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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 여주의 옆집에 살고 있습니다-173화 (173/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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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이나 로힐은 듣던 것처럼 사나운 분위기의 여자였다.

    밤하늘처럼 검은 머리칼에 험상궂은 표정. 날카로운 눈매 속 눈동자는 이글거리는 불씨를 지핀듯했다.

    그런 불경한 여자에게도, 스키아는 인자한 웃음을 보내 주고 있었다. 따뜻한 목소리는 진심으로 감격한 듯했다.

    “나를 만나러 와 줬구나. 기뻐.”

    좌중들이 하나둘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미셸은 그 흐름에 따라 손을 움직였다. 당연히 와야지! 제깟 게 뭐 그리 대단하다고!

    ‘초대해 주셔서 감사하다 머리를 조아려도 부족할 것을!’

    그러나 세이나 로힐은 그러지 않았다. 대체 무슨 생각 중인지, 입을 꾹 닫고 계속 위만 노려보고 있었다.

    “표정을 보니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은가 본데. 안타깝지만 네가 여기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단다.”

    스키아는 진심으로 세이나가 딱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녀를 따라 손님들이 모두 울상을 지었다.

    “네가 날 조금이라도 건들면 여기, 네 친구들이 널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

    “그러니 얌전히 내 먹이가 되도록 해. 그게 네 인생에서도 가장 의미 있는 일이 될 테니.”

    “…….”

    “친구들도 모두 널 지켜봐 주기로 했어. 네가 내 앞에 무릎 꿇고, 이 칼에 찔려…….”

    스키아의 긴 손가락이 단검의 칼날을 천천히 쓸어 내렸다.

    “최후의 한 방울을 흘리는 순간까지.”

    그리고 그때까지도, 세이나는 한마디도 말이 없었다.

    긴 정적 후, 기다리다 못한 스키아가 짧게 뱉었다.

    “세이나 로힐.”

    “아, 끝났어?”

    세이나는 막 잠에서 깨어난 듯한 반응이었다. 미셸은 미간을 좁혔다.

    이상한 여자. 눈 뜨고 자는 습관이라도 있나?

    “너무 지루해서 말이지. 잠시 졸 뻔했네. 미안. 내가 매너가 좀 더러운 편이라.”

    과연 그리 보이긴 했다.

    서 있는 자세도 삐딱하고, 팔짱을 끼고 있는 것도 건방진 인상을 주었다.

    “그리고 그동안 생각해 봤는데…….”

    잠시 아래로 향했던 시선이 다시 위로 향했다. 스키아를 치켜뜬 눈으로 바라보며, 세이나 로힐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 말했다.

    “역시 안 할래.”

    다시 홀이 무거운 정적 속으로 가라앉았다.

    손님들은 제각기 다양한 표정으로 충격을 그대로 표현했다.

    세이나의 오랜 친구로 알려진 청년, 로벤은 새어 나오는 소리를 막으려 입까지 틀어막고 있었다.

    “희생 같은 고리타분한 거, 나랑 어울리지도 않고. 아, 말이 나와서 말인데. 그 옷도 너무 촌스럽더라. 그래, 뭐, 이해해 줄게. 네 나이에 요즘 유행에 맞추긴 힘들겠다, 음.”

    “뭐?”

    “너무 자존심 상해하지 마. 늙으면 그럴 수도 있지.”

    쾅!

    격노한 스키아가 황좌의 손잡이를 세게 내리쳤다.

    손님들 사이로 또 다른 경악이 퍼졌다. 스키아의 이마에 굵은 핏줄이 튀어 올랐다. 사납게 구겨진 얼굴은 그 분노를 그대로 나타내고 있었다.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건방지게 기어오르는구나.”

    미셸도 경악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미친 여자!’

    어떻게 스키아 님의 부탁을 거절한단 말인가! 그것도 저리도 무례하게!

    세이나 로힐은 사람들의 반응 따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녀가 사악하게 웃으며 말했다.

    “내 희생을 바랐다면 마르셀은 뺐어야지. 나랑 아는 사이라고 쟤까지 끌고 오면 어떻게 해? 죽어 주고 싶다가도 싫어지겠다.”

    “…….”

    “하, 벌써 의욕 팍팍 떨어지네.”

    그러고는 진짜 짜증 난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기까지 하는 것이다.

    미셸은 너무 당혹스러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미친 여자!’

    속으로는 실컷 외쳐 댔지만.

    “미안하지만 나는 네가 아는 ‘성녀’처럼 그리 착하지도 않고, 도덕심에 충만한 사람도 아니라서. 희생도…… 뭐, 딱히 잘하지도 않거든. 해 본 적도 없고.”

    틀림없이 미친 여자다. ‘희생’을 잘하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래서 내가 가장 잘하는 일을 해 볼 작정이야.”

    그리 생각하면서도, 미셸은 이상하게도 세이나 로힐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이 거대한 홀에서, 제 편 따위는 하나도 없는 상황에서 홀로 서 있음에도 세이나 로힐은 어딘가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여 계속 바라보게 되었다. 황금을 녹인 듯 찬란히 빛나는 눈동자를.

    그리 생각하는 이는 비단 미셸뿐만이 아니었다.

    “그게 뭐지?”

    스키아가 묻자 미셸의 몸이 긴장으로 얼어붙었다. 홀은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정적 속에서.

    세이나 로힐이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사냥.”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새하얀 연기가 홀을 잠식했다.

    * * *

    세이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잡았어!’

    연기가 완전히 홀을 채우기 직전, 나무뿌리 같은 것이 올라와 스키아를 황좌에 묶는 것을 보았다.

    대화를 이어 가는 동안 너무 화가 나서 일어설까 봐 어찌나 조마조마했던지. 하지만 한 번 겪었던 미래와 마찬가지로, 오만한 스키아는 지배자처럼 황좌를 줄곧 지키기만 했다.

    만족스럽다는 미소를 지으며, 세이나는 마정석을 허공으로 던졌다.

    쾅! 쾅!

    한층 더 짙은 연기가 홀에 뿌려졌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으나 세이나는 주저하지 않고 빠르게 앞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검을 뽑은 순간, 흐릿한 그림자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세이나는 거침없이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쾅!

    불꽃 같은 섬광이 바로 눈앞에서 튀어 올랐고, 일순 그녀 주위의 연기가 물러났다.

    세이나는 제 앞을 가로막은 검은 그림자를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너머, 아직 황좌에 묶여 있는 은발의 여자도.

    마주친 푸른 눈은 소름 끼치도록 차가웠다. 다음 순간, 세이나는 알 수 없는 힘에 밀려 뒤로 물러났다.

    “윽!”

    연기가 완전히 사라진 것도 그때였다.

    세이나는 그제야 제 발목 바로 뒤에 쓰러진 황제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의도치는 않았지만, 그에게 걸려서 층계 밑으로 떨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바로 옆에는 황후와, 황태자가 있었다. 그 아래에는 안나와 로벤이…… 얼굴도 모르는 귀족들도 보였다.

    세이나와 스키아를 제외한 모든 이들은 완전히 의식을 놓은 채, 미동도 없이 잠들어 있었다.

    스키아의 시선도 천천히 홀을 훑었다.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가 으르렁대듯 말했다.

    “수면향인가.”

    ‘됐어.’

    짜증 나는 대화를 길게 끌은 보람이 있었다. 연막은 공격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뒤이어 터진 마정석 역시.

    기습하는 분위기를 낸 것은 오직, 스키아의 주목을 자신에게로 끌기 위해서.

    그래서 스키아가 방어에 집중하느라 수면향을 눈치채지 못하게 하는 것이 세이나의 목적이었다.

    그리고 아주 고맙게도, 스키아는 완벽하게 세이나의 공격을 막아 냈다. 그사이 모든 이들이 수면 향을 마시고 정신을 잃은 것이다.

    “쓸모없는 저항을 하는군.”

    “쓸모없는지는 해 봐야 알지.”

    “아니, 쓸모없어.”

    마지막 목소리는 뒤에서 나온 것이었다.

    세이나는 어느새 홀에 나타난 유클레스 후작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어떤 이름 모를 영애의 목에 검을 갖다 댄 채 세이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맬빈이 있었다. 그의 손짓에 따라 허공에 생겨난 불덩이들이 세이나에게로 달려들었다.

    쾅! 쾅! 쾅!

    충격음과 함께, 다시금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모든 것이 가라앉았을 때, 세이나는 불길 속에서 의기양양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상처 하나 없는 모습. 그의 목 부근에서 반짝이는 물건을 보고 스키아가 짓씹듯 말했다.

    “아티팩트…….”

    그 순간, 섬뜩한 빛이 유클레스 후작을 향해 날아들었다.

    아슬아슬한 거리를 두고 피한 뒤에도, 유클레스 후작은 침착한 표정이었다. 그를 노린 검을 회수하며 라샤드가 낮게 말했다.

    “후작.”

    “네놈이 올 줄 알고 있었지.”

    이어서 오웬이 라샤드처럼 2층에서 뛰어내렸다. 그는 자신을 경계하는 맬빈을 보며 혀를 찼다.

    “하, 진짜 세뇌당해 있잖아?”

    여기까지 계획대로.

    “이제 오붓하게 둘만 남았네?”

    장난스럽게 웃으며 세이나는 검을 고쳐 잡았다. 다시 확인한 스키아의 표정은 예지로 보았던 미래에서와 달리, 고통을 참아 내는 듯 일그러져 있었다.

    공격이 쏟아진 것은 눈이 마주친 순간이었다. 스키아의 발끝에서 뻗어 나온 검은 그림자가 촉수처럼 갈라져 세이나에게로 쏟아졌다.

    쾅! 쾅!

    어디에서 왔는지 모를 날카로운 검은 창마저 머리 위에서 쏟아졌으나, 세이나의 발길을 저지하지 못했다.

    계획대로. 미래에서 봤던 대로. 세이나는 스키아의 공격을 피하며 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한층 예민해진 감각은 허공에서 응축되는 마력을 바로 감지해 냈다. 그리고 그것이 향하는 방향이 바로.

    ‘보여.’

    스키아가 공격할 지점인 것이다.

    쾅!

    ‘확실하게.’

    열두 번째 촉수를 피했을 때, 세이나는 다섯 걸음 앞에 있는 스키아를 발견할 수 있었다. 다음에 마력의 흐름이 향하는 곳은.

    머리 위.

    쉬익!

    “감히!”

    스키아가 격노를 터트리자 그림자들의 속도가 더 빨라졌다. 세이나의 검과 그림자가 맞부딪칠 때마다 소름 끼치는 굉음과 함께 불꽃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열세 번째, 열네 번째. 그리고 열다섯 번째 그림자가 응축된 순간.

    세이나는 스키아의 바로 앞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이길 수 있어!’

    푸른빛을 뿌리며 세이나의 검이 스키아를 향해 쇄도했다.

    * * *

    맬빈을 상대하는 건 꽤 쉬웠다.

    “진짜 바로 기절해 버리냐…….”

    세이나가 말해 준 것보다 마탑주는 훨씬 허약했다. 틈을 좀 파고들어 목덜미를 내리치자 바로 기절해 버리다니.

    ‘이렇게 빨리 끝날 줄 알았으면 그냥 홀에 있을 걸 그랬나.’

    오웬의 역할은 맬빈을 밖으로 유인하는 것이었다.

    혹여 맬빈이 폭주하여 마법을 미친 듯이 쏟아 내면 쓰러진 다른 이들이 다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렵게 정원까지 데려왔는데, 바로 기절해 버렸다.

    한숨이 나올 정도로 시시한 결말이었다.

    “그럼 이제 돌아…….”

    그때, 비수가 오웬을 향해 날아들었다.

    몸을 돌려 공격을 피한 오웬은 인상을 찌푸리며 살기가 느껴진 방향을 노려보았다.

    정원의 큰 나무 뒤에서 덩치 큰 사내가 나타났다. 지저분한 수염에 넉살 좋아 보이는 얼굴…….

    “……누구시더라?”

    “처음 뵙겠습니다.”

    남자가 씩 웃으며 고개를 까딱였다. 그의 손이 허리춤의 검으로 향했고.

    “터너라고 합니다.”

    다음 순간, 거친 바람을 일으키며 그가 오웬에게로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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