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 1부 (1/22)
  • 1.

    재경이 ‘그 소식’을 접한 것은 어느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오후 2시를 살짝 넘긴 시각, 구내식당 문이 열리며 한 청년이 들어왔다. 안으로 들어선 그는 옷깃을 마구 펄럭이며 이마의 땀을 훔쳤다.

    ‘끝내주게 덥네.’

    도서관에서 식당까지는 도보로 채 5분도 안 걸리는데 그사이 등에도 땀이 차올랐다. 식당은 생각보다 한산했다. 식판을 손에 든 재경은 망설임 없이 한곳으로 향했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직접 닿는 명당이었다.

    오늘 그가 선택한 점심 메뉴는 새우볶음밥이었다. 음식의 질은 빈말로도 그다지 훌륭하지는 않았다. 건새우도 새우랍시고 몇 마리 들어 있는 것이 고작이지만, 양이 워낙 푸짐해서 허기를 채우기에는 제격이었다.

    재경은 볶음밥을 크게 한 숟갈 떠서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퇴식구 근처에 있는 대형 TV에서는 늘 그렇듯 뉴스 채널이 방영되고 있었다.

    [다음은 각종 사건 사고 소식입니다. 오늘 오전, 한국대학교 근처 고시텔에서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헐, 저것 좀 봐봐.”

    “어?”

    그와 동시에 곳곳에서 술렁대는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왜냐하면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이 바로 한국대 구내식당이기 때문이었다. 재경도 잠깐 숟가락질을 멈추고 오른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화재 현장을 담은 영상이 커다란 TV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4층에서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는 불은 빠르게 번져나갔지만, 이른 초기 대응으로 30여 분 만에 불길이 잡힌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관계자에 따르면…….]

    달그락-

    쥐고 있던 숟가락이 힘없이 땅으로 추락했다. 상황을 파악함과 동시에, 재경은 옆자리에 둔 백팩을 낚아채듯이 들고 곧장 밖으로 달려 나갔다.

    ‘……고시텔에 불이 났다고?’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마주 오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며 피할 정도로 정신없이 달려가면서, 재경은 제발 자신이 무더위에 헛것을 본 것이기를 바랐다.

    시커먼 연기가 마구 치솟던 TV 속 고시텔 건물은 그가 2년째 거주하고 있는 공간이었다.

    * * *

    서두른다고 서둘렀지만 핸드폰 시계는 어느덧 1시 3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식당 문을 열고 들어가자 저만치 안쪽에 앉아 있는 약속 상대의 얼굴이 보였다.

    “미안. 좀 늦었어.”

    “배고파서 눈 돌아가는 줄 알았어. 뭐 먹을래?”

    “밥 종류 중에 제일 싼 거.”

    재경은 그리 대답하며 컵에 대고 물병을 기울였다. 시원한 물로 목을 축이는 동안 김성욱은 손을 들고 식당 직원을 불렀다. 빠르게 주문을 끝내고는 다시금 재경을 쳐다봤다.

    “고시텔 주인은 만나봤어?”

    “어.”

    “뭐라고 하던데.”

    “……미안하다고 하지 뭐.”

    재경의 얼굴에 금세 그늘이 드리워졌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게 인생이라고들 하지만, 이번 일은 타격이 매우 컸다. 어제 아침에만 해도 아무 일 없이 무탈하게 방을 나섰는데……. 몇 시간 만에 삶의 터전을 잃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화재 원인은 누전이었다. 공용 부엌에서 시작된 불이 다른 곳으로 옮겨 붙었고, 순식간에 화마로 돌변해서 실내를 집어삼켰다.

    그나마 천만다행인 사실은 마침 여름방학인 데다가 밖에 나가 있던 학생들이 많아서 인명 피해가 거의 없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물질적인 피해는 결코 적지 않았다. 불길이 시작된 4층은 거의 전소하다시피 해서 당분간은 출입조차 불가능했다.

    그 탓에 재경은 아무것도 가지고 나올 수가 없었다. 사실 방에 있는 물건이라 해봤자 옷 몇 벌과 세면도구, 수저 따위밖에 없지만, 당장 갈아입을 수 있는 팬티 한 장 없다고 생각하니 기가 막혔다.

    뒤늦게 전해 듣게 된 상황은 생각보다 더욱 좋지 않았다. 건물주가 소방법을 위반한 데다 화재 보험에도 가입되어 있지 않아서 정식 보상을 받을 수 있을지조차 불투명했다.

    재경은 긴 한숨을 내쉬며 머리카락을 헝클고 말았다. 사실 보상은 부차적인 문제였다. 냉정하게 말하면 자신의 방에 있던 물건을 돈으로 전부 환산해도 채 100만 원, 아니, 50만 원도 되지 않을 터였다. 한마디로 물질적인 피해보다는 당장 지낼 곳이 없다는 사실이 더 큰 문제였다.

    “어젠 어디서 잤냐?”

    “용식이 형 집에서.”

    “용식이 형? 그게 누군데.”

    “호프집 매니저 형.”

    이윽고 주문한 음식들이 테이블 위에 놓였다. 일단 먹자. 그렇게 말한 김성욱은 제 몫으로 나온 비빔냉면을 슥슥 비벼서 빠르게 흡입하기 시작했다. 한동안 후루룩 쩝쩝하는 소리만이 울렸다. 어느 정도 배를 채운 뒤에 김성욱은 다시금 질문을 이어갔다.

    “그럼 당분간 그 형 집에서 지내기로 한 거야?”

    “아니.”

    재경은 드물게 정색하며 대답했다. 머릿속에 자연히 어젯밤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래서 말인데, 오늘 하루만 신세 좀 질 수 있을까요?’

    ‘물론이지.’

    어제저녁, 염치 불고하고 꺼낸 말을 들은 최용식은 얼마든지 와도 된다고 하며 넓은 도량을 베풀었다. 남에게 신세 지는 것은 싫지만 어쩔 수 없었다. 혹시나 해서 학교 주변을 돌아다니며 발품을 팔고 부동산 중개 앱도 살펴봤지만, 조건에 맞는 매물을 찾을 수가 없었다.

    알바가 끝난 뒤에 재경은 최용식과 함께 그의 집으로 향했다. 어쩌면 당분간 신세를 질 수도 있는데 빈손으로 가기는 뭣해서, 도중에 잠깐 편의점에 들러서 그가 좋아하는 맥주와 마른안주 두어 가지를 샀다.

    잠시 후에 그가 산다는 자취방에 도착했다. 최용식은 정체불명의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도어락 키패드를 띠딕띠딕 눌렀다.

    철컥-

    안으로 들어선 최용식이 형광등 스위치를 눌렀다. 그와 동시에 재경은 쓰레기장 같은 난장판을 목도했다. 얼어붙은 표정을 본 집주인은 민망함을 숨기려는 듯 재경의 등을 한 대 툭 치며 겸연쩍게 웃었다.

    ‘내가 원래는 깔끔한 사람인데, 요즘 좀 바빠서 청소를 못했어.’

    안녕히 계시라며 당장 뒤돌아서고 싶었지만, 갈 곳 없는 현실이 재경의 발목을 붙잡았다. 잠깐 모텔을 떠올리긴 했으나 곧바로 머릿속에서 지웠다. 몇 시간 동안 일해서 번 알바비를 하룻밤 모텔비로 날리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사치였다.

    마지못해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서는 동안, 최용식은 바닥에 널브러진 옷가지를 발끝으로 휙휙 걷어내며 앉을 자리를 마련했다.

    맥주는 순식간에 동이 났다. 어째 눈꺼풀이 무겁다 했더니, 작대기 하나가 고장 난 전자시계는 어느덧 새벽 1시 14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손에 묻은 오징어 양념을 쪽쪽 빨아먹은 뒤에 최용식은 간이 옷장을 열고 그 안에 든 이불을 꺼냈다.

    ‘여기서 자.’

    ‘혹시 칫솔 좀 빌릴 수 있을까요?’

    ‘화장실 수납장에 새 거 있을 거야. 없으면 내 거 써도 되고.’

    굳은 표정을 들킬세라 재경은 재빨리 일어섰다. 다행히 수납장에는 새 칫솔이 있었고, 세수까지 한 뒤에 방으로 돌아갔다.

    그새 최용식은 매트리스만 있는 침대에 누워서 숙면을 취하고 있었다. 홀로 남게 된 재경은 이불을 노려보다시피 하다가 형광등 스위치를 끄고 옆으로 길게 몸을 뉘었다. 이불과 함께 딸려 나오던 먼지 덩어리를 봤지만 기억에서 지우기로 했다. 어쨌거나 덕분에 잘 곳이 생기고 이불까지 챙겨줬는데 불평은 사치였다.

    한참을 뒤척였던 것 같다. 딱히 잠자리를 가리는 편은 아니지만, 마음이 싱숭생숭해서 그런지 잠이 쉽게 오질 않았다.

    ‘……물이나 한잔 마실까?’

    그 생각에 몸을 일으킨 순간.

    재경은 그만 보고야 말았다. 맞은편 벽 위를 빠르게 사사삭 가로지르는 우람한 생물체를. 허둥지둥하며 때려잡을 만한 물건을 찾는 사이에 그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재경은 한껏 인상을 찌푸린 채 도로 잠자리에 누웠다.

    그래도 어찌어찌 잠이 들기는 해서, 다시 눈을 떠보니 아침 해가 훤히 밝아 있었다. 집주인은 한밤중이었다. 두어 번 최용식의 어깨를 흔들다가 깨우기를 포기하고 재경은 혼자 먼저 집을 나섰다.

    아침부터 학식으로 끼니를 때우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그러던 중에 같은 학부 동기인 김성욱에게 전화가 왔고, 오랜만에 점심 약속을 잡게 됐다.

    6천 원짜리 김치찌개 정식은 구내식당에서 파는 3천 원짜리 정식과 별 차이가 없었다. 이래저래 심란함을 느끼며 밥을 퍼먹고 있으니 김성욱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고시텔 그렇게 된 거 부모님은 알고 계셔? 집 구할 때까지만이라도 통학하는 건 안 되나?”

    “안 돼.”

    그게 가능하다면 처음부터 그렇게 했을 거다. 하지만 재경에게는 부모님 댁이라고 부를 만한 곳이 없었다. 그러니 당연히 갈 곳도 없는 처지였다.

    “오늘 잘 데는 있어? 아님 우리 집에라도 오든가.”

    고마운 제안이었지만 마음만 받기로 했다. 제 기억이 맞다면 김성욱은 3대가 한집에 같이 사는 데다가 가족 구성원만 여덟 명이었다.

    “정 안 되면 용식이 형 집에서 하루 더 자면 돼.”

    “그럼 다행이고. 참, 짐은 어디다 뒀냐?”

    “없어.”

    “뭐?”

    “없다고. 아직 건물 안에 들어가 보지도 못했어.”

    “헐……. 진짜 사람 안 죽은 게 기적이네.”

    지잉- 지잉-

    테이블 위에 있는 김성욱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진동했다. 액정을 확인한 녀석이 “잠깐만.” 하고 전화를 받았다.

    “밥 먹고 있어. 아니, 학교 앞이야 지금. 잠깐 재경이 만나느라고.”

    갑자기 나온 제 이름에 재경은 멈칫했다.

    학과 사람인가? 귀를 기울여 봤지만 상대방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잠시 후에 전화를 끊는 것을 보고 김성욱에게 물었다.

    “누구야?”

    “박성범.”

    예상대로 재경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백 명이 넘는 동기들 중 한 놈이었다.

    “겜방 갈 건데 같이 갈래?”

    “아니.”

    대답을 예상하고 던진 질문이었기에, 김성욱은 조금도 민망해하거나 아쉬워하는 기색 없이 ‘그만 나가자’며 가방을 챙겨 들었다. 카운터에 이른 재경이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그런 재경의 앞을 막아서며 김성욱이 자신의 카드를 내밀었다.

    “됐어 인마. 오늘은 내가 살게.”

    “그럼 땡큐지.”

    재경은 냉큼 친구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한 발 떨어진 곳에 서 있으니 김성욱이 돌려받은 카드를 핸드폰 케이스 안에 챙겨 넣었다.

    “그래도 지갑은 무사한가 보네.”

    “내가 갖고 있었으니까.”

    “아.”

    바보들 만담 같은 대화를 주고받으며 두 사람은 식당 문을 열고 나왔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찜통 같은 더위가 엄습했다. 직사광선에 오징어처럼 얼굴을 구긴 채로 김성욱이 물었다.

    “다시 도서관으로 갈 거야?”

    “어.”

    재경은 방학 때도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요즘은 사기업도 블라인드 채용이다 뭐다 해서 공정성을 꾀한다고는 하지만, 최소한의 지원 자격조차 갖추고 있지 못하면 무용지물이었다. 더군다나 그전에 자격증이나 토익 점수 등 졸업장을 받기 위한 조건도 충족해야만 했다.

    “엇, 박성범!”

    그 때였다. 김성욱이 갑자기 어딘가를 쳐다보며 큰 목소리를 냈다.

    뒤를 돌아보니 재경에게도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가까이 다가온 박성범을 보며 김성욱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근처에 있었어?”

    “당구장에서 나오는 길이야.”

    “그럼 나도 부르지 그랬어.”

    “동아리 놈들하고 쳤거든.”

    둘이서 대화를 나누는 동안 재경은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열람실 이용 시간이 끝나기 전에 연장 신청을 하려면 서둘러야 할 것 같았다.

    고개를 드는데 박성범과 눈이 마주쳤다. 늘 그렇듯 여유롭게 웃는 얼굴이었다.

    “너도 겜방 갈래?”

    “아니, 갈 데가 있어서.”

    도서관이라는 말은 굳이 할 필요가 없었다. 재경은 곧 김성욱을 바라보며 짧은 인사를 건넸다.

    “밥 잘 먹었다. 다음에 보자.”

    “오냐. 들어가라.”

    장승같이 서 있는 놈들을 뒤로한 채 재경은 미련 없이 발길을 돌렸다.

    걸음을 재촉한 덕분에 다행히 늦지 않고 시간을 연장할 수 있었다. 어느 정도 땀이 식은 뒤에 재경은 볼펜을 손에 쥐고 책으로 시선을 옮겼다. 베개 대용으로도 손색이 없을 만큼 두꺼운 전공 서적은 자리를 비우기 전과 똑같은 페이지가 펼쳐져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어디선가 웅웅거리는 핸드폰 진동음이 울렸다. 제 것임을 확인한 재경은 부랴부랴 가방을 열고 핸드폰을 꺼냈다.

    액정을 보니 김성욱이었다. 조금이라도 소리를 줄이고자 핸드폰 몸뚱이를 꽉 움켜쥔 채 열람실 밖으로 나갔다.

    “어.”

    - 여보세요? 잠깐 통화 가능하냐?

    “말해.”

    - 겜하다가 어쩌다 보니까 네 이야기가 나왔거든. 고시텔에 불난 거. 그러니까 성범이가 자기 집으로 와도 된다고 하네.

    아까 잠깐 봤던 얼굴이 떠올랐다. 과하지 않게 멋을 낸 스타일에 이목구비가 뚜렷한 얼굴, 입가를 살짝 올리며 웃는 미소. 이내 머릿속에서 그 모습을 소거하며 재경은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인사치레로 한 말이겠지.”

    - 그럴까 봐 두 번 세 번 물어봤어, 인마. 이 형님이 원래 생각이 좀 깊잖아.

    재경은 피식 웃고 말았다. 생각이 깊은 줄은 모르겠지만 은근히 속정이 깊은 편이기는 했다.

    - 농담 아니고 진짜 괜찮다고 했어. 남는 방 있으니까 거기 쓰면 된대. 지금 옆에 있는데 바꿔줄까?

    당장에라도 핸드폰이 넘어갈 것 같아서 재경은 다급한 목소리를 냈다.

    “아냐. 말은 고마운데 생각 좀 해보고 결정할게. 너무 갑작스러워서.”

    - 그래? 그럼 나중에 네가 성범이한테 연락해봐. 번호는 알고 있어?

    “아마도.”

    저장되어 있지 않을 가능성이 99퍼센트였지만 일단은 있는 것처럼 대답했다. 모른다고 하면 당장 옆자리 놈에게 번호를 물어보고 알려주거나 바꿔주려고 할 텐데, 둘 다 딱히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통화를 끝낸 재경은 열람실로 되돌아갔다. 의자를 조용히 앞으로 당긴 뒤에 펜을 다시 손에 쥐었다. 하지만 집중력은 좀 전만 못했다. 눈동자는 도표며 그래프 따위를 보고 있지만, 머릿속에는 방금 김성욱이 했던 말이 잔상처럼 맴돌았다. 의식주 중에 한 가지가 걸린 문제이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성범이가 자기 집으로 와도 된다더라.’

    ‘두 번 세 번 확인했어. 남는 방 있으니까 거기 쓰면 된대.’

    “…….”

    결국 재경은 핸드폰을 다시 들었다.

    제발.

    괜찮은 매물이 하나라도 올라와 있기를 바라며 학교 홈페이지와 부동산 앱을 차례로 확인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헛수고였다. 침울하게 액정을 바라보던 재경은 결국 김성욱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박성범 번호 좀]

    그러자 곧바로 답장이 날아왔다.

    [안다고 하지 않앗ㅇ므?]

    [그런 줄 알았는데 없어]

    [잠만]

    안 봐도 뻔했다. 옆에 앉아 있다는 놈한테 물어보는 중이겠지.

    곧 찍힐 번호를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화면이 바뀌며 전화가 걸려왔다. 저장된 이름은 없었다. 재경은 직감적으로 박성범이라는 것을 깨닫고 일단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번호를 알려달라고는 했지만 당장 연락하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보기보다 성질이 급하네.’

    살짝 미간을 구긴 채로 다시금 메시지 창을 열었다.

    [아직 도서관이야 나중에 내가 연락한다고 해줘]

    [ㅇㅇ]

    임무를 끝낸 핸드폰은 바지 뒷주머니로 다시 들어갔다. 재경이 낯선 번호를 저장하고 그 번호로 메시지를 보낸 것은 그로부터 대략 두 시간이 흐른 뒤였다.

    * * *

    약속 장소는 도서관 로비 한편에 마련된 오픈형 쉼터였다. 재경은 약속 시간까지 5분 정도 남은 것을 확인하고 열람실을 나섰다.

    로비로 나가보니 약속 상대가 먼저 와 있는 것이 보였다. 박성범은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바깥쪽 테이블에 앉아 있는 데다가, 커다란 체구 때문에 눈에 안 띄려야 안 띌 수가 없었다.

    놈은 혼자가 아니었다. 웬 여학생 두 명이 앞에 서 있는데, 아무래도 지나가다가 박성범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춘 듯했다.

    “…….”

    또다시 슬금슬금 번뇌가 차올랐다. 불가피한 상황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딱히 친하지도 않은 녀석과, 그것도 제 개인적인 문제로 인해서 만나는 것은 결코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그다지 호감이 들지 않는 상대이기에 더더욱.

    박성범과 대화를 주고받던 여학생들이 떠나는 게 보였다. 하지만 재경은 곧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녀석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머릿속으로 저울을 떠올렸다.

    저울대 한쪽에는 박성범을, 나머지 한쪽에는 최용식의 방을 올려두었다. 엉망진창이던 방과 냄새나던 이불, 뜻하게 않게 목격해야만 했던 생물체를.

    저울은 빠르게 한쪽으로 기울었다. 재경은 한숨을 삼키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마침 고개를 들던 박성범과 눈이 마주쳤다. 금세 입가에 웃음을 띤 채로 아는 척을 한다.

    “왔어?”

    말없이 의자를 빼서 맞은편에 앉으니 낮은 목소리로 묻는 말이 들려왔다.

    “뭐 마실래?”

    “난 좀 전에 마셨어.”

    점심 먹고 자판기 커피를 한 잔 빼서 마셨으니 거짓말은 아니었다. 박성범이 잠깐만,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후에 돌아온 그의 손에는 일회용 플라스틱 컵 두 개가 들려 있었다.

    “마셔.”

    그중 하나가 앞으로 내밀어졌다. 재경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맙다 말하고는 컵을 건네받았다. 하지만 곧바로 마시는 대신 초조하게 다리를 떨었다.

    ‘뭐라고 말을 꺼내지?’

    가방을 챙기는 동안 지금 상황을 머릿속으로 대충 그려보기는 했다. 하지만 막상 눈앞에 상대가 있으니 좀처럼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애꿎은 빨대만 노려보고 있으니 박성범이 먼저 운을 뗐다.

    “성욱이한테 얘긴 들었어. 그래도 인명 피해가 없어서 천만다행이야.”

    “……어.”

    위로를 담아서 건넨 말이겠지만 안타깝게도 크게 와 닿지는 않았다. 그로 인한 안도감은 이미 충분히 느꼈고, 지금은 한시라도 빨리 차후 대책을 마련하는 일이 시급했다.

    당장 오늘 밤에 머물 곳도 불투명한 상태다. 그뿐이면 다행이었다. 고시텔에 있던 옷가지들도 홀랑 다 타버리는 바람에, 지금 재경은 이 무더운 여름날에 이틀 연속으로 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안정적인 거처가 마련되어야 옷을 사든 뭘 사든 할 텐데, 지금으로써는 어떤 걸 사도 거추장스러운 짐만 될 뿐이었다.

    그사이 박성범은 뚜껑을 연 컵을 기울여서 입에 댔다. 체격이 크면 목구멍도 큰지, 거의 끝까지 가득 차 있던 커피가 훅 줄어들었다.

    “아까 성욱이한테도 말했는데, 우리 집에 와도 된다는 거 진심으로 한 말이야. 학교까지는 걸어서 15분 정도 걸리고, 있을 건 다 있어서 크게 불편한 점은 없을 거야.”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제일 불편했지만, 소리 내어 말하는 미련한 짓은 하지 않았다. 지나친 솔직함은 침묵보다 못할 때가 있다는 것을 재경은 알고 있었다. 원만한 대인관계를 위해서는 적당히 속내를 감추는 현명함도 필요했다.

    ‘집은 깨끗하려나.’

    머릿속으로 거듭 최용식의 방을 떠올렸다. 거기보다 깨끗하면 염치 불고하고 신세를 지고, 아니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나오는 걸로 하자. 만일 그 방보다도 더럽다면 그건 정말 방이 아니라 쓰레기통이라 불러도 부족함이 없을 터였다.

    생각을 정리한 재경은 어렵게 말을 꺼냈다.

    “……방이 어떤지 먼저 보고 싶은데.”

    시선을 살짝 내리고 있던 터라 재경은 일순 놀란 기색을 띤 박성범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곧 부드러운 목소리로 묻는 말이 이어졌다.

    “잠깐 시간 돼?”

    “어.”

    “그럼 말 나온 김에 한번 가보자.”

    박성범이 꼬고 있던 다리를 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경은 황당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지금 가자고?”

    “시간 된다며. 당장 오늘 잘 곳도 없다고 들은 거 같은데, 한시라도 빨리 보고 결정하는 게 낫지 않겠어?”

    하나같이 옳은 말이었다. 그렇긴 한데, 일견 놀리듯 실실 웃는 얼굴 때문인지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하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었기에 재경은 한숨을 삼키며 뒤늦게 가방을 챙겨 들었다.

    오후에도 햇볕이 뜨겁기는 마찬가지였다. 탈 것 같은 목덜미를 간간이 손바닥으로 쓸면서 걷다 보니 어느새 학교 정문 근처에 다다랐다.

    “이쪽이야.”

    박성범이 손끝으로 가리킨 곳은 각종 문화시설 및 편의시설이 입점해 있는 건물이었다. 강의실은 없기 때문에 재경은 1층 서점에만 두어 번 가본 적이 있었다.

    왜 갑자기 저쪽으로 가는 거지?

    마침 땀방울이 뒷목을 타고 또르르 흘러내리는 게 느껴져서 재경은 살짝 인상을 찌푸린 채로 물었다.

    “뭐 살 거 있어?”

    “아니. 차가 여기에 있어서.”

    그러고 보니 학생 주제에 꽤 좋은 차를 끌고 다닌다는 말을 들어본 것 같기도 했다.

    집에서 학교까지 도보로 15분이라더니, 그 정도 거리도 못 걸어 다닌다 이건가.

    그래도 푹푹 찌는 오늘 날씨를 생각하면 잘됐다 싶긴 했다. 널찍한 등짝을 따라서 걷다 보니 어느새 빌딩 입구가 코앞이었고, 두 사람은 계단을 통해서 지하로 내려갔다.

    주차장은 대형 마트를 방불케 할 정도로 차들이 빼곡했다. 잠깐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 박성범은 어딘가로 사라졌다. 멀뚱히 서 있으니 잠시 후에 검은색 SUV 한 대가 가까이 다가왔다.

    “타.”

    마침 뒤에서 접근하는 다른 차량이 보였기에 재경은 얼른 뒷좌석 문을 열고 차에 탔다. 문이 닫힌 것을 확인한 박성범은 능숙하게 핸들을 돌리며 출구로 이어지는 경사로로 진입했다.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신호에 걸렸다. 의미 없이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데 앞쪽에서 말을 거는 목소리가 들렸다.

    “보통 이럴 땐 옆에 타지 않아?”

    “……어디면 어때. 어차피 타는 건 똑같은데.”

    솔직히 말하면 아주 잠깐 갈등하긴 했다. 하지만 왠지 조수석은 가까운 사람이 앉는 자리라는 생각이 들어서 뒷좌석 문을 열었다.

    나란히 앞자리에 동석이라니, 생각만 해도 어색했다. 상대도 그렇게 느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조용하던 차 안에 음악이 흐르기 시작했다.

    듣자마자 무슨 노래인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한 멜로디였다. 다시 출발한 차는 직진해서 신호등 세 개를 거쳤고, 곧 우회전을 해서 빌라 단지 안으로 들어섰다.

    ‘진짜 가깝네.’

    채 노래 한 곡이 끝나기도 전에 도착했으니 정말로 가까웠다. 층수가 그다지 많아 보이지도 않는데 빌라에는 엘리베이터도 있었다.

    수직 상승한 엘리베이터는 5층에서 멈췄다. 먼저 내린 박성범이 앞서서 복도를 걸어갔고, 505호라고 적힌 문 앞에 서서 도어락 버튼을 눌렀다.

    “들어와.”

    재경은 조심스럽게 운동화를 벗고 거실로 들어갔다. 바깥 못지않게 후끈거리는 공기가 두 사람을 맞았다.

    “완전 찜통이네.”

    집주인은 그렇게 말하며 곧장 에어컨부터 틀었다. 그동안 재경은 재빠르게 실내를 스캔했다. 언뜻 봐도 제법 너른 데다가 깔끔하게 잘 정돈되어 있다. 아까 잠깐 최용식의 방을 비교 대상으로 삼은 것이 미안할 정도였다.

    “뭐 좀 마실래?”

    “괜찮아.”

    좀 전에 놈이 사 준 커피도 겨우 다 마신 참이었다. 그러자 박성범은 두 번 권하지 않고 다른 말을 입에 담았다.

    “이쪽으로 와봐.”

    군말 없이 뒤를 따라가자 박성범은 현관 맞은편에 있는 문을 열었다.

    “여기야.”

    방 안도 생각보다 상태가 양호하긴 마찬가지였다. 창고로 쓰고 있는지 이런저런 물건들이 어수선하게 놓여 있긴 하지만, 이 또한 최용식의 방에 비하면 호텔 수준이었다.

    “어때?”

    “……괜찮은 거 같아.”

    솔직히 말하면 기대 이상이었다. 떨떠름함을 무릅쓰고 따라와 보길 잘했다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였다.

    “여기서 지낸다고 하면 바로 치워줄게.”

    재경은 한 번 더 안을 둘러본 뒤에 박성범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집에 다른 사람은 없어?”

    “없어. 그러니까 오라고 했지.”

    듣고 보니 맞는 말이라서 고개를 끄덕였다. 1차 기준을 통과했으니 이제는 다음 단계를 해결할 차례였다. 재경은 괜한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태연한 척 말을 꺼냈다.

    “만일 여기서 살면 월세는 얼마씩 주면 돼?”

    딱히 친하지는 않아도, 같은 과 동기인 놈을 앞에 두고 돈 얘기를 꺼내려니 민망하긴 했다. 하지만 이건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혹시라도 얼토당토않은 금액을 요구하면 뒤통수를 한 대 후려치고 나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어째 박성범의 반응이 이상했다. 눈썹을 한 번 꿈틀하더니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묻는다.

    “진심으로 하는 말은 아니지?”

    “…? 뭐가.”

    “월세 어쩌고 하는 거.”

    “당연히 진심이지.”

    무덤덤하게 대꾸하는데 뒤늦게 어떤 생각이 들었다.

    ‘설마 이 자식, 내가 그냥 들어와서 살 줄 알았나?’

    맹세컨대 그런 생각은 한 적이 없다. 지금 상황이 좋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재경은 염치를 아는 사람이었다. 혹시라도 박성범 집에서 신세를 지게 된다면 매달 고시텔 방값으로 내던 금액을 지불할 생각이었다.

    그러자 박성범이 또 한 번 헛웃음을 치는 것이 보였다. 제 머리카락을 벅벅 헝클더니,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으며 시선을 마주했다.

    “네 사정 뻔히 알고 있는데, 내가 그런 걸 받을 놈으로 보여?”

    “……주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그럼 지금이라도 다르게 생각해. 그 돈 받아서 내가 퍽이나 잘 쓰고 다니겠다.”

    표정도 그렇고, 말하는 뉘앙스로 봐서도 정말 돈을 받을 생각이 없었던 듯했다. 재경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달가운 일이었다. 방세를 주지 않으면 그만큼 돈을 굳힐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선뜻 응하기도 그랬다. 이러나저러나 신세를 지는 것은 똑같겠지만, 그냥 얹혀산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영 불편할 것 같았다. 결국 재경은 짧은 고민 끝에 이렇게 대답했다.

    “그러면 관리비라도 보탤게.”

    하지만 박성범도 보기보다 자기주장이 확고했다. 피식 웃음을 흘리더니 한결 누그러진 어조로 하는 말이 들렸다.

    “됐으니까 그냥 들어와. 말했다시피 남는 방 하나 내주는 것뿐이니까 전혀 부담 가질 필요 없어. 정 그러면 냉동실에 아이스크림이나 한 번씩 채워주든가.”

    “……알았어. 나중에라도 마음 바뀌면 언제든지 말해.”

    결국 재경은 약간의 여지를 남겨둔 채로 못 이기는 척 상대의 호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일단 한번 지내보고, 혹시 나중에라도 눈치를 주거나 태도가 달라지는 게 느껴지면 곧바로 나와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말을 이었다.

    “그럼 당분간 신세 좀 질게.”

    “신세는 무슨. 앞으로 잘 지내보자.”

    바지 주머니에 꽂혀 있던 손이 앞으로 내밀어졌다. 재경은 잠깐 망설이다가 느리게 그 손을 맞잡았다. 동시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일순 핫팩을 쥐었나 싶을 정도로 체온이 뜨거웠다.

    “성욱이 말로는 아직 고시텔에 들어가 보지도 못했다던데, 그럼 아무것도 못 건진 거야?”

    “……어. 그래도 크게 중요한 건 없어서 상관없어.”

    말은 이렇게 해도 속이 쓰리긴 했다. 멀쩡한 옷과 전공 서적들, 그 외 자잘한 물건들도 죄다 잿더미로 변해버렸을 테니 말이다. 그나마 한 가지 위안이 되는 점은 소유물 중에서 가장 고가인 노트북을 아침에 들고나와서 그것까지 잃는 참사는 면할 수 있었다는 거였다.

    “그나마 다행이긴 하네. 거실에서 잠깐만 쉬고 있어. 바로 치워줄게.”

    “미안한데, 지금 나가봐야 될 거 같아.”

    그렇게 말하며 재경은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알바 시간까지 아직 여유가 좀 있긴 하지만 그 전에 학교에 한 번 더 들를 생각이었다. 주거지가 정해졌으니 당장 필요한 것들을 사기 위해서였다.

    “알았어. 그럼 그동안 정리해놓을게.”

    재경은 돌아서려다가 멈칫하며 박성범을 바라보았다.

    “내가 뭐 거들어줄 건 없어?”

    “없어. 그냥 옆방으로 옮겨놓기만 할 거거든.”

    “……그럼 갔다 올게.”

    “조심해서 다녀와.”

    넉살 좋게 웃는 놈을 뒤로한 채 재경은 현관문을 나섰다. 엘리베이터가 내려오길 기다리는 동안 저도 모르게 뒷목으로 손이 향했다.

    조심해서 다녀오라니. 집을 나서는데 누가 인사를 해주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더불어 누군가와 함께 사는 것도 제대한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다.

    밖에 있는 시간이 많은 만큼 딱히 부딪힐 일은 없을 것 같긴 하지만……. 부디 큰 잡음 없이 잘 지낼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들었다.

    * * *

    아직 오픈 시간이 되지 않은 호프집은 낯설 정도로 조용했다. 카운터를 지나쳐서 안쪽으로 들어가는데, 마침 스태프 룸의 문이 열리며 최용식이 나왔다.

    “왔어?”

    “네. 옷 갈아입고 올게요.”

    교대하듯 스태프 룸 안으로 들어간 재경은 캐비닛 문을 열고 티셔츠부터 훌렁 벗었다. 안에 들어 있던 검은색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거울 앞에 서서 옷매무시를 정돈했다. 다시 바깥으로 나가니 좀 전까지만 해도 조용하던 홀에 끈적한 팝송이 흐르고 있었다. 재경을 발견한 최용식이 카운터에 두 팔을 걸친 채로 말을 걸었다.

    “언제 나갔어? 아침에 눈 떠보니까 없던데.”

    “9시쯤에 나왔을걸요.”

    “완전 기절해서 너 나간 줄도 몰랐어. 오늘도 우리 집에 갈 거지?”

    “아뇨, 방 구했어요.”

    그러자 최용식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벌써 구했어?”

    “네.”

    “어제 계속 한숨 내쉬더니만……. 어쨌든 잘됐네. 아니면 계속 잠자리 제공해주고 청소나 좀 맡기려고 했는데.”

    재경은 뒷말을 못 들은 척하며 딴청을 부렸다.

    어림없는 소리. 그 정도면 청소 용역을 불러야 할 수준이다.

    “그럼 오늘 밤에 한잔 콜? 집 구한 기념으로.”

    최용식이 씩 웃으며 소주잔을 꺾는 시늉을 해 보인다. 재경은 절레절레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누가 술고래 아니랄까 봐 이유를 갖다 붙이는 것도 수준급이다.

    “오늘은 힘들 것 같아요.”

    “왜. 짐 정리 때문에?”

    “아뇨, 내일 수강 신청하는 날이거든요.”

    저 술고래랑 같이 마시러 가면 못해도 서너 시간은 붙잡혀 있을 게 뻔하다.

    재경도 술은 제법 마시는 편이지만 가끔 숙취가 심할 때가 있었다. 혹시 내일 아침에 늦잠이라도 잤다가는 그야말로 쫄딱 망하는 거였다. 새 학기의 첫 단추를 잘 끼우려면 오늘은 자제하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최용식은 포기를 모르는 인간이었다.

    “그럼 딱 맥주 한 잔만 하자.”

    한 잔이 두 잔이 되고, 나중엔 소주병까지 줄을 설 게 훤히 그려졌다. 재경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꼬셔도 소용없어요. 오늘은 진짜 안 돼요.”

    “아니면 형이 수강 신청 대신 해줄게.”

    “시간표도 아직 안 짰어요.”

    그러면 시간표도 제가 짜주겠다는 헛소리를 할 것이 뻔했기에, 재경은 얼른 한마디를 더 보탰다.

    “사실 같은 과 동기랑 잠깐 같이 살게 됐는데, 첫날부터 너무 늦게 들어가도 눈치 보여요. 그리 친한 놈은 아니거든요.”

    “근데 같이 산다고?”

    “제 사정이 딱했나 보죠. 다음에 한번 날 잡아서 마셔요.”

    시계를 보니 마침 곧 있으면 6시였다.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는 최용식을 뒤로한 채 재경은 행주를 가지러 주방으로 들어갔다. 손님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테이블이라도 한 번씩 닦아놓을 생각이었다.

    * * *

    재경이 호프집을 나선 것은 밤 11시 20분이 넘어서였다. 본래 마치는 시간보다 20분 정도 더 지났지만 불만은 전혀 없었다. 손님이 많아서 일이 늦게 끝나면 그만큼 시급을 더 쳐주기 때문이었다.

    밤이 되어도 후텁지근한 날씨는 여전했다. 재경은 한쪽 어깨에 가방을 걸친 채 건널목으로 향했다.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으니 뒷주머니에서 휴대폰이 울렸다.

    [일은 마쳤어?]

    박성범이 보낸 문자였다. 재경은 잠깐 액정을 바라보다가 느리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어]

    핸드폰을 보고 있기라도 했는지 전송 버튼을 누르자마자 새 메시지가 날아왔다.

    [꽤 늦었는데도 안 와서 걱정돼서 연락했어

    조심해서 와 ^0^]

    매끈한 미간이 찌푸려졌다. 마지막에 붙은 웃는 이모티콘은 박성범과 전혀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재경은 그대로 화면을 끄려다가 생각을 바꿔 한 번 더 손가락을 움직였다.

    [어]

    [아참 공용현관 비번은 열쇠1234종

    현관 비번은 그냥 1234야

    잘 안되면 전화해]

    순간 재경은 제 눈을 의심했다. 공용현관이야 그렇다 쳐도, 현관문 비번이 1234라고?

    가만히 보고 있으니 화면이 알아서 까맣게 변했다. 뒤늦게 고개를 들자 어느새 신호등이 초록불로 바뀌어 있었지만, 보행 시간을 알리는 칸수가 세 개밖에 남질 않았다.

    재경은 무리해서 건너는 대신 다음 신호를 기다리기로 했다. 1234라니. 도둑놈들도 어이가 없어서 눌러보지 않을 번호라고 생각하면서.

    땡-!

    경쾌한 소리를 내며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복도는 조용했다. 저벅저벅, 어둠을 가르며 움직인 낡은 운동화가 505호 앞에서 멈춰 섰다.

    현관문에는 새빨간 커버의 도어락이 설치되어 있었다. 노려보듯 쳐다보길 잠시, 재경은 천천히 손을 뻗어서 도어락 커버를 위로 올렸고, 반신반의하며 네 자리 숫자를 입력했다.

    삐리릭-

    커버를 다시 내리자마자 해제음을 내며 잠금장치가 풀렸다.

    ‘……진짜 1234냐?’

    속으로 중얼거리며 문을 열자 거실에 불이 환하게 켜져 있는 것이 보였다. 소파에 앉아 있던 박성범이 먼저 아는 척을 했다.

    “왔어?”

    영화 채널을 틀어놓기라도 했는지 TV에서 시끄러운 총성이 난무했다. 테이블에는 맥주 캔과 과자 봉지 따위가 놓여 있었다.

    재경은 아까 박성범이 안내해줬던 방으로 시선을 옮겼다. 방문은 닫혀 있었다. 선뜻 들어가기가 그래서 제자리에 서 있으니 박성범이 가까이 다가왔다.

    “원래 이 시간에 끝나?”

    “……오늘 좀 늦게 마쳤어.”

    “손님이 많았나 보네.”

    “조금.”

    꼬박꼬박 대답하면서도 어색해 죽을 것 같았다. 말했다시피 재경은 제대한 뒤에 줄곧 혼자서 자취 생활을 했다. 비록 좁아터진 공간에 방음도 전혀 안 되는 곳이긴 했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프라이버시는 보장되는 데다가 누군가와 귀가 인사를 나눌 필요도 없었다.

    안쪽으로 걸어간 박성범이 방문을 열었다. 그의 시선이 거듭 재경을 향했다.

    “대충 치워뒀어. 쓸고 닦았으니까 바로 자도 될 거야.”

    “……고마워.”

    감사 인사도 영 어색하기만 했다. 인사말 자체가 어색한 게 아니라, 그 인사를 받는 상대가 박성범이라는 사실이 어색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아니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이 녀석 집에 얹혀살게 될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욕실은 저쪽이야. 갈아입을 옷은 있어?”

    “있어.”

    알바 가기 전에 잠깐 교내 상설 매장에 들러서 필요한 것들을 구매했다. 거기엔 티셔츠와 반바지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속옷은?”

    “있어.”

    물론 속옷도 샀다. 급한 대로 팬티 세 장만.

    “필요한 거 있으면 편하게 말해. 그리고 이쪽 방에도 에어컨이 있기는 한데 필터 청소를 못 했어. 업체에 전화해보니까 일주일 정도 기다려야 된다더라.”

    “상관없어.”

    얹혀사는 주제에 그런 사치까지 부리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새삼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고시텔이 열악하긴 해도 에어컨은 마음대로 켤 수 있어서 좋았는데.

    “청소하고 나면 알려줄게. 그동안 거실에서 자도 되고……. 아님 내 방에서 같이 잘래?”

    재경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확 구기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본 박성범이 웃음을 터뜨렸다.

    “너무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거 아냐? 딴에는 배려해서 한 말인데.”

    유감스럽지만 전혀 달갑지 않은 배려였다. 물론 어디까지나 농담인 것을 알기에 재경은 다른 쪽으로 말을 돌렸다.

    “씻고 올게.”

    “새 칫솔 내놨으니까 쓰면 돼. 비누나 수건 같은 것도 마음껏 쓰고.”

    “……알았어.”

    재경은 곧 욕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닫힌 문에 기대서는데 한숨이 절로 나왔다.

    ‘원래 저렇게 말이 많은 놈이었나?’

    누가 들어오든 나가든 신경도 안 쓸 것처럼 생겨서는 뜻밖이었다. 설마 사사건건 간섭하거나 유난을 떠는 건 아니겠지? 은근히 차오르는 불안감을 뒤로한 채 재경은 땀에 젖은 옷을 벗기 시작했다. 곧 샤워기에서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시원하게 울렸다.

    내심 제 방으로 들어갔기를 바랐지만, 박성범은 여전히 소파에 길게 드러누워서 TV를 보고 있었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이쪽을 바라보는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맥주 마실래?”

    솔깃한 제안이었다. 속마음이 그만 겉으로 드러나 버렸는지, 박성범은 곧장 몸을 일으켜서 어딘가로 향했다. 다시 돌아온 그의 손에는 캔 맥주 두 개와 납작한 조미 오징어 팩이 들려 있었다.

    “앉아.”

    방으로 들고 가려던 계획이 장렬하게 실패했다. 재경은 마지못해 박성범 옆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앉자마자 후회했다. 좀 전까지 놈이 누워 있었던 탓인지 열선 시트에 앉은 것처럼 뜨끈뜨끈했다.

    벽에 걸린 TV에서는 남자 둘이 서로 총구를 겨누며 시끄럽게 떠들어대고 있었다. 푸슉- 탭을 딴 맥주를 몇 모금 마신 뒤에 재경은 흘끗 옆을 쳐다봤다. 박성범의 시선은 TV에 고정되어 있었다. 예정에 없던 상황이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잘됐다고 생각하면서 재경은 입을 열었다.

    “따로 지켜야 될 사항 같은 건 없어?”

    “뭐?”

    TV 소리 때문에 못 들었는지 이쪽을 보며 되묻는다. 그러다 뒤늦게 원인을 깨달은 듯 리모컨으로 볼륨을 줄여 버린다.

    “따로 지켜야 될 사항 같은 건 없냐고. 쓰레기 버리는 거나, 이런 건 좀 조심했으면 좋겠다 하는 것들.”

    집에 붙어 있는 시간이 많지는 않겠지만, 어쨌거나 오늘부터 생활공간 일부를 공유하게 됐다. 마찰을 최소화하려면 지금이라도 기본적인 규칙을 정해두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으음……. 딱히 없는 거 같은데. 쓰레기는 아주머니가 정리하니까 신경 안 써도 되고.”

    “아주머니?”

    “일주일에 세 번씩 가사 도우미가 오거든.”

    말로만 들었지 실제로 가사 도우미를 쓴다는 사람은 처음 봤다. 하지만 잘사는 놈인 것을 알고 있어서인지 딱히 놀랍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남자 혼자 사는 집 치곤 상당히 깔끔하다 싶었는데, 업체에 맡긴다니 이해가 갔다.

    “한 번 더 생각해봐. 나중에라도 서로 싸우거나 얼굴 붉히긴 싫으니까.”

    “알았어. 그러는 넌 나한테 뭐 바라는 거 없어?”

    “없어. 아직은.”

    급하게 뒷말을 덧붙였더니 피식 웃음을 흘린다.

    “언젠가는 생길 수도 있다는 뜻이네.”

    “갑자기 같이 살게 됐는데, 앞으로 어떤 문제가 생길지 누가 알겠어.”

    좋아서 결혼한 부부도 성격 차이로 이혼하는 마당에, 별로 친하지도 않은 남자 놈 둘이서 아무 문제 없이 원만하게 지낼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들지 않았다. 웬만하면 을인 자신이 갑에게 맞춰주겠지만, 정도를 넘어서면 폭발할 수도 있었다.

    그러자 박성범은 순순히 수긍했다.

    “그럼 나중에라도 불편한 점이 생기면 그때그때 바로 말하는 걸로 해.”

    나쁘지 않은 대답이었다. 이윽고 대화는 끊겼고, 재경은 맥주 캔을 다 비운 다음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들어갈게.”

    “벌써 자려고?”

    벌써는 무슨.

    “12시 넘었어.”

    “새 나라의 어린이네.”

    그러더니 급하게 덧붙이는, 더우면 거실이나 내 방에 와서 자라는 말을 뒤로한 채 재경은 미련 없이 제 몫으로 배정받은 방문을 열었다.

    방은 정말로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다. 재경은 한숨을 삼키며 벽에 기대앉았다.

    쾌적한 주거공간에서 살게 됐지만 마음이 마냥 편치만은 않았다. 규칙이나 주의사항을 떠나서, 우선 누군가와 함께 산다는 사실에 먼저 익숙해져야 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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