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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은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디온의 품에 안겨 세이나는 한동안 계속 울기만 했다.
마치 제 몸이 고장이라도 난 것 같았다. 이건 어른스럽지 못하다고, 눈물을 참아 보려 해도 소용없었다.
디온은 내내 그녀의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밀어 내지 않고 천천히. 세이나는 그럴수록 그의 어깨에 더욱 얼굴을 묻었다. 그러다.
깨달은 것이다.
‘……잠깐만, 얘 벗고 있는데.’
한바탕 울고 나자 급격히 민망함이 찾아왔다. 어깨에 걸쳤던 수건은 그녀 때문에 밀려 넘어간 지 오래였다.
동굴은 적당히 서늘했지만, 그래도 벗은 채로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세이나는 괜히 헛기침하면서 그에게서 물러났다.
“흠, 그…… 이, 이제 몸은 어때?”
“마기가 있으니까 점점 치유될 겁니다. 하지만 언제 완치될지는 장담하지 못하겠네요. 이미 많이 약해져 버려서.”
이어진 설명은 세이나를 또 놀라게 했다. 그의 몸에 깃든 마력은 마족의 것이기에, 다루기 어렵다는 것도.
“하, 그럴 줄 알았어…….”
어린아이가 되었을 때 무리하게 마법을 써서 그는 폭주에 이를 뻔했다.
당시에는 본인이 괜찮다고 해서 일단 넘겼는데, 역시 괜찮지 않았다. 이후 2번의 혼수상태도 악영향을 미쳤다.
세이나는 다시 울적해졌다. 어떻게 그를 되돌릴 수 있을까. 생각하다 보니 다시 성녀의 힘이 떠올랐다.
‘다른 곳에 피를 내긴 어렵나?’
아파서는 아니었다. 잠깐 만져 본 입술은 상처 하나 없이 깨끗했다. 정령계의 영향인지, 성력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입술은 사실 그리 많은 양의 피를 뽑긴 어려웠다. 상처를 낸다면 역시 팔이 제일 나을 것 같았다.
제 손을 내려다보고 있던 와중, 세이나는 시선을 느꼈다.
고개를 들자 디온이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다 말했으니까 저도 여한이 없네요.”
“그게 무슨 뜻이야?”
“봉인하려면 지금도 괜찮아요.”
디온은 차분한 표정이었다. 입가의 웃음기마저 사라지자 엄숙하고 진지한 분위기가 찾아왔다. 그의 입술이 다시 열렸고.
“저는 마음의 준비가…… 앗! 아파요! 아파!”
세이나는 그의 팔뚝을 세게 때렸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해?!”
다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극적인 화해 이후에 할 말이 고작 저거라니! 당황과 동시에 울분이 치밀었다. 봉인이라니!
어이가 없다 못해 머리까지 어질어질해졌다.
그동안 마족에게 좋은 말을 한 적은 없었지만! 좋지 않다 못해 혐오스럽다고 팍팍 티를 냈지만!
어차피 하는 방법도 모르지만!
“아파요!”
“날 뭘로 보고!”
짝!
“윽!”
하지만 감정을 담은 매서운 손길은 오래 가지 않았다. 디온이 맞은 곳을 움켜쥐면서 몸을 앞으로 숙였기 때문이다.
“마, 많이 아파?”
그의 찌푸린 얼굴을 보자마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했다.
몇 번 때리지도 않았는데, 디온이 괴로운 듯 신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세이나는 무릎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걱정스레 살피던 중, 시선이 마주쳤다.
디온은 바로 입을 열지 않았다. 푸른색 눈동자가 깜빡깜빡. 계속 그녀를 주시하고만 있다.
세이나는 더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말도 못 할 정도로 아픈가?
“또 어디가…… 아픈데요?”
그러자 돌연, 디온이 폭소를 터뜨렸다.
“갑자기 말투가 왜 그래요?”
“내 멋대로 말을 편하게 했던 것 같아서…….”
당시에는 너무 화가 나서 바로 반말부터 튀어나왔다. 디온은 살짝 젖은 제 눈꼬리 끝을 닦으며 말했다.
“그냥 하던 대로 해도 괜찮아요.”
“그럼 그냥 하던 대로…… 할게……요.”
다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세이나는 낯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몇 걸음 가지 않아, 또 붙잡히고 말았다.
디온은 상체를 숙이고 웃고 있었다.
“아, 너무 웃어서 진짜 아파요.”
그리고 바로 일어섰다. 가까이서 마주 본 그는 이전보다 더 키가 큰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의 장난기 가득한 입꼬리를 보며 세이나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왜.”
“책임져 줬으면 좋겠어.”
가슴이 빠르게 두근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바로 받아들이고 싶진 않았다. ‘진짜’ 아프다니. 조금 전까지는 다 연기였다는 뜻이지 않은가.
“얼마나 아파?”
“안 해 주면 죽을지도.”
“또 거짓말.”
세이나는 무섭게 눈을 치켜떴다.
옷을 입고 있었다면 그 옷깃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흘리듯 하는 농담이라도 더는 거짓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나름의 위협인데, 디온은 계속 웃기만 했다. 얄밉기도, 사랑스럽기도 한 미소를 노려보며 세이나가 무겁게 뱉었다.
“지금부터 진짜만 말해.”
“지금부터?”
“그래. 앞으로 거짓말하면 절대로 안 해 줄 거야.”
그의 눈이 조금 커졌다가 가늘어졌다.
가까이서 본 푸른색 눈동자는 오늘따라 더 기묘한 빛을 품고 있었다. 볼수록 신기하여 더 뚫어져라 보는데, 문득 그가 말했다.
“그럼…….”
그리고 붙잡혔던 손목이 풀렸다. 두 사람의 코끝이 맞닿은 순간, 디온이 속삭이듯 말했다.
“좋아해요.”
두 번째 입맞춤은 이전처럼 부드럽게 시작됐다.
가슴이 뜨겁게 뛰는 것을 느끼며 세이나는 디온의 목을 끌어안았다. 천천히 눈을 감고, 그가 했던 것처럼 그의 입술을 머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입술에 뜨거운 통증이 일었다. 그의 목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고, 거친 숨이 흘러나왔다. 그가 자신의 입가를 핥는 것이 느껴졌다.
입맞춤은 턱을 스쳐, 이내 목까지 내려왔다. 정말 물 생각인가. 세이나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그가 허리를 잡고 있지 않았다면 뒤로 넘어졌을 것이다.
“그, 내가…….”
“응?”
겨우 입을 뗐으나 차마 말하기가 어려웠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싶어 망설이는데, 그가 물어 왔다.
“졸려요?”
“갑자기 긴장이 풀려서…….”
“풉.”
“싫은 게 아니야, 절대로. 지루한 것도 아니고, 그냥…….”
“괜찮아요.”
그러고 디온은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세이나는 몸이 점점 아래로 꺼지는 것을 느꼈다. 디온이 느리게 무릎을 굽혀, 그녀를 내려 주고 있었다.
정신이 몽롱한 와중에도 미안했다. 왜 하필 이럴 때 졸린 건지.
그러나 디온은 괜찮다는 듯 웃고 있었다. 억지로 눈을 부릅뜨려고 하자, 다시 입맞춤이 찾아왔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눈가에 입 맞추고, 디온이 속삭였다.
“잘 자요, 세이나.”
* * *
세이나는 몽롱한 상태에서도 계속 손을 움직였다.
‘퇴근 전까지는 마무리해야 하는데…….’
타닥타닥 소리가 요란하다. 극심한 두통을 느끼며 세이나는 이마를 짚었다. 흐렸던 시야가 선명해지고 감각이 돌아왔다. 세이나는 의아했다.
‘뭐지?’
조금 전까지 동굴에 있었는데.
주위를 둘러보니 삭막한 사무실이다. 타닥타닥.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귓가에 가득했다. 다들 열심히 일을 하는 중이었다.
‘이번에도…… 꿈인가?’
상황 파악이 제대로 되기도 전에, 모니터 우측 하단에 하얀색 창이 떠올랐다. 세이나는 화들짝 놀라며 다시 손을 움직였다.
‘으으, 빨리 해야 해. 빨리…….’
그녀는 빠르게 일에 빠져들었다.
서늘한 동굴도, 은발의 사내도 순식간에 머릿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지금의 그녀는 평범한 직장인. 해야 할 일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는 상태다.
이 자료를 정리하고 나면 바로 다음 회의에 들어가야 했다. 회의 후에는 기획안을 다시 확인하고, 얼마 전 들어온 후배가 정리한 회의록도 컨펌해 줘야 한다. 그리고 2시간 후에는 또 회의.
조금의 여유도 없는 삶이었다.
‘젠장, 반드시 이직하고 만다.’
시간이 꽤 흐르고 난 뒤 사람들이 하나둘 일어나기 시작했다. 시계를 보니 벌써 퇴근 시간을 훌쩍 넘어 있었다.
곧 사무실에 적막이 찾아오고, 다른 부서의 형광등이 하나씩 꺼졌다.
마지막 메일까지 발신하고 세이나는 의자에 등을 기댔다.
“후우…….”
오늘도 정신없는 하루를 보냈다.
온몸에서 기력이 빠지고 한숨만 계속 나왔다. 돌이켜 보니 저녁도 제대로 먹지 못한 것 같다.
이제 나도 일어날까. 주섬주섬 외투를 챙기다 보니 희미한 진동음이 들렸다.
세이나는 그제야 오후 들어 처음으로 핸드폰을 확인했다. 윙윙 울리는 창은 등록해 둔 일정을 보여 주고 있었다.
공모전 접수 마지막 날.
‘아, 벌써 그렇게 됐나.’
외투를 내려놓고, 세이나는 다시 쓰러지듯 의자에 앉았다. 아직 마무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는데. 한숨을 흘리며 뒷머리를 긁다가 손가락을 움직였다.
“일단 1화는 이 정도면 될 것 같고…….”
새롭게 열린 파일은 그녀의 평소 업무와는 매우 거리가 멀었다.
새하얀 배경. 줄 간격이 넓게 설정된 글자들이 그 위를 채웠다. 세이나는 작게 중얼거리며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자주 읽어서 눈에 익어 버리기까지 한 내용은 별다른 감흥도 주지 않았다.
“씁, 왜 볼 때마다 더 이상한 것 같지?”
그녀는 인상을 찌푸리며 다시 손가락을 움직였다. 또 다른 하얀 배경. 조금 전보다 작은 글자들이 화면을 채웠다.
그동안 정리한 꿈 내용이었다.
“엘렌이 가출하던 밤을 조금 더 극적으로 써야 하나?”
벌써 1달째. 그녀는 남은 여가 시간을 모조리 여기에 투자하고 있었다. 처음엔 단순한 정리 차원이었다.
며칠째 계속 똑같은 소녀가 꿈에 나오고 있었으니까.
꿈에 퍽 의미를 두는 경향은 아니었지만, 그 현상이 계속 반복되니 찝찝함을 감출 수 없었다.
여러 곳에 검색해 봤지만 이 상황에 대한 시원한 답변은 없었다. 게다가 그 소녀는 매일 성장해 나가고 있었다.
엘렌 유클레스.
그 이름을 제대로 들은 것은 세 번째 꿈에서였다. 귀여운 금발 여자아이는 가엾게도 형제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있었다.
엘렌 유클레스! 형제들은 그녀가 하는 작은 실수에도 눈에 불을 켜며 그 이름을 불렀다. 그때 나이가 고작 4살.
‘미친 것들.’
세이나는 자신이 정리한 꿈을 보면서 혀를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