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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 여주의 옆집에 살고 있습니다-172화 (172/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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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샤드는 실소를 터트렸다.

    “말도 안 돼.”

    그가 쥐고 있는 것은 오늘 아침 발간된 신문이었다.

    세이나가 마지막 각성에 이르고, 아침에 일어나 편지를 보여 주며 일행에게 일련의 일을 설명하는 동안 집 앞에 놓인 것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했다. 조금 큰 글씨로 쓰인 메인 제목과 그 아래를 빼곡히 채운 글자들.

    그러나 그 첫 줄을 읽자마자, 라샤드는 기가 막혀 신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세이나 로힐을 황성으로 초대합니다!

    틀림없이 그리 적혀 있었다.

    오늘 밤, 황성에서 엘렌 님이 주최하는 겨울 연회가 열립니다. 부디 초대장을 받은 귀빈들께서는 꼭 참석해 주세요.

    몇 번을 눈을 비벼도, 믿기지 않아서 다른 신문까지 주워 와도 같은 내용이 실려 있었다.

    특히, 세이나 로힐은 필히 참석을 부탁드립니다.

    “어딜 가도 그 연회 이야기밖에 없습니다.”

    밖을 살펴보고 돌아온 디온이 라샤드의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 그를 따라 들어온 오웬은 질렸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도 위화감을 느끼지 않더군요. 오히려 밝고 기대로 가득한 얼굴이었습니다.”

    “엘렌 님, 엘렌 님, 하면서 어찌나 떠들어 대는지…… 이거 꿈인가 싶었다니까. 사실 지금도 그래. 이거 꿈 아니지? 그렇지?”

    “수도 전체를 세뇌한 것 같습니다.”

    라샤드는 다시 신문을 살펴봤다. 신문에는 연회 외에 어떤 다른 소식조차 없었다. 이렇게 되어 버렸다면…….

    “폐하도 당한 건가? 어떻게?”

    “반지의 소유자를 세뇌할 수 없으니 그 주변인들을 이용했겠죠. 방법은 많이 있습니다.”

    “미쳤군.”

    그렇게 말하고 라샤드는 제 머리칼을 쓸어 넘긴 그대로 굳어 버렸다.

    “완전히 미쳤어.”

    “아무래도…… 정령계의 마기를 모두 흡수한 것 같습니다.”

    “그게 가능해?”

    오웬이 묻자 디온이 끄덕였다.

    “그 여자는 어중간한 저와 달리 진짜 마족이니까요. 정령계의 마기로 회복하고 더 강해진 겁니다. 그게 아니라면 설명이 되지 않아요.”

    그 역시 심각한 얼굴이었다. 디온이 라샤드와 오웬을 번갈아 보다 말했다.

    “아마 이 집에 있지 않았다면 두 사람도 당했을 겁니다. 어제 언제 집으로 돌아왔었죠?”

    “10시쯤.”

    “그럼 이후에 정령계에서 돌아왔겠군요.”

    그리고 일행이 잠든 사이, 수도를 정복한 것이다.

    라샤드는 다시 한숨을 흘렸다. 믿기 힘든 현실에 계속 탄식만 나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세뇌를 당한 이들이 평화로워 보인다는 사실 정도일까.

    스키아는 딱히 사람들을 이용해서 분쟁을 만들 생각은 없어 보였다. 모든 것이 평소와 다름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과하게 활기차 보인다.

    아침에 이 집을 방문한 이들도 그러했다. 안나는 세이나가 커다란 상자를 받아 들자 웃으며 말했다.

    - 엘렌이 세이나를 위해 연회를 준비하고 있어요. 틀림없이 재미있을 거야.

    살짝 열어 본 상자 안에는 드레스가 있었다. 눈으로 만든 것 같은 순백색, 장식도 없었다. 파티에서 입기엔 썩 적절하지 않은 옷이었다. 그보다는 신전.

    ‘성녀’가 입을 법한…….

    - 오늘 밤. 늦지 않게 와 주기를 바라요. 모두들 기다리고 있으니까.

    - 모두들?

    - 응. 모두들. 나랑, 로벤이랑, 카일…… 아, 카일의 가족들도 모두 초대받았어요. 마르셀도 아마 올걸요?

    마찬가지로 황성의 파티에서 찾아보기는 어려울 인원 구성이었다. 모두 세이나와 관련 있는 사람들이지 않은가.

    - 황제 폐하와 황태자 전하도 계셔요. 멋진 파티가 될 거예요.

    - 가지 않는다면?

    참지 못한 오웬이 벽 뒤에서 나와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안나는 불시에 나타난 남자를 보고 조금 놀란 기색이었지만, 바로 친절하게 말했다.

    - 그럼 우리 전부 그 자리에서 죽기로 했어요.

    아이처럼 활짝 웃으며.

    - 전부 다 세이나 탓 아니겠어요?

    세이나는 놀랍도록 담담했다.

    평온한 목소리로, 알려 줘서 고맙다고 한 뒤 안나와 로벤을 배웅했다. 마치 아무것도 듣지 못한 사람 같았다.

    직후 그녀는 식당으로 돌아와 상자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계속 저 상태.

    물 한 잔도 마시지 않고 계속 상자만 보고 있다. 마치 그대로 석상이라도 되어 버린 듯했다. 벌써 1시간째.

    세 남자가 걱정스레 보고 있던 와중, 돌연 세이나가 고개를 들었다. 침착하고 차분한 눈이 향한 곳은 오웬이었다.

    “오웬.”

    “어? 어, 나?”

    “그때 그 괴물에게 쓴 마법 있잖아요. 사실 아티팩트죠?”

    들켰다는 표정이 된 오웬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곧 품속에 있던 팔찌를 꺼내 상자 옆에 두었다.

    “몇 년 전, 어떤 유적에서 찾아냈지. 상대를 속박할 수 있는 마법이 새겨져 있어.”

    “목걸이도 지금 가지고 있죠?”

    “……어떻게 아는 거야?”

    오웬이 외투를 살짝 들어 목에 걸린 푸른색 보석을 보여 주었다. 장신구라기에는 투박한 외관이었지만,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세이나는 오웬의 팔찌를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더 있죠?”

    “……집에 가면.”

    “오웬은 아티팩트를 찾기 위해 그동안 유적 탐사를 한 거군요.”

    “맞아. 귀한 물건이니 무도한 자에게 들어가면 안 되거든.”

    아티팩트란, 마법이 새겨져 있는 물건을 뜻했다. 지금으로부터 아주 오래전에 만들어진 유물과 다름없었다.

    버튼을 누르거나 물건의 어떤 부분을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바로 마법이 발동되고 마정석도, 사용자의 마력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회장의 ‘새’ 역시 일종의 아티팩트에 해당했다.

    다시 말해, 마법과 연이 없는 세이나도 쓸 수 있는 물건이었다.

    “사실 여러분이 돌아오기 전에, 이미 미래를 한 번 봤어요.”

    “뭐?”

    “예전처럼 많이는 못 봤지만…….”

    세이나는 잠시 생각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

    “아마 제 마지막 예지라고 생각해요. 다음부터는 아무리 애를 써도 보이지 않거든요.”

    “그럼 이 신문도…….”

    “네, 꿈에서 봤어요.”

    여전히 차분한 어조였다. 그녀는 신중한 눈빛으로 일행을 돌아보았다.

    “그래서 흠, 가설이지만 예지에도 총량이 있는 게 아닐까 싶어요. 전 그걸 모두 소비해버렸고. 성력을 좀처럼 발휘하지 못한 이유도 그 때문이 아닐까…… 싶은데.”

    “이미 성력을 다 써 버렸단 말이야?”

    “네. 어머니에게 모두.”

    그녀가 떠나기 전. 손을 잡고 신에게 간절히 빌었다.

    그때 흘러나간 성력이 어머니에게 깃들었고, 후작이 이 때문에 그녀를 ‘성녀’로 착각했으리라.

    그렇기에 세이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엘렌은 아직 거기에 있어.’

    스키아로 완전히 변한 이후에도 엘렌의 목소리가 흘러나온 것이 바로 그 증거였다.

    그리고 아직까지 스키아는 제멋대로 행동하지 못하고 있다고…… 세이나는 생각했다.

    물론, 안나와 로벤의 입으로 전하는 경고의 말은 다시 들어도 소름 끼치는 것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꽤 번거로운 방법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차라리 스키아가 안나를 직접 데려와서, 따라오지 않으면 바로 죽이겠다고 하는 것이…… 조금 더 ‘잔혹한 마족’이 할 법한 발상이다.

    ‘엘렌이 전과 달리 살인을 거부하고 있을지도.’

    되찾은 기억에는 먼 옛날, 그녀가 신전에서 배우고 익혔던 지식도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어떤 책에서도 지금처럼 많은 수의 인간을 세뇌한 마족에 대한 기록은 없었다.

    “흠, 그래서 걱정이에요. 디온은 세뇌가 통하지 않을 테지만, 두 사람은 집 밖으로 나서면 혹시 당할까 봐…….”

    “괜찮을 거야.”

    갑자기 창문이 열린 것은 그때였다.

    두꺼운 커튼을 헤치고, 새하얀 고양이가 가볍게 집 안으로 들어섰다. 레블로테가 라샤드를 보며 말했다.

    “이 집에서 오래 지냈으니 성력의 영향을 받지 않았겠어? 벌써 면역이 됐겠지.”

    “로테.”

    “스키아가 깨어나면서 내 힘도 강해졌어. 필요한 일이 있으면 말해 줘. 뭐, 내가 이렇게 말할 것도 이미 봤겠지?”

    “……맞아.”

    “표정을 보니 좋은 결말은 아니었나 보네.”

    짧은 침묵이 긍정을 뜻했다. 레블로테는 픽 웃으며 물었다.

    “자, 그럼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세이나는 빠르게 작전을 읊었다. 이미 몇 번이나 머릿속에서 생각한 것처럼 막힘없는 목소리였다.

    “레블로테는 ‘그 사람’을 찾아 줘.”

    역할도 정해졌다. 라샤드와 오웬, 레블로테는 제 역할을 듣고 차례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엄숙하고 진지한 분위기에서 작전이 하나씩 정리되었다. 남은 것은 하나.

    “그리고 디온은…….”

    디온은 잠자코 기다리고 있었다.

    한쪽 구석에 등을 기대고, 거리를 두고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와 그들 사이에 마치 보이지 않는 벽이 있는 것만 같다.

    그러나 올곧게 세이나를 응시하는 시선은 또렷했다.

    세이나가 단호하게 말했다.

    “이 계획에서 빠져줘.”

    * * *

    미셸은 충직한 하인이었다.

    ‘으으! 이러다 늦겠어!’

    아침부터 지금까지 한 끼도 못 먹은 상황이지만, 그래도 미셸은 지치지 않았다. 품에는 무거운 꽃병을 안고, 정신이 혼미하고 시야가 흐릿해져도 계속 달려갔다.

    오직 한 사람을 위해.

    ‘스키아 님이 슬퍼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는데.’

    비단 미셸뿐만이 아니었다. 그가 아는 모든 이들, 심지어 황후까지도 연회를 위해서 신발도 벗고 뛰어다녔다.

    그리고 마침내 중앙 홀에서 모든 준비가 끝났을 때, 미셸은 좌절했다. 그 화려하고 찬란한 풍경 속, 작은 흠집이 보였기 때문이다.

    ‘이 꽃병만 더하면 완벽해!’

    고작 그 작은 꽃병을 하나를 두려고, 그토록 미셸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힘들진 않았다.

    손마디가 모두 꺾이고, 발바닥에 피가 나도 지금처럼 달렸을 것이다.

    스키아 님의 명령이니까.

    ‘어서 가야 해!’

    다행히 연회는 아직 시작하기 전이었다.

    미셸은 눈치를 보며 구석으로 가서 꽃병을 두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그의 얼굴이 향한 곳은 당연히 가장 높은 곳이었다.

    화려한 황좌 위, 그녀가 있었다.

    반짝이는 은빛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트리고, 턱을 괸 채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어디 하나 사랑스럽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미셸은 선망의 눈빛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주변을 스치는 귀족들 따위,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볼 필요도 없었다.

    어차피 모두들 스키아를 바라보고 있을 테니까.

    그토록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저기 저 구석에 종처럼 서 있는 황후보다도. 황제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고귀한 사람.

    ‘스키아 님이야말로 황좌에 걸맞은 분이셔.’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황제도 스스로 물러난 것일 테다.

    미셸은 고개를 숙인 황제를 보고 혀를 찼다.

    저런 사람을 한때나마 존경했다니. 과거의 자신이 바보 같았다.

    미셸은 황제에게 혐오스럽다는 눈빛을 던지며 두 손을 꽉 맞잡았다

    그나저나, 저 작자는 왜 이 즐거운 자리에서 얼쩡대고 있는 거야? 그냥 내가 확 올라가서 쫓아내 버릴까. 그런 고민을 하던 중, 돌연.

    덜컹.

    문이 열렸다.

    동시에 홀이 정적에 휩싸였다.

    들어선 이는 검은 로브를 걸친 여자였다. 우아한 복장의 귀빈들과는 어울리지 않는, 낡아빠진 차림새였다.

    미셸은 물론, 모든 이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후드를 눌러 쓰고 정체를 숨겼다면 바로 쫓겨났을 법한 복장과 분위기였다.

    하지만 그녀가 누군지 알고 있었기에, 모든 이들은 침묵을 지켰다.

    여자의 야수처럼 난폭한 눈빛이 위로 향했고.

    “어서 와. 세이나 로힐.”

    드디어 스키아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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