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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 여주의 옆집에 살고 있습니다-178화 (178/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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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렌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

그녀의 당황과 별개로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새로운 의뢰가 당도하고, 젊은 부부는 여행 준비를 시작했다. 곧바로 찾아온 작별은 짧았다.

- 금방 돌아올게.

금발의 여인은 엘렌을 그대로 본뜬 듯한 생김새였다. 갈색 머리칼의 남자는 그녀와 달랐지만, 하늘빛 눈동자는 똑같았다.

그들이 자신의 몸을 통과할 때까지도, 엘렌은 멍한 상태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녀가 뒤를 돌아봤을 땐 이미 그들의 모습이 모두 사라진 뒤였다.

“잠깐! 잠깐만!”

다음에 시간이 당도한 곳은 어느 겨울날이었다.

- 리처드가 실종됐네.

손님을 배웅한 노인은 비틀대듯 걸어와 소파에 주저앉았다. 거칠게 쓸어내린 얼굴은 충격에 잠겨 있었다.

실종 소식 이후 노부부는 매일을 눈물로 보냈다.

멍하니 창문 밖을 바라보다 누군가 다가오는 듯하면 허겁지겁 달려가 문을 열었다. 집안의 분위기도 점점 더 침울해져 갔다. 그들은 하루가 다르게 늙고 있었다.

‘할아버지…… 할머니…….’

그 소녀가 없었다면 아마 제대로 생활조차 힘들었을 것이다.

고양이처럼 손톱을 세우던 소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집 안에 온기를 채웠다.

방에 틀어박혀 있는 할머니를 억지로 끌고 나와 함께 산책했고, 할아버지가 집에 돌아오면 활짝 웃으며 맞이했다. 소녀는 혼자 있을 때마다 습관처럼 중얼거렸다.

- 내가 정신 차려야 해.

엘렌은 입술을 꽉 깨물고 소녀를 주시했다.

참아 내지 못한 눈물이 뜨겁게 양 볼을 적셔도, 빠르게 눈가를 훔치고 똑바로 그녀를 지켜보았다.

그녀가 활기차게 뛰어다니는 모습을. 반드시 돌아올 거라고, 부모님을 모욕하면 가만 안 두겠다고 눈에 불을 켜고 소리치는 순간을. 그리고 결국 할아버지마저 떠나 버리고.

혼자 남아 울음을 터트리는 날까지도.

- 흑…… 흐윽…….

자신의 것인지 소녀의 것인지 모를 흐느낌을 들으며, 엘렌은 입을 틀어막았다.

이제 소녀는 작은 방 안에 홀로 남아 있었다.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흑발을 길게 늘어뜨린 채, 무릎을 끌어안고 어깨를 떨었다. 눈물로 젖은 눈동자는 금색이었다.

“세이나.”

엘렌은 이제 그 소녀의 이름을 알 수 있었다.

“세이나가…….”

시야가 빠르게 흐려졌다.

엘렌은 결국 차오르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뚝뚝 떨어진 눈물이 닿은 곳은 낡은 목마였다.

그 옆에는 빛바랜 장난감들이 어지럽게 펼쳐져 있었다. 이윽고 작은 아기 침대를 발견했을 때, 엘렌은 힘이 빠져 주저앉아 버렸다.

한 번도 열린 것을 본 적이 없었던 1층의 작은 방.

“흑…….”

그곳은 자신의 방이었다.

언젠가 돌아올 작은 아이를 위해서, 할머니와 할아버지 그리고 세이나가 매일매일 정성 들여 꾸민 곳이었다.

어떤 색이 어울릴지, 어떤 것을 좋아할지. 상상하고, 고민하며 또 다짐했다. 눈 마주치는 모든 순간 아껴 주리라, 그리고 반드시.

“흐윽……. 흑…….”

끝까지 기다리겠노라고.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자신의 방이 되었을 그곳에서, 엘렌은 주저앉아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숨조차 제대로 쉬기가 어려웠다.

그녀가 우는 동안에도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지치고 힘들 때마다 세이나는 이 방의 문을 열었다. 낡은 물건들을 정성스레 닦으면서 긴 시간을 보냈다. 멍하니 앉아서 지내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러나 이내 방을 나설 땐, 마치 가면을 바꿔 쓴 듯이 결의에 가득 찬 표정이 되었다.

- 돌아올 거야.

그러다 누군가 집을 방문했다. 은발의 사내. 뒤이어 나타난 칼만 공작을 노려보며, 세이나가 말했다.

- 이 집은 내 할아버지부터 살았던 곳이에요. 직접 지으셨고, 가족의 추억이 남아 있는 곳이죠. 절대로 팔 수 없어요.

- 이대로 공작님이 저 때문에 이 거리를 비우게 되고, 그사이에 엘렌이 다치면 엄청 죄책감 느낄 거 같아서요.

엘렌을 외면할 수 없다. 엘렌을 지켜야 한다.

세이나는 계속 그녀를 걱정하고 보호하고자 했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면서. 옆집에 사는, 몇 달 전 갑자기 굴러들어온 남에 불과한데도.

어느 날 찾아온 요정을 만났을 때는 확신에 차서 말하기까지 했다.

- 그럼…… 엘렌을 좋아하지?

- 네!

요정의 아홉 번째 구슬에 빛이 들어오자 엘렌은 저도 모르게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집 근처에서 마물들이 나타난 원인은 엘렌에게 있었다.

비록 매우 다르게 이해하고 있었지만, 세이나도 엘렌 때문에 마물이 모여든다는 사실은 알았다. 그래도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 질문에서.

- 나는 내 가족이 살아 있다고 믿고 있다.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짓궂은 미소를 흘리며 요정이 묻자 세이나는 말했다.

- 물론.

짧은 망설임도 없는 단호한 답변이었다. 그녀의 금색 눈동자는 맑고 찬란한 빛을 품고 있었다.

- 돌아올 거야. 반드시.

*

엘렌은 당혹감 속에서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어느새 거리에 홀로 서 있었다. 잔잔하게 흐르는 물결과 낡은 벤치. 눈앞에는 너무나 익숙한 그 집이 있었다.

분명 방금까지만 해도 그 안에 있었는데. 다시 공간이 흔들리더니 몸이 뒤로 밀리고 말았다.

쫓겨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

불현듯 불길한 예감이 스쳤고, 엘렌은 허겁지겁 옆집으로 달려갔다. 다가가 붙잡은 손잡이는 굳건했다. 조금의 틈새도 없이 굳게 닫혀 있다.

“아…… 안 돼…….”

엘렌은 미친 듯이 손잡이를 움직였다.

다시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흔들림 없는 이 문이, 마치 자신을 거부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너는 들어설 자격조차 없다고. 이제 더 이상은.

돌아갈 수 없다는 것처럼 들려서…….

“안 돼!”

엘렌은 절박하게 문을 두들겼다.

“열어 줘! 제발!”

눈물로 얼굴이 엉망이 되어도 닦을 정신조차 없었다.

너무 세게 두들겨서 손이 벌겋게 달아올라도 멈추지 않았다.

“제발……!”

“그만 단념해.”

돌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은발의 여인은 거울 속에서 봤던 모습 그대로였다. 비정하고 차가운 표정. 그녀를 발견한 엘렌의 눈초리도 날카로워졌다.

“어차피 너를 반기지도 않아.”

하지만 그 말을 들었을 땐, 엘렌은 마음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반기지 않는다. 그래서 문이 열리지 않는 걸까.

“이 모든 일의 책임은 너에게 있어. 애초에 네가 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나는 네 몸에 정착할 수도 없었겠지.”

“…….”

“하지만 넌 나를 받아들였고, 모든 의지를 나에게 맡겼어. 후작 부인과 형제들에게 복수하고 싶어 했잖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에 엘렌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겉으로는 순진한 소녀를 연기하면서, 속으로는 그들을 미워했지. 생각해 봐, 엘렌. 네가 정말로 ‘착한’ 사람이라면 과연 내가 계속 네 안에 남을 수 있었을까?”

“…….”

“그날 신전에서도 마찬가지야. 보통 사람은 신전에서 행패를 부렸다고 너처럼 증오심까지 품진 않아. 하지만 넌 그들을 저주했고, 그래서 내가 깨어난 거야.”

“…….”

“네가 그들을 죽였어.”

스키아는 조금씩 집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의기양양한 미소를 그린 채, 손잡이에 닿은 엘렌의 손을 주시하며 다시 엘렌에게 말을 걸었다.

“추악하고, 타락해서 다시는 돌이킬 수 없지. 아직도 모르겠어?”

엘렌은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스키아의 미소가 더욱더 깊어졌다.

그녀가 손을 뻗은 찰나.

“엘렌.”

“그래도 갈 거야.”

엘렌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원망을 듣게 된다고 해도 상관없어.”

엘렌의 손이 다시 손잡이를 흔들기 시작했다. 쿵쿵! 묵직한 소음이 거리에 울려 퍼지자 스키아의 얼굴이 험하게 일그러졌다.

그녀는 여러 차례 엘렌을 불렀지만, 엘렌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참다못한 스키아가 날카롭게 외쳤다.

“엘렌!”

“부르지 마!”

하지만 뒤이어 들린 엘렌의 목소리는 거리를 울릴 만큼 컸다.

“너 따위가 부를 수 있는 이름이 아니야!”

스키아는 일순 멍해지고 말았다.

다시 마주친 소녀의 두 눈에는 분노가 넘실대고 있었다. 단 한 번도 보이지 않은 표정.

“나를 위해서, 그토록 먼 곳에서부터…….”

하지만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잠시 감정을 누른 엘렌이 다시 말을 이었다.

“나를 구하기 위해 찾아온 사람이 준 소중한 이름이야.”

엘렌이 힘들게 붙잡고 있는 손잡이는 마치 사람의 온기처럼 따뜻했다. 그저 착각이 아니었다.

“바로 그 사람이, 나를 기다리고 있어. 포기하지 않았어…….”

그래서 이토록 따뜻한 것이었다.

엘렌은 그제야 모든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원망하고 있다면, 반기지 않는다면, 이 집이 나타날 리가 없다.

가족들의 얼굴을 보여 주지도 않았을 테고, 엘렌이 어둠에 잠겨서 모든 것을 놓아 버리도록 내버려 뒀을 것이다.

“나는 나를 포기했는데도……. 나를 믿고 있어…….”

비참한 인생이라고 생각했다.

노력해도 아무것도 돌아오지 않고, 누구도 사랑해 주지 않을 거라고. 그저 불행만이 가득한, 불쌍하고 처절한 삶이라고 여겼다.

왜 내일을 살아야 하는지조차도 의문이었다. 허무하고 고통스러워 삶을 내던지고 싶다는 생각도 수백 번.

하지만 지금이라도 깨달았기에, 엘렌은 이걸 놓을 수 없었다. 실수하고, 잘못하고, 이미 너무 멀리 가 버렸을지라도.

믿어 주는 사람이 있는 한…….

“돌아갈 수 있어.”

엘렌은 힘껏 문손잡이를 잡아당겼다. 여러 번 시도 끝에 놀랍게도, 조금 문이 흔들리는 것이 느껴졌다.

계단에 발을 올렸던 스키아의 눈이 커졌다. 어디서 왔는지 모를 거센 바람이 스키아를 뒤로 밀어 낸 것은 그때였다.

“윽!”

그리고 따스한 온기가 엘렌을 스쳤다. 손안이 아닌, 바로 손등 위로. 눈물은 아니었다.

마치 누군가의 손길이 닿은 듯한…….

이내 어깨를 감싸는 또 다른 손길이 느껴지자, 엘렌의 눈시울이 다시 흠뻑 젖어 들었다. 두 사람의 정체를 알아차리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왜 지금에서야 깨달은 걸까.

‘나는 줄곧 혼자가 아니었어.’

그 순간, 놀랍도록 부드럽게 문이 열렸다.

그 새하얀 공간을, 엘렌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응시했다. 뒤이어 희미한 목소리가 들리자 그녀는 스르륵 눈을 감았다.

“엄마, 아빠…….”

다시금 부드러운 손길이 어깨를 쓸었다. 괜찮아. 다음엔 살짝, 등이 밀쳐졌다.

어서 가.

“고마워요.”

그리고 엘렌은 빛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 * *

“엘렌.”

세이나는 마음을 졸이며 다시금 그녀를 불러 보았다. 방금 눈꺼풀이 살짝 움직인 것도 같았는데.

“엘렌……?”

그에 응하듯 파르르 엘렌의 속눈썹이 떨렸다. 세이나가 너무 긴장되어 마른침을 삼킨 순간, 엘렌이 세이나의 품에서 눈을 떴다.

“괜찮아?”

오직 세이나에게만 시선을 고정한 채 엘렌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았다.

세이나 역시 그랬다. 그녀의 몸이 앞으로 쓰러진 직후부터 계속 끌어안고 있지만, 조금의 불편함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긴 침묵이 흐른 후.

“세이나…….”

엘렌은 눈물이 그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느리게 뻗은 손이 세이나의 뺨을 쓸었고, 이내 엘렌이 부드럽게 웃었다.

“……언니.”

긴 기다림의 끝을 알리는 미소였다.

“어서 와, 엘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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