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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 여주의 옆집에 살고 있습니다-170화 (170/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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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기 부여는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다.

    그날 이후부터, 세이나는 열심히 공부에 임했다. 신전에 있는 거의 모든 책을 살펴보고, 밤에는 성력을 다루는 훈련을 이어 갔다.

    힘들었지만 할 만했다. 목표도 생겼으니까. 꿈속의 ‘엘렌’을 실물로 볼 수 있다는 기대에 가슴이 벅찼으니까.

    엘렌은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도울 수 있다면 이중생활쯤이야, 큰 고난도 아니었다.

    예지력을 깨우치는 건 좀 힘들었어도…….

    “내가 돌을 숨긴 건 어떤 컵일까?”

    “음…… 여기!”

    “하, 예지가 도움이 된다더니. 나 제대로 사기 당했네.”

    “아, 아니다! 이쪽! 이쪽이야!”

    “에휴.”

    레블로테의 도움 덕분에 점차 나아져 갔다.

    “조금 있다가 비가 올 거야. 아마 지금부터 10…… 9…… 8…… 온다!”

    “오, 맞췄네.”

    1분. 10분. 30분. 1시간. 2시간. 반나절…… 내일.

    6살이 될 무렵, 세이나는 예지력을 확실히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비록 내일 아침까지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한계는 있었으나, 그 시간만큼은 자신이 원하면 언제든 미래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먼 미래를 보기에 아직은 어렵다는 판단이 들자마자.

    “이렇게 빨리?”

    세이나는 신전을 빠져나왔다.

    “엘렌 쪽이 더 급하니까. 신전에는 미련도 없고.”

    돈을 받고, 팔려 간 곳이다. 좋은 기억 따위 있을 리가.

    덕분에 산책처럼 산뜻한 발걸음으로 떠날 수 있었다. 크게 걱정되지는 않았다. 예지한 오늘 밤은 평화로웠고, 자신을 도와줄 레블로테는 마법을 쓸 수 있으니까.

    “하루라도 더 빨리 엘렌을 만나고 싶어.”

    오직 그 생각밖에 없었다.

    실제로 보면 얼마나 사랑스러울까. 목소리는 어떨까. 첫인사는 뭐라고 해야 할까.

    친해지고 난 뒤에는 따뜻하게 안아 주고 싶었다. 그동안 고생했어. 기특하다. 네가 자랑스러워.

    더 일찍 와 주지 못해 미안해.

    몇 달을 지켜본 소녀였다.

    더군다나 그녀에 대해 제 손으로 상세하게 기록까지 남겼으니 세이나가 엘렌에게 깊은 애정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마치 가족처럼…….

    세이나는 벅찬 기대감을 안고 수도로 향했다.

    가는 길도 그리 힘들진 않았다.

    일단, 전날 밤 내일 일어날 일을 빠르게 훑어본다. 불상사가 생기면 다시. 또다시.

    어느 누가, 어린 여행자를 동정하여 친절을 베풀어 줄까. “부모님과 헤어졌어요. 고향은 수도예요.”라는 눈물 어린 눈동자를 보고 불쌍히 여기지 않을까.

    여러 가지 경우도 고려했다. 때로는 과한 친절이 피곤해질 수도 있으니.

    선호하는 사람은 돈만 주면 뭐든지 받아들이는 쪽. 신관에게서 몰래 훔쳐 온 자금이 꽤 도움이 되었다.

    레블로테는 세이나가 미처 예지하지 못한 불상사를 해결해 주었다. 마물, 납치범, 사기꾼, 도적 등등.

    좋은 말동무도 되어 주었다.

    “내가 도와준다니까! 너 지금 진흙으로 엉망진창이야! 목욕해야 한다고!”

    “끼야아아아옹!”

    때로는 날카롭게 할퀴기도 했지만.

    레블로테는 그녀가 수도가 보이는 언덕에 오를 때까지 함께했다. 긴 꼬리를 살랑거리며, 세이나가 그 하얀 털을 쓰다듬는 손길을 가만히 느끼며 물었다.

    “바로 갈 거지?”

    이별을 직감한 목소리에 세이나는 말없이 그 작은 머리를 어루만졌다.

    “재수 없는 꼬맹이.”

    쌀쌀맞은 말투. 그러나 동그랗게 뜬 샛노란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고여 있었다. 이윽고 레블로테가 입을 열자.

    “그동안 즐거웠어.”

    “나도.”

    고양이는 뚝뚝 눈물을 떨어트렸다. 세이나는 그를 꽉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정말 고마워.”

    레블로테는 울먹이다 그녀의 얼굴에 머리를 기댔다.

    “나중에 찾아가도 돼?”

    “그래, 그때 또 같이 놀자. 로테.”

    더 머뭇거리면 떨어지기 힘들어질 것을 알기에, 세이나는 무거운 발걸음을 돌렸다. 레블로테는 그녀가 놓아준 자리에 멈춰 서서 계속 그녀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수도로 향하는 길에 들어서자마자.

    “꼬맹이!”

    눈물 젖은 눈으로 다시 소리쳤다.

    “조심해!”

    “너도!”

    세이나는 활기차게 손을 흔들고 등을 돌렸다. 그러나 하얀 고양이만은,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계속 자리에 머물렀다.

    “조심해야 해…….”

    아주 오랫동안.

    *

    어젯밤에 예지한 것처럼, 수도는 복잡한 곳이었다.

    ‘울지 마. 울면 안 돼! 울면 집중력이 흐려진단 말이야!’

    세이나는 눈가를 닦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노점상 옆에 있는 큰 거울 속, 작은 소녀가 보였다. 어젯밤에 예지한 것처럼.

    아직 길을 찾지 못한 상태다.

    ‘다시 찾아봐야 해. 다시. 계속.’

    탈진할 정도로 기력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세이나는 결국 어젯밤 꽃집에 이르는 미래를 찾지 못했다.

    수도는 너무 넓었고, 사람도 많았다. 세이나는 다시 정신을 집중했다.

    ‘이쪽? 아니야. 이쪽은?’

    그리고 집중하기에도 그리 여의치 못한 환경이었다.

    사람들이 계속 제 어깨를 스치고 지나가기도 수십 번. 세이나는 힘겹게 앞으로 향했다.

    “혹시 수도에서 가장 큰 강은 어디에 있어요?”

    ……라는 질문은 모퉁이를 돌 때마다 물었다. 꽃집은 강가 옆이니, 일단 강에 이르러서 계속 걸을 생각이었다. 답변도 바로 얻긴 했으나.

    ‘젠장, 너무 멀어.’

    가는 길이 꽤 고되었다. 변수도 많았다.

    잠깐 사이에 본 미래에서 자신은 항상 어떤 사람과 마주쳤다. 어떤 이는 친절하기도 했지만, 어떤 이는 검은 속내를 보이기도 했다.

    그녀는 여러 번 둘러싸이고, 잡히고, 맞기도 하고, 기절당해 끌려가기도 했다. 잠깐만 쉬려고 숨을 골라도 바로 어김없이.

    “얘야, 너 혼자 있는 거니?”

    도저히 예지를 쉴 수 없었다.

    마주치는 모든 사람마다 세이나는 그를 살피고 미래를 보았다. 도움의 손길도 의심되었다. 오늘은 괜찮아도, 내일, 그다음 날은 볼 수 없으니까.

    짧은 여유조차 갖지 않았다. 레블로테도 없는 상황에서, 7살짜리 꼬마가 혼자 대체 어디서 마음 편히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아마 내일이 돼도 마찬가지이리라.

    ‘오늘 안에 해치워야 해. 혼자는 위험해.’

    저녁 무렵이 되었을 땐 다리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도 않았다.

    세이나는 보이는 벤치 아무 곳을 골라 그 위에 드러누웠다.

    “하아, 하아…….”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시야도 흐릿하고. 정신도 온전치 못하다. 이렇게 예지를 많이 쓴 것은 처음이었다.

    그래도 멈추면 안 돼. 스스로를 다독이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무심코 바라본 바로 앞이…….

    “어?”

    너무 익숙했다.

    뾰족한 지붕의 이층집.

    갈색 돌벽과 긴 창문들. 2층의 작은 테라스. 기억대로라면 이 집의 바로 옆에…….

    “없어?”

    꽃집이 있어야 하는데.

    “없다고?!”

    세이나는 참지 못하고 소리칠 수밖에 없었다.

    작은 꽃집이 있던 곳에는 무성한 풀밖에 없었다. 말 그대로 공터.

    “하아……. 하, 젠장.”

    몸이 다시 무너진 것은 그때였다. 바닥에 무릎을 댄 채, 흐려진 시야를 어렵게 들고 빈자리만 쏘아보았다. 설마.

    ‘내가 너무 일찍 왔어!’

    그곳에는 집, 혹은 그 비슷한 흔적 따위도 전혀 없었다.

    ‘그럼 지금은 언제인 거지? 엘렌이 오기 5년 전? 10년 전? 혹시 엘렌은 태어나지도 않았어? 그보다 더 이전이면 엘렌은…….’

    거기까지가, 그녀가 버틸 수 있는 한계였다.

    끝내 만나지 못한 소녀를 가슴에 품고 세이나는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시각은 저녁. 비록 따뜻한 날씨였으나 그녀가 쓰러진 곳은 강가였다.

    늘 그녀를 지켜 주던 성력마저 사라지자 차가운 돌바닥의 한기가 고스란히 그녀의 몸으로 흘러 들어 갔다. 그녀는 긴 여행을 이어 온 직후. 거기다 종일 수도의 거리를 거닐었다.

    어린 소녀가 감당하기엔 너무 고된 하루였다. 어쩌면 그대로 죽었을지도 몰랐다. 만약.

    “여보!”

    저녁 산책을 나온 젊은 로힐 부부가 그녀를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이리 와 봐요. 여기에 아이가 쓰러져 있어!”

    * * *

    젊은 로힐 부부의 앞에 나타난 아이는 거리에서 연일 화젯거리였다.

    긴 검은 머리칼. 영롱한 금빛 눈동자. 아이는 말을 못 한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이나 총명한 인상이었다.

    많은 동료가 그녀를 만나러 왔고, 또 그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러나 아이는 입을 꾹 닫을 뿐. 고양이처럼 계속 어두운 구석으로 숨어들어 가는 통에 제대로 된 의사소통조차 어려웠다.

    “그냥 치안대로 보내는 게 낫지 않을까?”

    ……라고 어떤 이가 제안하기도 했지만.

    무슨 영문인지, 아이는 집을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 억지로 끌고 현관문으로 이끌면 바로 울음을 터트렸다.

    아이가 집에 온 지 2달이 지나도록 부모를 찾지 못하자 가족들은 아이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보낼 곳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내리게 된 결정. 그러나 집안에서 아이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었다.

    젊은 로힐 부부는 결혼 후에도 오랫동안 아이가 없었으니.

    “하늘에서 주신 선물일지도 몰라.”

    이름도 생겼다. 세이나. 옛 폴리시아 어로 ‘하늘의 선물’이라는 뜻이었다.

    가족들의 정성이 통한 덕분인지 몇 달이 지나자 세이나의 경계심도 서서히 풀려 갔다. 함께 식사도 했고, 불쑥 손을 뻗어도 놀라지 않았다.

    비록 말은 계속 못 했지만.

    특히 올리비아는 헌터 일도 잠시 접어 두고 세이나를 정성스레 보살폈다.

    친구들이 집을 방문한 어느 날, 그들에게 아이를 보인 것도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정말 예쁘지? 얼마나 착한지 몰라. 내 보물이야.”

    당시 세이나는 제법 얌전해져서, 따뜻한 차를 주면 몸을 꼬지 않고 의자에 앉을 수 있는 수준에 이른 상태였다.

    올리비아의 친구들이 옆에서 수다를 떨어도 싫은 내색도 하지 않았다. 덕분에 올리비아는 평화롭게 수다를 이어 갈 수 있었다.

    “나, 어젯밤에 엄청 좋은 꿈 꿨어! 커다란 금색 물고기가 나한테 와서 안기더라!”

    “와! 엄청 좋은 꿈이네!”

    “큰돈을 버는 거 아니야?”

    “흠, 마침 큰 의뢰가 들어오긴 해서……. 안 받을 생각이었는데 괜히 혹하는 것 있지?”

    “돈은 무슨! 물고기면 다른 쪽이지!”

    “다른 쪽?”

    올리비아가 눈을 크게 뜨며 물었으나, 친구는 당황한 듯 제 입을 가로막았다. 순간 분위기도 이상해졌다.

    이윽고 그 뜻을 눈치챈 올리비아가 씁쓸하게 말했다.

    “그럴 리가.”

    “호, 혹시 모르잖아. 그런 꿈은 보통 아이가…… 윽! 꼬집지 마!”

    “그래, 맞아! 올리비아. 이번에야말로 좋은 소식이 있을지도 모르지. 세이나도 동생이 생길지도?”

    “후후, 세이나. 너도 동생이 생기면 좋지? 이름은 뭐가 좋을까? 세이나니까 레이나? 세릴? 아니면…… 윽! 꼬집지 말라니까!”

    “우리 다른 이야기 하자, 응? 아, 저번에 샀던 그 찻잔은 어때? 괜찮아?”

    다시 수다가 시작되었다. 친구들은 열심히 눈치를 살폈지만, 올리비아는 전혀 기분이 상하지 않은 기색이었다.

    곧 가벼운 웃음이 주방에 퍼지고, 분위기도 화기애애해졌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마무리될 무렵…….

    “엘렌.”

    문득, 세이나가 말했다.

    곧바로 정적이 찾아왔다.

    긴 침묵을 깨트린 이는 올리비아였다. 그녀는 놀란 심장을 애써 가라앉히고, 부드럽게 세이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래, 동생 이름은 엘렌이 좋겠다.”

    그렇게 그녀는 ‘세이나 로힐’이 되었다.

    도망친 이후, 기억을 잃어버린…….

    언젠가 그녀가 쓴 그 소설 속 소녀를 닮은 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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