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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 여주의 옆집에 살고 있습니다-179화 (179/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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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수습은 생각했던 대로 꽤 오래 걸렸다.

스키아가 사라지면서 세뇌도 모두 지워졌지만, 수도의 사람들은 바로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세뇌가 걸린 거의 하루 동안의 기억이 모두 사라진 탓이었다.

그러나 예외는 늘 존재했다. 라샤드의 부관, 아론은 신문을 확인하자마자 사람들을 이끌고 바로 황성으로 향했다.

그들이 무너진 황성의 홀에 이르는 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진 않았다.

“세상에! 이게 다 무슨 일입니까?!”

라샤드의 상처가 그리 깊지 않은 것도 행운이었다.

그는 부하들을 만나자마자 바로 구조 작업을 진행했다. 인명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 일행들이 노력한 덕분에 다친 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역시나 예외는 있었다.

뒤늦게 찾은 황비는 세뇌의 후유증이 너무 심한지 눈을 뜨지도 못하고 있었다. 황태자는 의식이 있었지만, 미친 자처럼 횡설수설했다.

그리고 돌에 깔린 시신이 황제라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아론은 고개를 저으며 깊이 탄식했다.

“앞으로의 황실이 걱정되네요.”

라샤드가 본격적으로 바빠진 것은 그 이후부터였다. 정신을 차린 귀족들이 그를 찾으며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고 물어봤기 때문이다.

덕분에 세이나는 라샤드에게 더 다가가지 못하고 따로 행동하게 되었다. 안나와 로벤은 세이나의 설명을 다 들은 후에도 믿기 힘들다는 얼굴이었다.

“단체로 최면에 걸렸다는…… 말이죠?”

“맙소사. 내가 꿈을 꾸는 건가?”

그들을 아론을 통해서 모두 집으로 돌려보내고 난 후에야 여유가 생겼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세이나에게 엘렌이 찾아온 것은 동이 틀 무렵이었다.

“일어났는데, 손에 이게 있었어요.”

“봉인석……이겠지?”

말로만 들었지 실제로 보는 것은 세이나도 처음이었다. 보랏빛 구슬은 겉으로 보기에는 딱히 특별한 것이 없어 보였다.

“제가 가져가도 되겠습니까?”

문득 말을 걸어온 이는 붉은 머리칼의 노인이었다. 그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봉인석을 가리켰다.

“성국으로 보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잠깐! 나는 반대!”

오웬이 눈살을 찌푸리며 끼어든 것은 그때였다.

“스승님께서는 모르시겠지만, 우리는 대신관에게 크게 뒤통수를 맞은 전적이 있습니다. 성국도 못 믿어요.”

“이 아둔한 것아. 그럼 이 위험한 걸 어디에 두게?”

“……스승님 집?”

“이놈이! 평생 마물에 쫓기며 살라는 게냐!”

딱! 노인의 지팡이가 오웬의 다리를 후려쳤다. 세이나는 픽 웃음을 터트렸다.

“사실 성황이 의뢰한 사람은 바로 저입니다. 제가 거동이 불편해서 오웬에게 이 일을 대신 맡겼지요. 직접 만나 본 분이니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진심으로 성녀님의 안위를 염려했습니다.”

“그런……가요?”

“성황은 나도 만나 봤어. 나쁜 사람 같진 않던데.”

하얀 고양이가 오웬의 발치에서 나타나자 엘렌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그녀는 봉인석을 볼 때보다 더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레블로테를 빤히 보았다.

“이 고양이…… 어떻게 말을 하죠?”

“말만 해? 마법도 쓸 줄 알아.”

“어머!”

“나도 정말 놀랐었지. 레블로테를 실제로 볼 줄은…….”

그리고 수다 시간이 찾아왔다. 레블로테라는 공통 관심사가 있어서인지, 세 사람은 전혀 어색하지 않게 대화를 이어 나갔다.

우스운 것은 레블로테도 그들의 관심을 그리 싫어하는 눈치는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경탄 어린 시선들을 받으며 레블로테는 의기양양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흐음, 내가 좀 귀한 몸이긴 하지.”

평화로운 풍경. 하지만 그 속에는 위화감이 있었다. 주변을 둘러본 세이나는 곧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데, 디온은 어디 갔어요?”

* * *

세이나는 급히 현관문을 잡아당겼다.

초조한 마음으로 집안을 둘러보니 다행히, 낯익은 등이 보였다. 소파의 바로 옆에서 뭘 그리 열심히 보는지. 다가가는 기척이 느껴져도 한 번 돌아보지를 않았다.

“디온.”

“상인이 말해 줬던 드래곤 이야기…… 아직 기억하고 있나요?”

돌아온 질문은 뜻밖의 것이었다.

머리를 살짝 기울인 세이나는 그에게 가려져 보이지 않던 드래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당장 화염을 뿜을 듯 용맹한 자태였다.

“응, 기억해.”

“제가 제일 좋아하는 동화입니다.”

“……왜?”

“마족에게 우호적인 동화는 그것밖에 없었거든요.”

살짝 보인 옆얼굴은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어딜 찾아봐도 나쁜 말밖에 없었죠. 스승님도 좋은 말은 안 해 주더군요. 당시에는 좀 원망스러웠어요. 어차피 둘러대는 것, 좋게 좀 말할 수 없나……. 하지만 이젠 이유를 알겠습니다.”

그러고 디온은 세이나를 돌아보았다.

“반쪽이라 해도 제가 마족인 걸, 잊지 말라는 뜻이었겠죠.”

묘한 빛의 푸른 눈동자와 마주치자마자 가슴이 술렁대기 시작했다. 기묘한 불안감에 휩싸인 채 세이나는 디온을 응시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디온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호선을 그렸고, 세이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이윽고 나온 대답은 세이나의 머릿속을 하얗게 지울 만한 것이었다.

“저를 봉인하세요.”

“……또 그 소리야?”

“진심입니다.”

정말 그런 표정이었다. 장난기가 모두 사라진 얼굴은 다소 엄숙해 보이기도 했다.

그 어느 때보다 진중하고 무거운 목소리로 디온이 설명했다.

“성국은 끝까지 봉인석을 요구할 겁니다. 제 존재도 곧 알려지겠죠. 당신이 곤란해질 거예요.”

떠보거나, 시험하는 어조는 아니었다. 이미 각오를 마친 남자의 눈빛은 단호했다.

나를 없애도 된다고. 전혀 원망하지 않고 받아들이겠다고.

“제 어머니의 실수로 시작된 일이니 제가 끝맺고 싶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으세요.”

세이나는 오랫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긴 침묵 속에서 이제 불안한 쪽은 디온이 되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기에 저렇게 길게도 입을 열지 않는 걸까. 혹시 내게 실망했을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이미 말했듯, 디온은 진심이었다.

스승님도, 어머니도 그걸 바라고 있으리라.

“세이나.”

“좋아해요.”

……그렇게 생각했는데.

“제 곁에 있어 줘요. 제가 당신을 행복하…… 어, 다음이 뭐더라?”

“지금…… 뭐라고 했어요?”

디온은 성큼성큼 세이나에게 다가가 그녀의 턱을 붙잡았다. 살짝 양 볼을 누르자 그녀의 볼살이 밀려 올라가 입술이 도드라지게 나왔다.

“방금, 아주, 아주, 아주, 안 좋은 기억을 들춘 것 같은데.”

“우리의 어마어마한 첫 만남을 두고, 안 좋은 기억이라니. 나는 그걸 보면서 부럽다고 생각했는걸.”

“……그래도 그걸 그대로 하는 건 아니죠. 누구 놀립니까?”

툴툴거리며 놓아주자 세이나가 픽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녀와 달리 디온은 좀처럼 미간을 풀 수 없었다.

그때 엘렌에게 한 고백은…… 디온의 인생에서도 손꼽히게 후회되는 일 중 하나였다. 세이나가 보고 있는 걸 알았다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텐데.

그 고백 때문에 이후에 있었던 상황들을 생각하면 정말이지…….

“흠, 그럼 이건 어때?”

답답하여 한숨을 푹 내쉬려던 그때, 세이나가 돌연 손을 뻗었다. 작은 엄지로 그의 눈썹과 뺨을 천천히 쓸다가, 이내 작게 속삭였다.

“사랑해.”

그리고 짧게, 디온의 입가에 키스했다. 다시 빤히 올려다보는 눈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무릎 꿇고 애원해도 절대로 봉인은 안 할 거야. 사실 우리끼리 하는 말인데, 하는 법도 아직 잘 몰라.”

“……네?”

“스키아 때도 봉인됐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만 열심히 했지. 아마 엘렌의 몸 안에 내가 오래전에 남긴 성력이 봉인을 이끌었을 거야. 지금 난 성력을 못 쓰니까 봉인도 못 할걸?”

“그게 무슨…….”

“성력이 응답해 준다고 해도…… 네가 사라지는 걸 내가 간절하게 원할 리가 없잖아.”

세이나가 그의 눈가를 매만졌다. 마치 그곳에 눈물이 있어서, 정성스레 닦아 주는 것처럼.

“성국이 무서우면 내가 쫓아내 줄게.”

“……도망 다녀야 할지도 몰라요.”

“그럼 어디로 갈까? 난 따뜻한 곳이 좋은데. 아, 신전 하니까 혼내 줄 놈들이 생각났어. 걔들도 만나러 가야 하긴 해.”

“세이나.”

“나도 진심이야. 너, 그렇게 겪고도 날 몰라?”

그러고 세이나는 손을 내렸다. 치켜뜬 눈은 조금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다.

“난 절대 누구도 포기하지 않아.”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디온은 세이나를 끌어안았다. 다소 성급한 손길이었지만 세이나는 물러서지 않고 그에게 몸을 기대었다.

“내 옆에 있어 줘.”

그의 어깨에 닿았던 고개를 살며시 들어서 세이나는 디온을 마주 보았다. 다시 본 예쁜 얼굴은 귀엽게도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았다.

“역시 이 말이 제일 좋은 것 같아.”

다시 억센 팔이 그녀를 감쌌다. 그녀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고 디온이 속삭였다.

“평생 안 놓아줄 거예요.”

“응.”

“절대로, 절대 안 놓을 거야.”

“오, 점점 무서워지는데?”

“세이나.”

마지막에는 거의 울먹이는 것 같기도 했다. 세이나가 그 목소리를 놀리려고 입을 연 그 순간, 디온이 말했다.

“사랑해요.”

세이나는 환하게 웃었다.

비로소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마침〉

By.[Y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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