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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림없이 그자였다.
자신과 똑같은 은색 머리칼. 푸른 눈동자. 생김새는 조금 달라졌지만, 그 기운도 그대로였다. 속내를 숨기는 듯한 표정. 자신을 바라보는…….
경멸에 찬 눈빛 역시.
“하! 이미 늦었어!”
스키아는 세이나의 머리카락을 뒤로 잡아당겼다.
“넌 더 이상 이 여자를 살릴 수 없어! 네가 진 거야!”
그 손길에 따라 앞으로 쓰러졌던 세이나의 몸이 뒤로 젖혀졌다.
“네가 틀렸다고.”
그러자 드디어 남자의 얼굴에 작은 균열이 생겼다.
하지만 원하는 방향은 아니었다. 패배감에 휩싸여서, 절망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원했는데. 그저 조금 눈살을 찌푸렸을 뿐이다.
마치 못 볼 것을 보고 있는 것처럼. 징그러운 벌레를 지켜보는 듯하기도 했다.
스키아는 실소를 터트렸다.
너도 똑같으면서.
‘왜 나를 비난하는 거지?’
돌이켜 보면 저 남자는 늘 저런 눈빛이었다.
고고한 듯 고개를 쳐들고, 동족들을 혐오하고 피해 다녔다. 너는 어디가 그렇게 다른 건지. 무엇이 그리 대단하여 우리를 비난하는 건지.
대체 저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네가 우리를 속였어.”
늘 궁금했었다.
“배신자.”
스키아는 세이나를 내팽개치고 느리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일어서려고 했다.
느닷없이 발목에 찾아온 위화감에 스키아는 다시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보이지 않는 족쇄가 사지를 결박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무슨…….”
“어딜 가려고, 스키아.”
그리고 세이나 로힐이 고개를 들었다.
세이나와 스키아의 발밑에서 돌연 보라색 빛이 피어올랐다.
그 빛을 따라 시선을 움직인 스키아는 그제야 바닥에 새겨진 거대한 마법 진을 발견할 수 있었다.
흙먼지와 함께 위에서 쏟아진 건물의 잔해 때문에 알아차리지 못했다. 커다란 원과 알 수 없는 글자들. 그 안에 있는 수상한 도형들까지.
어쩐지 눈에 익은 형식들에 스키아는 순간 소름 끼치는 기분을 맛보았다. 지금 그녀를 속박한 마법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지?”
먼 옛날, 초대 성녀가 자신을 붙잡은 것과 똑같았다.
“마족은 마족을 알아차릴 수 없으니까.”
“너…….”
그제야 스키아는 그들의 속셈을 깨달았다.
그 의미 없는 대화와 끈질긴 대치. 치명타 하나 섞이지 않은 공격도 모두.
‘루드리에스가 이 마법 진을 그릴 시간을 벌기 위해서…….’
무서워서 피해 다닌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어떻게 내가 여기로 떨어질 걸 알고 있었던 거지? 예지는 못 쓰는 게 아니었어?’
세이나 로힐이 느리게 몸을 일으켰다.
일어선 그녀는 만신창이였다. 여기저기 찢긴 옷은 넝마와 다름없었고, 떨어진 충격으로 한쪽 다리도 온전치 않아 보였다.
연이어 거친 숨을 뱉는 입술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 새하얀 목을 적신 선혈을 거칠게 닦으며, 세이나 로힐이 스키아를 노려보았다.
“하아……. 아직도 모르겠어?”
“뭐?”
“네가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아직 엘렌을 완벽하게 지배하지 못한 이유 말이야. 그리고 네가.”
쿨럭! 격한 기침이 쏟아졌다. 잠시 숨을 가다듬고 세이나 로힐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스키아는 오싹한 소름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 움직일 수 없는 이유도.”
“설마…….”
“엘렌의 몸에는 내 성력이 깃들어 있어.”
갖고 있던 모든 의문이 해답을 찾은 순간이었다. 스키아는 욕을 내뱉고 싶었지만, 입술마저 마비된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세이나 로힐이 비틀대며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스키아의 앞에 무릎을 꿇고, 손을 뻗어.
“그 성력은 어머니를 보호하고, 지금까지 엘렌을 지켜 왔지. 그리고 이제 내 피까지 흠뻑 마셨으니…….”
덥석, 스키아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내 명령을 들을 수밖에 없어.”
스키아는 맥없이 그녀에게로 이끌려 갔다. 눈앞의 여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지만, 옷깃을 붙잡은 손길이 더 거세어져 가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제 돌려줘.”
가까이서 마주친 금색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 찬란한 빛을 품고 있었다.
“일어나!”
세이나가 소리쳤다.
“엘렌!”
* * *
엘렌은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헉!”
긴 잠에서 깨어난 느낌이었다. 몸은 가벼웠지만, 정신은 아직 아득히 먼 곳에 있는 것만 같았다.
“여긴 어디지?”
희미한 불빛을 발견한 것은 엘렌이 자리에서 일어나고도 그 주변을 제법 오래 서성인 뒤였다. 곧이어 들린 목소리는 귀에 익은 것이었다.
- 그 제자 놈을 풀어 주도록 해.
조심스레 다가가자 공간이 변했다. 음침한 감옥 앞에서 금발의 소녀가 단호하게 말했다.
- 내 힘을 줬으니 쉽게 당하지도 않을 테고. 시선을 끌기엔 부족하지 않을 거야.
- 그걸로 충분할까?
엘렌은 어둠 속에서 나타난 다른 남자를 보고 숨을 멈추었다. 소녀의 뒤에 선 유클레스 후작이 인상을 찌푸리고 말했다.
- 그 녀석을 빌미로 나를 구속하면 더 곤란해져. 성국에서 봉인석을 찾아다니는 것을 방해할 생각이 아니었나? 왜 더 번거로운 일을 만들지?
- 번거롭다니. 널 도와주려고 한 건데?
엘렌은 소녀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저건 나야.’
아직 10살도 되지 않는 소녀는 저보다 훨씬 큰 남자를 보고도 전혀 기죽지 않았다. 오히려 비웃는 것처럼 눈을 가늘게 뜨고 후작을 올려다보았다.
- 녀석에게 새로운 기억을 심었어. 나를 ‘성녀’로 생각하도록.
- 뭐?
- 성국 놈들이 저 녀석을 사로잡으면 아마 그렇게 실토할 거야. 그 이후로 어떻게 될지는 굳이 설명해 주지 않아도 알겠지?
- 성국이…… 너를 보호하겠군.
- 그래. 이 몸에 봉인석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채.
소녀는 그러고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 성국에서 누구를 보내든 상관없어. 일단 나에겐 호의적으로 다가올 테니까.
- 그 뒤엔 죽일 건가?
- 뭐, 봐서.
소녀가 씩 웃으며 말했다.
- 귀여우면 데리고 놀아 줄 수도 있고.
그리고 두 사람은 사라졌다.
공간이 뒤바뀌고, 새로운 풍경이 떠올랐다.
창백한 달빛이 비친 곳은 깊은 숲속. 피로 물든 검을 든 채, 금색 머리칼의 소녀가 뚜벅뚜벅 걷고 있었다.
얼마 가지 않아 걸음이 멈췄고, 소녀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발목을 붙잡은 것은 피에 흠뻑 젖은 남자였다.
- 제발…….
가까스로 흘러나온 목소리는 곧 끊어질 듯 미약하기만 했다. 남자가 울면서 애원했다.
- 제발 살려 주세요…….
그러나 그를 훑는 소녀의 눈빛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앞으로 향했던 검이 방향을 틀었다. 날카로운 끝이 노리는 방향은 아래.
- 아나히는 제발…….
바로 이 손으로, 그 남자의 숨통을 끊었다.
그의 동료를 쓰러트리고, 그의 연인을 죽였다. 간절한 부탁을 외면하고 다시금 그를 무참하게 짓밟았다.
비록 마족에게 몸을 빼앗겼다고 해도, 그 일을 행한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더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에 엘렌은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는데.’
이미 수백 번을 떠올린 그 생각이 여느 때보다 더 깊숙하게 비수처럼 가슴을 파고들었다.
‘전부 내 탓이야.’
되찾은 기억에 숨이 막힐 듯 괴로웠다.
그 저택에서 보내는 모든 순간이 비참했다. 가장 슬픈 것은 이렇게나 힘든데도, 도저히 스스로 생을 끝낼 용기가 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살고 싶었다.
그것이 오랫동안 고민해서 내린 결론이었다.
비록 모두가 경멸하고, 비난한다고 해도, 엘렌은 도저히 자신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맬빈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 저택에 더 있으면 정말 죽어 버릴 것 같았으니까. 이대로 있으면 그 ‘용기’가 날 것 같았으니까. 조금이라도 더…….
살고 싶었으니까.
‘전부 내 탓이야.’
그러나 모두 부질없는 짓이었다.
애를 쓰고 이어 온 삶이 결국 다른 이들을 불행으로 내몬 것이다.
내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나만 없었으면.
‘죽어 버렸으면 좋았을 것을.’
홀로 남겨진 컴컴한 방 안에서, 발을 접질려 넘어진 계단에서, 형제가 고의로 던진 꽃병을 맞은 정원에서, 억지로 끌려 나간 연회에서 뺨을 맞은 발코니에서…….
그 아래로 몸을 던졌어야 했는데.
다시 찾아온 어둠 속에서 엘렌은 가늘게 흐느꼈다.
그저 살고 싶었을 뿐인데. 모두에게 해를 끼치고 말았다. 존재 자체가 민폐라는 말이 딱 알맞았다.
모든 생명은 의미가 있다는 말을 믿어 버렸다. 이 작고 하잘것없는 삶에도 어떤 가치가 있다고. 나 주제에, 형편없는 엘렌 유클레스 주제에.
감히, 행복을 꿈꿨다.
“이제…… 됐어.”
그렇게 말하고 엘렌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암흑을 향해 그녀가 젖은 눈꺼풀을 열었다.
“다 포기할게.”
하지만 기대했던 반응은 없었다. 엘렌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안 들려? 내가…….”
그때, 주변이 밝아졌다.
이전과는 다른 현상에 엘렌의 눈이 커졌다. 그녀의 옆에 갑자기 펼쳐진 것은 어느 가정집이었다.
묘하게 눈에 익은 풍경에 엘렌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낡은 테이블의 앞, 덩치 큰 두 남자가 어깨를 맞대고 무릎 꿇고 있다.
- 괜찮아, 우리 나쁜 사람 아니에요……. 해치지도 않아요…….
- 그 험상궂은 얼굴로 말하는데 퍽이나 믿겠다. 이리 나와 보아라, 리처드! 자자, 아가야. 이리 온? 여기 간식도 있단다?
- 아버지랑 저랑 똑같이 생겼거든요?
엘렌은 뒤늦게 그들의 앞에 있는 검은 머리칼의 소녀를 발견했다.
그녀는 고양이를 그대로 사람으로 만들어 둔 것 같았다. 등을 둥글게 말고, 남자들이 손을 뻗으면 손톱을 세워 거침없이 할퀴어 댔다.
- 캬옹!
- 어휴, 답답해! 두 분 다 비켜 봐요! 내가 알아서…… 꺄악!
- 올리비아!
- 으윽, 엄청 재빠른데?
금빛 머리칼의 여자를 포함해 어른들은 인내심 있게 소녀의 뒤를 따라다녔다. 넘어지고, 긁히기 일쑤였지만 그들의 입가에선 웃음이 떠날 줄 몰랐다.
- 푸하하! 리처드! 꼴이 그게 뭐냐!
‘……즐거워 보이네.’
반면, 엘렌의 기분은 점점 더 가라앉았다.
끈질긴 노력 끝에 소녀는 그들의 일원이 되었다. 어디서 왔는지도 모를 의문의 소녀를, 어른들은 딸로서 받아들였다.
‘행복해 보여.’
침울한 기분을 좀처럼 떨칠 수 없었다.
저 아이는 무슨 천운을 타고났기에 저렇게 행복하게 지내는 걸까. 왜 나는 이런 불행을 겪어야 할까.
그런 의문을 품던 중, 급작스럽게 다시 풍경이 바뀌었다. 장소는 식당. 다른 이들이 등장했다.
그제야 엘렌은 금발의 여자를 제대로 살필 수 있었다. 낯선 여자의 얼굴에는 묘하게 익숙한 구석이 많았다.
그 기시감의 정체를 깨달았을 순간, 소녀가 말했다.
- 엘렌.
단란해 보이는 그들은…….
- 그래, 동생 이름은 엘렌이 좋겠다.
다름 아닌 자신의 가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