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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 여주의 옆집에 살고 있습니다-162화 (162/179)
  • @162

    세이나는 고개를 숙였다.

    시간을 돌려서 그 시점으로 돌아간다 해도, 솔직히 자신은 없었다.

    그대로 검을 심장에 찔렀다면 엘렌은 영영 돌아오지 못하게 됐을 테니까.

    하지만 그녀를 되찾아 올 뾰족한 방법도 떠오르지 않았다. 답답함에 입을 닫은 그녀를 향해 디온이 조곤조곤 설명했다.

    “그리고 바로 스키아가 후작에게 제 발로 돌아왔습니다. 성녀를 확인했으니 바로 붙잡아 오라고 했죠.”

    “…….”

    “곧 도망칠 테니 빨리 잡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때 후작이 저에게 아버지의 ‘새’를 불러서 당신을 협회로 유인하라더군요.”

    후작의 예측은 정확했다. 디온은 그때 왔던 기사가 후작에게 이미 오래전부터 매수된 자라고 덧붙였다.

    “후작은 바로 당신을 빼돌릴 생각이었지만, 칼만 공작이 끈질겼죠. 협회의 눈치도 보였고. 그래서 급하게 재판을 당겼던 겁니다.”

    “…….”

    “사형이든, 징역이든. 한번 죄인이 되면 칼만 공작도 더는 손을 쓰기가 힘들어지니까. 이후에 빼내서 스키아에게 바칠 생각이었겠죠.”

    “…….”

    “그 일은 아마도, 저한테 시켰을 겁니다.”

    그의 설명을 따라가던 세이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새를 보내지 않았다면 협회로 갈 일도 없었어.”

    “그럼 어디로 갈 생각이었습니까?”

    “공작저…….”

    세이나는 말끝을 흐리며 디온의 눈치를 보았다.

    또 결혼식 이야기가 나올까 우려했지만, 디온은 기분이 상한 것 같진 않았다. 그는 차분한 어조로 설득하듯 말했다.

    “스키아는 세뇌를 쓸 수 있죠. 저보다 완벽하게.”

    디온은 세이나의 얼굴을 감쌌던 손길을 내렸다. 시선을 내리고, 잠시 말을 끊었다가 이었다.

    “자는 사이에 누군가 들어와 당신을 찔렀을지도 모릅니다. 공작저에 있는 모든 이들이 인질이 되었을지도 모르죠. 아론은 제 목에 칼을 대고, 후작에게 가지 않으면 자결하겠다고 했을 겁니다.”

    그가 말한 대로 상상하던 세이나는 작은 신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을 버리고 도망칠 수 있을 리가.

    ‘망할.’

    “당신에게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세이나를 주시하며 디온이 말을 이었다.

    “힘을 각성하고, 대책을 세울 시간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생각했죠.”

    “…….”

    “죽어 버리면 후작도 당신을 포기하지 않을까.”

    흠칫, 세이나의 어깨가 크게 떨렸다. 크고 동그랗게 뜬 그녀의 눈을 보고 디온이 피식 웃고는 덧붙였다.

    “제가 죽였다고 말할 생각이었습니다.”

    세이나는 그제야 디온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

    “죽은 척…… 하라는 거지?”

    “네. 당신을 그대로 도망치게 하는 것도 생각해 봤지만…… 오늘 같은 소란이 분명히 있었을 겁니다. 마물을 불러들여서 당신의 발목을 잡았겠죠.”

    “…….”

    “빠져나갈 수 있다고 확신하기엔…… 변수가 많았습니다. 당신도 다칠지도 모르고. 그보다 안전한 방법을 찾을 수밖에 없었죠.”

    “…….”

    “제가 죽였다고 하면, 후작은 앙심을 품고 저를 쫓았을 겁니다. 그 긴 술래잡기가 이어지는 동안 당신은 수도를 유유히 빠져나가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

    “영영 돌아오지 않아도 괜찮고.”

    만약 그렇게 이야기가 풀렸다면.

    도망자는 세이나가 아닌 디온이 되었을 테다.

    그래도 괜찮다고 디온은 웃으며 말하고 있었다.

    “왜…… 말 안 했어?”

    “말하려고 했습니다.”

    “언제?”

    “세이나는 후작의 감시를 계속 받고 있으니, 칼만 공작을 찾아갔죠.”

    디온의 시선이 다시 내려갔다. 조금 뒤,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때, 결혼 소식을 들었습니다.”

    * * *

    디온에게 칼만 공작의 첫인상은 끔찍했다.

    어떻게 좋을 수 있을까. 그가 한 달 내내 들어가지 못하고 서성이기만 했던 바로 그 집에, 칼만 공작은 무례하고 당당하게 입성했다.

    잘 떼어 놓았다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그는 돌아와 계약을 제안했다.

    ‘그냥 죽여 버릴까.’

    ……하는 생각도 없진 않았으나, 칼만 공작이나 되는 거물을 없애 버리는 것은 그에게도 큰 리스크로 다가왔다.

    무엇보다 유클레스 후작이 좋아할 만한 일은 해 주고 싶지 않았다.

    후작은 칼만 공작이 엘렌을 찾는 것을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그건 따지고 보면 후작의 안일한 판단 탓이라고, 디온은 생각했다.

    몇 년 전 스승의 옛 제자가 영지에서 달아났고, 후작은 “어차피 곧 죽을 놈이니 보내 줘라.”라고 디온에게 말했으니.

    그래서인지 후작은 칼만 공작이 그 괴물과 마주친 것 같다는 보고를 들었을 때도 화를 내지 않았다. 괴물을 쫓는 것이 아니라, 엘렌이 목적이라고 할 땐 조금 흔들리긴 했지만.

    ‘어떻게 떼어 내지?’

    후작은 공작을 항상 주목하고 있었다.

    만날 때마다 그가 어디에 있는지 물었다.

    디온은 정보를 모두 차단했지만, 시간 문제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가 세이나의 집을 드나든다는 것을 알면.

    ‘세이나가 휘말릴지도 몰라.’

    디온은 그를 내쫓고 싶었다. 귀족들은 보통 자존심이 높으니 살살 찔러 주면 화를 내고 떠나 버리리라. 일부러 더 얄밉게 굴고, 툭툭 그의 신경을 거슬렀다.

    하지만 칼만 공작은 꿋꿋하기만 했다.

    가장 우스운 것은 어느 순간부터 자신이 그에게 적응해 버렸다는 사실이었다.

    공작은 후작만큼은 아니지만 나름 놀리는 재미가 있는 사내였다.

    만들어 주는 요리도 맛있었고, 책 취향도 비슷했다. 짜증이 난 것이 빤히 보이는데 체면 때문에 화를 누르는 것이 웃겼다.

    그가 세이나에게 호감이 있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는 있었지만…….

    일방적인 감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결혼이라니.

    황성의 기둥 뒤에 몸을 숨긴 채, 디온은 몇 번이나 허탈한 실소를 흘려야 했다.

    언제부터였을까.

    고민을 이어 가느라 좀처럼 자리를 뜨지도 못했다. 언제부터 두 사람이 그런 사이가 될 걸까. 최근? 아니면 그보다 더 이전?

    ‘왜 눈치채지 못한 거지.’

    스스로가 이토록 한심하게 느껴진 것은 오랜만이었다.

    세이나에 대해서는 뭐든지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비록 공원에서는 그렇게 떠나 버렸지만…… 놀라서 그런 것이리라고. 스스로를 다독이고 애써 그 순간을 잊으려고 했다.

    다시 만나면 웃으며 반겨 주리라고.

    ‘결혼이라.’

    그러나 모두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디온은 계획을 모두 접을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결혼을 준비하고 있는데, 거기다 죽은 척을 하자고 제안한다니. 우스운 말처럼 들리지 않겠는가.

    그래서 세이나를 모르는 척했다.

    축하한다, 하는 그런 형식적인 말조차 입에 담기 어려웠다. 자신이 이렇게 속이 좁았던가. 한탄하기도 여러 번.

    도저히 그녀의 앞에 설 용기가 없었다.

    그리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결혼은 석방하기에 제법 괜찮은 수단이었다.

    공작의 결정을 알자마자 후작은 길길이 날뛰며 서재의 물건들을 집어 던졌다. 황제는 칼만 공작에게 늘 관대했기 때문이다.

    후작이 루카스 로브엘을 세뇌하라 명령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디온은 잠시 망설였지만, 후작의 뜻을 따랐다.

    여기서 후작을 거슬렀다간 그의 곁에 붙어 있는 것이 어려워진다. 혹시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모르니 후작의 정보를 계속 들어야 했다.

    다만, 루카스 로브엘을 세뇌하진 않았다.

    그냥 가서 적당히 연기하라고 말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루카스 로브엘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부모님을 풀어 줄…….”까지만 듣고 바로 울음을 터트렸다.

    달랠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그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으니.

    그렇게 어질어질한 머리로 끌고 간 재판장에서.

    황제가 그녀에게 사형을 선고한 것이었다.

    그리고 바로 오웬이 신전 녀석들을 끌고 왔다.

    ‘빌어먹을.’

    최악에. 또 최악.

    ‘왜 하필 신전이야?’

    후작 쪽이면 차라리 자신이 정보를 교란하거나 수를 쓸 텐데. 신전은 완전히 그의 손을 떠나게 된다.

    그리고 디온은 예전부터 신의 종을 믿지 않았다. 후작을 막아 내기도 충분치 않다.

    아니나 다를까. 후작이 바로 세이나를 데려오라 명령했다. 스키아가 자신의 힘도 쓰겠다 나선 그때.

    문득 접었던 계획이 떠오른 것이다.

    * * *

    “스키아는 당신이 남긴 어깨의 상처가 치료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 상황에서 힘을 더 쓰게 만들면, 저라도 죽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죠.”

    디온은 처음엔 거짓 정보로 스키아를 교란하고자 했다.

    저쪽에서 성녀를 발견한 것 같다. 그런데 내 힘으로는 역부족이다. 우는소리를 하며 그녀를 대륙 여기저기에 끌고 다닐 작정이었다.

    “그녀의 힘으로 태어난 마물은 그녀의 명령에 복종합니다. 마물들을 대륙 곳곳으로 보내면 힘을 소진할 수밖에 없죠.”

    “……오늘의 마물도?”

    “네. 최대한 많은 마물을 만들어서 혼란을 일으키라고 했습니다. 괴물을 대신 보내 성녀를 잡아 오게 하라고. 스키아는 저도 함께 가라고 하더군요.”

    이후의 상황은 세이나도 익히 아는 것이었다.

    그는 공작과 대치하면서 괴물을 주시했다. 그리고 괴물의 눈이 부서지고, 더 많은 마물이 오는 낌새를 눈치채자마자 바로 세이나에게 다가왔다.

    비로소 모든 퍼즐이 맞춰진 기분이었다.

    하지만 세이나는 도무지 울적한 기분을 떨치지 못했다.

    “그럼 그땐 왜 그랬어?”

    “그때?”

    “알레데이아.”

    뜬금없는 이름에 디온의 고개가 살짝 기울었다.

    알레데이아의 진실 게임에서 오웬은 디온에게 세이나를 좋아하냐고 물었다.

    디온의 대답은 긍정. 그러나.

    “거짓말로 나왔잖아.”

    “아.”

    디온은 그제야 떠올렸는지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조금 투덜대듯 말했다.

    “그때 세이나가 오웬을 보고 있었으니까요.”

    분명 그랬었다.

    왜 그런 질문을 굳이 지금 하느냐고. 책망하듯 날카롭게 오웬을 노려보았다. 그 짧은 눈빛 교환이 디온의 마음을 잠깐 흔든 것이었다.

    겨우 그것 때문에.

    세이나가 입술을 깨문 찰나, 디온이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시선을 맞추고 다정하게 말했다.

    “이제 다 설명…….”

    그때, 세이나의 눈물이 디온의 손등 위로 떨어졌다.

    디온은 놀라서 일순 굳고 말았다. 뒤늦게 조심스레 손을 잡아당겼지만, 세이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연이어 떨어진 눈물방울들이 맞잡은 손 위로 떨어졌다.

    재차 눈가를 훔쳐도, 눈물은 계속 흘러나왔다. 지금껏 참았던 감정들이 터져 흘러나와, 뺨을 적셨다.

    “날 싫어해서가 아니구나.”

    가까스로 뱉은 목소리는 제 것이라 믿기 어려울 정도로 가늘고 힘이 없었다.

    비로소 찾아온 안도감이 천천히 온몸으로 퍼져 나가는 것을 느끼며, 세이나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날 싫어한 게 아니었어…….”

    디온은 부드럽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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