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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마주한 얼굴은 이전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냉정하고 차가운 눈빛. 그러나 목소리는 묘하게 부드러워져 있었다.
“제가 아직 마법을 쓸 정도로 회복되진 않아서요.”
“……그럼?”
칼도 없고, 마법도 안 되면 어떤 방법으로 피를 내야 할까.
곰곰이 생각하던 세이나의 상념 속에 불쑥 어떤 마물이 끼어들었다.
“설마…….”
박쥐와 비슷한 모양의 그것은 날카로운 이빨로 사람의 피부를 뚫고 피를 흡수했다.
소설 속 흡혈귀와 같았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세이나는 무심코 제 목을 손으로 가렸다.
“기대에 어긋나서 미안하지만, 마족은 흡혈귀랑은 다릅니다.”
세이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디온을 빤히 보았다.
잠깐 웃었던 것 같은데. 착각인가.
“피부를 뚫을 정도로 치아가 날카롭지도 않고.”
손끝에서 쿵쿵, 맥박이 울리는 것이 느껴졌다. 세이나는 그를 응시하며 조심스레 물었다.
“……그럼?”
“그보다 더 위에 쉽게 상처를 낼 수 있는 곳이 있죠.”
그보다 더 위?
세이나는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요란하게 울리는 목을 넘어서 턱 끝을 넘자 부드러운 촉감이 닿았다.
입술.
“뭐?”
놀라서 바로 말부터 튀어나왔다.
그녀가 당황하여 빠르게 눈을 깜빡이는 동안에도 디온은 차분하기만 했다.
피로 물들어 붉어진 그의 입술을 보던 세이나는 민망함을 느끼며 급히 시선을 내렸다.
그러자 더 충격적인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녀가 옷을 벗겨 치료한 탓에, 디온은 상의를 입지 않은 상태였다.
그의 단단한 가슴을 보자마자 세이나는 제 얼굴을 감싸고 말았다.
‘맙소사.’
드디어 제 상황이 제대로 파악되었다.
낯선 동굴. 단둘뿐. 한쪽은 반 나신.
뺨이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기에, 세이나는 여전히 얼굴을 가린 채 조심스레 물었다.
“다, 다른 곳은 없어?”
“제안 주시면 고려해 볼게요.”
“어, 어, 내 생각엔……. 어…….”
하지만 입술보다 더 쉽게 상처를 낼 수 있는 곳이 떠오르지 않았다.
입술은 잠깐이면 해결되겠지만 다른 곳은 힘도 더 필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는 긁혀도 피가 잘 나지 않는 체질이다.
성녀란 참으로 튼튼한 존재였다.
“천천히 생각해 보세요. 강요할 생각은…… 윽!”
물러서던 갑자기 디온이 배를 움켜쥐었다. 세이나는 놀라 반사적으로 디온 쪽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많이 아파?”
“창피해서 말은 못 했는데…….”
“뭐, 뭘?”
“어쩌면 곧 죽을지도…….”
“뭐?!”
가까이서 본 디온의 안색은 정말 좋지 않았다. 원체 창백한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더 심각해 보였다.
빽빽한 속눈썹 아래 눈동자는 수심이 가득했다. 이렇게 약해진 디온은 처음이다.
의식을 놓고 쓰러진 후에도 바로 일어나 쌩쌩하게 다니던 그가 아니던가.
만약 정말 그가 죽어버리면…….
“좋아, 받아들일게.”
그러자 붙잡고 있던 디온의 어깨가 크게 움찔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세이나는 한 번 더 단호하게 말했다.
“해도 괜찮아.”
“정말요?”
디온의 손길이 세이나의 뺨에 닿았다. 얼음을 댄 듯 차가운 체온에 흠칫했으나, 세이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의 살짝 풀린 눈이 세이나의 얼굴을 구석구석 살피는 동안, 세이나도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신비로운 은색 머리칼. 긴 속눈썹, 그리고 오로지 자신에게만 보이는 따뜻한 눈길을 마주하다가.
“괜찮아.”
세이나는 스르륵 눈을 감았다.
다시 심장이 요동치는 것이 느껴졌다. 쿵. 쿵.
설렘보다는 슬픔과 불안함을 동반한 울림이었다. 디온이 미워서 울컥한 적도 많은 것도 사실. 그러나 그가 죽는 것 역시 원치 않았다.
그의 서늘한 손이 제 귓불을 만지작거릴 때조차 세이나는 울적함을 떨치지 못했다. 잠깐 상상한 것만으로도 가슴이 미어질 듯하다.
부디 내 피가 도움이 되어야 할 텐데. 걱정하고 염려하던 중, 문득.
“사실.”
곧이어 뜨거운 숨결이 귓가에 부딪혔다.
“농담이에요.”
세이나는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이마가 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서 그의 붉은 입매가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는 것이 보였다. 장난기가 가득한 미소였다.
“너……!”
“싫으면 밀어 내요.”
그리고 다음 순간, 입술에 부드러운 것이 닿았다.
밀어 내도 된다고 했으면서, 디온은 그럴 틈조차 주지 않을 생각인 듯했다. 당황한 세이나의 입술을 바로 집어삼키더니 이어서 강하게 깨물었다.
“아!”
세이나는 반사적으로 제 옷을 꽉 붙들었다. 날카로운 통증. 이내 비릿한 맛이 느껴졌다.
또 다른 부드러운 것이 입술에 난 상처를 쓸자, 세이나는 그대로 뻣뻣하게 굳어버리고 말았다. 그의 서늘한 손이 세이나의 머리카락 사이를 파고 든 것은 그때였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그리 거칠지도, 느리지도 않게 디온은 입맞춤을 이어 나갔다.
한 손으로는 빠져나가지 못하게 그녀의 목 뒤를 붙잡고, 혀를 부드럽게 굴려 그녀의 아랫입술을 핥았다. 그리고 입술이 서로 붙고, 잠시 떨어졌다가, 다시 붙고.
모든 것이 너무 지나치게 생생했다.
생각마저 툭, 끊기고 말았다. 온통 백지.
그래서일까.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떨어졌을 때는 시간이 쏜살같이 지난 기분이었다.
세이나는 숨을 헐떡이며 그를 마주 보았다. 자신만큼은 아니지만, 디온의 가슴도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 보였다.
푸른빛의 눈동자에는 어느새 온기가 돌아와 있었다. 그녀의 입가를 매만지며 디온이 천진하게 웃었다.
“생각보다 그렇게 역겹진 않죠?”
세이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 *
자신이 한 말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 끔찍해.
마족을 두고 스스럼없이 뱉었던 말들은, 세이나의 기억에도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 성녀의 피를 마신다고. 으으, 생각만 해도 소름 끼쳐.
- 혐오스럽지 않아요?
미안하긴 한데…….
‘내 옆에 마족이 있을 줄 몰랐지!’
‘조심했어야 했다.’라는 말조차 성립되기 애매했다.
세상에 어느 누가 ‘마족이 들을 수 있으니 조심해야지.’라고 생각하며 살겠는가. 마족은 전설 속의 존재. 게다가 세이나는 그들을 악당으로 여기고 있었다.
가장 가까이 있는 남자가 바로 그들 중 하나일 줄은.
‘상처받은 건…… 알겠지만! 입맞춤을 끝낸 뒤에 할 말이 그것밖에 없어?’
하지만 원망할 수만은 없었다.
디온은 정말 세이나가 이 입맞춤을 싫어할까 걱정하는 눈치였다. 살짝 내렸다가 다시금 세이나의 표정을 살피는 눈길이 무척이나 조심스러워 가엾기까지 했다.
그리고 대답조차 기다리지 않았다. 곧 디온은 자리에서 일어나 외투를 걸치며 말했다.
- 확실히 효과가 있는 것 같기도 하네요.
- 뭐?
- 주변을 둘러보고 올게요. 오래 걸리지 않을 거예요.
그는 아무렇지 않게 빗속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따라갈 엄두는 나지 않았다. 저 빗방울들은 디온의 입맞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따끔했으니.
멍하니 빗소리를 들으니 또 조금 전이 생각났다. 왜 바로 떠났을까?
어색해서? 부끄러워서 그랬을까?
‘아니면 별로였나…….’
그러나 입맞춤이 최선이었지 싶었다. 스스로 입술에 상처를 내서 손가락에 찍어 보내 줄 수도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세이나는 디온이 떠난 자리를 바라보며 무릎을 끌어안았다. 그러고 보니 마족에게 이 비는 괜찮은 걸까.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일어났어요?”
잠깐 잠들었던 것 같다.
세이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동굴 벽에 몸을 기대고 있었는데, 어느새 완전히 누워 자고 있었던 듯했다.
어깨에는 두꺼운 모포가 덮여 있었다. 졸린 눈을 비비며 시선을 돌리자 동굴 입구에 선 디온이 보였다.
그는 수건으로 머리를 닦고 있었다. 비를 가로질러 다녀왔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문제는 그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젖지 않은 구석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상체에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상태였다. 세이나는 그의 등 근육을 가로질러 내려오는 빗물을 보다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밖은…… 어때?”
“별거 없었어요.”
곧 그는 큰 수건을 외투처럼 어깨에 걸치고 세이나의 앞에 주저앉았다.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를 투명한 병이 그녀의 앞에 놓였다.
“근처 호수에서 물을 채워 왔습니다. 마기에 물들어 있긴 하지만, 세이나는 성녀라서 바로 정화될 거예요.”
“아, 고마워.”
디온은 당장 옷을 걸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세이나는 그를 올려다보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병을 가져왔다.
한 모금 마시자 디온이 물었다.
“배고프진 않죠?”
“오, 신기하게 그러네.”
“정령계는 특별한 장소니까요. 우리가 있던 세계보다 정령계의 시간이 느리게 흘러간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여기서의 일주일이 우리가 있던 세계에서는 몇 분이 될지도, 몇 시간이 될 수도 있죠.”
“그렇구나.”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응?”
“결혼식은 늦지 않게 치룰 수 있을 겁니다.”
뜬금없는 단어였다.
세이나는 고갤 갸웃거리다 깨달았다.
“결혼식? ……아!”
라샤드와 그런 약속을 하긴 했었다. 황제에게 보고한 이상, 정말 결혼식을 진행해야 한다고 듣긴 했지만…….
세이나에게 그것은 사면을 위한 방책일 뿐. 구체적인 결혼식 날을 잡은 기억도 없었다.
실제로 라샤드도 신전으로 간 후에 딱히 그에 대해 의논하지도 않았고.
“마음 편하게 있어도 됩니다. 몸을 회복하는 대로 바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잠깐! 잠깐만!”
짧게 생각하는 사이 디온이 일어났다. 세이나는 급히 그를 붙잡았다.
“그건…… 그럴 수밖에 없었어.”
디온은 가만히 그녀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그의 푸른 눈을 응시하며 세이나는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감옥에서 나가야 하는데. 방법이 그것밖에 없었어. 나는 진짜 놀라서 당시에 머리도 제대로 안 돌아갔고, 왜냐하면…….”
당신이 나를 배신했으니까.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졌다.
느닷없이 찾아온 슬픔은 순식간에 세이나를 점령했다.
디온에게 남겼던 모든 말을 아직 잊지 않았듯이, 그가 돌아섰을 때의 감정 역시 아직 그녀에게 남아 있었다.
점점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몇 번이나 침을 삼키자 겨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왜 그랬어?”
벌써 수없이 참아온 감정이 눈물이 되어 흘러나오기 직전이었다. 그 당사자의 앞이어서 더욱더 그러했다.
“내가 그렇게 미웠어?”
디온은 불시의 공격을 당한 듯 멍한 눈이었다.
세이나가 꾹 입술을 깨문 그때, 디온이 무릎을 접어 그녀에게 다가왔다.
“한 번도.”
그의 손길이 세이나의 뺨에 닿았다. 그가 잠시 끊었다가 말을 이었다.
“단 한 번도 미워한 적 없습니다.”
“그럼 왜……?”
“……다 설명하려고 했어요.”
디온이 괴로운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세이나가 성녀일 줄은 몰랐어요. 의심조차…… 아니, 오히려 그럴 가능성마저 부정하고 있었죠.”
그러고 한숨을 내쉬었다. 오랜 고민을 회상하는 푸른색 눈동자는 깊고 어두웠다.
“세이나도 알다시피, 후작은 계속 성녀를 찾고 있었습니다. 저는 후작에게 거짓 정보를 줄 계획이었습니다. 수도를 떠나게 할 생각이었죠.”
“…….”
“거짓 정보를 만들고 있는 사이…… 스키아가 깨어났습니다. 뒤늦게 가보니 벌써 당신이 그녀를 만났더군요.”
“그럼 그때 그 얼음은…….”
“제 마법입니다.”
엘렌 안의 마족이 깨어난 날. 세이나가 검을 내찌르기 직전, 돌연 얼음이 올라와 마족의 다리를 구속했다.
우연이라기엔 지나치게 정확한 타이밍이었다.
왜 그 순간을 잊었던 걸까.
“당신은 엘렌을 죽이지 못했죠. 그래서 제가 그 일을 맡아야겠다고 결심한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