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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 여주의 옆집에 살고 있습니다-171화 (171/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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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소녀는 그곳에서 행복했다.

    물론, 처음에는 무서웠다. 눈을 떠 보니 처음 보는 집 안에 뚝 떨어져 있었다. 다가오는 이들은 조금도 익숙하지도 않았고, 저와 닮은 구석 역시 하나도 없었다.

    그래도 친절하고 따뜻했다.

    그들은 그녀를 정성스레 보살폈다. 계속 구석진 곳에 박혀 몸을 웅크려도, 이따금 뻗은 손을 깨물거나 할퀴어도 한 번도 다그치지 않았다.

    텅 빈 머릿속에서 하나둘 결론이 내려졌다. 여기는 괜찮아. 안전해. 이들은 나를 해치지 않아.

    이름도 생겼다.

    세이나.

    ……어쩐지 많이 들어 본 것 같은데.

    그리고 글을 배울 때, 기시감이 다시 찾아왔다. 아무래도 나는 이 글자들을 알고 있는 것 같다고, 세이나는 생각했다. 부모님도 동의했다.

    하지만 무리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기억하지 않아도 넌 가족이고, 내 딸이야. 그러자 이젠 위화감이 찾아왔다.

    한 번도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없었기에.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머릿속이 잔잔한 물결로 가득 차 있는 기분. 그리고 이렇듯 익숙한 것을 접할 때마다 수면 위로 하나씩, 기억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거기까지. 기억은 그녀가 손을 뻗어 잡으려고 하면 어김없이 다시 가라앉고 말았다.

    세이나는 답답했다. 대체 저 아래에 잠겨 있는 것이 무엇이길래.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열심히 생각을 정리했다.

    그러자 돌연, 무언가 손에 잡힌 것이다.

    “엘렌.”

    누구지?

    자신이 뱉어 놓고도, 세이나는 그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저 뭔지 모를 그것이 아주 중요하다는 것밖에.

    그로부터 며칠 뒤, 부모님은 바로 그 ‘큰 의뢰’를 수락했다. 오래 알고 지내던 친구가 함께 가 달라고 한 것이 결정적인 계기였다.

    “엄마랑 아빠는…… 같이 여행을 다녀올 거야. 조금 오래 걸리겠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별일 없는 곳이야.”

    세이나는 그들을 말리고 싶었다.

    느낌이 너무 이상했다. 하지만 그 정체를 몰랐기에 뭐라고 말하기가 어려웠다.

    마치 기억과 같았다. ‘무엇’인가 있는데, 분명히 손에 잡힐 듯 가까운데. 깨달으려고 하면 저만치 멀어지고 말았다.

    “금방 돌아올게.”

    그리고 어머니가 떠나가기 직전. 세이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고 그 ‘무엇’에게 기도했다. 간절한 염원을 담아서.

    ‘제발 지켜 주세요.’

    기이하게도, 응답이 찾아왔다.

    제 손에서 빠져나가는 하얀 빛이 어머니에게 깃든 것을 보고 세이나는 뒤로 물러났다. 현관문이 닫히고 발소리가 완전히 떠날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기척이 완전히 사라진 뒤, 갑작스러운 현기증이 찾아왔다. 일어났을 땐 침대 위였다.

    “빼앗겼어.”

    정신을 차리자마자 그 말부터 나왔다. ‘어떤 것’을 빼앗겼는지는,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다시 물이 차오르고, 모든 것이 잠겼다.

    그 ‘무엇’조차 사라졌다.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당시 어린 세이나는 어머니의 손을 붙잡고 소원을 빈 기억이 없었다. 그저 부모님이 떠난 직후에 의식을 잃었다고만 알고 있었다.

    ……지금에 와서는 그 이유를 알 것도 같지만.

    부모님이 떠난 이후부터는 지금의 세이나가 알고 있는 그대로였다.

    실종 소식이 들리고, 모든 이들이 가족을 손가락질했다.

    세이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지키기 위해 거칠어질 수밖에 없었다.

    누가 조금이라도 눈을 흘기면 똑바로 노려보며 내쫓아 버렸다. 부모님에 관한 험담이 들리면 당사자를 찾아가 걷어차 주었다.

    네가 우리 부모님에 대해서 뭘 아냐며. 이상한 소문 퍼트리지 말라고.

    반드시 돌아올 거니까.

    과거와 현실이 겹쳐지며 하나의 기억으로 완성되었다.

    가로막은 모든 것이 사라지고, 완전한 진실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왜 자신이 그토록 신전에 거부감을 느꼈는지. 신관들만 보면 짜증이 치솟았는지.

    왜 그동안 한 번도 친어머니를 찾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는지, 부모님에 관해 왜 흐릿한 기억밖에 없는지. 왜 그 고양이가 친근하게 다가왔는지…….

    왜 그 소녀에게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쓰였는지도.

    “엘렌…….”

    끝내 잊지 못한 이름을 속삭이며, 세이나는 조용히 흐느꼈다.

    * * *

    이른 아침. 세이나는 식탁 위에 작은 상자를 내려놓았다.

    “이게 뭐야?”

    “편지예요.”

    오웬의 물음에 답하고 세이나가 상자를 열었다. 곱게 접혀 있는 종이는 한눈에 보기에도 꽤 오래전의 것 같았다.

    “세르벤스 숲에 도착한 뒤, 부모님이 보내신 편지죠.”

    숨을 들이마신 채 굳어 버린 라샤드와 달리, 세이나는 담담한 눈빛이었다.

    그녀가 조심스레 편지를 펼쳐 식탁 위에 두자 디온을 시작으로 세 남자가 고개를 숙였다.

    밝은 인사가 먼저, 뒤에는 그간 부부와 조사대의 일상이 적혀 있었다.

    의뢰인이 아주 친절한 사람이라는 것, 숙소로 잡은 고급 여관이 너무 좋다는 것, 숲은 너무 넓고…….

    어떻게 하면 더 실감 나게 상황을 전할 수 있을까. 그리 고민한 흔적도 역력히 남아 있다. 그녀가 쓴 다채로운 표현들은 세이나마저 잠시 상황을 잊고 웃게 했다.

    이미 수백 번도 더 읽은 내용이었는데도.

    이걸 보고 있으면 어머니가 바로 옆에 있는 것 같았다. 귓가에 재잘재잘 속삭이며 싱긋 웃는 느낌이었다.

    따뜻하고 다정한 사람. 그녀의 성격이 여실히 드러난 편지였다.

    제가 말이 너무 길었죠?

    그리고 넘어간 세 번째 장에서.

    사실, 어떻게 이 말을 전해야 할지 고민하느라 계속 내용을 질질 끌고 있었어요. 죄송해요. 편지지가 끝나 가고 있으니 이제는 말씀드릴게요……. 며칠 전에…….

    그녀는 입술을 꾹 깨물 수밖에 없었다.

    며칠 전에 의사가 왔을 때, 아이를 가진 것 같다고 전해 줬어요.

    올리비아는 거기까지 쓰고, 잠시 펜을 놓았다. 그런 흔적이 남아 있었다. 이후에 쓴 글자가 이전과 달리 살짝 기울어져 있었으니.

    올리비아는 그녀 특유의 다채로운 표현으로 기쁨과 벅찬 감정을 고스란히 적었다. 세이나는 신이 나서 활짝 웃는 그녀를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서 뵙고 싶지만, 아직 일이 남아 있어서요. 아, 그래도 너무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제 소식을 듣고 친구들이 빨리 마무리하려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에 몰두 중이거든요.

    정말, 바로 눈앞에 있는 것처럼.

    우리끼리는 벌써 작게 축하 파티도 했어요. 그때는…… 정말, 너무 행복해서……. 리처드는 눈물까지 보이더라니까요.

    아버지도 떠올렸다. 큰 키에, 곰 같은 덩치의 사내.

    몰래 나가서 울고 돌아왔을까. 등을 돌리고 눈가를 훔쳤을까. 아이처럼 얼굴을 감싸고 엉엉 울었을까.

    아니면 어머니의 배를 만지면서, 울먹이며 중얼거렸을까. 찾아와 줘서 고맙다고.

    어쩌면 이 편지가 도착하고 바로 다음 날 우리가 도착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반드시 행복하게 해 주겠노라.

    곧 돌아갈게요. 건강하세요.

    그렇게 말했을까.

    추신. 이름은 이미 지었어요! 돌아가면 알려 드릴게요.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을 느끼며 세이나는 고개를 숙였다.

    이미 수백 번을 읽은 편지. 우습게도 그 앞에만 서면 어린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질끈 눈을 감았다 떴을 땐, 다시 편지가 보였다.

    아마 세이나에게 큰 선물이 될 거예요.

    “저는 부모님만 기다린 게 아니에요.”

    다시 부모님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긴 금색 머리칼을 흔들면서, 어머니는 신이 나서 편지를 마무리했을 것이다. 그리고 상상했겠지.

    집에 돌아가서, 이 이름을 말하면.

    분명히 세이나가 좋아할 거라고.

    “내 동생…….”

    엘렌.

    끝내 참지 못한 눈물이 흘러나왔을 때, 세이나는 다시 바닥을 바라보고 있었다.

    평생을 살아온 집에는 추억이 남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하물며 이 바닥까지. 저기에 있는 움푹 팬 흔적은 할아버지가 망치를 떨어트린 자리였다.

    솜씨를 발휘해서 직접 둘째 손주의 장난감을 만들 거라고. 신이 나서 흔들다 떨어져서 할머니의 잔소리를 들었다.

    세이나는 그때 할머니가 사 준 물감을 챙겨 들었다. 그림은 내가 그릴게. 그렇게 두 사람이 합작해 만든 목마가 3개나 되었다.

    하지만 결국 당도한 것은 실종 소식이었다. 그때의 절망감이란…….

    ‘이런 기억은 남아 있는데.’

    왜.

    왜 엘렌만…….

    “유클레스 후작의 성에서, 엘렌과 엘렌의 어머니를 본 적이 있습니다.”

    긴 침묵 끝에, 디온이 입을 열었다.

    “단 한 번뿐이었죠. 스승님께서는 후작이 그 여자를 성녀로 착각했다고 했습니다.”

    “……성녀로?”

    “네. 마법이 통하지 않았으니까요.”

    라샤드의 물음에 디온이 끄덕였다.

    “함께 있는 남자의 솜씨가 보통이 아니라서 더 의심했다고 했습니다. 그런 실력 있는 자가 지키고 있으니, 당연히 성녀라고 생각했다고 했죠.”

    “그럼 아버지는…….”

    디온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후작은 그자가 죽은 충격 때문에 여인이 말을 잃었다고 했습니다.”

    세이나는 다시 입술을 깨물었다. 잠시간 정적 후 오웬이 물었다.

    “……그 이후로는?”

    “하지만 그 여자의 피로도 봉인석은 해방되지 않았습니다. 이상한 일이었죠. 성녀가 아닌데, 성력을 품고 있었으니. 스승님은 여인을 살피다 곧 그녀가 임신한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후작은 당연히 아이가 성녀라고 생각했겠군.”

    “네. 그러나 아이의 피로도 봉인이 풀리지 않았습니다. 예상과 다른…… 신기한 반응은 하나 있었죠.”

    디온은 한 손으로 다른 제 손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이의 손으로 봉인석의 마력이 흘러들어 간 겁니다.”

    오웬과 라샤드는 놀란 눈이 되었다. 디온은 바로 설명을 이어갔다.

    “아마도…… 아이의 먼 선조 중에 마족과 계약한 인물이 있었을 겁니다. 후작은 아이를 ‘적합자’라고 하며, 실험을 시작했죠.”

    “실험?”

    “저에게 벌어진 일을 반대로 한 겁니다.”

    디온은 마족의 육체에 그의 혼을 심은 사례였다. 후작은 그 반대로, 인간의 육체에 마족의 혼을 넣고자 했다.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디온의 어머니, 레티샤가 마족의 육체와 혼을 끊어 내는 마법을 마족에게서 배웠으니 말이다.

    “스승님은 그 여자를 어디에서 데려왔는지 끝내 말하지 않았습니다. 죄책감이 심하다고 두 번 이야기하는 것조차 꺼렸지요. 여자의 이름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세르벤스 숲의 기록에는 사망자밖에 없었죠.”

    디온은 그러고 세이나를 보았다.

    “설마 세이나의 어머니일 줄은…….”

    “데려올 거예요.”

    세이나는 고개를 들었다. 슬픔이 물러난 눈동자가 태양처럼 이글거렸다.

    “반드시 엘렌을 되찾을 거예요. 절대 포기 못 해.”

    “당연히 그래야지.”

    오웬이 씩 웃으면서 그녀를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이미 결정한 것 아니었어?”

    “음. 그렇지.”

    라샤드에 이어, 디온도 고개를 끄덕이자 세이나는 깊은 감동을 느꼈다. 의심할 것도 없는 진심이었다.

    “고마워요. 모두.”

    그리고 다음 순간.

    “그럼…….”

    똑똑.

    돌연 노크가 들렸다.

    동시에 네 사람의 시선이 현관으로 박혔다. 라샤드는 바로 옆에 둔 검까지 이미 쥔 채였다. 무거운 긴장감이 집 안에 흘렀다. 그리고 다시.

    똑똑.

    “세이나!”

    “안……나?”

    세이나는 놀라 급히 현관으로 다가갔다.

    문을 열자 익히 아는 그 얼굴이 있었다. 바로 옆에는 로벤까지. 무슨 좋은 일이 있는지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조금 과해 보일 정도로.

    “무슨 일이야?”

    그러자 안나가 커다란 상자를 내밀며 활짝 웃었다.

    “엘렌이 보낸 선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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