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 여주의 옆집에 살고 있습니다-169화 (169/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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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엘렌

신전은 무엇 하나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었다.

세이나는 몇 년을 누구도 가까이하지 않은 채 홀로 지냈다.

신전 사람들은 의아해하며 그녀를 무리로 끌고 들어오려 했으나, 세이나는 계속 거부했다. 외로움 따위는 걱정도 되지 않았다.

그저 두려웠을 뿐이다.

내가 성녀라는 걸 알아차리면 이 사람들은 어떻게 나올까.

친절함은 계속 유지될 테다. 아니, 지금보다 훨씬 더 과해져서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겠지. 다만 그 장소가 달라질 뿐.

신전의 지하에는 감옥이 있었다.

도망갈 길을 찾다가 우연히 발견했다. 쓰인 흔적은 없었으나, 그곳이 누구를 위해 마련된 장소인지 짐작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절대로 들키면 안 돼.’

그들은 세이나의 피를 바쳐 마족을 부활시킬 것이다.

신관들은 그리 아프지도, 힘들지도 않은 과정일 것이라 했지만 글쎄. 도망치지 않게 하려 그냥 둘러대는 말일 지도 모르지 않는가.

신관들에게 마음이 가지도 않았다.

그들은 소녀들에게 자신의 사상을 강요하고 있었다. 밥 먹는 시간을 제외하고 내내 경전을 읽게 하고, 신전 밖이 얼마나 끔찍한지 묘사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신전 인근에 있는 영주들은 괴물 그 자체였다.

어떤 이는 밤마다 여자들을 잡아먹는다. 어떤 이는 사람들을 채찍질하고 노예로 부려 먹는다. 어떤 이는 마차를 말이 아닌 인간이 끌게 한다…….

잠깐은 정말 그런가 싶기도 했었다. 그녀는 아직 어렸고, 마을 밖으로 가 본 적도 없으니까.

내가 떨어진 이 세계는 어쩌면 지옥 그 자체일지도.

무섭고 두려웠다. 세이나는 점점 마음의 문을 닫고 누구와도 말을 섞지 않았다.

그렇게 몇 년이 흘렀을까.

이제 새로운 지식을 습득할 차례가 되었다고, 신관이 말했다. 그는 그동안 본 적 없는 새로운 책을 주며 세이나에게 모든 내용을 암기하라고 했다.

그것에는 마족이 봉인된 과정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초대 성녀. 그리고 그녀를 도운 간악무도한 다섯 가문.

“칼만. 유클레스…… 잠깐, 유클레스?”

익숙한 이름에 그녀의 눈이 확 커졌다. 유클레스. 그 이름을, 세이나는 그때까지 잊지 않고 있었다.

‘그럼 이 세계는…… 내가 꿈에서 본 곳?’

그 뒤의 해답도 책에 적혀 있었다. 성녀의 능력은 네 가지. 정화와 치유, 마족 봉인과…….

미래 예지.

‘그 꿈은 미래였던 거야. 곧 펼쳐질 미래.’

깨달음이 스치자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냥 흘려 넘기지 않기를 잘했다 싶었다. 꿈에서 본 것은 전부 정리하고 재구성하여 소설까지 썼기에, 세이나는 모든 내용을 기억하고 있었다.

왜 하필 많은 이들 중 굳이 엘렌이 보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엘렌이 중요한 인물인 건 알겠는데……. 왜 중요한지를 모르겠단 말이지. 성녀는 나잖아. 혹시 이전 성녀인가? 아니면 나 다음?’

제대로 결론은 내려지지 않았지만, 계획은 세워졌다.

유클레스 가문을 만날 것.

그리고 엘렌을 확인할 것.

그러기 위해서 12살이 되기 전에 이 신전에서 탈출해야 했다. 성녀라는 것이 밝혀지면 지하에 갇힐 것이 뻔했다. 돈도 필요하고.

능력도 발현해야 했다. 도망치다 다치면 스스로 치료해야 하니까.

무엇보다, 조력자가 필수였다.

그때부터 세이나는 주변 인물들에게 주의를 기울였다. 신관들에게 친근한 척 다가가서, 꼭 성녀가 되고 싶다고 하며 정보를 빼내었다.

안타깝게도 그녀를 도울 사람은 찾지 못했다. 그러나 필요한 지식을 가르쳐 주는 사람은 있었다.

덕분에 세이나는 그들을 통해 성력을 다루는 법을 깨우칠 수 있었다.

물론, 성녀인 걸 들키면 안 되니 드러내지는 않았다. 잘 안된다면서 툴툴거리고 어린애처럼 투정만 실컷 부렸다.

그리고 매일 밤 몰래 신전 근처의 숲으로 나가 성력을 일깨웠다. 그렇게 연습하고, 또 고민하던 어느 날…….

돌연 기척이 느껴졌다.

‘마물?’

생각보다 먼저, 손이 움직였다.

그녀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새하얀 섬광이 한 곳으로 뻗어 나갔다. 컁! 날카로운 외침이 들렸다.

‘고양이?’

꼭 그런 소리였다. 잠시 후, 세이나는 그녀의 성력에 꽁꽁 묶인 하얀 고양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세이나가 다가가는 와중에도 발버둥 치고 있었다.

“너는…….”

바로 그때, 마족의 추종자 중 1명이 썼다던 책이 떠올랐다. 그 17번째 장. 마경(魔鏡)의 소유자. 마족 스키아.

그리고 그 반려동물.

“혹시 레블로테?”

다음 순간, 고양이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

그 고양이는 다른 마물과 달리 제법 말을 잘했다.

“그, 그냥 지나간 것뿐이야……. 결코 너를 해칠 생각은 없었어…….”

“그런데 왜 하필 여기야? 여긴 아주 외진 숲인데. 그리고 거기에 있었으면 계속 날 지켜봤다는 뜻인데…….”

뜨끔! 고양이가 몸을 크게 떨었다.

세이나는 재미있다는 듯 씩 입꼬리를 올렸다.

“내가 성력을 다루는 걸 계속 본 거지?”

“…….”

“그럼 내 정체를 눈치챘을 테고, 흐음……. 그래도 도망가지 않았다? 왜?”

“…….”

“혹시 죽이려고?”

뜨끔!

“호오, 왜 날 죽이려고 하지? 내가 없으면 주인님이 부활하지 못할 텐데.”

“…….”

“아, 너 주인님이 부활하는 게 싫구나? 그런데 봉인석은 잘 보관되어 있잖아? 왜 굳이 날 죽이려고 했지?”

고양이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제대로 정곡을 찌른 듯했다. 몸을 묶은 성력이 풀리지 않으니 도망칠 수도 없었다.

몇 개월간 날카롭게 다듬어 두었던 성력은 훌륭한 구속구가 되어 그의 사지를 밧줄처럼 꽁꽁 묶고 있었다.

레블로테는 하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잘 보관되어 있지, 않아.”

“뭐?”

“3개가 사라졌어.”

“어떻게?”

“레티샤 유클레스가 훔쳤다.”

레블로테의 이야기를 모두 들으며 세이나는 계속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여자였군. 어쩐지 느낌이 이상했지.

“하지만 그 여자는 이미 내 피를 가져갔는걸?”

세이나의 답변에 레블로테의 눈동자가 튀어나올 듯 커졌다.

고양이는 어울리지도 않게 턱을 덜덜 떨기까지 했다.

“괜찮아. 아직 부활한 느낌은 없잖아? 고양이 너, 주인님이 부활하면 알아차릴 수 있지?”

“무, 물론이야.”

“그 레티샤라는 여자에게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게 틀림없어. 어쩌면 엘렌도…….”

그 여자의 일에 휘말려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가문도 같고. 친척이거나…… 어쩌면 어머니일 가능성도 있다.

그래서 내 꿈에서 엘렌이 보였나? 나는 성녀니까, 엘렌을 도와야 해서?

‘하지만 딱히 마족 같은 오컬트적인 일에 휘말린 것 같진 않았는데.’

“그럼 이제 날 놔줘!”

생각을 다 정리하지도 않았는데, 레블로테가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다. 세이나는 흥미롭다는 듯 눈을 빛내며 물었다.

“어디 가게?”

“네 피를 가져갔다면서! 뺏거나 없애야지! 성녀의 피는 소량만으로도 마족을 깨울 수 있어! 빨리 없애야 해!”

“……왜 그렇게까지 절박하게 막으려고 해? 이상하네. 주인님이 쉽게 먹잇감을 가져와 줄 텐데.”

“먹잇감?”

“인간 말이야.”

그러자 레블로테는 소름 끼친다는 표정이 되었다.

“오우, 마물에게 저런 시선을 받을 줄은 몰랐는데.”

“안 잡아먹어.”

“마물은 인간을 잡아먹는 게 당연…….”

“안 잡아먹는다고!”

이내 소리까지 내지르기 시작했다. 세이나는 급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다행히, 별다른 기척은 없었다만.

“쉿! 누가 오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레블로테도 그제야 제 잘못을 알아차렸는지 입을 닫았다. 분홍빛 귀가 풀이 죽어 아래로 처져 버렸다. 요란하게 움직이던 앞발도 힘을 잃었다.

곧 나온 대답은 아주 뜻밖이었다.

“죽으면…… 같이 못 놀잖아…….”

놀랍게도, 거짓말 같진 않았다. 세이나는 당황해 눈을 여러 번 깜빡였다.

세상에. 내가 지금 무슨 깜찍한 말을 들은 거야?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 몸을 꾹 찌르니, 앙칼진 울음소리가 튀어나왔다. 세이나는 쿡쿡 웃으면서 레블로테의 볼을 잡아당겼다.

“너, 나랑 일 하나 하자.”

드디어 찾아낸 조력자는 몹시 귀여운 생물이었다.

*

당연하게도, 레블로테는 세이나의 제안을 거절했다.

“……대충 이해하겠지? 내 꿈에 엘렌이 계속 보인다는 건 이 일에 그 아이가 아주 중요한 역할이란 뜻이야. 일단 엘렌부터 찾아보자고.”

“절대로 안 해! 안 한다옹!”

“나는 성녀야. 미래 예지가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너도 알지? 내가 최선의 길을 찾으면 너는 마법으로 파바박!”

“안 해! 이거 놔!”

“아아, 보인다아……. 무서운 미래가…… 주인님은 레블로테가 배신할 걸 벌써 눈치채셔 버렸단다. 벼르고 계셔. 음음, 부활하면 널 죽여 버리겠대. 역시 날 도와야겠는걸?”

“캬옹!”

쉬운 협상 상대는 아니었다.

세이나는 그날 늦도록 끈질기게 레블로테를 설득했다. 강경한 태도였던 고양이가 지쳐 늘어지는 동안에도 계속.

“그리고 나는…… 꽤 재미있는 사람이야. 전생에서도 어찌나 인기가 좋았던지. 초등학교 반장 투표에서 무려 5표나 얻었거든.”

“닥쳐 제발…….”

“게다가 전학 간 지 얼마 안 됐을 때였어. 아주 괄목할 성과였지. 응? 내 이야기 듣고 있지?”

“잠은 좀 자자…….”

“네 파트너에게는 이렇게나 장점이 많아. 날 놓치면 후회할걸?”

“제, 제발 꺼져 줘……. 안 풀어 줘도 되니까…….”

“어디까지 했더라? 아, 장점 106번째!”

이윽고 새벽이 밝아 오자 레블로테는 항복 선언을 했다.

세이나는 기뻐하며 성력을 거두어 주었다. 다행히 레블로테는 당장의 위기를 위해 거짓말을 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아무튼…… 그 엘렌이라는 아이를 만나도록 해 달라는 거지?”

“응. 분명히 이 세계 어딘가에 있을 거야. 그 아이를 만나면 마족을 저지할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어.”

“성녀의 직감은…… 잘 맞…… 하암, 그래서? 걔는 지금 어디에 있는데?”

말문이 턱 막히는 질문이었다.

현재가 그 소설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는, 지금으로서 알아내기는 어려웠다.

세이나는 그저 꿈속에서 엘렌을 죽 지켜보았을 뿐.

“내 능력이 미래 예지긴 하지만…… 내가 그 꿈을 본 지도 벌써 꽤 오래됐거든. 지금으로서는 엘렌이 몇 살일지 짐작하기 어려워.”

그리고 안타깝게도 꿈에서 세이나는 그 시대를 추측할 만한 어떤 사건도 접하지 못했다. 단서조차 없는 것이다.

“어쩌면…… 엘렌이 가출할 때 봉인석을 훔쳤을지도 모르지.”

그냥 뱉은 말인데,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니 꽤 그럴듯한 추측 같다.

“그리하여 엘렌이 위험에 처하고, 그 레티샤 유클레스라는 여자가 봉인석을 찾아 쫓아오는……? 그런 식이 되려나? 아니면 후작? 그러면 내가 구하는 역할…… 인가?”

그리고 점점 더 앞뒤가 맞는 것 같다. 비록 레블로테는 아직 심드렁한 반응이었지만.

“아, 그래. 잘됐네.”

“빨리 엘렌을 만나야겠어!”

세이나는 강하게 확신하며 활짝 웃었다.

“내가 엘렌을 구해야 하는 게 틀림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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