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 여주의 옆집에 살고 있습니다-160화 (160/179)
  • @160

    디온은 그제야 제 상태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의 몸을 가리고 있는 것은 옷이 아닌 붕대였다. 옷은 그의 발치에 놓여 있었다.

    상체를 일으키자 두꺼운 모포가 스르륵 흘러 그의 무릎 위로 떨어졌다.

    “……당신 친구가 날 여기로 데려왔어.”

    세이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레티가?’

    “여기가 어딘지 알겠어?”

    전혀. 완전 처음 보는 동굴이었다.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짐작조차 안 갈 정도로 아주 크고 넓었고, 안쪽에서 언제든 커다란 곰이 기어 나올 것 같은 음산한 분위기다.

    하지만 의아하게도 그곳을 채우고 있는 것은 사람이 쓰는 물건들이었다. 옷과 붕대, 약병, 그리고 마정석들도 쌓여 있다. 디온은 이곳이 어딘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레티가 가져온 주머니의 정체로군.’

    몇 년 전, 그가 짐이 너무 많아서 사람을 불러야겠다고 했을 때 뜬금없이 주머니 하나가 튀어나왔었다.

    넣고 싶은 것 아무거나 넣어도 된다고 해서 마정석을 쏟아부으니 끝없이 들어갔던 기억이 난다.

    레티는 이 주머니와 다른 공간을 연결했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은 언제든 거기에 가서 꺼내 올 수 있다고.

    그녀가 마음 편히 다닐 곳은 하나밖에 없다.

    “정령계입니다.”

    디온은 그러고 동굴 입구로 시선을 던졌다.

    거센 기세로 쏟아지는 빗줄기가 요란한 소음을 자아내고 있다. 그 뿌연 장막 너머에는 울창한 밀림이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나무를 응시하며 디온이 인상을 찌푸렸다.

    “마기에 완전히 잠식되었다고 들었는데…… 생각보다 멀쩡하네요.”

    그러고 세이나를 살폈다.

    싸움의 여파로 옷은 엉망진창이었지만, 세이나에게서 지치거나 힘든 기색은 찾아 볼 수 없었다.

    ‘마기도 통하지 않는 건가.’

    보통 사람이라면 숨조차 쉬기 힘들 텐데.

    ‘나도 버거운데 말이지.’

    정령계의 마기는 지나칠 정도로 짙어서 현기증이 일 지경이었다. 향수로 가득 채운 통에 처박힌 기분.

    긴장이 완화됨과 동시에 거북함도 밀려왔다. 세이나를 유심히 살피던 디온은 다시 통증에 미간을 구겼다.

    “괜찮아?”

    그리고 몸이 앞으로 쓰러지기 직전, 세이나의 손이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세이나는 바로 흠칫 놀라며 떨어졌다. 습관적으로 손을 뻗은 곳은 천 한 장 덧대어지지 않은 살갗이었다.

    거기다 그와는 이제 친근하다고 하기는 어려운 사이.

    그녀의 속내를 충분히 짐작하면서도, 디온은 바로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자연스럽게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잘게요.”

    뜻밖에도 등을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졌다.

    어린아이를 달래는 것처럼 조심스러운, 그리고 따뜻한 손길이었다.

    복부의 통증은 생생하기만 한데, 계속 현실감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세이나가 나를 밀어 내지 않는다니.

    ‘꿈인가.’

    그럼 이대로 깨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디온은 의식의 끈을 놓았다.

    * * *

    세이나는 사실 할 말이 무척 많았다.

    ‘진짜 바로 자네?’

    소녀의 설명으로 디온이 자신을 도와줄 의도였음은 파악했으나,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들이 많았다.

    하지만 어색해서 입을 떼기가 어려웠다. 당장 몇 시간 전, 디온은 답변을 거부하고 등을 돌리지 않았던가.

    ‘모르겠어…….’

    세이나는 조심스럽게 디온을 저에게서 떨어트려 바닥에 눕도록 만들었다.

    그는 벌써 정신을 잃은 듯했다. 긴 속눈썹을 내리깔고 곤히 자는 모습이 어렸던 그를 연상케 했다.

    ‘……얼굴은 참 순진해 보이는데 말이지.’

    누가 이 남자를 보고 거짓말쟁이라고 생각할까.

    곤히 잠든 그는 정말 온순해 보였다. 그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세상사에 때 묻지 않고 시골에서 책만 보고 사는 순수한 청년이라고 해도 믿지 않을까.

    세이나는 디온을 내려다보며 그의 이마의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디온은 미동도 없었다.

    ‘괜찮은…… 거겠지?’

    그를 발견했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갑자기 눈앞이 어두워지더니 정신을 차리자 낯선 곳에 떨어져 있었다. 황망하게 주변을 둘러보는데, 돌연 피에 젖은 그가 나타났다.

    놀란 와중에도 빨리 치료해야겠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주변에 치료에 필요한 물건들이 완벽히 갖춰져 있어서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허둥지둥 피가 묻어 나오는 옷을 벗기자 검에 꿰뚫린 깊은 상처가 나왔다. 동굴 밖에서 검은 기운이 흘러들어 온 것은 그때였다.

    ‘마족은 마기를 부른다.’

    검은 기운은 천천히 디온의 몸으로 스며들어 갔다.

    헌터들의 가장 기본적인 지식을 되새기며, 세이나는 급히 손을 움직였다. 붕대를 감는 작업이 모두 끝나자 마기의 흐름이 잦아들었다.

    ‘아직 다 낫진 않은 것 같지?’

    붕대는 피에 흠뻑 젖어 있었다. 마기를 채운 후에도 회복되지 않는다니, 꽤 깊은 상처인 모양이다.

    덕분에 깨울 엄두도 나지 않았다. 세이나는 무릎을 끌어안으며 그 위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래도 다행이다.’

    당장 대화할 때는 침착한 척했지만, 세이나는 아직 놀란 심장을 가라앉히지 못한 상태였다.

    그가 쓰러질 때 닿았던 온기가 아직 목에 남은 것 같다. 짙은 피 냄새도 아직 코끝에 머물러 있었다.

    “하…….”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다.

    다름 아닌 자신부터가. 머릿속이 복잡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내가 좀 더 똑똑했다면 이런 결과에 이르지 않았을 텐데.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그를 두고 공원을 떠나는 것이 아니었는데. 엘렌의 일에 관여하지 말았어야 했나.

    모든 것이 자신의 탓인 것만 같았다.

    신전을 나오고 나서부터 계속 그랬다. 오웬과 라샤드의 도움이 없었다면 내내 멍한 채로 수도 어딘가에 숨어 있었을 것이다.

    ‘오웬과 공작님은 어떻게 됐을까.’

    갑자기 사라져 버려서 많이 놀랐을 텐데. 내가 여기에 혼자 도망쳐 와도 괜찮은 걸까.

    ……어쩐지 울고 싶은 기분이 되기도 했지만.

    ‘할 일을 찾아야겠어.’

    세이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동굴 입구로 향했다.

    빗줄기는 좀처럼 잠잠해질 기미가 없었다. 맹렬하다고 해도 좋을 그 기세를 유심히 지켜보며, 세이나는 빗속으로 손을 뻗었다.

    “윽!”

    그러나 1초도 되지 못하고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급히 뒤로 물러나 손바닥을 살펴보니 붉은 자국이 남아 있다. 화상이라도 입은 듯 따끔거렸다.

    ‘그냥 비가 아닌가?’

    유황이 섞인 비를 맞으면 이런 느낌일 것이다. 차마 저 안으로 뛰어 들어갈 수는 없었다.

    ‘내가 여기서 할 수 있는 일…….’

    그렇게 되뇌며 시선을 돌리자 다시 디온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성녀는 치유 능력도 있다고 했는데.’

    하이든 대신관은 그녀에게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았기에 방법은 몰랐다.

    세이나의 시선이 다시 제 손바닥으로 향했다. 그 아래 푸른 혈관이 오늘따라 유독 도드라져 보였다.

    ‘성녀의 피는 봉인을 풀 수 있으니까, 아마 피에 힘이 응축된 걸지도?’

    어쩌면 소녀가 디온과 자신을 이곳에 남긴 이유 역시 치료를 위해서일지도 모르겠다.

    세이나는 제 옷 이곳저곳을 살폈다. 그러나 여행을 준비하며 단단히 붙여 둔 단검과 비수들은 모조리 사라져있었다.

    ‘이것도 그 애가 한 건가.’

    디온을 해칠까 봐 그랬을까. 세이나는 다시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그 소녀는 자신을 싫어하는 것이 틀림없다.

    반면, 디온은 소중하게 생각한다. 그 둘을 붙여 놓는 건 그녀로서는 떨떠름한 일일 것이다. 아마 ‘어쩔 수 없이’라는 부연 설명이 붙지 않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치료가 목적이 맞는 것 같다.

    세이나는 손을 강하게 말아 쥐었다. 몇 달 전, 손톱에 찍혀 손바닥에서 피가 새어 나왔던 것이 떠올랐다.

    그러나.

    “윽!”

    깊은 자국을 내는 것까지가 그녀의 한계였다.

    ‘그땐 무의식이라 가능했나.’

    세이나는 다시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날카로운 돌을 발견했다.

    ‘오, 이걸로 되겠다. 피를 내는 건 어디로 할까?’

    원시인들이 사용한 돌칼 같은 모양새였다. 오른손으로 돌을 들고, 세이나는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역시 팔이 무난하겠지. 긁다 보면 피가 나오려나?’

    차가운 것이 피부에 닿자 바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썩 날카롭다고 생각했는데, 칼에 미치지는 못했다. 손에 힘을 세게 쥐고 홱 그어야 피가 나올 것 같다. 그렇게 망설이다가.

    “음…….”

    돌연 제 모습이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온갖 미친 짓은 다 해 봤다고 생각했지만, 스스로 팔뚝을 긋는 지경까지는 이른 적은 없었다.

    세이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하지? 고민하며 팔에서 돌을 떨어트리던 그때.

    “어?”

    덥썩, 손목이 붙잡혔다.

    “지금…….”

    “디온?”

    “지금 뭐 하는 겁니까?”

    디온은 세이나의 손목을 꽉 붙잡은 채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 화가 난 얼굴에, 세이나는 일순 당황하여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차갑다고만 생각했던 푸른빛 눈동자 너머로 열기가 넘실거리는 것이 보였다.

    화를 억누른 목소리는 어쩐지 울먹이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나랑 있는 게…… 그렇게 싫어요?”

    세이나는 급히 외쳤다.

    “무슨 그게…… 아니야!”

    “아니면?”

    “성녀는 치유력이 있다고 들었어! 내 피로 당신을 치료해 줄 수 있잖아?”

    하지만 디온은 좀처럼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세이나는 더 당혹스러웠다.

    ‘정말 내가 같이 있기 싫어서 자해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진심으로 그리 여기는 표정이었다. 내팽개쳐진 담요의 모양으로 보아 정신을 차리고 놀라 바로 달려온 듯했다.

    ‘아무리 싫다고 해도 그렇지, 왜…….’

    “마족이 싫어도 어쩔 수 없습니다. 지금으로선 이곳이 가장 안전합니다.”

    ……이제 이유를 알 것 같다.

    ‘역시 기억하고 있구나.’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디온은 마족. 자신에 대한 험담을 그리 많이 하는데, 어찌 바로 잊을까.

    지은 죄가 있었기에 세이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디온이 그녀의 손목을 놓고, 등을 돌릴 때까지.

    무거운 침묵을 깬 쪽은 디온이었다.

    “힘을 회복하면 보내 주겠습니다.”

    디온은 이미 제자리로 돌아가 있었다. 담요를 주워드는 그를 보고 세이나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얼마나 걸려?”

    “……모르겠는데요.”

    디온은 힐긋 그녀를 보더니 바로 홱 돌아누웠다. 더는 대화하고 싶지 않다는 듯 모포를 어깨까지 끌어 올리는 게…….

    ‘삐쳤나?’

    세이나의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마치 예전, 자신의 집에서 평화롭게 지내던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언젠데? 응?”

    “말했지만, 이곳이 가장 안전합니다.”

    “나는…… 나는 안전할지 몰라도 다른 사람은 아니야. 걱정돼서 그래.”

    “다른 사람?”

    “오웬과 공작님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을지 모르잖아.”

    세이나는 잠시 쉬었다가 말을 이었다.

    “나만 없어져서 걱정하고 있을 거야. 마물들도 아직 남아 있었고. 날 찾으러 돌아왔다가 마물들에게 공격당했을 지도 몰라. 빨리 돌아가야 해.”

    “…….”

    “확실히 말해 줘. 내 피로 회복할 수 있어?”

    “네.”

    “그럼 좋아.”

    세이나는 조심스레 고개를 그를 향해 기울였다.

    “내 피를 마셔.”

    그리 말한 직후부터 긴장감이 밀려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디온을 믿어서는 안 되었다고 수없이 후회했지만.

    지금으로써는 이것이 최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빨리 나았으면 했다. 세이나는 진심으로 디온이 더는 아픈 것 역시 원치 않았다.

    “당신 마법으로 상처를 내든, 뭘 하든 상관없어.”

    그러자 곧.

    나지막한 물음이 들려왔다.

    “……정말, 뭘 해도 괜찮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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