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 여주의 옆집에 살고 있습니다-166화 (166/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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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관들은 세계의 창조주인 여신을 배척하지 않았다.

오히려 추앙하고, 자신들 역시 여신의 뜻을 따르는 존재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그 여신께서 혼란스러운 세상을 정리하기 위해 보낸 존재가 바로 마족이라고 가르쳤다.

“초대 성녀는 여신의 뜻을 잘못 헤아려 마족들과 갈등을 빚었습니다. 그것은 그릇된 판단입니다.”

안타깝게도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은 그녀밖에 없었다.

“우리는 다시 마족들을 깨워, 지금의 죄인들 역시 심판대에 올려야 합니다. 돈과 권력으로 백성들을 우롱하는 악의 세력을 모두 말살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성녀의 피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다른 이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이런 교육을 받은 것 같았다. 눈을 깜빡이며 연거푸 고개만 끄덕였다.

“여러분께서는 성녀님이 될 가능성이 있는 분들입니다. 부디 열심히 교육에 임해 주셔서 보다 높은 경지에 이르러 주세요. 성녀가 되신 한 분께서…….”

신관은 자부심에 찬 표정으로 미소 지었다.

“마족을 깨워, 세계의 구원자가 되실 겁니다.”

세이나는 충격을 금치 못했다.

‘마족이면 당연히 안 좋은 거지! 신의 사자라니! 미친 거 아니야?’

세이나는 전생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의 전생에서 일반적으로 ‘마족’이란, 그리 좋은 존재가 아니었다.

그리고 신관들의 최종 목적은 세계를 정화하는 것이었다.

말이 좋아 ‘정화’지.

‘결국 거슬리는 이들은 다 죽이겠다는 뜻이잖아…….’

후에 알고 보니 그녀와 함께 있는 소녀들은 모두 같은 마을에서 태어난 이들이었다. 그 마을은 초대 성녀가 태어났다고 전해지는 곳.

신관들은 제법 긴 세월 동안 그 마을의 아이들을 지켜봐 왔다. 언젠가는 여기서도 성녀가 나타나겠지. 기다리고 또 기다리다가…….

“기록에 따르면 초대 성녀께서는 아주 영민한 두뇌를 가지셨다고 하더군요. 남다른 발상의 전환으로 마족들을 궁지로 몰았다고 합니다.”

“…….”

“마치 다른 차원에서 온 사람 같았다더군요.”

결국, 1명이 걸렸다.

‘X됐다.’

내가 성녀라니. 마족을 깨워, 파멸을 부를 씨앗이라니.

반발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녀는 너무 어렸다.

그나마 하나 다행인 것은 아직 시간이 있다는 것 정도.

“초대 성녀님은 12살에 능력을 자각했다고 전해지죠. 아마 12살이 되어야 힘이 발현되는 것 같습니다.”

‘미친.’

“더 빠른 발현을 위해서는 강도 높은 공부가 필요합니다. 성녀님께서는 아주 영민하셨다고 하시니, 여러분이 성녀라면 바로 알아들을 수 있을 겁니다.”

‘무슨 개소리야.’

“혹시 공부하시다 낯선 기억이 있으면 말씀 주세요. 너무 이해가 잘 되거나, 술술 풀린다면 아마도…….”

‘절대 싫어.’

“성녀일지도 모릅니다.”

세이나는 결심했다.

‘12살이 되기 전에 도망가야겠어.’

얌전히 피를 뽑힐 수는 없었다. 부활에 피가 얼마나 필요한지 모르지 않는가. 죽을 때까지 다 마족에게 빨려야 한다면 최악이다.

‘내가 성녀인 걸 알게 되면 신관들은 기뻐하며 나를 마족에게 바칠 거야.’

배우기로, 성녀의 피는 오직 성녀가 살아 있을 때만 유효했다. 산 채로 피가 빨리는 상상을 하자 오싹 소름이 끼쳤다.

어떻게 도망갈 수 있을까. 고민하고 고민하던 어느 날.

어떤 여자가 신전을 찾아왔다.

여자는 자신이 여행자라며 신관들의 뜻에 깊이 감복하여 먼 곳에서부터 찾아왔다고 했다.

신관들은 처음엔 여자를 경계했지만, 여자의 말솜씨가 너무 좋아 점점 설득되어 갔다. 그녀가 베푸는 돈도 큰 역할을 했다.

“저는 이제 곧 성국으로 갈 예정입니다. 그곳에도 저와 뜻을 함께하는 친구들이 있죠. 기회를 잘 잡으면 제가 누가 진짜 성녀인지 대신 검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신관들은 좋아하며 소녀들을 모두 불렀다. 팔뚝을 살짝 베고, 유리병에 피를 받아 여자에게 전달해 주었다.

세이나도 피할 수는 없었다.

부디 여자의 말이 그저 허풍이기를 바라면서, 그녀는 팔을 걷어 피를 주었다. 그런데 물러서기 직전, 느낌이 좋지 않아 여자를 돌아보았다.

“저 사람은 누구예요?”

서툰 발음으로 옆의 신관의 옷을 잡아당기며 물었다. 누군지 알아나 두자. 혹시 내가 잘못되면 눈을 감기 전에 원망해 둘 생각도 없진 않았다.

여자는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예쁘게 웃으면서 친절하게 말했다.

“레티샤란다, 아가.”

* * *

눈을 뜨자 다시 동굴이었다.

고개를 돌린 세이나는 동굴 입구에 앉아 있는 디온을 발견했다. 돌아왔구나. 작게 중얼거리기가 무섭게 그가 기척을 느껴 그녀를 돌아보았다.

세이나는 몸을 일으켰다. 디온이 다가와 그녀의 앞에 앉고 물었다.

“이번 기억은 어땠어요?”

“……예상대로 썩 좋진 않았어.”

“들려줘요.”

세이나는 담담하게 말을 이어 갔다.

부모님이 자신을 신관에게 팔아 넘겼다고 했을 때는 조금 목소리가 떨리긴 했지만, 이내 평온함을 찾을 수 있었다.

신관들의 교육은 최대한 축소했다. 말하다 보면 저도 모르게 마족을 안 좋게 말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디온이 놀란 대목은 가장 마지막이었다.

“이름이, 뭐라고요?”

“레티샤.”

그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더니 곧 작게 웃었다.

“그렇게 된 거였군.” 하고 그가 중얼거리는 동안 세이나는 알아듣지 못해 가만히 고개를 기울이기만 했다.

잠시 후 나온 대답은 몹시 뜻밖이었다.

“……제 어머니입니다.”

디온은 차근차근히 설명했다. 잊었던 기억에 이어 디온의 과거까지. 놀라움의 연속인 상황에서 그녀는 잠자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어머니는 피를 숨기고, 바로 제국으로 돌아와서 아버지를 만났을 겁니다.”

그는 태어났을 때부터 몹시 연약했다. 오웬이 들은 소문은 거짓이 아니었다.

“세이나가 저를 살린 거네요.”

디온이 말을 끝내며 미소 지었다.

새롭게 깨달은 사실이 퍽 마음에 든 눈치였다. 세이나는 쑥스러워져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얻어걸린 느낌이 좀 있긴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그 신전에 끌려간 게 잘된 게 되어 버렸네.’

레티샤가 그녀를 찾아내지 못했다면 지금의 디온을 만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세이나가 마주 웃었고.

쿵!

갑자기 큰 소리가 들렸다. 미약하게 바닥마저 흔들리자, 디온과 세이나의 얼굴이 단번에 심각해졌다.

“여기 있어요.”

“같이 갈래.”

마침 빗줄기도 조금 약해져 있었다.

그래도 여전히 빗물에 닿으면 따끔거렸기에 세이나는 모포를 머리 위에 쓰고 몸을 가렸다.

처음으로 올려다본 정령계의 하늘은 우울하기 짝이 없었다. 시간은 대충, 늦은 오후 즈음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저쪽에서 들렸지?”

주변은 울창한 밀림이었다.

몹시 낯선 나무는 없었기에 세이나는 큰 거부감 없이 수풀을 헤쳐 나갈 수 있었다. 비만 내리지 않았다면 높은 습도 때문에 땀을 엄청나게 흘렸을 것 같은 장소다.

야생 동물의 기척은 없었다. 혹시 벌레는 있을까 귀를 기울이던 세이나는 다시금 큰 울림을 들을 수 있었다.

쿵!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다.

얼마 가지 않아 주변의 나무들이 사라지고 탁 트인 장소가 나타났다.

절벽 끝. 까마득한 아래를 내려다보던 세이나의 귓가에, 쿵! 또 다른 울림이 스쳤다.

고개를 들자 커다란 산이 보였다.

아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산맥이었을 것이다. 쿵! 다시 땅이 울리고, 산의 왼편이 무너져 내렸다.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거인이 짓밟는 것처럼.

“정령계가…….”

“무너지고 있군요.”

산이 완전히 사라지자 그 너머의 흐릿한 다른 산봉우리가 보였다. 그리고 쿵!

똑같이 무너져 내렸다.

세이나는 그 현상을 알고 있었다.

‘침식.’

오염의 최종 단계.

모든 것을 변화시킨 마기는 최종적으로는 땅에 침투하여 마지막 남은 생명력까지 흡수한다.

그리고 그 작업마저 끝나면 결국 모든 것이 먼지로 변해서 사라져 버리게 된다. 이론으로나 접했던 과정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세이나가 당혹과 함께 입을 연 찰나.

“이렇게 직접 보게 될 줄은…… 꺅!”

“세이나!”

느닷없이 그녀의 몸이 뒤로 끌려갔다.

정확히는 그녀의 다리를 스치고 있던 수풀에서 나무줄기가 나와 발목을 잡아당긴 것이었다.

디온이 세이나의 곁에 이르렀을 땐 이미 그녀의 온몸이 줄기에 묶인 후였다.

그녀의 상태를 확인한 디온은 침착하게 마력을 불러들였다. 하지만 주문이 제대로 끝나기도 전에, 그의 팔뚝에서 검은 핏줄이 튀어 올라왔다.

“윽!”

“왜.”

그리고 그 소녀가 나타났다.

“왜 아직 안 죽였어?”

갈색 머리칼의 소녀는 전과 달리 지저분했다.

바닥에 여러 번 구르기라도 한 건지, 여기저기가 흙투성이다. 깔끔하게 묶어 내렸던 양 갈래의 한쪽은 날카로운 것에 잘려 날아간 상태였다.

세이나는 이제 그녀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레티.”

“기껏 기회를 만들어 줬는데…….”

소녀, 레티는 고통스럽게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들의 유언을 잊었어?”

그것만은, 세이나가 모르는 것이었다.

그녀가 의아하여 고개를 들자 레티와 눈이 마주쳤다. 소녀는 쓰러진 세이나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성녀를 죽여.”

레티는 품속에서 작은 단검을 꺼내 던졌다. 세이나가 늘 들고 다니던 그것이었다.

“그럴 순 없어.”

“디온!”

“미안.”

“그걸 위해 살아왔잖아! 성녀를 죽일 거라고! 매일 밤 내게 말했잖아!”

디온은 더 대답하지 않았다. 레티를 외면하고 세이나에게 다가와 무릎을 접었다.

“기다려요. 풀어 줄게요.”

세이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유언이라면, 혹시.

‘디온의 어머니가 날 죽이라고 한 거야.’

그녀는 후작을 막아 달라 부탁했다고 했다.

가장 빠른 것은 당연히, 성녀의 죽음. 황제가 결단을 내렸고, 대신관이 고민하던 바로 그 방법.

화를 낼 수는 없었다.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니까. 그저 그 부분을 숨겼을 뿐.

‘내가 상처받을까 봐…… 그래서…….’

디온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맨손으로 가시 돋친 줄기를 붙잡았다. 그의 손바닥을 타고 뚝뚝 진득한 핏방울들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레티는 이제 곧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분위기를 살피던 세이나가 그녀를 향해 입을 열자.

휘익!

바로 줄기가 뻗쳐 나와 디온을 옭아맸다.

“윽!”

“디온!”

눈 깜짝할 사이 디온과 세이나 사이의 거리가 멀어졌다.

“네가 못 하면 내가 하겠어.”

“레티!”

레티가 빗물에 젖은 단검을 들어 올렸다.

슬픔이 사라진 검은 눈동자는 한없이 공허하기만 했다. 세이나는 오싹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진심이야.’

저 소녀는 정말 자신을 죽일 작정이었다.

발버둥을 쳐 봤지만 몸의 속박은 아직도 굳건하기만 했다. 동시에 온몸이 따갑고 쓰라렸다. 넘어지면서 모포가 떨어졌던 탓이다.

디온이 크게 소리쳐 레티를 불렀으나, 소녀는 전혀 들리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한 발짝씩 세이나에게 다가오면서, 느리게 단검을 치켜올렸다.

그녀가 이윽고 세이나의 앞에 멈춘 그때.

“그건 안 되지.”

레티의 눈동자에 빛이 돌아왔다. 충격과 경악. 마지막으로 공포마저 스친 순간, 레티가 뒤를 돌아보았고.

검은 그림자가 그녀의 가슴을 관통했다.

“컥!”

레티의 몸에서 튀어 오른 피가 후두둑 세이나의 얼굴 위로 흩뿌려졌다.

바로 앞에 있었기에, 세이나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피를 토하는 레티와, 그녀의 몸을 관통해서 복부에 치솟아 오른 그림자. 그리고…….

“도망 다니느라 애썼어, 정령.”

레티의 바로 뒤에서 음흉한 미소를 짓고 있는 은색 머리칼의 여자를.

‘스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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