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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 여주의 옆집에 살고 있습니다-157화 (157/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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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날은 처음으로 제 발로 새어머니를 찾아간 날이었다.

    “유클레스 후작가로 돌아갈게요.”

    쨍그랑! 바로 접시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새어머니와 그 형제들, 하인들까지 눈이 동그랗게 변하여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며칠 전에 직접 만나서 말씀드렸어요. 흔쾌히 받아 주시기로 하셨고요.”

    아버지는 없었다. 일부러 그가 협회로 간 시간을 골랐다. 디온은 다시는 아버지와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또 무슨 꿍꿍이야? 어머니, 쟤 아무래도 뭘 잘못 먹은…….”

    “잘 생각했다!”

    새어머니는 손뼉이라도 치고 싶다는 얼굴이었다. 포크와 나이프도 모두 내던져 버리고, 처음 보는 친절한 낯으로 다가와 무릎도 살짝 굽혀 디온과 시선을 맞춰 왔다.

    “언제 갈 거니? 응?”

    “최대한 빨리…….”

    “그럼 오늘 오후가 좋겠구나! 아버지께는 내가 말씀드리마!”

    어찌나 적극적인지, 제 발로 나가겠다고 한 것이 조금 후회되기도 했다. 새어머니는 그날을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행동했다.

    ‘더 버틸 걸 그랬나.’

    하지만 후작에게 생각할 틈을 주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의 묘사에 따르면 후작은 의심이 많은 성격이었다.

    자신의 말을 곰곰이 뜯어보기 전에, 계속 더 거짓말을 해서 혼란스럽게 하는 게 디온의 작전이었다.

    엘렌의 상태도 한시라도 빨리 봐야 했다.

    아직 완전히 마족에게 먹히지 않았다면 옆에서 실험에 훼방을 놓을 생각이었다. 그로써 실험이 완전히 망해 버리면 가장 좋고.

    ‘그렇게 되면 성녀를 찾아다니겠지.’

    같은 편이라는 신뢰를 주면 후작도 자신에게 정보를 제공해 줄 테다. 내가 성녀를 확보하겠다고 하고, 먼저 가서…….

    ‘내 손으로 죽여야지.’

    목표를 확실히 한 디온은 미련 없이 저택을 떠나 후작의 마차에 올라탔다. 마지막까지 아버지의 얼굴도 못 봤으나 아쉽지는 않았다. 오히려 후련하기까지 했다. 이상하게도.

    ‘정말 마족이 되어 버린 걸지도.’

    자신의 거짓말이 어쩌면 진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책에서 읽은 마족은 무자비하고 잔혹한 존재였다. 부모 자식 간의 정 따위, 없는 것이 당연했다.

    새어머니도 눈을 부라리며 “악마 같은 것!”이라고 외치지 않던가.

    마찬가지로 외숙부인 후작에게 기대도 없었다. 성녀보다 먼저, 그를 죽여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엘렌은…….

    엘렌은 항상 풀이 죽어 있었다.

    그 넓은 저택에서 엘렌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후작은 철저한 무시로 엘렌을 대했다. 후작 부인은 그녀에게 직접 해를 가하진 않았지만 조롱을 일삼았고, 아이들은 번갈아 가며 그녀를 괴롭혔다.

    공으로 머리 맞히는 것은 일상, 계단에서 구르게 하고, 걸어가면 위에서 쓰레기를 쏟았다.

    엘렌은 디온과 달리 맞서 싸우지 않았다.

    아이들이 음식을 엎지르면 직접 주방으로 가서 거의 구걸하듯 새 음식을 받아 왔고, 옷이 찢어지면 스스로 바늘을 들었다. 넘어지면 툭툭 털고 일어나, 걸어갔다.

    하지만 디온은 그녀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아직 후작의 경계심이 풀리지 않았을 텐데.’

    엘렌이 가는 길에는 늘 지켜보는 눈이 있었다. 도와주려다가도, 매서운 감시자들 때문에 디온은 터덜터덜 별관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잘 구슬려서 실험에 협조적으로 나오게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의문이 해결된 것은 후작의 영지에서 지내고 딱 일주일이 되는 날이었다.

    깊은 밤. 디온은 후작을 조사하기 위해 별관으로 향했다. 정문으로 당당히 갈 수는 없었다. 고민 끝에 고른 곳은 어머니와 함께 갔던 계단이었다.

    지하실에서 안쪽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디온은 작은 마정석을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뜻밖에도, 그곳에는 사람이 있었다.

    “디온?”

    금발의 여자가 살던 바로 그 방이었다. 낡은 문이 있던 자리에는 이제 단단한 철창이 박혀 있었다. 거친 쇳소리가 다시 그를 불렀다.

    “디온이로군! 디온 프라벨!”

    “……뭐야 당신?”

    “날 기억 못 하는 게냐?”

    그런 쭈글쭈글한 영감 따위 전혀 본 적 없다. 그의 외관은 저절로 뒤로 물러서게 할 정도로 흉했다. 창살을 붙잡은 손가락뼈가 이리저리 뒤틀려 마귀의 손 같았다.

    “벌써 이렇게 크다니! 그럼 몇 년이나 지난 거지? 2년? 3년? 여기에 혼자 들어온 걸 보니 레티샤는 그럼…… 자, 잠깐만! 가지 말아라! 제발 이리로 와, 제발!”

    “당신은 뭐야?”

    “뭐로 보이느냐?”

    “괴물?”

    “푸하하! 헤엑……! 그것도, 흐엑! 틀리진 않아!”

    폭발적인 웃음을 터트린 노인은 숨이 막히는지 한참을 헥헥댔다. 이후 나온 말은 디온의 발길을 붙잡기에 충분했다.

    “내가 그 괴물을 만들었으니 말이다.”

    “……당신이 엘렌의 아버지야?”

    “푸헥! 아버지! 푸…… 콜록! 콜록! 그, 그건 주워온 것이야. 꼬마야. 엘렌 이전에도 수많은 엘렌이 있었단다. 정말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지. 실패를 거듭하고 있는데, 갑자기 적합자가 나오다니!”

    “적합자?”

    “아아, 하지만 그 이후로도 아주 힘든 과정이었어. 아이의 혼이 원체 강해서 말이야. 쓰읍, 아니지. 그건…….”

    노인은 제 턱에 난 수염을 만지작거리더니 중얼거렸다.

    “어떤 ‘보호’가 있는 쪽에 더 가까웠지.”

    저만의 생각에 빠진 표정이었다.

    “다 끝났어? 그럼 간다.”

    “자, 잠깐만! 잠깐만! 내 부탁 좀 들어주련? 시원한 물 한 잔만 가져와 다오. 부탁이다.”

    “싫은데.”

    “푸헥! 건방진…… 콜록! 콜록! 꼬마로군! 하, 하지만…… 넌 내, 내가 필요할 게다. 너, 지금 상태로…… 콜록! 절대로…….”

    노인은 넝마 같은 소매로 제 입가를 닦더니 덧붙였다.

    “절대 후작을 막지 못해.”

    비밀을 들킨 디온의 눈이 동요로 흔들렸다. 노인은 씩 웃으면서 말했다.

    “아직 세뇌도 못 쓰고 있지 않느냐.”

    어둠 속에서 그의 눈동자가 파랗게 형형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디온과 똑같은 빛이었다.

    * * *

    노인은 정말 수다쟁이였다.

    “나는 스스로 엘렌의 피를 마셨다.”

    제대로 사람을 보는 것이 몇 달만이라고 했던가.

    물어보지 않아도 줄줄 정보를 읊었다. 처음엔 의심스러웠지만 듣다 보니 제법 흥미진진하여 디온도 묵묵히 들어 주게 되었다.

    “그 마력을 직접 느끼면 더 잘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 하지만 오산이었어. 다루기는커녕, 시시각각 잡아먹히고 있으니 말이다. 나는 이미 반은 마족이다. 그러니 후작도 날 못 죽이고 여기에 가뒀지.”

    “마족은 안 죽어?”

    “마족이 직접 죽이지 않는 한.”

    노인은 인상을 찌푸렸다.

    “후작도 다르지 않아. 다음으로 자기 몸에 피를 주입한 게 그 녀석이다. 놈의 힘이 나를 여기에 가뒀지.”

    “그럼 죽일 수 있겠네?”

    “지금으로선 무리야. 앞으로…… 콜록! 네 힘을 다룰 수 있도록 가르쳐 주마. 하…… 네게도 나쁜 제안이 아닐 게다.”

    디온은 그날 이후로 매일 밤 지하실을 드나들게 되었다. 날이 갈수록 의심이 사그라들고, 점점 그와 가까워졌다.

    “내 제자 놈은 아직도 후작을 따라다니고 있느냐?”

    “제자? 아, 못생긴 놈이 하나 졸졸 따라다니고 있긴 하던데.”

    “그럼 내 제자가 틀림없군! 그놈이 날 배신해서 여기에 처넣었지.”

    “왜?”

    “나는 실험을 중단…… 콜록! 중단하고 싶었거든. 그 힘은…… 인간이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족을 손에 넣어도, 켁! 세상에서 마물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어.”

    “당신과 다르다면, 후작은 뭘 꾸미고 있지?”

    “그건 말이지…….”

    “그건?”

    “……사실 나도 몰라! 푸헤헤헥!”

    사람 열 받게 하는 성격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지만.

    그는 마법에 능통했고, 마족에 대해서 잘 알았다. 어느 날은 그가 가르쳐 준 대로 했더니 정령까지 부를 수 있었다.

    “정령계는 마족이 완전히 잠식했지. 그러나 아르테이아는 남았다. 이 정령이 앞으로 너의 수족이 되어 줄 게다.”

    디온은 제 손바닥 안에서 파닥거리는 요정을 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노인은 그를 보며 씩 웃었다.

    “이름을 주거라.”

    디온은 곰곰이 생각하다 말했다.

    “레티.”

    “뭐냐? 그 거지한테나 붙일 법한 건.”

    “……우리 어머니 이름에서 따왔어.”

    “오, 정말 멋진 이름인걸?”

    마력의 영향을 받아 레티는 날이 갈수록 성장해 갔다.

    그 과정이 어찌나 즐겁던지, 디온은 경계심도 완전히 잊은 채 매일 노인에게 레티에 대해 떠들었다.

    노인은 디온을 기특해하며 많은 것을 가르쳤다.

    단 하나, 마물을 부르는 방법을 제외하고.

    “마력은 혼이 근원이지. 네 몸에 있는 마력은 그 혼에서 흘러나온 일부에 불과…… 헥, 불과하단다. 그러니 엘렌의, 콜록! 엘렌의 안에 있는 것에 비하면, 허억, 불완전하지.”

    “그래도 엘렌의 몸은 인간이잖아?”

    “2살 때부터, 허억, 그 혼을, 콜록! 콜록……! 그 혼을 몸에 넣었다. 이미 너와 비슷한 상태가 되었을 게야. 하지만, 하나 수가 있긴 하지.”

    “뭐?”

    “마력으로도 수명은 바꿀 수 없어. 그건 신의 소관이거든.”

    늙어 죽을 때까지 기다리라는 뜻이었다. 디온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그냥 내가 죽일 수 있게 힘을 키우는 게 좋겠어.”

    “오, 죽일 수는 있겠느냐?”

    “물론. 어렵지 않아.”

    다음 날, 디온은 그 말을 후회했다.

    노인이 자기를 죽여 달라 부탁했기 때문이다.

    “후작은 내 이성을 완전히 없애고 그를 위해 움직이는 괴물로 만들 생각이다. 그러기 전에, 콜록! 나, 나를 죽여 다오. 성녀님에게 부탁하면 더 확실하겠지만…… 콜록! 콜록! 내 사정이 이러해서.”

    노인이 철창을 움켜쥐었다. 디온은 완전히 얼어붙어 숨조차 내쉬지 못했다.

    “디온.”

    “아, 아직 배울 게 많잖아! 망할 영감, 가르치기 싫어서 게으름 피우는 거지?”

    노인은 가라앉은 눈으로 디온을 바라보다 웃었다.

    “그래, 들켰구나. 껄껄. 나도 더 가르칠 게 떠올랐단다.”

    “어떤 거?”

    “사람에게도 힘을 줄 수 있듯이 도구에도 힘을 심을 수 있단다. 내일은 단검을 많이 가져오거라.”

    힘을 부여하는 마법도 여느 때처럼 재미있었다. 노인은 그날도 창살 너머로 디온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잘했다.”라고 칭찬해 주었다.

    “내가 가르친 제자 중에서도 네가 가장 영특하구나.”

    “그걸 이제 알았어?”

    “더 빨리 만났으면 좋았을 텐데…….”

    그리고 다음 날.

    디온은 차갑게 식은 노인의 시신을 보고 다시금 온몸의 피가 굳을 수밖에 없었다. 창살 안, 그의 목에는 날카로운 단검이 박혀 있었다. 노인은 스스로 그것을 제 목에 쑤신 것이다.

    디온이 마력을 부여한, 바로 그 단검으로.

    기가 막혀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주저앉아서, 그가 했던 것처럼 거친 숨만 연거푸 내쉬었다. 이윽고 머리에 떠오른 것은 스승이 매일 했던 말.

    마족이 완전히 눈을 뜨거든.

    “성녀를 죽여라.”

    디온은 굳은 얼굴로 주먹을 꽉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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