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 여주의 옆집에 살고 있습니다-164화 (164/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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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저택에는 엘렌의 편이 정말 단 1명도 없었다.

    엘렌은 매일 밤 훌쩍이다 지쳐 홀로 잠이 들었다. 많이 울어버린 탓에 늦게 일어나는 날에는 하인들이 야단을 쳤다.

    존중이라고는 하나 없는 매서운 호통. 엘렌은 어렸을 때부터 많은 사람의 눈치를 보면서 자랐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 아버지가 엘렌의 식사 시간을 챙기는 것 정도인가.

    하지만 따뜻한 말은 없었기에 훌륭한 아비라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호화로운 식당에서도 엘렌은 철저한 외톨이였다.

    그 아이에게 건네지는 것은 이따금 후작 부인의 날카로운 눈총이 전부.

    - 음침하기 짝이 없지.

    그리고 세이나는 철저한 관찰자였다.

    마치 관객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꿈의 내용은 모두 엘렌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엘렌이 자거나 의식을 잃으면 꿈이 끊겨 버렸다. 그리고 다음 꿈은 어김없이 엘렌이 아침에 눈을 뜨는 것으로 시작했다.

    세이나는 점점 엘렌을 응원하게 되었다.

    눈을 뜬 후에도 꿈 내용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혹시 영화나 드라마인가 싶어 검색했지만 ‘엘렌 유클레스’라는 이름을 가진 여주인공은 없었다.

    딱히 할 일 없는 출퇴근길. 세이나는 언젠가부터 꿈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이름은 다르지만, 혹시 같은 내용의 드라마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그리고 2주일 뒤.

    엘렌은 가출했다.

    잘했다! 속이 다 시원하네!

    가출 밑에 자신이 남긴 코멘트를 보며 세이나는 피식 웃었다.

    맬빈을 처음 만났을 땐 조금 불안했지만, 다행히 그는 엘렌에게 우호적인 사람이었다.

    덕분에 무사히 가출도 하고 기억도 지웠다. 그딴 기억 없어도 괜찮다고, 세이나는 생각했다. 그녀가 아는 엘렌은 법 없이도 살 사람이었으니까.

    세이나는 미소를 띤 채 천천히 스크롤을 내렸다. 그날, 마지막 코멘트는 이러했다.

    그냥 내가 써 볼까?

    가출까지 넣어서 검색했지만, 엘렌과 꼭 닮은 주인공은 결국 나타나지 않았다.

    전 세계의 영화와 드라마, 만화까지 다 뒤지고 마침내 이른 곳이 소설이었다. 플랫폼을 전부 뒤져도 엘렌은 없었다.

    혹시 어떤 계시 같은 거 아니야?

    막 잠에서 깨어나 비몽사몽한 사이에 남긴 자신의 코멘트는 언제 봐도 웃겼다.

    계속 반복적으로 꿈을 꾸는 게 정말 이상하다. 뭔가 있긴 있는데, 대체 그 정체를 모르겠다.

    혹시 계시인가? 조상님께서 내게 내려 주신 대박 작품의 신호?

    생각이 계속 그쪽으로 쏠렸다. 그녀가 보기에 엘렌의 일생은 소설로 펼치기에 충분했다.

    불우한 어린 시절과 스스로 결정한 가출의 길. 기억을 지우고 홀로 꽃집을 운영해서 인망을 얻고, 잘난 남자 3명이 그녀에게 반한 것도.

    이제 자수성가만 하면 그럴듯한 소설의 완성이었다. 세이나가 간절히 바라는 결말이기도 했다.

    수도에 들어온 후 엘렌은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모든 일을 주도적으로 이끌었고, 용감하게 낯선 장소를 드나들었다. 만나는 모든 이들이 그녀에게 호의적이었고, 작은 갈등조차 없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3명의 남자를 저에게 빠져들게 했다.

    얼굴이 개연성이지. 엘렌은 예쁘니까.

    세 남자는 엘렌에게 첫눈에 반한 것 같았다. 그럴 만하다고, 세이나는 생각했다. 이따금 보이는 유혹적인 미소는 세이나도 놀랄 정도였으니.

    이전의 엘렌과 달라도 너무 달라진 것 같지만…….

    뭐, 어때. 엘렌이 즐거우면 됐지.

    그러다 어느 날, 공모전 소식을 보았다.

    사실, 잘 썼다는 확신은 크게 없었다.

    평생 다양한 소설을 보았지만 직접 쓰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으니. 완성에 의의를 두며 그녀는 없는 시간을 쪼개어 소설을 진행했다.

    하지만 어젯밤 꿈은.

    “뭔가 이상했지…….”

    세이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마지막 파일을 열었다.

    시작은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엘렌은 잠자리에서 일어나 씻고, 식사한 뒤에 꽃집을 청소했다. 정리를 끝내고 앞치마를 풀자, 돌연 문이 열렸다.

    그리고 나타난 은발의 사내.

    디온 프라벨……이었던가?

    그 예쁜 얼굴은 이전 기록에도 남아 있었다. 유클레스 후작은 엘렌을 차갑게 대하면서 이상하게도, 외부 행사에는 종종 데려갔었다.

    처음엔 그 나름대로 챙겨 주는 것인가 했으나, 전혀 아니었다. 그는 엘렌을 더 힘들게 하려고 밖으로 데려가는 것이었다.

    확신을 한 날이 바로 트라본 후작 영애 생일 파티 때였다.

    엘렌이 후작에게 따귀를 맞은 날, 옆에는 디온 프라벨이 있었다.

    그는 이후로도 종종 엘렌과 마주쳤다. 어디서 어떻게 나타났는지는 엘렌도 몰랐다.

    가끔 정원을 걷다가, 어느 날은 식사 시간에, 또 언제는 겨울에 와서 목도리를 주었다.

    그래도 나쁜 추억은 아닌지라 세이나는 조금 반가웠었다.

    반면 엘렌의 반응은 차가웠다. 그녀가 인상을 찌푸린 그때, 예의 남자 3명이 디온의 뒤에서 불쑥 나타났다.

    라샤드와 오웬, 맬빈은 엘렌의 반응을 보고 바로 디온을 내쫓았다. 디온이 미처 뭐라고 할 틈도 없었다.

    엘렌은 가만히 서서 그가 나가는 것을 지켜보기만 했다.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말조차 없었다.

    세이나가 아는 엘렌과는 무척이나 다른 태도였다.

    꿈은 뜻밖에도 꽃집의 문이 닫힌 직후 디온에게 집중되었다. 누구도 없는 싸늘한 가을의 거리에서, 꽃집을 쏘아보며 은발의 사내는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 찾았다.

    ‘대체 뭐였을까?’

    세이나는 몸을 앞으로 끌어당기고 팔꿈치를 책상 위에 올렸다.

    오랫동안 아무것도 안 한 탓에 대기 상태가 된 컴퓨터 화면은 검게 물들어 있었다.

    그녀의 미간은 계속 구겨져 있었다. 희미하게 남은 꿈을 다시 회상하며, 세이나는 스크롤을 내렸다.

    곧 다음 문장이 나타났다.

    그 꽃집에, 내가 모르는 비밀이 있다.

    그것이 그녀가 꿈에 대해 남긴 마지막 기록이었다.

    * * *

    세이나는 눈을 떴다.

    “어?”

    어두운 동굴 천장이 돌아와 있었다. 그리고 조금 서늘한 온도도. 고개를 돌리자 비가 쏟아지고 있는 숲이 보였다.

    “이게…… 무슨…….”

    세이나는 떨리는 손으로 제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떨려?’

    말 그대로. 그녀는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었다. 이윽고 찾아온 깨달음은 그녀가 제 입을 틀어막기에 충분했다.

    “세상에.”

    그 소설을 쓴 사람은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세이나는 충격에 다시 흠칫 몸을 떨었다.

    ‘나라고?’ 좀처럼 믿기지 않았다. ‘정말 나야?’ 조금 전 겪었던 순간들은 희미한 부분 없이 모두 머릿속에 또렷이 남았다.

    ‘나라니.’

    꿈이라기엔 과하게 선명했다.

    “왜 그래요?”

    디온은 그녀의 옆에 있었다.

    자는 그녀를 줄곧 지켰는지, 벽에 등을 기대고 있는 자세다. 어디서 찾아왔는지 모를 셔츠는 조금 젖어 있었다.

    세이나는 어쩌다 그랬는지 물을 겨를도 없었다.

    “내가…….”

    힘겹게 몸을 일으키기가 무섭게, 곧바로 추락하고 말았다.

    디온은 급히 그녀에게 달려들어 부축했다. 그때까지도 세이나는 계속 떨고 있었다. 디온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세이나?”

    세이나는 그의 팔을 꽉 붙잡고 숨을 골랐다. 다시 꿈이 반복되었다. 건조한 사무실. 일정. 소설. 기록. 모두 전생의 기억이었다.

    생각의 흐름은 느닷없이 튀어 과거로 향했다. 오웬은 성녀의 힘을 4가지라고 말했다. 마족 봉인. 정화. 치유.

    미래 예지.

    “설마.”

    “네?”

    “디온, 상처…… 정말 나았어?”

    “무슨 뜻이에요?”

    “내 피를 마셔서, 치유가 되고 있어? 정말?”

    디온은 눈을 감았다. 잠시 이어진 침묵 동안 세이나는 초조한 심정으로 그를 지켜보았다. 이윽고 눈꺼풀이 열렸고.

    “네.”

    세이나는 비명을 지를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떨림이 계속 멎지 않았다. 충격적이어서 제대로 말을 잇기도 어려웠다. 그럴 수가. 아니, 그럴 리가.

    디온이 그녀를 흔들지 않았다면 몇 시간이 흐르도록 그러고만 있었을 것이다. 차가운 손길이 목에 닿자 번쩍 정신이 들었다. 푸른색 눈동자가 그녀를 응시했다.

    “무슨 일이에요?”

    세이나는 그러고도 한참 후에야 겨우 입을 뗄 수 있었다.

    *

    그동안의 일을 정리해 말하는 것은 꽤 고역이었다.

    정령계에 있어서 차라리 다행이란 생각도 들었다.

    긴 설명 동안, 세이나는 배고픔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쉴새 없이 입을 움직여도 지치거나 힘들지도 않았다. 입술의 상처도 모두 사라진 뒤였다.

    덕분에 그녀는 최대한 담담하게 과거를 고백할 수 있었다. 전생과 환생. 그리고 디온을 만나기 전까지.

    디온은 가만히 그녀에게 귀 기울였다. 반응을 숨기지도 않아서, 세이나는 마치 자신이 대단한 연설자가 된 기분이었다.

    특히 전생의 꿈에서 디온을 보았다는 부분에서, 그는 드물게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쩌면…… 세이나는 전생부터 각성한 상태였을 지도 모릅니다.”

    “……그럴까?”

    “단지 자신이 ‘성녀’라는 자각이 없었을 뿐이죠. 그리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힘이 사라진 것 같아. 기억도 같이 사라진 것 같네요.”

    디온은 차분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아마 마기가 가득한 정령계의 환경이 자극을 준 게 아닐까요? 몸을 지키기 위해서 ‘정화’가 깨어났고, 피를 줘서 ‘치유’도 발현된 걸지도.”

    “그럼 남은 건 봉인이네.”

    “네. 혹시 지금 실험해 볼…… 농담이에요, 농담!”

    세이나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지자 디온이 급히 외쳤다. 그리고 바로 세이나가 토라져 등을 돌렸기에, 디온은 한참 미안하다고 말해야 했다.

    잠시 후, 그녀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다시 그를 마주했다.

    “아무튼, 아마 나는 앞으로 꿈에서 과거를 보게 될 것 같아. 내가 잊고 있는 부분이겠지.”

    “잊고 있는?”

    “유년 시절이지 않을까. 그땐 보통 기억 못 하니까.”

    디온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조금 두려워.”

    “어떤 부분이요?”

    세이나는 잠시 생각하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어진 말은 디온이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사실 내 부모님은 친 부모님이 아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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