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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 여주의 옆집에 살고 있습니다-175화 (175/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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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찌의 보석이 깨졌을 때, 오웬은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미치겠네.’

큰 덩치처럼 움직임이 굼떴던 이전의 괴물과 달리, 눈앞의 사내는 숨 쉴 틈도 없이 몰아치고 있었다.

어느새 칼날처럼 변한 그것의 팔이 빠르게 찔러 들어왔고.

“큭!”

물러나는 오웬의 얼굴에서도 어느덧 여유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벌써 이렇듯 간발의 차이를 두고 물러선 것이 몇 번인지.

오웬은 이를 악물고 다시금 팔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러나 부서진 마정석이 빠르게 점멸한 그 순간, 또다시 날카로운 칼끝이 그의 코앞까지 파고들었다.

“쳇!”

오웬은 거듭 혀를 차고 터너에게서 빠르게 거리를 벌렸다.

이어서 터너가 도약하자 오웬은 검을 뽑을 수밖에 없었다.

칼날이 서로 맞부딪히며 기이한 소음을 자아냈다.

“으윽!”

예상했던 대로 어마어마한 괴력이 쏟아졌다. 코앞까지 닥쳐온 난폭한 기운에 오웬은 등골을 타고 올라오는 소름을 느꼈다.

가까이서 본 터너는 여전히 눈동자가 없었다.

새까맣게 변한 그의 목 위로 드러난 굵은 핏줄을 보고 오웬은 인상을 구길 수밖에 없었다. 터질 듯이 팽창한 그의 팔 근육은 징그럽게 꿈틀대고 있었다.

‘이 녀석도 스키아의 마력을 받았군.’

눈앞의 사내는 더는 사람이라 말하기 어려웠다. 새어 나오는 목소리는 짐승과 닮아 있었다.

“크르릉……!”

‘그냥 묶어 두기만 할 걸 그랬나.’

터너의 의식이 부서진 자리는 이제 스키아의 마력이 차지하고 있었다.

엘렌과 비슷한 양상. 차이점이라곤 그쪽은 생각이라도 있다면, 여기는 스키아가 심어 둔 명령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 정도.

‘그래도 결국 빠져나왔겠지.’

이성을 잃은 괴물에게 설득이나 조롱이 통할 리도 없다. 눈앞의 상대는 그저 파괴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육체파.

오웬이 가장 까다로워하는 상대였다.

“젠장.”

그렇게 뱉은 순간, 오웬의 검이 박살 났다.

그가 미처 물러서기도 전에 강한 충격이 몸을 강타했다.

쾅!

겨우 눈을 떴을 땐 황성의 벽에 박혀 있었다.

소리 없는 중얼거림과 함께 오웬은 볼품없이 땅으로 추락했다.

‘몸이…… 안 움직여.’

흐릿한 시야 속 보이는 괴물은 아직 쌩쌩하기만 했다. 승리에 도취된 듯 짐승처럼 괴상한 포효를 내지르기도 했다. 저걸 쓰러트릴 수 있는 기회는…….

‘단 한 번.’

놈은 이제 자신을 죽이러 올 것이다.

다가오는 경로를 예상할 수 있으니, 능력을 발휘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러나.

‘다시는 되돌아오지 못하겠지.’

이전에 만났던 그 괴물의 의식은 지옥 그 자체였다. 잠깐 닿은 것만으로도 오웬 자신의 정신이 붕괴되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아마 저놈도 다르지 않으리라.

‘그럼 나도 괴물이 되려나.’

끔찍한 결과가 예상되지만, 이대로 죽는 것보단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마족의 마력을 이겨 내리라 낙관하는 것이 아니었다.

……어차피 반은 마물이니까. 저렇게 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하나 다행인 사실은.

‘내가 저놈과 달리 수련을 게을리했다는 거겠지.’

마족의 마력으로 재구성된다고 해도, 그 기반은 인간의 육체였다. 꾸준히 단련한 검사와, 도망이 주특기인 헌터.

후자가 상대하기 더 좋은 적임은 분명했다.

오웬은 흐릿한 시야 속에서 다가오는 괴물을 바라보았다. 예상한 경로. 크게 빠르지 않은 걸음걸이.

능력이 빗나갈 가능성은 없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것은 세이나.

‘너무 슬퍼하진 않았으면 좋겠는데…….’

변해 버린 자신을 보고 머뭇거릴 그녀가 눈에 선했다. 근래 가까이하지 않았던 종이와 펜이 갑자기 간절해지기도 했다.

그렇게 긴 글을 남길 생각도 없었다. 미련을 두지 않도록, 가능하면 짧게.

망설임 없이 죽여도 된다고.

그동안 고마웠다고.

……그렇게 말해 주고 싶었는데.

고통을 참으며, 오웬은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초점을 맞추자 여러 개로 보였던 괴물의 형상이 겨우 하나가 되었다. 거리는 열…… 아니, 이제 아홉 걸음 앞.

시시각각 가까워지는 그를 향해 오웬이 팔을 들었다. 이제 이걸로…….

‘마지막.’

그리고 다음 순간.

돌연 괴물이 뒤로 넘어졌다.

“어?”

쿵!

오웬은 제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의기양양하게 다가오던 괴물이 사라지고, 그가 있던 자리에 불쑥 낯선 형체가 솟아올랐다.

아니, 괴물에게 가려져서 그동안 보지 못했다고 하는 쪽이 맞을 것이다.

유난히도 육중해 보이는 대도가 가볍게 허공을 가르자 괴물의 피가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눈에 익은 무기였다.

오웬이 알기로 저런 무지막지한 걸 쓰는 놈은.

“셀론…… 프라벨?”

단 한 사람밖에 없다.

“네가…… 왜?”

“어디 있어.”

단숨에 다가온 셀론이 눈을 부라리며 오웬을 노려보았다.

“뭐, 뭐가?”

“그 자식 말이야!”

공기가 떨릴 정도로 우렁찬 외침이었으나, 오웬은 아직도 그를 만난 것이 제대로 실감이 되지 않았다.

갈색 곱슬머리. 녹색 눈. 아무리 뜯어봐도 셀론이 틀림없긴 한데…….

“……뭐?”

“빌어먹을 놈!”

평소와 너무 다른 모습에 계속 현실감이 없었다. 셀론은 또라이가 맞다. 하지만 저렇게 화를 내는 일은 극히 드물다.

그가 화를 낸다면 원인은 아마도.

“디온?”

“그래! 그 자식!”

여기서 걔 이야기가 갑자기 왜 나오지?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어!”

“뭐, 뭘?”

“사기꾼이었다고!”

셀론은 이제 오웬의 멱살이라도 잡아당길 듯한 표정이었다. 만신창이가 된 사람을 상대하기에는 적절한 태도가 아니었지만, 그는 지금 제 화를 주체하기도 어려워 보였다.

“그 여자, 모든 것이 거짓말이었어! 귀족도 아니고, 심지어 남편도 따로 있더군! 내게 빚을 다 떠넘기고 도망치려는 작정이었지!”

“…….”

“난 바보같이…… 젠장!”

“…….”

“디온 어디 있어? 저쪽이야?!”

“어, 어…….”

셀론이 성문으로 달려간 그때, 갑자기 거센 바람이 오웬의 얼굴을 스쳤다.

겨우 다시 눈을 뜨자 어느덧 검은 괴물이 일어서 셀론의 앞을 가로막은 것이 보였다. 어깨에 대도를 걸친 채, 셀론이 오웬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얘는 뭐야?”

“그냥 죽이면 돼.”

오웬이 미처 입을 떼기도 전에 또 다른 기척이 다가왔다.

새하얀 고양이가 가늘게 눈을 접으며 말했다.

“저렇게 된 이상 되돌릴 수 없어.”

그리고 셀론의 대도가 난폭한 기세로 괴물에게 날아들었다.

볼 때마다 경악스러운 전투 방식이었으나, 오웬은 그를 더 감상할 여유가 없었다. 통증을 겨우 참아 내며 상체를 일으키자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한심하네. 벌써 누워 있을 줄은.”

레블로테는 그의 바로 옆에서 비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이내 다른 기척도 다가왔다.

“그러게 말이다. 내가 저리 약하게 키우진 않았는데.”

“스승님…….”

“얼른 일어나지 못하겠느냐?”

오랜만에 만난 스승은 예전보다 더 늙어 있었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얼굴. 검은색의 로브. 그리고 자신과 닮은 붉은 머리칼을 보며, 오웬은 작게 미소 지었다.

“……못 일어나겠어요.”

“쯧쯧.”

스승은 혀를 차면서도 오웬의 몸을 일으켜 세워 주었다. 스승에게 기대어 겨우 두 발로 서자, 다시 셀론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의 커다란 대도가 괴물의 팔을 잘라 냈고.

‘와.’

이내 다리에도 큰 상처를 남겼다. 쿵! 괴물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허무해.’

“내가 잘 고른 모양이군.”

스승의 말대로, 셀론은 괴물을 상대로도 전혀 밀리지 않았다. 이쪽도 또 다른 괴물이라고 해도 좋지 않을까.

저런 대도를 마구잡이로 휘두르다니. 셀론 프라벨이 여기에 온 것도 몹시 의외라고, 오웬은 생각했다.

……아마 세이나도 놀라지 않을까.

- 라프만 일족을 데려와 줘.

그녀가 레블로테에게 말해 준 계획에도 셀론은 포함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 우리를 바로 수도까지 데려온 마법으로, 일족을 찾아가서 가장 강한 힘을 가진 사람을 수도로 모셔 와야 해. 오웬, 일족이 어디에 있는지 레블로테에게 말해 줄 수 있죠?

- 일족은 왜?

- 우리만으로는 부족해요.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에요.

세이나는 차분한 어조로 일행에게 설명했다.

- 내 피를 얻지 못했으니 스키아가 아직 완전히 힘을 찾았다고 보기 어려워요. 많은 사람을 세뇌한 만큼, 분명히 파고들 틈도 많이 있겠지.

- 그럼 내가…….

- 오웬은 능력을 많이 쓰면 안 돼요. 레블로테, 수도에서 가장 강한 사람의 세뇌를 풀어 줘. 우리에게 우호적이고, 도와줄 만한 사람으로 부탁해.

‘그게 셀론이란 말이지.’

“이 자식! 가만 안 두겠어!”

‘우호……적인 거 같진 않지만, 어쨌든.’

일은 계획대로 잘 풀리는 것 같았다. 오웬이 안도의 한숨을 내쉰 그때, 레블로테가 그를 돌아보았다.

“세이나는?”

다소 불안함이 어린 눈빛이었다.

* * *

세이나가 알려 준 대로 후작은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한심하기 짝이 없군.”

그의 발치에서 꿈틀대는 검은 그림자를 보며 라샤드는 이를 악물었다.

역시 복도로 데려온 것이 패착이었을까. 공간이 좁아서 자유롭게 움직이기가 어렵다.

“고작 그런 실력이었던가?.”

아니, 그래도 복도로 데려왔어야 했다. 더는 사람들이 다치는 것을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애초에 이 일에 뛰어든 것도 혹시 모를 희생을 막기 위해서가 아니던가. 비록 자신이 여기서 죽는다고 하더라도.

후회할 생각 따위, 조금도 없었다.

“도망치는 게냐!”

라샤드는 후작에게서 등을 돌리고 달려 나갔다.

후작이 마법을 사용했는지 요란한 충격음과 함께 복도 한쪽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쾅! 쾅! 쾅!

후두둑 소리를 내며 부서진 알갱이들이 그의 머리를 때렸다. 라샤드에게 큰 상처가 있었다면 운석처럼 쏟아져 내려오는 대리석들을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겨우 고개를 든 그의 앞에 큰 창문이 보였다. 잠시 멈춰 서 걸개를 열 정신은 없었다.

쨍그랑!

라샤드는 몸을 둥글게 말고 땅을 굴렀다. 멈추자마자 다시 쿵!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창문이 있던 자리에 커다란 구멍이 생겨났다. 그 틈으로 걸어 나오며 후작이 사악하게 웃었다.

“이제 끝인가?”

“허억……. 헉…….”

후작이 무어라 더 떠들어 댔지만,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너무 열심히 뛰어다닌 탓인지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대는 소리만 요란하게 귓가를 때렸다.

검을 쥔 오른손이 조금씩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검집에 넣고 달아났다면 더 빨랐겠지만.

‘저자가 날 따라오진 않았겠지.’

싸울 의지가 없는 상대를 가지고 노는 것은 몹시 지루한 일이다. 실제로 후작은 지금 무척이나 재미있다는 표정이었다.

건방진 애송이가 저를 두려워해서 달려들지 못하리라 생각하고 있을 테다.

계획했던 대로.

- 후작은 원래 마법사가 아니었어요.

먹먹해진 귓가에 세이나의 목소리가 스쳤다.

- 검사도 아니죠. 싸움에 익숙하지 않아요. 그리 인내심이 강한 편도 아니라서 장기전으로 끌고 갈수록 조급해질 거예요.

그녀가 했던 말을 되새기며 라샤드는 검을 바로 쥐었다.

- 하지만 공작님은 다르죠.

참고 인내하는 것.

‘제대로 봤어.’

그것은 라샤드가 자부하는 자신의 장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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