떠냐고 했더니 최창섭은 박수까지 치면서 좋아했다.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됐을 땐 벌써 7시가 다 되어 있었다. 카페 밖으로 나가면서 박성범이 말했다.

“밥 먹고 갈 사람 있어? 늦었으니까 내가 쏠게.”

“앗, 그럼 저 가겠습니다.”

“저도요.”

“저도 갑니다.”

다들 앞다투어 대답하고 재경만 남았다. 졸지에 네 쌍의 시선이 이쪽을 향하는 바람에 재경은 당황하다가 뒤늦게 대답했다.

“난 됐어.”

“왜. 약속 있어?”

“그런 건 아닌데…….”

“그럼 같이 가. 집에 밥 없어.”

그러자 티셔츠에 안경을 닦고 있던 최창섭이 불쑥 끼어들었다.

“선배님들 같이 사세요?”

“맞아.”

“사이가 엄청 좋으신가 봐요. 저도 1학년 때 친구랑 잠깐 같이 살았는데, 대판 싸우고 틀어졌어요.”

안타깝지만 엉터리 추측이었다. 친하기는커녕 아직도 조금은 서먹한 사이지만, 굳이 말할 필요는 없단 생각에 재경은 침묵을 지켰다.

“약속 없으시면 같이 가요, 오빠. 여럿이 먹으면 더 맛있잖아요.”

“맞아요.”

이보라와 주이판까지 합세해서 결국 재경은 못 이기는 척 함께 가기로 했다. 박성범이 선택한 곳은 고깃집이었다. 사람 마음처럼 얄팍한 건 없다더니, 갈비와 생삼겹을 통 크게 5인분씩 주문하는 걸 보자 따라붙길 잘했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다섯 명이라는 어정쩡한 인원 때문에 테이블 두 개를 잡았는데, 어쩌다 보니 재경은 박성범과 둘이서만 같은 테이블을 쓰게 됐다.

“맥주부터 한 잔씩 할까?”

“좋죠!”

박성범의 주도하에 다들 가득 채운 술잔을 하나씩 손에 들고 팔을 뻗었다. 잔끼리 쨍 하고 부딪치며 경쾌한 소리를 냈고, 재경은 맥주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인 뒤에 집게를 들었다.

불판 위에 양념 갈비를 올리자마자 치직거리며 식욕을 자극하는 냄새가 풍겼다. 벌써부터 입안에서 군침이 돌았다. 오늘도 어김없이 학식으로 점심을 때우고 이후로 먹은 거라곤 커피 한 잔뿐이니 그럴 만도 했다.

빤히 바라보다가 고기를 한 번 뒤집었다. 또 빤히 바라보다가 한 번 더 뒤집는데 박성범이 시비 아닌 시비를 걸었다.

“왜 그렇게 자주 뒤집어?”

“빨리 익으라고.”

시선도 떼지 않고 대답하는 모습에 박성범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리 줘. 내가 할게.”

“됐어.”

얻어먹는데 고기까지 구워주길 바랄 정도로 양심이 없지는 않았다. 집게로 불판 위의 고기 한 줄을 들어 올려보자 드디어 다 익은 듯해서 재경은 서둘러 다른 손에 가위를 들고 큼직하게 고기를 잘랐다.

“……잘 먹을게.”

예의상인 인사까지 건넸으니 이제 맛있게 먹을 일만 남았다. 재경은 쌈 채소 위에 고기 두 점을 올려서 입안 가득 밀어 넣었다.

식사 자리에서도 단톡방 못지않게 많은 대화들이 오갔다. 첫 강의 때부터 활기찼던 이보라는 물론이고, 얌전해 보이는 최창섭도 입심이 좋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든 말든 재경은 허기진 배를 채우는 데 집중했고, 박성범이 한 번씩 그런 재경에게 시선을 주었다.

사부작거리며 잘도 먹는다. 저번에 같이 라면을 먹었을 때도 느꼈지만 보기보다 식성이 좋은 듯했다. 박성범은 불판 위에서 익은 고기를 조용히 재경 쪽으로 밀어주고, 손을 들어 2인분씩 추가 주문을 했다.

옆 테이블도 다들 전투적으로 젓가락을 움직이기는 마찬가지였다. 폭풍 같은 식사가 끝난 뒤에 이보라가 티슈로 입가를 닦고는 말을 꺼냈다.

“저희 다음에는 언제 만날까요?”

“오늘처럼 토요일 5시에 볼까?”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최창섭이 그 말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앗, 저 다음 주 토요일은 안 돼요. 약속 있거든요.”

일순 떠오른 핑크빛 기류를 감지해낸 주이판이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애인 만나?”

“아냐!”

그러자 화들짝 놀라며 손사래를 친다. 귀는 순식간에 붉게 물들인 채였다. 다들 ‘옳다구나’ 하는 표정으로 음흉하게 웃으며 눈빛을 보냈고, 무언의 압박을 느낀 최창섭이 결국 뒷목을 긁적이며 이실직고를 했다.

“친구랑 같이 콘서트 보러 가기로 했어요.”

“콘서트? 누구?”

이보라의 물음에 최창섭은 얼굴을 더욱 붉게 물들였다.

“모카초코요.”

“헐, 대박. 표 구하기 되게 어렵지 않아?”

금세 수다를 떠는 두 사람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박성범은 재경에게 질문을 던졌다.

“넌 좋아하는 가수 없어?”

“없어.”

재경은 중고등학교 시절에도 연예인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래도 음악을 듣는 건 좋아하는 편이라서 노트북으로 과제를 할 때면 유튜브에서 최신 가요를 찾아서 듣곤 했다.

옆 테이블에선 이제 주이판까지 가세해서 어제 방영한 드라마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가만히 있다간 한도 끝도 없을 듯해서 슬슬 제지하려는데, 박성범이 먼저 말을 꺼냈다.

“그래서, 다음엔 언제 모일 건데?”

“일요일에 볼까요?”

“전 좋습니다.”

“저도요.”

속전속결로 약속을 정한 뒤에 다들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으로 나가자 어느덧 하늘이 캄캄하게 변해 있었다. 하지만 후텁지근한 공기는 밤이 되어도 여전했다.

식당 앞에서 인사를 나누고 뿔뿔이 흩어졌다. 이번에도 재경은 박성범과 나란히 걷게 됐다. 목적지가 같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주말 밤 대학가는 출근길 지하철 역사 안을 방불케 할 정도로 인파가 넘쳐났다. 재경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주말 저녁엔 보통 도서관에 있기 때문에 이런 혼잡스러운 광경을 보는 것은 꽤나 오랜만이었다.

그런데 기분 탓인지 어째 마주 오는 사람들이 한 번씩 이쪽을 힐끔거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얼굴에 뭐가 묻었나 싶어 입가를 매만지다가, 재경은 뒤늦게 이유를 깨달았다. 사람들의 시선은 제가 아닌 박성범을 향하고 있었다.

‘하긴, 눈에 띄긴 하지.’

순순히 납득하며 계속 걸어가는데 대뜸 말을 거는 목소리가 들렸다.

“택시 타고 갈까?”

“택시?”

“밤인데도 완전 더워.”

올려다본 옆얼굴은 드물게 굳어 있었다. 그래도 낮에 비하면 살 만한 것 같은데 박성범은 아닌 모양이었다.

몸에 열이 많다더니, 그래서 그런가. 속으로 생각하며 재경은 대답했다.

“그럼 혼자 타고 가. 난 걸어갈게.”

버스가 끊긴 것도 아니고 만취해서 몸을 가누지 못하는 것도 아닌데, 여름밤에 고작 날씨 좀 덥다고 택시를 타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낭비였다. 더군다나 이 혼잡하고 좁은 길목에서는 택시를 잡을 수도 없었다. 결국 큰길까지 나가야 한다는 말인데, 거기서 잡으면 집까지 너무 가까워서 탑승 거부를 당할지도 몰랐다. 문득 든 생각에 재경은 한마디를 덧붙였다.

“차 안 타고 왔어?”

“정비소에 맡겼어. 접촉사고가 났거든.”

태연한 박성범과 달리 재경의 얼굴엔 놀란 기색이 떠올랐다.

“안 다쳤어?”

“멀쩡해. 뒤쪽 범퍼만 살짝 긁혔는데, 상대방 과실이라서 보험 처리하기로 했어.”

“그래서 아까 늦은 거야?”

“어.”

첫 모임부터 늦는다고 흉을 봤던 게 살짝 미안해지는 순간이었다. 걷다 보니 길목 끝에 있는 편의점까지 왔고, 모퉁이를 돌자마자 넓은 대로가 나타났다.

“진짜 안 탈 거야?”

“뭐?”

“택시.”

“어.”

“……그럼 나도 그냥 걸어갈까.”

거의 동시에 박성범의 핸드폰이 울렸다. ‘진우 형’이라고 저장된 이름이 뜬 것을 보고는 전화를 받았다.

“예, 형.”

- 살아 있냐? 요즘 왜 이렇게 뜸해?

“개강해서 바빠요.”

- 바빠도 운동은 꾸준히 해야지. 오늘도 안 올 거야?

“오늘 토요일이잖아요.”

- 우리 클럽은 회원님의 건강을 위해서 토요일에도 9시까지 해. 가뜩이나 밤샘도 많이 하는데 운동까지 제대로 안 하면 몸 망가지는 거 한순간이야.

누가 큰형 친구 아니랄까 봐 꼰대처럼 잔소리를 퍼붓는 것도 똑같았다. 미간을 구긴 채로 듣고 있던 박성범은 결국 백기를 들고 말았다.

“갈 테니까 고만 좀 해요. 끊어요.”

종료 버튼을 누른 뒤에 박성범은 재경을 바라보았다.

“먼저 들어가. 난 헬스장에 좀 갔다 올게.”

“……그래.”

“아님 너도 같이 갈래?”

“아니.”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식 웃은 박성범이 나중에 보자는 말을 남기고 먼저 뒤돌아섰다. 성큼성큼 멀어지는 뒷모습을 잠깐 바라보다가 재경도 걸음을 옮겼다. 더워서 걷기도 싫다는 놈이 헬스장은 잘도 간다고 생각하면서.

* * *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시끄러운 음악 소리가 들렸다. 자동문 버튼을 눌렀더니 문이 열리며 음악 소리는 더욱 커졌고, 소중한 회원님의 얼굴을 알아본 정진우가 냉큼 가까이 다가왔다.

“왔어?”

웃는 얼굴로 말을 건넨 것도 잠시, 금세 눈살을 찌푸리며 설마 하는 어조로 물었다.

“술 마셨어?”

“조금요.”

“술 마신 놈이 여길 왜 와?”

“형이 오라고 했잖아요.”

“집이나 작업실에 처박혀 있는 줄 알았지. 술 마셨으면 그냥 가.”

“맥주 두 잔밖에 안 마셨어요. 유산소만 좀 하고 갈게요.”

더한 잔소리가 날아들기 전에 박성범은 탈의실로 가서 옷을 갈아입었고, 러닝머신 위에 올라서 스타트 버튼을 눌렀다.

처음엔 가볍게 걷다가 서서히 속도를 높였다. 5분을 넘어가니 등에 슬슬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더운 것은 질색이지만 운동은 예외였다. 중독까지는 아니어도 땀을 쫙 빼고 난 뒤에 찾아오는 개운함이 좋아서 급한 일이 없으면 헬스장은 꾸준히 찾는 편이었다.

헬스클럽 대표인 정진우가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옆에는 또 다른 트레이너가 서 있었다.

“뒤에서 봐도 몸 진짜 좋네요.”

순수한 감탄이 담긴 말에 정진우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내가 만들어준 거야.”

“원래부터 좋았던 거 아니고요?”

“어허, 내가 만들어줬다니까.”

사실은 트레이너의 짐작이 맞았다. 박성범은 고딩 때부터 절친한 친구 놈의 동생인데, 어릴 때부터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팔다리가 길쭉한 것이 소위 말하는 떡잎부터 남다른 녀석이었다. 대체 어떤 유전자를 물려받았는지 몇 년 뒤에는 기어이 키마저 추월하더니, 그대로 반듯하게 잘 자라서 멋진 남자가 되었다.

“아직 학생이랬죠?”

“어.”

“학교에서 인기 엄청 많겠어요.”

그렇겠지.

외모면 외모, 성격이면 성격, 게다가 씀씀이도 좋은 편이니 인기가 없는 게 이상할 노릇이었다. 하지만…….

“그러면 뭘 해.”

“예?”

“……그냥 혼잣말이야. 가서 김윤미 회원님이나 더 봐줘.”

“예!”

몇 분이 지나도 흐트러짐 없는 등판에 시선을 고정한 채 정진우는 아무도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저렇게 근사한 놈이 게이라니, 제가 다 아까운 마음이 들었다.

* * *

아침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알람을 끈 재경은 긴 하품을 흘린 뒤에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아직도 단 세 장뿐인 팬티 중 하나를 챙겨 들고 욕실로 들어갔다. 거실에서 시원하게 자라는 걸 한사코 거절했더니 박성범은 새끈한 검은색 선풍기 한 대를 던져줬다. 그것도 감지덕지한 일이었지만, 밤새 선풍기를 틀고 자도 땀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덕분에 모닝 샤워가 일과의 시작이 되어버렸다.

씻고 나왔더니 주방 쪽에서 소리가 났다. 슬쩍 다가가 보자 박성범이 싱크대 앞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앉아. 거의 다 됐어.”

그렇다고 냉큼 앉기는 그래서 재경은 인사치레에 불과한 물음을 던졌다.

“도와줄 건 없어?”

“없어. 우유 마실 거면 꺼내든가.”

“너는?”

“난 커피.”

이윽고 토스터기로 구운 식빵과 계란 프라이가 담긴 접시 등이 테이블 위에 놓였다. 재경은 반색하며 식빵 하나를 집어 들었다.

“잘 먹을게.”

조촐하다면 조촐하지만, 공복으로 나가는 것에 비하면 충분히 훌륭한 식사였다. 나름 배도 든든하게 채울 수 있고 식비도 아낄 수 있으니 일석이조였다.

함께 산 지 어느덧 2주일째. 그간 재경은 박성범에 대해서 이런저런 것들을 조금씩 알게 됐다. 보기보다 부지런하다거나, 알바를 마치고 집에 오면 보통은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고, 불이 꺼져 있으면 집에 없다는, 그런 소소한 점들. 그리고 아침에 한 번씩 홀딱 벗은 채로 마주쳐서 사람 기함하게 하는 점도 여전했다.

어쨌거나 동거 생활은 생각보다 훨씬 순조로웠다. 좋은 점은 또 있는데, 박성범도 일주일에 두 번은 1교시 수업을 들어서 그때마다 차를 얻어 탈 수 있었다. 학교까지 그렇게 멀지는 않지만 땀 흘리지 않고 학과 건물 바로 앞에서 내리면 확실히 편하기는 했다.

오늘도 작열하는 태양은 여전했다. 창밖에 시선을 두는 동안 박성범의 차는 정문을 유유히 통과했고, 잠시 후에 빈 주차 공간에 세워졌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안녕하세요.”

차에서 내리자마자 산뜻한 인사가 들려왔다. 인사 대상은 물론 박성범이었다. 후배로 추정되는 여학생들에게 둘러싸이는 놈을 뒤로한 채 재경은 먼저 학과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아니, 이게 누구야.”

채 몇 걸음 걷기도 전에 누군가가 힘차게 헤드락을 걸었다. 그 바람에 하마터면 재경은 앞으로 고꾸라질 뻔했다. 범인은 김성욱이었다. 재경은 목을 주무르며 마뜩찮은 시선을 보냈다.

“놀랐잖아.”

“엄살은. 커피 마실래?”

달콤한 권유에 불만이 입안으로 쑥 들어갔다. 덜컹하며 자판기에서 떨어진 캔 커피 하나가 재경에게 건네졌고, 두 사람은 곧 나란히 커피를 마시며 복도를 걸었다.

“성범이랑 같이 왔어?”

“어.”

“그래도 잘 지내나 보네. 그 새끼, 차에는 존나 까다로워서 아무나 안 태워주거든.”

뜻밖의 정보였다. 까다롭다니, 딱히 그런 기색은 못 느꼈는데.

강의실 의자에 앉자마자 김성욱이 한 일은 해외 축구 동영상을 재탕하는 거였다. 눈은 핸드폰 화면에 고정한 채 입으로는 무성의한 질문을 던졌다.

“주말에 뭐하냐?”

“뭐하긴. 과외 갔다가 공부하지.”

형편이 빠듯하지만 주말 알바는 일부러 잡지 않았다. 오후에는 경수 때문에 삼촌 집에 가야 되고, 학기마다 최소 한 번씩은 꼭 있는 조별 과제 모임에 참석할 시간도 필요했다. 무엇보다 일주일 내내 알바를 하면 시험 기간에 공부할 시간마저 빠듯해지는데, 그런 식으로 주객이 전도되는 것은 사양이었다.

“그럼 너도 껴. 가평에 방 잡아놨어.”

“가평?”

“어. 다음 주에 이 형님 생일이잖냐. 이왕 놀 거 화끈하게 놀아보려고.”

내일이 없는 놈들처럼 부어라 마셔라 하며 광란의 밤을 보낼 모습이 절로 그려졌다. 재경은 생각할 것도 없이 거절했다.

“나는 빼줘. 바빠서 안 돼.”

“주말엔 알바 없잖아. 참가비 2만 원인데 특별히 넌 공짜로 해줄게.”

그러더니 갑자기 고개를 휙 돌리며 쓸데없는 연설을 늘어놓는다.

“대학 생활은 공부가 다가 아니다, 이거야. 우리 학번 놈들만 모이니까 지금이라도 인맥 좀 쌓고 그래, 인마.”

“이제 와서 무슨.”

재경은 덤덤하게 대꾸했지만 내심 신경 쓰이는 부분이긴 했다. 먹고사는 데 급급하다 보니 1학년 때부터 정말 꼭 필요한 모임이 아니면 빠질 때가 많았고, 그러다 보니 선후배는 물론이고 같은 학번 동기들도 낯설 때가 있었다. 복학한 뒤에는 더 심해졌다. 마이페이스인 학생이 저뿐일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지만, 그래도 아주 가끔은 고립된 섬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긴 했다.

“콜?”

“…….”

“콜?”

“……콜.”

“오케이, 1인 확정.”

재경의 표정이 일순 돌변했다.

“야, 이 사기꾼아.”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거, 커피 마셨으니까 무르는 건 안 됨. 그새 다 마셨네.”

책상 위에 올려둔 빈 캔을 흔들면서 얄밉게도 웃는다. 퍽, 애정으로 뒤통수를 한 번 만져줬더니 대번에 뇌세포가 죽네 어쩌네 엄살을 떤다. 왈왈대는 소리를 깔끔히 무시한 채 재경은 전공 서적 페이지를 넘겼다. 별다를 것 없는 하루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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