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22)

2.

어느 순간 휴대폰 벨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재경은 인상을 구긴 채로 잠에서 깼다. 손만 뻗어서 머리맡을 더듬거리자 휴대폰으로 추정되는 물체가 손끝에 걸렸다. 간신히 눈을 뜨고 시간을 확인해보니 오전 8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재경은 알람을 끄고 일어나서 비척비척 욕실로 향했다. 평소엔 아침에 곧잘 일어나는 편인데 오늘따라 몸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아마도 정신적인 피로감이 쌓여서 그런 듯했다.

세수를 하고 나니 그나마 정신이 좀 맑아졌다. 젖은 얼굴을 수건으로 닦으며 방으로 돌아간 재경은 곧장 노트북 전원을 켰다.

패스워드를 입력하자 익숙한 배경화면이 나타났다. 마우스를 움직여 인터넷 창을 클릭한 것도 잠시, 이내 “응?” 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포털 사이트 메인 화면 대신 페이지를 찾을 수 없다는 문구가 보였다.

다른 창을 한 번 더 열어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뒤늦게 이유를 깨닫고는 튕기듯이 일어나서 밖으로 나갔다.

‘미친…….’

어제 와이파이 비밀번호를 물어본다는 게 깜빡하고 그냥 자버렸다. 깜빡할 게 따로 있지. 자책 아닌 자책을 하며 빠른 걸음으로 거실을 가로질렀다. 수강 신청 사이트가 열리는 시간까지 여유가 있긴 하지만 괜히 마음이 조급해졌다. 여차하면 근처 PC방으로 달려가야 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막상 목적지 앞에 다다르니 선뜻 손이 나가질 않았다.

‘일어났을까?’

이른 아침부터 남의 방 문을 두드려대는 것이 내키지는 않았지만, 생각해보니 박성범도 수강 신청을 하긴 해야 할 터였다. 그렇게 자기합리화를 하며 재경은 고동색 문에 대고 노크를 했다.

“나야. 혹시 일어났어?”

문 너머는 잠잠했다. 귀를 기울여봤지만 딱히 인기척이 들리는 것 같지도 않았다. 잠깐 기다린 재경은 다시 한 번 문을 두드렸다.

“박성범.”

하지만 이번에도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철옹성처럼 닫힌 문을 바라보고 서 있자니 또다시 슬금슬금 초조함이 차올랐다.

‘……한 번만, 딱 한 번만 더 두드려보자. 그래도 반응이 없으면…… 열어보는 거다.’

그렇게 생각하며 주먹을 쥐었을 때였다.

벌컥-

느닷없이 문이 열리는 바람에 하마터면 재경은 소리를 지를 뻔했다. 열린 문 사이로 박성범의 얼굴이 나타났다.

‘와 씨, 아침부터 간 떨어질 뻔했네. 그래도 박성범이 일어나서 다행…… 응?’

순간 재경의 시선이 어딘가에 닿았다. 자신이 본 것을 인지한 순간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고 말았다.

미, 미친 거 아냐?!

두 눈은 튀어나올 것처럼 부릅떠졌다. 그도 그럴 것이 박성범은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았다. 상반신 누드야 그렇다 쳐도, 무성한 검은 털과 그 아래의 중심부까지 죄다 눈에 들어왔다.

너무 놀라니 말도 제대로 나오질 않았다. 충격에 휩싸인 재경과 달리 박성범은 몹시도 태연한 모습이었다. 자신의 몸을 한번 내려다보더니 다시금 시선을 마주했다.

“음흉하기는.”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노릇이었다. 재경은 입을 뻐끔거리다가 간신히 목소리를 끄집어냈다.

“왜, 왜 이러고 서 있어?”

웬만한 일에는 평정심을 유지한다고 생각하는 편인데, 아침부터 불시에 당한 안구 테러에는 속수무책이었다. 그러든 말든 박성범은 몸을 가릴 생각도 하지 않고 태연하게 대꾸했다.

“자는 사람 네가 깨웠잖아.”

“……이러고 잤단 말이야?”

“몸에 열이 많아서 잘 땐 다 벗고 자거든. 근데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이유를 묻는 말을 들으니 그제야 정신이 돌아왔다. 실수로라도 시선을 내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재경은 아침부터 방문을 두드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말했다.

“와이파이 비번 좀 알려줘. 수강 신청해야 되는데 인터넷이 안 잡혀.”

박성범의 얼굴에 언뜻 미소가 떠올랐다. 방금 봤던 재경의 표정도 그렇고, 지금도 묘하게 비켜간 시선을 보니 어지간히 당황한 모양이었다.

“설정한 지 하도 오래돼서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아님 네 휴대폰 좀 가져와봐. 자주 쓰는 비번들 입력해볼게.”

“알았어.”

방으로 돌아간 재경은 휴대폰을 들고 다시 나왔다. 그새 5분이나 더 지난 것을 보고는 재빨리 패턴을 풀어서 박성범에게 건넸다.

“받아.”

“패턴 엄청 단순하네.”

그새 또 그걸 본 모양이다. 재경은 못마땅하게 혀를 차다가 와락 인상을 구기며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박성범은 여전히 알몸 상태였다.

“오, 됐다.”

“뭔데.”

“영타로 놓고 ‘비밀번호’라고 치면 돼. 전부 소문자로.”

돌려받은 휴대폰을 확인해보니 와이파이가 잡혔다는 표시가 상단에 떠 있었다. 내심 1234 반복이나 00000 뭐 이런 거로 해놨을 줄 알았더니. 어쨌든 볼일이 끝났기에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서는데 뒤에서 박성범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근데 그쪽 방에서는 속도가 느릴걸?”

“뭐?”

“공유기가 내 방에 있어서 그런지 거실만 지나도 신호가 약해지더라고. 아니면 내 방으로 와. 어차피 나도 해야 되니까.”

“……일단 한번 해보고.”

“그러든가 그럼.”

방으로 돌아간 재경은 재빨리 노트북 자판을 두드렸다.

‘비밀번호……. 됐다!’

연결된 것을 확인하고는 서둘러 인터넷 창을 클릭했다. 하지만 호기로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화면이 뜨긴 뜨는데, 집주인의 말마따나 로딩 속도가 예사롭지 않았다.

와중에도 시간은 자꾸만 흘러갔다. 미간을 구긴 채로 화면을 노려보던 재경은 할 수 없이 노트북과 마우스를 챙겨 들고 일어났다.

‘아직도 벗고 있는 거 아냐?’

방문은 반쯤 열린 채였다. 혹시나 해서 슬쩍 안을 들여다보니 박성범은 침대 헤드에 기댄 채로 허벅지 위에 둔 노트북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다행히 옷은 주워 입은 상태였다. 그제야 안심하며 크흠, 헛기침으로 존재를 어필했더니 금세 고개를 들며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웃어 보였다.

“앉고 싶은 데 편하게 앉아.”

재경은 잠깐 망설이다가 침대를 지나쳐서 테이블로 다가갔다. 가까이 가서 보니 재떨이와 담뱃갑, 물티슈 따위가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한쪽으로 살짝 밀고 자리를 잡으니 박성범도 노트북을 들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8시 49분. 아직은 여유가 있었다. 재경은 메모장을 열고 한 번 더 시간표를 확인했다. 알바 때문에 공강 없이 전부 앞으로 밀어놨기 때문에 반드시 이대로 성공해야만 했다.

박성범이 담배 한 개비를 꺼내서 입에 물었다. 그러다 무슨 생각에서인지 테이블 위에 도로 올려두는 것을 보고 재경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입을 열었다.

“피우고 싶으면 피워도 돼.”

“담배 연기 싫어할 거 같아서.”

“상관없어.”

물론 좋지는 않겠지만 집주인이 본인 방에서 피우는 것까지 싫어하는 티를 낼 마음은 없었다. 그보단 다른 데 신경이 쓰였다. 방에 들어올 때부터 찬 기운이 훅 느껴지더니 시원하다 못해 추울 지경이었다. 팔뚝을 슥슥 문질렀더니 박성범이 리모컨으로 에어컨 온도를 조절했다.

“이렇게 있으면 안 추워?”

“안 추워. 이것도 새벽에 온도 올려놓은 거야.”

올려놓은 게 이 정도라고?

딱 그런 표정으로 쳐다봤더니 피식 웃으며 상체를 살짝 앞으로 기울인다.

“손 한번 줘봐.”

느닷없는 요구가 이어졌다. 재경은 의아했지만 시키는 대로 오른손을 테이블 위로 올렸다. 그 위를 덮듯이 박성범의 손이 내려앉았다.

“……!”

거의 동시에 재경이 후다닥 손을 빼냈다. 얼굴에는 경악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손이 왜 이렇게 뜨거워?”

“말했잖아. 몸에 열이 많다고.”

“춥게 자서 열나는 거 아냐?”

그게 아니면 사람 손이 이렇게 뜨거울 리가 없었다. 재경은 확신을 가지고 말했지만 상대는 여유롭게 웃을 뿐이었다.

“원래 열이 많다니까. 아니면 다른 데도 한번 만져보든가.”

“……됐어.”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까 불식간에 목격했던 나체가 떠올라서 인상을 구기고 말았다. 다시 생각해도 아침부터 큰 충격이 아닐 수가 없었다.

재경은 다시금 마우스를 손에 쥐었다. 모니터 하단 시계에 눈동자를 고정하고 있는데 박성범이 묻는 말이 들렸다.

“몇 학점 들을 거야?”

“24학점.”

“24? 그게 가능해?”

“가능하지.”

내년에 조기 졸업하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에 재경은 작년부터 풀로 학점을 채워서 듣는 중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빠듯하긴 했다. 공강이 거의 없는 데다가 운이 나쁘면 하루에 네 과목씩 기말시험을 쳐야 하는 불상사가 있을 때도 있지만, 잘만 하면 시간도 돈도 크게 절약할 수 있으니 한번 해볼 만한 도전이었다.

“넌 몇 학점 듣는데.”

“22학점.”

“너도 많이 듣네.”

“인과응보지, 뭐.”

인과응보?

박성범의 표정을 보고 뒤늦게 말뜻을 깨달았다. 짐작건대 아무래도 발등에 불이 떨어진 모양이다.

같은 학부 동기인 것은 맞지만 두 사람은 딱히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다. 학년마다 인원수가 워낙 많다 보니 같은 분반 내에서도 자연스레 몇 개의 무리가 만들어졌는데, 어디에도 끼지 않은 재경과 달리 박성범은 소위 말하는 한 가닥 한다는 놈들과 어울려 다녔다. 그 탓에 개설반이 하나뿐인 전공 수업을 듣거나 중요한 학과 행사에 참석할 때를 제외하면 두 사람의 접점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자기 집에 와도 된다는 고마운 제안을 해주었지만, 재경이 선뜻 응하지 못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한마디로 같은 학번 동기라는 사실을 빼면 거의 남이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재경은 박성범의 얼굴과 이름만큼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어디에 있어도 눈에 띄는 사람이 있는데, 박성범도 그러한 부류에 속했다.

일차적인 이유는 겉모습 때문이었다. 190을 웃도는 키에 그에 걸맞은 체격. 여럿이 같이 있어도 남들보다 얼굴이 위에 있으니 어디서든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보통 집안이 아니라는 소문까지 더해져서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는 존재감을 자랑했다.

게다가 전적은 또 어찌나 화려하신지, 학과 수업에만 충실한 자신도 이런저런 소문을 알 정도니 말 다한 셈이었다. 물론 그 소문을 전부 믿는 것도 아니고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지만, 어쨌거나 박성범이 학부에서 유명 인사인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 ♬♪♪

알람 소리에 휴대폰을 보니 8시 57분이었다. 이제 슬슬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하는지 박성범도 자세를 바로 하며 마우스를 쥐는 것이 보였다.

58, 59, 09:00

모든 숫자가 바뀜과 동시에 재경은 재빨리 패스워드를 붙여넣기하고 로그인을 시도했다. 지금부터는 말 그대로 시간 싸움이었다.

만반의 준비를 한 만큼 하나씩 침착하게 성공했다. 순식간에 두 개를 끝내고, 세 번째 과목 코드를 복사해서 붙여넣기 했다. 이어서 신청 버튼을 눌렀는데 낯선 과목명이 추가되었다.

‘뭐야. 왜 이래?’

재경은 당황했지만 침착하게 삭제하고 한 번 더 코드를 긁어와서 신청하기 버튼을 눌렀다. 하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그제야 뭔가가 잘못되었음을 깨닫고는 일단 다른 과목부터 먼저 신청했다. 다행히 전부 한 번에 끝내고, 부랴부랴 교육과정표 파일을 열어서 법 경제학을 찾았다.

혹시 몰라서 이번에는 하나하나 과목 코드를 입력했다. 그러고 나서 신청 버튼을 눌렀지만, 절망스럽게도 수강 인원이 다 찼다는 멘트가 나타났다. 재경은 그만 머리를 감싸 쥐고 말았다.

“……어떡하지.”

미련이 남아서 두어 번 더 시도해봤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온몸으로 절망감을 표출하고 있으니 태평하게 묻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잘 안 됐어?”

“하나를 놓쳤어.”

“전필?”

“아니, 전선.”

“그럼 일단 아무거나 넣고 계속 시도해봐. 누가 취소할 수도 있으니까.”

안타깝게도 그런 기대는 전혀 들지 않았다. 법 경제학 담당 교수는 학생들 사이에서 좋은 쪽으로 명성이 자자하기 때문에 빈자리가 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어쨌든 하나 더 넣긴 해야 돼서 같은 시간대의 다른 수업을 일단 신청했다. 깔끔하게 성공했으면 좋았을 것을. 계속 신경 쓰며 틈틈이 체크해야 할 걸 생각하니 벌써부터 골치가 아팠다.

그와 달리 박성범은 몹시도 느긋했다. 노트북을 덮는 모습을 보면서 재경은 저도 모르게 소리 내서 물었다.

“넌 다 넣었어?”

“전필 하나 빼고. 근데 그건 정 안 되면 한 자리 더 열어달라고 하면 되니까.”

순간 재경은 제 귀를 의심했다.

“전필을 못 넣었다고?”

“제일 뒤에 했더니 다 찼더라고.”

그런 의미로 물어본 게 아니다. 보통 전공 필수 과목은 2학년까지 듣고, 재수강을 해도 어지간해서는 좋은 학점을 받기가 힘들다. 그걸 지금 듣는다는 걸 보니 두 가지 정도 추론이 가능했다. 제때 수업을 듣지 않았거나, 재수강을 해야 할 정도로 학점이 형편없거나.

몸을 일으킨 박성범이 어딘가로 걸어갔다. 이끌리듯 시선을 움직였더니 옷장 앞에 서서 민소매 티를 벗는 것이 보였다. 재경은 거듭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좀 전에도 그러더니 남 앞에서 잘도 훌렁훌렁 벗어댄다.

“나가서 밥이나 먹자.”

“난 됐어.”

박성범이 티셔츠를 끌어 내리며 뒤를 돌아봤다.

“왜. 원래 아침 안 먹어?”

“어.”

사실 가능하면 우유 한 잔이라도 챙겨 마시는 편이긴 했다. 공복이면 머리가 잘 안 돌아간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인데 지금은 그냥 습관에 가까웠다.

하지만 아침부터 박성범과 나란히 숟가락을 들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일단 도서관에 가서 자리부터 맡아놓고, 좀 더 있다가 구내식당으로 가면 될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며 일어나는데 어느새 다가온 박성범이 앞을 막아섰다.

“그럼 오늘은 먹는 걸로 해. 근처에 가정식 백반 잘하는 집 있어.”

“난 됐으니까 혼자 먹어.”

“반찬이 많이 나와서 혼자 가면 눈치 보여. 이사 기념으로 내가 쏠 테니까 같이 가기만 해.”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더니 정말이었다.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연거푸 거절하기도 곤란했다. 게다가 자기가 사겠다고 하니 밥값도 아낄 수 있었다.

“……알았어. 일단 좀 씻고, 가방 챙겨서 나올게.”

그랬더니 박성범이 뭔가가 생각났다는 얼굴로 제 턱을 매만진다.

“나도 아직 세수도 안 했네.”

참 빨리도 깨닫는다. 재경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노트북을 챙겨 들고 밖으로 나갔다.

* * *

푹- 하얀 빨대가 두유 팩 속으로 파고들었다. 입에 물고 쭉 빨아들이자 달콤하면서도 고소한 맛이 났다.

오늘 재경의 점심 메뉴는 도서관 매점에서 산 삼각김밥과 검은콩 두유였다. 뒤늦게 식당에 갔더니 정식 메뉴가 동이 나서 간단한 요깃거리를 사 들고 휴게실로 향했다.

“그건 대체 뭔 조합이냐?”

그렇게 묻는 김성욱의 메뉴도 재경이 보기에는 도긴개긴이었다. 소시지 빵에 블루 레모네이드도 썩 훌륭한 조합은 아닌 거 같은데.

“수강 신청은 잘했어?”

“그냥저냥.”

다시 생각해도 입안이 썼다. 도서관에 오자마자 한 번 더 시도해봤지만 법 경제학은 여전히 정원 초과였다.

“성범이랑 같이 살기로 했다면서.”

“……그렇게 됐어.”

벌써 알고 있는 걸 보니 둘 사이에 말이 오간 모양이다. 재경은 새삼 김성욱이 대단한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선후배는 고사하고 일부 동기들 이름도 제대로 모르는 자신과 달리, 김성욱은 소문난 마당발에 화려한 인맥을 자랑했다. 한마디로 여기저기 안 끼는 데가 없는 놈이었다.

“잘 생각했어. 근데 솔직히 말하면 나도 좀 놀랐어.”

왜?

표정으로 물었더니 레모네이드를 한 모금 삼키고는 말을 잇는다.

“그렇잖아. 아무리 사정이 안 좋다고는 해도, 남한테 선뜻 자기 집에 와서 살라고 말하기가 어디 쉽냐?”

그러다 뭔가 생각났다는 표정으로 말을 잇는다.

“둘이 원래 친한 사이야?”

“친하기는. 그랬으면 폰 번호 정도는 알고 있었겠지.”

“……그러네. 암튼 이번 기회에 잘 지내봐.”

재경은 대답 대신 빨대를 다시 입에 물었다. 자연히 박성범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솔직히 말하면 녀석에 대한 이미지가 딱히 좋은 편은 아니었다. 박성범의 주변에는 늘 사람들이 가득했고, 멀리서만 봐도 가볍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막상 어제 오늘 가까이에서 지내보니 지레짐작만큼 생각이 없는 놈은 아닌 듯했다. 방을 깨끗하게 치워둔 것도 그렇고, 칫솔 등을 먼저 챙겨주는 것도 그렇고. 본래 성격을 파악하려면 조금 더 시일이 필요하겠지만 아직까지는 크게 나쁘지 않았다.

“집들이는 언제 할 거야?”

대뜸 건네는 질문에 재경은 인상을 찌푸린 채로 옆을 돌아봤다. 우걱우걱 빵을 씹어대는 걸 보니 아무 생각이 없는 게 분명하다.

“얹혀사는데 집들이는 무슨.”

“그래도 할 건 해야지. 저녁에 맥주 사서 갈까?”

“오늘 알바 있어.”

“그럼 끝나고 한잔하자. 성범이한테는 내가 연락할게.”

말이 끝나자마자 휴대폰을 꺼내더니 미친 속도로 손가락을 움직여댄다. 숨길 수 없는 미소가 떠오른 놈을 보면서 재경은 그제야 감을 잡았다. 집들이는 핑계고, 그냥 술이 마시고 싶었나 보다.

“크……. 역시 뭘 좀 아는 놈이라니까. 밤에 자기 집에서 마시잔다.”

희희낙락한 김성욱과 달리 재경은 옅은 한숨을 한 번 내쉬고 말았다. 집주인이 괜찮다고 하니 할 말이 없었다. 오늘도 일찍 자기는 글렀다고 생각하면서 남은 김밥을 묵묵히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 * *

“왔냐?”

알바를 끝내고 귀가하니 거실에서는 이미 술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현관으로 들어서는 재경을 본 김성욱이 집주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반갑게 맞았다.

“얼른 와서 앉아.”

“좀 씻고.”

“새끼, 깔끔떨기는.”

“……땀 냄새 한번 맡아볼래?”

“아냐. 얼른 씻고 와.”

샤워를 하고 나온 재경은 거실 한편에 자리를 잡았다. 어째 시끌시끌하다 했더니 TV에서 축구 중계가 한창이었다. 테이블 위에는 빈 소주병이며 맥주 캔이 벌써 여러 개였다.

“이래서 집에서 마시자고 했냐?”

“겸사겸사 그런 셈이지.”

겸사겸사는 무슨.

김성욱은 자타가 공인하는 축구광이었다. 해외 시즌이 시작되면 휴대폰을 손에 달고 사는 것은 기본이고, 밤새 하이라이트 영상을 돌려보다가 눈알이 시뻘건 채로 수업을 들으러 오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그렇지. 그렇지! 고, 고, 고!!!”

저러다 아주 그냥 TV 속으로 빨려 들어갈 기세다. 한심하단 표정으로 뒤통수를 쳐다보고 있으니 소파에 등을 기댄 채로 앉은 박성범이 말을 걸었다.

“뭐 마실래?”

“맥주 남았어?”

“아직 많아.”

달그락하는 소리에 이어 캔 맥주 하나가 건네졌다. 재경은 받자마자 깜짝 놀랐다.

“왜 이렇게 차가워?”

“아이스 버킷에 들어 있던 거라서.”

얼음통까지 준비한 걸 보니 작정을 하고 마실 생각인 듯했다. 어쨌거나 시원해서 좋기는 했다. 탭을 딴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켜자 등골이 서늘해질 정도로 차가운 감각이 밀려왔다. 역시 무더운 여름밤에는 시원한 맥주만큼 좋은 게 없었다.

“고! 고고! 고! 어, 어, 아악!”

야심차게 쏘아 올린 중거리 슛이 빗나감과 동시에 김성욱이 절규했다. 재경은 미간을 구기며 서둘러 발끝으로 놈의 엉덩이를 툭툭 쳤다.

“조용히 해. 아래층에서 사람 올라오겠다.”

“내가 지금 조용히 하게 생겼어?”

그와 동시에 시합 종료를 알리는 휘슬 소리가 길게 울렸다.

[경기 끝났습니다! AC밀란이 나폴리를 상대로 짜릿한 역전승을 거뒀습니다.]

가만히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박성범이 한마디 툭 던졌다.

“내놔.”

내놔? 뭘?

재경의 의문을 해소해준 사람은 김성욱이었다. 머리를 감싸고 있던 손을 떼며 비굴한 표정으로 박성범을 쳐다본다.

“내일 주면 안 됨? 나 지금 돈 없는데.”

“아까 지갑 꺼내는 거 다 봤어.”

“안에 카드밖에 없어. 후불 교통카드.”

“그럼 지갑째로 줘봐. 진짜 교통카드만 있으면 돌려줄 테니까.”

“……와 씨, 한마디를 안 지네.”

김성욱이 툴툴대며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덕분에 재경은 뒤늦게 정황을 파악했다. 어느 팀이 이길지를 놓고 둘이서 내기라도 한 모양이다.

“진짜 한 번만 봐주면 안 되냐?”

“어. 안 돼.”

“우라질 새끼. 하여간 꼭 있는 놈들이 더해요.”

쿨하지 못하게 청승을 떨더니 결국 김성욱은 지갑 속에 든 지폐 한 장을 꺼냈다. 재경은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한 판에 무려 신사임당이 오가는 내기라니, 둘 다 어지간히 간도 크다.

한순간에 주인이 바뀐 5만 원짜리 지폐를 박성범은 여봐란듯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고맙다. 잘 쓸게.”

“닥쳐. 좀 있으면 엠폴리랑 칼리아리랑 붙는데 어느 쪽에 걸 거임?”

“안 해.”

“뭐? 안 해?”

김성욱의 눈이 희번덕 빛났다. 금방이라도 멱살을 잡고 흔들어댈 기세였다.

“5만 원이나 처먹고 입 닦으려고?”

“원래 이런 건 땄을 때 바로 빠지는 거야. 알면서 왜 그래.”

“와, 나 진짜…….”

먹튀를 당한 놈의 얼굴에 세상 억울하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러거나 말거나 재경은 유유자적하게 맥주 캔을 기울였다. 딱 봐도 저놈이 먼저 하자고 질척댔을 게 뻔해서 동정심도 들지 않았다.

Trrrr- Trrrr-

머리칼을 쥐어뜯던 김성욱이 핸드폰 벨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액정을 확인하더니 언제 절망했었냐는 듯 반색하며 전화를 받는다.

“응, 여보야.”

재경은 피식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저러니 저놈 여친은 아직도 자기 남자친구가 마냥 착한 줄로만 알지. 기억이 맞다면 벌써 3년 넘게 사귀는 걸로 알고 있는데, 아직도 저렇게나 좋을까 싶었다.

“아니, 성범이 집에서 마시고 있어. 재경이가 어제부터 성범이랑 같이 살게 됐거든. 어. 그 고시텔 때문에. 아니, 여기서 자고 갈 거야.”

순간 재경은 멈칫하며 김성욱을 쳐다봤다. 박성범의 표정도 딱딱해지기는 마찬가지였다.

“응. 알았어. 나도 사랑해 여보.”

전화를 끊자마자 재경은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그 전에 박성범의 목소리가 먼저 흘러나왔다.

“누가 재워준대?”

“에이, 우리 사이에 야박하게 왜 그래. 숙박비도 미리 줬구만.”

김성욱이 비굴하게 웃으며 턱짓으로 5만 원짜리 지폐를 가리켰다. 하지만 집주인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는 수작이었다.

“가져가도 되니까 너네 집에 가서 자.”

“와, 진짜 이러기냐? 자꾸 이러면 나도 상처받아.”

“상처?”

박성범이 코웃음을 치며 기다렸다는 듯이 되받아쳤다.

“들어오자마자 남의 집 현관에 토하고, 새로 꺼내준 이불에도 빈대떡 부친 놈이 할 말은 아니지 않아?”

“에이, 그게 언제적 일인데 아직도 들먹이고 그래. 오늘은 얌전히 잘 테니까 걱정을 안 해도 돼. 이불도 필요 없어.”

“또 토하면 세탁비 청구할 줄 알아.”

“안 한다니까.”

이후로는 늘 그렇듯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이 오갔다. 동기 중 한 놈인 누가 이랬고, 분데스리가인지 뭔지에서 뛰는 축구 선수가 저랬고. 음악으로 치면 주크박스나 다름없는 김성욱이 있어서 대화는 끝을 모르고 계속 이어졌다.

어느 순간 재경은 몰려오는 피로감을 느꼈다. 시계를 보니 어느덧 새벽 1시가 지나 있었고, 이제 슬슬 일어나야겠다는 생각에 때를 봐서 입을 열었다.

“계속 더 마실 거야?”

“당연하지! 끄윽, 밤은 이제부터 시작인데.”

“그럼 둘이서 달려. 난 들어가서 자야겠다.”

묵묵히 술잔만 기울이고 있던 박성범이 재경의 편을 들어주었다.

“그만 마시고 정리하자. 나도 내일 아침에 나가봐야 돼.”

“……수상한데. 둘이 짜고 이러는 건 아니지?”

게슴츠레한 시선이 차례로 두 사람의 얼굴을 훑었다. 뭐라고 구시렁대던 김성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장실 좀 갔다 올게.”

흐느적거리는 걸음걸이가 꽤나 위태로워 보였다. 재경이 집에 왔을 때 벌써 빈 병들이 꽤 쌓여 있었고, 이후로도 쉬지 않고 계속 달렸으니 취할 법도 했다.

커다란 좌식 테이블에는 셋이서 먹고 마신 흔적들이 가득했다. 마음 같아선 당장 방에 가서 눕고 싶었지만, 재경은 염치를 아는 사람이었다. 대충이라도 치워야겠다는 생각에 옆에서 굴러다니는 마트 봉지를 집어 드는데 박성범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냥 놔둬. 내일 치우면 돼.”

“거실에 음식 냄새 밸걸.”

과자 봉지야 그렇다 쳐도 양념치킨 박스나 무는 냄새가 날 것이 뻔했다. 재경은 널브러진 쓰레기를 봉지에 쓸어 담은 뒤에 치킨 박스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방에서 대충 뒷정리를 하고 나오는데 마침 화장실 문이 열리며 김성욱이 나왔다. 재경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 갈 땐 그나마 두 발로 걸어갔던 놈이 나올 때는 사족보행을 하는 짐승처럼 네 발로 기어 나오고 있었다.

‘곧 쓰러지겠네.’

라고 생각함과 동시에 김성욱의 몸이 옆으로 풀썩 쓰러졌다.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깜짝 놀라 달려갔겠지만 재경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었다. 만취하면 꼭 네 발로 기다가 어느 순간 픽 쓰러져서 잠드는 김성욱의 버릇을 알기 때문이었다.

“……저럴 줄 알았다니까.”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다가가려는데 그 전에 먼저 도착한 사람이 있었다. 박성범이 꽐라가 된 놈의 어깨를 발로 흔들며 깨웠다.

“일어나.”

하지만 당연히 김성욱은 요지부동이었다. 어느새 코까지 골아대는 놈을 한심한 눈으로 내려다보던 박성범은 고개를 돌려 재경을 쳐다봤다. 김성욱을 볼 때와는 사뭇 온도 차가 다른 표정이었다.

“피곤할 텐데 들어가서 자.”

재경은 김성욱을 힐끗 바라본 뒤에 대답했다.

“너 혼자 옮기려고?”

“아니. 그냥 놔둘 거야.”

그냥 놔둔다고?

얼굴에 떠오른 속마음을 읽었는지 박성범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술 처먹고 뻗은 자식 어디가 예쁘다고 옮겨줘. 나중에 정신 차리면 알아서 소파로 가든가 하겠지.”

“그래도…….”

재경의 시선이 거듭 김성욱을 향했다. 박성범의 말마따나 술 취해서 뻗은 놈이 예쁠 리가 없다. 하지만 저렇게 엎드린 채로, 왼손이 얼굴 밑에 깔린 채로 잠든 놈을 버려두고 들어가려니 마음이 영 편치 않았다. 아침부터 쏟아질 잔소리는 덤일 테고.

“그럼 안쪽으로만 옮겨놓을게.”

자세를 낮춘 재경이 김성욱의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넣고 포대 자루처럼 질질 끌기 시작했다. 끄응, 하는 신음이 절로 나왔다. 체격은 비슷하지만 완전히 축 늘어진 탓에 무게가 장난이 아니었다.

소파에 눕혀줄까 하다가 생각을 바꿨다. 잠결에 뒤척이다가 떨어질 수도 있고, 만취해서 두 번이나 토했다던 말이 생각나서 그냥 바닥에 두기로 했다. 대신 소파 위에 있던 쿠션을 김성욱의 목 밑에 넣어준 뒤에 허리를 일으켰다.

박성범이 그런 재경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을 느낀 재경이 속으로 혀를 찼다. 짐작 가는 바가 있었기에 뒷목을 쓸며 녀석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남는 베개 있어?”

“있긴 한데, 왜?”

“성욱이한테 주게.”

“이미 베고 있는데 뭘.”

그 말에 재경은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비싸 보이는 쿠션을 베개 대용으로 삼은 걸 못마땅해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면 왜 그렇게 빤히 쳐다본 거지?

정적을 깨며 갑자기 벨소리가 울렸다. 박성범이 “잠깐만.” 하며 테이블 쪽으로 걸어갔다.

이 시간에 걸려온 전화라니, 재경에게는 다소 낯선 상황이었다.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나. 짐작이 맞는 듯 박성범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는 것이 보였다.

“알았어요. 지금 바로 갈게요.”

통화를 끝낸 박성범이 다시금 시선을 마주했다.

“잠깐 나가봐야 될 거 같아. 거실에 에어컨 켜둘 테니까 더우면 너도 나와서 자.”

“알았어.”

이내 박성범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고, 잠시 후에 달라진 옷차림으로 재경의 곁을 스쳐 갔다. 덕분에 불과 몇 분 전만 해도 시끌시끌하던 집 안에 금세 침묵이 내려앉았다.

언뜻 여자 목소리가 들렸는데, 여친인가? 분위기가 별로 안 좋은 것 같던데…….

“으음…….”

고개를 돌리자 김성욱이 잠꼬대를 하며 뒤척이는 것이 보였다. 벽시계를 한번 확인한 뒤에 재경은 방에 있던 베개와 얇은 이불을 가지고 나왔다. 테이블을 베란다 쪽으로 밀어버리고 김성욱 옆에 나란히 몸을 뉘었다. 피로함이 쌓인 육체에 수마가 찾아온 것은 금방이었다.

* * *

택시에서 내리자 익숙한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박성범은 거침없이 빌딩 안으로 들어갔다. 6층에 있는 녹음실 문을 열자마자 누군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같은 프로듀싱 팀에 소속된 이미정이었다.

“성범아!”

떡 진 머리에 멀리서도 선명한 다크서클. 사흘은 못 잔 것처럼 퀭한 얼굴이 박성범을 보자마자 거의 울상으로 변했다.

“어떡하지? 나 완전 대형사고 쳤어.”

“무슨 일인데 그래요, 누나?”

전화를 받자마자 대뜸 큰일 났다고, 당장 와봐야 할 것 같다는 말에 급하게 택시를 타고 온 참이었다. 이미정이 커다란 안경알을 밀어 올리며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게……. 데모 음원 완성된 거 씨엔에 보내줬는데, 김 실장님한테 전화가 와서는 처음이랑 마지막 사비에 브라스를 입혀보는 건 어떠냐 하더라고. 귀찮아서 그냥 네 계정으로 들어가서 작업했는데, 다 끝내고 정리하다가 사고를 쳤어. 내 파일을 정리한다는 게 그만 네 거까지 같이…… 지운 거 같아.”

마지막 두 마디는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목소리가 작았지만, 박성범은 어찌어찌 이미정의 말을 알아들었다. 채 대답을 하기도 전에 다급한 음성이 먼저 터져 나왔다.

“진짜 미안해! 잠을 제대로 못 자서 정신이 완전 나갔었나 봐. 뭘 지웠는지는 모르겠는데, 한번 확인해보고 내가 도와줄 일 있으면 뭐든지 말만 해. 진짜 미안.”

“잠깐만요. 잠깐만요, 누나.”

이렇게까지 여유를 잃은 모습은 처음이었다. 쩔쩔매다 못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상대를 진정시키며 박성범은 제가 들은 바를 정리했다.

“그러니까, 실수로 제 파일을 삭제했다 이 말이죠?”

“……맞아.”

“일단 한번 봐봐요.”

이미정이 퍼뜩 옆으로 물러났다. 박성범은 상체를 살짝 숙이면서 습관처럼 마우스를 손에 쥐었다. 빠른 눈으로 바탕화면을 살피자 정말로 오른쪽 상단에 저장해두었던 파일 두 개가 사라진 것이 보였다.

휴지통은 말끔하게 비워져 있었다. 딱 봐도 텅 비어 있어서 굳이 클릭해볼 필요도 없었다. 잠시 후에 박성범은 다시금 허리를 일으켰다.

“진짜 깔끔하게 날려먹으셨네요.”

“어떡하지? 많이 급한 거야? 지금부터 시작하면 어떻게든……. 아니지, 날 밝자마자 바로 노트북 들고 복구 센터로 가볼게. 진짜 미안해.”

“알았으니까 진정 좀 하세요, 누나. 혹시 저한테 백업본이 있을 거란 생각은 안 해봤어요?”

“……어?”

안 해봤으니 이 밤중에 전화해서 당장 와봐야 될 것 같다고 울먹였겠지. 창작자가 창작물을 이중 삼중으로 저장해두는 것은 기본인데, 그런 기본조차 떠올리지 못한 걸 보니 뇌에 과부하가 제대로 걸린 모양이었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이미정이 얼떨떨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백업해둔 거 있어?”

“네. 다행스럽게도요.”

한 템포 늦게 이미정의 얼굴에 환희가 떠올랐다.

“진짜야? 진짜 있어?”

“네. 저 예전에 랜섬 걸려서 한번 다 날려 먹고, 그 뒤로는 철저하게 관리하는 거 아시잖아요.”

“하아……. 진짜 다행이다.”

다리가 풀릴 정도로 안도감이 찾아왔다. 이미정은 그제야 여유를 되찾은 얼굴로 머쓱하게 웃었다.

“내가 진짜 정신이 나가긴 했나 봐. 아까는 정말 머리가 하얘져서 백업은 생각도 안 나더라고. ……이럴 줄 알았으면 너한테 전화했을 때 이실직고할 걸 그랬어.”

“그러게요. 왜 안 그러셨어요?”

“왜 안 그랬겠어. ……지금이니까 하는 말인데, 너한테 전화하고 기다리는 동안 차라리 사라져버리고 싶더라. 작업실 문 열렸을 때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어.”

고된 작업 과정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문을 열었을 때 어쩔 줄 몰라 하던 이미정의 얼굴이 떠올라서 박성범은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작업은 다 끝낸 거예요?”

“응.”

“그럼 얼른 가서 눈 좀 붙이세요. 누나 얼굴 지금 장난 아니에요.”

“안 그래도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어. 암튼 진짜 다행이야. 내일 누나가 한턱 크게 쏠게.”

“됐으니까 얼른 노트북부터 고쳐요. 그럼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넌 안 가?”

“온 김에 메인 라인이나 잡아보려고요.”

“그래. 그럼 수고해. 아, 그리고 저기 테이블 위에 있는 거 손 안 댄 거니까 마셔도 돼. 갈게.”

유쾌한 인사를 남긴 채 이미정이 퇴장했다. 테이블로 시선을 돌리니 온갖 에너지 드링크와 캔 커피 따위가 놓여 있었다. 박성범은 고개를 내저으며 신디 앞에 앉았다. 효율이 가장 좋은 시간대이기도 하겠다, 여기까지 온 게 아까워서라도 뭐라도 하나 만들어볼 생각이었다.

* * *

문이 닫힌 엘리베이터가 빠르게 위로 올라갔다. 재경은 엘리베이터 벽에 기대선 채로 팔락팔락 부채질을 했다.

‘오랜만에 손발이 고생하네.’

아침부터 서두른 게 화근이었다. 눈을 뜨니 어느덧 10시가 훌쩍 넘어 있었고, 재경은 혼비백산해서 김성욱을 깨운 뒤에 어제 먹다 남은 치킨으로 배를 채우고 나란히 집을 나섰다. 휴대폰을 놔두고 온 것을 깨달은 건 도서관에 도착한 뒤였다. 혹시나 해서 가방을 뒤져봤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없어서, 공부에 몰두하다가 평소보다 좀 더 일찍 짐을 챙겼다.

다행히 지갑은 있어서 가는 길에 잠깐 마트에 들렀다. 휴대폰 때문에 어차피 집에 한 번 들러야 하니, 돈도 아낄 겸 집에서 저녁을 먹고 알바하러 갈 생각이었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시원한 공기가 느껴졌다. 마침 안쪽에서 방문이 열리며 박성범이 나왔다.

“왔어?”

샤워라도 했는지 머리가 젖어 있고 목에는 수건을 걸친 채였다. 곧 성큼성큼 다가온 녀석이 두어 걸음 정도의 간격을 둔 채로 멈춰 섰다.

“아까 전화하니까 안 받던데.”

“폰을 집에 놔두고 갔어. 무슨 용건이라도 있어?”

“그런 건 아니고. 너 집에 있으면 점심이나 같이 먹을까 했거든.”

그러고 보니 어제 밤늦은 시간에 박성범이 나갔던 게 생각났다.

‘아침에는 없는 거 같던데, 그럼 그 뒤에 들어왔나? ……아무렴 어때.’

주방으로 가려는데 박성범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건 뭐야?”

“뭐?”

“손에 든 거.”

“……그냥. 필요한 것 좀 샀어.”

“나도 진라면 좋아해.”

뜬금없는 말에 재경은 미간을 구겼다가 아래를 내려다봤다. 봉지 안에 들어 있는데 잘도 알아봤다. 이내 목적을 깨닫고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지금 끓일 건데 너도 먹을래?”

“그럼 고맙지. 내가 끓일까?”

“됐어. 다 되면 부를게.”

주방으로 직행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금세 다시 나올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박성범은 방으로 돌아가지 않고 소파에 앉아서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냄비 아무거나 써도 돼?”

“어. 말했잖아. 집에 있는 거 아무거나 써도 된다고. 아님 내가 꺼내줄까?”

“내가 할게.”

다시 돌아간 재경은 싱크대 아래 수납장을 열었다. 놀랄 만큼 가지런히 정돈된 식기 중에서 적당해 보이는 냄비 하나를 꺼냈다.

물을 가득 채운 냄비를 인덕션 위에 올려두고 재경은 잠깐 방으로 향했다. 굳이 찾을 필요도 없이 간이책상 위에 놓인 휴대폰이 눈에 들어왔다.

화면을 켜자 정말로 문자며 부재중 전화가 들어와 있었다. 메시지 함을 누른 순간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뭐해? 점심 같이 먹을래? ^0^]

이놈의 이모티콘은 아무리 봐도 적응이 되질 않았다. 손도 커다란 녀석이 대체 어떤 표정으로 이런 걸 입력하는지. 이어서 재경은 전화기 버튼을 눌렀고, 최근 기록을 확인한 순간 언제 웃었냐는 듯 미소가 사라졌다. 박성범 말고 전혀 달갑지 않은 상대로부터도 부재중 전화가 들어와 있었다.

“하아…….”

‘삼촌’이라는 글자를 보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가 차올랐다. 일단은 그대로 액정을 끄고 책상 위에 도로 올려두었다. 급한 일이 있으면 다시 전화하겠지. 안 하면 더 좋고.

주방으로 돌아가자 박성범이 싱크대 앞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맛있는 냄새가 풍기는 걸 보니 벌써 라면 수프를 투하한 모양이다.

“계란 하나 넣을까?”

“마음대로.”

그러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재경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매운 고추 있어?”

“냉장고에 있을걸. 너도 맵게 먹는 거 좋아해?”

“라면만.”

적당히 매운 라면을 후후 불면서 먹으면 스트레스가 절로 풀리는 기분이었다. ……그나저나 ‘너도’라는 건 본인도 좋아한다는 뜻인가? 그사이 걸음을 옮긴 박성범이 냉장고 문을 열었고, 고추가 든 봉지와 반찬통을 꺼냈다.

잠시 후 식탁에 놓이는 냄비를 보자 군침이 절로 돌았다. 앉으라는 권유에 재경은 쭈뼛거리며 의자에 앉았고, 젓가락으로 면을 가득 덜어서 흡입하기 시작했다.

적당히 매운맛이 기분 좋은 자극을 일깨웠다. 콧잔등에 땀이 맺힌 채로 열심히 먹는데 박성범의 목소리가 들렸다.

“김성욱은?”

“아까 나랑 같이 나갔어. 5만 원 도로 가져간다더라. 상 위에 있던 거.”

“얍삽한 놈.”

쯧 하고 혀를 차며 한입 가득 면을 빨아들이더니 다시금 말을 잇는다.

“수강 신청은 했어? 그때 못 넣었다던 거.”

“아직 못했어.”

“과사에 가서 더 열어달라고 해봐.”

“선택 과목이라서 안 될 것 같아. 인원도 너무 많고.”

안타깝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쓰린 속을 달래며 면발을 흡입하는데 박성범이 뜻밖의 말을 건넸다.

“아니면 내가 틈틈이 해볼까?”

“뭐?”

잠깐 젓가락질을 멈추며 재경이 고개를 들었다.

“지금 하는 일이 좀 있어서 컴퓨터 앞에 오래 앉아 있을 때가 있거든. 아이디랑 비번만 알려주면 시간 나는 대로 시도해볼게.”

표정을 보니 농담이나 장난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덕분에 저도 모르게 솔깃한 마음이 들었다. 아마 안 될 거라는 생각은 변함없지만, 틈틈이 하다 보면 혹시 또 모를 일이었다.

아이디랑 비번을 알려줘야 한다는 게 살짝 걸리긴 하지만……. 일단 임시로 바꿔서 알려주고, 마지막에 다시 바꿔서 확인하면…….

괜찮은 방법 같았다. 설령 안 돼도 손해 볼 일은 전혀 없었기에 재경은 결단을 내리고 대답했다.

“그럼 부탁 좀 해도 될까?”

부드러운 목소리와 달리 눈빛은 강렬했다. 혹시라도 허튼짓을 했다간 가만두지 않겠다는 무언의 협박이었다. 그러자 박성범이 돌연 웃음을 흘렸다.

“어지간히 듣고 싶은가 봐.”

“이왕이면 도움이 되는 수업을 받는 게 좋으니까.”

“그럼 밥 먹고 나서 아이디 알려줘.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지만, 시도는 계속해볼게.”

“알았어.”

재경은 다시금 식사를 이어갔다. 속으로는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좀 늦었긴 해도 김성욱을 챙기는 것도 그렇고, 수강 신청 못한 걸 아직 기억하고 있는 것도 뜻밖이었다. 얼굴만 봐서는 남 일에는 관심도 없을 거 같은데 말이다.

냄비가 워낙 커서 양이 상당해 보였는데 막상 먹다 보니 금세 바닥이 드러났다. 자처해서 설거지를 끝낸 뒤에 방으로 들어가자 휴대폰이 웅웅거리며 요동치는 것이 보였다.

-삼촌-

잠깐 액정을 바라보다가 재경은 인상을 찌푸린 채로 전화를 받았다. 상대가 이쪽 표정을 볼 수 없어서 다행이었다.

“여보세요?”

- 뭘 하느라 전화를 이렇게 안 받아.

받자마자 호통이 터져 나왔다. 골이 지끈거리는 기분에 재경은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밥 먹느라 못 받았어요. 무슨 일이세요?”

- 돈 좀 보내야겠다. 한 30만 원만.

기다렸다는 듯 이어지는 요구에 또 한 번 한숨이 차올랐다.

“얼마 전에 이번 달 생활비 보내드렸잖아요.”

- 그걸 누가 몰라? 노인네 약값이 백만 원도 더 넘게 나왔어. 매달 뭘 그렇게 처넣는지 네 숙모랑 나도 죽을 지경이야.

‘……말이나 못 하면.’

뒷목이 뻐근하게 당겼다. 할아버지가 요양 병원에 입원해 있는 것은 맞지만, 약값이 어떤지는 알 재간이 없었다. 삼촌이 결제를 해서 병원에서는 확인이 불가능하고, 그렇다고 삼촌한테 영수증을 보여달라고 했다가는 개쌍놈 소리나 듣게 될 게 뻔하고.

그새를 참지 못하고 성화가 이어졌다.

- 왜 대답이 없어.

“……지금 당장은 돈이 없어요. 알바비 나오면 입금해드릴게요.

- 머리도 굵은 새끼가 돈 30이 없어?

“…….”

- 알바비는 언제 나오는데.

“다음 주에요.”

- 잊지 말고 꼭 부쳐. 생각이 있으면 병원에도 자주 좀 찾아가고.

하고 싶은 말을 속으로 삼켜야만 하는 현실이 이렇게 통탄스러울 수가 없었다. 뉘 집 개가 짖는다 생각하며 듣고 있으니 몇 마디가 더 보태졌다.

- 참, 그리고 토요일에 네 숙모 없으니까 공부 끝나면 경수 저녁 좀 챙겨줘. 숙모 없다고 애 데리고 놀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고.

“……알겠습니다. 들어가세요.”

- 다음 주에 돈 꼭 부쳐.

매번 본인 할 말만 하고 통화 종료라니, 고약한 성질머리만큼이나 전화 예절도 형편없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재경은 뒷목을 주무르며 은행 앱으로 잔고를 확인했다. 월세가 안 나가서 앞으로는 여유가 좀 있겠거니 했는데…….

‘여유는 개뿔.’

기가 막히게 돈 냄새를 맡고 연락하는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었다. 재경은 거듭 긴 한숨을 내쉬며 벽에 머리를 기대고 말았다. 찰나에 피로감이 물밀듯 밀려왔다.

* * *

딩동-

초인종을 누르고 기다리기를 잠시, 현관문이 벌컥 열리며 밤톨 같은 놈이 튀어나왔다.

“형!”

재경을 올려다보는 얼굴에 반가움이 가득했다. 군바리처럼 까슬까슬한 머리통을 슥슥 문질러준 뒤에 재경은 거실로 들어섰다. 이내 평소와 다른 점을 깨닫고는 경수에게 물었다.

“숙모는?”

“오늘 계모임 있다고 나갔어. 밤늦게 올 거래.”

그러고 보니 며칠 전에 삼촌이 ‘숙모가 외출하네 어쩌네.’ 하고 말했던 기억이 났다. 경수에게는 미안하지만 신경질적인 얼굴이 눈에 띄지 않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했다.

“들어가자.”

걸음을 옮기려는데 경수가 대뜸 그 앞을 막아섰다.

“형.”

“안 돼.”

그러자 금세 입술을 삐죽거리며 목소리를 높인다.

“내가 무슨 말 할 줄 알고 그래?”

“놀자는 거겠지. 아냐?”

“윽…….”

양옆으로 뻗었던 두 팔을 다소곳하게 내리는 걸 보면서 재경은 미소 띤 얼굴로 한 번 더 경수의 작은 머리통을 벅벅 문질렀다.

중1이면 한창 삐딱선을 타며 허세가 하늘을 찌를 때인데, 눈앞의 녀석은 아직 어리숙하면서도 순한 면모가 남아 있었다. 애만 놓고 보면 삼촌과 숙모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재경은 곧 피식 웃으며 손끝으로 경수의 이마를 아프지 않게 튕겼다.

“잔말 말고 들어가. 오늘 어느 부분 공부했는지 숙모가 나중에 확인해본댔어.”

거짓말이지만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긴 했다. 순진한 경수는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방문을 열었고, 재경이 그 뒤를 따랐다.

매주 주말마다, 그것도 무보수로 해주는 과외 수업이 달가울 리가 없다. 대학교 합격 소식을 알리자 숙모는 이제껏 거의 본 적이 없는 환한 얼굴로 호들갑을 떨었고, 당장 그날부터 자기 아들, 그러니까 재경에게는 사촌 동생인 경수에게 과외 수업을 해줄 것을 부탁했다.

말이 좋아서 부탁이지 강요나 다름없었지만 재경은 순순히 받아들였다. 비록 천덕꾸러기 신세나 다름없었긴 해도, 할아버지가 쓰러진 뒤에 오갈 데 없던 자신을 거둬준 게 삼촌 내외라는 점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잠깐 쉬자.”

“으으…….”

경수가 앓는 소리를 내며 책상에 얼굴을 기댔다. 암만 봐도 밤톨 같은 녀석을 바라보며 재경은 거듭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머리가 나쁘면 가르치면서 복장이 터졌을 텐데, 다행히 공부 머리가 있어서 가르치는 보람이 쏠쏠했다.

“아이스크림 먹을래, 형?”

“어. 가져와 봐.”

벌떡 몸을 일으킨 경수가 밖으로 나갔다. 다시 돌아온 녀석의 손에는 배 맛 쭈쭈바와 스크류바가 들려 있었다.

“뭐 먹을래?”

“이거.”

재경은 스크류바를 골랐고, 껍질을 까서 뽀얀 속살이 드러난 아이스크림 끝부분을 입에 물었다. 의자에 비스듬히 기댄 채로 짧은 휴식을 즐기는데 가방 속에서 진동음이 울렸다.

[뭐하냐?]

김성욱이었다. 재경은 아이스크림을 입에 문 채 빠르게 답장을 보냈다.

[과외중]

[과외도해?]

[사촌동생]

두세 번 말해줬는데 또 까먹은 모양이다. 금세 새로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언제끝남? 저녁에 애들이랑 술마시기로 했는데 낄생각 ㅇ?]

[약속있어]

[ㅁ무슨 학학]

[?]

[약속]

[왜 갑자기 학학대 사람 놀라겤ㅋㅋㅋ]

[오ㅌㅏ]

하여튼 오타도 남다른 놈이라고 생각하며 재경은 다시금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런게있어 잼나게 놀아라]

[ㅇㅇ]

사촌 동생 저녁까지 챙겨 먹인다고 말하면 존나 한심한 놈이라며 잔소리를 해댈 것이 뻔했다. 액정을 끄자마자 타이밍 좋게 스톱워치가 삑삑거리며 울기 시작했다. 남은 아이스크림을 마저 먹은 뒤에 재경은 짐짓 엄한 목소리를 냈다.

“채점하는 동안 단어 외우고 있어.”

“알았어. ……근데 있잖아, 형.”

“안 돼.”

“…….”

입술을 삐죽대면서도 경수는 단어장을 펼쳐 들었고, 재경은 웃음을 삼키며 채점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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