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
세이나 로힐은 디온이 내미는 모든 제안을 거절했다.
“싫은데?”
“마음에 안 들어.”
“수상하잖아.”
“내가 요즘 안 좋은 일이 너무 많아서, 의심부터 드네.”
너무 황당해서 어질어질할 지경이었다. 세이나는 철벽 그 자체였다. 점점 웃음이 나왔고, 나중에는 오기까지 들었다. 받아 줄 때까지 들이대 보자.
디온은 기어코 부하의 어머니까지 이용하여 그녀에게 접근시켰다. 동정심을 자극해서 도움을 받고, “도와줘서 고마우이, 젊은이. 이건 내 감사의 표시일세.” 하는 전략이었다.
그러나.
“괜찮아요! 손자분들께 선물해 주세요!”
“나, 나는 혼자 살아서…….”
“이웃분들이라도요! 전 진짜 괜찮아요!”
“그래도 작은 성의 표현으로…….”
“그럼 이만!”
세이나는 과할 정도로 씩씩한 사람이었다. 보고를 받은 디온은 어이가 없어서 계속 웃었다.
“하하.”
웃음 밖에 안 나왔다.
“하……. 진짜 어이가 없어서…….”
“이제 접근할 방법도 떨어졌습니다. 더 의심받을 거예요.”
부하들은 울상이 돼서 그의 눈치만 봤다. 미친 사람처럼 보이겠지. 디온은 제 모습을 알면서도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어, 어떻게 할까요?”
“됐어.”
차갑게 뱉고도, 또 웃음이 나왔다. 디온은 소파에 기대어 담배를 입에 물었다.
‘나도 할 만큼 했어.’
도움을 거절한 건 그 여자였다.
이제 굶어 죽든 말든 알 바 아니다, 중얼거리며 디온은 그녀를 머릿속에서 지워 버리려 했다. 마물들에게 둘러싸이고도 살아남아 온 사람이다. 걱정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시간이 갈수록 그녀에 대한 생각은 더 깊어지기만 했다.
그때쯤에는 잠도 잘 못 잤다. 그녀의 근황이 궁금하면서도, 알고 싶지 않았다. 묻기도 어려웠다.
부하들은 그가 아버지와 관련된 일이라서 신경 쓰는 거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돕고 싶어 하면 다른 사연이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가.
여자에 목매달고 있는 보스는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너무 멋이 없었다. 어제는 부하가 일부러 떠보듯 물어보기도 했다.
혹시, 세이나 로힐에게 관심이 있냐고.
‘절대 아니야.’
그것도 여러 번.
‘아니라고.’
그것도 여러 명이 함께.
‘난 마족이란 말이다. 젠장.’
디온은 그녀를 완전히 떨쳐 내기 위해서 수도를 떠났다. 성녀를 찾기 위해 대륙 곳곳의 정보를 살피면서도, 엘렌의 일도 주의를 기울였다.
그로부터 몇 개월 후, 레티가 엘렌이 신전을 떠나 수도로 가고 싶어 한다고 보고했다. 수도의 결계가 그녀의 마력을 억제해 주리라는 늙은 신관의 말은 꽤 설득력이 있었다.
디온은 레티의 부탁대로 엘렌이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다만 도움은 주었다. 그녀가 도운 헌터들을 통해 돈을 보낸 것이다.
그리 많은 돈은 아니었다.
의심받고 싶지 않으니까.
세이나 로힐이 준 뼈 깊은 조언이었다.
“가게를 차린다고 했어. 잘 어울리지? 너무 대견해.”
레티는 엘렌이 어른이 되어 가고 있다면서 기뻐했다.
그 미래를 위해서, 디온은 영지로 돌아가서 후작을 살살 달래었다. 곧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 나에게 맡기고 너는 다른 일에 집중해라.
그렇게 정신없이 보내고 수도로 돌아오자.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엘렌의 새집이 그 여자의 옆집이라고?”
“보자마자 그 집이 마음에 무척 마음에 든다고 그 자리에서 덜컥 계약해 버렸어. 다, 다른 곳으로 유인해 보려고 하긴 했는데…….”
레티는 걱정 가득한 눈으로 디온을 올려다보았다.
“괜찮겠지?”
디온은 전혀 그녀를 보고 있지 않았다. 멍한 눈. 새하얀 머릿속 위에 잠시 잊었던 그녀가 떠올랐다. 세이나 로힐은 매우 예민했다.
만약 내가 엘렌을 감시하러 그 집에 갔다가 마주치면…….
‘만나면 어떡하지?’
레티와는 전혀 다른 방향의 걱정이었다.
*
디온은 그동안 그녀와 만나리라고 상상한 적 없었다.
만나선 안 된다. 만나고 싶지 않다. 이런 식이 아니라, 그냥 생각지도 못했다.
이상했다. 왜 한 번도 마주치려고 하지 않았을까. 처음부터 멀리서 지켜봐서 그런가.
‘만나면 어떡하지?’
한번 시작한 생각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 그의 머릿속을 빠르게 점령했다.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수준이었다.
‘뭐라고 인사하지?’
‘소개를…… 하긴 해야 하지 않을까?’
‘너무 다짜고짜 아닌가.’
‘표정은 어떻게?’
‘옷은 뭘 입지?’
‘언제 보는 게 좋을까?’
매일을 조마조마하게 보냈다. 좀처럼 진정이 되지 않았다.
돌이켜 보면 우스운 일이었다. 의뢰도 직접 준 적이 없으면서. 계속 그녀를 만날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 겨우 결심이 섰다.
계획은 완성되었다. 친절하고 부드럽게. 하지만 의심을 사면 안 되니 너무 다가가진 말고.
하지만 그가 그녀의 집 앞을 지났을 때, 인기척은 조금도 없었다.
엘렌의 꽃집에서 나온 이후도 마찬가지였다. 디온은 몇 분을 그 주변에서 얼쩡거리다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왔다. 바쁜가 보다.
‘내일은 나오겠지.’
그러나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그녀의 집은 조용했다. 후에 알아보니 세이나는 그때 자고 있었다. 아침은 그녀의 활동 시간이 아니었다.
시간대를 바꿔 방문했으면 마주쳤을지도 모르는데, 우습게도 당시에는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주변에 의논하기엔 괜히 자존심이 상했다.
그저 주변을 초조하게 오갔다. 거의 1시간을 서성일 때도 있었다.
‘외출했나?’
‘환기를 잘 안 하는 편인가?’
‘자고 있진…… 않겠지. 벌써 10시인데.’
하지만 보름이 넘도록 그러고 있으니 그에게도 마침내 한계가 찾아왔다. 참다못해 부하에게 물어보자 바로 답변이 돌아왔다.
“임무 중에 다쳐서 병원에 있답니다.”
“병원?”
“예.”
“……상태는?”
“바로 일어났는데, 무슨 영문인지 퇴원까지 좀 걸리는 것 같습니다.”
부하는 눈치를 보다 넌지시 말했다.
“가보실래요?”
“내가 왜.”
디온은 바로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왜 그 여자를 신경 써.”
하지만 말과 달리, 다음 날도 디온은 그녀의 집 근처를 기웃거렸다. 몇 분쯤 그러다 보니 돌연 허탈해서 웃음이 나왔다.
‘젠장, 내일은 절대 안 온다.’
그제야 자신이 실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달 동안 매일 꽃을 사러 오는 미친놈이 어디 있겠는가.
가장 우스운 것은 한 달 동안 매일 오면서도, 엘렌을 살피지를 못했다는 사실이다.
돌아가야겠다고 다짐하고 발걸음을 돌린 순간, 엘렌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금색 머리칼. 하늘빛 눈동자. 화사한 미소를 지켜보고 있자니.
문득, 의문이 들었다.
‘진짜 엘렌일까?’
그를 보고 깜빡이는 눈동자는 깨끗하기만 했다. 늘 수심에 잠겨 있던 과거와는 너무 달랐다. 기억을 지우는 것만으로도 저렇게 사람이 달라질 수 있나.
‘확인해 봐야겠지.’
그래서 망설임 없이 내뱉었다.
“좋아합니다, 엘렌.”
대답은 거절이었다.
엘렌이 떠나는 뒷모습을 보며 디온은 미간을 찌푸렸다. 담담한 속내와 달리 눈시울이 따끔거리기 시작했다.
‘맞았군.’
세뇌가 실패해서 나오는 눈물은 스승이 말해 준 것보다 훨씬 아팠다. 어디 그뿐일까. 몸도 제대로 가누기 힘들었다. 두통 때문에 눈앞도 흐려졌다.
습관적으로 발을 내딛자 곧 앉을 자리가 나타났다. 주저앉은 디온은 본격적으로 눈가를 꾹 눌렀다.
한번 터진 눈물은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빌어먹을, 괜히 했어.’
통증과 함께 진한 후회가 밀려왔다.
왜 굳이 그런 짓을 해서는. 요즘 자신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편하게 잠을 잔 게 언제인지 아득했다.
이유는 당연히 한 사람.
‘다신 안 찾아올 거야. 다시는.’
수십 번 다짐하고 또 다짐하느라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어찌나 몰입했던지, 덕분에 디온은 누가 제 앞까지 다가오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돌연 요란한 외침이 들렸다. 짜증이 나서 고개를 들자…….
세이나 로힐이 거기에 있었다.
“설마, 디온 프라벨?”
심장이 쿵,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 * *
‘주마등은 죽을 때나 보인다더니.’
씁쓸하게 웃으면서 디온은 깊게 숨을 내쉬었다.
시야는 캄캄하기만 했다. 깜빡이는 감각은 있지만, 어둠 외에 보이는 것은 없었다. 죽어 가고 있기 때문이겠지.
통증도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곧 간신히 이어지는 이 의식도 끊겨 버리리라.
회상을 마무리하며 디온은 다시 숨을 내쉬었다.
‘마족은 마족만이 죽일 수 있다더니. 망할 노친네.’
스승을 생각하자 또 픽 웃음이 나왔다. 분명 자신을 비웃고 있겠지. 아무도 믿어선 안 된다고 그렇게 귀 아프게 말했는데.
‘익숙해져서 그랬어, 미안.’
지난 몇 달은 의심과는 거리가 너무 먼 생활이었다. 오랫동안 가다듬은 긴장감은 세월에 무색하게도 흐트러져 버렸다. 마음을 놓고, 편안하게 지냈다.
그리고 즐거웠다.
라샤드는 반응이 너무 재미있어서 미처 세뇌를 걸지 못했다. 내쫓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는데, 툴툴대면서 져 주는 것이 못내 우스웠다.
오웬도 웃기긴 마찬가지였다. 의자에 묶여 있는 그를 괴물의 일기장 앞에 끌고 갔을 땐 정말 재미있었다.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도 궁금해서 결국 넘기는 꼴이란.
그리고 세이나는…….
꽤 긴 시간을 보냈는데도 결국 마지막까지 남은 것은 차가운 표정뿐이라니.
제 기억력이 이리도 엉망인가 한숨만 나왔다.
벌써 세 번째, 디온은 루카스를 데려다준 그 복도로 돌아가고 있었다.
세이나는 줄곧 매섭게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세뇌에 걸렸다면, 절대로 보이지 않을 눈빛.
진심.
- 마족은 가장 잔혹하고 무서운 마물이라고 봐야 해요.
- 성녀의 피를 마신다고. 으으, 생각만 해도 소름 끼쳐.
- 혐오스럽지 않아요?
조금의 거짓도 없는 혐오.
- 끔찍해.
누구도 포기하지 않는 여자에게는 단 하나. 포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 있었다.
바로 마족.
자신은 세이나의 옆에 있을 자격조차 없었다.
“하…….”
다시 스승이 떠올랐다. 왜 그녀를 죽이지 못 했느냐고, 너 때문에 모든 것이 망했다고 엄한 목소리로 책망하는 것 같았다.
디온은 어떤 변명도 떠올리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무겁게 눈꺼풀을 열자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어둠이 찾아왔다.
그 안에 세이나가 있는 것은 신이 마지못해 내려 준 한 줌의 자비인 걸까.
어느 쪽이든 괜찮았다. 적어도, 지금 제 눈앞에 있는 세이나는 더는 슬퍼 보이지 않으니 말이다. 환각치곤 지나치게 선명한 것도 마음에 들었다.
디온은 천천히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하지 못했던 말을 하기 위해 입을 뗀 순간.
“깼어?”
갑자기 세이나가 말을 걸었다.
“……어?”
“상처는 지혈해 뒀어. 피는…… 더 나지 않는 것 같네.”
“……예?”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
“알긴…… 알겠는데…….”
디온은 당황하여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시야가 넓어지고, 주변이 제대로 보였다.
그는 생전 처음 보는 동굴 안에 있었다.
세이나가 말했다.
“우리, 여기에 갇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