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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이웃은 수도에 가는 내내 ‘협회장’이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지 떠들어 댔다.
물론 귀담아듣진 않았다.
‘개소리.’
진정으로 훌륭한 남자였다면 가족을 버리진 않았을 테다. 제 발로 찾아가고 있긴 하지만, 어린 디온은 그를 아버지라고 부를 마음 따위 없었다.
그러나 여행은 길었고, 사내는 수다쟁이인 편이었다. 그동안 디온은 아버지가 해낸 수많은 업적을 들으며 그를 상상해 보았다.
강하고, 인정이 많고, 동료들을 아끼며, 위험한 일에도 망설임 없이 나서는 용맹한 헌터.
어린 소년의 마음속에 작은 동경이 피어난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모험가 협회 건물은 당시 수도에서 가장 큰 건축물이었다. 이렇게 많은 이들이, 아버지를 존경하고 따르고 있구나. 우여곡절을 넘어 누군가의 안내로 그의 집무실에 이르렀다.
데일 프라벨.
매서운 눈매에 목을 꺾어서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큰 키. 어린 소년은 그의 위압적인 기세에 눌려 쉽게 입을 떼지도 못했다. 너무 충격적인 탓도 있었다.
그는 자신과 너무 달랐다.
머리칼, 눈동자, 심지어 피부색마저 달랐다.
그제야 왜, 입구에서부터 “네가 그분의 아들일 리가 없다.”라며 쫓아냈던 건지 이해할 수 있었다. 함께 온 이웃은 얼이 빠져 두 사람을 번갈아 보기만 했다.
살아온 환경이 달라서 오는 차이가 아니었다. 인종이 다른 느낌. 건물로 직접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면 동명이인이라고 단정 지었을 것이다.
하지만 데일은 그들을 내치지 않았다.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있는 디온 대신 이웃이 전달한 말을 들으며 비통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레티샤는…….”
아버지는 편지를 받지 못했다고 했다. 늦게라도 알려 줘서 고맙다며, 앞으로 디온은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전부 거짓말이다.
디온은 그리 생각했다.
얼결에 끌려온 저택에는 이미 안주인이 있었다. 그 아들의 갈색 머리칼을 본 순간, 디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참담한 심경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의혹이 확신이 되고, 불안은 울분이 되었다.
‘아버지는 우리를 버린 거였어.’
뒤이어 만난 아버지의 형제, 셀론은 기본적인 눈치도 없는 남자였다. 그는 디온을 본 첫눈에 이렇게 말했다.
“레티샤의 아들이 맞아? 하나도 안 닮았잖아.”
자신의 존재조차 의심받는 상황에서도, 디온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정체를 밝힌다면 성국에 바로 끌려가 봉인되고 말리라.
“아마 정신이 온전치 않은 상황에 상태로 다른 아이를 데려와서 제 자식처럼 키운 게 틀림없어. 참 안타깝네. 총명한 여자였는데 어쩌다 그렇게 됐는지.”
그리고 아버지는 자신을 절대 지켜 주지 않을 것이다.
첫 만남에서부터 디온을 직감할 수 있었다. 은빛 머리칼을 본 순간, 흔들리던 그의 눈빛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뭐, 어쨌든 데리고는 있어야겠네. 레티샤가 협회에 도움이 된 것도 적지 않으니까.”
셀론의 말을 들은 새어머니는 노골적으로 디온을 배척하기 시작했다. 하인들은 그를 보고 수군댔고, 손님들은 그를 없는 사람 취급했다.
유클레스 후작가에서도 겪지 못한 핍박이었다.
가장 짜증 나는 것은 자신을 피해 다니는 아버지의 태도였다.
언젠가 직접 찾아간 서재에서 아버지는 바쁘다는 핑계로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 문제는 그 자리에 새어머니와 다른 어른들도 많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 중 1명이 말했다.
“이쯤 되면 스스로 사라져 줘야 하는 게 아닌가요? 아무리 아이라지만 이리도 눈치가 없어서야.”
제대로 들으라는 듯, 크게 목소리를 높이며.
*
디온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왜 나가?’
이 저택, 재산, 그리고 협회에서 어머니의 지분도 절대로 적지 않았다. 그들이 잘난 듯 누리는 것들은 모두 자신에게로 와야 할 몫이었다.
그날부터, 디온은 저택을 떠나야겠다는 마음을 완전히 접었다.
보란 듯이 고개를 들고 다니면서 새어머니의 신경을 거슬렀다. 사람을 홀리는 마족의 매력이라는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처음엔 쉬쉬하던 사람들도 날이 갈수록 빛나는 디온을 열을 올리며 칭찬했다.
“큰 도련님은 장차 대단한 미인이 되시겠지. 그에 반해서 작은 도련님은……. 사실 그쪽도 그리 회장을 닮진 않았어, 그렇지?”
자세히 뜯어 보니 형제라는 놈도 아버지와 머리칼 빼고 전혀 달랐다.
궁금해서 물어보자, 셀론 프라벨은 새어머니에게 그랬듯 가감 없이 디온에게 말했다.
“그건 거래였어. 우리는 협회를 보증해 줄 귀족의 이름이 필요했고, 그 귀족은 밖에서 아이를 배고 온 외동딸이 있었지. 아버지가 누군지 모르는 사생아보단 협회장의 아들이 더 낫잖아?”
아버지를 수식하는 단어 중 ‘도망자’ 다음이 생겼다.
현실적인 인간. 큰 호감이 담긴 칭찬은 아니었다.
‘그건 좀 나랑 비슷하긴 하네.’
현실적으로, 그는 이 집에 붙어 있어야 했다.
아무리 잘났다고 하나 열댓 살 먹은 소년이 어디 가서 뭘 할 수 있겠는가.
차라리 새어머니를 쫓아내고 자신이 이 집에 들어앉는 쪽이 미래를 위해서도 좋았다. 통쾌하기도 할 테고. 면전에 욕을 해도 뭐, 개가 짖나 보다.
‘다 내가 잘났기 때문이지.’
‘시끄럽게 징징대기는. 어쩌라고.’
‘부러우면 너도 마족 되든가.’
셀론이 새어머니에게 동조하지 않는 것도 나름의 위안이었다.
“디온, 넌 말이지. 형님의 친자식이 아니잖아? 그러니 좀 몸을 사릴 필요도 있어. 사람들이 계속 헐뜯잖아.”
“아, 하지만 그 여자가 뺨을 때리고 할 때 다리를 걷어찬 건 좋았어. 나 기립 박수 친 거 봤지?”
괴롭히는 건지, 잘 대해 주는 건진 아직 제대로 판단이 안 서지만.
‘미친놈아, 하나만 하라고.’
새어머니와의 싸움도 그럭저럭 적응되었다. 아버지는 여전히 자신을 피해 다니지만, 화를 내진 않았다. 쫓아내겠다고 한 적도 없었다.
그래서 디온은 이렇게 생각했다.
아버지는 내가 마족이라서 싫은 거지, 나를 부정하진 않았다. 나는 여전히 아버지의 아들이고, 이 가문의 정당한 후계자다. 나쁜 건 새어머니다.
신기하게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아버지를 따라다닐 용기도 생겼다. 지칠 때까지 얼굴을 들이밀면 언젠가는 봐주겠지. 어쨌든, 아들이지 않은가.
아버지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내버려 두었다. 그러다 따라간 트라본 후작 영애의 생일 파티에서.
디온은 마침내 아버지와 독대할 수 있었다.
우연한 기회였다. 아버지는 그날따라 유난히 술에 취했고 셀론도 친구들과 어울리느라 바빴으니까.
아버지를 걱정해서 찾아다니던 디온은 어떤 어두운 방 안 소파 위에서 자고 있던 그를 발견했다.
데일 프라벨은 헌터답게 디온이 그에게 다가가기도 전에 그의 기척을 알아차렸다.
“디온? 아니…….”
하지만 아직 정신은 온전치 않은 듯했다. 잔뜩 흐트러진 자세로 눈을 비비던 데일이 다시 디온을 돌아보았다.
가만히 지켜보다, 이내 허탈하게 웃었다.
“마족인가.”
*
디온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떠났다.
이상하게도 눈물은 나지 않았다.
가슴은 터질 것같이 갑갑한데, 눈시울이 뜨겁고 심장이 요란하게 뛰는데도. 누구든 붙잡고 소리치고 싶어서 미칠 것 같은데도.
숨 가쁘게 달려가다 보니 이른 곳이 테라스였다. 난간을 붙잡은 채 디온은 주저앉았다.
‘날 인정한 게 아니었어.’
아버지에게 자신은 그저 마족이었다.
그제야 깨달은 사실이 비수처럼 날카롭게 가슴을 파고들었다. 숨도 제대로 쉬기 어려워서 미친 사람처럼 헐떡였다.
아버지는 자신을 아들로 보지 않았다. 그럼 왜, 내치지 않는 걸까. 울분을 꾹꾹 누르면서도 침착하게 머리를 굴렸다. 현실적으로, 냉정하게.
곧이어 내린 결론은 어린 그가 받아들이기엔 너무 잔혹했다.
‘나를 또 버릴 거야.’
그는 마족을 혐오한다. 그런 마족을 곁에 두었다면 이유는 단 하나.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성국으로 가는 자신을 상상하며 디온은 이를 악물었다. 제 손으로 아들을 봉인하고도 남을 작자였다.
그는 현실적인 사람이니까.
하나 의문인 것은, 1년이 넘도록 왜 아직 성국에 데려가지 않는지였다.
방심할 순간을 기다리는 건가. 울분을 꾹 누르고 자리에서 일어나 숨을 고르던 순간.
“너도 혼자구나?”
그녀가 나타났다.
금빛 머리칼에 하늘빛 눈동자.
왜소한 소녀는 존재감이 너무 흐려서 곧 사라질 것만 같았다. 유령과 같은 자태에 디온은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과 비슷한 느낌이 들었던 먼 옛날의 기억이 떠오른 것은 그때였다.
“너. 이름이 뭐야?”
“에, 엘렌…….”
혹시나 싶었던 마음에 확신이 생긴 것은 유클레스 후작이 테라스에 나타난 직후였다.
작은 소녀는 오래전 그가 봤던 아이가 틀림없었다.
그와 어머니가 구하지 못하고 남긴, 그 아이.
벼락처럼 깨달음이 스쳤다.
그때 후작은 그 아이에게 ‘실험’을 행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아이가 살아 있다면, 실험은…….
‘후작은 아직 포기하지 않았어.’
자책감마저 느껴졌다. 왜 그동안 어머니의 부탁을 잊고 지냈던 것일까. 그렇게나 간절히 부탁했는데.
그날 밤, 디온은 바로 후작을 찾아갔다.
어둠이 자리한 복도에서 엘렌을 제 부하에게 떠넘기고 홀로 돌아오는 유클레스 후작을 향해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야, 후작.”
디온은 또래보다 체구가 작은 편이었다. 그래서 어려보이지 않으려고 반말부터 시작했다.
어색하진 않았다. 새어머니를 놀리며 몸에 익은 건방진 말투가 도움이 된 것이다.
“왜 당황한 척이야? 내가 누군지 알면서.”
“……디온.”
유클레스 후작은 적잖게 놀란 기색이었다. 하지만 곧 기억 속처럼 차가운 눈빛으로 디온을 쏘아보았다.
“왜 날 찾아왔지?”
디온은 피식 웃고 말했다.
“아직 실험을 이어 가는 것 같던데.”
“……그래서?”
“돕고 싶어서.”
“왜?”
“나는 마족이니.”
그리 말하고 나니 오히려 후련하기까지 했다. 왜 그 사실을 지금껏 외면하고 있었던 걸까.
자신을 향한 조소를 띠며 디온은 매끄럽게 말을 이어갔다.
“이 몸의 주인은 벌써 몇 년 전에 사라졌다. 애송이가 감당하기엔 어머니의 죽음이 너무 큰 충격이었던 모양이야.”
“날 돕겠다고?”
역시 새어머니를 골탕 먹이기 위해 했던 짓들이 도움이 되었다. 아름다운 얼굴을 한 소년은 거리낌 없이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너는 ‘루드리에스’가 아닌가, 그런데 왜?”
“후회하고 있으니까.”
거짓.
“동족들이 모두 봉인되고 난 후에 깨달았다. 나는 결코 하면 안 될 짓을 했어. 이렇듯 혼자 살아 숨 쉬는 것이 괴로울 만큼이나.”
거짓.
“나는 동족들을 모두 깨울 생각이다.”
거짓.
“그것이 내가 배신한 동족들에게 속죄할 유일할 길.”
거짓.
“그리고 무엇보다…….”
그러나 마지막에 튀어나온 것은.
“더는 혼자가 되고 싶지 않아.”
부정하기 어려운, 진심이었다.