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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 여주의 옆집에 살고 있습니다-174화 (174/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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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터너는 맹렬한 기세로 검을 휘둘렀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오웬이 그를 향해 손을 뻗는 것이 더 늦어졌다면 필시 그랬을 것이다.

    오웬과 정면으로 눈이 마주치자마자 터너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강한 바람이 이마를 때리는 것과 동시에 어디론가 의식이 이끌려 가는 느낌을 받았다.

    무례한 침입자는 이내 터너를 정신적으로 뒤흔들었다. 터너는 방어를 위해 자신의 존재를 되짚었다.

    터너. 그는 누구인가. 그는 수도에서도 아주 먼 시골에서 태어났다. 인자한 아버지와 자애로운 어머니의 아래에서…….

    “미안한데.”

    천방지축인 형제들과…….

    “안 궁금해.”

    쿵! 터너의 몸이 쓰러졌다.

    땅바닥에 엎어진 남자를 보며 오웬은 이마의 땀을 훔쳐 내었다.

    “이제 진짜 끝이겠지?”

    사고를 완전히 파괴하진 않았지만, 저 정도 충격이라면 바로 일어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오웬은 한숨을 내쉬었다.

    ‘적이라지만, 사람의 정신을 부수는 건 좀 양심에 찔린단 말이야…….’

    이럴 때마다 자신이 마족의 힘을 받은 혈통이라는 것을 더 여실히 느끼게 된다.

    사실 그 행위만 두고 본다면 세뇌를 일삼는 마족과 다를 게 뭐가 있단 말인가.

    ‘아니야. 전혀 다르다고.’

    이번 일만 끝나면 마족의 능력을 거두어 달라 세이나에게 부탁할 생각이었다. 그것이 일족의 오랜 소원이라 믿고 있었다. 그걸 위해서 성국의 의뢰도 수락했고.

    ……이 힘이 없어진 이후에도 S급 헌터의 자리를 지킬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놈은 잘 갔겠지?’

    팔찌의 마정석을 점검하며 떠오른 인물은, 뜻밖에도 그 얄미운 사내였다.

    디온 프라벨은 세이나의 말에 매우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그는 세이나가 계획을 읊는 와중에도 계속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일부러 거리를 두고 다가오지도 않았다.

    ‘짜증 날 정도로 시비를 걸더니.’

    조금 안쓰럽게 보이기도 했다.

    ‘젠장.’

    아주 뜻밖에도.

    ‘모든 것이 끝나면 다시 제대로 물어봐야겠어.’

    계획의 마지막 단계를 생각하다 보니 다시 미간이 좁아졌다.

    세이나는 각자에게 역할을 주었다. 이제 오웬이 할 일은 돌아가서 라샤드를 도와주는 것.

    그리고 ‘그 사람’이 오기를 기다리면 된다. 내키지는 않지만.

    ‘성국에 도움을 요청할 걸 그랬나. 아니지, 성국은 절차가 까다로워. 그리고 또 배신당하면 진짜 열받을 거라고. 하, 그런데 다시 생각해도 그쪽은 좀…….’

    눈살을 찌푸리며 뒷머리를 긁던 그때.

    오웬의 시야에 이상한 것이 걸렸다.

    쓰러진 남자가 사지를 벌벌 떨면서 일어난 것이다.

    ‘타로였던가? 아무튼.’

    제대로 떠오르지도 않는 이름을 지워 버리며 오웬은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런데, 그 상대의 상태가.

    많이 이상했다.

    “……뭐야?”

    오웬은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남자의 피부는 어느새 새까맣게 변해 있었다. 그럭저럭 순박해 보이던 눈은 새하얗게 물들었으며, 어깨는 미친 듯이 떨리고 있었다.

    “으……. 으으…….”

    고통에 찬 신음을 흘리는 입에는 멧돼지 같은 치아가 솟아나 있다. 몸은 점점 더 비대해져서, 오웬이 올려다봐야 할 정도였다. 아무리 뜯어봐도.

    “엥?”

    그때의 그 괴물과 비슷한 형상이었다.

    “설마 너도?”

    오웬이 탄식한 순간, 검은 괴물이 그에게로 달려들었다.

    쾅!

    * * *

    라샤드는 유클레스 후작을 노려보며 검을 바로 잡았다.

    ‘유클레스 후작.’

    고대했던 독대의 순간은 상상했던 것보다 격양되진 않았다. 오히려 차분히 가라앉는 제 심장의 고동을 느끼며 라샤드가 낮게 말했다.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다.”

    “…….”

    “왜 마족을 부활시키려고 한 거지?”

    경계를 늦추진 않았다. 아직 멀지 않은 곳에 쓰러진 귀족들이 많았다.

    바로 공격할 것처럼 노려보며 후작을 복도 쪽으로 등이 향하도록 밀어붙이고는 있지만, 언제 다른 이들이 노려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후작의 눈길도 계속 라샤드의 뒤로 향해 있었다. 라샤드는 그들을 지키듯 후작의 시선을 가로막았다.

    유클레스 후작이 실소를 터트렸다.

    “그래, 네놈도 이유를 모르는 채로 죽긴 억울하겠지.”

    이름 모를 귀족 영애를 겨눴던 단검이 후작의 품 안으로 사라졌다. 뒤이어 제 외투를 정리하며 그는 여유롭게 말했다.

    “이 모든 것은 세계를 위해서다.”

    “……헛소리.”

    “진실이다.”

    너무 단호한 목소리에 라샤드의 눈빛이 한층 더 살벌해졌다. 그것이 가소롭다는 듯 유클레스 후작이 웃으며 말했다.

    “칼만 공작. 수도의 결계가 사라진 이유를 알고 있나?”

    안타깝게도 바로 답하기는 어려웠다. 침묵을 지키는 라샤드를 향해 후작이 말했다.

    “수도의 결계는 대마법사가 완성했지. 결계식의 구조는 오직 그의 가문에만 전해지고, 후손들은 몇백 년이 지난 지금도 황실 마법사로서 결계를 지킨다.”

    “…….”

    “대마법사가 만든 5개의 아티팩트가 결계를 지탱하고 있지. 그 아티팩들은 마정석을 동력으로 작동한다.”

    “…….”

    “일반적으로는 구하기 힘든, 아주 거대한 마정석이 필요하지. 실제로는 사람보다 크다더군.”

    그런 것, 라샤드는 한 번도 직접 본 적이 없었다.

    후작은 라샤드의 의심 어린 눈초리 따위는 신경 쓰이지도 않는다는 듯 말을 이었다.

    “그런 마정석은 보통, 금지 구역에서 발견할 수 있다. 마기가 응집되는 중심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지곤 하지. 황실 마법사들은 그 중심을 ‘문’이라고 하더군.”

    문. 이전에 들어 본 바 있었던 개념에 라샤드의 손끝이 살짝 움직였다.

    마족이 이 세계로 향할 때 열고 들어왔다던…….

    “다른 차원으로 향하는 통로라고도 할 수 있다.”

    “…….”

    “마족은 그것을 통해 이 세계로 발을 들였다. 마기의 흐름이 시작된 것도 그 지점이지. 마물의 탄생 역시 바로 마기 때문이라는 건, 너도 알고 있을 테고.”

    “……하고 싶은 말이 뭐지?”

    “몇 년 전, 나는 우연히 금지 구역에 발을 들였다. 그리고 깨달았다.”

    후작은 눈을 가늘게 떴다.

    “문이 완전히 닫혔다는 것을.”

    “무슨……?”

    “덕분에 아티팩트를 유지할 만큼 큰 마정석도 이제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교체할 동력이 없으니 점점 결계도 약해질 수밖에.”

    결계에 대한 의문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라샤드는 찌푸린 미간을 좀처럼 풀 수 없었다.

    “더는 이 세계로 마기도 유입되지 않는다. 흐름이 사라졌으니,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사라지겠지.”

    문은 마기를 유입하는 통로.

    그것이 닫혔다면, 앞으로 마물이 사라지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은가.

    “잘된 게 아닌가? 하는 표정이군.”

    라샤드의 속내를 꿰뚫어 봤는지, 후작이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이내 소름 끼치는 눈빛으로 그는 라샤드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그럴 리가. 전혀. 이건 절대로 잘되었다고 할 수 없다, 칼만 공작. 아직도 모르겠나?”

    “뭘 모르는 건 너겠지. 마기가 사라지면 마물도 자연스럽게 사라지게 되는 거야. 마물이 사라지면 평화가 찾아온다. 당연히…….”

    “마법은!”

    복도의 벽을 타고 후작의 목소리가 웅웅 울렸다. 후작은 다시금 목소리를 높였다.

    “마법은, 어떻게 될 것 같나?”

    마법은 마력에 적응한 인간이 펼치는 기적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그 마력은, 마기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사람이 그 힘을 받아들였을 때 마법사가 된다.

    애초에 이 세계에 속한 것이 아니다.

    “오러는? 성력은?”

    마력에 노출된 몸을 보호하기 위해 내재한 힘이 변형된 것이 오러. 보호를 넘어서, 주변의 마력을 정화하는 또 다른 힘을 성력이라 불렀다.

    “마정석은?”

    모두 마기가 없으면 처음부터 나타날 수 없는 것들이었다.

    “무려 천 년이다. 천 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우리는 마력을 기반으로 발전해 왔어. 그 모든 것이 갑자기 사라지는데!”

    후작의 목소리가 다시 복도를 타고 울려 퍼졌다. 열띤 얼굴을 한 남자는 격한 분노를 표출하고 있었다.

    “어떻게 잘되었다고 할 수만 있겠나?”

    “…….”

    “모든 것이……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가는 거야! 마법도, 성력도, 오러도 없이, 원시인처럼! 우리가 이룩한 모든 문명을 잃어버리고, 처음으로 돌아간다고!”

    “…….”

    “나는 두렵지 않을 수 없었네, 칼만 공작.”

    라샤드를 노려보는 눈동자는 불길을 담은 듯했다.

    “이 세계가 어떤 혼란에 빠질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어.”

    “……그래서 마족을 깨웠나?”

    “마족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마기를 부른다. 닫힌 문을 열 수도 있지.”

    후작은 양손을 펼쳐 보였다.

    “이 세계에는 마력이 필요하다.”

    믿음을 전파하는 교주처럼.

    “나는 세계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마족을 부활시킬 것이다.”

    후작의 뜨거운 눈빛이 하늘로 향했다. 홀의 천장에 그려져 있는 여신의 형상이 바로 위에서 후작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찌 이것을 대의라 하지 않을 수 있겠나?”

    “허튼소리!”

    호통하듯 소리치고, 라샤드는 짧게 숨을 가다듬었다. 검을 쥔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간 순간이었다.

    “네 실험으로 인해 무고한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부끄럽지도 않은가?”

    “전혀.”

    후작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인류의 미래를 위한 고귀한 희생이다.”

    라샤드는 말없이 으드득 이를 갈았다. 후작은 여신에게 눈길을 고정한 채 말을 이었다.

    “그리고 엘렌은 내 손으로 만든 진정한 ‘성녀’이지.”

    “역겹군.”

    그리 뱉자, 드디어 후작과 눈이 마주쳤다.

    라샤드는 치미는 구역질을 억누르며 말했다.

    “그 모든 행동이 대의를 위한 것이라면, 네게서 느껴지는 수상한 마력은 무엇이지?”

    그저 착각은 아니었다. 맬빈은 분명, 후작이 마법을 쓸 수 있다고 말했다.

    과거에는 쓰지 못했는데, 갑자기 그렇게 변했다고.

    “너의 그 마법 역시, 인류를 위한 희생인가?”

    후작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라샤드의 비웃음이 더욱더 짙어졌다.

    “헛소리 마, 유클레스 후작. 너는 그냥 힘을 추구하는 흔한 야심가에 지나지 않아. 세계를 위해서라고 자신을 정당화하는 비겁자이기도 하지. 차라리 욕심이 났다고 하지 그러나.”

    “뭐라고?”

    “금지 구역에 발을 들인 이유.”

    라샤드의 검은 여전히 후작을 향해 있었다. 그 끝을 주시하는 라샤드의 눈매가 더욱 날카로워졌다.

    “마족을 만나 ‘계약’할 속셈이었겠지.”

    “…….”

    “네 외조부에 대한 기록을 찾아봤다.”

    한때 세르벤스 숲의 주인이었던 귀족. 반역자로 사라진 남자.

    세이나의 부탁으로 뒤쫓은 그에게는 다소 놀라운 비밀이 숨겨져 있었다.

    “먼 옛날 제국이 복속시킨 왕국의 후손이라고 되어 있더군.”

    유클레스 후작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라샤드는 자세를 고쳐 잡으며 냉엄하게 말했다.

    상대의 표정이 한층 험악해진 것은 그때였다.

    “사라진 왕국을 재건이라도 할 셈인가? 반역자.”

    “……네놈과는 예전부터 말이 통하지 않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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