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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 여주의 옆집에 살고 있습니다-176화 (176/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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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을 고르기가 무섭게 다시 불덩이들이 그를 향해 날아들었다. 라샤드는 다시금 발을 움직였다.

쾅! 쾅! 쾅!

그들이 튀어나온 곳은 정원이었다. 그리 넓진 않았지만, 복도보다는 훨씬 나았다.

몸을 숨길 곳도 있다. 라샤드는 어릴 적 기억을 되살리며 깔끔하게 정리된 나무들 사이를 기민하게 움직였다. 지날 때마다 바로 뒤의 나무가 불타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화르륵!

- 마법을 계속 쓰게 만드세요.

불길은 나무를 다 잡아먹자마자 빠르게 사그라들어 잿더미가 되었다. 매캐한 연기가 정원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라샤드가 숨을 곳이 더 많아진 셈이었다.

“어디냐!”

불 다음은 벼락이었다. 섬광이 번쩍 울렸을 때, 라샤드는 정원 가운데서 바쁘게 고개를 좌우로 흔드는 후작을 발견했다.

그가 앞으로 손을 뻗었으나.

“칼만 공작!”

요란하게 울리며 내리꽂힌 벼락은 라샤드가 있는 곳과 한참 떨어져 있었다.

- 후작의 마력은 스키아로부터 가져오는 것.

“젠장!”

- 언젠가는 한계에 부딪히게 되어 있어요.

정원이 전부 쑥대밭이 되었을 무렵, 후작이 조금 비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마침 연기가 다 가라앉은 타이밍이었다.

- 마법이 바닥나면 그림자가 움직이기 시작할 거예요. 그림자는 후작을 보호하는 힘.

라샤드는 땅을 박차고 후작에게 달려들었다.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금속들이 마찰하는 것처럼 섬광이 비산했다. 라샤드의 검을 막은 것은 공작의 발치를 맴돌던 검은 그림자였다.

- 그걸 공격에 쓰도록 유도하세요. 그림자는 후작의 의지에 따라 움직여요. 여기서부터는 공작님이 보통 겪으셨던 대련과 비슷해요.

지금껏 억눌러 왔던 감정을 폭발시키듯 라샤드는 맹렬한 기세로 후작을 몰아붙였다. 그림자는 유연하게 움직여 그의 검을 막아섰으나, 거기까지가 고작이었다.

후작은 좀처럼 반격의 틈을 잡아내지 못했다.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사방으로 불꽃이 튀어 올랐고, 그림자에 붉은 자국들이 새겨졌다.

후작은 흉악하게 얼굴을 구기며 뒤로 물러섰다.

- 후작은 검사가 아니니까 반드시 틈이 생길 거예요.

“빌어먹을!”

- 분명히 오래 버티진 못해요. 얼마 지나지 않아서…….

휘익.

갑자기 후작의 몸이 뒤로 쓰러졌다.

무너진 복도의 잔해를 밟은 탓이었다. 그림자는 라샤드를 막고 있었기에, 후작은 결국 볼썽사납게 나자빠지고 말았다.

그림자가 라샤드에게서 물러선 것도 바로 그때였다.

“하아…… 하…….”

“자, 잠깐만!”

후작은 그 몇 분 사이에 몇 년을 겪은 듯 늙은 얼굴이었다. 그가 급히 소리쳤다.

“내, 내 말을 좀 들어 보게, 칼만 공작. 마력은…… 마력은 그냥 스키아가 협박해서 새긴 거야!”

“…….”

“세계를 구하고자 하는 내 신념은 굳건하네! 마법이 없어진다고! 자네의 그 붉은 오러도 더는 쓰지 못할 수 있단 말일세!”

라샤드는 거칠게 숨을 골랐다. 몸을 움직이지 않아서일까.

후작의 말이 이제는 제대로 들렸다.

“내, 내 말을 이해하겠는가……?”

그러나 세이나의 목소리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 마정석이 있는 곳은 후작의 다리.

“세계를 지키기 위해서는 마족을…….”

라샤드는 망설임 없이 후작의 허벅지를 꿰뚫었다.

“컥!”

세이나가 속삭였다.

- 그가 평소에 잘 움직이지 못하는 바로 그쪽이에요.

“커…… 커흑! 쿨럭!”

돌연 후작이 피를 토해 냈다. 마치 심장을 찔린 듯한 반응이었다.

라샤드는 그제야 자신의 등 뒤에서 솟아오른 검은 물체를 발견할 수 있었다.

‘대화를 이어 가면서 뒤에서 몰래 찌를 심산이었나.’

후작이 한 번 더 피를 뱉자 그것은 곧바로 사그라들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남은 것은 달빛이 남긴 옅은 그림자와.

“유클레스 후작.”

두 사람뿐이었다.

라샤드의 검이 후작의 목을 겨누었다.

최후를 앞둔 남자의 얼굴은 비참했다. 옅은 숨소리만 겨우 이어지고 있을 뿐. 이미 죽음을 맞이한 듯한 표정에 라샤드는 미간을 좁혔다.

“너는…….”

그때, 다시금 커다란 굉음이 울려 퍼졌다.

무심코 고개를 든 라샤드는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황성의 윗부분이 사라졌다.

뒤이어 그 자리에 또 다른 폭발이 일어나자, 라샤드는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쾅! 쾅! 요란한 소리가 귓가를 뜨겁게 울렸다.

정원을 삼킨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커다란 검은 연기가 밤하늘 위로 퍼져 나갔다.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 막히는 광경이었다.

라샤드는 절망스러운 기분에 휩싸였다.

“세이나.”

* * *

세이나는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

쏟아지는 거센 광풍은 그녀를 뒤흔들 만한 것이었다. 뒤이어 끔찍한 굉음이 들렸을 때, 세이나는 이겨 내지 못하고 한쪽 무릎을 꿇어 버렸다.

“하아……. 하…….”

방금 전.

치열한 공방을 이어 나가던 중, 갑자기 스키아가 물러나 거리를 벌렸다.

좋지 않은 징조였다. 세이나가 원하는 것은 장기전.

라샤드가 후작에게 대처할 때 쓴 방법처럼, 스키아의 체력과 인내심을 점점 소모하게 할 작정이었다.

무슨 속셈인가 싶어 한쪽 눈을 찌푸리는데, 돌연 거센 바람이 일었다.

마치 스키아의 손끝에 태풍이 생겨난 듯한 느낌이었다. 긴장된 공기 속에서 탁, 탁, 정전기가 일어나는 소리도 들렸다. 마력의 흐름이 향하는 곳은…….

홀의 정중앙.

스키아의 계획을 알아차리자마자 세이나는 바로 몸을 던졌다.

이를 악물고 겨우 아티팩트를 발동한 그때, 불길한 기운을 담은 거대한 돌풍이 그녀에게로 달려들었다.

그동안의 전투 경험이 없었다면 그대로 밀려 넘어졌을 것이다.

세이나는 이를 악물고 아티팩트가 펼친 결계를 방패 삼아 소용돌이를 튕겨 냈다. 정신을 차렸을 땐 홀의 천장이 그대로 찢겨 날아간 뒤였다.

“하아……. 후우…….”

반면 스키아는 멀쩡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그녀가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후우…….”

거친 숨을 고르며 무심코 바닥을 짚자, 전기가 오른 듯 찌릿한 감각이 스쳤다. 흘깃 본 팔찌는 무참하게 박살이 나 있었다.

“이제 몇 개나 남았지?”

오웬은 평생 찾아낸 거의 모든 아티팩트를 세이나에게 주었다. 바로 그것들 덕분에, 지금까지 마족을 상대로 홀로 버틸 수 있었다.

스키아가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거의 다 썼을 텐데.”

‘젠장.’

세이나는 쓴웃음조차 지을 수 없었다.

방금 전 그 어마어마한 돌풍을 막아 내느라 동시에 3개의 아티팩트를 망가뜨려 버렸다.

교전을 치르는 동안 몇 개를 더 부숴 먹었으니, 스키아의 추측은 얼추 정답에 가까웠다.

‘장기전은 잘못된 선택이었나.’

스산한 기운이 그녀의 주위를 맴돌았다. 충돌하는 바람이 낳은 소리는 보이지 않는 짐승이 포효하는 것처럼 들렸다.

이내 쌀쌀한 밤공기가 목덜미를 스치자 오싹 소름이 끼쳤다. 세이나는 그제야 스키아의 손끝에 맺힌 핏방울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언제…….”

“으음.”

급히 뺨을 만지니 작은 상처가 느껴졌다.

대체 언제. 황망한 심정으로 시선을 보냈지만, 스키아는 제 손끝을 가볍게 핥을 뿐이었다.

‘젠장.’

검은 그림자의 영역은 어느새 처음보다 더 넓어져 있었다.

대체 언제부터. 세이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자신이 완벽하게 모든 공격을 피했으리라 자만한 건 아니었다. 옷이 너덜너덜하게 변했고, 통증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나름대로 잘 대처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사이 벌써 피를 훔쳤으리라고는…….

“역시 네가 틀림없어.”

그리고 다시 공격이 시작되었다.

세이나는 가까스로 검을 들었으나 막아 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마법을 받아 낸 이후부터 팔목에 감각이 없었다. 날카롭게 변한 그림자와 부딪힐 때마다 그녀의 검이 파편을 날리며 부서졌다.

마력의 흐름을 놓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알아채는 것보다.

마법이 날아오는 속도가 더 빨랐다.

“윽!”

정신을 차렸을 땐 황좌 바로 옆이었다.

분명히 내가 서 있던 곳은 저쪽인데. 아마 스키아의 힘을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밀려 날아온 듯했다.

온몸이 부서질 것처럼 아프고, 숨조차 쉬기 어려웠다. 세이나는 부서진 황좌를 붙잡고 겨우 몸을 일으켰다.

“으윽……! 콜록! 콜록!”

겨우 눈꺼풀을 열자 스키아가 보였다. 그 어느 때보다 살벌한 기운을 풍기며, 허공에 떠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늘로 올린 손끝 주변에는 부서진 건물의 잔해들이 중력을 잃은 듯 떠 있었다. 스키아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고.

“남은 건.”

세이나가 급히 손을 뻗은 그때.

“마지막 하나.”

거대한 석벽이 세이나를 향해 돌진했다.

쿵!

목걸이에서 피어오른 찬란한 빛이 세이나의 몸을 휘감았다.

곧바로 그녀의 앞에 등장한 반투명한 결계 사이로, 세이나는 부서진 여인을 발견했다. 천장화에 있던 여신이었다.

쿵!

그리고 바로 그 뒤에, 새하얀 돌기둥이 겹쳐졌다. 여신의 두 눈이 한층 더 가까워진 순간, 땅이 요란한 진동을 시작했다. 세이나는 숨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쾅!

그리고 다음 순간.

쾅!

홀의 바닥이 무너졌다.

쿠구구궁!

추락하는 와중에도 정신을 잃지 않은 것은 오로지 소리 덕분이었다. 부서진 석벽들이 결계에 부딪히며 괴이한 진동을 일으켰다.

이윽고 무릎이 바닥에 닿자 세이나는 급히 몸을 웅크렸다. 유성우 속에 있는 작은 벌레라도 된 기분이었다.

쾅! 쾅!

정신을 차린 것은 그로부터 꽤 시간이 흐른 후.

“허억……. 헉…….”

고통 속에서 몸을 일으킨 세이나는 제 주변에 흩뿌려진 건물의 잔해들을 볼 수 있었다. 그 위에는 별을 쏟아 낸 듯 빛 무리가 반짝이고 있었다.

세이나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남은 아티팩트는 없다. 이제 그렇다면…….

‘어디지?’

그 순간, 날카로운 통증이 그녀의 목을 파고들었다.

양쪽 어깨가 무너질 것 같은 아픔을 느끼며 세이나는 발버둥 쳤다. 그러나 어깨를 붙잡은 스키아의 손길은 더욱더 거세어지기만 했다.

목을 물고 있는 치아는 짐승의 그것만큼이나 단단했다. 스키아의 입술 사이로 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크윽!”

모든 것이 세이나가 예상한 그대로였다.

* * *

스키아는 거침없이 세이나의 피를 빨아들였다.

고대하던 식사는 그녀의 상상보다 훨씬 감미로웠다. 세이나의 저항도 점점 사그라들었기에, 스키아는 더욱 머리를 처박고 피를 흡수했다.

‘멍청한 계집애.’

몸을 속박하는 기운이 하나둘씩 걷어지는 느낌은 황홀하기까지 했다. 샘솟는 활기를 느끼며 스키아는 다시금 세이나의 목을 깨물었다. 그러다 돌연…….

‘뭐지?’

모든 것이 멈추었다.

다시 팔다리가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스키아가 무릎을 꿇자 그 손길에 이끌려 세이나의 몸도 앞으로 쓰러졌다.

스키아가 그 남자를 발견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루드……리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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