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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 여주의 옆집에 살고 있습니다-167화 (167/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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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몸에 제 팔을 쑤셔 넣는 와중에도 그 마족은 히죽 웃고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성녀를 묶어 둬 주기까지. 고마워서 어쩌나.”

“커헉!”

어떻게 이렇게 빨리. 그녀의 눈동자에 담긴 당혹의 의미를 알아차린 세이나는 비통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스키아는 ‘도망치느라 애썼다.’라고 했다.

소녀는 마족으로부터 피해 다니며 디온을 지킨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큭……!”

스키아가 팔을 빼내자 레티는 피를 토하며 세이나의 바로 앞에 쓰러졌다. 디온이 격한 기침을 터트린 것도 바로 그때였다.

세이나의 눈동자가 불안으로 미친 듯이 흔들렸다.

‘고작 이런 나무줄기 따위에!’

디온마저 마법을 쓰지 못하는 상황에서 멀쩡한 것은 자신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묶여 있는 꼴이라니.

다시금 찾아온 무력감에 뼈저리게 아팠다. 분하고 원통해서 계속 발버둥을 치자 앞에서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스키아는 아주 재미있다는 듯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드디어 마음 편히 식사할 수 있는 건가?”

악마.

가히 그 호칭이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팔을 흔들어 레티의 피를 주변에 흩뿌리며, 스키아가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왔다.

고대하던 먹잇감을 앞둔 포식자의 얼굴.

그녀는 이 순간을 진심으로 즐기는 것이 틀림없었다. 내딛는 발걸음은 춤추듯 가볍고, 또한 느렸다.

바로 그것이.

“디온.”

바로 그녀의 패착이었다.

“이 무슨!”

땅에서 솟아오른 수십 개의 뿌리가 그녀의 몸을 습격했다. 그와 동시에, 세이나는 사지를 속박한 구속이 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바로 디온에게로 다가가 그를 부축했다. 다시 본 스키아는 미친 사람처럼 새까만 뿌리들을 손으로 쳐 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 레티가 있었다.

피에 젖은 손으로 스키아의 발목을 움켜잡은 소녀는 이미 각오를 마친 얼굴이었다. 갈색 머리칼은 점점 뿌리가 되어 땅으로 흘러내렸고, 붉은 얼굴은 백지장처럼 창백해졌다.

더는 인간이라고 하기 어려운 모습이었으나, 눈물이 뚝뚝 흘러내리는 두 눈만큼은 온기가 깃들어 있었다.

세이나는 어느새 그녀의 어깨에서 피어오른 두 쌍의 날개를 발견할 수 있었다.

“미안해…….”

알레데이아. 인간을 사랑하여 인간의 곁에 남은 정령.

“더, 같이 있어 주고 싶었는데.”

그 말을 마지막으로 레티와 스키아는 사라졌다.

*

다시 눈을 떴을 땐 황야였다.

어디서 왔는지 모를 모래바람을 맞으며 세이나는 거의 기어가듯 나아갔다. 다행히 얼마 가지 않아 그가 보였다.

“디온!”

디온은 완전히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미약한 숨소리를 확인한 세이나는 곧바로 옆에 떨어진 낡은 단검도 발견할 수 있었다.

스키아가 나타난 것은 그녀가 손바닥을 단검으로 긋기 직전이었다.

“허억…… 허억…….”

세이나는 단검을 고쳐 쥐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스키아는 말 그대로 엉망이었다.

은색 머리칼은 여기저기 헝클어져 있고, 온몸에 흙이 덕지덕지 묻어 있다.

땅속에서부터 손으로 헤쳐서 파고 나오면 아마 저런 몰골일 것이다. 늘 보이던 여유가 사라졌으나, 세이나는 그녀를 비웃을 작은 미소조차 짓지 못했다.

‘레티에게서 빠져나온 건가?’

그 요정은 정령계와 일체가 되어 가고 있었다. 그럼, 이 황야는 현실 세계인 걸까.

하지만 혼란을 정리할 틈조차 그녀에겐 허락되지 않았다. 세이나는 디온을 뒤에 두고 몸을 일으켰다.

손에 쥐어져 있는 무기는 단 하나.

그걸 발견한 스키아가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미친 사람처럼 소름 끼치는 자태였지만, 세이나는 더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젠장, 어떻게든 되겠지!’

각오를 마친 세이나가 단검을 앞으로 세웠다. 거센 바람이 불어닥치지 않았다면, 그대로 그녀에게로 달려들었을 것이다.

사막에서나 볼 법한 모래 돌풍이 일었다.

덕분에 세이나는 싸움 중인 것도 잊고, 저도 모르게 눈을 비비고 말았다. 겨우 다시 떴을 땐 희미한 형상이 보였다.

스키아라고 하기엔 너무 작았다. 작은 머리. 긴 꼬리. 저건…….

‘고양이?’

바람이 잦아들자 그 모습이 확연히 시야에 들어왔다. 뜻밖에도 맞은편에서 먼저 외침이 터져 나왔다.

“레블로테!”

“오랜만이네?”

비록 등을 돌려 확인할 수 없었지만, 세이나는 그 고양이가 웃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무언가’를 했다는 것도.

“네가 감히 나를 거역해?!”

어쩐 일인지 스키아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못 하고 있었다. 고양이는 스키아와 세이나의 사이에서 한가롭게 앞발을 할짝거렸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지.’

저 고양이가 나를 지켜 주는 거야? 왜?

“너 따위가 어딜!”

“1,000년이면 독립할 때도 됐잖아? 안 그래, 주인님?”

“네 주제에 잘도……!”

그 순간, 갑자기 스키아의 등 뒤에 검은 선이 등장했다.

마치 허공에 거대한 균열이 난 것 같았다. 그 사이에서 뻗어 나가는 수십 개의 검은 촉수들을 보고 세이나는 일순 숨 쉬는 것마저 잊고 말았다. 마치 나무뿌리 같은 형상.

무섭게 퍼져 나온 촉수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스키아의 양 팔다리를 구속했다. 조금 전 레티가 불러냈던 것과 똑같았다.

“이거 놔!”

“정령은 집착이 심한 편이지.”

이내 검은 선이 커다란 원이 되자 세이나는 비로소 그 너머에 있는 울창한 밀림을 확인할 수 있었다. 쿵! 쿵! 무너지는 소리도 아득히 들려왔다.

정령계가 스키아를 끌어들이고 있다.

“그 미움을 살 정도로 멍청할 줄은 몰랐어.”

“젠장! 놔!”

“옛날에는 똑똑했었는데. 아, 벌써 노망이 드셨나?”

레블로테가 쿡쿡 웃으며 말했다.

잔뜩 비꼬는 말이었지만 스키아는 그마저 들을 정신이 없어 보였다. 촉수들은 강한 힘으로 그녀를 정령계 쪽으로 잡아당기고 있었다.

“놔!”

스키아는 격렬히 저항했으나 단숨에 모든 촉수를 끊어 내지는 못했다.

그녀의 발 한쪽이 검은 원 안으로 들어섰을 때, 레블로테가 뒤를 돌아보았다.

“이동한다.”

“어, 어?”

그리고 다시 눈을 뜨자 다른 공간이 펼쳐졌다.

몹시 익숙한 풍경임에도, 세이나는 좀처럼 정신을 차리기가 어려웠다.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순간밖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집?”

세이나는 그녀의 집 거실에 떨어져 있었다.

착각일 리가 없었다. 당장 보이는 커튼과 낡은 벽난로. 그 위에 질서를 맞춰 세워져 있는 장식품들.

모두 그녀가 매일 정성 들여 손보던 것이었다. 곧이어 큰 외침이 들린 후에야 그녀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세이나!”

주방 쪽에서 달려온 이는 다름 아닌 라샤드와 오웬이었다. 환상이나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생동감 넘치게 놀라는 표정이었다.

“오웬? 공작님?”

“어떻게 된 거야? 그건…… 디온?!”

디온은 그녀의 무릎 바로 앞에 있었다. 그 옆엔…….

“레, 레블로테가…… 나를 도와……줬어요.”

흰 고양이가 가볍게 제 몸을 털었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을 때, 세이나는 그것의 파랗던 눈동자가 노란빛으로 바뀌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미소는 오랜만에 봐도 얄미웠다. 어떻게 고양이에게서 이런 감정을 느끼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왜?”

“뭐야.”

레블로테는 실망스럽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날 못 알아보는 거야?”

* * *

디온은 고통 속에서 정신을 차렸다.

무심코 머리칼을 넘기던 그의 손이 허공에서 뚝 멎었다.

타인이 보기엔 아무것도 없이 깨끗한 그의 손등이지만, 그곳에는 그만이 볼 수 있는 작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레티와 계약을 맺자마자 스승이 직접 새겨 준 표식이.

‘없어.’

깨끗한 손으로 제 눈 위를 꾹 누르며 디온은 입 안의 여린 살을 깨물었다.

마음속이 텅 빈 것 같았다. 늘 레티를 향해 희미하게 빠져나가던 마력은, 완전히 끊겨 버려 동요조차 없었다.

‘없어.’

혼자였다면 아마, 모든 것을 내려놓고 울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바로 앞에서 계속 기척이 느껴졌기에 디온은 손을 내리고 앞을 쏘아보았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붉은 머리칼이었다.

“얼마나 지났죠?”

“……뭐?”

오웬은 디온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인상부터 찌푸렸다. 답변은 옆에 있던 라샤드에게서 나왔다.

“하루.”

‘체감으로 3일은 훌쩍 지난 것 같은데.’

그의 배에 난 상처는 하루 만에 회복될 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대로 며칠만 있었으면 마법을 쓸 수 있었을 텐데. 스키아, 그 지독한 여자가 끼어드는 바람에…….

‘젠장.’

하지만 레티로서는 하루도 최선이었을 것이다.

의문점은, 어떻게 그 여자가 레티를 찾아낼 정도로 회복했냐는 것이었다. 그녀가 부른 마물은 분명 꽤 많은 수였다. 어깨도 다 낫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내가 아는 것보다 마족은 더 대단한 존재일지도.’

그녀를 죽인다는 것은 결국 헛된 계획이었던 걸까. 디온은 허탈감에 실소를 흘렸다.

더 생각해 보고 싶었지만, 맞은편에서 쏘아대는 시선이 너무 따가웠다.

디온이 느리게 몸을 일으키자 오웬이 물었다.

“전부 설명해.”

어울리지도 않는 엄숙한 표정이었다. 완전히 가라앉은 기분이 아니었다면, 마음껏 약 올리면서 놀려 줬을 것이다.

디온은 느리게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없다. 확실하게. 의심할 여지도 없이.

그녀와 함께 있었던 세월이 10년이었다. 디온은 상실감에 제 몸을 가누기 어려웠다. 가슴이 수차례 짓밟힌다면 이런 느낌일까.

“세이나……는요?”

혼미한 정신으로도 그녀에 대한 걱정은 놓지 않았다.

뜻밖에도 대답은 바로 들려오지 않았다. 디온은 의아하여 고개를 들었다가 라샤드와 눈이 마주쳤다.

팔짱을 낀 그는 오늘도 근엄한 낯이었다. 하지만 그를 꽤 오래 보아 왔기에 디온은 그에게서 일어난 미세한 변화를 읽어 낼 수 있었다.

‘설마 잘못되기라도 한 건가?’

아니, 그렇다면 더 극적으로 눈빛이 흔들렸을 것이다. 오웬처럼 감정 표현이 확실한 사람은 더 반응이 좋지 않았을 테고.

짧은 침묵 속에서 그들의 속내를 읽어 내기는 그리 어렵진 않았다. 디온은 픽 웃으며 말했다.

“불안하죠?”

효과는 바로 왔다. 흠칫 떨리는 라샤드의 어깨를 보며 디온은 눈을 가늘게 떴다.

“빼앗아 갈까 봐.”

몇 개월 전. 바로 이 집에서.

디온은 라샤드를 쫓아내기 위해서 열을 올렸다. 유클레스 후작이 공작을 쫓다 세이나를 발견할지도 모른다고 걱정해서.

그리고 마음 깊은 곳에는 부정하기만은 어려운 또 다른 염려가 존재했다.

라샤드 칼만. 제국에서 가장 유명한 젊은 공작. 다가오는 모든 남자를 내친 엘렌마저 호의를 보낸 남자.

세이나의 집 한쪽을 차지한 그를 보고 디온은 생전 처음 위기감을 느꼈다. 그의 행동을 주시하고 항상 경계했다.

지금, 라샤드와 같은 눈으로.

“이제야 공작님이 제 심정을 아시는 것 같아 기쁘네요.”

가라앉은 기분이 조금은 유쾌해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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