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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 여주의 옆집에 살고 있습니다-168화 (168/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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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 뜻만 있진 않아.”

    라샤드는 제법 시간이 흐른 후에 대답했다.

    ‘부정은 안 하네.’

    “또한 너를 경계할 생각도 없어. 네가 세이나와 오웬을 구해 준 것은 내 눈으로 봤으니까.”

    그 말은 디온의 기준에서는 좀 뜻밖이었다.

    자신이라면 구해 준 것을 직접 보았든 말든, 일단 거침없이 묶어 버리고 시작했을 것 같다. 당장 상대가 마족이지 않은가.

    그러나 라샤드의 근처에는 밧줄은커녕 그가 늘 들고 다니는 무기도 없었다.

    라샤드는 옆에 있던 의자를 끌고 와 디온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세이나는 지금 다른 이를 만나고 있어. 한창 대화 중이니 방해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녀도…… 여러모로 당황스러운 눈치였으니까.”

    딱히 어떤 수를 숨기고 있는 낌새도 없었다. 말투는 정중하기까지 했다.

    “그사이 설명을 듣고 싶은데.”

    “맞아.”

    오웬이 옆에서 거들었다. 디온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혀를 찼다.

    아무래도 아프다는 핑계도 썩 통하지 않을 것 같은데.

    “처음부터 전부 다 설명해.”

    디온은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 * *

    세이나는 놀라서 물었다.

    “예전에 나랑 만난 적이 있다고? 언제?”

    “내 입으로 말해 주긴 싫어.”

    레블로테는 다시 봐도 까다로운 고양이였다.

    그렇게 대답하고 하얀 고양이는 식탁 위에 편안하게 앉았다. 반쯤 접힌 눈이 졸린 것처럼 보였다.

    “기억은 어디까지 찾았는데?”

    “이상한 신전에 끌려가서 피를 뽑혔어. 그리고 디온의 어머님을 만났지.”

    “흐음, 그럼 내 차례는 그다음인가.”

    세이나는 아직도 좀처럼 믿기지 않았다. 자신은 성녀이지 않은가. 레블로테는 마물이다.

    대체 어떤 인연이 있어서 날 도와준 건지.

    “힌트를 주자면, 네가 모든 것을 잃어버린 건 부작용이었어.”

    “부작용?”

    “응. 모든 능력을 잃어버렸으니까. 정확히는 회복을 위해서 장시간 잠들어 있던 거라고 할 수 있지. 정령계의 마기에 노출되면서 너를 보호하려고 성력이 다시 깨어난 거야.”

    또 신학 시간이 찾아왔다. 세이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성력이 제일 처음 깨어났던 순간과 같아. 문이 열리고, 마기가 세상을 잠식하자마자 일부 사람들은 성력을 발현했어. 이 이야기는 알지?”

    “으응.”

    “성녀의 성력은 좀 더 특별해. 어떤 마족은 신이 직접 부여한 힘이라고도 하더라. 그래서 신이 창조한 다른 생명들과 비슷하게 의지도 있어.”

    ‘그래서 공원에서 디온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던 거구나.’

    그땐 누군가에게 조종이라도 당하는 느낌이었다.

    저절로 입이 움직이고, 발이 끌려갔다. 정신이 들었을 땐 이미 공원에서 한참 멀어진 뒤였다.

    “그래서 잠들었던 거야. 만약 그대로 네가 계속 성력을 더 쓰면 성력은 완전히 사라질지도 몰랐거든. 그건 신의 명령에 반하는 일이지.”

    “명령?”

    “성녀의 힘은 계속 이어져야 하니까. 네 차례에서 사라지면 곤란하잖아?”

    레블로테는 나른한 어조로 말했다. 세이나는 턱을 매만지며 끄덕였다.

    대충 이해가 될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이제 괜찮아 보이니 다시 각성을 시작해 봐.”

    “각성하면 잠이 들 텐데 괜찮을까?”

    “뭘 걱정해? 이 집은 이 땅에서 가장 안전한 곳인데. 스키아도 여기는 못 들어와. 그 녀석은 마력 그 자체라서, 이곳은 공기가 없는 환경처럼 느껴질걸.”

    “왜?”

    “네가 일평생을 살아온 곳이니까.”

    그건 정말 뜻밖의 대답이었다.

    세이나가 말을 잇지 못하고 눈만 깜빡이자, 레블로테가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정성을 다해 매일 쓸고 닦았지. 성력은 잠이 든 것이지, 죽은 게 아니잖아? 힘은 계속 미세하게 흘러나오고 있었지.”

    “…….”

    “구석구석 네 성력이 남지 않은 곳이 없어. 당장 나도 힘들 정도니까. 그러니…….”

    “무모해!”

    마지막 것은 세이나의 답이 아니었다.

    레블로테와 세이나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외침은 디온이 누워 있는 방에서 바로 튀어나왔다. 아마도. 그 주인공은 오웬.

    뒤이어 디온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세이나는 안도의 한숨을 흘렸다.

    “일어났구나.”

    “저쪽도 정리가 되고 있나 보네.”

    디온이 오웬과 라샤드에게 그간의 일을 설명하고 있는 듯했다. ‘무모하다’는 말로 미루어 보아 디온이 혼자 스키아를 죽이러 갈 작정이었다는 부분쯤일까.

    이어서 오웬이 방을 박차고 나오지 않았으니, 그런대로 이야기가 잘 풀리고 있다고 생각해도 될 것이다.

    그 두 사람이 디온을 지키고 있다고 했을 땐 걱정했는데…….

    세이나는 그제야 마음 편히 웃을 수 있었다.

    “다행이다.”

    제대로 집으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 * *

    디온은 대충 설명을 끝내자마자 다시 잠들었다.

    그의 상태가 썩 좋지 않아 보였기에, 오웬과 라샤드는 더 말하라고 억지를 부리지 않았다. 조용히 자리를 비켜 주고 주방에서 세이나를 만나 남은 부분들을 채워 갔다.

    “미리 우리에게 협조를 구했어야지. 그랬다면 네가 신전에서 고생하지도 않았을 거 아냐.”

    오웬은 듣는 내내 계속 툴툴거렸다. 세이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결혼식에 진심이라 오해하고 있었다고는 말 못 하겠다…….’

    당장 본인도 숨긴 일을 그녀가 털어놓을 필요는 없었다.

    무엇보다 민망함이 먼저였다.

    아무리 착각이라지만, 공작님과 내가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니.

    그리 생각하며 슬쩍 눈치를 보다, 라샤드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깊은 눈매를 보다 보니 어쩐지, 그는 말하지 않아도 눈치챈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라샤드는 굳이 그 사실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대신 일어나 낮게 물었다.

    “식사는 했어?”

    오랜만에 함께하는 식사 준비는 즐거웠다.

    레블로테가 안심하라고 했기에, 세이나는 잠시 스키아에 대한 생각을 미뤄 두고 마음 편히 지낼 수 있었다.

    요리가 다 되었을 즈음엔 디온도 일어나 오랜만에 넷이서 다 함께 식탁에 모일 수도 있었다.

    ……비록 전과 똑같이 유쾌한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아주 어색하지도 않았다.

    디온은 또 당근이 있다고 투덜거렸고, 라샤드는 골고루 먹어야 한다고 핀잔했다. 오웬은 아직 디온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아 보이는 표정이었지만 적당히 대화에 응해 주었다.

    라샤드와 오웬은 디온이 잠든 것을 확인하고 잠시 주변을 둘러보겠다고 집을 떠났다. 세이나는 그사이 목욕을 마쳤다.

    일과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오자 하늘이 모두 검게 물들어 있었다.

    디온은 세이나의 머리가 다 마를 때쯤 그녀의 방을 찾아왔다.

    “몸은 어때?”

    “괜찮아요.”

    그리 말하는 표정이 너무나 쓸쓸해 보였다.

    세이나는 천천히 앞으로 다가가 디온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의 품에 이마를 맞대자 디온의 손이 뒤통수에 와 닿는 것이 느껴졌다.

    “미안해.”

    “……세이나가 왜요?”

    “그냥…… 다…….”

    오래전부터 함께 있던 정령이라고 했다.

    스승이 그리 떠난 후에도. 세이나를 만나기 훨씬 전부터.

    두 사람이 함께한 세월을 헤아릴 수조차 없었기에, 세이나는 아무 말 없이 그를 안고만 있었다. 어떤 따뜻한 위로도 이 가슴에 와닿지 않으리라.

    디온도 그녀를 조용히 끌어안았다. 그렇게 꽤 긴 시간이 흐른 후, 세이나가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각성은…… 내일로 미룰까?”

    “한시라도 빠른 게 좋을 겁니다. 집이 안전하다고는 하지만, 스키아가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까요.”

    그녀의 기분을 위해서 그냥 하는 말 같진 않았다. 머리카락을 쓸어 주고, 뺨을 쓸어내리는 손길은 부드럽기만 했다.

    세이나는 덕분에 용기를 얻었다.

    “좋아, 그럼.”

    세이나가 포옹을 풀자 디온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런 그의 반응을 확인하지 못한 채, 세이나는 품에서 단검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바로 제 손바닥을 찔렀다. 제법 긴 상처 위로 붉은 피가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자.”

    “…….”

    “왜?”

    디온은 여전히 못마땅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를 한참 들여다보던 세이나는 뒤늦게 그의 불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여기는 정령계가 아니잖아. 입술이 부어 버릴지도 모른단 말이야.”

    “…….”

    “그리고 다른 사람이 입술은 왜 그렇냐고 물으면 민망하잖아. 뭐라고 둘러대?”

    상상만 해도 괜히 낯이 뜨거워졌다. 세이나는 거짓말에 몹시 서툴렀다.

    하지만 디온은 그런 상황 따위 전혀 걱정하지 않는 눈치였다.

    보다 못한 세이나가 그의 코앞에 손바닥을 들이밀자, 그제야 그가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마침 흘러나온 피가 손가락을 타고 흘러내리기 직전이었다.

    “뒤에 앉아요.”

    세이나는 고분고분 침대에 앉았다. 하지만 뜻밖에도, 디온이 선택한 자리는 그녀의 옆이 아니었다.

    “디온?”

    바로 앞.

    세이나는 놀란 눈으로 한쪽 무릎을 꿇은 디온을 내려다보았다. 왜 이쪽으로 오지 않냐고 묻기 직전, 디온의 입술이 그녀의 손바닥에 닿았다.

    시작은 가벼운 입맞춤으로. 곧 선홍빛 혀가 나왔을 때, 세이나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가 상처에 닿는 감각이 너무 선명해서 당황스럽기도 했다. 손의 상처 따위, 수도 없이 경험했건만. 오늘따라 느낌이 이상했다.

    ‘왜 무릎을 꿇냐고.’

    디온은 정성스럽게 그녀의 손을 핥았다.

    그의 붉어진 입술을 보고 있으니 계속 그와 입을 맞췄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 순간에도 이런 표정이었을까. 차분하게 눈을 감고, 천천히 혀를 움직…….

    ‘무슨 생각하는 거야!’

    세이나는 세게 고개를 저었다.

    ‘이건 치료야. 치료.’

    하지만 계속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마저 막기는 어려웠다. 온몸이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었다.

    ‘좋은 방법이 아니었어.’

    디온은 오늘도 예뻤다. 비록 아직 마음에 들지 않는지 한쪽 눈살을 구기고 있었지만, 그것마저도 보기 좋게 다가왔다.

    당장 다가가 입맞춤을 퍼부어 주고 싶을 만큼이나.

    ‘착한 생각. 착한 생각…….’

    그러나 그리 생각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세이나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의 머리칼을 쓰다듬고 말았다. 디온이 고개를 든 것은 바로 그때였다.

    피로 물든 입술은 더 붉어져 있었다. 그 사이에서 나온 선홍빛 혀가 가볍게 그의 입술을 쓰는 것을, 세이나는 홀린 듯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내 그가 몸을 일으켜, 다가올 때까지.

    세이나는 눈을 감고 입술을 열어 그를 받아들였다.

    몸이 뒤로 넘어지고, 등 뒤로 부드러운 이불이 닿았다. 다리가 닿은 쪽의 침대가 푹 꺼지는 것이 느껴졌다.

    디온이 올라오고 있었다.

    ‘이건 치료였는데.’

    하지만 생각과 달리 손은 그의 목을 제 쪽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긴 입맞춤 후에 그가 작게 속삭였다.

    “손. 나았는데.”

    “아……. 그래?”

    어쩐지 이제 아프지가 않더라.

    “금방 나으니까 괜찮죠?”

    “밑에 사람들도 있고…….”

    “아직 안 돌아왔어.”

    세이나는 가쁜 숨을 내쉬며 그의 뺨을 부드럽게 쓸었다.

    그는 아직도 어딘가 불만스러워하는 표정이었다. 아니, 이건 불만보단…….

    “왜 그래?”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알아차린 세이나가 물었다. 디온은 그녀를 내려다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체 무엇이 그를 불안하게 만든 걸까.

    “말했지만, 결혼식은 그냥 나가려는 방법이었을 뿐이야. 나는…….”

    말을 마무리하기 전에 그의 입술이 다시 세이나를 덮쳤다. 그는 조금의 여유도 주지 않고 바로 세이나의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다른 이야기가…… 있는 것 같은데.’

    그리고 점점 눈이 감겨 왔다. 손바닥의 상처로 인한 졸음이 이제야 몰려오는 것이라고, 세이나는 생각했다.

    ‘물어봐야…….’

    세이나는 결국 아무것도 묻지 못하고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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